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할머니
“부웅 부웅”
“통 통 통 통 …”
“점순이 어매-, 얼른 오랑께, 임자도 배가 시방 뜰 모양이여.”
“뚜갱아, 니 아부지 손 꼭 잡어라 잉, 안 그라먼 큰일난다 잉.”
“워-, 워-, 짐이요, 짐. 짐.”
“강남호-, 영신호-, 빨리 발판 떼고 배 좀 빼요, 빼. 갈칫배가 들어오고 있소.”
“하역 분회 3조, 3조. 완도호 해태 좀 퍼 주시오.”
서남 해의 촘촘히 박힌 섬들로 둘러쌓인 목포시의 선창은 뱃시간만 돌아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대부분의 여객선들이 아침 9시에 출항을 하며, 또 점심나절을 전후해 서너 시간 동안 출, 귀항하는 데 선창 사람들은 이 시간을 ‘뱃시간’이라고 부른다.
부두는 빽빽이 밀집한 각양각색의 배들로 바다로 향한 출구조차 찾기 힘들고, 배마다 붐비는 사람들의 외침 소리, 기계의 소음이 낯선 사람들의 귀와 눈을 금방 피곤하게 만들만큼 요란스럽기 짝이 없다.
어선, 여객선, 화물선, 유람선, 무역선, 경비정, 병원선 등이 종류, 형태, 색채, 기관의 차이로 시청각적인 혼잡을 이루는 바다는 본래의 빛깔조차 잃은 듯 암울한 그늘 속에 묻혀 있고, 하늘은 온갖 배의 연통에서 내뿜는 매연으로 일광마저 차단되어 버린 불쾌한 짙은 회색을 띤다.
육지는 육지대로 자동차의 경적 소리, 마차 소리, 가축 울음소리,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 짐자전거의 벨 소리들로 소리의 전시장을 이루고, 그것들의 틈새로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길길이 날뛰고, 부딪히고, 외치며 살아간다.
악다구니를 벌리고, 싸움질을 하고, 훔치고, 짓밟고, 밟히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곳,
생활 이하의 생존을 위해 투쟁이라도 하는 듯 그들은 삶의 밑바닥을 조금의 정신적 여유도 없이 헤맨다.
피부에 와 닿는 치열한 생존 경쟁.
접대부와 음담 패설로 실랑이를 벌이는 고깃배 선원의 소금기 흐르는 까무잡잡한 피부.
몇 푼의 이해 득실을 위해 양심을 속이기를 조금도 서슴지 않는 장사치의 비굴한 웃음.
허술한 농어민의 얄팍한 주머니만을 노리는 소매치기의 손가락 사이에 끼면 면도날 반쪽
폭력과 협박으로 매음녀의 간을 빼먹는 기둥서방의 기름진 뱃가죽.
이들에게서 단 한가지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살기 위해서, 그것도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억척스런 생활태도 뿐이다.
전국적으로 가장 억세고, 간사스럽다고 해서 이 도시를 ‘하와이’니 ‘짠물’이니 하는 것도 모두 이 선창 가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옳을 것이다.
이 부둣가에서 일본할머니는 땟국물흐르는 꼬맹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오고 있다.
장사하는 점포래야 골목 한 귀퉁이에 붙은 다썩어가는 나무 판자로 된 궤짝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이것만이 일본 할머니네 두 식구가 생계를 유지하여 온 유일한 보루였다.
부두로 연한 아스팔트길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이와 평행으로 달리는 ‘휘파리 골목’이라 불리는 매춘분 집단 거주 지역이 있는데, 부두와 휘파리 골목을 관통하는 샛골목의 입구에 반다지 두 개를 합해 놓은 정도의 일본 할머니의 점포가 쪼그리고 있다.
지은 지가 20여 년이 지난 지라 그동안 풍우한설에 페인트 자국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을 뿐이니라, 썩은 판자는 거무틔틔하다 못해 군데군데 파란 이끼로 얼룩져 있고 못 빠진 구멍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손으로 만지면 부석부석 부서져 버릴 만큼 썩어서,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덜컹거리는 판자소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위태로움을 느끼게 조차한다.
5척도 안 되는 일본할머니가 들어가 앉으면 다른 사람의 등판조차 들이밀 수 없는 비즙은 점포를, 그녀는 비가 오나 눈보라가 몰아치나, 하루도 빠짐없이 열어 왔다.
새벽같이 문을 열고 자판을 펴면 밤이 이슥하도록, 일본할머니의 초췌한 모습을 어둑어둑한 판자 점포 속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자판이래야 겨우 책상넓이 정도 밖에 안되지만 알사탕, 굴뚝과자, 오리과자, 튀밥 꽈배기 등 먹을 것으로 시작해서 장난감 권총, 리본, 딱지, 고무풍선, 저금통장 등 별의 별 것들이 형형 색색으로 오밀조밀하다.
일본할머니의 손님들은 대부분이 코흘리개 꼬마들이라서 순진하고, 양심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될 때가 있다.
철없고, 장난기 심한 녀석들은 돈도 내지 않고 알사탕을 하나씩 집어들어 도망치는가 하면, 5원 짜리 동전을 던져주고 10원짜리 과자를 가져 가버리는 욕심쟁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할매, 나 사탕 하나만 줘.’ 하는 눈치로 자판 앞을 떠날 줄을 모르고 군침을 흘리는 철부지들도 일본할머니를 영 난처하게 만들곤 한다.
하루 종일 팔아봐야 몇 백 원에 불과하고, 거기에서 남은 들 고작 1~2백 원 안팎인 데 한 둘 거저 줘버리면 하루동안 헛장사가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철없고 귀여운 어린아이들의 간절한 시선을 묵살해버리기에는 너무 박절한 것 같아 몇 번이고 “아가, 엄마한테 가서 돈을 타 오너라’ 하고 구슬리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다가. 그래도 그냥 와서 맨 손을 내밀면 ‘다음에는 돈을 가져와야 한다’ 하고 알사탕을 집어 줘 버린다.
