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빨대효과
2004년 4월 1일 KTX(Korea Train Express) 개통이 가져온 수도권의 강력한 흡인력에 지방이 쪼그라드는 현상을 말한다. 바로 이런 빨대효과 때문에 서울에서 지방, 또는 지방에서 서울로 KTX 출퇴근을 하는 ‘KTX 통근족’이라든가, 그 덕분에 과거의 주말부부 신세를 면한 ‘KTX 부부’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조선일보』 영남취재팀장 배명철은 2004년 3월 31일자에 쓴 <서울 밖에서 걱정하는 고속철>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고속철도 개통으로 지방 도시들이 훨씬 가까워진 서울길이 가져올 엄청난 흡인력에 빨려들어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방이 서울에 빨려들어가는 효과는 쇼핑뿐만이 아니다. 거리와 시간의 단축은 지방의 기업들이 자금과 고급인력이 풍부한 서울에 본사를 두기가 훨씬 쉽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서울의 기업들도 한 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지방에 굳이 독립성이 있는 지방본부를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축하행사의 팡파르에 묻혀 아직은 잘 들리지 않지만, 고속철의 개통이 지방의 도시들에게 기회가 되는 것 이상으로 위기가 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2006년 7월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 권영준은 “구성의 오류는 어떤 원리가 부분적으로 성립해도 전체적으로 성립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성립한다고 추론함에 따라 발생하는 오류”라고 정의하면서 “국가 물류산업의 선진화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YS정부부터 수십조원의 엄청난 돈을 들여 건설한 고속철도 KTX가 오히려 지방경제를 죽이고 있다는 원망을 듣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구성의 오류로서 정책의 결과가 의도로 반대로 나타나는 것이다”고 했다. “고속철도가 생기면 2000만 수도권 인구가 지방으로 더 자주 내려가서 관광도 많이 하고 서울과 지방 사이에 교류도 더욱 활발해져서 지방경제가 활성화될 것으로 홍보도 많이 하고 기대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막상 개통이라는 뚜껑을 열고보니, KTX를 서울사람만 타는 것이 아니라 지방주민도 타고 오히려 문화와 소비상권의 격차가 너무 큰 현실 때문에 지방의 여유 있는 소비계층이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서울로 자주 와서 다양한 문화서비스와 고급소비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방상권이 겪는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중앙일보』 2006년 9월 6일자는 “병원.쇼핑.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도권 집중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KTX로 인해 노무현 정부의 지방 균형정책도 희석될 공산이 크다. 이미 지방 근무자들 사이에는 주말에 서울 집에 들르는‘금귀월래(金歸月來)’라는 두 집 살림이 보편화되고 있다”고 했다. 2007년 4월 21일 KTX 승객 누계가 1억 명을 돌파했는데, 이는 세계 고속철도 사상 전례가 없는 대기록이다. 그만큼 빨대효과가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돼 있어 지방의 쇠락은 가속화될 전망이다. 『한겨레』 2007년 6월 26일자에 따르면, “고속열차 개통 3년이 지나면서 교육?의료?문화 등 절대 우위에 있는 서울이 지방의 인력과 자원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역할이 점차 뚜렷해 지고 있다. 시속 300㎞의 속도 혁명이 가져온 역효과인 셈이다. 특히 서울과 1시간 생활권인 충남 천안?대전은 ‘서울시 천안구’, ‘대전구’로 불리며 부유층과 지식층을 중심으로 의료, 거주에서 수도권 집중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참고문헌) 이철호, , 『중앙일보』, 2006년 9월 6일, 30면; 허승호, , 『동아일보』, 2007년 4월 26일, A30면; 권영준, <‘구성의 오류’>, 『주간조선』, 2006년 7월 3일, 104면; 손규성 외, <‘블랙홀 KTX’ 돈도 사람도 서울로 서울로>, 『한겨레』, 2007년 6월 26일자
- 선샤인 논술사전
철도와 증기선이 등장함으로써 이전까지는 여러날 걸리던 여행이 단 하루로 줄어들기도 했고, 그 때까지는 언제나 시간 단위로만 측정되던 것이 15분, 그리고 1분 단위로까지 측정 가능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철도와 증기선에 의해 성취된 이런 빠르기를 대단한 승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발명품은 아직도 측정이 가능한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운송 수단들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빠르기를 다섯 배, 열 배 혹은 스무 배 정도로까지 빠르게 만든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이고, 설명할 수 있는 기적이었다.
그러나 전기가 이룩한 최초의 업적들은 그 성과에 있어서 완전히 예측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전기는 요람 단계에서부터 이미 하나의 헤라클레스였다. 전기는 그 때까지의 모든 법칙들을 밀쳐 넘어뜨렸고, 모든 타당한 척도들을 때려 부수어 버렸다. 우리들 후세 사람들로서는 전보(電報)가 이룩한 최초의 업적들에 대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느끼던 놀라움을 상상도 하지 못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라이덴 병(Leidener Flasche)으로부터 겨우 1인치 거리, 즉 손가락 마디 정도밖에 가 닿지 못했던 그 작은 전기 불꽃이, 갑자기 나라와 산들을 넘어 지구 구석구석을 뛰어넘어가는 괴물 같은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축축한 말이 단 1초 만에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가 닿아 그 곳에서 읽히고 이해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한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
소식을 전하고 철도를 움직이고 도로와 집들을 밝히고, 공기의 요정 아리엘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게 공기를 꿰뚫고 지나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발견을 통해 비로소 공간과 시간의 관계는 세계 창조 이후 가장 결정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 안인희 역, <광기와 우연의 역사>, 휴머니스트
수백 년 이상 사람들은 별을 바라보면서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우주 여행에 대한 공상을 키웠다. 1969년 7월 29일, 닐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달을 밟음으로써 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왕복 769,000km 거리를 여행하는 데에 1주일이 걸린 이 우주 여행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된다. 달 탐사 여행을 계획하고 추진하는 데에는 약 50만 명의 사람들이 관여했다.
- G.I. 브라운, 이충호 역, <발명의 역사>, 세종서적
* 다음의 제시문과 논제는 대부분 김찬호의 책 <문화의 발견(문학과 지성사)>과 한겨레신문 연재 기사를 인용한 것입니다.
* 시각 자료는 편집자의 임의로 수집한 것입니다.
탈것의 사회학
[가]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지하철에는 갖가지 행동 수칙들이 끊임없이 방송된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 한걸음 물러서라, 멀리 가실 분은 안으로 들어가라, 화재 발생 시에 비상 장치로 출입문을 열고 신속하게 대피해라,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놓아라, 주변에서 수상한 사람을 보면 신고하라, 옆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위를 하지 마라, 출입문 옆에 기대서 있지 마라, 물건 사고파는 행위를 하지 마라, 출입문 옆에 기대서 있지 마라, 물건 사고파는 행위를 하지 마라, 승강장과 전차 사이의 간격이 넓으니 내릴 때 발을 조심하라…… 핵심을 간추리면 '안전', 그리고 '배려'이다. 그런데 승객들은 그런 안내 방송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지하철에는 안내 방송 외에도 많은 정보가 쇄도한다. 승강장에서부터 차내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동영상과 포스터 광고물들이 승객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오전에 배포되는 무가지 신문들이 여러 승객들에게 윤독된다. 의자 위의 선반은 그것들을 주고받는 '공유폴더'로 활용된다. 그 위에 가득 쌓여 있는 신문들은 도시인들이 게걸스럽게 소비한 정보의 배설물처럼 보인다. 승객들은 신문을 보지 않는다면 책에 몰입하거나, 이어폰을 ㄲㅈ고 음악이나 영상에 빠져 있거나,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거나 게임을 하는데 열을 올리거나, 아니면 아예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창밖으로 아무런 풍경이 펼쳐지지 않기에 매우 지루한 것이다. (중략)
또 한 가지 지하철에서 이루어지는 활발한 상호작용은 노인에 대한 자리 양보이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신기하게 바라보는 미풍양속이 건재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거기에는 노인을 공경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양보하지 않으면 받게 될 따가운 눈총도 작용한다. 자신과 타인이 노약자인지 아닌지를 이토록 민감하게 식별하고 의식해야 하는 공간은 없다.
