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맥아더의 역사적 인천상륙, 중공군 참전도 막았더라면…
업데이트 2023.09.01
인천 ‘새우섬(하도·소무의도)’의 영욕
김정탁 노장사상가
인천국제공항을 지나 조금 가다가 왼쪽으로 빠지면 무의도로 향한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무의도에 쉽게 간다. 이 다리를 건너서 무의도를 가로질러 끝으로 가면 소무의도를 만나는데 원래 이름은 하도(鰕島), 즉 새우섬이다.
이 섬은 아주 작아 걸어서 한 시간이면 일주한다. 그리고 이 섬 정상에는 하도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여기서 전면을 바라보면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이 바다에 70여 척의 군함이 집결해 4척의 순양함과 8척의 구축함 함포에서 45분간 2845발의 포탄이 발사되면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장면을 하도정에서 바라봤다면 아마도 장관이었다.
6·25 ‘격랑의 현장’ 한눈에 들어와
45분간 포탄 2845발 쏟아진 그곳
“중공 참전 안 할 것” 무리한 북진
정주~흥남라인 지켰으면 어땠을까
‘인천 성공’에 자신감 넘친 맥아더
지도자는 길게 보는 안목 갖춰야
맥아더, 서울 탈환에 오랜 시간
인천시 소무의도(하도) 섬카페에서 바라본 팔미도 풍경. 팔미도 뒤로 월미도에 있는 건물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 유재성, 김정탁]
인천상륙작전은 어려운 확률을 뚫고 이뤄낸 기적적인 군사작전이다. 맥아더 참모장 앨먼드(E Almond) 소장이 작전을 준비했어도, 이를 기획한 맥아더의 천재성이 잘 드러난다. 맥킨리 함정 위에서 맥아더가 참모들에게 둘러싸여 작전을 지시하는 유명한 사진에서 맥아더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앨몬드다. 그는 3개월 후 10군단장으로서 흥남철수작전도 지휘했는데, 그의 승인으로 수많은 피난민이 미군 함정에 올라타 남한에 올 수 있었다. 그런 그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들과 사위의 전사통보를 같은 날 받은 슬픈 사연의 주인공이다.
인천상륙작전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후 맥아더가 지휘한 한국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먼저 맥아더는 서울 탈환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한양에 올라오는 시간만큼 오래 걸렸는데 북한군 저항이 그만큼 심해서다.
이럴 때는 서울을 우회해 외곽에서 북한군을 차단한 뒤 동쪽으로 즉시 이동해 낙동강 전선에서 올라오는 아군과 빨리 합류하는 게 정석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북한군이 고립돼 전쟁을 쉽게 끝낼 수 있다. 그러니 서울 탈환은 상륙작전의 첫 번째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서울 탈환에 집착해 북한군이 북으로 빠져나갈 시간을 벌어주었다.
원산상륙작전, 의욕과 오판
소무의도에서 바라본 인천 앞바다와 팔미도. [사진 유재성, 김정탁]
또 맥아더는 원산에서 다른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그래서 인천에 막 상륙한 10군단을 다시 배에 태워 동해로 이동시켰는데 거리만도 1400㎞였다. 이런 무리수에도 원산 앞바다 기뢰를 제거하느라 상륙작전이 계속 지연되었다. 그 사이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던 국군이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해 상륙작전이 필요 없어졌다. 10군단은 그로부터 2주 후인 10월 25일에야 원산에 상륙했다. 애초부터 원산상륙작전을 계획하지 않았으면 합동작전이 최소한 2주 먼저 전개돼 평안도 일대를 충분히 장악할 수 있었다. 낭림산맥이란 거대한 장벽을 어떻게 극복했을지 모르지만, 당시 2주의 시간은 매우 중요했다.