아무 것도 모르는 꼬마 애들에게 자꾸만 ‘돈 돈 돈’ 하는 자신이 무척이나 민망하고, 죄책감 마저 들어 항상 마음이 무거웠지만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오래 전부터 다른 장사를 해 볼까 하고 여러 차례 생각도 해 봤지만 노쇠한 신체와 미미한 자본은 20여 년 간을 이 판자 점포를 떠나게 하지를 못하였다.
이 선창 가에서 일본할머니 만큼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사람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몇 년 혹은 십수넌동안 모을 만큼 돈을 모았으면 자녀의 교육상, 사업상 의 이유로 더 큰 도시로 떠나버리곤 해버리기 때문에 선창의 주인은 자꾸만 바뀌어 왔다.
누구하나 이 선창 바닥에 미련이나 애착을 가지고 지켜 나갈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원이 아닐 만큼 언제부터인가 이곳은 人情의 불모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초라하고 볼품 없긴 하지만 꼭 같은 곳에서 꼭 같은 장사만을 20여년 간을 계속해 온 일본 할머니의 판자 점방은 날이 갈수록 명물이 되어갔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일본 할머니에 대한 얘기가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동정 어린 시선 마저 보내는 이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주위에서 장사하는)“일본 할머니, 일본 할머니” 라고 불러 대는 통에 요즈음은 너나 할 것 없이 혀가 제대로 놀려지지도 않는 꼬마둥이들마저도 “일본 할매야 일본 할매야, 나 잡아봐라” 하고 놀려대기까지도 하지만 그녀의 내력을 이는 사람은 선창 가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들은 일본 할머니가 본래는 일본인이었다는 자못 희귀한 사실과 그래서 지금도 한국어의 발음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 ‘일본 할머니’ 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내일 모레 칠십을 바라보는 일본할머니는 그러잖아도 왜소한 체구에 허리까지 굽어 ‘더욱 키가 작아보인다. 잘해야 넉자 반정도 밖에 안 되는 신장이다. 깊게 패인 주름살 투성이 인 얼굴엔 기름기가 사라져 버린 지 이미 오래고, 회백색 머리카락이 10년은 족히 연로해 보인다.
이가 몽땅 빠져버린 탓에 발음이 똑똑하지 못했지만 다시 목구멍 속으로 들어 갈 듯한 가늘고 약한 소리 속에서도 젊은 날의 청아한 목소리를 짐작하게 한다.
비록 죽을 날이나 기다려야 하는 늙고 늙은 몸이지만 노인 답지 않게 아직도 또렷한 눈망울, 똑 속은 콧날, 둥그스름한 얼굴 윤곽들이 젊었을 때는 상당히 귀엽고 예쁜 얼굴이었던 것 같이 보인다.
일본 할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조용하고 차분하다.
필요하지 않은 말을 여태 한 번도 해본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말이 없는데다 일년 내내 기쁘거나 슬픈 일 조차 없는 듯 웃거나 울지도 않았고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인 적도 없었다.
언제 봐도 똑 같은 표정 똑 같은 옷차림이다.
그녀의 광목 치마 저고리는 사시사철을 가리지 않고 변할 줄 모른다.
내핍에 내핍을 거듭하지 않으면 조밥이나 밀가루 죽 마저 먹을 수 없는 쪼그만 수입으론 도저히 옷 두벌조차 가질만한 여유가 없었다.
닳아 망가져 몇 번을 기워 입을 때 까지 입었다.
그렇지만 일본 할머니는 결코 추하거나 망측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 감마저 풍기는 깨끗한 할머니였다.
그녀가 찌든 가난과 종일토록 먼지 투성이로 뒤범벅이 되는 선창가에서 그렇게 청결하게 늙어 갈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딸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본 할머니에게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학자라고 스물 여섯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 한 체 집안 일을 맡고 있는 처녀인데, 사람들은 그들 모녀의 과한 연령 차이에 대해 의아심을 갖기도 했다.
하기는 일본 할머니의 하나 밖에 없는 혈육이고, 일본 할머니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키워왔으며, 학자 또한 일본 할머니를 닮아서 어머니를 받드는 자식의 도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자랐다.
구차하다는 단 하나의 이웃 때문에 중학교의 문턱도 밟지 못하게 한 것이 일본 할머니에게는 커다란 한이 되어 가슴에 맺혀 있지만 학자는 그런 것에 대해 투정을 하거나, 아쉬움을입밖에 낸 적 조차 없었다.
학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부터 여태까지 그녀의 생활은 어머니처럼 변함이 없었다.
집안에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는 일 이외에 하는 일이라곤 아침 나절에 물지게를 짊어지고
이집 저집 물운반을 해주어 삯으로 어머니의 힘겨운 생활고를 도왔고, 점심 때가 되면 어머니 대신 판자 점포를 지키는 정도 밖에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꽃다운 나이에도 나들이 한번 가지 않았고, 친구 한 사람 없었으며 읽을 만한 책 한권도 없었다.
시내 중심가에는 일년이 다가도록 한 번이나 나갈까 말까 할 정도로 외출을 삼가고 있었는데, 그 이유은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어머니의 엄한 명령이 이제 몸에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일본 할머니가 학자의 문밖 출입을 삼가게 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 할머니네 집이 위치하고 있는 휘파리 골목의 음탕한 기질에 행여 학자가 휘말려 들어 타락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때문에서 였다.
일본 할머니네 집은 판자 점포에서 채 100m도 안되는 휘파리 골목의 한 가운데에 끼어
있었다.
