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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어진 십자가 지고 사제로 살아온 43년
오태순(토마스) 서울대교구 원로사제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 통 큰 신부
서울대교구 원로사제 오태순(토마스) 신부를 만난 날은 마침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선포한 ‘신앙의 해’ 개막일인 지난 10월 11일이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안산 기슭에 자리 잡은 사제관에 들어섰는데도 오 신부는 서재에서 인터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마주앉은 자리에 각종 자료를 한 아름 내려놓는다. 지난 2008년 8월 일선 본당 사목 은퇴를 맞아 펴낸 화보집 ‘그 역사의 현장에서’와 묵상집 2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비롯하여, 그동안 활동했던 내용과 참고할 내용 등을 보도한 신문 스크랩이다. 매사 철저하게 준비하고 대비하는 그의 단면을 보는 듯 해 경탄했다.
이런 철저함이 있었기에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큰 획을 긋는 그 많은 일들을 성공적으로 치러 ‘작은 거인’으로 불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및 103위 성인 성녀 시성식, 1989년 세계성체대회 실무 책임자로 발탁돼 주관하고 기획해 행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공적으로 마친 예는 유명하다. 이들 행사를 통해 보여준 그의 뛰어난 기획력과 추진력, 포용력, 책임감은 아무나 쉽게 흉내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 일뿐만 아니라 사제로 살아오면서 수행한 모든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도 한결같은 열정과 성실성, 치밀함, 사심없는 태도로 임해 좋은 열매를 맺었다. 일선 사목자로서 교회를 위해 헌신한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2008년 8월 24일 서울 연신내 본당에서 있은 은퇴미사에서 당시 사회사목담당 김운회(루카) 주교는 교구장 명의의 공로패를 전달하고 치하했다. 김 주교는 오 신부가 남긴 족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교본으로 남을 만한 큰 일들이었다고 극찬했다.
은퇴미사를 시무(始務) 미사로 봉헌
오 신부는 1969년 12월 17일, 30세가 되는 생일을 이틀 앞두고 고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으로부터 서울대교구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때 선택한 성구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 9, 23)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사제생활 43년 동안 이 말씀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갖춰야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명쾌한 가르치심입니다. 성직자로서 살아오면서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습니다. 제 경험으로 서울대교구 사목국장으로 재임하면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주관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오셨던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성인 시성식을 기획해 성공적으로 치른 경험이 있어 교황님이 다시 방문하신 1989년의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면서는 좀 교만한 생각이 들어 몇 가지 점에서 소홀했더니 당장 그 결과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항상 자기를 버리고 겸손하게 살아야 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반성했습니다. 사(私)가 개진되면 마(魔)가 끼기 마련이지요. 잘 한 것은 모두 교구장님 몫이고, 잘못한 것은 모두 제 탓이라는 교훈을 절감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실수하는 저까지도 사랑하시어 한 단계 성장하는 과정으로 삼게 해 주시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은퇴 후인 지금도 저는 원로사제로서 조용히 뒤에서 있으면서 젊은 현역 사제들이 하는 일을 지켜보며 도와달라고 하면 말없이 도와 줄 따름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 신부는 일선 사제 정년인 칠순, 고희(古稀)를 1년 앞두고 은퇴하며 봉헌한 미사를 은퇴 시무(始務)미사라고 했다. 일선 본당이나 공식적인 사목은 하지 않지만 ‘프리랜서 선교사‘로 세상 마치는 날까지 열심히 하느님 말씀을 전하겠다는 의지의 표헌이다. 실제로 연신내 본당 주임사제로 있던 2006년 12월 한국가톨릭 성령 쇄신 봉사자 협의회장에 선출돼 은퇴 후인 2008년 12월 19일 개최된 한국가톨릭 성령 쇄신 봉사자 협의회 전국대회와 2009년 6월 1일부터 15일까지 음성 꽃동네에서 있은 세계 성령대회 한국 준비위원장과 공동 대히장직을 맡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행동하는 사랑’ (LOVE IN ACTION)이란 주제로 열린 이 성령대회는 바티칸 성서대학에서 온 학자들과 많은 국내·외 인사들로부터 “한국성령운동이 세계 제일이다.”는 찬사를 받았다. 오 신부는 그 외 요청이 있는 피정이나 교육 프로그램에는 기꺼이 나가 지도한다.