그런가 하면 경북대 사회학과 천선영 교수는 지하철에서 노약자의 함의에 대해서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다. 그는 '노약자'라는 범주에 주목한다. 노약자의 구분은 필연적으로 비노약자라는 존재를 가정하고 있고, 그런 상호간의 자기 규정과 경계 설정은 사회적 긴장을 수반한다고 전제한다. 그러한 상호 작 규정과 경계 설정은 사회적 긴장을 수반한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구별은 노약자들을 배타적으로 분할하는데, 이는 노약자석의 배치에도 그대로 반영된다고 한다. 즉 노약자석이 객차 여기저기에 흩어져 배치되어 있는 유럽과 달리 한국에서는 양쪽 구석으로 몰아놓은 것이다.
- 김찬호, 문화의 발견(문학과 지성사)
** 활동 1. 한국에서는 65세 이상의 모든 노인들에게 지하철 탑승권을 무료로 제공한다. 이러한 예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지하철의 재정을 압박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경로 우대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에 대해 그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맞서고 있다. 그 외에도 다른 절충안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지하철 경로우대제에 대해 입장을 달리하는 2~3인이 논쟁을 벌인다고 가정하고 그 토론 내용을 가상으로 작성해보자.
** 활동 2. 지하철을 통해 본 도시인의 일상을 15분짜리 영상 다큐로 제작한다고 가정하고 제목, 장면, 음향, 내레이션 등이 포함된 대본을 작성해보자.
[나] 버스정류장의 풍경을 보자. 승객들은 멀리서 들어오는 버스가 어디쯤 멈춰 문을 열 것인지를 가늠하느라 머리를 굴린다. 뛰어가서 탈까 아니면 기다리고 있을까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기껏 뛰어 갔는데 버스가 전진하는 바람에 다시 뛰어 와야 하는 경우도 흔하다. 종잡을 수 없는 정차 지점을 둘러싸고 승객들은 우왕좌왕한다. 버스 체제가 획기적으로 바뀐 서울에서도 이런 모습은 여전하다.
승차 후에도 안심할 수 없다. 사람들이 모두 올라서면 곧바로 문을 닫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승객들은 신속하게 교통카드를 찍고 나서 손잡이를 번갈아 잡아가며 자리까지 도달해야 한다. 고도의 순발력과 평형감각이 요구되고 노약자들은 위험하다. 내릴 때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잠깐 방심하면 하차 정류장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벨을 누르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미리 문 앞에 나와 서 있어야 한다. 정차 후에 일어서서 나온다면? 운전사의 싸늘한 눈초리에 승객들도 가세할 것이다. 민첩하게 움직이지 않는 승객들에게 어떤 운전사는 무언의 꾸지람을 한다. 군대의 훈련소에서 자주 듣던 말이 불현듯 들려오는 듯하다. “동작 봐라, 동작 봐!”
조급증은 교통사고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서두르고 쫓기는가?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이다. 운전자만이 아니라 승객도 그 관성에 함께 젖어든다. 그래서 보행자의 입장에서는 신호와 차선을 무시하고 난폭 운전하는 버스를 보면 화를 내면서도, 자기가 탄 버스가 그렇게 달려가면 기특해 하고 고마워한다. 이렇듯 속도 중독은 우리의 일상 의식과 사회 시스템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서두는 습관, 일단 빨리 가고 보자는 시간 감각 등이 거기에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 김찬호 / 한겨레신문 (2005.08.18)
* 활동 3. 제시문을 바탕으로 버스를 이용하는데 느끼는 불편함은 누구의 잘못에 기인하는가? 버스 운전사 때문인가? 승객의 조급함 때문인가? 아니면 미성숙한 사회 의식이 빚은 결과인가?
* 활동 4. 버스 운전기사가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이 버스 승객들에게 미치는 손익을 분석해보자.
[다] 외면적 과시 말고도 승용차가 주는 심리적 만족감이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자유가 아닐까 싶다. 마음대로 행선지를 정하고 속도를 조절하면서 시공간을 장악하는 쾌감 말이다. 출근 시간대에 70%나 되는 나 홀로 운전 차량들, 곳곳이 막히는데도 굳이 차를 끌고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복잡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런데 운전대를 잡으면 뭔가 상황을 제어하는 듯하다. 그러한 통제감으로 자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차내 공간 그 자체가 주는 자족감도 크다. 직장이나 가정에서 겪는 참견이나 눈치에서 벗어나 마음껏 음악도 듣고 담배도 피울 수 있는 그 곳은 오붓한 휴게실이다.
하지만 그런 안락함과는 상반되게 운전자의 마음은 날카로워질 때가 많다. 앞차가 조금만 지체해도 안달하고, 다른 운전자들의 사소한 실수에 신경질을 낸다. 평소에는 점잖은 사람이 운전대만 잡으면 험한 욕을 내뱉는 경우가 많다.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서고 많은 정신 에너지가 소모되는 노동인 것이다. 그렇듯 우리는 개인적 차원에서 자동차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점점 더 추구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치르는 비효율과 심리적 엔트로피의 비용이 매우 높다. ‘주고받고 통하는’(交通) 마음의 회로망을 도로에 어떻게 병설할 것인가. 자동차라는 사유물을 도로라는 공유공간에서 다루는 양식은 무엇인가.
- 김찬호 / 한겨레신문 (2006.02.09)
** 활동 5. 출근 시간대에 나홀로 승용차가 너무 많다. 정부에서는 교통 체증을 줄이고 에너지를 절감하기 위하여 카풀car pool을 적극 권장했다. 목적지가 비슷한 운전자들이 한대의 승용차를 함께 타고 출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했다. 무엇이 걸림돌인가? 그리고 카풀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갖춰져야 하는가?
** 활동 6. 자가용을 없앨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에게 과감하게 자가용을 없애도록 설득한다고 생각하고, 자가용 없이 사는 생활의 좋은 점 일곱 가지를 써보자.
[라] 이제 전국은 3시간 생활권으로 좁아졌고, ‘서울시 천안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충청도까지 수도권으로 편입되어오는 추세다. 백화점과 병원들이 손님을 빼앗기고, 그쪽 지역에서 기숙하던 직장인과 학생들이 수도권에서 통근 통학하게 되면서 원룸 가격이 떨어졌다. 주말 부부가 KTX 통근 거리에 집을 마련해 평일부부로 회귀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일명 ‘KTX 부부’) 또한 전국 어디든 당일로 다녀올 수 있게 되면서 출장 문화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지방의 숙박업 매출이 줄어든다. 다른 한편 서울 사람들이 신선한 회를 먹으러 부산까지 원정가는 등 일일관광의 반경이 확대되면서 연계 상품도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다. KTX는 그렇듯 이동의 속도를 높이면서 일상공간을 광역화하는 것이다.