목포시 및 인근 도서의 매음 행위가 모두 이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매춘 소굴인 휘파리 골목은 장정 양팔 간격도 채 못되는 좁은 길을 두고, 양편으로, 서너 평씩 밖에 안되는 상자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연이어 200여m나 계속 되고 있다.
그 가운데 일본 할머니네 집같은 어염집이 끼어있다는 사실이 기이할 정도로 술집, 매음 전문집. 여인숙들로만 즐비하게 들어차 있다.
이 곳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춘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도 의식적으로 거의
공개하다시피 매춘 장면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대낮에도 지나가는 사람을 막무가내로 잡아들이는 창녀들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지나다니기를 꺼려 하는 곳이다.
영문 모르고 구경 삼아 들어 갔다가 창녀들의 행패에 봉변을 당하는 사람이 하루에도 부지기 수 일만큼 대단한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한 농민이나, 바다에서 며칠씩 배만 타다가 상륙한 선원들, 호기심 많은 도시 청년들이 이 골목에 발이라도 들여 놓게 되면 한꺼번에 서너명의 창녀들이 달여 들어 ‘이쪽으로 오라’, ‘쉬어 가라’, ‘놀다가라’, ‘자고가라’ 하며 옷자락이며 팔이며 심지어 다리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 당긴다.
이런 틈 바구니를 간신히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그들은 뒷통수에 입에 담기조차 수치스러운 욕설 세레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들은 몸을 팔아서 돈을 번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의 수치심도 느끼지 못 하는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손님을 접대하고, 더 많은 돈을 읅거 내기 위해, 심지어는 여자들이
가장 부끄럽게 여기고 감추고 다니는 부분마저 거리낌없이 노출시켜 호객 행위를 해대고 있다.
열려진 창문 속에서 행해지는 매음 행위를 보고도 무감각하게 지나 갈만한 목석까지도,
기어코 그의 주머니를 털털 털어 버리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지 그녀들은 인성의
맨 밑바닥을 헤메며 광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할머니네 집이 하필이면 이런 음탕한 곳에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세 평이나 될까 말까 한 좁은 집을 적은 돈으로 구하기는 이 곳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
했기 때문이었다.
학자는 어머니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며 왔기 때문에 이런 음탕한 소굴
속에서도 여태 순결을 지킬 수가 있었다.
바로 이웃에 사는 창녀들과도 아예 아는 체도 하지 않았고, 별로 알고 지내는 남자도 없었기 때문에 여지껏 그 나이에 남자에게 손목 한번 잡혀 보지 않은 채 고스란히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학자가 결코 귀머거리, 맹인은 아니었다.
판자벽 저쪽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틀려오는 음탕하고 추잡한 남녀의 소리나, 골목을 지나다 얼핏 보이는 매음 광경은 그녀의 욕정을 끌어 오르게 하였고, 이를 억제하려는 자신과의 싸움은 참기 어려운 괴로운 고통이었다.
이를 악물고, 귀를 막고 눈물을 흘릴 때도 수 차례였다.
매춘 행위가 추잡하고 비도덕적이다는 이성적인 판단 이전에 인간의 본성이, 그녀의 젊은 육체가 불리는 것이었다.
가을 해가 떨어진다.
석양에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요즘들어 제법 쌀쌀해진 편이다.
한 차례 태풍이 몰고간 뒤처럼 어리럽혀지고 더럽혀진 채 어스름 속으로 정적이 찾아온다.
그 혼돈과 소요의 뱃시간을 치루고 나면 사람들은 서서히 자기들의 후식처를 찾아 가게되고, 거리는 한산해져 간다.
부두에는 사람도 없는 빈배들이 저희들끼리 부딪고 덜커덕 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이상하리 만큼 쓸쓸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정적을 깨기라도 하는 듯 가끔 들리는 뱃소리와 사람 소리는 애처럽기 조차하다.
일본 할머니의 판자 점포에도 어스름 속으로 고요가 찾아든다.
오늘 매상을 계산해 보는 할머니의 여위고 주름 투성이인 손바닥에서 동전들이 처량하게 쩔렁거린다.
해가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그 만큼 매상이 적어져 간다.
이제부터는 거의 손님이 오지 않는다.
한창 해가 길었던 두어 달 전 만해도 한시간은 더 달수 있었는데 ....
이렇게 팔다가는 올 겨울 지낼 일도 적잖이 걱정이 되지만 일본 할머니의 얼굴을 더욱 어둡게 만드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학자의 결혼 문제였다.
어둠에 묻혀 가는 일본 할머니의 얼굴에 수심이 어린다.
‘오늘은 장산 댁한테 들려 무슨 결말을 봐야지, 이렇게 머뭇거리다가 또 해를 넘기는 게 아니까?’
아버지 없이 자라 남들처럼 잘 입히고 잘 먹이지도 못하면서 그나마 시집마저 여태 보내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민망했다.
‘그래 오늘만큼은 무슨 확답을 들어야 한다.’
5.
치일 피일 하다가 우리 착한 학자들......’’
신 창가 상가의 전등불이 하나둘 켜질 때 일본 할머니는 자란 위의 물건을 챙겼다.
어제보다는 좀 빠른 것 같지만 이 시간만 되어도 일본할머니의 판자 점토는 거의
어둠에 덮여 옆 가게에서 나오는 불빛이 아니고는 도저히 장사를 할 수 가 없다.
근래 와서 급작이 시력이 감퇴되어 가는 일본할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온 세상 천지가 가물가물 해서 그럴 때마다 눈을 비벼대곤 하지만 한참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쉬기 전에는 쉽사리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의 시력이 감퇴한 만큼 어둠은 빨리 찾고 밝은 대낮마저 그저 화창하지 못했다.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아 걸핏하면 온몸이 쑤시고 결리는 데 늙은이로서 참아 나가기 힘든 고통이었다.
