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권제3-5 보물419호
소 재 지;
이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로서 권일(卷一)·권이(卷二)가 없는 잔본(殘本)인데다가 책 첫머리인 권삼(卷三)이 6장, 끝인 권오(卷五)가 끝으로 4장이 없어진 결본(缺本)이다. 《삼국유사》로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조선 중종(中宗)7년(1512) 임신(壬申)에 경주부(慶州府)에서 발행한 것이 있어, 그 중에서 안정복(安鼎福)의 수택본(手澤本)이 일인학자(日人學者) 금서룡(今西龍)의 소유로 된 것과, 뒤에 고(故) 황의돈(黃義敦) 씨(氏)의 소장본으로 지금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들어간 것이 모두 조선 초기에 간행된 소위 정덕본(正德本)인 중종조(中宗朝) 간본(刊本)이다. 이 책은 자체(字體)가 고르며 도각(刀刻)이 정교하고 지질(紙質)이 오랜 것이어서 위의 두 가지보다 더 좋은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처음 고(故) 권덕규(權悳奎) 씨(氏)가 가졌던 것을 이인영(李仁榮) 씨(氏)가 입수(入手)하였다가 다시 현(現) 소장자에게로 돌아갔다. 권수(卷首)에 「이병직인(李秉直印)」 「송은(松隱)」과 함께 「전주이씨(全州李氏)」 「청분실(淸芬室)」 등의 인기(印記)가 있고, 권오(卷五) 첫장에 「최산진장(崔山珍藏)」(이상 모두 4각형 소인(小印)), 권말(卷末)에 타원형의 「청분실(淸芬室)」 인기(印記)가 찍혀 있다. 국보 제306호 삼국유사 권제3-5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2003년2월3일 해지
삼국유사 <권2> 보물419-2호
소 재 지;
고려 충렬왕 때의 고승 일연(一然)이 엮은 사서(史書). 일연은 고려 후기 무신의 난 이후 원(元)나라의 억압에 의한 문화적 위기의식에서 당시의 기록과 역사의 정리를 꾀하여 단군의 고조선으로부터 시작하는 한국고대사의 체계를 세웠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체재는 5권 9편 144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9편은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57항목으로 서술하였는데, 서두에는 이 편을 설정하는 연유를 밝힌 서(敍)가 붙어 있다. 흥법편에는 삼국이 불교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 및 그 융성에 관한 6항목, 탑상편에는 탑·불상에 관한 31항목이 들어 있고,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를 중심으로 하는 14항목,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3항목,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10항목, 피은편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10항목, 마지막 효선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5항목을 각각 수록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다. 저자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며, 1310년대에 제자 무극(無極)이 간행하였으나, 무극의 간행이 초간인지 중간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것으로는 고판본의 인본(印本)인 석남본(石南本)과 송은본(松隱本)이 남아 있다. 석남본(石南本)은 왕력과 제 1 권만 남은 잔본이며, 송은본(松隱本)은 권3·4·5만 있으며, 이 가운데서도 권 3 의 첫 6장과 권 5 의 끝 4장이 누락되어 있는데 보물 제419호로 지정되어 있다. 1512년(중종 7)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이 중간한 《삼국유사》는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또는 정덕본(正德本)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4-5> 보물419-3호
소 재 지;
이 책은 14세기말(조선초) 경주(慶州)에서 간행된 것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현존본 중 가장 빠른 간본(刊本)인 동시에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초기본들의 훼손된 부분과 결락(缺落)된 부분을 보완함은 물론 동시에 정덕본(正德本)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삼국유사 권제4-5까지 2권을 1책으로 묶은 것으로, 권4가 31장, 권5는 전체 30장에서 2장(제26-27)이 결락된 28장의 도합 59장인데 첫장 상단의 묵서(墨書) 기록으로 보아 광무(光武) 11년(1907) 오성월(吳腥月)이 입수하여 범어사(梵魚寺)에 기증한 책임을 알 수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광곽(匡郭)의 길이가 정덕본에 비하여 대체로 크고, 변란(邊欄)도 모두가 쌍변(雙邊)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정덕본과 문자상(文字上) 많은 차이가 보이고 특히, 고려왕(高麗王)들의 어휘(御諱) 대부분에 피휘(避諱)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조선초 판본(板本) 중 유일하게 권4의 이혜동진(二惠同塵)·자장정률(慈藏定律)·원효불기(元曉不羈)·의상전교(義湘傳敎) 등의 편에 구결(口訣)로 현토(懸吐)가 되어 있으며, 권제5의 제27-30장이 있는 것은 범어사본이 유일하다.
삼국유사 <권3-5> 보물419-4호
소 재 지;
이 책은 14세기말(조선초) 경주(慶州)에서 간행된 것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현존본 중 가장 빠른 간본(刊本)인 동시에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초기본들의 훼손된 부분과 결락(缺落)된 부분을 보완함은 물론 동시에 정덕본(正德本)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삼국유사 권제4-5까지 2권을 1책으로 묶은 것으로, 권4가 31장, 권5는 전체 30장에서 2장(제26-27)이 결락된 28장의 도합 59장인데 첫장 상단의 묵서(墨書) 기록으로 보아 광무(光武) 11년(1907) 오성월(吳腥月)이 입수하여 범어사(梵魚寺)에 기증한 책임을 알 수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광곽(匡郭)의 길이가 정덕본에 비하여 대체로 크고, 변란(邊欄)도 모두가 쌍변(雙邊)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정덕본과 문자상(文字上) 많은 차이가 보이고 특히, 고려왕(高麗王)들의 어휘(御諱) 대부분에 피휘(避諱)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권1-5> 보물419-5호
소 재 지;
서울 관악구 신림2동 산56-1 서울대학교규장각 |
이 책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왕력(王曆)과 권제1∼권제5까지 5권을 2책으로 묶은 것으로, 왕력 15장, 권제1 37장, 권제2 49장, 권제3 56장, 권제4 31장, 권제5 30장, 발문(跋文) 1장 등 총 219장이다. 표제(表題)에는 대자(大字)로 “삼국유사(三國遺事)”라 묵서(墨書)되어 있으며, 표지는 개장(改裝)한 것으로 격자문양(格子紋樣)의 한지(韓紙)에 주사(朱絲)를 이용한 오침철장(五針綴裝)이다. 이 책은 고(故) 황의돈(黃義敦) 교수의 소장이었으나 뒤에 서울대학교로 이관된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中宗) 7년(1512)에 경주(慶州)에서 간행된 정덕본(正德本) 삼국유사로 낙장(落張)이 없는 유일한 책인 동시에, 같은 판본(板本) 중에서도 인출(印出)시기가 가장 빠른 선본(善本)으로 평가된다. 국보 제306-2호 삼국유사<권1-5> 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2003년4월14일 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