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창세기 31:17-21
17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18 그 모은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 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 새
19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단어들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김연아, 박태환, 싸이, 수지, 이승기, 소녀시대, JYP, 빅뱅, 원더걸스, 동방신기, 2NE1. 네 맞습니다. 아이돌입니다. 요즘 10대와 20대들의 열광적인 인기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아이돌입니다. 요즘 TV를 보면, 이런 아이돌의 활동이 정말 대단합니다.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그들의 공연장 분위기만 보면 마치 온 나라가 이런 아이돌에 미쳐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통계청이 발표한 설문조사를 보니까,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위가 운동선수였고, 3위가 연예인이었습니다. 2위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2위는 공무원이었습니다. 어떤 초등학생에게 너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라고 물었더니 “정규직”이라고 대답했답니다. 이게 우리 아이들의 미래입니다.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아이돌이 되든지, 아니면 그냥 안정적인 소시민이 되어 하루하루를 별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 아이들의 꿈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이돌이 되는 것이 쉬운 게 아닙니다. 제가 조사해보니 아이돌이 되는 것은 사법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합니다. 실제로 요즘 아이돌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연예기획사의 철저한 관리와 교육을 거쳐 만들어진답니다. 기획사들은 일찌감치 ‘될 성 부른 새싹’을 발탁해 ‘사관학교’식의 또는 ‘선수촌’식의 엘리트 교육을 통해 잘 포장해 대중 앞에 ‘잘 만든 문화 상품’으로 내놓는다는 겁니다. 슈퍼주니어, 빅뱅, 2PM, 소녀시대, 카라, 티아라 등 요즘 TV만 틀면 나오는 아이돌이 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이돌이랍니다.
이런 아이돌이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바로 기획사의 오디션입니다. 슈퍼주니어와 소녀시대를 배출한 SM 엔터테인먼트는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오디션을 치르는데, 매주 매번 수백 명씩 몰려 북새통을 이룬다고 합니다. 빅뱅과 2NE1의 소속사 YG, 그리고 2PM과 원더걸스의 소속사 JYP 등 대형 기획사들도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씩 오디션을 여는데, 그 때마다 그 일대는 10대 청소년들로 뒤덮여 교통이 마비될 정도랍니다.
비공식적인 통계이지만, 연예인을 꿈꾸는 지망생들만 해도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디션에 붙을 확률도 1% 정도에 불과하답니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가수 아이유 양도 20차례도 넘게 오디션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오디션 계에도 사교육 열풍이 불어서, 전국적으로 가수 지망생을 교육하는 학원 숫자만도 3천 곳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런 학원에서는 노래의 기본기뿐만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선 처리까지 오디션 ‘쪽집게’ 강의를 하는데, 강의료도 수백만 원을 웃돌지만, 학원마다 수십 명씩 수강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아이돌을 숭배하는 분위기를 조장하고, 아이돌이 되는 것을 마치 ‘자아의 실현’이나 ‘꿈의 완성’처럼 아름답게 포장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제가 아이돌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오디션과 연습생 과정을 미화한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의 한 구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아이돌이 되는 길은 끝이 없이 달려야 하는 길. 매번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길.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경쟁이 더 치열한 곳에서는 더 치열하게 부딪혀야 할 것입니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아이돌을 숭배하는 사회가 되었을까요? 왜 우리 사회는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냐는 말입니다. 맘몬의 세상에서 돈을 쫓다보니까, 존경을 잃어버린 세대들이 인기의 헛된 명예를 쫓다보니까, 믿음이 없는 세대들이 그래도 믿을 만한 것을 찾다보니까,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게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믿음이 없는 이 세대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 아이돌의 굿판을 걷어치우고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귀한 예배시간이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을 때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몰래 훔쳤습니다. 여러분, 드라빔이 무엇입니까? 드라빔은 당시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었습니다. 크기가 손에 잡을 만한 것부터 사람의 키 정도까지 크기도 다양했는데, 사람들은 그 드라빔에게 복을 빌기도 하고, 드라빔으로 점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드라빔은 한 가정의 아이돌, 우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라헬이 남편을 따라 아버지 라반의 집에서 떠나면서, 라반 집안의 우상인 드라빔을 몰래 훔쳐 나온 겁니다. 