‘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을 가진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여 열두 사도에 합류하게 됩니다(사도 1, 20). 사실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사도행전의 몇 구절(1, 15~26) 이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았으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까지 모든 과정을 목격한 사람으로 72명의 예수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베드로는 120명 정도의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편의 예고(109편)를 들며 유다의 직책을 넘겨받을 한 사람이 필요함을 역설하게 되고,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바르사빠’라는 별명을 가진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놓고 제비뽑기를 하게 되는데(사도 1, 23), 그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 24-25). 라고 기도를 드린 후 제비뽑기를 하여 마침내 마티아가 뽑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도 1, 26)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전승마다 다르긴 하지만 그는 사도가 된 후 오랫동안 유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인 지역으로 갔는데, 남쪽으로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내륙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고도 하고, 다른 전승은 북쪽으로 흑해 연안의 콜키스(오늘날 흑해 연안의 조지아 일대)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했다고도 합니다. 참고로, 소실된 위경인 ‘복음성서’를 그가 집필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며, 독일의 성서학자인 티쉔돌프는 1846년에 “식인종 도시에서의 안드레아와 마티아의 사적”이라는 책에서 마티아가 식인종 지역에서 전교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갇혔으나 안드레아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얘기를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관하여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은 남아있지 않은데, 언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는 사도직에 충실했으며 순교로써 그의 덕과 정열을 장식하였음은 확실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의 순교와 관련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혔거나 도끼나 미늘창(곡괭이와 도끼날을 결합한 창)으로 신체가 잘려 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그의 유해는 나중에 ‘성녀 헬레나’(8월 18일) 황후에 의해 발굴되어 로마로 이장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다시 독일 남서부의 ‘트리어’로 옮겨졌으며, 이후 노르만족의 침략으로 분실되었다가 발견되어 다시 안장되었고, 현재는 베네딕토회의 성 마티아스 수도원 지하 무덤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의 축일은 원래 2월 24일이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이듬해부터 매년 5월 14일, 주님 승천 대축일과 가까운 부활 시기로 옮겨 기념하고 있습니다. 로마 순교록은 그의 순교 방법이나 장소 그리고 무덤 등에 관하여 전승의 다양함을 인정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내용을 수정 보완한 ‘로마 순교록’은 5월 14일 목록에서 이전 판과 같은 내용을 전하며 ‘유다 지방에서’라는 말을 빼고 그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말을 추가했습니다. 가톨릭 미술계에서는 전승에 따라 종종 십자가를 들거나 미늘창을 들고 있는 그림으로 성인을 묘사하고 있으며, 독일의 트리어 시는 그를 수호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술자의 주보 성인이자 목수와 재단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