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다정이 죽이기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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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knock - please love me
동혁이 가장 깊게 남긴 다정이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재영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말할 수 있다. 수능 전날에 보여준 다정. 가장 사람이 심란할 때 남긴 흔적만큼 오래 기억에 남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 흔적이 너무 깊게 패여 사라지지 않은 흉터로 남아있었다. 죽어도 남아있을 다정. 정말 지독한 다정이었다.
재영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었다.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오빠. 재영 앞에서는 애교덩어리가 되는 오빠. 사회 생활을 할 수나 있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대가리가 온통 꽃밭인 오빠가 있었다. 그는 이름하야 나재민. 그래서 재영은 어릴 적부터 자신이 오빠를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 구실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남자애들이 오빠를 넘어트렸을때 그렇게 화를 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오빠는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해내었다. 공부하는 모습을 통 본적이 없었는데 집에 대학 합격증을 당당히 들고 왔다. 재영은 그것이 합성인지 의심을 했다. 오빠라면 충분히 합성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몇 번이고 들여보고 나서야 그게 찐인 것을 알아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 가긴 하늘의 별 따기랑 유사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재영은 재민이 대단했다. 인서울 대학에 합격해놓고 재영에게 와서 우리 재영이~ 너어무 귀여워~ 를 외치는 바보같은 오빠가 처음으로 대단해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재민이 공부한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그래서 재영은 입시가 힘들었다. 학원 하나 다니지 않고 합격증을 들고 온 오빠와 달리 학원을 몇 개씩 다녀야 겨우 오빠랑 같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살짝 긴장을 놓는 날은 등급이 쭉 밀려내려갔다. 부모님은 무리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마저도 부담으로 다가왔다. 내가 공부를 존나 못해서 저런 소리하는 거야. 낮은 자존감은 자신을 깎아내렸다. 공부가 전부 아니라고 하지만 재영에게는 전부같았다. 성적이 곧 재영이 얼만큼 인생을 열심히 살아왔는지 지표가 되는 것만 같았다.
"수능이 하루 남았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나재영씨!"
"네. 개같습니다."
문제를 채점하던 빨간 색연필을 마이크 삼아 인터뷰를 하는 영지의 장난에 진심으로 답했다. 진짜 개같았다. 동혁이 왜 그렇게 수시에 목숨을 걸었는지 알 거 같았다. 한 번의 수능으로 재영의 인생 등급이 결정된다니. 이만큼 잔인한 것도 없었다. 책상에 올려둔 초콜릿을 씹었다. 수능이 근접해지자 주변 사람들이 초콜릿을 하나씩 보내줬다. 집에 쌓여가는 초콜릿을 보고 재영은 한숨을 쉬었다. 초콜릿의 갯수가 마음에 쌓인 짐의 갯수랑 비슷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해주는 응원도 싫었다. 뭘 안다고 응원을 해주는지도 몰랐다. 힘내세요~ 싫어요~ 삐뚤어지는 마음은 점점 사람을 삐딱하게 만들었다. 뉴스에서 매일 떠드는 수능 이야기도 싫고, 재영을 잘 챙겨주는 오빠 친구들도 다 보기 싫었다. 그냥 이정도에서 인생의 막이 내렸으면 좋겠다. 수능 이후의 인생 제 2막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희극일지, 비극일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극을 끝내도 될 거 같았다.
"바빠?"
"응."
동혁이 공부하는 재영의 방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바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사실 하나도 바쁘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에 집중이 안 되어서 노래 가사나 쓰고 있던 중이었다. Baby 네게 반해버린 내게 왜 이래~ 수능 금지곡이라고 떠드는 노래가사였다. 이 노래를 mp3에 담아놓고 열심히 들었다. 수능을 망치면 노래 탓이나 해야지.
동혁이 재영의 책상을 한 번 스캔하고는 웃었다. 재영이 슬그머니 공책을 가렸다. 동혁이 들어와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래 가사 쓰는거 바쁘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씨. 다 들켰네. 재영은 공책을 탕 소리나게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동혁을 노려보았다. 뭐. 왜. 시비털거면 나가. 나 내일 수능이야. 동혁의 다정을 받아줄 기력이 없었다. 그런 기력이 있으면 몽땅 모아서 내일 써야 했다.
"줄 거 있어."
"뭐? 초콜릿?"
재영은 의자를 돌려 앉았다. 수능 기념이라고 초콜릿을 만들어 왔겠지. 아니면 엿이라도. 화이트데이엔 사탕, 발렌타인데이에는 초콜릿, 빼빼로데이에는 빼빼로. 동혁이 준 달달한 것들이었다. 재영은 손을 뻗었다. 마음에 짐이 하나 생길 시간이었다. 동혁은 약간 망설이다가 손 위에 무언가를 올려다두었다. 초콜릿의 촉감은 아니다. 단단하고 푹신했다.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려보자 손에 들린 건 나무와 털실로 만들어진 작은 인형이었다. 갑자기 놓인 인형에 재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지도 못하는 인형을 왜?
"얘 이름은 이동혁이야."
"오빠라고?"
"응. 얘가 우리 재영이 걱정 다 가져갈 거야."
