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韓龍雲)
본명 : 한정옥(韓貞玉)
만해(萬海), 한유천(韓裕天)
1879년 충청남도 홍성 출생
1896년 동학에 가담하였으나 운동이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감
1919년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
1927년 신간회(新幹會) 중앙 집행위원
1930년 월간지 <불교> 발행인
1944년 사망
시집 : <님의 침묵>(1926)
38. 님의 침묵(沈黙)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님의 침묵>의 첫 구절,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된 시집 <님의 침묵>은 마지막 작품인 <사랑의 끝판>의 끝 행, ‘예 예 가요
이제 곧 가요’로 마무리되는 이별과 만남의 존재론적 드라마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시집 <님의 침묵>에 강한 연계성과
극적인 구조로 배열되어 있는 88편의 시를 대표하면서 나머지 시들을 해명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만해시가 갖는 시적 특질을 가장 압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이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님’과 ‘침묵’의 상징체계가
어떠한 연관을 지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집 <님의 침묵>의 머리말격인 ‘군말’을 보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중략>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그것이 생명이 있건 없건 간에 만해는 모두 ‘님’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만해의 ‘님’은 그의 영혼의 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그를 존재하게 하는 원점이고, 그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動力)이라
할 수 있다. 자아를 출발시키는 근원으로서 존재하는 그의 ‘님’은 역사 속에서는 조국이나 민족이며, 진리의 의미로는 참자각의
세계요, 그의 종교적 환경에 비추어 본다면 절대 신앙의 가치요, 그외에도 단순한 연인으로서의 의미 등 다양하게 변모하며
적용될 수 있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으며, 또한 그 어느 하나만은 될 수 없는 복합적 의미의
‘님’인 것이다. 가장 포괄적으로 그의 ‘님’을 말하면 인간의 삶을 삶답게 해 주는 모든 가치의 총체를 의인화한 것이라 하겠다.
‘님’의 다양한 의미처럼 ‘님의 침묵’ 역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인간으로서는 헤아리기 어렵고 도달하기 어려운 부처의
경지, 피안(彼岸)의 진리 세계,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암담한 조국 현실 상황, 현상으로는 이미 사라지고 본질로서만 있는
영원한 임의 존재 양상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만해의 생애와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던 민족의 삶이었던 만큼 역사적, 현실적 의미를 떠나서는 그의 시가 온당하게 해석될 수만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1행은 ‘님’이 떠난 사실을, 2행은 ‘님’이 떠난 모습을, 3행은 ‘님’이 떠남으로써 파기된 ‘님’과의 약속을, 4행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님’과의 추억을 말함으로써, 1~4행이 ‘님의 떠남’, ‘님의 부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5행은 ‘님’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6행은 ‘님’이 떠남으로써 야기된 슬픔을 보여 주어 5~6행은 ‘님’과 함께 있으면서 ‘님’에게
절대적으로 귀의했던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뜻밖의 이별에 대한 충격을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1~6행까지는 사랑하는 ‘님’과 이별함으로써 일차적으로 일어나는 슬픔과 괴로움을 묘사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나’라는 접속어에 의해 7행은 시적 상황이 급전하게 되어 슬픔을 희망으로 바꾸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이것은 바로 그가 ‘거자필반(去者必反)’과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철리(哲理)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8행에서는 ‘거자필반’이라는 재회의 확신을 보여 줌으로써 이 시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만해에게는 이별이 부정적
이별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을 극복한 긍정적 이별이 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시가 ‘소멸’과 ‘생성’, ‘이별’과 ‘만남’, ‘눈물’과
‘웃음’의 변증법적 구조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결국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9행은 주제 행으로 ‘님’이 부재하는 객관적 사실을 ‘마음으로는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주관적 의지로써 슬픔을 극복하고 있다.