소무의도 정상에 있는 하도정. [사진 유재성, 김정탁]
게다가 맥아더는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으로 진격하면 중공군이 참전할 거라는 중국 측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했다. 이 경고를 외교적 협박으로 봐서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기세등등해진 맥아더를 미 정부 내에서 통제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미 합참이 미군을 중국 접경지대로 진격하지 말라고 뒤늦게 지시했어도 맥아더는 압록강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웨이크섬으로 날아갔는데 중공군 참전이 없을 거라는 그의 주장만 되풀이해 들었다. 그때 중공군은 30개 사단 규모인 30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서 이미 북한 땅에 들어와 있었다.
소무의도 정상에 있는 하도정의 정자 편액. [사진 김정탁]
당시 중국 수뇌부는 한국전 참전을 내키지 않았다. 대륙을 통일해 정부를 수립한 지 1년도 안 된 데다 세계 최강인 미군과 싸움을 피하고 싶어서다. 중공군 최고 전략가인 린뱌오(林彪)가 신병을 이유로 모스크바에 간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런데도 중공군 파병이 이루어진 건 압록강을 경계로 미군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다. 맥아더가 웨이크섬에서 트루먼에게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 지 정확히 10일 후 미군은 평북 운산리에서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공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추수감사절 이전에 한국전을 끝내겠다는 맥아더의 과욕이 이런 참사를 빚었다.
넉 달 만에 다시 빼앗긴 서울
맥킨리함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유엔군 수뇌부. 망원경을 들고 앉아 있는 맥아더 장군과 그 오른쪽의 앨먼드 소장. [사진 위키피디아]
중공군의 기습으로 아군은 서둘러 청천강까지 후퇴했는데 맥아더는 한 달 후 다시 북진을 명령했다. 이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한국전을 끝내고 싶어서였는데 이 명령은 재앙에 가까운 대실패로 끝났다. 서부전선에서 유엔군 7개 연대가 무너지고, 미 2사단은 ‘인디언 태형’으로 와해하였다. 이 패배는 미 육군 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로 기록된다.
동부전선에서도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에서 완전히 포위돼 사상자 3000여 명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운산리에서 중공군의 기습을 처음 받았을 때 북진을 멈춰야 했다. 미 8군 사령관 워커도 같은 생각이었으나 맥아더는 중공군을 소수라고 여겨 판단을 그르쳤다.
인천 앞바다에 상륙작전을 위해 집결해 있는 연합군 함정들. [사진 위키피디아]
중공군이 전선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자 유엔군 방어선은 형편없이 무너졌다. 그래서 서울을 탈환한 지 4개월도 안 돼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다면 운산리에서 미군이 첫 패배를 당했을 때 크리스마스 공세 대신 정주(청천강 입구)~흥남에 방어선을 쳤어야 했다. 그러면 아군은 산악지대 깊숙한 곳으로 유인되는 중공군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아 패배하지 않았다.
또 미군의 막강한 화력으로 이 방어선을 충분히 막아냈다. 워커도 도쿄로 급히 날아가 이곳에 방어선을 치면 중공군 남하를 저지할 수 있다고 건의했는데 맥아더는 거부했다. 인천상륙작전이란 성공신화에 매몰돼선지 맥아더 판단이 흐려졌다.
저우언라이~마오쩌둥 비밀문서
무의도와 소무의도를 연결하는 인도교. [사진 인천중구청]
유엔군 목표는 분쟁 종식이므로 침략군을 38선 밖으로 몰아내면 일단 임무를 완수한 셈이다. 그러니 38선을 넘더라도 적당한 곳에서 진격을 멈춰야 했다. 그곳이 정주~흥남 선이면 아주 바람직했다. 이 선과 압록강 사이에 완충지대가 형성돼 중공군 참전의 명분이 사라져서다.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보낸 마오쩌둥(毛澤東)의 비밀 전보문에도 유엔군이 청천강 이북을 공격하지 않으면 중공군도 참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또 이 선은 미 합참이 맥아더의 북진을 우려해 멈추길 권유했던 선이고, 영국 정부도 유엔을 통해 제안했던 선이다.