그 이유는 한 집안의 드라빔을 사위가 차지하면, 그 집안 아들이 받을 복을 사위가 받는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라헬은 하나님도 믿지만 드라빔도 믿은 것입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드라빔도 믿은 순수하지 못한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라헬의 모습에서 요즘 우리나라 크리스천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나 주님의 기쁨 되길 원하네’를 뜨겁게 찬양하면서도, 교회 밖에서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미친 듯이 말춤을 추는 우리 크리스천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도 돈이 주는 축복을 쫓아다니는 크리스천들,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만 어떻게 하면 세상의 권력과 가깝게 갈 수 있을까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권력을 쫓아다는 크리스천들, 그런 크리스천들이 이 땅에 너무 많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하나님도 믿고 아이돌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아이돌이 주는 유익도 챙기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도 믿고 아이돌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더 나쁜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아이돌을 숭배할 수 있습니다. 믿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아니 더 못한 인간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뒤에 보면, 드라빔을 도둑맞은 라반은 곧바로 야곱을 쫓아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야곱이 몰래 도망친 것이 미웠던 라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돌인 드라빔을 몰래 훔쳐 갔다는 생각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라반에게는 드라빔이 아이돌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반은 그 잃어버린 드라빔을 찾기 위해 야곱을 추격합니다.
야곱을 뒤쫓아 온 라반은 드라빔을 찾기 위해서 야곱의 온 장막을 수색을 합니다. 그러나 34절을 보니까, 라헬은 그 훔친 드라빔을 자신의 낙타 안장 아래에 숨기고 낙타에 올라타 거짓말을 합니다. 오늘은 자신의 몸이 좋지 않은 날, 즉 생리를 하는 날이라 일어설 수가 없다고 뻥을 칩니다. 그래서 라반은 자기의 드라빔을 찾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라헬이 아이돌을 믿는 아버지 라반을 속인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의 아이돌을 훔치고 속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라헬이 왜 그랬을까요? 왜 아버지의 드라빔을 훔치고 또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라반의 아이돌이 라헬에게도 아이돌이었기 때문입니다. 라헬은 드라빔을 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이돌을 훔치고 또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그렇게 귀하게 생각했던 아이돌을 귀하게 취급하지 않는 모순을 보입니다. 아이돌을 깔아뭉갠 것입니다.
만약 라헬이 드라빔을 진짜 신으로 생각했다면 잘 모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위급한 상황이 되자 자신의 엉덩이로 그 드라빔을 깔아뭉갰습니다. 아이돌 드라빔은 거짓 신이라는 말입니다. 평소에는 잘 모시다가 깔아뭉갰다가 다시 잘 모셨다가 하는 그런 아이돌이 무슨 진짜 신이겠습니까? 드라빔은 거짓의 아이돌, 우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거짓의 아이돌에게 복을 빌고, 미래를 묻는 점을 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사회가 딱 이렇지 않습니까? 아이돌에 미쳐 죽을 듯이 날뛰다가도 싫증나거나 미워지면 쉽게 매장시켜버리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의 자랑, 월드스타 ‘비’라고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지금은 대부분의 언론들이 군문제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싸이는 또 어떻습니까?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비난을 해대서 결국 군대를 두 번 가게 만들더니, 지금은 대한민국의 자랑, 아이돌의 종결자라고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세상은 이렇게 아이돌의 굿판이 난무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라헬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도 믿고 드라빔도 의지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런 믿음은 믿음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고전 8:4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아이돌도 믿는 믿음은 믿음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내 집안도, 내 자신도 바꿀 수 없습니다. 믿음은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믿음은 그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헛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온전한 믿음은 능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이 바로 믿음의 능력이라고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은 이것을 한 마디로 정의해줍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진짜 믿음, 온전한 믿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믿음이 희망이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믿음이 희망의 근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에서, 실상은 희랍어로 휘포스타시스(huipostasis)입니다, 여기서 huipo는 영어로 under이고 stasis는 stand입니다. 