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성례 식을 거행합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는 일 곱 가지 성례가 있습니다. 세례, 견신, 성만찬, 참회, 서품, 결혼, 아픈 자를 위한 기름부음입니다. 우리 개신 교회는 두 가지 즉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로 하는데, 그리스도와 제자들에 의해서 분명히 시행된 것들만 성례 전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성례의 숫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첫째, 말씀과 성례 전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둘째, 말씀과 성례 전에서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신실한 응답이 중요하다 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세례와 유아세례의 의미 그리고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고 자 합니다.
(1) 먼저 세례에 대해서입니다.
세례를 시행하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세례의 역사에 있어서 이 구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례는 예수의 행위에 기초하기도 합니다. 예수는 요한에게 세례 받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름에 대하여 순종하므로 응답하면서 그의 소명(vocation)을 시작합니다. 이 세례의 행위를 통하여 예수는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과 연대관계에 들어갑니다. 결국 그의 수난,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값비싼 사랑과 섬김의 삶이 예수의 세례 받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세례 받음은 예수께서 이 세상의 죄인과 버림받은 자들과 연대를 이루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옛 삶의 방식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그들의 전 삶은 신앙의 여정이 되며, 그 여정 가운데 세례에서 얻은 새로운 정체성(identity)을 더 충만하게 실현해 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과 사랑 안에 참여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은 세례의 의미를 여러 가지 풍성한 표상들(images)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의 표상들은 모두 다 중요하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합니다.
1)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일시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통해 옛 삶에 대하여 죄가 행사했던 능력이 부숴 집니다. 물로부터 다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기초한 새로운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롬6:3-4).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던 죠지 뮬러에게 한 크리스챤 신문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당신의 믿음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뮬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어느 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시체로 땅에 묻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내 가족, 친구, 취미, 좋아하는 것, 인정받으려는 마음, 질투, 모든 소유가 나와 함께 죽었고 땅에 묻혔다는 사실을 깨닫자 나는 변화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뮬러처럼 하나님 말씀에 의해 우리가 그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라는 사실을 계시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 영적 깨달음에 의해서만 우리는 변화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2)세례는 또한 죄에 얼룩진 삶으로부터 씻겨짐으로 묘사됩니다. 물이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듯이 하나님의 용서도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씻어냅니다(고전6:11). 그리스도에 의해 용서받고 깨끗 게 된 사람들은 세례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으며 새로운 삶의 윤리를 실천하게 됩니다.
3)세례는 또한 성령에 의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과 성령의 능력을 부여받는 것으로 묘사됩니다(요3:5, 행2:28). 성령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역사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성경은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의 선물을 세례와 밀접하게 연관시킵니다.
4)세례는 또한 연합(incorporation)의 표상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서로서로 하나가 되고 모든 세대와 모든 지역의 그리스도인과 하나가 됩니다. 세례를 통하여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고독한 개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됩니다. 새로운 사회의 시민(엡2:19)이 됩니다. 이 새로운 사회 안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인의 구분이 없어지며 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없어집니다(갈3:28).
5)세례는 또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의 징표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받음으로써 다가올 추수의 '첫 열매'(롬8:23)로서 성령을 받으며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을 고대하며 정의와 평화가 완전히 실현될 것을 희망하며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과 연대를 이룹니다.