변화는 양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고속철도는 여행의 질감을 바꿔놓고 있다. KTX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창밖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동시간을 최대한 단축해야 하는 여정에서, 출발지와 목적지를 쾌속으로 잇는 직선 회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공간이다. 외부세계와 단절된 열차는 우주선 같은 추상 공간이 되고, 그 속에서 방향감각은 상실된다. 그 밀실에서 승객들은 잠을 자거나 사무를 보거나 책 또는 신문을 읽는다. 아니면 천정의 텔레비전으로 무료함을 달랜다. 열차 바깥으로 펼쳐지는 경치, 길과 마을과 산세가 어우러지는 그 장소성은 증발되어버렸다. 이제는 원경(遠景)마저도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바깥을 바라보지 않는 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한국의 고속철도에는 굴이 너무 많아 풍경의 파노라마가 툭툭 끊기기 때문이다. 유난히 산이 많은 지형에서 곧게 길을 뚫다 보니 엄청난 암흑지대를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 김찬호 / 한겨레신문 (2005.09.29)
** 활동 7. 예전부터 기차역에는 부랑자나 노숙인들이 많이 머문다. 그런데 KTX역에는 예전의 기차역들에 비해 훨씬 수가 적다. 왜 그럴까?
** 활동 8. KTX가 개통된 이후 3년지난 시점에서 대전 시민들이 그동안 그 도시에서 일어난 변화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고 가정하고 그 내용을 구성해보자(인원은 4명 정도로 하고 그 직업이나 신분은 자유롭게 설정하되 최대한 입장이 다른 사람들로 배정할 것)
** 활동 9. 기차 여행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한 여행보다 매력적인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철도청의 여행 상품 홍보를 대행한다고 가정하고 그 광고 문구를 써보자.
[마] 어떤 사람들은 도착지의 시간으로 자신의 손목시계를 미리 조정해놓기도 한다. 승객들을 지배하는 시간은 행선지에 따라 제각각으로 분화된다. 특정한 시간이 적용되지 않는 국적 불명의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은 업무와 인간관계 그리고 사회적인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듯하다. (중략)
하지만 그 홀가분한 '해방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승객들은 신발까지 벗어서 짐과 함께 엑스레이 카메라에 투과시켜야 하고, 몸 구석구석을 검사받아야 한다. 모두가 잠재적 테러범으로 의심받는 것이다. (중략) 더구나 그곳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람들 즉 표적이 되는 인물들이 많이 드나드는데 이들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래서 언제나 삼엄한 경비를 하고 있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하는 불편함을 여기에서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일상을 벗어나는 홀가분함 또는 낯선 곳으로 간다는 설렘 때문인지, 수속을 밟는 사람들은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한다. 또한 출입국 심사, 세관 신고, 질병 검역 등의 번거로운 절차도 순순히 따른다. (중략)
비행기 좌석은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로 '클래스'가 정확하게 나뉜다. 이코노미석에서 장거리 여정은 고역이다. 노약자들이 '이코노미석 증후군'이라는 신체 이상을 주의해야 할 정도로 자석이 비좁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비즈니스나 일등석은 널찍한 좌석에서 몸을 눕힐 수도 있고, 승무원에게서 일류 호텔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뿐만 아니라 그 '귀빈'들에게는 탑승 전에 공항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프레스티지Prestige'가 주어진다. 그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자신을 '매우 중요한 인물(VIP: Very Important Person)'임을 확인하게 된다.
- 김찬호, 문화의 발견(문학과 지성사)
* 활동 10. 비행기에는 왜 노약자 보호석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걸까?
'**' 는 <문화의 발견>에서 직접 인용한 논제임.
논제 1. 승객의 입장에서 (1)~(6)의 기준을 적용하여, [가]~[바]에서 언급된 각 교통 수단들의 순위를 매겨봅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근거를 간단히 제시합니다.
(1) 주행 거리와 요금을 대비한 경제적 효율성 :
(2) 생활과 업무의 효율성을 고려한 경제성 :
(3) 안전성 :
(4) 신체에 대한 구속 정도 :
(5) 승객의 심리적 안정과 여유 :
(6) 교통 수단과 승객(운전자)의 친밀도 :
논제 2. [가]~[마]의 내용을 바탕으로 '현대인의 사고 및 삶의 패턴의 변화'가 교통 수단의 변천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설명하시오. 그리고 교통 수단의 발달이 인간의 삶과 사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하시오.
논제 3. [가]~[마]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병폐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지적하고, 이러한 현상을 다른 사례에서도 찾아봅시다.
논제 4. 다음 시의 화자가 지향하는 가치에 가장 부합하는 교통 수단은 어떤 것이고, 가장 동떨어진 교통 수단은 어떤 것인지 [가]~[마]에서 골라 각각 제시하시오. 그리고 이 둘의 지니는 차이점 어떤 것이고, 그 차이점이 함축하는 근본적인 의미를 분석하시오.
구부러진 길
- 이준관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같은 민들레를 만날수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수도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목소리도 들을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도 많이 모여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드는 구부러진 길 .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가]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1932년 본과 쾰른 사이의 20㎞ 구간에 놓인 것이 효시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본격적으로 아우토반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2차대전 발발 때까지 4000㎞를 닦았다. 한국의 현재 고속도로 길이가 3100㎞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하다. 히틀러의 아우토반 건설에는 실업자를 줄이고, 전쟁시 군인과 군수물자를 전선으로 신속히 이동한다는 2가지 목적이 있었다.
아우토반의 매력은 역시 고속 질주다. 속도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권장속도’를 실시하는 구간이 많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아우토반은 다시 무한 질주의 공간이 된다. 이 아우토반에 속도 제한을 두는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독일 환경부는 시속 120㎞로 제한하자는 입장이다.
- 김철웅 / 경향신문 여적 (2007.01.03)
[나] 하이네는 철도를 화약과 인쇄술 이래로 '인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꾸어 놓은 숙명적인 사건'이라고 불렀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제 우리의 직관 방식과 우리의 표상에 어떤 변화가 생길 것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다. (중략)
이제 사람들은 세 시간 반 내에 오를레앙까지,그리고 같은 시간 내에 루앙까지 여행한다. 이 노선들이 벨기에와 독일까지 연결되고 또 그곳의 철도들과 연결된다면 어떤 일이 초래될 것인가! 내게는 모든 나라에 있는 산과 숲이 파리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미 독일 보리수의 향내를 맡고 있다. 내 눈 앞에는 북해의 파도가 부서지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일한 하나의 변화가 지니는 두 가지 모순적인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철도는 한편으로 이제까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공간을 열어 놓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이의 공간을 없앴다는 점이다. 슈테른베르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럽의 창을 통해 보이는 전망은 그것이 지닌 심층적인 차원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것은 빙 둘러 서 있으며, 어디나 채색된 평면뿐인 하나의 동일한 파노라마 세계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 시각적 인식에 존재하던 초점심도(焦點深度)는 속도로 인해 가까이 놓여 있는 대상들이 사라져 가면서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다. 이는 전경(前景)의 종말, 즉 산업화 이전 시기에 여행의 본질적인 경험을 이루던 공간 차원의 종말을 의미한다. 전경을 통해서 여행자는 스스로를 자신이 지나치고 있는 풍광과 연관 지었고, 자신을 이 전경의 일부분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그를 그 지역의 풍광과 일치시켰고, 여행자는 이 풍경이 펼쳐질 수 있는 경계 내에 존재했다. 속도로 인해 전경이 해체되면서, 여행자는 이러한 공간 차원을 잃게 되었다.
- 볼프강 슈벨부쉬(박진희 역), <철도여행의 역사>
[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고
빠름은 부지런함이 아니다.
느림은 여유요, 안식이요, 성찰이요, 평화이며
빠름은 불안이자 위기이며, 오만이자 이기이며, 무한경쟁이다.