즉, 언더스탠드로 "아래서 받쳐준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받쳐주는 근거 혹은 기초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는 절망의 벽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붙드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절망의 벽을 넘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는 이런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이돌이 절망을 희망으로 받쳐줄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아이돌은 절망의 근거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도 바라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갈대아 우르’라는 희망 없는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라함은 그 절망의 땅을 떠나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믿음으로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18에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살던 고대시대에서는 자식이 없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100세가 될 때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나이가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를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죠?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믿음, 아브라함은 그 능력의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도저히 살아갈 희망이 없어 보이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 같은데, 오히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외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희망전도사 닉 부이치치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머리와 몸통만 있는, 사지가 없는 그는 누가 보더라도 절망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절망이 희망이 되는 삶, 한계가 비전이 되는 삶의 상징이 되어 있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그가 저술한 책 ‘Life without limits’, ‘한계 없는 삶’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남들처럼 팔다리는 없지만 거기에 매이지 않고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이들에게 역경을 이겨내며 꿈을 쫓으라고 도전하고 있다.” 사지가 없이 태어 난 그를 보고 부모조차도 “왜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우리에게 주셨는지 모르겠다”고 절망했다지만, 그는 15살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후, “장애는 나의 축복”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온전한 믿음이 회복되면 그 어떤 절망도 희망이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지선아 사랑해”를 쓴 이지선 양은 어떻습니까? 이화여자대학교를 갓 졸업한, 너무나 예뻤던 그녀가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끔찍한 모습으로 변했을 때, 그녀가 맞닥뜨렸을 절망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아마도 보통 사람이라면 모두 자살이라도 하고 말았을 그 절망을, 그녀는 온전한 믿음으로 이겨내고, 오늘날 얼마나 많은 감동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주며 살고 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그 어떤 절망도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시인 박진석 씨를 아십니까? 언젠가 SBS 휴먼드라마에 소개되었던, 돌이 되어가는 시인 박진석 씨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믿음이 왜 희망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부갑상선 기능 항진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란 긴 이름의 희귀병에 걸린 사람입니다. 칼슘이 몸 안에서 과다 생성되어 축적됨으로 온몸이 석회처럼 굳어 버리는 병입니다.
박진석 시인은 여덟 살에 다리를 절기 시작하였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리에서 누어 지금까지 온 몸이 굳어 죽어가는 육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하였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희망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된 그는 자기와 같이 절망과 맞닥뜨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작가가 되는 꿈을 꿉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워서 독학으로 영어와 한문을 배웁니다. 그리고 한손에는 볼펜을 잡고, 또 한손으로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30개월 만에 원고 800장의 고통의 이야기를 탈고합니다. 그 책제목이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입니다.