(2)유아세례에 대하여
만약에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삶, 죄로부터 씻겨짐,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받음, 하나님의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감,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을 바라는 가운데 믿음의 여정을 시작함 등을 의미한다면 유아세례를 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침례교는 유아세례를 반대하며 개혁교회의 신학자들 중에도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유아세례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유아세례가 사도시대에 시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여러 가지 증거를 종합해 보면 유아세례는 오직 사도시대 이후에 들어가서야 시행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유아세례의 문제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신앙과 세례의 관계"에 있습니다. 신앙이 세례에 앞서야 합니다. 신앙 없는 세례는 무의미하며 아무 효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신학자들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성인세례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신앙적 상대성과 불완전 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세례의 시기를 인간의 신앙의 성숙도와 자기 결단에 근거시킬 경우, 세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행위"에 불과할 것이며 인간의 자기업적 내지 공로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신앙과 세례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그들의 신앙과 고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세우신 구원의 사건 곧 새로운 계약의 사건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 된 우리를 그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주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곧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는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유아세례의 타당성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유아세례를 가리켜 간단히 유아의 인권침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어린 아이에게 예방주사를 맞게 하며 병이 나면 병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의 의사를 묻지 않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 학교에 보냅니다. 그렇다하여 우리가 어린 아이의 인권과 자유를 침해하였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실시함에 있어서 교회는 유의할 사항도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는 부모가 확고한 신앙을 가졌으며 유아의 신앙 적 성장에 대하여 철저한 책임의식을 가졌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유아세례를 베푸는 교회 공동체가 세례받은 유아의 교육에 대하여 얼마나 확실한 책임의식을 느끼며 그의 교육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유아의 부모들은 단순히 다른 부모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들의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부모들은 유아세례에 대한 분명한 의식과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유아세례를 베풀기 전에 그 부모들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3)성찬에 대하여
주의 성찬의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고, 또한 고린도전서 11:23이하에서 사도 바울에 의하여 그 전승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세례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초가 되는 성례전이라면, 주의 성찬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탱되는 성례전입니다.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의 성례전이라면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성장하고 양육되는 성례전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의 성례 전으로서 하나님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새로운 공동체로 인도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결시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유대를 맺게 하십니다. 반면에, 주의 성찬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생명과 사랑을 나눠주심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과 사랑을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에 능력을 주시며 이 세계 안에서 섬김의 삶을 살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주의 성찬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사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모읍니다.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생생하게 회상하게 하며 세계의 창조와 보전 가운데 부어진 하나님의 모든 선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합니다. 신앙의 공동체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단지 기억만이 아닙니다. 떡을 떼고 먹는 것을 통하여 포도주를 붓고 마시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며, 이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이러한 성례 전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희망하게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해방과 화해의 사역이 완성될 것을 열렬히 고대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해방과 화해의 사역에서 동역 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찬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 주요한 경향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일차적으로 주의 성찬을 희생으로 보는 것이며, 둘째는 일차적으로 주의 성찬을 만찬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찬이라는 명칭은 기본적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낭송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성찬 성례 전에서 갖게 되는 감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수난과 부활의 역사를 통하여 구원의 대 역사를 이룩하신 것을 상기하고 재현하는 가운데서 우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전승'의 성찬 성례 전은 바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성례이며 여기서 거룩한 신비를 경험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신비의 성례 전을 통하여 참여자들을 진리 안에서 일으켜 주시고 믿음이 굳어지도록 성령 님이 역사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 매주 가졌던 성찬 성례 전은 2-3세기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지탱해 나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 원동력은 바로 어떠한 핍박이나 순교도 수행할 수 있는 강력한 믿음을 소유하게 하였습니다.
(4)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기독교의 초대시대 때에는 3년 간의 예비 신자로서의 교육 과정이 끝난 다음에 수세 후보자로서 그들은 엄격한 심사를 받았습니다. 그 심사는 본인의 대답으로 끝나 지 아니하고 그를 처음부터 인도하여 온 후견인의 증언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이 때의 중요한 질문은 예비 신자로서 등록을 할 때 약속했던 사항들을 철저히 준수했는지를 확인할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선행을 했는지를 묻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절차를 통과한 후에 선발된 수세 후보자는 목요일에 목욕을 하고, 금요일에는 단식을 하고, 토요일에는 감독으로부터 성대한 축귀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일의 수탉이 우는 시간에 맞추어 세례에 쓰일 물을 축성하는 예전으로부터 세례의식은 시작되었습니다.