땅속에 있는 금을 캐내 닦지 않으면
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마음속에 있는 정서의 창을 열고 닦지 않으면
창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정호승의 《위안》중에서
[라]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시간은 자연과 떼려야 뗄 수 없었다. 노동방식, 추수시기나 양털 깎는 계절, 이 모든 것이 농촌의 농사리듬과 함께했다. 중세사학자 J. 르고프가 쓰고 있듯이 그것은 '서두름에서 자유롭고 정확성에 무관심하며 생산성에 개의치 않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도시가 성장하면서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도시의 노동과 사회생활은 전혀 자연에 의존하지 않았으며,그곳에서는 시간이 '구조화되었다'. 시계 장치가 자연의 리듬을 대체했던 것이다. 오늘날 시골의 시간은 도시보다 훨씬 천천히 흐른다는 것은 거의 진부한 표현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휴일이면 도시를 떠나 시간이 '더 많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 왜냐하면 그곳은 도시보다 시간측정이 덜 되기-시계가 적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ㄱ)시계는 사실 시간의 대립물이다.자연이 시간으로 충만해 있다면, 도시 생활은 시계로 넘쳐흐른다. 시청의 시계에서부터 로마도시의 기원을 역사의 출발로 삼는 로마인들에 이르기까지, 상징적으로 시간 측정은 도시화와 밀접하게 공명한다. 기독교교회-이들의 이교도와의 싸움은 자연에 대항한 도시화의 추구라 할 수 있다-는 시계 장치에서 자신들의 우군을 발견했다. 현실생활이나 형이상학적인 면 모두에서 시간의 규율은 기독교와 부합했다.
- 제이 그리피스, <시계 밖의 시간>
[마] 우렁탸게 토하난 긔뎍(汽笛) 소리에
남대문을 등디고 떠나 나가서
빨니 부난 바람의 형세 갓흐니
날개 가딘 새라도 못 따르겟네.
늙은이와 뎖은이 셕겨 안 별í
우리네와 외국인 갓티 탓으나
내외 틴소(親疏) 다갓티 익히 디내니
됴고마한 딴 세상 뎔노 일웟네.
- 최남선, 경부철도가(京釜鐵道歌) 중에서
활동 1. [가] 글에서 아우토반의 속도 제한에 대한 논란이 불거진 이유를 추론하시오. [100자 내외]
활동 2. 만약 볼프강 슈벨부쉬가 오늘날의 고속전철을 타고 여행을 했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평가를 내렸을지 [나] 글을 바탕으로 추론하시오. [200자 내외]
활동 3. [라]의 밑줄 친 (ㄱ)의 명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례를 제시하고 그 이유도 함께 제시하시오. [100자 이내]
논제 1. [나]와 [마]에서 문명을 바라보는 인식에 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설명하시오. [500자 이내]
논제 2. 제시문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의 차이점을 설명하시오. [800자~1,000자]
( 조건 : 차이점을 몇 가지로 분류하고 각각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시오.)
논제 3. 제시문을 바탕으로 다음의 물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서술하시오. [1,000자~1,200자]
(1) 속도와 삶의 질은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가?
(2) 속도는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는가?
(3) 속도는 시간의 유용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가?
참고하세요
[경향포럼] 황진이에게서 배우는 시간철학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어룬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다들 알다시피 이 시조는 황진이의 대표작이자 시조사의 절창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님을 기다리는’ 긴긴 겨울밤과 ‘님과 함께 있는’ 봄날의 짧은 밤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고도의 수사법, 개념어를 전혀 쓰지 않고도 심오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묘한 통사법 등이 가히 ‘언어의 연금술사’라 할 만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그저 애달픈 연정시 정도로만 취급되어 왔다. 기녀라는 신분에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숱한 스캔들 탓이리라.
- 작품속에 담긴 배짱과 여유-
하지만 황진이를 휩싸고 있는 ‘에로틱한 아우라’를 걷어내고 차분히 음미해보면, 이 작품은 시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들로 가득하다. ‘이미 지나간 시간(과거)’을 뚝 잘라서 차곡차곡 넣어두었다가 ‘아직 오지 않은 시간(미래)’에 굽이굽이 다시 펼치겠다는, 이런 과감한 발상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그녀가 보기에 시간은 추상적인 흐름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무엇’이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자르고 붙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순간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의 선분적 틀에서 벗어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즉 과거는 미래가 되고 미래는 과거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지금, 여기’, 곧 현재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해진다. 과거의 상처에 붙들리지 않고, 미래의 성취에 안달할 까닭이 없으므로. 이 작품이 별리와 그리움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특유의 배짱과 여유를 지니고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시간의식은 얼마나 협소하고 빈곤한 것인지. 주지하듯 우리의 근대는 기차와 함께 도래했다. 20세기 초 이 땅에 기차가 등장하면서 우리의 시공간은 단 하나의 척도가 지배하게 되었다. ‘계량화된 속도’가 바로 그것이다. 과거-현재-미래는 기차의 레일처럼 선분적으로 배열되었고, 동시에 모든 시공간의 차이는 일거에 사라지고 말았다. 속도에 대한 광적인 집착 역시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레일 위에서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한다. 그리하여 과거는 늘 낡은 것, 현재는 오로지 미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참을 수 없는 결핍과 권태는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구성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이 속도의 파시즘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럼 속도의 반대는 무엇인가? 느림인가? 아니다. 그것은 리듬이다. 속도가 오로지 타자를 추월하기 위해 돌진하는 것이라면 리듬은 타자들과 뒤엉키면서 시간의 흐름을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 나만의 ‘시간리듬’ 찾아보길-
그것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아니 빠른가 하면 고요하고, 고요한가 하면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고 있다. 황진이의 삶이 그토록 위풍당당했던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익숙한 통념처럼 사랑과 아름다움이 그녀를 빛나게 해준 것이 아니라 예술과 사랑을 뛰어넘는 특이한 삶의 궤적이 그녀를 한 시대를 풍미한 전위로 만들어준 것이다. 아쉽게도 드라마 ‘황진이’에선 여전히 연애와 아름다움의 화신으로 다루어지고 말았지만.
2007년 새해가 밝았다. 누구나 한번쯤 ‘시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되짚어볼 때이다. 새해에는 속도라는 단 하나의 척도가 지배하는 ‘직선의 판타지’에서 벗어나 낯선 가치들이 종횡으로 엮이는 자기만의 독특한 리듬을 실험해보는 건 어떤가. 오래 전 황진이가 그랬던 것처럼.
- 고미숙 (연구공간 ‘수유+공간’ 연구원) / 경향신문 (2007.01.14)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같이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증기기관차. 그림에서만 보던 증기기관차가 끄는 기차를 영국의 호수지방에서 처음 타보았다. 작은 증기기관차에 달린 객차에 올라 산골 기차역에서 바닷가까지 했던 짧은 여행은 잊기 어려운 추억이다.
디젤 기관차와 전기 기관차에 밀려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기차라고 하면 하얀 연기와 ‘칙칙폭폭’ 소리를 내는 증기기관차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해리 포터가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갈 때 타는 기차도 맨 앞에서 증기기관차가 끌고 숲 속을 누비고 하늘을 난다.
증기기관차를 움직이는 증기기관은 원리상으로 보면 아주 간단한 기계장치다. 증기기관은 증기가 가지고 있는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어 물체를 움직인다.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드는 보일러가 붙어 있고 수증기의 팽창과 수축에 따라 피스톤이 움직인다. 바퀴를 움직이려면 피스톤의 직선운동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터빈이 수증기의 팽창과 수축을 원운동으로 바꾼다. 증기기관의 장점은 어떤 연료를 사용하든 수증기만 만들 수 있다면 구동할 수 있다는 것.