일본할머니의 몸에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도 어렴풋이 나마 느끼면서, 그럴수록 서둘러 학자를 시집보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시집도 보내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던
것이다.
물건을 다 챙기고 난 할머니는 자물쇠를 걸어 채운다음 장산 댁을 찾아갔다.
장산 댁은 부둣가의 공설시장을 으슥한 곳에서 바느질을 하려 살아가는 과부다.
과부인 자신은 재론을 못하면서 남들 중매는 잘 세주어 선창 바닥에선 바느질하는 장산 댁
보다 중매쟁이 장산 댁으로 더 잘 알려진 말많은 여자였다.
일본할머니가 장산 댁에게 딸의 중개를 부탁 한 것도 그런 소문 때문이었는데 무심한 장산 댁에 그 녀의 청을 여간해서 들어주지를 않아 벌써 이달들어 세 번째 방문을 하는 것이다.
“어휴, 일본할매 또 왔수?”
장산 댁은 입담 좋은 가는 입술꼬리에 항상 웃음을 띄우며 일본할머니를 반겨주었다.
일하고 있던 바느질감을 밀려준 자리에 올라앉은 일본할머니는 잠시 말을 꺼내지 못한다.
오늘도 헛걸음질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딸 학자의 혼인이 장산 댁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는 만큼 일본할머니는 장산 댁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절박하게 들려왔다. 이 선창에서 딸의 혼사를 의논하고 도움을 요청할 만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었으며, 학자 역시 문밖 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 생활을 하던 터라 아는 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가진 것이나, 또 배움이 많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할머니의 경제적인 여유로는 신랑의 양복 한 벌 맞춰주지도 못할 정도이니 ‘내 딸 중매 좀 서 주시오’하고 떳떳이 말을 꺼내지도 못할 만큼 딱했다.
그래도 문제가 문제이니 만큼 어렵사리 얘기를 꺼내다 보면 너무나도 불리한 여건들만 들추어내는 장산 댁은 시원스레 대답을 해 주리 않고 있는 처지였다.
망설이는 일본 할머니의 심중을 환히 읽기라도 하는 장산 댁이 말을 꺼냈다.
중매쟁이로 알려진 그녀가 할머니의 속마음 정도 읽는 것은 어쩌면 식은 죽 먹기 보다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일본할매, 저 이 말은 물어보기가 조금 거북하지만 말 이유, 나로선 어차피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그래 혼삿돈은 얼마나 장만해 뒀우?”
처음 몇 차례 일본 할머니가 장산 댁을 찾아 왔을 때만해도 ‘자신이 없다’고 고개만 실레실레 저었었다.
자기 양심으로는 학자 같은 얌전한 규수를 좋은 혼처에 6
대줄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학자 하나만 보면 별 나무랄 것은 없지만 가정 환경이나 경제적 능력이 너무 궁핍해서 적당한 자리가 나질 않는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고 막돼먹은 고깃배 선원이나 거리의 불량배들을 소개 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자꾸만 찾아와서는 시무룩하게 앉았다 돌라가고 하는 할머니가 측은했던지
나중엔 ‘알아보겠다’는 정도로 얼버무렸다.
일주일 전에 왔을 적에만 해도 “요새 중매 결혼하려는 번번한 총각이 어디 있는지 아우?
더구나 나한테 중매 서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은 요즘 들어 가뭄에 콩나듯이 귀하기만 해유. 내 자리 생기면 기별드릴 테니 가 계시우.”
하고 미덥잖은 말만하던 장산 댁이었다.
혼사 치를 돈 걱정을 하던 일본할머니는 그녀의 아픈 심중을 찔려 맥이 풀리면서도, 그래도 혼삿돈 운운하는 걸 보면 적당한 자리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기대에 들떴다.
“어디 마땅한 자리가 나왔오?”
끊기는 듯 이어지는 할머니의 떨리는 목소리에 긴장이 서렸다.
“아들 내놓은 사람이 두어 군데 있긴 하지만 할매 딸하고는 모든 게 맞지 않아서… ”
장산 댁은 여전히 겉만 뱅뱅 돈다.
“장산 댁...”
장산 댁을 부르는 할머니의 힘에 겨운 목소리에 애조마저 서려있다.
자칫하면 눈물이라도 글썽일 듯한 서글픈 표정을 장산 댁으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우리 학자하고 어디가 맞지 않은데?”
딸의 혼사를 위해서라면 늙고 힘없는 자신이 걸림돌이라면 당장 죽어 버릴 각오라도 하는 듯 일본 할머니는 장산 댁은 애원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장산 댁은
“요즘, 총각 내놓은 사람들 처가 덕 불려고만 하는 바람에… 젊은 사람들도 그래요. 신부될 사람의 집안이 얼마나 잘 사느냐, 배경이 얼마나 좋으냐, 혼수는 얼마나 준비했느냐 하는 둥 말이 야요”
하고 딴청만 부렸다. 일본 할머니는 슬픔이 왈칵 밀려와 통곡이라도 해버리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장산 댁의 바느질 점토를 나왔다.
눈앞이 캄캄하고 다리에 힘이 전부 빠져 금방이라도 쓰러 질 것만 같았다.
‘이러다간 정말 우리 학자는 시집도 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학자를 데려갈 사람이 이 넓은 천지에 이토록 없단 말인가?
이럴 바엔 학자도 차라리 남들처럼 연애나 하게 해서 제 짝은 찾게 하는 건데… ’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일본 할머니의 머릿속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이럴 때 남편이 살아 계셨더라면, 이렇게 까지 우리의 운명이 기구하지는 않을 텐데…’
남편! 지금도 눈앞에 보일 듯한 남편의 얼굴 생각은 남편의 환영을 좇아 자꾸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미찌꼬, 미찌꼬, 울지만 말고 말을 해봐, 왜 그래? 집에서 또 무슨 일 있었어?”