맥아더가 정주~흥남 선에서 유엔군의 진격을 멈췄다면 지금쯤 한반도 운명도 크게 달라졌다. 일단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았을 테니 전선은 정주~흥남 선에서 고착되었다. 또 미군 폭격으로 평북 강계의 한 동굴에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던 김일성은 자신의 군대를 제대로 통솔할 수 없어 사실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러면 북한 정부는 평안도 일부와 함경도에서 힘을 발휘하는 조그만 정부로 쪼그라들게 된다. 이런 상태에선 소련과 중국도 전쟁을 도발한 김일성을 계속 도울 순 없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런 정부가 과연 지금까지 존속했겠는가.
장자가 말하는 ‘대붕의 지혜’
신재민 기자
물론 맥아더 판단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는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싶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는데 이는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 생각과 일치했다. 게다가 한국전이 발발하기 1년 전에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가 본토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대만으로 쫓겨났기에 자유세계 진영에선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이 그 어느 때보다 컸다. 그렇더라도 맥아더는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가 지닌 공자의 지혜를 소홀히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더욱이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려 했던 맥아더 생각은 시간이 흐르면서 지나친 거로 판명이 났다. 그렇다면 정주~흥남 선에서 진격을 멈췄다면 당시로선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쯤은 맥아더가 한반도에서 원했던 결과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러니 지도자는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장기적 안목을 지녀야 한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대붕(大鵬)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맥아더도 전함 맥킨리가 아닌 영종도 새우섬에서 마음을 비우고 대붕의 심정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바라봤다면 과유불급의 지혜를 실천하지 않았을까 하고 안타까워서 뒤늦게나마 상상해 본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
y****
2023.09.02 23:00
기사처럼 맥아더 장군이 정주~흥남 선 정도에서 유엔군의 진격을 멈췄다면 통일신라 시대 대동강 이남까지 국경을 넓혔던 것처럼 현재 대한민국의 국경도 삼팔선보다 훨씬 이북 쪽으로 국경을 넓힐 수 있었을 텐데.
hsy5****
2023.09.02 20:20
일리 있네. 인천상륙작전의 큰 성공만큼이나 중공군의 침입을 간과한 잘못도 크다고 본다. 하지만 그에 대한 벌은 미군이 충분히 받았으니 더이상 논할 필요는 없으리라. 역사에 가정이 무에 의미 있으랴...
답글 작성
좋아요
5
화나요
1
댓글 옵션 버튼 펼치기/닫기
hsha****
2023.09.02 10:00
모든 정보가 다 알려진 지금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우를 저지르고 있다. 필자의 생각은 아마도 3.8선을 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에 무게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한만 국경까지 진격하는 대신 정주-흥남선을 지켰으면 더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은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이미 중공군은 북한땅에 진주했는데 그대로 머물다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혹 미중 간의 군사적 충돌이 그 선에서 멈춰졌더라도 그들이 점령한 땅은 더 이상 한민족의 땅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민족사에 작은 영토마저 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을 것이다. 역사를 가정에 의존해서 함부로 해석을 바꾸어서는 안된다.
답글 작성
좋아요
9
화나요
5
댓글 옵션 버튼 펼치기/닫기
hslu****
2023.09.02 02:12
글쓴이의 주장이 일리가 있지만 하나 간과하는 것은 그 정주 - 흥남선에서 남북이 갈라졌다면 김일성은 그 땅을 소련이나 중공에 충분히 갖다바쳤을 인간이란 거다. 중공이 참전했다고 만주는 물론 우리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마저 절반을 준 놈이다.