증기기관의 원리에 대한 첫 언급은 로마가 번성했던 1세기의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사람 헤론은 증기의 압력이 기계적인 운동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원리가 실생활에 사용되지는 않았고 간단한 도구도 운동의 원리를 보여주는 정도에 그쳤다.
철학의 대상에서 산업 원동력으로
실용적인 증기기관은 16세기 아랍 학자 타키 알-딘이 처음 만들었다. 17세기에는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기관이 등장해 절구의 공이를 움직이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는 효율도 낮았고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 정도였다. 예를 들어 데니스 파팽 같은 사람은 증기기관을 당시에 뜨거운 철학적 논쟁의 대상이었던 완전한 진공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를 푸는 도구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증기기관은 산업에 응용되면서 세상을 바꾸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개발된 토머스 세이버리와 토머스 뉴커먼의 증기기관은 처음으로 산업에 응용되었다. 이 기관은 아주 느리고 사람이 지켜보면서 밸브를 따로 여닫아야 했지만 갱도에서 물을 길어내는 데 이용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개발된 제임스 와트의 엔진은 효율도 좋고 끊김 없이 운동해 산업에서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산업사회를 끌고 갈 심장이 마련된 것이다. 현재도 세계에서 만들어내는 전기의 87%가량은 증기기관을 통해 생산된다.
증기기관이 공장을 돌리는 원동력이 되어 대량생산과 소비의 사회를 만들어낸 것도 놀랍지만 탈것들에 증기기관이 실려 인간이 빠른 속도를 경험하게 된 것은 더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 증기기관차가 있다.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고 그 위에 조지 스티븐슨이 만든 증기기관차 로커모션호가 달린 것은 1825년이었다. 로커모션호는 90t 무게의 객차와 화차를 끌고 시속 16㎞의 속도로 운행했다. 1830년이 넘어서면서 증기기관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장거리 운송의 주요한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세계 어디서나 하얀 연기를 뿜으며 힘차게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899년 경인선에 증기기관차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주요한 운송수단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도시의 삶 바꿔놓다
처음 본 증기기관차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편으로는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한말에 일본을 방문해 증기기관차를 처음 보고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뛰었다고 했던 인상기가 그 놀라움을 대변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촌에서 도시로 거처를 옮긴 어떤 시인이 처음 본 기차가 무서워 땅에 바짝 엎드렸다고 한 고백은 기차에게서 느낀 두려움을 극명하게 표현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움도 두려움도 무뎌지고 굉음은 잦아든다. 하지만 증기기관차는 소리 없이 우리 삶의 씨줄과 날줄을 다시 짜는 데 점점 더 깊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우선 사람들의 시간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상행선과 하행선 복선이 없던 시절에 기차가 정확한 시간에 운행하는 것은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서 아주 중요했다. 기차는 정해진 시각에 정거장에 도착하고 출발해야 한다. 기차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모두 시계를 맞추어 놓고 그의 운행에 따라 다른 삶의 시간표들을 짜야 했다. 해가 뜨고 지는 데 따라 임의적으로 시간표를 변경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차는 공간적인 구성도 바꾸어 놓았다. 철도는 연속적이지만 기차가 머무르는 역은 띄엄띄엄 놓여 있다. 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산다. 새로운 도시도 만들어지고 철도 바깥에 놓인 공간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 차창 밖의 공간과 역에 내려 직접 만나는 공간 사이의 차별은 점점 더 심해진다. 더 나아가 기차는 사회적인 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누구나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승차권을 타고 모르는 사람들 곁에 앉아 여행을 하면서 성별, 나이, 신분의 차이는 희미해진다.
섬진강 기차마을의 시간 여행
시간의 힘은 무섭다. 산업사회를 일구고 시공간과 사회 구조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친 증기기관차가 이미 현실을 떠나 기억 속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요즈음은 증기기관차를 보려면 박물관에나 가야 한다. 실제로 움직이는 기차는 더 드물다. 처음 증기기관차를 운행했던 영국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토머스 증기기관차와 그 친구들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여러 곳을 들른다. 그곳에 가면 한 번씩 증기기관차가 끄는 객차를 타고 짧은 거리를 여행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라남도 곡성에 있는 섬진강 기차 마을에 가면 탈 수 있다.
1998년 전라선 복선화 공사로 곡성에서 압록까지 13.2㎞가 폐선이 되었다. 그곳에 1960년대에 실제로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와 같은 형식의 기관차가 끄는 관광용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곡성에서 표를 사서 기차를 타면 섬진강변을 달려 종착역인 가정역까지 가는 데 25분 걸린다. 가정역에서 내려 하이킹이나 래프팅을 할 수 있는 것은 덤이다. 다시 돌아와 곡성역 구내에 마련된 철도 공원에서 한나절 보내면 긴 여름해도 서산을 넘는다.
산업화를 일구었고 근대의 표상이었던 증기기관차에서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느끼는 것은 어쩌면 아이로니컬한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운행되고 있는 기차에서는 볼 수 없는 화차와 화부가 있고 여전히 기계가 아닌 사람의 할 일이 남아있는 증기기관차는 그것이 열었으나 따라가지 못한 현대의 촘촘함 속에선 오히려 막힌 숨을 틔워주는 존재가 되었다.
- 주일우 / 중앙Sunday 제22호 (2007.08.11)
[기술속사상] 비행기가 사라지고 있다
(18) 항공기술의 발달
날 수 없어 더 날고픈 인간욕망의 산물 ‘항공기’
무수한 실패의 연료가 타서 내뿜는 불꽃
‘편리-재난’ 양날의 칼도 어쩔 수 없는 운명
음속도 돌파했던 콩코드기는 은퇴했지만
탄생 100년 만에 레이더에서도 사라져 속도만
» 1953년의 대한국민항공사 광고. 항공기가 갈 수 있는 만큼이 이 세계의 범위다. 당시 유럽은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 전 런던에서 미국으로 가는 여객기에 액체폭발물을 실어 공중에서 폭파시키려는 테러기도가 발각된 데서 보듯이, 항공기는 참으로 편리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끔찍한 재난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양날의 칼 같은 것이다.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항공기라는 것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항공기의 제물이 되고 만다. 자신이 만든 글라이더로 2천회나 비행에 성공했던 독일의 항공기술 선구자 오토 릴리엔탈은 추락사고로 죽었으며,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한 오빌 라이트는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추락하여 크게 다쳤다.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발을 땅에 디디고 살게 되어 있는 한 하늘을 날고자 한다는 것은 운명에 대한 거역이요, 이는 죽음이라는 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2차원의 평면을 떠나 더 크고 넓은 차원을 개척하고자 열망하는 것이 또한 인간의 운명이라면, 항공기를 개발하는 것도 인간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보잉747’ 괴물의 한국 상공 출현
항공기란 언제나 이 세계의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도구이자 삶의 방식이었으며, 또한 바로 그런 사실 때문에 숱한 재난의 표상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테러리스트들이 항공기를 테러의 표적이자 수단으로 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항공기란 매력적인 기계는 편리와 재난, 혹은 동경과 공포라는 이율배반을 항상 품고 있었다. 항공기의 이미지는 항상 거대한 괴물과 문명의 이기라는 두 가지 면에서 시소게임을 했는데, 꼭 시커멓고 무시무시한 폭격기만 그런 게 아니라, 대형 여객기도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
지금이야 보잉747은 전세계의 공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비행기가 돼버렸지만, 1968년에 처녀비행을 하고, 1973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운항을 시작했을 때는 센세이셔널했다. 열명의 승객을 한 줄에 태울 수 있을 정도의 폭 넓은 와이드 바디에 2층으로 된 구조, 70t의 연료를 싣고 최대이륙중량 400t이나 나가는 이 괴물비행기는 전세계의 공항의 시설기준을 바꿔 놓을 정도로 파격적인 규모였으며, 이 비행기의 디자인, 역사, 운용에 대해 수 많은 책과 다큐멘타리 영화들이 나와 있다. 김포공항도 점보기의 취항으로 2468m의 활주로를 3200m로 확장하고 공항청사도 부분적으로 확장해야 했다. 점보기의 취항은 비행기가 커졌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간 항공여행의 보편화와 대중화를 의미했고, 보트피플에서부터 미국으로 언어연수를 떠나는 대학생, 노트북 컴퓨터를 든 비즈니스맨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를 체험하게 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비행기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가는 관문인 것이다.
