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
하늘 조각
그는 12살의 여름의 끝자락까지 거의 매일을 같이 지낸 아이였다. 그 일이 벌써 6년 전 얘기. 그 시절의 기억은
마치 장마다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림책 같이 띄엄띄엄 기억나고, 같이 있을 적에 느꼈던 가슴 떨림은 조금
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내 가슴은 식어 버린 지 오래. 그는 같이 있어도 언제나 꿈처럼 한 없이 멀게만 느껴졌던
아이였다.
그는 하얗고 다른 남자 애들에 비해 작은 편이었지만 거대한 여름 하늘과 무척 닮아 있었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잔잔한 표정이나 배려해 줄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냥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무언가가 어린 그에게는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혼자밖에 모르는 굉장히 비밀스런 보물 같은 존재였다. 그
의 하나 하나의 몸짓, 생각, 말투 전부 다 나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졌다.
[ 나는 하늘의 파편이야. 떨어진거야, 널 만나기 위해. ]
[ 거, 거짓말…. ]
[ 사실인걸. 거짓말 따위가 아냐. ]
그는 언제나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되지도 않는
말을 당연한 듯이 말하는 폼이 아주 그럴듯 해 보였다. 그의 조용조용한 목소리와 고운 얼굴에 무척이나 잘 어울
리는 잔잔한 표정 때문에 어린 날의 내가 거짓말이란게 빤히 보이는 말을 긴가민가하다가 얼떨결에 믿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게는 어린 아이의 유치함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답지 않게 귀엽지 않은 성격이었다. 일찍 철
든거라고 해야할까.
그가 아무 말 없이 떠났을 때, 나는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을 꿨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의 11살의 여름 날
나타나서 12살의 여름날, 그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그의 엄마와 내 엄마는 고등학교 친한 동기생으로 그가 다
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 왜, 너 그 아이랑 친했잖아. 연락처 알려줄까? ]
그날 밤,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다. 끝도없이 퐁퐁 눈물이 솟아났다. 그냥 그렇게 슬펐
던 날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밍밍한 나에게 있어서 말이다. 말없이 떠난 그가 나와는 먼 타인인 것처럼 느껴져 무
서웠다. 그가 나를 생각하길 단순히 옆집에 살고, 엄마끼리 친구였기 때문에 옆에 같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는 그 당시 다른 애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안의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 아이도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나
만의 하늘이었으니까.
나는 지금 그의 집 앞에 서 있다. 거짓 없이 그가 많이 그리웠다. 그런 것 같다. 색바랜 과거의 나날을 떠올릴 때마
다 언제나 그가 함께 옆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말도 없이 떠난 것일까. 6년만의 재회는
쉽지 않다.
"오랜만이야. 기다리고 있었어."
서먹할 줄 알았던 내 생각과 다르게 그는 마치 6년간의 긴 시간을 무시한 듯 자연스러웠다. 나를 반기는 그의 담담
하게 웃는 얼굴과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 목소리에 눈물이 삐질 나왔다. 그의 얼굴에 젖살이 빠져 있었다. 날카롭고
섬세한 턱선과 피곤한 기색이 묻어있는 살짝 풀린 눈, 긴 속눈썹이 여자보다 더 예뻤다. 나와 같던 키도 많이 컸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아스라함이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더욱 짙어졌다.
그가 가리킨 방으로 들어가 편한 차림의 옷으로 갈아 입고 양치질 도구를 가지고 나와 화장실에 놓아 두었다. 그의
칫솔은 흰 바탕에 파란색 고무였다. 손을 씻고 나오자 그는 티비를 보고 있었다. 발꿈치를 올리고 살살 걸어 소파 끝
에 바짝 붙어 앉았다. 편하게 소파 손잡이에 놓인 팔에 힘이 축 빠진 그의 하얀 손을 보며 나는 옆에 있는 손잡이를
살며시 쓸어 보았다. 서늘한 감촉이 좋았다. 오랫동안 꺼져있던 심장 스위치가 다시 켜졌다. 그 시절에 느꼈던 가슴
떨림이 놀랍게도 더 크게 그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엄마는 잦은 출장에 항상 바빠 나를 다른 곳에 맡기는 신세였다. 모든 것에 의욕이 없는 난 중졸을 하고 학교를 다니
지 않았다. 엄마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혼자는 죽어도 싫다는 말에 엄마는 넓은 인맥으로 나를
이곳 저곳에 맡겼다. 항상 약속한 날보다 늦게 오던 엄마는 오늘도 3일이나 지나서 날 데리러 왔다.