먹지도 못하는 인형에 이름을 붙였다. 이동혁이라고. 입에 넣고 씹으면 사라지는 초콜릿과 달리 이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재영 앞에 있는 큰 동혁이 아닌 작은 동혁이가 재영을 보고 환히 웃었다. 살짝 실이 풀려 있는 것이 손으로 만든 것 같았다. 이걸 동혁이 만든 거라면 만드는 내내 재영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리 재영이 걱정하지 않게 해주세요. 다정한 기도가 안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다정을 넣었을 거라면 초콜릿이나 주지. 다정을 느끼기도 전에 씹어 넘길텐데 왜 하필 인형이야. 차라리 엿을 줬으면 기분이 덜 엿같았을 거 같았다.
"그니깐 재영이는 내일 너무 걱정하지 마."
수능 본다는 사실이 짜증 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건 기대가 무너질까봐 걱정하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수능에게 느끼는 감정이 짜증이 아닌 걱정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눈가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앞에 서있던 동혁이 당황했다. 울지 말라고 안아 달랬다. 그래서 더 울었다. 울지 말래서 더 울었다. 내일 눈 붓는다고 걱정해서 더 울었다. 너 진짜 싫어. 알아? 왜 수능 전날까지 다정해? 왜 수능 전날까지 날 울려? 접힐만 하면 다시 펴버리는 동혁의 다정이 재영은 싫었다. 너무 싫었다.
"뭐야? 누가 우리 재영이 울렸어!!"
엉엉 재영이가 우는 소리가 닫힌 문밖으로 새어나가자 재영이 수능 도시락을 연구하던 재민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한껏 빡친 모습이었다. 재민은 동혁의 품안에 있는 재영이를 꺼내와 안았다. 열심히 동혁을 째려보면서 말이다. 제노와 인준도 방 안을 살펴봤다. 애 응원하라니깐 울리고 있네. 인준이 고개를 저으며 부엌으로 다시 향했다. 제노는 들어와 아잇, 하고 동혁이 한 대를 때리고 갔다. 등짝을 맞은 동혁이는 재영이 얼굴을 계속 살폈다. 눈이 부어서 내일 문제를 못 읽을까봐가 걱정이었다. 아니다. 차라리 망하면 눈 붓게 한 자기를 탓하라면서 동혁이가 웃었다. 그 말조차 다정해서 싫었다.
작은 동혁을 꼭 쥐고 잔 재영은 작은 동혁을 들고 수능 시험장에 갔다. 가방 가장 아래에 작은 동혁을 두고 시험을 봤다. 국어영역을 조금 망쳤지만, 시간이 없어서 몇 문제 찍었지만 쉬는 시간에 작은 동혁을 쥐고 기도를 했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매 시간마다 작은 동혁을 꼭 쥐었다. 부적이냐고 놀리는 아이들에게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적이었다. 걱정을 덜게 해줄 부적이었다.
부적 덕에 재영은 수능 대박이 났다. 지금까지 본 모의고사보다 훨씬 더 성적이 좋았다. 원하는 대학을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걱정을 하더니 거보라면서 부모님이 좋아하셨다. 재민은 재영을 안고 어화둥둥거렸다. 우리 재영이~ 짱 멋있어~ 재영은 주머니에 넣은 작은 동혁을 툭, 하고 쳤다. 동혁이 다정으로만 만든 작은 동혁이를.
다정이 죽이기
재영은 카페에서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케이크도 두 개, 음료수도 두 개. 거기에 음, 와플도 하나 주세요. 카드가 시원하게 긁히고 재영은 진동벨을 받았다. 혼자 먹을 것은 아니었다. 먹을 것을 좋아했지만 배가 그렇게 큰 건 아니었다. 이건 다 사과를 받아줄 사람에게 바치는 뇌물이었다. 자리로 돌아왔다. 하핫, 웃는 지성이가 맞은편에 있었다.
"이런 거 안 사줘도 된다니깐."
"아냐. 그날 민폐 갑이었을텐데... 내 작은 성의니깐 받아줘."
지성과 술을 먹은 날 취한 재영을 챙기느냐고 지성이가 얼마나 고생했을지 안 봐도 유튜브 각이었다. 간간히 기억나는 술주정들에 얼굴이 붉어졌다. 지금 재영의 머릿속에서 거의 뭐 4k로 재생되고 있었다. 지성을 만나는 것이 뻘쭘했지만 만나서 사과하는 것이 맞았다. 오빠한테 그런 게 예의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다. 재영은 카톡을 보냈다. 내가 보기 싫겠지만 제발 나랑 만나줘. 지성은 웃음 두 개와 함께 알겠다고 보냈다.
"집은 잘 들어갔어?"
"응. 그날 무사히 들어갔더라."
"다행이네. 무사히 들어가서. 걱정 조금 많이 했어."
"근데 나 어떻게 들어갔는지 아니?"
이게 제일 큰 의문이었다. 도대체 재영은 어떻게 집까지 무사히 왔는가. 재민이 아무 말 없는 거 보니 지성이 데려다준 건 아닌 거 같았다. 만약 지성이 데려다줬으면 재민에게 잔소리 폭격 맞았을지도 모른다. 가는 길마다 쫓아와 시끄럽게 굴었을 것이다. 시원하게 찢어진 입이 잔소리하라고 찢어진 것이 아닐텐데 재민은 그 입으로 바쁘게 재영에게 잔소리를 해댔다.
