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는 텃밭 가꾸기 / 정선례
‘심는 것은 일등’이란 말은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자신들보다 더 잘 심는다며 마을 아짐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다. 간혹 자기 며느리와 비교해서 나는 며느리들 사이에 때로 공공의 적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는 직장 다니느라 평일에 밭일을 못 하고 주말에 하는데 비라도 오면 일을 못해 거두는 일이 그 다음 주로 미뤄졌다. 완두콩을 거둬들여 처마 밑에 쌓아 놓고 따지를 못해 썩는다거나 하지감자며 강낭콩이 밭에서 싹이 나 버린 적이 있어 남편에게 감당할 만큼만 심으라는 잔소리를 듣곤 했었다. 일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으니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 심고 거두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어 요즘은 심은 만큼 거두는 일도 소홀함이 없다.
단체 카톡방에 오늘 만났던 이들이 올린 상추 사진과 댓글이 달렸다. 흑미밥에 된장, 상추를 상에 올린, 갓 씻어 물기 뚝뚝 떨어지는 싱그런 상추가 먹음직스럽다. 매주 한 번씩 가는 시 쓰기 모임에 가지고 가서 나눴더니 문우들이 올린 것이다. 씨앗은 주로 봄과 가을 파종용으로 나뉜다. 작년 겨울 김장할 때 씨를 뿌려 겨우내 눈보라 속에서도 죽지 않고 안으로 숨을 가두었다가 날씨가 풀리면서 자란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상추는 봄에 씨를 뿌려 물과 웃거름인 요소를 주고 속성으로 키운다. 그래서 부드럽지만 아삭한 본래의 상추 맛은 덜하다.
아침 밥상에 올릴 정도로 나는 상추를 즐겨 먹는다. 전년도 12월에 뿌린 것은 다음 해 4월에 초 3월에 뿌린 것은 장마지기 전 6월에 먹고 장마 끝날 무렵 7월 10일경 심은 여름 상추씨는 9월에 먹는다. 그리고 김장 무, 배추 심을 때 뿌리면 늦가을이나 초겨울 서리 내리기 전까지 상추가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 씨앗은 배게 뿌려 어릴 때 솎아 집장에 참기름, 깨소금 뿌려 살살 무쳐 스테인리스 양푼에 밥 비벼 먹으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누구나 좋아한다. 뭘 하나 사더라도 차 타고 읍에까지 나가야 하는 우리 마을 친하게 지내는 이웃들은 갑자기 상추가 필요하면 우리 밭으로 와서 해 간다. 나는 고기보다는 채소를 좋아해서 고추장에 또는 마늘, 쪽파 넣고 들기름, 참깨로 양념한 된장에 싸 먹는 걸 즐긴다. 내가 잘 심는 것은 상추뿐만이 아니다.
축사를 짓고 난 부지가 천여 평 남짓 남아서 화살나무, 소나무, 향나무를 심었다. 농촌 아낙의 씨앗 심기는 봄이 아닌 지난겨울부터 시작된다. 해마다 같은 작물을 심는데 연작 피해를 줄이려고 돌려짓기를 한다. 직파해야 하는 작물과 모종을 내서 심는 작물이 있다. 자투리땅이 적잖아서 철 따라 논에 보리나 사료 작물을 심을 때 맞춰 마늘, 양파, 완두콩, 상추를 심고 다음 해 봄에는 구정 지나면 언 땅을 로터리 쳐서 땅에 멀칭을 씌운 후 씨감자를 시작으로 강낭콩, 옥수수를 심는다. 서리가 끝나갈 무렵 싹이 튼 감자 비닐을 터 주고 며칠 후 옥수수 순 비닐까지 터 줘야 어린 모종이 햇볕에 고스러지지 않는다.