" 어릴 때 너 옆집에 살던 애 기억하니? 엄마 친구 아들."
"...은재?"
두근, 거짓말 같게도 심장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반응했다. 마치 봄이 시작되는 입춘처럼.. 그런 것처럼.
"그래 은재. 걔는 혼자 독립한지 1년이 넘었다던대. 그 전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 거기로.
여름 방학이고 하니까, 이번에는 잠깐 걔 집에 있어. 1주일 안으로 올거니까."
전에 살던 아파트라니…. 그는 무슨 생각으로 그 곳에 돌아온 걸까. 그도 그 시절이 조금은 그리웠던 걸까. 그래봤자
아무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였으니까. 별로 그의 입장을 생각해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엄마는 그가 남자란건
자각하고 하는 소리일까. 흐릿해진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다가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런 건 상관없
으니까. 괜찮아. 애써 홀로 위로하며 눈을 감았다.
"저녁 아직이지?"
"응…."
"오늘은 시켜 먹을까… 괜찮지?"
"으음, 괜찮아."
첫 날이라 어색한데 저녁까지 시켜먹자니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그가 첫 날부터 밖에서
시켜 먹은 이유를 알았다. 그의 음식 솜씨는 보통 이하였다. 밥짓고, 계란 후라이는 소금 양 조절을 못해서 싱겁게
하는 수준정도. 그래도 과일은 참 예쁘게 잘 깎는다.
"맥주 마시지?"
그의 집으로 온 지 2일 째. 머리에 수건을 올려 놓고 나온 그가 물었다. 나는 보고 있던 티비에서 눈을 때지 않고 두
어번 끄덕였다. 주량이라면 보통 남자들 보다 센 편일거다. 보통 남자들의 주량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전에 신세진 집주인 중의 한명인 서영씨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혼혈인이다. 아직은 한국 문화보단 일본 문화에 익숙
한 호탕한 성격의 섹시한 그녀는 항상 자신을 미나코짱- 이라고 부르라고 시켰다. 미나코짱은 30대 초반이지만 S라
인의 몸매와 긴 웨이브 머리를 하고 짙은 화장을 즐겨했다. 미나코짱은 오로지 맥주만을 고집하는 지독한 애주가였
다.
[ 이 찰랑이는 금빛 물결을 보면……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갈 정도로 아름답지 않니…. 딸꾹. ]
정신이 오락가락 할 때 말한 애주가의 한 말씀은 마음 깊이 새겨져 나는 밝은 황토색이나 노랑색, 금색을 보면 맥주
가 그리워지곤 했다.
그는 쟁반에다가 깎아 온 복숭아와 캔맥주 2캔을 들고 왔다. 지금은 11시경, 그의 하루를 마무리 하는 건 언제나 맥
주 한 캔이었다. 아무레도 알코올이 조금 들어가야 잠을 잘 수 있는 것 같다. 그는 불면을 앓고 있는 것 같다. 새벽
2시가 넘어서 부터 늦은 새벽까지 두어번 문 열리는 소리와 냉장고를 열어 물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첫모금은 길게 쭉 한 모금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 역시 미나코짱에게 얻은 습관이다. 안주인 복숭아를
포크에 찍어서 한 입 크게 물었다. 입술에 묻은 달콤한 과즙을 혀로 핥았다. 티비에서는 토크쇼가 한창인데 어떤 연
예인이 재미있는 발언을 했는지 빵 터지는 웃음 소리가 적막한 집 안 가득 울렸다. 나는 멍하니 티비를 보며 맥주를
홀짝였다.
"어떻게 지냈어?"
"음?"
"자퇴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어. 많이 힘들었나 보다."
익히 들었다는 말은 얼마 전, 엄마와의 통화가 아닌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린가?
"아… 아니. 그냥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어서… 그것보다 네 학교 생활이 궁금해.
어때? 고등학교 생활은."
"뭐, 그냥 피곤해. 특별한 것도 없고."