"혹시 내가 누구한테 데리러 오라고 했어?"
"왜? 누구한테 했을 거 같아?"
"....아니. 아냐. 그냥 물어봤어."
지성의 물음에 머리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영을 지배한 사람. 지독한 다정씨. 재영은 동혁이 데려다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다음날 속은 괜찮냐는 문자 하나도 하지 않아 데려다준 줄도 모르게 하는 재영에게만 다정으로 무장한 동혁 때문이었다. 미안함조차 갖지 못하게 아예 막아버린 동혁이었다. 우웅- 진동벨이 울렸다. 지성이 진동벨을 들고 일어섰다. 지성에게 물으면 알 거 같지만 굳이 확인사살 받고 싶지 않았다. 쟁반을 가져온 지성이 가장 맛있다는 케이크를 툭 밀어 재영 앞에 두었다.
그날은 재영은 아직 고등학생이고 동혁은 대학생일 때, 재영이 점점 동혁의 다정에 질식되어 갈 때였다. 밤 늦게까지 학원에서 썩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재영은 하늘에 대고 빌었다. 제발 내일 세상이 망하게 해주세요. 이 개같은 학원 그만 다니고 싶어요. 공부하기 싫어. 검은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달에 속삭였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거 같았다. 발로 작은 돌멩이 하나를 툭 찼다. 톡톡 소리를 내며 돌이 굴렀다.
너 모르는 척 하지 마. 너 알잖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왜 모르는 척 하는건데. 내가 친구 없어서 너보고 데리러 오라고 한 줄 알아? 내가 할일없어서 너보고 영화보러 가자고 한 줄 알아? 너 다 알잖아. 야 말 좀 해. 듣기만 하지 말고. 사람 바보 만드냐?
앙칼진 목소리가 골목길에 울렸다. 누가 들어도 사랑 싸움하는 소리였다. 재영은 골목길에 등을 붙여 섰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건 싸움 구경이지만 세상에서 제일 뻘쭘한 건 싸움에 끼는 것이었다. 좁은 골목에서 저들 사이를 지나갈 용기는 없었다. 저들이 지나갈 때까지, 다 싸울 때까지 여기서 있을 생각이었다. 고개를 살짝 빼꼼 내밀어 그곳을 봤다. 앙칼지던 여자는 퍽퍽 남자를 치기 시작했다. 헉, 대박. 재영은 입을 틀어막았다. 감정이 실린 주먹을 그대로 받아든 남자였다. 지친 여자가 숨을 색색 쉬었지만 노려보는 눈은 거두지 않았다. 남자는 머리를 쓸어넘기고 몸을 살짝 돌렸다. 하 시발. 틀어막힌 입에서 재영은 욕을 내뱉었다. 맞고 있던 사람은 동혁이었다.
'나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거든? 네가 나 좋아한 거 알아. 그래서 안 받아줬잖아. 데리러 오라고 했을 때 안 간다고 했고, 영화보러 가자고 할 때도 싫다고 했는데.'
'그게 문제라고.... 나는 너 좋아하는데 네가 나 안 좋아하잖아. 그게 문제야...'
엉엉 울며 자리에 주저앉는 여자였다. 동혁이 그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재영은 당연히 동혁이 여자를 안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재영에게 하는 것처럼. 엉엉 꼭 아이처럼 우는 재영을 달래주는 것처럼 안아서 달래줄 줄 알았다. 몸을 감싸고 토닥거리며 위로섞인 다정한 말들을 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여자를 바라만 보았다. 저렇게 매섭게 눈을 뜨는 것도 처음이었다. 항상 재영에게는 곰돌이같은 웃음을 짓던 동혁이 여자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에 서있는 것이 동혁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동혁과 닮은 사람인가? 동혁 오빠 동생이 사실 쌍둥이인가?
'또 술 먹고 내 앞에 나타나서 주정 부릴 생각이면 접어. 앞으로 술 먹은 네 연락 안 받을 거니깐.'
어. 나 이동혁. 얘 데려가. 여기가.... 동혁은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 걸었다. 여자가 우는데도 달래주지 않고 그렇게 그 앞만 지켰다. 어떤 한 남자가 달려와 여자를 데려갈 때까지 그렇게 계속 동혁은 앞만 지켰다.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여자를 보고 나서야 동혁이 몸을 돌렸다. 동혁이 사라진 뒤 한참 지나서 재영은 막고 있던 손을 풀고 숨을 몰아쉬었다. 작은 숨소리라도 나면 바로 동혁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그럼 동혁이 재영에게도 저 매서운 눈빛을 할 것만 같았다. 동혁의 다정은 싫지만 동혁의 매정함은 더더욱이 싫었다.
그날 알게 된 건 두 가지였다. 첫째, 이동혁은 나재영에게만 다정하다는 것. 그 어떤 사람도 밤이 늦었다고 데려다 준 적이 없으며, 영화보고 싶다는 말에 바로 예매해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괜한 희망을 품게 하는 고문을 유일하게 나재영에게만 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 이동혁은 술 먹고 주정 부리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것. 그래서 재영은 재민 때문에도 술 마시기 싫었지만 동혁 때문에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마시면 자기도 모르게 동혁에게 연락을 할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아무한테도 데리러 오라고는 안 했어."