마지막 10행에서는 현상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본질적 존재로서는 남아 있는 침묵의 깊은 경지 속의 ‘님’을 향해 끝없이 정진
하는 모습을 그리며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1~5행에서 ‘만남은 만남, 이별은 이별’이라는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로서만 존재하던 평면적 사고(思考)가 6행에 이르면서부터
입체적인 사고로 변하게 되었다. 만남의 배후에 있는 이별과 이별의 배후에 있는 만남을 설정함으로써 만남은 곧 이별이요,
이별은 곧 만남이라는 역설이 가능해진 것이다. 바로 이 역설적이고 입체적인 사유가 5행에서 주제행인 10행으로 전개시킨
원동력이 되었고, 또한 ‘님’과의 이별이라는 비탄과 절망의 상황을 소망과 기대의 밝은 공간으로 이끌어 준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님’이라는 존재와 이별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제시하여 인간 정서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이별의 한(恨)’으로 대표되는 한국적 정서를 ‘절망이 아닌 희망’이라는 새로운 장으로 열어 준 기념비적 작품으로,
‘이별’ → ’이별의 슬픔과 고통’ → ‘희망적 기다림’ → ‘만남’에 이르는, ‘소멸’ → ‘모순․갈등’ → ‘생성’이라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드라마이다. 따라서 이별은 만남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며, 생성의 존재 원리에 해당한다. 결국 만해는 국권 상실도 일시적
이고 현상적인 소멸에 불과한 것으로 더 큰 의미의 광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할 현실적 고통이며 역사적
시련으로 인식함으로써 194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조금도 변절하지 않고 일제와 맞서 싸운 실천적 지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39. 이별은 미(美)의 창조
이별은 미(美)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이 작품은 ‘이별’과 ‘미’의 등식(等式) 관계를 통해 이별에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로
시작해서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로 끝나는 구조는 이 시가 부정을 통해 긍정에 이르고, 그것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더 큰
긍정을 준비하는, 이른바 정․반․합의 변증법적 철학 원리에 기초해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아침의 바탕 없는 황금’,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별의 미는, 어둠이 있기에 밝음이 있는 것처럼 긍정적 가치는 반드시 부정적 가치의 존재에서만 그 생명력을 발휘
할 수 있다는 역설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한다. 다시 말해, 황금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바탕으로
빛을 발하고, 검은 비단은 어둠 속에서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으며, 생명은 죽음 없이는 가치를 얻을 수 없고, 시들지
않는 꽃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님’과의 ‘다시 만남’을 전제로 한 이별은 분명 의미 있는 것이 되며,
또한 그 이별은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있는 이별이므로 새로운 미의 창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40.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시집 <님의 침묵>, 1926)
해설 생략
본 해설집의 완전한 내용은 <한국현대시 400선 1, 2>(태학사) 참조.
41. 나룻배와 행인(行人)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시집 <님의 침묵>, 1926)
이 작품도 만해의 다른 시들처럼 ‘님’에 대한 절대적 의미를 부여한 노래이다. 시적 화자는 자신을 ‘나룻배’에 비유하고,
나룻배와 행인의 관계를 통하여 인내와 희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숭고한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행인인 ‘님’은 나를 흙발로 짓밟지만, 나룻배로 나타난 시적 화자는 기쁨과 사랑을 느낀다. 왜냐하면, 흙발로 짓밟히는 그 순간
만이 그가 ‘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 곧 ‘님’을 맞기만 하면 나룻배, 곧 시적 자아는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를 막론하고 기쁨에 넘쳐 강을 건너게 된다. 바람과 눈비를 맞는 고통 속에서 ‘밤에서 낮까지’ ‘님’을 기다리던
어느 날, 마침내 ‘님’은 나룻배를 타게 된다. 그러나 그뿐, 나룻배인 그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냥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님’이 반드시 돌아올 것을 믿으며 또다시 ‘님’을 기다리며 날마다 외롭게 낡아가고 있다.
이 작품에서 ‘님’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로 하여금 절망하지 않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2연 3행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다. 이 믿음은 <님의 침묵>의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와 동일한 차원으로, 거자필반(去者必反)의 원리를 믿고 있기에 날마다 ‘님’을 기다리며 낡아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의 기본 바탕은 욕된 일에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참는 ‘인욕(忍辱)’과 자기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주고 희생함
으로써 탐욕을 이겨내고 사랑을 실천하는 ‘보시(布施)’의 불교적 윤리 의식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흙발로 짓밟혀도 원망
하지 않고(인욕), ‘님’을 안아 물을 건너며(보시), ‘님’이 오실 때를 기다리는 헌신적 사랑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해에게 있어서 ‘님’은 현실적으로 떠나고 없지만, 그 ‘님’과의 이별은 만남이라는 밝은 긍정을 전제로 하고 있는 차원
높은 이별이다. 소월의 ‘님’은 이미 죽었거나 돌아오지 않을 곳으로 떠나 버린 ‘님’이므로 그의 시가 비탄과 체념적인 어조를
띠고 있는 데 비해, 만해의 ‘님’은 반드시 돌아올 것을 확신하는 ‘님’이므로 그의 시는 항상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분위기이다.
