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臨終)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부처의 금언(金言)이기에 틀림없는 왕생(往生)이라고 자타(自他)가
생각하나이다.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부처는 후회(後悔)하시어 미현진실(未顯眞實)·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
이라고·설(說)하신 것은·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을 니치렌(日蓮)이 말하니 헛된 일이고 거짓이라고 일본국(日本國)에서 노(怒)여움을 샀소이다·
뿐만 아니라 부처의 소승경(小乘經)에는 시방(十方)에 부처가 없고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불성(佛性)이 없다고·설(說)해졌지만·
대승경(大乘經)에는 시방(十方)에 부처가 계시며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불성(佛性)이 있다고·설(說)해졌으니·
그 누가 소승경(小乘經)을 받아 들이겠느뇨, 모두 대승경(大乘經)을
믿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불가사의(不可
思議)한 위목(違目)들이 있소이다.
법화경(法華經)은 석가불(釋迦佛
)·이금당(已今當)의 경(經)들을 모두 후회(後悔)하고 타파(打破)하여
·이 경(經)만이 진실(眞實)이니라고 설(說)하셨기 때문에·제자(弟子) 등(等)은 받아 들이지 않았느니라.
이 때·다보불(多寶佛)·증명(證明)을 가(加)하고 시방(十方)의 제불(諸佛)·혀를 범천(梵天)에 붙이시었다.
그리고서 다보불(多寶佛)은 문(門)을 닫고 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은 본토(本土)로·돌아가신 후(後)는
어떠한 경(經)들이 있어서 법화경(法華經)을 석가불(釋迦佛)이 타파
(打破)하신다 할지라도·타인(他人)과 협의(協議)한 것이라서·파(破)
하기 어려우니라.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 이후(已後)의 경(經)들·보현경(普賢經)·열반경(涅槃經) 등(等)에는
법화경(法華經)을 칭찬하는 일은 있어도 헐뜯는 일은 없느니라.
우에노전답서(上野殿答書)
어서 1545쪽
젊은날의 일기
1951년 3월 11일 (일) 맑음 –23세-
7시 기상.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교육회관으로 달려갔다.
창가학회의 총회다. 은사 도다 선생님이 건강하게 참석하셨다는 사실은 나의 최대의 기쁨이었다.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선생님을 그늘에서 지켜왔는가. 나는 울고 있다. 나는 기쁘다. 선생님의 사자후에.
〈간효팔번초〉를 인용하셨다. 공부해야 한다.
집합 인원, 수백 명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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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3월 11일 (목) 비 –26세-
하루 종일, 비.
본부에서 오후에 면접. 10명 내외.
개인 지도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선생님, 선배의 지도는 정말 능수능란하다.
그 사람의 고뇌, 그 사람이 구하고자 하는 요점을 잘 간파하여 해명해 준다. 간단한 듯해도 실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도로써 그 사람의 일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6시 어서 교정, 메이와인쇄 ― 교학부원 11명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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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 11일 (금) 맑음 –27세-
아침, 7시 30분발 일본항공을 타고 홋카이도에.
약간 늦어져 11시 30분에 치토세(千歲) 도착.
선생님과 K, T, 나 4명이었다.
삿포르에서 기차를 타고 오타루까지. 현지 도착. 오후 3시, 역 앞에 있는 여관에서 곧바로 작전 협의.
4시 30분, 오타루공회당에 먼저 도착하여 선발 부대와 각종 협의를 했다.
실질적인 지휘는 내가 했다.
미노부 측과 등단 순서, 토론, 질의 등을 협의했다. I씨와 함께.
내 작전대로 모두 결정되어 간다. 흥미진진하다 ―.
아사히가와(旭川), 하코다테(函館), 삿포로, 오타루 등의 학회원도 약 750명, 선발 부대의 지도 · 격려에 힘입어 집결.
7시 정각, 역사적 법론에 들어갔다.
먼저 미노부 측의 사회자, 마쓰이(松井) 씨가 3분간 인사.
강사는,
하세가와 기이치(長谷川義一), 다음에 쓰지 다케히사(辻武壽),
무로즈미 이치묘(室住一妙), 다음에 고다이라 요시헤(小平芳平),
순서로 각 12분씩 자기 종파의 주장을 펼쳤다.
이어서 하세가와, 쓰지, 무로즈미. 고다이라 순으로 각 5분씩 보충 법론.
다음에 질문회. 20분. 강사 4명 중 아무나 지명해서 질문하는 것도 가능.
최후에 대결.
학회 측 강사, 미노부측 강사 각 한 명씩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각 7분간 자유 등단, 특히 급소인 본존론(本尊論), 본불론(本佛論) 등 네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불꽃 튀기는 전투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9시 10분, 모두 종료.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엄연한 학회 측의 승리.
선생님, 대단히 기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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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1일 (금) 비 –32세-
끊임없는 비. 적막함-.
정오에 T사장과 N에서 회식.
하루 종일 본부에 있었다. 하루빨리 대객전 자재를 연구하기 위해 미국, 인도, 타이완으로 가야 한다고 .
다음 세대, 광포의 다음 무대에 살고, 투쟁할 청년들이여.
건재하라, 행복하라.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