"아..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었다. 재영이 전화했더라면 동혁이 차가운 목소리를 내며 매정한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다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정에 질식되는 중이지만 그 다정없이 못 사는 역설적인 재영이는 아마 진짜로 존재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다행이었다.
지성은 재영이 가져다 준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머그잔의 손잡이만 매만졌다. 데리러 오라고 하지 않고 먼저 연락 온 거였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성은 그날 느낀 것을 재영에게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을 했다. 재영아 사실 그 사람은 너를 좋아해. 이 한 마디가 가져올 파장은 어마무시했다. 나비의 한 번의 날갯짓으로 폭풍우가 치는 것처럼 지성의 한 마디로 그들 사이에 폭탄이 하나 떨어질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어쩌면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재영아."
"왜?"
"네가 좋아한다고 했잖아. 다정이를."
응 맞아. 내가 좋아한다고 했어. 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재영의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맨정신 상태에서 이를 말하기란 쉽지 않았다. 말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 뱉는 순간 기정사실화가 되어버린다. 그것이 내 귀로 다시 들어와 머리에 맴돈다. 그러면 결국 머리에는 동혁에 대한 사랑밖에 남지 않는다. 그 과정이 실로 무서웠다. 재영은 아무말 없이 지성을 향해 웃었다. 지성은 이것을 긍정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다정이 말고 다른 사람 좋아해볼 생각은 없어?"
그래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서로 그렇게 숨기는 마음이라면 굳이 들춰낼 필요가 없었다. 지성은 기회를 아는 사람이었고, 기회가 오면 잡아야 했다.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만났고, 친구 이상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물도, 비료도, 하물며 햇빛 조차 주지 않은 마음이었는데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굳이 자란 싹의 꽃을 보기 전에 밟을 필요는 없었다.
엉? 재영이 당황한 듯 물었다. 지성은 그릇 위에 놓은 재영의 포크로 와플을 집어 건넸다. 재영아, 나는 어떤 멍청이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절대로 소개팅 같은 것에 내보내지 않아. 그건 결국 내 마음에서 도망치는 거잖아. 재영은 와플을 우물우물 씹었다.
"나는 좋아해볼 생각 있는데."
응? 재영아.
다정이 죽이기
"나 매운 거 못 먹는다고! 착한맛으로 시켜!"
"하지만 인주나~ 나나는 초보맛 먹고 싶은뎅?"
"너 혹시 천국 먼저 가고 싶어서 이러냐?"
재민의 휴대폰에 옹기종기 모여 떡볶이를 주문하는데 맵기가 문제다. 초보맛을 시킬 것인지, 착한맛을 시킬 것인지. 아까부터 나눈 공방은 치열했다. 오리지널도 잘 먹는 재영은 그 공방에서 살짝 벗어나있었다. 어차피 다 안 매운 맛인데 아무거나 시키지. 소파에 눕듯이 앉아 동혁이 준 담요를 덮고 있었다. 휴대폰으로는 지성과 연락을 나눴다. 그날 지성이 마지막으로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뭘 좋아해볼 생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날 지성은 무언가를 결심했고, 재영과 연락을 계속 이어가길 원했다. 친구로서 지성이 좋았던 재영은 그렇게 연락을 이어갔다.
재영이 앉은 소파 반대편에 동혁이 앉아 역시 모바일 게임을 하고 있었다. 탕탕. 총소리가 울렸다. 오늘은 치킨을 꼭 먹겠다면서 휴대폰에 들어갈 정도로 몰입해서 게임 중이었다. 재영의 발은 동혁의 허벅지 바로 옆에 놓여있었다. 약간만 뻗으면, 근육을 조금만 쓰면 발가락으로 동혁의 허벅지를 간지럽힐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런 거 있잖아. 가까워도 닿기 어려운 거. 동혁이 꼭 그런 것이었다. 분명 바로 옆에 있는데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데 선뜻 뻗기 어려운 사람. 재영은 온 신경을 발에 주어 최대한 닿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했다.
".....여보세요."
가로로 놓여있던 동혁의 휴대폰이 세로로 세워져 귓가로 향했다. 치킨을 먹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곤 동혁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아까 제노가 동혁의 휴대폰을 가려 한소리를 들었던 거와 달랐다. 지성과 연락을 이어가던 재영은 힐끔 동혁을 바라보았다. 동혁이 휴대폰 음량키를 눌렀지만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여자 목소리였다. 이동혁~ 너 나 무시하냐아! 애교 섞인 말투였다.
"어... 아니.. 뭐래, 진짜."
어. 시발. 재영은 욕을 그대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이동혁이 어떤 여자와 통화하다가 웃었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동혁은 싸우고 있는 애들과 재영의 눈치를 한 번 살피더니 재민의 방으로 들어갔다.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재영의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와 흡사했다. 지금 이동혁이 여자한테 웃어준 거 맞지?
동혁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다. 고등학교 축제에서 마이클 잭슨 노래를 부르던 동혁이 꽤 많은 사람들 가슴에 불을 질렀다. 눈을 감고 고음을 지르자 동혁을 마음에 품은 이가 많았다.