세례는 세 번 물에 침수하게 하였고 그때마다 사도신경과 같은 내용의 신앙고백에 대한 질문을 하고 거기에 확고한 대답을 하게 하였습니다. 세례가 끝나고 최종적으로 감독이 수세 자에게 하는 의식은 기름 바른 손으로 그에게 안수하고 그 이마에 십자가 표시를 하고 입맞춤을 하면서 "주께서 당신과 함께"라고 하면 수 세자는 "또한 당신과 함께"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드디어 다음 단계인 성찬 성례 전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모든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예비 신자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신자가 되었을 때 드디어 그리스도교 공동체만이 갖는 성찬 성례 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 침을 받고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이었습니다. noblesse oblige 특권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제목:나를 기념하라
성경:고전11:23-28
설교:유재정 목사
일시:2001.4.22(일) 주일 1,2부 설교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한 거지 아이가 고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아원에서 새 옷과 새 신발, 새 책 등 여러 가지 새 물건들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는 헌 것을 미련 없이 다 버리고 새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모자를 버리려고 하자 막무가내로 모자를 손에 꼭 쥐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묻자 아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모자는 제 어머니가 늘 쓰시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신 유일한 것입니다. 저는 이 모자를 쓸 때마다 늘 어머니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저는 비록 낡았지만 이것만은 버릴 수 없어요." 이 아이에게 있어서 이 모자는 그저 단순히 낡으면 버리고 새것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 아이에게 평생토록 어머니를 기억하게 하는 거룩한 상징물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상징물은 누구에게나 한 두 개는 있을 겁니다. 그것이 아픈 상처이건 아니면 기쁨의 상징이건 관계없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에 그의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나누었던 장면을 기억하면서 성찬의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고 있는데 떡은 곧 그리스도의 몸, 우리를 위해서 뾵기신 주님의 몸을 나타내며, 잔은 곧 그리스도의 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흘리신 그의 보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의 몸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기념하라는 말을 두번씩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기념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남네시스"라는 합니다. 이 말은 과거의 어떤 일을 회상하는 정신적인 행동, 곧 기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과거의 한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재현함으로써 그 사건으로 하여금 지금 여기(here and now) 즉 나의 삶의 자리에서 똑 같은 상황과 효력을 발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만찬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 즉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성되었으며 아직도 온 인류를 위하여 작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생활과 그 희생에 대한 실제적인 표징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백성이신 성도 여러분! 그러면 성만찬을 먹고 마시려는 우리들이 지금 여기서 기념하고 상기하고 재현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만찬에 참예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과거의 사건들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 확인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본문 24절 말씀입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으시고 베들레헴에 나셨고 나사렛에서 성장하시어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그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모든 병자와 약한 자를 고치시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살리시고 자신은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희생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세례요한의 고백처럼 주님은 그렇게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의 마지막 밤을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가지십니다. 만찬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딱딱해서 잘 찢어지지도 않는 무교병에 포도주가 전부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출애굽의 구원 역사를 기념하는 유월절 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로와 대적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10가지의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의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시면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마다 죽음을 넘어가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신천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첫발을 내디디기 전날 밤에 만찬을 가지고 구원의 노정을 향하여 떠납니다. 어린양을 취하여 5일 동안 집안에서 같이 생활하고 가족과 이웃이 같이 그 양을 잡아서 살을 구워먹고 나머지는 불에 태우고 떠납니다. 이때 무교병과 쓴나물을 같이 먹습니다. 이렇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로 죽음을 넘어간 밤은 애굽에게는 심판의 밤이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보존의 밤이며 구원의 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월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5일 동안 계셨고 5일이 시작되는 저녁에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가지고 체포되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가 뿌려질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 땅에 뿌려지는 순간은 바로 아스라이 먼 옛날에 있었던 출애굽의 구원의 역사를 온 인류에게 확대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제자공동체의 만찬의 밤은 바로 구원의 밤이었습니다. 