사실, 테크놀로지의 역사는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 끊임없이 놀라운 쇄신을 이루며 새롭고 깜짝 놀랄 성과를 보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근저를 흐르는 모티브는 반복이다. 예전에 쓰였던 기술이 겉모습만 바꿔서 다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양차 세계대전을 겪고, 20세기 후반의 컴퓨터 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항공기 자체는 엄청 나게 발전한 것이 사실이지만, 항공기 이미지를 둘러싼 패러다임은 형태를 바꿔서 반복하여 나타난다. 꼬리날개와 동체가 따로 없이 오로지 날개로만 된(flying wing) 스텔스 폭격기 B2 스피릿의 형태는 실은 1929년 노드롭에서 만든 플라잉 윙 X216H로 시작하여, 1945년의 YB49로 다시 나타났다가 계속 되는 실패 끝에 다시 한번 더 나타난 것일 뿐이다. 사실 플라잉 윙은 이미 1910년 독일의 항공학자 후고 융커스(Hugo Junkers)가 실험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융커스의 1910년대의 플라잉 윙과 오늘날의 스텔스 폭격기 B2의 차이는 무엇인가. 많은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차이를 요약하자면 플라잉 윙의 불안정한 비행특성을 바로 잡아줄 컴퓨터가 옛날에는 없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플라잉 윙과의 큰 차이다.
억세게 운 좋았던 라이트 형제
석양을 배경으로 날으는 여객기. 항공여행이 보편화되면서 이 세계를 보는 우리의 눈도 바뀐다.
<항공기>라는 책을 쓴 데이빗 패스코가 항공기를 엔지니어링의 기적이라고 했을 때 ‘기적’이라는 말에는 긍정적인 함의도 있지만, 항공기술발달의 역사는 곧 뼈아픈 실패의 역사이기도 하다. 2003년에 라이트형제의 최초의 동력비행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항공우주국의 엔지니어들이 그들의 비행기 ‘플라이어(Flyer)’를 원형 그대로 만들어서 풍동실험을 했을 때, 엄청난 첨단기술로 무장한 그들은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플라이어를 날게 할 수 없었다. 플라이어는 비행특성이 극도로 불안정하여, 곧바로 날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엔지니어는 라이트형제가 비행실험 도중 목을 부러트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극도로 운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라이트형제의 앞뒤로는 운 나쁜 발명가, 엔지니어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 항공 엔지니어링의 역사이다. 라이트형제 이전에 무동력 글라이더를 가지고 2천여회의 시험비행을 한 끝에 1896년 사고로 죽은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에서부터, 초음속 폭격기 발키리를 개발하다 수 많은 트러블 끝에 죽은 조종사들, 초음속 여객기 TU144를 미소합작으로 개발하려다 엄청난 돈만 쓰고 실패해버린 프로젝트, 그 여파로 직장을 잃거나 엉뚱한 곳으로 전보발령된 엔지니어 등, 항공 엔지니어링의 역사에는 뼈아픈 실패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찬란한 항공기의 이미지는 실패라는 연료가 타서 내는 불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항공기는 나는 기계일 뿐 아니라 보는 기계이고 꿈의 기계이며 폭력과 파괴의 기계이기도 하다. 항공기의 미래는 무엇인가? 항공기는 나날이 빨라지고 커지고 더 안전해지고 있지만, 또 한가지 특징은 우리의 시각장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항공기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라지고 있다. 항공여행이 보편화됨에 따라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고, 사람들은 어떤 항공사의 표를 어떻게 사면 싸다는 것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들이 이번에 태평양을 건너 뉴욕에 가는데 최초로 플라이 바이 와이어 방식으로 조종되며 최초로 종이에 설계도를 그리지 않고 전적으로 컴퓨터상으로만 설계된 항공기 보잉777을 탄다고 해서 특별히 흥분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항공여행이 흔해지는 정도에 비례하여 항공기의 모습은 우리의 시각장에서 사라진다.
군용기도 사라진다. 항공기라는 대상으로서는 훤히 드러나는 가시성을 가지고 있는 민간항공기와는 달리, 군용기는 훨씬 미묘한 가시성의 전략을 가지고 사라진다. 군용기는 적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눈이란 것이 인간의 육안 만이 아니라 첨단 레이더와 센서로 발달해 가자, 눈에 띄지 않기 위한 기술도 첨단화된다. 오늘날 생존을 위한 비가시성은 스텔스 기술이라는 형태로 결정화되어 있다.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군사적 가시성의 궁극적 목표인 것이다. 그것은 육안에서만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텔스 기술의 핵심은 레이더 스크린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더 빨리 더 크게 더 안전하게
항공기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속도다. 세계유일의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는 현역에서 은퇴했지만 그 속도는 숫자로 남아 있다. 총알보다 빠른 비행기 SR71도 마찬가지이다. 마하3.5의 속도에서 한번 유턴하려면 회전반경이 수백㎞에 이른다는 이 전설적인 비행기의 속도도 숫자상의 전설로만 남아 있다. 프랑스의 평론가 폴 비릴리오가 어릴 적의 전쟁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독일군이 라디오 방송이 전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격해 오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고 했던 전격전(Blitzkrieg)의 속도처럼, 항공기의 속도는 우리가 그것을 지각하기 전에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지각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다.
- 이영준 (기계비평가) / 한겨레신문 (2006.08.17)
[기술속사상] 디젤기관차와 KTX, 시속 그 이상의 차이
(16) 시대의 경관으로서의 철도기술
최고 시속 150㎞와 300㎞ 수치상의 차이 뒤엔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가 있고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 뒤엔 열차를 타고 바라보는 경관의 차이가 있다
기관차가 근대의 풍경을 보존했다면 KTX에서 풍경은 영화의 스크린처럼 사라진다
» 서구에선 옛날 철도모델을 그대로 쓰는 등 과거 테크놀로지가 잊혀지지 않고 있는 반면, 한국은 과거의 테크놀로지가 현재와 연속성을 갖고 있지 않다. 사진은 독일 쾰른 역에서 1년에 한번 운행되는 증기기관차.