봄의 끝에는 넝쿨 호랑이콩, 고추, 가지, 토마토, 땅콩, 오이, 대파을 심는다. 특히 대파 모종은 김장에도 넣고 한겨울 소머리 삶을 때 뚝뚝 썰어 넣으면 최고의 요리가 된다. 들깨도 잎을 목적으로 심는 씨앗은 먼저 뿌리고 수확용 들깨는 늦디늦은 5월 말에 모를 부어 옮겨 심어야 열매가 많이 맺힌다. 모든 작물이 그렇듯이 너무 이른 시기에 심으면 키만 훌쩍 크고 잎만 무성해 열매는 많이 열리지 않는다. 매운 것을 못 먹는 체질인 우리 부부는 생김새가 기다랗고 주렁주렁 열리는 미인 고추 모종을 주로 심는다. 약 차는 대로 따서 장아찌 담그면 맵지 않아서 간장, 고춧가루, 마늘 갖은양념에 무쳐 겨우내 먹고 주변에 나누면 별미다. 여름철 땀 흘리고 입맛 없을 때 한 바구니 따 와서 된장에 찍어 먹으면 어느 순간 바닥이 보인다. 여름에는 다른 반찬 필요 없다. 풋고추와 오이냉국이면 더위에 지친 입맛을 찾아준다.
해마다 이맘때면 신경전을 벌이는 문제의 작물이 있는데 그것은 호박 모종이다. 남편은 먹을 만큼만 심으라 하고 나는 애호박, 밤 호박, 늙은 호박 쓰임이 달라서 종류별로 잔뜩 심는다. 퇴비를 듬뿍 준 구덩이에 호박 모종을 심어 놓으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호박잎을 멸치젓갈에 싸 먹거나 디포리 몇 개 넣고 된장국을 끓이면 개운하다. 애호박은 수확이 빠른 품종이라 직파보다는 농약 방에서 모종을 구입해 심으면 일찍 열매가 달려 호박전, 남편이 좋아하는 애호박돼지고기 찌개를 한다. 단호박은 단맛이 덜하고 샛노랗지 않아 밤 호박을 주로 심고, 늙은 호박은 밭 가에나 산으로 올라가는 자투리땅 여러 곳에 심어 벼 수확할 때 배 도라지 생강 넣고 호박즙 짜서 일해주는 분들과 물 대신 마시면 갈증에 도움 된다. 여름, 가을내내 식탁에 올리고도 남아 누구라도 우리집에 오면 손에 들려 보낸다. 내가 해마다 빼놓지 않고 심는 모종이 고구마이다. 수확하려는 것보다는 무더운 여름날 고구마순을 뜯어 데쳐서 빨간, 풋고추 썰어 된장에 식초 넣고 무쳐 먹거나 말린 고구마순으로 갈치 지져 먹어도 맛있어 한두 단 사서 두둑을 만들어 멀칭해서 심는다.
도시 생활에서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바로 샀던 허영기 많았던 나는 낮은 산으로 둘러싼 명주리의 성배골 외딴집에서 가진 것 없이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예전의 생활 방식을 버리고 소비를 줄여서 사는 수밖에 없었던 빈한한 농촌 생활이 적응되지 않았고 철 따라 자연이 주는 것들로 내 식탁을 채우고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돼지감자가 당뇨에 좋다 해서 볶아서 차로 끓여 내거나 장아찌 담으면 아삭한 식감이 좋아 사방에 심어 거둘 시기만 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나와 보니 돼지감자를 유난히 좋아하는 멧돼지가 쑥대밭을 만들어 알맹이를 다 파먹어서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었다. 씨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파먹은 멧돼지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미웠고 만나면 흠씬 두들겨 주고 싶었다.
비가 내린다. 물뿌리개 조리로 하루에도 여러 차례 물을 길어 날라 모종에 뿌려 주는데 무겁게 물을 주는 수고를 덜어 주니 휴가철에 다니러 오는 아이들 보는 것처럼 비가 반갑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 온 비인가. 직파한 해바라기가 비를 흠뻑 맞고 잎을 삐죽 내민다. 논에 사료작물이며 보리의 초록 물결이 단비를 반기는 몸짓처럼 수런거린다. 사는 일이 팍팍하기만 했던 내 지난날이 그래도 보송보송했던 것은 바람 솔솔 부는 들에 나와 주변 나무들의 잔 숨결을 듣는 고즈넉한 시간 덕분일 것이다. 심는 것이 일등이 되어 버린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이것은 내가 끝까지 보듬어 매양 할 일이다. 주변과 나누는 열린 마음이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