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하늘
김 용 구
겨울 햇빛은 여간 고맙지 않다. 우선 따뜻해서 좋다. 추위에 만물이 움츠리게 되지만 햇볕이 나면 겨울 추위가 두렵지 않다. 일기예보는 아침에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어 꽤 추울 거라 하였는데 고맙게도 이른 아침부터 해가 나고 구름이 걷혔다. 그래서 춥기는 하여도 햇볕을 받은 나목림이 환성이나 지를 듯 상기되어 보인다.
겨울 해는 유난히 눈이 부시어 세상을 환하게 만든다. 이 좋은 일기에 높은 낙엽송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있는 까치는 일찌감치 출타한 모양이다. 보이지도 않고 조용하다. 겨울날에 구름이 끼어보라. 해가 가려져 세상이 우중충하고, 나부터도 몸이 움츠려진다.
햇빛이 반짝이는 겨울 아침은 그것만으로 기쁨의 첫 이유가 된다. 해는 날마다 새롭다고 하는데, 정말로 이렇게 아침해가 나의 기분을 돋궈주는구나. 오늘도 산책에 나가야겠다. 나는 가벼운 산행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사실은 산행이라 할 것까지는 못되고 내가 노상 오르는 데로 가는 것이다. 살고 있는 동네에서 멀지 않은 관악산이다. 이 산도 작다고는 할 수 없고, 사방으로 오르는 길목이 많은 줄 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은 낙성대 쪽으로 들어가는 조용한 산길이다. 나는 십 년쯤이나 이리 다녔다. 그러니 내가 가는 산길이란 다름아닌 이 길이다.
처음 이 오솔길을 안 건 주말 산행 패와 어울려서였다. 지금 그들은 다른 산을 찾아다닌다. 나는 여기가 좋아서 내내 이 길로만 다니고 있다. 이따금, 정말 이따금 벗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혼자서 간다. 그것이 익숙해졌고, 주말이면 이 산길을 걷는 게 버릇이 되었다.
해가 바뀐다고 해서 이 관행이 바뀔 것 같지 않다. 여전히 나는 이 산길을 오를 것이다. 산길은 내 사색의 오솔길이기도 하다. 지난 초겨울에는 마침 사상가 니체의 탄생 일백오십 년이기도 하여 한국에서 니체의 가곡을 연주하는 음악축전이 베풀어졌다. 니체 작곡발표회란 어디서나 드문 일이고 이 땅에서는 전례가 없었다.
그는 산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사람. 젊은 니체는 산의 나라 스위스의 대학강단에서 고문학을 강의하였는데 병약으로 그만두고 이후 산간에서 많이 정양을 하였다. 그의 주저에서 주인공이 산에 올라 산꼭대기에서 말하고 말을 다하고는 하산하는 줄거리를 적은 건 다 아는 바다. 산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에게 니체는 적어도 산과의 인연이라는 매력을 지닌다.
중연의 니체가 새해를 맞아 쓴 말이 있다. “아직 나는 살아있고, 아직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아직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내건 사람, 그러니 그는 무엇보다 사상가라 하는 게 어울린다. 그렇게 쓴 이후 과연 니체는 전기보다 후기에 더 풍성한 사상의 결실을 거뒀고, 이십 세기가 거반 다 가도록 그의 문자와 사상은 영감의 샘으로 마르지 않고 있다. 소년시대 이래 나도 니체의 책을 놓지 않고 있다.
생각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이 깊이 관계는 되어도 같은 건 아니다. 사람이 생각하며 살지만 반드시 글을 쓰는 건 아니라는 것과 같다. 할 말을 준비하며 생각하는 사람도 반드시 글로 쓰지 않는다. 생각과 글은 분리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둘이 같은 건 아니다. 생각하는 이의 높은 형태가 사상가인데, 사상이 말과 글로 유체화 되어야 비로소 전달되고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다. 니체 사상도 문자로 유체화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읽고 인식하고 감동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사상일 뿐 아니라 문필가인데 독어를 구사하는 최고의 산문가의 하나로 친다.
우리말의 산문양식에 수필이 있다. 이 문학양식은 전통도 깊고 대대로 작품도 많았다. 현대는 왕성한 수필시대를 가져왔다. 다른 문학양식도 그렇지만, 어떤 수필이 좋고 길이 남을 것이냐는 속단할 것이 아니다. 외국에서도 문학작품이 명작으로 걸러지는 데는 흔히 몇 십 년, 아니 일세기 이상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하고, 오늘의 작가와 수필인에게는 어떤 작품을 쓸 것이냐가 중요하다. 바꿔 말하면, 어떤 문필가냐는 물음이 된다. 이즘에는 문학이 자기도취와 자기이익의 표현이어서는 안 되겠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표현해 보겠다는 작가의 말도 들린다. 이런 것이 문학의 새 흐름인지 여부는 잘 모르되 나는 공감이 간다. 그래서 새해에 내가 쓰는 글에는 그런 방향을 잡아야겠다고 느끼고 있다.
수필에 대하여는 자기탐구의 글이라든가, 또는 산문으로 쓰는 서정시라는 말이 있긴 하다. 나도 그런 흐름의 굴줄을 써왔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 수필에 좋은 글이 있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수필은 그렇게만 써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기는 사회 흐름인지 소설에서 사소설이 성행하는 곳도 있다.
아무튼 문학, 그 가운데서도 수필이 자기몰두나 표현이 된다면 그것도 타성이나 병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반드시 문학만이 아니다. 지금 내 귓전에선 어떤 예술가의 목소리가 울린다. “성악가는 청중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꿈을 노래하는 것이다.” 나에서 남으로, 타자로, 인간으로 눈빛이 가야 한다는 말이다.
산길을 오르다가 나는 널찍한 큰 바위에 앉아서 떠오르는 상을 종이조각에 긁적였다. 그것은 오솔길에서 주운 생각이었다. 후련한 기분이 되어 나는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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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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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
모든 예술 중에서 글쓰기가
가장 간단한 도구로 할 수 있는 것.
가볍게 자유롭게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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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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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