매일 기도하던 소년 사제의 길 선택
오 신부는 1939년 12월 19일, 아버지 오산옥(마티아)과 어머니 김분다(베네딕다)의 2남 가운데 차남으로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 신부가 세 살 되던 해에 선종해 어머니 김 씨 혼자 두 아들을 키웠다. 김 씨는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두 아들을 부모가 있는 자식들보다 더 떳떳하게 키우기 위해 노력해 형제들을 남부럽지 않게 성장시켰다. 한 예로 두 형제가 전농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교에 내는 사친회비나 학비를 다른 학생들보다 먼저 내 주고 준비물도 아쉬움 없이 미리 챙겨 주는 등 아들들이 학교생활을 구김살 없이 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오 신부의 초등학교 친구들은 어머니 김 씨에 대해 “우리가 오 신부 집에 놀러 가면 어머니께서 꼭 간식을 상에 차려 주셨고, 항상 묵주를 들고 기도하셨다.”고 증언한다.
어머님의 기도와 희생으로 무럭무럭 자란 오 신부는 1954년 3월 경동중학교에 입학해 1960년 2월 경동고등학교를 졸압하고, 그해 3월 대신학교인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권투를 한 오 신부는 운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꼭 성당에 들려 오래도록 기도했다. 당시, 사회복지재단에 있으면서 청량리 성당 일을 도와주었던 살트르 바오로회의 이춘근(시몬스톡 · 94)) 수녀의 회상은 듣는 이들을 감동시킨다.
“당시 청량리 성당은 마루로 되어있어 신을 벗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매일 성당 청소를 말끔히 하고 난 뒤 토마스 학생이 땀이 잔뜩 난 발로 들어와서 발자국을 남기곤 했지요. 토마스는 그렇게 들어와서는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너무나 열심히 하는 것이 대견해 잠시 후에 다시 들여다보면 여전히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기도를 마쳤겠지 하고 성당 안을 다시 보니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면서 착실하게 살더니 결국 대신학교에 입학하더군요.”
오 신부가 천호 본당 주임사제로 재임할 때(1986. 8~1992. 10) 오 신부를 대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추천해 준 아버지 신부 고 이삼복(사도 요한) 신부 사제 수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아 아들 신부로서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대신학교 시절의 오 신부에 대해 대신학교를 함께 다녔던 고려대 사학과 조광 명예교수는 “제가 철학과 2학년에 재학할 때 오 신부님이 군 복무를 마치고 신학과 1학년으로 복학하셨습니다. 오 신부님과 저는 원예부에서 거의 매일 흙이나 퇴비를 실은 외바퀴 수레를 밀면서 온실의 화초를 가꾸는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베네딕토 성인의 ”기도하고 일하라. “(Ora et Labora)는 말의 뜻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묵묵히 노동하고 기도하는 오 신부님을 마음속으로 좋아했지만 겉으로 굳이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고 회고한 뒤 “그러다가 저는 고려대학교로 갔고, 계속 만나지 않다가 1979년부터 준비된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면서 다시 만나 지금까지 두터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때 만나 참여한 사람들이 구일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만남을 정례화하고 있습니다. 구일회는 조선교구 설정일(1984년 9월 9일)을 기념해 지은 명칭입니다. 그 후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의 기획과정이나 1998년 세계성체대회 행사 준비 때에도 그 인연은 이어졌습니다. 중국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맺는 데도 오 신부님과 함께 했고, 서울대교구가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발족하고 북녘의 동포와 새로운 관계를 세워나가기 시작할 때에도 오 신부님은 중심에 서 있었고 저는 그 주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며 오 신부를 높이 평가했다.
주요 직책 두루 거친 베테랑 사제
오 신부의 경력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 짐작하기 쉬울 것이다. 서품 후 첫 임지는 1970년 1월 신당동 본당 보좌였다. 이후 △1971년 1월 서울스카우트 지도 △1972년 12월 서울가톨릭학생회 지도(명륜동 회관, 신촌 회관 관장) △1974년 4월~1989년 12월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창립위원 △1976년 6월~1979년 6월) 오류동 본당 주임 △1979년 6월~1981년 11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목국장(평신도사도직협의회 지도) △1980년 7월 3일~8월 14일 광주민주화 항쟁과 관련되어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잡혀가 혹독한 고통 겪음 △1981년 1월 11일~10월 18일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사무총장 △1981년 11월~1982년 7월 천주교 중앙협의회 사무차장(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 담당) △1982년 7월~ 1986년 8월 면목동 본당 주임(서울 MBW 추진 회장 / 문화 선양회 지도) △1986년 8월~1992년 10월 천호동 본당 주임 겸 제9지구장 △1989년 12월~ 1998년 10월 한마음 한몸 운동 본부장 △1987년 대통령 선거 가톨릭 공명선거 감시단장 △1990년~1992년 강동가톨릭 문화원장 △1988년~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 · 세계평화의 날 준비위원장 △1992년 10월~1996년 10월 한강 본당 주임 △1995년 우리민족 서로 돕기 공동 대표 △1993년~1998년 (사)한·베트남 청소년 문화교류 후원회 공동 회장 △1995년 4월~1999년 6월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상임 위원장 △1995년 9월~1999년 6월 천주교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 전국 본부장 △1996년 10월~1998년 10월 신당동 본당 주임 겸 제1지구장 △1997년 5월 북한 옥수수보내기 운동 이사 △1998년 10월~2002년 9월 역삼동 본당 주임 겸 제11지구장 △2002년 5월 성가정 자녀 축복 지도 △1999년 9월 ~2002년 9월 강남가톨릭문화원 지도 △2002년 9월~2003년 9월 안식년 △2003년9월~2008년 9월 19일 연신내 본당 주임(라우스 데오 합창단 지도) △2008년 8월 24일 원로사제 시무미사 봉헌했으며, 2011년 2월 25일~ 현재 한국 성령 쇄신 봉사자 협의회 교육 전문 위원으로 있다.