그 밤에 그들은 홍해를 건넜으며 요단강을 건넌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만찬을 하는 우리도 그들과 함께 죽음의 강을 건너 구원의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받은 구원의 확신과 감격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죄에서 구원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다시 확신하고 그 감격에 빠지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뿐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25절 말씀입니다. "식후에 또 이와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우리는 이미 죽어서 없어져 버린 분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과거에 존재했던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분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럽게 승천하시어서 지금도 살아계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주의 백성들을 돌보시게 하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죄에 빠져 더러워져 있을 때, 그 분은 용서의 수건을 허리에 두루시고 우리의 발을 씻기십니다. 우리가 의심에 빠져있을 때 그분은 구멍난 손을 보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분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해결받아야 할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외로울 때 그분은 문밖에서 나의 가슴의 문을 두드리시며 나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가난하여 굶주릴 때 그 분은 겉옷까지 내주며 우리를 덮어주십니다. 그 분은 임마누엘 예수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성찬에서 주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커뮤니온을 나눌 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들었지만 확신하지 못하고 엠마오로 낙향하는 제자들의 무기력 속에 주님은 동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직접 성경을 해석해주시고 성만찬을 하는 가운데 그들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성경을 해석하시는 것은 설교를 하시는 것이며 제자들과 떡을 떼는 것은 바로 주의 성찬을 나누는 것입니다.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곤고하고 희망이 없는 제자들의 삶 속에 주님은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지 못하였지만 결국 주님과 성찬을 나누고 난 후에는 저희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보이는 말씀이십니다. 이 시간에도 주님은 성경을 해석해주시고 만찬의 살과 피가 되셔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알아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주님은 요6:48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55절에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그렇습니다. 지금 내 생명을 살려서 이 시간에 살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주님은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때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살과 피가 내 몸을 세우고 내 피를 내 피를 돌게 하는데 내 손이 어찌 주님의 손이 되어서 이웃을 섬기지 않을 수 있으며 내 심장에 주님의 피가 흐르는데 어찌 복음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12:1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통합니다. 모든 인류를 위해서 내 놓으신 주님의 살과 피는 오늘 이 시간에도 살아 역사하여서 우리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려지게 하십니다. 영원한 밥으로 우리를 살리신 주님은 지금 우리가 또한 세상에 밥이 되어서 그들을 살리라고 하십니다. 성만찬을 통해서 오늘 주님이 자신의 살과 피로 나를 살리시는 것처럼 오늘 나를 번제로 드려서 주님의 백성을 살리는 놀라운 헌신의 역사가 이 시간에 여러분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성만찬에 참여하면서 이제 머지 않아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26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역사의 한 복판에서 역사의 끝과 우리 주님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바라보는 눈으로 성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광스러운 참 소망입니다.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수하시고 죽어 장사지낸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보이신 주님은 이제 영광 가운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실 심판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참소망과 확실한 약속을 향해 우리의 머리와 마음을 들어야 합니다. 눅21:28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그 마지막 밤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를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단지 과거의 예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육신과 가르치심, 고난, 십자가에 죽으심,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까지의 모든 것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만찬은 주님의 죽음과 최후의 만찬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과 앞으로 전개될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적 향연의 약속을 선포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즐거운 축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월절 사건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일어난 구원의 사건이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누신 마지막 밤의 만찬은 제자공동체의 사건으로 오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까지도 포함된 우주적인 만찬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만찬은 그야말로 축제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25:6-8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힌 휘장을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과 함께 천국연회에 참석하게 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베푸실 향연은 하나님과 함께 아름다운 교제를 하는 것이며 너무나도 즐겁고 완전하여서 모든 슬픔과 죽음조차도 다 사라지게 되는 축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으실 것이며 그들의 수치를 온전히 제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 향연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더 이상의 사망도 애통함도 곡하는 것도 아픈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향연을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서 미리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맛을 세상에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성찬의 영광스러운 미래형에 대하여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장차 올 영광의 날에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하늘의 향연에 앉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저희에게 주의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사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새롭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주의 복음에 합당하게 행하여 항상 예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몸에 짊어지고 그 빛을 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