하지만 동혁이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장난기 가득하다가도 호감을 보이는 순간 냉랭해진 말투를 보였다. 삼백안을 치켜뜨면 나오는 차가운 분위기에 다가가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그래서 다들 재영을 부러워했다. 매섭게 뜨던 눈도 재영만 보면 사르르 녹아 눈웃음을 지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재영의 이름만 불렀다. 이래서 죄라는 것이다. 친구들과 하는 진실게임에서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일관하는 동혁이 유일하게 재영이 보이는 호감에만 밑도, 끝도 없어서. 재영에게만 주는 고문이었다. 다정이 죄라면 동혁은 백프로 사형이었다.
그런 동혁이 지금 다른 사람에게 웃어줬다. 재영은 동혁에게 아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듯 웃었다. 그래도 저 다정 안에 이유가 한 방울이라도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재영의 안일함을 비웃듯이 말이다. 사랑이 주는 벌은 별로 크지 않았다. 그저 동혁의 작은 웃음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뿐이었다. 괜히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알림이 계속 오긴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저쪽에서 떠드는 소리들이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웅웅거려 들렸다. 온몸의 감각이 차단되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오감 중 그 어느 것 하나 작동하지 않았다.
"....응?"
그 중 시각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인준이 재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인준이 욕하는 재영을 날 것 그대로 봐버렸다. 착잡한 낯으로 고개를 돌리던 재영은 인준과 눈이 딱 마주쳤다. 뭔가를 감지해버린 인준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냥 나잼 너 먹고 싶은 거 시켜. 그렇게 으르렁거리며 싸우던 떡볶이 맵기를 재민에게 일임하고 재영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잠깐 단둘이 보자는 뜻이었다.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아니지. 이걸 눈치 빠르다고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1학년 11월 11일부터, 아니 동혁을 아는 순간부터 시작된 마음을 이제야 들켰으니 눈치가 느리다고 해야 하는 건가. 재영은 아직도 알림이 오는 휴대폰을 들고 인준을 따라 베란다 밖으로 나갔다.
"너 좋아해?"
"....뭘."
다짜고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재영은 발로 베란다 바닥을 툭툭 쳤다. 아직 덜 마른 재민의 후드티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물은 뚝뚝. 재영은 톡톡. 몇 분을 그렇게 말이 없자 인준이 다시 물었다. 좋아해? 하지만 재영은 여전히 답을 하지 않았다. 묵묵무답에 인준이 짜증을 살짝 섞으며 물었다. 너 좋아하냐고! 아 뭐를! 투박한 물음에 나씨 집안에서 가장 섬세한 재영이 버럭 화를 내었다. 그리고는 제 오빠가 들었을까 싶어 거실 쪽을 살폈다. 재민과 제노는 조용했다.
"너 이동혁 좋아하냐고."
"....몰라."
"뭘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네 마음인데 뭘 몰라."
"내 마음이니깐 모른다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싫어. 완전 싫어. 저럴 때마다 짜증이 나는데 그러면 싫은 거 맞는데.... 나 쟤 진짜 싫은데.... 죽도록 싫은데...."
재영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살 밖으로 보이는 골목길 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싫다. 밉도록 싫다. 동혁이 밉도록 싫다. 다정해서 싫고 신경 쓰이게 해서 싫다. 동혁이 뭐라고 자신의 온 감각이 마비되는 것도 싫다. 하루의 기분을 동혁이 좌지우지해서 싫다. 이 모든 것이 내 꺼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한순간에 뺏겨버려 싫다. 이 관계가 최선이라는 것도 싫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도 싫다.
그런데 싫다는 말의 반대는 좋다가 아니었나. 좋은 거 아니면 싫은 거. 둘 중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나. 근데 왜. 왜. 죽도록 싫은데.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싫은데. 재영은 입술을 물었다. 동혁을 향한 모든 것들은 싫은 것들 투성인데 정작 동혁은 좋았다.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싫은데 이상하게 동혁이 좋았다. 싫고 좋고, 좋고 싫고.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재민은 알아?"
"아니. 몰라. 알면... 오빠 성격에 가만히 있겠어?"
"하긴. 재친놈이지. 재영한테 미친 놈."
인준도 재영 옆에 앉아 같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형제가 없는 인준은 재민을 볼 때마다 경이로웠다. 원래 모든 형제들이 다 저런가? 근데 또 다른 형제가 있는 제노나 동혁도 재민 보고 미친놈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재민만 특이한 사람인 듯 했다. 재영에게 보여주는 사랑이 도가 지나쳤다. 물가에 애를 내놓은 사람처럼 전전긍긍거렸다. 재영이 아는 재민의 모습은 원래 모습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재영한테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해놓고는 뒤에서는 재영의 걱정으로 날밤을 샜다. 쿨한 척 해놓고는 별 쌩쇼를 다 했다. 재영의 수능 날에 맞춰 군 휴가를 쓴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예닐곱쯤 되어보이는 아이들이 반팔, 반바지만 입은 채 와하하- 소리를 내며 골목길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직 밖은 조금 쌀쌀하던데..... 재영은 이름도 모르는 꼬맹이들의 감기 걱정을 했다. 측은지심. 아무리 물건을 훔치는 도둑도 우물에 떨어지는 애기를 보면 자연스레 구해주는 마음, 측은지심. 동혁이 보여주는 다정은 이런 것이지 않을까. 재영이 얼굴도 모르는 꼬맹이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동혁도 재영을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것이지 않을까. 결국 오해한 재영만 바보가 되게 만드는 다정.