답글 작성
좋아요
7
화나요
1
댓글 옵션 버튼 펼치기/닫기
same****
2023.09.01 22:03
서울을 우회해 북한군을 차단한다. 어디서 어떻게 우회하나? 동해안은 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상륙작전하기가 불가하다. 국군은 낙동강에 배수진을 치고 전투를 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나마 북진을 하였기에 구름떼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을 저지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의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오히려 중공군을 격파하며 기습하는 효과도 있었다. 북쪽 땅에서 적당한 선에서 경계를 하면 중공군의 집결력을 높여 더욱 감당하기가 어려웠고 국군, 미군, 유엔군의 희생자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시체를 넘고 넘어 개미떼처럼 밀려오는 인해전술의 중공군을 어떻게 방어하랴? 다행히 한반도는 산이 많아서 그나마 방어를 하며 후퇴를 한 것이었다. 원자핵 포탄을 중국에다 터뜨리면 소련이 개입하게 되고 그러면 3차 세계대전으로 갈 수가 있었기에, 결국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투는 생명을 걸고 싸우는 것이라 이론이나 게임처럼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상황은 급변하고
답글 작성
좋아요
7
화나요
2
댓글 옵션 버튼 펼치기/닫기
The JoongAng
저고리 동정 없애고 속치마를 겉옷으로…젊어진 한복
저고리 동정 없애고 속치마를 겉옷으로…젊어진 한복
xkwh****
2023.09.01 16:28
맥아더 오만하고 거만한 사람이었죠. 미국 극우/인종차별주의였고, 중국군 우습게 보았다가 패배하고 중국에 핵 미사일 날리고, 대만군 투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죠. 중국까지 들어가서 해방시키려고 했을 것이고 그러면 소련이 참전하여 3차 대전이 날거 같으니 트루먼 대통령이 해임시켰죠. 아마 그랬을 거고요. 미국에서는 평이 좋지 않은 데, 미국/한국에서는 호평을 받고 있으니 아이러니 하네요.
답글 작성
좋아요
6
화나요
17
댓글 옵션 버튼 펼치기/닫기
rhkd****
2023.09.01 16:14
그래도 통일을 목전에 두었었다ㆍ우리도 낙동강까지 쫗겨가지 않았나? 그나마 한강방어전으로 유엔군이 올 시간을 벌었다ㆍ
답글 작성
좋아요
7
화나요
1
댓글 옵션 버튼 펼치기/닫기
seah****
2023.09.01 16:00
김정탁 작가는 전쟁전략전문가도 아니면서 마치 자신이 6.25 한국전쟁 전쟁전문가인양 맥아더 장군이 수많은 실책을 저지른 것처럼 한국전쟁의 영웅인 맥아더장군을 폄하하고 격하시켰다. 맥아더야말로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은 자유 대한민국의 은인이고 최고의 전쟁 전략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답글 작성
좋아요
16
화나요
2
댓글 옵션 버튼 펼치기/닫기
cnd8****
2023.09.01 12:22
옜날 이야기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떠들게 만드는 정권이 문제 입니다. 핵 전쟁을 일으켜서 남북한이 쑥대밭 되어서 1950년대로 후퇴하여 아프리카 처럼 내전이나 치르려는 정치인의 안목을 어떻게 뭐라 하지 안을 수 있겠습니까?
rr72****
2023.09.01 10:46
이 분야 전쟁역사 관련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지만1950년 10월 당시 북한군 병력은 고작 3만, 한미 연합군은 30만이 넘었습니다.그런 상황에서 중공군이 올지 모르니 일단 정지라고 외친다면 그것이 오히려 해임사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지나고 나서는 무슨말이든 쉽게 할 수 있는 법. 맥아더 장군의 일화하나가 생각납니다. 맥아더의 사령부 앞에 미군 부모들이 몰려나와 한국이 무척 춥다는데 후방으로 빼달라고 시위를 했습니다. 그러자 맥아더가 나와서 하는 말.여러분의 아들들은 대한민국의 통일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좋습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 당신의 아들들을 모두 최전방으로 보내드리죠!아마 세계역사상 다른 나라 사람이 이 정도로 남의 나라에 충성을 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https://youtu.be/5ksHNvFPPVs (맥아더가 대한민국에 우호적이었던 이유)
The JoongAng
라스베가스 아닌 '와수베가스' 아시나요? 3대 군세권은 지금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라스베가스 아닌 '와수베가스' 아시나요? 3대 군세권은 지금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
choi****
2023.09.01 09:40
김정탁 [노장 사상가]의 이 글은 ... 망상의 [거짓말]에 ... 자신의 [좌파]적 주장을 미화한 ... 생계형 [소설] 수준이다 ... 이런 허접한 글은 ... 중앙일보 [오피니언]에 적합치 않다 !