마주친 그의 눈이 피곤으로 가늘어져 있었다. 힘없이 미소 짓는 입꼬리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희미했다. 그
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늦어도 12시 안에 모든 일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나도 같이 방으로 들어가 스
텐드를 켜고 침상 위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그 몰래 부엌의 작은 불을 키고 주스를 따라 가져가서 마시기도 했다.
침묵 속에서 책을 읽다 보면 전 집 주인인 영미 아줌마가 생각났다. 영미 아줌마는 짝 찾는 것을 30대 중반이 되었
을 때, '아 늦었구나' 생각하며 포기했다고 한다. 아줌마는 무테 안경을 쓰고 단정한 정장 차림의 차갑고 날카로운
이미지였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목 늘어난 반팔과 츄리닝 바지를 입고 티비에 게임기를 연결해서 나와 1:1로 밤 늦
도록 붙곤 했다. 영미 아줌마는 진정한 건어물 여인이었다.
"난 이만 들어가 볼게."
"어, 나도. 잘자."
"잘자."
벌써 11시 5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스위치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기다려줬다.
달칵.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나서 가만히 서 있었다. 탁, 불을 끄는 소리와 궁궁 땅이 울리는 사람 발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후우……."
성장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굉장히 가슴이 떨렸다. 궁궁 가슴에 방망이질을 해서 들릴까봐 숨도 제대로 못 쉴 정
도로 긴장을 했다. 작은 움직임 조차 매끄럽지 못했다.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이부자리를 펴고 그 위에 엎드려
옆에 놓인 책을 들었다.
새벽 2시 50분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냉장고를 열고 졸졸 물 따르는 소리.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허공을 바라봤다. 스텐드 불빛만이 켜진 주위가 하얀 빛으로 환했다. 맑은 눈을 감았다 떴더니 맑은 눈이
조금 흐릿해진 기분이었다. 책 속에 빠져 있던 공간이 깨져 현실로 돌아왔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대로 나
는 불을 끄고 바르게 누워 이불을 덮고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그의 집에서 지낸 지 어느 덧 사흘 째. 덜덜- 떨리는 오래 된 선풍기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바람 세기만 강할 뿐,
그저 미지근하다. 감당할 수위를 넘은 여름 날의 열기에 뇌 속까지 뜨거워 진 것 같다.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
던 그가 거실에 있는 에어컨 쪽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
"응?"
"안 돼. 더우면 여기 앉아."
그는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미지근한 센 바람에 날리는 얇은 머릿결에 하얀 옆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그는 더위에 지쳤는 지 평소 힘 없는 표정이 더욱 지쳐 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에어컨을 키라는 말
을 하지 않았다. 난 여름이 좋다. 이 뜨거운 열기도 싫지만은 않다. 그러니까 왜 여름이 좋느냐 하면……. 여름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길 것 같으니까. 예를 들면…….
[ 나는 하늘의 파편이야. ]
이런 것……. 이미 나한테는 일어난 일이지만. 그 생각, 그 느낌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분홍색 연기같은 마
법같이 몽롱하고 가슴이 벅찼다. 그는 나만의 하늘이었다.
현기증이 일 정도의 더위를 무시하고 선풍기 바람에 집중해 더위를 참았다. 귓가에는 오직 덜덜거리는 선풍기 소리
뿐. 내가 이 상황을 어색해 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그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기분이 좋다.
"점심 먹게 부엌으로 가자."
부엌으로 가자 식탁 위에 젓가락과 숫가락만이 나란히 올려져 있었다. 의자에 앉아 싱크대 쪽에서 그릇에 면을 조심
히 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는 종아리가 예쁘게 뻗어 있었다. 살랑거리는 반팔 소매 사이로 하얀 팔
이 분주하다. 두 그릇을 양 손에 들고 온 그가 내 쪽에 조심스럽게 하나를 내려 놓았다. 나는 물냉면, 그는 비빔 냉면.
아직 녹지 않는 얼음이 위에 동동 떠 있었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어릴 적 그는 항상 비빔냉면을 나는 물냉면을 먹었
던 기억이 아주 오래 된 장면처럼 떠올랐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흐릿해지는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시원하겠다. 맛있게 먹을게."
"그래. 맛있게 먹어."
그리고 면을 빠른 속도로 먹기 시작했다. 남자인 그와 거의 같은 속도로 나는 빠르게 면을 해치웠다. 양치를 끝내고
그와 나는 서로 아무 말 없이 각자 방에 들어갔다. 나는 방에 있는 선풍기에 타이머를 맞춰 놓고 낮잠을 잤다.