"오빠."
"응?"
"오빠는 아무한테나 다정하지 마."
"갑자기?"
떡볶이 왔다고 소리지르는 재민의 목소리에 재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준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식으니깐 얼른 오라고 재민이 또 한 번 더 소리 질렀다. 문 꼭 닫은 베란다까지 쨍쨍하게 들릴 정도로 목청도 좋았다. 재영은 한 번 더 반복했다. 다정하지 마. 뒤에 나오는 말은 입에서 웅얼거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다정해. 인준은 여전히 멍청한 낯을 지우지 못했다.
인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들어야 하는 청자는 따로 있었다. 사실 동혁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다정하지 마.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다정해. 근데 또 하지 못하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재영에게 다정하지 않으면? 모순적이라고 욕할 순 없었다. 그니깐 네가 나를 다정에 잠겨죽게 만들었으면서도, 다정이 없으면 질식하게 만들어 놓았잖아.
"다정은 죄야."
재영이 베란다 문을 열었다. 통화를 마쳤는지 동혁도 자리에 앉아있었다. 동혁을 바라보며 재영은 인준을 향해 돌아보았다. 이유없는 다정은 죄야, 오빠. 재영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호들갑 떠는 재민의 목소리가 열린 문틈 사이로 쩌렁쩌렁 울렸다.
"재영아."
"응?"
"이유없는 다정은 없어."
인준은 재영을 올려다보았다. 인준의 눈은 항상 맑았다. 똘망똘망한 것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굴었다. 그것이 불편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밑바닥까지 모두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거북했다. 인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영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뭐라 내뱉었다. 재영이 답하기도 전에 인준은 제노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동혁은 통화를 마쳤는지 다시 가로가 된 휴대폰을 들고 나왔다. 재영은 올라올 거 같은 감정을 꾹 누르고 거실로 향했다.
"다정인 척 하는 사랑도 있어."
다정인 척 하는 사랑. 안다. 그런 사랑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재영은 이것도
안다.
사랑인 척 하는 다정도 있다는 것을.
다정인 척 하는 사랑이든, 사랑인 척 하는 다정이든 거짓으로 점철된 마음이었다. 더 이상 거짓은 싫었다. 거짓에 속기엔 거지같았다.
다정이 죽이기
상현의 달이 명확하게 남은 밤이었다. 재영은 일부러 동혁을 불렀다. 밤이 늦었으니 혼자 가기 무서워 데리러 오라는 티가 나는 거짓말이었다. 가로등이 너무 환한 늘 걷는 밤길이 무서울리가 없었다. 더 늦은 밤에도 홀로 콧노래를 부르며 귀가해봤다. 어둠은 재영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온몸을 휘감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뻔한 거짓말을 해서라도 동혁을 불렀다. 동혁은 캡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타났다. 오자마자 재영의 가방을 대신 들었다. 무겁던 가방이 사라지자 몸이 가뿐해졌다.
"무슨 팀플을 이렇게 밤 늦게까지 해?"
"다들 열정적이라 그래. 이번에 에이쁠 받아야 한대."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늦다."
툭툭 그냥 던지는 무의식적인 다정의 말이 재영의 거짓말을 눈감아주었다. 재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다정은 사랑의 증표가 아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으면 다정하지 않는다. 오해를 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 여지를 주는 건 저 새끼였다. 저 새끼의, 나보다 나이 조금 많은 저 새끼가 하는 농간에 놀아난 것이 재영의 모든 오해라고 한다면 그거만큼 억울한 것이 없었다. 재영의 발걸음이 멈췄다. 같이 걷던 동행자가 사라지니 동혁이 뒤를 돌아 재영을 바라보았다. 재영은 입술을 꾹 물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나
"좋아해?"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질문이었다. 계속 묻고 싶은 말이었다. 속 안을 돌아다닌 말을 인준의 한 마디가 발화시켰다. 이유없는 다정은 없어. 동혁이 가지고 있는 다정이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는지 원망을 섞어 던진 질문이었다. 어쩌면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온점으로 끝나는 평서문일지도 모른다. 오빠, 나 좋아해. 온점을 물음표로 둔갑시킨 것은 재영의 방어였다. 받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최소한하기 위한 방어. 혼자 죽어갈 세상 속에서 온점만큼 작게 뚫어놓은 유일한 숨구멍.
재영의 말에 동혁은 움직임이 없었다. 아니.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푹 눌러쓴 모자에 모든게 가려졌다. 물음표가 재영의 방어인 것처럼 저 모자가 동혁의 방어인 것 같았다. 모자 아래에서 동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재영은 보이지 않는 동혁의 눈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좋아하냐고."
"....재영아."
"다정은 이유가 있대. 다정인 척 하는 사랑도 있대."