오 신부는 이렇게 바쁜 가운데 △작은 거인 오태순 신부 화보집, ‘그 역사의 현장에서’ 2008 △믿음과 삶이 하나 되어, 1994 △자녀 축복 세미나 교재 2008. 도서출판 빅벨 △오태순 신부 묵상집 1. 마리아, 자애로우신 나의 어머니. 도서출판 빅벨, 2002 △오태순 신부 묵상집 2. 나를 찾아오신 하느님, 도서출판 빅벨 2007 △신앙 성숙 견진 준비를 위한 성령세미나 교재, 2007, 한국가톨릭성령봉사회 △번역 자료 : 하느님 사랑 10단계 묵상집, 2007 등의 저서와 번역 자료를 남기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했다.
사목국장 재임 때 사목계획 수립 큰 보람
“지금 지나놓고 보니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온총이어서 늘 감사드립니다. 성직자로 살아온 어느 한 순간, 어떤 일이든지 긴장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큰 행사들을 무리없이 잘 마칠 수 있어 무엇보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저와 함께 일을 해준 평신도 전문가들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조광 교수가 말한 구일회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준비하면서 참여한 분들로서 지금까지 만나고 있지만, 그 외 참여한 평신도가 150주년 때 4천 명,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는 5천 명이나 됐습니다. 각 본당 사목위원들과 각 단체 임원 및 회원들이지요. 이 분들은 제가 사목국장으로 처음 발령받아 일하기 시작할 때인 1979년부터 만났습니다. 교구 사목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본단 신부들과 사목위원들을 각각 2차례 연수했습니다. 신부님들은 1차 때는 87% 정도 참석하더니 2차 때는 90% 이상 참석해 주셨습니다. 사목위원들은 1, 2차 모두 95% 이상 참석해 성황을 이뤘습니다. 사제 연수에 참석하지 않은 본당 신부가 있는 본당의 사목위원들까지 오셨다는 얘기입니다. 이 때 본당신부님들은 ‘신자들에게 가르칠 사목 교재를 잘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하셨습니다. 이 요구를 기초로 ’소공동체 반모임 교재‘가 만들어졌고, 교구장 사목교서가 탄생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큰 보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 신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실로 탄생한 ‘더 나은 세계 운동(MBW) 등을 통해 “사목은 봉사하는 것이다.”는 신념을 확고히 수립했다. 봉사는 남에게 선행을 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이 하느님께 응답할 수 있도록 요구되는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오 신부는 또 “이 사목은 성직자들만의 봉사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 전체의 봉사이므로 각자가 받은 카리스마와 재능에 따라 각각 독특한 봉사를 하는 것이다.”고 자상하게 설명했다.
대선 정국에서 교회는 중립 지켜야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창립위원이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잡혀가 고초를 치른 오 신부는 교회는 어떤 정파나 개인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지난 1987년 대통령 선거 때 저는 가톨릭 공명선거 감시단장으로 일했습니다. 그 때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 간의 야권 단일화 노력이 있었고, 막판 회담을 천호동 성당에서 갖기로 했는데 김대중 후보가 오지 않아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알고 보니 사제단 원로들이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세우고 곧바로 발표했지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후퇴를 가져왔음은 물론, 후배 사제들이 크게 실망하고 그 후 잘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잘못된 일이지요. 이번 대선에서도 후보들의 공약을 잘 보고 선택해야합니다. 공약 가운데 미래가 불확실한 것은 따를 수 없지요. 어느 정파나 사람을 보지 말고 공약을 잘 살펴보고 선택하면 됩니다. 우리 국민들은 현명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잘 선택할 것으로 믿습니다.”
오 신부는 때가 되면 성령께서 우리를 밝혀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우리 모두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했다.
글 최홍운 alsemffp34@naver.com
사진 인영오 05ern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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