한국의 유일한 철도박물관인 경기도 의왕의 철도박물관에 가면 두 가지 흥미로운 전시물이 눈에 띈다. 하나는 철도기술연구원에서 만든 철도의 미래에 대한 모형이다. 도시의 일부를 재연하고 있는 이 모형은 항구와 고속도로, 고층빌딩을 한 장면 속에 묘사하고 있다. 철도는 이 것들을 연결하는 혈관 같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항구에 내려진 화물과 승객은 철도편으로 도시로, 더 넓은 세계로 옮겨 가며, 그 세계는 고층빌딩들이 솟아 있는 첨단의 장소이다. 철도가 꿈 꾸는 미래의 모습은 철도가 도시의 주요부분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회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자동차와 항공기가 보편화된 이후 철도는 항상 주변화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기존 선로의 미래철도 ‘틸팅 열차’
또 하나 눈에 띄는 전시물은 자기부상열차에 대한 것이다. 독일, 일본, 프랑스 등 각 나라가 개발하고 있는 자기부상열차를 소개하고 있는 게시물에 부속된 전시물은 자기부상열차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본의 신칸센 500계 열차의 모형이다. KTX가 자기부상열차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로 있는 걸로 봐서, 일반인들의 뇌리 속에는 ‘미래의 고속첨단 열차=자기부상 열차’라는 등식이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 같다. 박물관이 이런 일반인들의 선입견적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데, 그것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철도기술의 현황과 실제 현장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인에게는 철도의 미래는 자기부상 열차라고 알려져 있지만 당장 실용예정인 다음 기술은 차체가 기울어져 기존선로에서도 시속 200킬로미터까지 안정성 있게 달릴 수 있는 틸팅 열차이다. TTX(Tilting Train eXpress)라 불리는 이 기술은 새로 선로를 깔아야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KTX와는 달리, 기존 선로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주요한 철도기술로 세계 각국에서 각광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7년부터 충북선에서 TTX의 시험운행이 있을 예정이다. 철도기술이 향상하면서 우리 생활에서 철도가 가지는 위상도 변한다.
지금은 철도여행의 낭만이 많이 줄었지만, 어릴 적에는 기차를 올라타는 순간부터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진입로 같이 느껴졌다. 실제로 1980년대에 용산역에서 출발하던 목포행 호남선 완행은 열차 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전라도였다. 옆자리의 아저씨는 요즘 젊은 것들은 농촌으로 시집 오면 당장 죽기라도 할 듯 꺼린다면서 혀를 끌끌 차셨고, 차장은 안내방송에 대고 막걸리 같은 목소리로 울고 넘는 박달재를 읊었다.
호남선 완행 타는 순간 전라도
» 2004년 개통된 케이티엑스(KTX)가 힘차게 달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외부세계와는 단절된 철길이라는 구조, 일정한 주기로 철커덕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우리를 향수의 세계로 밀어 넣는 열차 바퀴의 오묘한 음률, 버스와는 다른 느낌의 객차 내부, 그리고 삶은 달걀과 사이다, 천안의 명물 호도과자.... 지금은 열차에서 내리면 바로 다른 교통수단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철도여행이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라는 느낌은 많이 사라졌다. 거기다가 용접해 붙여서 이음매 없이 긴 장대레일 때문에 더 이상 규칙적인 철커덕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삶은 달걀과 사이다는 다른 메뉴로 대체되었고 모든 창과 문은 밀폐형이라 시골의 공기냄새를 맡을 수 없다.
사실 정보의 고속도로를 따라 정보들이 아무런 물리적 이동수단에 의존하지 않고도 순간이동을 하는 시대에 실제의 땅 위에 무거운 쇳덩어리를 써서 사람과 물건을 나른다는 것은 더 이상 급변하는 시대를 대표하는 표상도 아닌 것 같으며, 그에 대해 글을 쓰거나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는 것도 별로 신선한 주제가 아닌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탈근대의 첨단기술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요즘이야말로 근대의 기술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같은 세기가 철도와 사진을 발명했다고 한다. 양자는 근대의 시각장치(vision machine)이며 이동성과 깊이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870년대 미국 서부에서 활동했던 윌리엄 헨리 잭슨은 사진과 철도를 결합한 사진가였다. 그는 철도를 이동수단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객차를 개조해 자신의 작품을 고객들에게 선보이는 갤러리로 쓰기도 했다. 사진과 철도의 이런 결합은 남북전쟁 이후 백인들이 미국 서부를 더 왕성하게 개척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잭슨에게 철도는 시작장치이기도 했다. 그는 무거운 사진장비를 나르기 위해 노새를 쓴 경우가 많았지만, 그가 사진 찍은 땅의 범위는 기본적으로 철로를 따라 나 있었다.
자동차와 항공기의 발달이 근대의 풍경을 빠른 속도로 지워버린 것이라면, 철도가 근대의 풍경을 보존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워 보인다. 누구나 잘 알다시피, 철도는 철저하게 근대의 산물이고, 근대를 가져 온 원동력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과 재화를 포함하는 물질의 순환이 빨라지고 규칙적이 되고 능률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속도감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1825년 조지 스티븐슨이 만든 로코모션이란 이름의 증기기관차가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를 시속 24킬로미터로 주파했을 때 이는 이 세계를 다르게 보이게 할 만큼 경이로운 속도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속도가 어지러웠다고 하니 말이다.
한국의 철도는 1960년대 이래로 지금까지 디젤 동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현재는 급속하게 전력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2004년의 KTX의 개통에 이은 전력화와 고속화 추세에 따라, 한국형 고속철도인 G7의 개발이 진행 중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발전이 현재 한국의 철도를 디젤동력으로 표상되는 과거와 전력화, 지능화, 고속화로 표상되는 미래로 갈라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는 디젤동력은 1960년대에 영원한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진 증기동력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옛날 철도모델을 그대로 쓰고 있는 서구와는 달리, 과거의 테크놀로지와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의 철도 기술의 특성이기도 하다.
실제로 디젤기관차와 KTX는 아주 다른 패러다임에 속하는 기계이다. 그것은 최고속도 150킬로미터와 300킬로미터의 차이이기도 하고, 3천 마력과 1만6천8백마력의 차이이기도 하다. 디젤과 KTX는 단지 수치상의 차이일 뿐 아니라,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이기도 하다. 공기역학적 고려는 전혀 없이 직사각형의 딱딱한 디자인에 동력대차와 브레이크, 연료탱크 등 많은 기계부분들을 겉에 노출시키고 있는 디젤기관차와는 달리, 고속의 KTX의 설계에서는 공기역학적 구조가 아주 중요하게 고려되어, 차체는 항공기를 닮은 매끈한 유선형으로 되어 있으며, 전기를 받아들이는 펜타 그래프 외에는 어떤 것도 노출시키지 않고 있다. 고속으로 달리는 KTX의 특성상 조그만 장애물도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주행상태를 점검하는 많은 수의 센서들이 열차 내외부와 선로 주변에 장치되어 있는 것도 KTX가 기존의 철도와 다른 점이다.
과거과 단절된 한국 철도기술
이런 차이는 열차를 타고 바라보는 경관의 차이로 나타난다. KTX에서는 더 이상 지리적 참조점을 알아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풍경은 그냥 영화의 스크린처럼 사라질 뿐이다. 기계적 패러다임의 차이가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기존 선로를 훨씬 빠른 속도로 달릴 틸팅 열차가 실용화되면 새로운 양상을 띨 것이다. KTX 만한 성능의 고속열차는 없지만 많은 연구자료를 담고 있는 철도박물관이 수도 없이 산재해 있는 미국이나 영국과는 달리, 제대로 된 철도박물관은 없지만 최첨단의 철도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철도기술은 분명히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이영준/기계비평가 , 한겨레신문 (2006.08.03)
지방경제 희망열차? 거꾸로 달린 KTX
서울 손님 태워 올 줄 알았더니…지방 소비자까지 다 뺏어 가네
#1. 고속철도 KTX의 경부선 출발역인 서울역 회의실은 대부분 꽉 들어찬다. 여기서 열리는 사업설명회나 강연회에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 많이 참석하기 때문이다. 대구에 사는 한국웃음치료센터 정해성 대표도 이곳을 자주 이용한다. “회의실 임대료가 싸고, 전국적으로 사람을 모으기 쉽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2.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는 김모(27)씨는 지난주 서울 신사동의 한 성형외과를 찾았다. 3개월 전에 한 가슴 확대 수술에 후유증은 없는지 검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오전 8시 부산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건 오전 10시40분. 택시를 타고 신사동 병원에 도착하니 오전 11시20분쯤이었다. 점심시간 전에 검사를 마친 그는 “수술 비용이 부산보다 비싸지만 신뢰도를 생각해 서울 병원을 택했다”고 말했다.