한사코 흐느끼기만 하는 미찌꼬를 가슴 조이며 달래는 남편은 그 당시 제국대학 의학부 졸업반인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6년 전.
어제 같기만 하던 그 날이 벌써 46년이 지난 옛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흐흑 . 흐흐흑. 긴상, 긴상.... 전 어쩌면 좋아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왜 그래? 미찌꼬. 울지만 말고 어서 말을 해봐요. 정말 답답해 죽을 지경이야. 미찌꼬가 이 김택진한테 못 할말이라도 있소??”
“긴상! 긴상! 긴상… 전 자신이 없어요.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 그런 약한 말을 하지? 조금만 참아 줘 그래 몇 달만, 내가 졸업만 하게되면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기다리고 있어. 미찌꼬 나를 봐요. 그리고 용기를 내요.”
김택진은 미찌꼬의 손을 꼬옥 잡았다.
“하지만 흑흑 이제 도저히 이겨 내지 못할 것만 같아요.”
“안 돼, 미찌꼬. 오늘 따라 미찌꼬 답지 않게 왜 이러는 거지? 왜 그런 약한 말을 하는 거야 응?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었어?”
미찌꼬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결합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과 혈통을 져버리고 미찌꼬를 종의 나라 조선인에게 시집 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엄격한 가정에서 일본인의 고유한 전통과 풍습대로 미찌꼬를 키워났으며
미찌꼬 자신도 김택진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말씀을 어겨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미찌꼬가 2년 전 그녀의 여학교에서 주최하는 자선음악회에서 우연히 김택진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들의 사이가 가까워지게 된 것을 안 미찌꼬의 아버지는 벼락같이 노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의 불호령보다 김택진과의 사랑에 마음이 기울어진 미찌꼬였다.
그토록 반대를 해오던 아버지께서 오늘은 마침내 미찌꼬에게 최후의 통첩을 내린 것이다.
“미찌꼬, 그토록 일러도 못 알아듣겠냐? 그놈은 조센징 이고 너는 황국의 신민이야 너는 지금 종의 나라의 일개이고 보랄 것 없는 촌뜨기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돼 내 오늘 아비로서 마지막 충고를 하겠다.
앞으로는 다시 그 긴상인가 하는 녀석을 만나서는 안 된다.
만일 그 녀석을 다시 만난 다면 너는 내 자식이 아니야.
대답을 해라 또 만나겠냐?”
“....”
“ 정 그 녀석을 만나지 않고는 못 배기겠거든 우리 집 망신시키지 말고 아예 나가버려! 그리곤 다시는 이 집 문안에 발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미찌꼬의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조선과 일본의 두 이민족은 물과 기름과 같은 것이었다.
미찌꼬는 그이 아버지의 발등에 엎드려 울며 애원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럴수록 미찌꼬의 아버지는 더욱 노해져서 마치 미쳐 날뛰는 사람과도 같았다.
마침내는 아버지의 손으로 미찌꼬는 집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닥치는 대로 때리고 내던지는 아버지의 밑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두 사람 사이엔 난관이 많았고 시련도 많았지만 그들의 사람은 조금도 식을 줄 몰랐고 아버지의 성화가 높아갈수록 오히려 택진에게로 향한 사랑은 그 열이 더해갔다.
김택진과 미찌꼬가 부부로서 새 살림을 차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수많은 역경을 겪어야만 했다.
집에서 돈 한푼 없이 쫓겨난 미찌꼬였고, 김택진의 집에서 부쳐오던 유학 자금이 미찌꼬와의 결혼을 통지했던 달부터 뚝 끊겨버린 것이었다.
비록 김택진의 하숙방에서 친구 몇 사람의 초대로 조촐하게 나마 거행된 식이었지만 그들은 어느 호화스러운 신랑 신부보다도 행복했었다.
눈물겨운 결혼식을 마친 다음날부터 일자리를 찾아 눈코 뜰새 없이 뛰어다녀야 했던 두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고생을 쓰다않고 치렀으며, 몇 달이 지나 김택진이 대학의 의학부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식날, 두 사람은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고생과 눈물로 얼룩진 졸업식은 그들에게 너무나 감격어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늑한 보금자리는 김택진의 졸업과 함께 마련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병원을 개업할 만한 자금이 없었다.
양가로부터 버림을 받다시피 한 젊은 부부로서, 세끼 끼니라도 겨우 건너뛰지 않고 먹을 수 있으며 다행일 정도로 가난한 형편에 당장 병원을 개업한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을 만큼 아늑하였다.
그렇다고 좌절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었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밤을 낮삼아 한 푼, 두 푼을 모으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연약한 미찌꼬의 무서울 만큼 강인한 정신력은 그들 부부의 꿈을 실현시키는데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럴수록 택진은 용기를 얻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택진이 히로시마에 조그만한 병원을 개업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5년.
그동안 종합병원의 내과 전문의로, 내일의 꿈을 키웠던 김택진으로서는, 또한 15년을 하루같이 모든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미찌꼬로서도 꿈만 같은 사실이었다.
일본 할머니의 내핍은 이렇게 15년 동안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입을 것을 입지 않는 검소한 생활에서 몸에 익혀진 것이었다.
택진의 나이 마흔에 차린 개인 병원이었지만 그들 부부에게는 너무나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이제 생활을 위해 악전고투했던 지난날의 고생을 한시름 덜게 되었다. 아이들의 교육비, 건강을 위한 영양섭취 따위의 걱정은 않아도 되었다.
고진감래라듯이 그들이 겪은 고생만큼 병원을 차린 후의 생활은 달콤하고 행복하기 그지 않았다.
병원의 손님은 하루하루 많아져 갔다.