"잠 와?"
"아니… 아까 낮에 잤더니 별로 잠이 안 오네."
"그럼 맥주 마실래? 안주도 여러가지로 준비해서."
"좋지."
밤 10시 30분쯤 그가 말했다. 항상 자기 전에 습관적으로 마시던 알코올을 왠일로 즐기려는 것일까. 그와 대화를 나
눌 수 있는 자리기에 좋았지만 헤어질 시간이 점점 가까워짐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가기 전에 이렇게 대화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차려온 작은 상은 별로 많지 않는 그릇들로 가득했다. 오징어와
쥐포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먹기 좋게 잘라져 있었고, 복숭아는 같은 크기의 모양으로 그릇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다른 날과 달리 맥주는 5캔이었다.
왠지 모르게 오늘 이 자리가 마지막 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내 머릿속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 한꺼번
에 쏟아졌다. 자제, 해야할 이유가 있나?
"내가 여기서 일주일이나 지낸다는 건 알고 있었지? "
"음."
"왜 허락했어? 네가 거절 의사를 보였다면 나는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거야.
사실 나는 널 보기가 껄끄러웠거든."
"어릴 때 널 많이 좋아했어, 난."
"… 지금에서 그런 건 상관 없잖아."
희미한 미소, 그는 나와 눈을 마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주시했다. 오묘한 느낌. 무언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까. 나는 맥주 한 모금을 길게 마셨다.
"나는 줄 곧 널 만나고 싶었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말은 강인하지도 예리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을 닮은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도 나
처럼 평화로웠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걸까.
"…거짓말."
"넌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모든 것을 포기 했어. 그래서 그 어린 날, 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이사 가기
전 날까지. 하지만 너와 같이 보낸 시간들은 행복했고 소중했어."
"……."
"다시 그 날로 되돌릴수만 있다면… 좋을텐데……."
그는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눈빛이 아련하게 젖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그의 말 속에는
다시는 그 날로 되돌아 갈 수 없는 현실이 느껴져 나는 안타까워졌다. 그 어린 날의 우리는 여기에 다시 만났건만…
그는 다시는 있을 수 없다는 듯이 마지막처럼 아쉬워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쓰아렸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은 비가 왔다. 방충망으로 비가 튀기는 것을 창을 닫아 막았다. 탁, 타닥. 창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내일 낮에 올거니까 짐 정리하고 기달리고 있어. ]
어제 낮 티비를 보고 있을 때 걸려온 전화는 엄마였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슬퍼졌다. 이제 정말
로 그와 헤어져야 한다. 얼마 안 남은 시간에 그와 대화를 할까. 폰 번호를 알려 달라고 할까. -내일 엄마가 낮에 데
리러 온데.- 그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제 들었으면서도 그는 점심 시간이 다가와도 책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침착한 모습에 나는 안절부절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날씨는 흐리고 비까지 내린다. 언제 올지 모르는 엄마와, 그
는 책을 읽고 있다.
"아, 점심은 여기서 먹고 가?"
"… 먹고 갈래."
"음… 그럼 지금 해야겠……."
"으흑!"
결국 나는 울어버렸다. 그는 일어선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창피하지만 헤어지면 왠지 그와는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용기가 없으니까 그에게 폰 번호도 이메일도 결국 아무것도 물어
보지 못할거다. 뻔하다. 나는 항상 이런식이었으니까. 그가 소리 없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아 내 몸을 두 팔로 안았
다. 내 어깨에 고개를 숙여 턱을 놓고 가만히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몸에서 느껴지
는 그의 체온이 너무 좋아서 눈을 감고 오직 그를 느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 볼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
등에서 그의 손가락이 톡톡 두드리는 느낌, 그의 체취, 그의 온기.
"……."
"울지 마."
"미안… 그치만 네가 너무 평소하고 같잖아. 난 이제 가야하는데……."
"그래… 알고 있어, 나도. 미안해."
일정한 빗소리에 이 시간이 멈춰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편이 좋을텐데…….
"안 나오고 뭐해?"
"잠깐, 먼저 나가 있어요."