김씨가 수술을 받은 이 병원은 고객의 30%가 지방 사람이라고 한다. 보디라인 전문병원인 바람성형외과 이지원 실장은 “KTX 개통 이후 대구·부산 등 지방 고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KTX 운행이 올해로 4년째를 맞고 있다. 당시 개통을 학수고대했던 경상도 경제에 KTX는 고통으로 변했다. 지방경제를 살릴 것이라던 고속철도가 오히려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KTX 패러독스(역설)’다. 균형발전이라던 취지와는 달리 지방의 사람과 돈이 고속철을 타고 서울로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가 가장 심한 곳이 대구·경북이다. 김포~대구 간 국내선은 지난 연말 아예 폐지됐다. 철도에 손님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이 지역 상인들은 “KTX 개통 후 서울이 ‘블랙홀’로 변했다”며 아우성이다. 그중에서도 타격을 많이 받은 분야가 의료와 쇼핑이다.
◇서울은 ‘블랙홀’=대구·부산 사람들이 지난해 서울 소재 병원에서 쓴 돈은 1267억원이다. 의료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성형·미용에서 쓴 돈은 빼고서다. 성형치료뿐 아니라 암 등 중환자들도 서울로 올라온다. 대학병원은 물론 일반 병원에도 지방 환자가 꽤 있다. 성북구 안암동 소재 고운숨결내과 측은 “지방 환자가 20% 이상”이라고 밝혔다.
물론 고속철도 개통 이전에도 지방 환자들은 서울 병원을 선호했다. 소득이 늘고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그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대구시 안문영 보건과장은 “대구의 5개 대형 병원이 이런 문제에 대처하기 공동 홍보 등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구·경북 주민들이 서울 현대백화점에서만 쓴 돈은 250억원이었다. 이 백화점은 이들이 지난해 서울에서 쓴 돈은 이것의 열 배쯤인 2500억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서울역 갤러리아백화점 콩코스점은 지방 고객이 지난 4년간 매년 10%씩 늘어났다. 부산에서 온 고객은 지난해 22%나 늘었다. 이 백화점 판매기획팀의 박세호 팀장은 “이런 통계는 신용카드를 쓴 고객만 대상으로 한 것”이라며 “현금 결제를 감안하면 더 불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용산역에 있는 아이파크몰도 손님 중 약 25%가 지방 고객이라고 한다.
KTX는 지방 부동산 경기 침체의 한 요인이라는 비난도 받고 있다. 지방에서 돈을 번 사람들이 부동산을 살 때는 서울과 수도권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삼성증권 부동산컨설턴트 김재언 과장은 “최근 2~3년간 대구·부산 지역의 고액 자산가들이 압구정동·대치동 등 강남의 아파트를 상당히 구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방학이 되면 학생들도 서울로 올라온다. 부산에 사는 고3인 김모양은 매주 토·일요일이면 서울 강남의 학원에 다닌다. 그는 “대치동 일대 학원은 특히 방학 때면 영어와 논술 강의를 듣기 위해 상경하는 지방 학생이 많다”고 말했다.
- 대구=송의호·이봉석 기자 - 중앙일보 08.05.14
‘블랙홀 KTX’ 돈도 사람도 서울로 서울로
‘1시간 생활권’ KTX 되레 지역균형 역효과 불러
부유층 중심으로 교육·문화·의료 집중화 심화
대전 대학들 ’수도권 통근’ 교수 2배로 늘어
“서울 큰 병원 가는데 2시간도 안걸려요.”
이아무개(63·여·대전시 서구 둔산동)씨는 지난해부터 한달에 1번씩 서울 ㅎ병원을 찾아가 진료를 받는다. 이씨가 ‘대전지하철~고속열차~서울지하철’을 이용해 병원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시간50분 정도다. 그는 2000년 봄부터 고혈압과 당뇨 증세로 대전의 한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고속열차가 개통된 뒤에는 서울사는 딸의 권유로 병원을 옮겼다. 그는 “교통비가 더 들긴 하지만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아무개(37·대구시 수성구 사월동·주부)씨는 지난 주말 대구에서 케이티엑스를 타고 서울의 대학 친구들 모임에 참석했다가 밤 늦게 내려왔다. 그는 “예전에는 서울 갈 엄두를 못냈는데 고속열차 덕분에 공연이나 전시회를 보러 서울 나들이가 잦아졌다”고 말했다.
고속열차 개통 3년이 지나면서 교육·의료·문화 등 절대 우위에 있는 서울이 지방의 인력과 자원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역할이 점차 뚜렷해 지고 있다. 시속 300㎞의 속도 혁명이 가져온 역효과인 셈이다.
특히 서울과 1시간 생활권인 충남 천안·대전은 ‘서울시 천안구’, ‘대전구’로 불리며 부유층과 지식층을 중심으로 의료, 거주에서 수도권 집중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의료보험공단이 집계한 대전 거주자의 서울 요양기관 진료 현황을 보면, 고속철도가 개통된 2003년 5만7196명에서 2005년에는 6만5524명으로 1만여명 가까이 늘었다. 진료비도 260억4226만원에서 315억1267만원으로 증가했다.
대전은 완만한 인구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나, 유독 서울·경기 등 수도권은 전출이 전입보다 많다. 대전에서 서울로 이사간 순 인구(전출자-전입자)는 2004년 2085명에서 2006년 2941명으로 늘었다.
<한겨레>가 대전의 2개 대학 전임강사 이상 교수들의 출퇴근 현황을 조사했더니, ‘가’ 대학은 2004년 199명 가운데 12명(6.03%)이 서울에서 출퇴근을 했으나, 지난달 말에는 249명 가운데 33명(13.25%)으로 늘었다. ‘나’ 대학도 2005년 252명의 교수 가운데 수도권 거주자는 30명(11.9%)이었으나 현재는 269명 가운데 53명(19.7%)으로 증가했다.
»>> KTX 정기권 이용현황
‘가’ 대학 ㅈ아무개(46) 교수는 “광고·디자인 분야는 서울 강남의 유행을 알아야 강의할 수 있는게 현실이고,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이들과의 원활한 소통과 자녀 교육 문제도 있어 서울을 택했다”고 털어놨다.
고속철도 서울~대전 정기권 이용자는 2005년 13만7천명에서 2006년에는 21만5천명으로 늘었다. 올해는 4월말 현재 8만4천명(6.7%)에 이른다. 코레일 여객마케팅팀 관계자는 “정기권 증가는 서울~대전 출퇴근자 증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구의 한 대학 교수(음대)는 “집이 서울이어서 과거에는 주말에만 올라갔는데 요즘에는 주중에도 수시로 간다”며 “이런 생활을 하는 동료 교수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토연구원 지역연구실 이용우 박사는 “중앙정부는 국가균형발전계획을 차질없이 추진하고 지방정부는 지역 특성을 살리면서 주민 바람에 근접하는 수준의 도시개발을 해야 서울 집중화가 다소 완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 대전·대구/손규성 송인걸 박영률 기자 sks2191@hani.co.kr / 한겨레신문 2007-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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