택진의 정성을 다하는 의술은 이미 내과 전문의를 하는 동안 1급의 수준에 달했었고, 그의 인격적인 진료방법에 환자들은 신뢰를 했었고, 그럴수록 그의 병원은 널리 유명해져 갔다.
그들에게도 이제 생활의 여유가 생겼다.
이미 중년에 접어든 김 택진 부부였지만, 그들의 사람은 자식에 대한 사랑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택진이 의학부에 적을 두엇을 적의 열렬한 사랑은 이제 중후한 사랑으로 과일이 익어가듯 익어 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부부 생활을 남들은 부러워했고 가장 모범적인 부부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침략자의 근심을 버리지 못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국제정세는 점차 일본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갔다
그런 난리 통속에서도 택진 부부의 살림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지켜 나갈 수 있었다.
모두가 성질하고 근면한 두 사람의 힘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전쟁 자금을 강요받으면서, 일본이 승전국이 되리라고는 믿지 않았으면서도, 또한 패전국이 된다는 것도 그들에겐 달갑잖을 일이었다.
몇 년을 전쟁통에 시달리면서 국내의 사정은 그야말로 황폐하다시피 처참하게 변해갔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갈수록 일본에게 전황이 불리하게 전개된다는 소문과 전쟁의 종결이 얼마 남지 않았다기도 하였다.
“여보 요즈음 당신 안색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걱정이라도 생긴 것 아니오?“
수심 어린 미찌꼬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택진이 그녀의 조그만 어깨에 손을 얹으며 하는 말이었다
미찌꼬의 나이도 이제 40을 넘어 섰고 병원을 개업한 지도 벌써 5년이 지난 초봄이었다.
큰아들은 제법 어른 타를 낼만큼 성장하여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 불철주야 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던 때였다
남편의 시원스럽게 큰 눈을 바라보면 모든 걱정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갓은 미찌꼬여사는 부끄러움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다 늙어 가는 주제에 주책없이 미찌꼬여사의 몸에 태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기가 있다는 말에 택진은 박장대소를 하며 그녀의 아랫배를 만져보려고도 하고 귀를 갖다 대기를 하는 것이었다.
의사인 그로서 벌써부터 표징이 나타나지 않을 줄은 뻔히 알면서도 부러 장난삼아 해보는 것이었다.
미찌꼬여사는 남편의 그런 짓궂은 장난에 더욱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랐다.
남편은 그러한 그녀가 더욱 우스웁고 사랑스러웠던지 놓아주지를 않고 웃어대는 것이었다.
자리에 누운 남편과 등을 돌린 채 미찌꼬 여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신부인과에 가서 낙태시켜 버리려다가 당신이 서운해 하실까봐…”
미찌꼬여사는 아직도 화끈거리는 볼을 남편이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눈을 감은 채 말끝을 맺지 못했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하느님이 주신 자식을 떼다니? 우리에게 딸이 없다고 이번에는 어여쁜 공주님을 하나 낳으라고 구원을 베푸신 거요. 당신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조금도 부끄러웁게 생각할 것 없어요. 여자가 애 낳는 게 뭐가 그리도 부끄러운 일인가?”
택진은 미찌꼬여사의 몸을 자기에게로 돌려놓으며 그녀를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늙은 주제에 애를 낳으면 사람들이 흉을 볼텐데요?”
“당신이 늙었다니. 그런 어림도 없는 말은 하지도 말아요. 당신은 아직 젊고 아름다워.”
“아이, 당신도 무슨 말씀을…”
결국 미찌꼬여사는 남편의 권유에 못 이긴 척하고 애를 낳기로 하였다.
사실 미찌꼬여사 자신도 오래 전부터 딸이 하나 낳는 게 소원 이였는데 그럭저럭 하다보니 아들만 내리 셋을 낳고 말았던 것이다.
달이 차갈수록 미찌꼬 여사의 배는 불러갔다.
출산을 두어 달 앞두고 남편은 그녀에게 일일이 신경을 써 줄만큼 한가하지가 못했다.
대전의 막바지를 내리 닫는 일본은 각처에서 수많은 부상병을 본국으로 후송해 왔고 택진의 내과병원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은 반강제적으로 떠 맡지 않으면 안되었다.
병원은 부상병 치료하랴, 일반 환자 받으랴 하여 눈코 뜰새 없이 바쁘고 소란스러웠다.
“여보, 아무래도 당신 별장에 가서 몸조리나 하며 쉬는 게, 여기서 내 뒷바라지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 괜히 혼잣몸도 아니면서 무리를 하나 뱃속의 아기한테 무슨 탈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남편은 미찌꼬여사를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제 걱정은 마세요. 오히려 당신이나 조심하세요.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과로하신 탓에 건강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요.”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내 말고 내 말을 들어요, 내일이라도 당장 별장으로 떠나는 게 좋겠소. 그릇 별장지기 영감 내외가 잘 보살펴 줄 테니까 그쪽이 편하고 안전할 것 같소.”
남편은 작년에 히로시마 시에서 40km 지점에 사놓은 아담한 별장으로 미찌꼬여사를 보내는데 일보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 애들은 어쩌죠?”
미찌꼬는 마지못해 남편의 말에 따르기로 했지만 금방 세 아들이 걱정되었다.
“응, 그건 염려 말아요. 내가 가정부에게 일러 잘 보살필 테니까. 그리고 얼마 있으면 방학이 되니까 그때 내가 아이들을 대리고 당신한테 가겠어.”
이렇게 해서 다음날 남편은 미찌꼬여사를 환자용 엠블런스에 싣고 별장으로 떠났다.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는 애들보고 일일이 ‘몸조심하고 공부 열심히 해라’, ‘아버지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반찬 투정말고 잘먹어야 한다’고 어머니로서 갖은 염려로 일렀지만 그래도 여간해서 마음이 놓이지가 않았다.