42.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후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이 시의 핵심은 인종(忍從)과 애소(哀訴)로 살아가는 가운데서 극복의 힘을 주는 ‘당신’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가냘프면서도
끈질긴 한국 여인의 목소리이다. 여기서도 ‘당신’은 시인이 추구하는 ‘님’과 같은 존재이다.
‘당신’은 나를 떠났지만,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람다운 삶을 포기한 채 치욕 속에서 사는 내게 삶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갈고 심을 땅’도, ‘집’도, ‘민적’도 없다. 이러한 나에게 부자인 ‘주인’과 권력자인 ‘장군’은
인격적 대우를 거부하고 치욕을 가한다. 나와 주인, 나와 장군의 대립은 못 가진 자와 가진 자, 피지배자와 지배자, 민중과
권력자의 대립으로, 이것은 바로 타락한 인간 세계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자, 당시 현실과 연관지어 보면 우리 민족과
일제의 대립으로 민족의 삶과 존엄성이 박탈된 식민지 상황을 암시한다. 여기서 만해는 ‘그를 항거’한 3․1 운동이 실패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내보이기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自責感)으로써 현실 상황을 ‘스스로의 슬픔’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와 같은 타락 사회에서 치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시적 자아는 윤리와 도덕, 법률은 말만 그럴듯한 것이지, 결국은
권력(칼)과 돈(황금)에 의해 지배되는 허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과 자신의 삶에 대해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지게 됨으로써 불안감이 고조된다. 마침내 현실의 역사를 부정하고 피안(彼岸)의 세계(불교적 초월의 세계)로 도피하는 삶과,
인류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 그리고 현실에 절망하고 그저 자포자기하는 삶 가운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갈등을
겪고 있던 중, ‘당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극적 전환이 일어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적 자아는 아무리 타락한 현실 세계라
할지라도, 참된 삶을 이루기 위한 정당한 모색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을 깨우친다.
그 귀중한 깨우침이 바로 만해로 하여금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치게 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43. 복종(服從)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해설 생략
본 해설집의 완전한 내용은 <한국현대시 400선 1, 2>(태학사) 참조.
44. 정천 한해(情天恨海)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 하늘을 따를쏘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 하리라.
높고 높은 정(情) 하늘이
싫은 것만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恨) 바다가
병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情) 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恨) 바다는 깊을수록 묘하니라.
만일 정(情) 하늘이 무너지고 한(恨) 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天)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情) 하늘이 높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恨) 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도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情) 하늘에 오르고 한(恨) 바다를 건느려면
님에게만 안기리라.
(시집 ꡔ님의 침묵ꡕ, 1926)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는 ‘정(情)의 하늘’과 ‘한(恨)의 바다’이지만, 그 곳은 가을 하늘보다 높고 봄 바다보다 깊어 시적
화자는 결코 갈 수가 없다. 이렇게 제 자신을 미약한 존재로 드러내고 있는 시적 화자의 숨은 의도는 ‘정천 한해’에 대한
무조건적인 예찬이나 미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님’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사랑과 그리움으로 가득찬 마음은 가을 하늘보다도 높고, 가슴에 사무친 한은 봄 바다보다도 깊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이 세상 어느 것보다 아름답고 오묘한 것이라 하지만, 사바 세계를 헤매는 인간들로서는 그것을 실천하기
어렵고, 연모의 정으로 깊어진 원한 또한 쉽게 버리지를 못한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지혜의 높이인 ‘손’이 낮고, 지혜의 깊이인 ‘다리’가 짧은 모든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발견하고 절망한다.
그러므로 사랑이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가슴에 사무친 한이 사랑으로 승화
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깊을수록 묘한’ 것임을 아는 시적 화자는 사랑의 감정이 없어지고, 사무친 한이 사라진다면, 차라리
‘정천에 떨어지고 한해에 빠지는’ 절망의 질곡에서 고통받겠다고 외친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 의미를 제시한 것으로, 그리움의
대상이나 원한의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사랑의 감정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그리움에 사무친 한이 세상 어느 것보다 깊고
절실한 것인 줄 알았는데, ‘님’의 초월적 세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 ‘님’의 절대성을 인식하게 된 시적 화자는
마침내 ‘님에게만 안기는’ 완전한 귀의의 방법을 통해 정한(情恨)을 극복하고 ‘님’의 초월적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따라서 이 시는 대립적 개념인 ‘정(情)’과 ‘한(恨)’이 하나로 통합되어 ‘님’이라는 초월적 존재로 귀결되는 과정 즉, 대립적
관계에서 합일적(合一的) 경지로의 이행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 유한적 정한의 세계를 철저히 부정하고 극복함으로써
초월적 세계로의 승화를 꿈꾸는 시적 화자의 소망이 잘 나타나 있다.