차오르는 물 속에서 드디어 재영이 발버둥을 쳤다. 발 한 번의 휘적임에 하얀 거품이 일었다. 구해달라고 손을 뻗었다. 이제는 이 다정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없어서 숨을 쉬지 못하더라도. 재영에게만 다정한 줄 알았던 동혁이 다른 사람에게도 다정했다. 그러면서도 재영에게 여전히 다정했다. 눈물이 나왔다. 울고 싶지 않아 눈을 부릅 떴다. 여전히 모자 밑에 자신을 숨겨둔 동혁이 먼곳을 보고 있었다.
"오빠의 다정엔 어떤 이유가 있어?"
".....네....가..., 재민이... 동생이니깐..."
한참을 침묵에 잠겨있던 동혁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나재영이니깐. 나재민과 같은 '나'씨니깐. 대충 짐작하고 있는 답변이었으나 들으니 기분이 더러웠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온 기분이었다. 가슴이 턱턱 막혀오는 것이 조금은 숨쉬기 힘들었다. 엄지 손톱으로 검지를 긁었다. 손톱이 긁은 자리가 따가웠다. 그렇게 해서라도 동혁의 말로 얻은 고통을 완화시키고 싶었다.
"진짜 그 이유뿐이야?"
"........"
"그럼... 그때... 키스는 왜 했어?"
곡괭이를 들고 단단한 흙을 팠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던 금기의 타임캡슐을 꺼냈다. 그 누구도 묻자고 하지도 않았지만 단단하게 다져진 땅 밑에 묻어둔 타임캡슐이었다. 재영은 그것을 열었다. 고등학교 1학년 11월 11일 오후 1시 11분의 기억이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낯부끄러운 소리와 물기 어린 촉감, 그리고 그날의 기분까지.
"그것도 내가 재민 오빠 동생이라서?"
"....하, 재영아...."
"잡지 마."
동혁이 재영을 향해 팔을 뻗었으나 재영은 그 팔을 내리쳤다. 적원이 가득한 눈으로 동혁을 올려다보았다. 동혁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머리를 정리하고 다시 썼다. 머리를 터는 손길이 거칠었다. 재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팀플 끝나고 이제 집 간다고 하니 걱정을 가득 보낸 지성의 연락이었다. 아이폰에서 흘러나오는 벨소리가 둘 사이에 울렸지만 재영은 받지 않았다.
".....어. 네가 재민이 동생이라서."
"오빠는 친구 동생이랑 입술 부비고 막 그래?"
"재영아."
"친구 동생이랑 입술도 부비고 혀도 섞고 그런가보지?"
"재영아."
동혁이 계속 재영을 불렀다. 재영 이름의 자음과 모음을 반복해서 불렀다. 성을 붙여서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재민 때문에 버릇이 되어버린 건지 자꾸 재영의 이름만 다정한 목소리로 불렀다. 모난 재영의 말에 성을 한 번이라도 붙일 법한데도. 지성의 걱정은 부재중으로 남았다. 빨간 글씨로 재영의 휴대폰에 지성의 걱정이 남았다. 동혁이 다시 재영을 향해 팔을 뻗었다. 재영의 소매 끝자락을 살짝 잡았다. 이번에 재영은 뿌리치지 않았다.
"재영아, 나는 있잖아."
"......."
"네가 이럴 때마다,"
"......."
"나 너무 힘들어."
동혁이 바스락 움직였다. 소매 끝자락을 잡은 손이 점점 내려와 재영의 손과 단단하게 얽혔다. 재영의 손가락들 사이사이에 동혁의 손가락이 자리 잡았다. 재영보다 온도가 살짝 더 높은 손이었다. 빼내야 하는 빼낼 수 없었다. 움직일수록 더욱 강하게 옥죄오는 덫처럼 동혁의 행동 하나하나에 빠져나올 수 없었다. 물 밖으로 나가려고 발버둥치던 재영의 발을 잡아끄는 동혁이었다. 동혁은 재영을 품에 안았다. 재영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숨쉴 때마다 날숨이 목에 닿아 재영이 움찔거렸다.
"너는 재민이 동생이잖아."
".....오ㅃ,"
"난 재민이 친구고."
"........"
"그래서 네가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축축하게 늘어지는 말투였다. 한숨도 중간중간 섞여있었다. 목소리는 떨려왔다. 동혁이 고개를 들어 재영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물기가 가득했다. 다정이, 동혁이, 지독한 다정이 울고 있다. 모자 밑에 숨어있던 동혁은 울고 있었다. 재영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동혁이 운다는 선택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여러 번 상상해온 이 장면에 동혁이 우는 모습은 없었다. 수많은 평행우주 속에서도 동혁의 눈물은 없었다.
"근데 네가 말해달라니깐 말해줄게."
"뭘?"
"재영아, 나는 네가 생각한 것처럼 다정한 사람이 아니야."
다정이 다정을 부정했다. 그렇게 죽이고 싶던 다정을 다정이가 죽였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야.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말도, 겸손을 떨기 위한 말도 아니었다.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내면을 들춰냈다. 칼로 재영 앞에 서있는 자신의 허물을 사정없이 찔렀다. 동혁은 발걸음을 움직여 재영과의 틈 사이를 좁혔다. 밀착된 두 사람의 틈 속에 호흡이 섞였다. 다정한 눈으로 항상 재영을 바라본 동혁은 이제 없었다. 배려로 무장된 행동을 하는 동혁은 이제 없었다. 쓰러진 그 내면 속엔,
"욕망을 다정인 척 한 거야."