남편과 같이 별장까지 온 미찌꼬여사는 양손을 꼬옥 쥐어 주던 남편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평생을 바쳐도 조금도 아쉬움이 없는 믿음직한 남편.
“제 걱정 마시고 병원 일하고. 애들이나 잘 보살피세요. 기리고 당신 건강에 유의하셔야 돼요.”
남편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위로했지만 그를 보내고 나니 금방 가슴속이 텅빈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멀리 점이 되어 사라져 가는 남편이 타고 가는 차를 바라보며 미찌꼬여사는 모두가 무사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결혼 후 하루도 떨어지지 않고 살아온 그들 부부였으니 앞으로 두 달 이상이나 별거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달칵 눈물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차를 타고 오며 남편이 자기의 귓가에 다짐하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 했다.
“여보. 우리 옛날 고생할 적을 생각하며 조금만 참아요 이 전쟁이 끝나고 당신이 순산을 하면 우리는 새로운 땅으로 떠나가는 거야.”
“새로운 땅이라뇨? 여보”
미찌꼬여사는 남편이 항시 입버릇처럼 떠올리는 ‘새로운 땅’이라는 것이 그의 조국 조선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묻는 말이었다.
남편은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몇 번이나 비친 적이 있었다.
‘산 좋고 물 좋고 하늘 맑아 인심후한 곳’이 바로 그곳이라면 남편의 말이었다.
“네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부모형제가 살고 소꿉 친구들이 있는 곳‘
남편은 감격 어린 최상의 잠긴 듯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내 당신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오래 전부터 계획하여 왔던 일이라오. 일본도 이제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패망하게 될 거요.
그럼 내 조국 조선은 해방이 되고 그러면 우리는 그곳으로 떠나는 거요. 하찮은 미물도 죽을 때는 제가 태어난 곳으로 찾아간다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기의 모국을 바랄 수야 있겠오?”
남편은 정말 떠나갈 심산인 모양이었다.
미찌꼬여사는 그러한 남편에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남편과 함께 살아온 20년을 남편의 말이면 뭐든지 순순히 따랐고, 남편 역시 이때 부당한 허사를 해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남편의 말대로 그의 조국인 조선이 그렇게 살기 좋다는 것을 막연하게 나마 믿었으며. 자기의 조국을 떠나야 된다는 점에 다소의 염려가 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미찌꼬여사는 떠나간 남편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객이 되리라고 어찌 꿈에라도 생각했으랴!
며칠 후 라디오에서 ‘히로시마 나가사끼시에 원자폭탄 투하’ 라는 급보가 흘러나올 때 미찌꼬여사는 하늘이 꺼진 듯한 충격으로 그만 거꾸러지고 말했다.
그녀가 별장지기 노인 내외의 극진한 치료와 정성으로 간신히 의식이 회복되었을 때 ‘왜 내가 여태 살아 있나?’ 하고 온 가족을 잃은 자신만의 생존이 몹시도 저주스러웠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남편과 세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만삭된 몸으로는 문밖 출입도 하기 어려웠고, 이미 두 원폭 피해도시는 폐쇄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찌꼬여사는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지 며칠이 지나 학자를 순산했다.
남편과 세 아들, 그리고 히로시마의 병원, 모든 거짓이 자취를 감춰버린 삭막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한탄만으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며칠을 보냈다.
생각하다 못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보살펴 주어 귀가를 청허하는 편지를 동경의 친정아버지에게 띄웠지만 답장은 너무도 그녀를 실망시켰다.
조선인과의 결혼으로 부녀의 인연이 끊겼으니 다시 연락을 말라는 답장이었다.
그녀가 별장을 아주 헐값으로 넘겨버리고 현해탄을 넘어 한국으로 건어 온 것은 남편의 조국에 대한 일루의 기대와 희망이라고나 할까?
‘살기 좋고 인심 좋은 곳’이라는 남편의 말대로 차라리 패전국인 일본에서 사는 것보다 새로운 세계로의 동경 같은 것도 있었으며, 이제는 유언처럼 느껴지는 남편의 고국에 대한 향수를 남은 가족이라도 실현시켜 천국에 계신 남편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부모를 만날 수 잇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전쟁통에 잃은 것도 많았지만 남편의 고향 주소조차 알 수 없게 된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렇지만 가족을 빼앗아간 사지의 땅을 하루빨리 떠나지 않으면 못 베길 것만 같았다.
갓 낳은 핏덩이를 안고 발을 디딘 한국 땅은 그녀의 기대와는 너무나 딴판이었다.
한국말 한마디 변변치 못한 그녀가 남편의 고향인 이 목포를 어렵사리 찾아왔지만 난관은 계속되었다.
대일 증오감정이 극도에 달한 한국땅 어디에서도 일본인인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할 곳은 없었다.
시부모 댁의 주소조차 모르는 그녀로서는 인연의 끈을 더 이상 연결할 방법이 없었다.
여관을 전전하다 수중의 돈조차 바닥이 났고, 핏덩이 학자는 말라빠진 젖 때문에 앵앵거렸다.
그녀가 이 선창 바닥에 정착하게 된 것도 싸구려 사글세방을 얻자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고, 그 때부터 판자 점포를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언어 소통이 거의 불가능하고, 생활 습관이 판이해서 고충도 많았지만, 학자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생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처음 몇 년간은 시댁을 찾기 위해 여러 곳에 수소문도 해보았고, 직접 찾아 나서기도 했지만 결과는 늘 그녀의 소망과는 반대 쪽으로 나타났다.
그녀가 시댁 찾기를 포기하게 된 것도 숱한 노력에 대한 아무런 성과도 없이 기진 한 탓도 있었지만, 자라나는 학자를 위해서는 가정에 충실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학자는 미찌꼬여사보다 그녀의 남편을 더 닮아 가는 것 같았다.
시원하게 큰 눈이며 가는 입술, 체격도 남편처럼 듬직했다.