45. 찬송(讚頌)
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으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의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시집 <님의 침묵>, 1926)
해설 생략
본 해설집의 완전한 내용은 <한국현대시 400선 1, 2>(태학사) 참조.
46. 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백골(白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줍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주운 꽃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의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
이 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만해가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시를 읽고 난 뒤, 그것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그의 문학관 및 종교관이 나타나 있어 주목을 끈다. 타고르는 동양 최초로, 그것도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인으로서 노벨 문학상
(1913년)의 수상자가 된 사람이다. 우리 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찬양하기도 했던 그가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던 당시의
많은 우리 문학인들에게 ‘동방(東方)의 시성(詩聖)’으로 추앙받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가 이 땅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17년 육당의 ꡔ청춘ꡕ을 통해서였으며, 본격적인 소개는 김억에 의해서였다. 만해의 ꡔ님의 침묵ꡕ에 수록된
시편들은 타고르의 본격적 도입 이후 창작된 작품이며, 한국 근대시의 형성과 그 전개에 끼친 타고르의 영향은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타고르의 시 ‘Gardenisto’라는 작품은 ‘원정(園丁, 정원사) The Gardener’의 에스페란토 역(譯)이다.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타고르의 시에 상당히 감동받았으면서도 전적으로 타고르의 시 세계에 공감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타고르의 시에 나타나는 초월적 세계에의 지향에 대하여 만해는 많은 이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만해에
의하면 현실을 떠나 영원한 피안(彼岸)의 세계를 노래하는 타고르의 시는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경건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절망의 노래요, 죽음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시는 타고르의 시에 대한 만해의 소감을 ‘벗’이라고 지칭된 타고르에게 들려 주는 형식으로 된 전 4연 구성의 자유시이다.
1연에서 만해가 평가하는 타고르의 시는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이나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백골의
향기’와도 같이 대단히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아무리 신비롭고 놀라운 것이라
하더라도 진정 살아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일견 희망의 노래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희망을
포기한 ‘절망인 희망의 노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2연에서 만해는 그에게 눈물을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라고 한다. 떨어진 꽃에 눈물을
뿌리는 일은 소용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3연에 이르면 더욱 분명해져 그의 시를 ‘무덤을 그물친 황금의 노래’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현실의 생명과 유리된 허황한 아름다움만을 가진 노래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추’는 것은 현실의 삶을 위해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고 있는 만해로서는 그에게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발을 세우’라고 진심으로 충고한다. 즉, 고통스런 현실의 역사를 회피하지 말고, 그 안에서 참된 가치의
실현을 위해 싸우라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마침내 절망적 현실인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게 된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4연에서 만해는 그의 시에 대한 감상을 종합적으로 ‘부끄럽고 떨리는’ 것으로 말하고 나서, 왜 ‘내가 님을
떠나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것인지 밝힘으로써 자신의 문학관이자 종교관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종교란 현실을 떠난 영원한 내세로 구원시켜 주는 데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 현실의 고통에 맞서 능동적
으로 싸울 수 있도록 해 주는 데 그 가치가 있으며, 문학 또한 그 같은 사명에 충실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만해는 이
시를 통해 지금과 같은 암울한 현실 상황하에서 필요한 것은 절망적 노래가 아니라, 현실 상황과 대결하며 그 속에서 가치
있는 삶을 이루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47. 명상(冥想)
아득한 명상의 작은 배는 가이없이 출렁거리는 달빛의 물결에 표류(漂流)되어 멀고 먼 별나라를 넘고 또 넘어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라에는 어린 아기의 미소(微笑)와 봄 아침과 바다 소리가 합(合)하여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옥새(玉璽)의 귀한 줄도 모르고, 황금을 밟고 다니고, 미인(美人)의 청춘(靑春)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이 나라 사람은 웃음을 좋아하고, 푸른 하늘을 좋아합니다.
명상의 배를 이 나라의 궁전(宮殿)에 매었더니 이 나라 사람들은 나의 손을 잡고 같이 살자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님이 오시면 그의 가슴에 천국(天國)을 꾸미려고 돌아왔습니다.
달빛의 물결은 흰 구슬을 머리에 이고 춤추는 어린 풀의 장단을 맞추어 넘실거립니다.
(시집 <님의 침묵>, 1926년)
해설 생략
본 해설집의 완전한 내용은 <한국현대시 400선 1, 2>(태학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