욕망만 드글거리는 동혁만 남았다. 동혁은 재영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달라진 동혁에 재영이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동혁은 살짝 기울어진 고개로 재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너무 농도가 짙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날이었다. 그날. 재영이 돌아가서 죽고 싶었던 고등학교 1학년 11월 11일 1시 11분. 그날의 동혁처럼 팽팽해진 텐션을 유지했다. 재영은 하,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동혁은 재영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숨을 나누다가 혀가 섞였다. 혀로 여린 살을 훑어내렸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란 재영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살짝 휘청였다. 동혁이 허리를 감싸안았다. 더더욱 둘 사이의 틈이 없어졌다.
이제 다정은 죽었다.
다정이 죽이기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았다.
장미꽃나무 너무 다정할 때 그러하듯이
저녁 일몰 유독 다정할 때 유독 그러하듯이
뭘 잘못했는지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 같았다.
-다정이 나를, 김경미-
다정이 죽이기
안녕하세요 다정이 죽이기로 왔습니다,,
사실 다들 기대를 해주신 거 같아서,, 쓰는데 많이 부담을 느꼈습니다(ㅎㅎ) 엇.. 그냥 쓴 글인데 오엥? 하면서 어떻게 하면 기대에 부흥할 수 있을까 했는데 기대 부흥 못한 것 같군요..ㅎㅎㅎ........... 제 한계 잘 보고 계신가요? 심지어 맛 들으면서 써서 분위기 잡기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끝나서 다들 놀라셨을텐데, 번외편이 있습니다. 동혁이 시점에서 진행될 '사랑이 살리기'가 있어요~ 그것도 열심히 써서 와보겠습니다.
지성이는 상편만 등장할 예정이었으나 지성이가 더 좋다는 분이 계셔서 또 등장했습니다. 근데 지성이 역할 꽤 괜찮은 거 같아서 지성이 번외도 써보고 싶은...(이렇게 점점 커져가는 판...) 지성이 제목은 음, 죽이고 살렸으니... 음... 기절시켜야 하나?ㅋㅋㅋㅋㅋㅋㅋㅋ 기절한 걱정 막 이런식으로ㅋㅋㅋㅋ
문제 있으면 댓글 달아주세요
다들 감사합니다~~
첫댓글 오마갓...오마갓....! 보면서 진자 숨도 못 쉬었ㅅ어요 이동혁 유죄...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5.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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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완벽하다......글이 너무 몽글몽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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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선생님..와..ㅠㅠㅜㅠㅠㅠ진짜몰입감대박이에요..어느정도냐면 제심장이 찌르르했어요
미친•••
다정은 죽었다 드르륵탁 ...드르륽탁...
ㅠ ㅠ 아 지성이 서브로만 있기엔 넘나 아쉬운데요 ㅠㅠ
동혁아 왤케 삽질했어 너두 여주가 너 좋아하는구 알았으면서...!!!!!!
사랑이 살리기 존버할게요 💚
와....상편부터 느낌이 왔지만.....
진짜 대작 ... ㅠㅠ 끕끕...
작가님 더 주세요ㅠㅠ
이거 미쳤다 진짜
저 지금 손 떨려서 아무것도 못하겠ㅇ ㅜ요...
미쳤다 개미쳤네요이거 번외도 기다릴게요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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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죽어요..설레서....하
와 진짜 몰입감 미쳤어요... 한 글자 한 글자 너무 소중해 ㅠ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아악 미쳤다리 넘 좋아요ㅠㅠㅠㅠ
텐션 무슨 일이야......짜릿
와...진짜 도라버려......미쳐버려....동혁아아아아악!!!!! 동혁이 외전..벌써부터 맛있어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5.13 02:40
지성아 나한테 와라 !!!!!!!
아 미쳤다 다정인척하는 욕망이래...작가님 진짜 너무 재밌어요ㅠㅠ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5.13 12:34
와우 두번주거 세번죽어 네번죽어 다정아.,,,.,,,,
제목부터 걍... 분위기 끝이여 하... 미쳤다
으아아으아...! 으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ㅏ아아!!!! 으아아아아아아ㅏㅇ아ㅏ아아아아앙아아아ㅏ아아아아아악!!!! 으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악!!!!!!!! 아악!!!! 아아아아아아ㅏ아아아아아!!! 아악!!!!!!!!!!!!!!!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으아아아아!!! 으아...! 으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ㅏ아아!!!! 으아아아아아아ㅏㅇ아ㅏ아아아아앙아아아ㅏ아아아아아악!!!! 으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악!!!!!!!! 아악!!!! 아아아아아아ㅏ아아아아아!!! 아악!!!!!!!!!!!!!!!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와씨 미쳤다 동혁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진짜 도라버려 동혁아악!!!!!! 인준이 근데 진짜 눈치 빠르다 작가님 캐해 맛집...
으아ㅠㅠㅠㅠㅠㅠ 다정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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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미쳤다 …. 분위기 개쩔어요 … 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