시간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엄마는 오고 말았다. 엄마를 먼저 문 밖으로 내 보내고 그를 보았다. 그는 잔잔한 미소
를 지으며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텅 빈 것 같은 공허감이 너무 커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홀로 서 있는
그가 위태로워 보였다. 지금 당장 눈 앞에서 사라져도 이상할 거 하나 없는 느낌.
"…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는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은 없었다. 처음부터 답이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말 한거지만 이대
로 끝내기는 아쉬움이 미련으로 남겨질 것 같은 생각에 그가 대답하기를 애절하게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
는 대답이 없었고, 나는 피식 웃으며 내 하얀 운동화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제 가봐야겠다……. 잘 있어."
"네가… 많이 그리울 거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에게 들은 최선의 답이었다. 벌써부터 아련한 그의 모습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내일이
면 그의 모습이 머릿 속에서 흐릿해져 버릴 것만 같아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절대 잊어선 안될 얼굴이니까…….
"너만큼은 행복해져야 해."
그의 마지막 바램은 공기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도 나와 같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나의 바램이 그에게는 닿지 못
했기 때문에……. 그와 헤어진 지 3달이 조금 안되서 그의 자살 소식을 엄마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의 자살에 내
머리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이 굳어져 버렸다. 멍하게 지내는 나날들로……. 그렇게 2년이 훌쩍 지났다.
20살, 나는 작은 빌라에 정착했다. 그 날 이후, 나는 자기 전에는 꼭 맥주 한 캔을 마시고, 그를 회상하는 것으로 하
루를 마치는 습관이 들었다. 투칵- 어느덧 여름이 다시 돌아와 맥주 캔 따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여름- 나에게
는 감당하기 어려운 계절. 낮은 층에 살고 있어서 불을 다 꺼 놓은 집 안에는 달빛 대신 밖에서 비추는 가로등으로
달빛 분위기가 났다.
"좋아해."
"……."
"… 피식."
2년이 지났지만 그를 회상할 때면 나는 18살의 소녀로 돌아간다. 어쩌면 나는 그의 죽음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와 같이 있으면 그의 얼굴에서 희노애락을 볼 수 없었다. 그저 공허한 얼굴, 마치… 무언가를 기다
리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같이 지내면서 점점 편안해지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 너와 같이 보낸 시간들은 행복했고 소중했어. ]
지금 생각해 보면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행복했던 어린 날, 그 속에 같이 있던 나를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만족하고 세상을 떠난 것 같다. 속 편한 사람. 나는 항상 생각한다. 만약 나에게 조그만 용기가 있었더라면 우리 세
계는 바꼈을까. 얼굴에 절로 쓴 웃음이 나왔다. 소용없는 생각이다. 그는 단지 혼자 지고가는 삶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리는 길을 선택했을 뿐인데…….
[ 다시 그 날로 되돌릴수만 있다면… 좋은텐데……. ]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 말을 생각하면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왠지 그의 마
지막 미련인 것 같아서…….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은 지독한 슬픔에서 시간이 지나 공기 중에 엷게 펴져 주변의 산소로 남아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그가 생각나고, 한없이 공허해 보이지만 인자해 보이는 미소는 거대한 여름 하늘을 연상시켰다.
나의 첫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운 사람으로 내 심장 쪽에 영원히 자리 잡았다.
- 하늘 조각
안녕하세요 여름 소년입니다.
다섯번째 단편 작을 들고 왔습니다!
아슬하게 두 달이 되기 전에 왔어요.
막상 소설을 다 쓰고 오니 문득 걱정이 되더라구요.
과연 나를 기억해 주실 분들이 있을까…….
그만큼 시간이 지나도록 저는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죄송합니다. 사과 드릴게요.
요즘 학교다 뭐다 해서 많이들 바쁘시고, 그만큼
피로도 장난아니게 쌓였겠죠.
수능 보시는 분들은 힘내세요!
엿 드릴게요.(에헷)
앞으로도 자주 올지는 모르지만…….
아주 발을 끊는 건 아니니까요.
다시 보는 그 날까지!
건강하세요~
끗.
★ 이번 소설도 마음 편히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
첫댓글 좀,,슬프네요...ㅠㅠ
그렇네요< 처음으로 새드를 내보네요! 사실 저는 새드쪽인 사람이지만 결말은 언제나 해피로 내거든요. 그 뭐랄까 제가 감당을 못해서..슬프니까요 흑흑흑!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아.......정말, 마음이 먹먹해지네요. 마지막에 '너만큼은 행복해 져야해' 한마디가 되게 찡해요 ㅜㅜ 잘 읽었습니다!