그 책을 보면, 박진식 씨의 인생이 왜 감동의 휴먼 드라마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감동의 드라마는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그 지독한 고통과 대결하면서 마침내 욥의 믿음을 갖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기 때문에, 누가 봐도 불가능한 것을 꿈꾸게 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냅니다. 그렇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짜 믿음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미래를 볼 수 있는 비전을 갖게 합니다. 비전이 무엇입니까? 보는 것 아닙니까?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비전의 사람들은 남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을 담대히 할 수 있습니다. 비전에 따라, 보는 바를 따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니까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은 보이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의 눈으로 그 약속의 땅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절망의 땅을 과감히 떠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비전이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노아에게 홍수는 보이지 않는 미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홍수를 믿음으로 보고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노아의 믿음의 눈에는 온 세상이 물에 잠기는 모습이 보였고,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방주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무너트린 일은 어떻습니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성이라는 존재는 무너질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런 성을 뱅뱅 돌면 무너진다고요?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믿지 않는 백성들을 이끌고 여리고성을 돌았습니다. 어떻게 여호수아는 그 바보들의 행진을 할 수 있었습니까?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눈에는 무너진 여리고성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
미국 플로리다에 가면 디즈니월드가 있습니다. 그 디즈니월드의 개막식에서 월트 디즈니의 부인이 한 말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원래 월트 디즈니는 그의 꿈이었던 어린이의 놀이동산 디즈니랜드를 LA근교에 건설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LA에서 겪었던 시행착오의 경험을 살려, 좀 더 넓은 곳에서, 좀 더 과학적이고, 좀 더 자연친화적인 놀이동산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플로리다 디즈니월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열심히 그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그렇게 꿈꾸었던 디즈니월드가 오픈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디즈니 월드 개막식에서 유명한 인사 한분이 축사를 하며 “오늘 월트 디즈니씨가 이 광경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간 것이 안타깝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등단한 미망인이 이런 유명한 답사를 했습니다. "조금 전에 축사를 하신분이 제 남편에 대한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수정할 것이 있습니다. 그분이 제 남편이 오늘 이 개막식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제 남편은 오늘 이 동산이 열리는 것을 보면서 일을 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보았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희망사항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지하다면 믿음은 반드시 구체적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인 것입니다. 여기서 증거라는 말은 법적인 효력이 있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심증이 아니라 구체적인 물증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은 구체적으로 좋은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믿음으로 후손들에게 자기가 죽은 후 시온의 땅으로 떠나라고 유언하였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믿음대로 되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어떠했습니까? 당시 태어나는 모든 아들들이 나일강에 던져지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 모세를 목숨을 걸고 기르기로 작정합니다. 그들의 아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역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성공적으로 인도해내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성경은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었던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의 능력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능력을 보여줄 차례가 되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아이돌을 숭배하는 헛된 믿음을 집어던지고 진정한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돌의 굿판을 걷어치우고 하나님만을 붙드는 온전한 믿음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믿음의 선배들이 살았던 세대와 비교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아이돌을 숭배하는 이 세대의 상황 속에서 온전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 오히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의 신념이 우리의 믿음보다 더 강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믿음은 신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워가 강력합니다. 믿음과 신념은 그 출발의 근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신념과 하나님의 믿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신념은 출발의 근거가 인간 자신이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입니까? 무한의 능력, 가름할 수 없는 파워가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이 거대한 세상을 만들고, 또 이끌어 가고 있는 파워를 가진 하나님 말씀, 그 말씀에 근거한 믿음과 인간 자신에 근거한 신념이 비교나 됩니까?
인간의 신념은 아무리 강해도 절망에 굴복하기 쉽지만, 믿음은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의 신념은 잘못된 고집이나 아집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 말씀의 믿음은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틀릴 수 없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신념은 시작이 다른 만큼 결과도 확연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여러분, 아이돌을 숭배하는 것도 신념이라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이 시대는 그렇게 아이돌의 굿판이 난무하는 맘몬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이런 시대라고 할지라도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멋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매일 나와, 우리의 믿음을 회복하고 강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말씀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매일 듣지 않으면, 아이돌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나도 모르게 휩쓸려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이돌의 굿판을 걷어치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2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참아내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기 위해 참아내신 게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아이돌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참아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참아낸 고통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이 씌웠고, 살점이 너덜거리는 몸뚱이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는 손바닥에 대못이 박혔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린 예수님의 옆구리에 창이 꽂혀 모든 피와 물이 다 쏟아져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참아낸 수치는 또 어떤 것이었습니까? 사람들이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네가 왕이라면 스스로 구원해보라는 조소하고 비아냥댔습니다. 우리 주님,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모든 옷을 다 벗겼습니다. 우리 주님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발가벗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참아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지금 여러분들께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람의 소리가 아닌 여러분들의 주인 되시는 그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그분은 여러분들의 죄와 절망을 십자가에서 대신하여 죽으시고, 여러분들의 새 삶과 희망을 위해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여러분,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그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의 인도를 받으시고,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행동을 시작해 보십시오. 그러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여러분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이돌의 굿판을 걷어치우고 이 시대에서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멋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드라빔을 훔쳤던 라헬과 같은 믿음을 벗어던지고, 아이돌의 굿판을 걷어치우는 온전한 믿음이 회복되는 저와 여러분의 2013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첫댓글 아멘,아멘....