그런 학자를 볼 때마다 행복했던 일본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가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남편 생각에, 죽은 아들들 생각 때문에 수많은 밤을 눈물로 보내야 했다.
“학자야, 학자야.”
남편 생각하는 동안에 어느 새 집 앞에 다다른 일본할머니는 풀죽은 목소리로 학자를 불렀다.
집이라고 해봐야 부엌 한 칸에 방 한 칸, 그리고 부엌 옆에 딸린 변소가 전부였다.
대낮에도 밀창문을 잠그지 않으면 어떤 무뢰한이나 취객이 침입해 올 지 몰라 항상 문단속을 잘 시키는 터에 일본할머니가 집에 돌아올 적 마다으례 문이 잠궈져 있는 것이다.
“녜, 나가요. 어머니.”
학자가 문고리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오늘도 별일 없었냐?”
“예, 어머니. 오늘은 좀 팔리던가요?”
“그저, 그렇지.”
날마다 되풀이되는 대화다.
그들에게 이외의 대화꺼리가 생긴다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할머니와 학자는 저녁을 들면서도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다.
할머니는 오늘 장산 댁에게 찾아갔던 일이 자꾸 떠올라 일찍 숟가락을 놓았다.
설거지를 하던 학자는 아무래도 오늘따라 어두운 표정인 어머니의 심기를 거슬리기 조심스러워 몇 번이나 망설이던 끝에 말을 꺼냈다.
“어머니, 아무래도 우리 점포와 이 집이 마음에 걸려요. 새로 부임한 시장님이 내세우는 정책이 도시 환경 정화와 과감한 도로계획이라면서 최우선적으로 우리 동네를 철거할 거라고 하는 뉴스를 오늘도 두 차례나 들었어요.”
“글쎄,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나도 들었다만 우리 처지에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
“우리처럼 무허가 건물은 보상금도 주지 않고 강제 철거한다고 하던데요.”
사실 일본할머니가 사는 집이나 점포는 평수가 적은 것도 문제지만 등기조차 안된 무허가 건물인 것이다.
점포는 길 위에 허가 없이 지어진 것이고, 집은 너무 밀집된 공간에 공부상 도로를 만들 수 없는 곳이기에 건축허가가 나지 않은 무허가 건물인 것이다.
할머니 집뿐만 아니라 이 일대의 200여 호의 매춘 가가 불법 무허가 건물이며, 소방차도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길목이 비좁아서 항상 화재 위험성으로부터 노출된 상태였다.
자칫 한 곳에서라도 불이 난다면 소화할 대책이 없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곳이라 재산 및 인명 피해가 막대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실정인 것이다.
5년 전 겨울에 일어나 화재로 인해 부로가 30분만에 6채의 가옥이 전소되고, 2명의 인명 피해를 당한 것도 이런 취약점을 단적으로 보인 예이다.
더구나 집단적 매춘골목이라는 오명이 전국적으로 알려져서 도시의 이미지 제고에도 큰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에 부임하는 시장마다 휘파리 골목의 철거 및 주변 정비사업이 제1의 공약이 되곤 하였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부둣가의 매춘 골목 정비라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가슴을 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개가 몸을 팔아서, 하루 벌어 먹고사는 빈민들이라서 이 생활의 터전을 떠나서는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동안은 시장이 임명될 때마다 부둣가(특히 이 휘파리 골목 주변)의 환경정비 사업이 단골 메뉴처럼 등장했다가는 유야무야되었지만, 이번에 부임한 시장님은 예삿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앙정부에 든든한 배경을 가졌으며, 전도가 창창한 분이라 자신이 공언한 내용은 반드시 실천하는 추진력이 강한 분이라는 것이다.
휘파리 골목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가 무엇인지 도시 환경정화사업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별 관심도 없다.
다만 자기들의 생계와 보금자리가 위협받는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시정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들의 관심사는 이 골목이 철거되느냐, 마느냐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일본 할머니와 학자에게도 철거로 인한 생존의 위협은 나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상을 하고는 있지만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다는 게 이 모녀의 가장 취약점이자, 고민거리였다.
더구나 세상물정 어두운 이들 모녀에게 이 골목 밖의 세상은 너무나 크고 두려운 상대였다.
일본 할머니는 자기 식구가 쫓겨나기 전에 해결하고 싶은 유일한 희망은 딸 학자가 출가하여 믿음직한 남편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들어 부쩍 조바심이 더해 가는 것이다.
딸의 혼사가 여의치 않은 상태로 철거라도 된다면 그녀들은 길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고, 그 이후의 상황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억지로 잠을 청해 보지만 의식은 또렷할 뿐이었다.
그러한 나날의 연속은 극도로 일본 할머니의 체력과 정신력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휘파리 골목의 철거가 점점 가시화되면서 일본 할머니에게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0여 년을 판자 점포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손수 문을 열고 닫았던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문을 닫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자리를 학자가 대신하는 날이 점점 많아지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안색은 날로 파리해져 가서 낡고 닳은 흰 저고리 색깔을 닮아가고 있었다.
학자는 어머니의 성실성을 본받아 할머니 못지 않게 점포를 운영하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할머니의 건강은 쇠약해 지는 것 같았다.
주변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같이해 오던 상인들이 가끔 학자에게 할머니의 안부를 물으며 안타까워 할 뿐 그녀들의 앞날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거나 도와주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의 점포 개근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휘파리 골목의 철거가 시작되었다.
보상이나 이주대책같은 것은 서슬 퍼런 군사정부 아래서 감히 언급하지도 못하고 이 도시의 하층민들은 대책 없이 쫓겨난 것이다.
휘파리 골목의 200여 가구가 사는 집들의 철거는 불과 일주일이 안 되어 완료되었지만, 일본 할머니와 학자의 행방에 대해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