저도 쓰면서 얼마나 쓸쓸했는지 모릅니다... 흑흑! 새드는 역시 제가 감당 하기가 조금은 힘드네요. 저도 그 부분에서 얼마나 슬펐는지... 사실 제 이상형을 바탕으로 쓰는 소설이기에 쓰면서도 더욱 마음이 아리네요. 잘 전달됬으면 좋을텐데.. 아직은 미숙합니다! 더욱 실력을 늘리도록... 해야 하는데... 일단 피곤하니... 나중으로.(에헷) 피곤하네요~ 얼른 씻으려 가야겟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정말, 마음이 먹먹해지네요. 마지막에 '너만큼은 행복해 져야해' 한마디가 되게 찡해요 ㅜㅜ 잘 읽었습니다!
이런 문체가 좋아요! 격하지 않게 단호하지 않게 감정을 드러낼듯 말듯 그러나 마음 속에 잔잔하게 전해지는. 무언가 경험이 뒷받침 된거 같기도 한. 잘 읽고 가요~ 오늘 이 소설로 여름소년님을 알게 되었는데 지금 다른 소설도 찾아보러 갑니다^ ^ 건필하세요~
아직은 많이 서툴러요. 좋게 봐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꾸벅) 경험이라기엔 사랑이 없지만 제 취향이나 생각을 잘 살려내서 쓰고 있습니다! 제 소설이 조금은 지루감이 없잖아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은근 많더라구요. 그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흐릿 흐릿 흐르는 내용이 너무나 묘하게 아프네요. 이런게 소소한 아픔이란 거겠죠? 시작부터 아프던 모든게 마지막 쯤에서 터져나올 뻔했어요. 정말 묘하게 아픈 글이었어요. 건필되세요!
이 댓글을 보고 제 글인데도 정말 그런가? 하고 다시 보게 되더라구요.. 하핫. 묘하게 아픈 소설이었군요. 저도 글을 쓸 때는 일심동체이라 씁쓸해지고 아련해지고……. 뭐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감정을 가지고 쓴 소설이에요. 하지만 어딘지 어색한 부분이 많더라구요. 쓰고 나서도 많은 아쉬움이 남아요. 나날이 발전해가는 글쓴이가 되도록.. 힘내야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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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쏭윤아님 하핫. 요즘 학교 생활이 많이 피곤하실 듯 해요. 더구나 요즘 신종플루로 많이들 예민해져 있는 시기라서 공부하랴 신종 걱정하랴 힘든 나날로 많이 지치죠,(유유) 이번 소설은 새드로 끝났지만 전 나름 만족하고 있어요. 아, 진짜 글 쓴 저도 가슴이 많이 아릿아릿 한 소설이에요. 제가 약간 마조끼가 있어서 이런 아릿거림을 좋아라 하며… 헉.ㅋ. 다음 소설은 아마도 한달 넘지 않게 아마도 빠르면 이번주??는 조금 무리일 듯 싶고, 이주일 후에는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약속은 못해드려요! 워낙에 변덕이 들끓는 저라서… 하핫. 다음 작품은 처음 시도해 보는 코믹작품으로 찾아올거에요! 그때까지 건강하세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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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비상탈출구님 오랜만이세요! 수능이라- 공부는 잘 되가나요?? 하핫, 음 너무 잘 쓴다니, 과찬이세요호- 이번 편은 새드라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나봐요.ㅋ 오늘 열이 꽤 높게 올르고 몸살기가 잇는 것 같아요. 병원을 다녀왔지만 내일도 열이 오르면 그때 타미플루를 처방해 준다고 하더군요. 병원에서 그렇게 아프진 않은 주사를 맞아 마냥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핫. 오늘은 뜨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누워야겠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름소년님 예전에 라임엔젤 이었던 영롱한백조입니다.........;;;;;;;;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보고싶어요.ㅜㅜ 하늘 조각도잘읽고갑니다. 예-에전에 읽었는데 닉을 바꿔서 댓글을 쓸지 안쓸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올립니다. 보고싶어서.....;; 언능오세요♡
되도록 일찍 돌아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죄송하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