seah****
2023.09.01 09:22
중공군의 6.25 한국전쟁 참전은, 모택동과 주은래의 비밀전보문을 인용하며 당초 참전 의사가 없었다고 김정탁 작가는 주장하지만, 송재윤 교수의 책 "슬픈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글방, 202년 출간) 제9장 '마오의 도박, 미국과의 전쟁'(pp.120-136)을 읽어보면, 김일성이 6.25전쟁 도발 전에 지원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가서 모택동을 만났을 때 이미 중공군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전쟁을 벌일 각오를 하고 있었지요. 중공군의 참전 이유 중에는 장개석의 국민당과의 국공내전을 치루는 동안 지나치게 불어난 중공군의 숫자를 한국전쟁을 통해 줄인다는 속셈도 있었지요.
youn****
2023.09.01 08:11
노무현 대통령때 맥아더때문에 분단국되었다고 동상부시려 달겨들었던자 들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니 앞으로 2번만 그런 대통령이 나오면 영낙없이 베트남꼴 되지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나 ? 강기정은 해묵은 이념타령이라 변명하는데 본인자신이 이념투쟁하고있다는것이 내눈에만 보이는것인가 ? 우리대한민국은 통일되기전까지는 어쩔수없이 이념전쟁은 끝나지않고 끝낼수도 없다는 처지를 모른다면 대한민국은 존속할수가없다
cwgi****
2023.09.01 07:55
필자께서 언급하신말씀가운데 지나친 과욕에 대하여 언뜻 이런 단어가 떠오르네요 과유불급(過猶不及)전장에서 이렇게 비유한것이 과연 옯바른 것인지 자못 의아하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일상에서 사물의 정도가 지나치면 오히려 부족함보다 못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본능에서 발로된 자아의 정중동이 스스로 자제하기란 쉽지는 않은것 같아요 지금의 필자께서 인천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른 무의도의 사진과함께 멋진 풍경 올려주셔서 감사드리며 기회가 닿는대로 가족과함께 드라이브 여행을 다녀오도록 하겠슴니다
yong****
2023.09.01 06:56
이런 내용은 73년이 經過한 歷史的 평가일 뿐입니다....두고두고 아쉬움은 남지만.....
The JoongAng
인천에 다시 유커가 몰려온다
인천에 다시 유커가 몰려온다
uoop****
2023.09.01 04:50
대한민국은, 6.25전쟁으로 불과 3일 만에 북한군에 의해 서울을 점령받았고, 9월에는 국토의 90%를 북한에 점령받았다. 맥아더는 일본의 점령 정책을 비군사화에서 전환해 일본에서 재군비를 실시했다. 1950년 12월 24일,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26발의 원자폭탄을 사용할 허가를 요구했다. 1951년 0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을 포함한 모든 직무에서 해임했다. 적어도 미군이 참전하지 않고, 유엔군이 편성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1950년 국제사회에서 소멸하고 있었다.
------------------------------------------------------------------------------------------
cnd8****2023.09.01 12:22
옜날 이야기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떠들게 만드는 정권이 문제 입니다. 핵 전쟁을 일으켜서 남북한이 쑥대밭 되어서 1950년대로 후퇴하여 아프리카 처럼 내전이나 치르려는 정치인의 안목을 어떻게 뭐라 하지 안을 수 있겠습니까?
uoop****2023.09.01 04:50
대한민국은, 6.25전쟁으로 불과 3일 만에 북한군에 의해 서울을 점령받았고, 9월에는 국토의 90%를 북한에 점령받았다. 맥아더는 일본의 점령 정책을 비군사화에서 전환해 일본에서 재군비를 실시했다. 1950년 12월 24일,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26발의 원자폭탄을 사용할 허가를 요구했다. 1951년 04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을 포함한 모든 직무에서 해임했다. 적어도 미군이 참전하지 않고, 유엔군이 편성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1950년 국제사회에서 소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