설교자에게 있어서 설교는 상인이 가게에 진열해 둔 상품과 같다 할 수 있는데 "닥치고 안식" "아이들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 등등의 제목은 자극적이고 패기와 시선함이 느껴집니다. 본문의 느낌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제목과 최초의 5분 안에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도입부를 설정하려고 의도한듯하여 묘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이돌의 굿판..." 이라는 제목을 위해 채용된듯한 느낌, 결국 결론이 "믿음 생활의 격려"라는 일반론으로 흘러간 듯하여 조금은 아쉬움! 혹자는 선포된 설교에 토의가 필요한가라고 할지 모르지만 문서로 공개된 설교문은 토의를 피할 수 없음을 이해 바랍니다.
"설교가 토의의 대상이 아니라면 더욱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토의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까" 라는 얘기도 있음.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 올라오는 필로의 설교는 예닮 면민들이 단순하게 "은혜 받았습니다" 라는 의례적인 인사만이 아니라 어느 부분이 은혜스러웠는지 아니면 어느 부분은 이해가 잘 안된다든지 하는 의견개진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건강한 교회, 좋은 설교자를 위한 거룩한 작업일 수가 있습니다. 전 아예 토의의 대상이 될 자신이 없기로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매일 나와, 우리의 믿음을 회복하고 강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말씀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매일 듣지 않으면, 아이돌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나도 모르게 휩쓸려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이돌의 굿판을 걷어치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가 말씀의 중심이지요?여기에 아이돌 이야기는 빠져도 될 것 같아요..오히려 어색하기도 하고요..운동을 열심히한 김연아 박태환..노래열심히한 연예인들과..사업 열심히한
정확히 설교의 핵심을 짚어주셔서 감솨~~, 아이돌이 판치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예수님만 바라보라!!
필로가 말하고잡은 아이돌의 대표적인 것은 맘몬의 세상의 돈, 그리고 권력과 명예 임돠...
김연아, 소녀시대는 요즘 아이들에게 그런 것(아이돌)을 상징하는 비유로 사용한 것이고요...
디즈니가 다른 의미로의 예가 되는게 쫌 그래요. 훌륭한 ... 과학자..스포츠인..정치가..사업가.. 모두 사회에 필요한 분들이고 그것을 목표로 노력하는게 나쁜일은 아닌 것 같아요. 과하다면...무엇이던 문제가 되겠지요.. 있자나요 필로님 좋아하시는 말....이또한 지나가리니~~~ 히히히 설교말씀에 은혜 받으면 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가 감사해 평소 소신인데요... 옹이님 말씀도 있고 처음 시작하시는 필로님에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하면 도움이 될수도 있겠다 싶어 올렸어요......근데요 전..김연아 도 좋아하지 않고..아이돌들 이름도 모르고 그래요.. 김연아 아버지를 개인적으로 아는데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예화는 예화일뿐 큰 의미를 두지 않으셔도 좋을 듯....
믿음은 비전을 갖게 한다는 설명을 월트 디즈니의 예화로 쉽게 설명하고자 했던 설교자의 의도가 엿보입니다.^^;
다고 했더니...흐흐 살짝 삐치던데요?? 히히 복받으세요~~
사랑......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핵심인 거 같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