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산과 보문평야 답사도보- 2010년 12월 8일
■ 신문왕릉
신문왕릉 능역을 돌아 사천왕사터로 간다.
■ 사천왕사터 당간지주
사천왕사터는 지금 발굴 중이다.
거대한 거북받침이 보인다.
낭산을 올라 선덕여왕릉이 있는 도리천으로 간다.
▴ 낭산(사적 제163호)은 경주시 보문동, 구황동, 배반동 일대에 걸쳐있는 높이 104m 안팎의 펑퍼짐한 산으로 남북에 봉우리가 있어 마치 누에고치처럼 생겼다. 주위에 명활산과 토함산, 선도산, 소금강산이 둘러싸고 있다.
낭산은 신라 때부터 神遊林(신성한 산)으로 여겼다. <三國史記>에 따르면 실성왕 12년(413년) 8월, 낭산에 구름이 일어났는데, “누각같이 보이고 향기가 매우 성하게 퍼지며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이니 응당 복지일 것이다” 하고, 그 뒤부터는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
그후 불교가 공인되면서 신유림은 전불시대 칠처가람터의 하나로 인식했으며, 선덕여왕 때에는 도리천이라 하여 신성시하였다.
신라인들은 낭산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하천을 만들었다.
주위의 산들까지도 불교의 우주관과 관련된 의미와 이름을 부여하였다. 그들은 모든 산봉우리에 불, 보살의 이름이나 불교의 사상을 담은 용어들로 바꾸어 불렀다. 그리고, 그 산 속 모든 곳을 부처님이 상주하는 도량으로 인식하였다.
낭산 주변의 대표적 유적지로는 진평왕릉, 선덕왕릉, 신문왕릉, 효공왕릉,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진 능지탑 등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과, 사천왕사, 망덕사, 황복사, 중생사 등이 있다.이 절들은 호국사찰이거나 왕실의 복을 빌었던 곳이다.
낭산 기슭에는 백결선생이 살았고, 북쪽 산허리에 최치원의 고택 독서당도 있다.
■ 선덕여왕릉
능지탑으로 가는 길
■ 능지탑은 경주시 배반동에 있다.
낭산 서쪽에 흩어져 있던 탑재들을 새로 맞추어 이런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예로부터 능지탑 또는 연화탑이라 불렀다.
5층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기단 위에 피어오르는 연화문을 두르고 위에 흙을 덧쌓은 뒤, 석재를 모아 탑신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연화문을 두른 특이한 모습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은 “내가 임종한 후 열흘 안에 고문 밖 뜰에서 화장하라. 상례를 검소하게 하라.”고 유언하였는데 이 탑 주변에 문무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되어, 문무왕의 화장터로 추측하고 있다.
12지신상 일부가 남아있다.
석재들이 이렇게 남아있으니,
복원한 모습이 이상할 수밖에.
Les feuilles mortes 고엽
Yves Montand(1921~1991)
■ 중생사는 경주시 배반동 낭산에 있다. 신라때 창건된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40년대 옛 터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법당 비로전과 삼성각, 요사채 2동이 있다.
유물로는 마애삼존불(보물 제665호), 불상대좌, 석탑 지붕돌, 석탑 부재, 석조관음보살상 등이 있다.
석조관음보살상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 중생사 마애지장삼존불(보물 제665호)
본존은 보발을 두 어깨에 늘어뜨리고 띠 줄이 있는 법의를 걸치고 있다. 스님의 복장에 가깝다. 수인은 생략되었고, 반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두광도 신광도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특히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모습은 고려 불화에 보이는 모자를 쓴 지장보살의 모습을 닮아 이러한 양식의 앞선 예로 보인다.
오른쪽 협시는 신장상으로 보인다.
마모가 심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중생사(낭산)관세음보살은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있다.
마모되어 분명히 나타나지 않지만 십일면관세음보살이다.
이 보살상의 머리는 일찍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몸체는 낭산 서쪽 기슭 능지탑 근처에 반쯤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1975년에 몸체를 조사하였는데, 그 마을에 살던 노인에게서 이 “이 불상의 머리는 경주박물관으로 가져갔는데, 그 모양이 여느 불상과 달리 길쭉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리하여 경주박물관 정원에 전시되어 있던 보살 머리가 낭산에 있는 보살 몸체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후 1997년 4월 몸체가 묻혀있던 부근에 연꽃대좌를 찾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높이는 3.76m이다. 통일신라 8~9C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나면 받침대 위에 있던 불상이 굴러 떨어지면 가장 약한 목이 부러지기 쉽다. 또 몽골의 침입, 조일전쟁, 조청전쟁과 같은 전란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일부러 불상을 훼손한 경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간혹 땀 흘리는 불상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유생들은 세상을 현혹시킨다 하여 불상을 파괴하였다. 목불상은 불태우고 석불이나 금동불은 우물, 저수지, 바다에 던져 버렸다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머리를 잘라 관청에 신고하기도 하였다.
중생사 관세음보살상에 대하여,
<삼국유사-제3권 탑상 제4> 三所觀音 衆生寺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① 신라 古傳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 천자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아름답기가 비할데가 없었다. 이에 천자가 말하기를 “고금에 있는 그림으로도 이같이 아름다운 것은 적을 것이다.” 하고 화공을 시켜 그녀를 그리게 했다. (그 화공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혹은 張僧繇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吳나라 사람으로 梁나라 天監연간에 武陵國王의 侍郞直秘閣知畵事가 되었고, 右將軍 吳興太守를 지냈다. 그러니 여기에 말한 천자는 중국 梁 ․ 陳무렵의 천자일 것이다. 그런데 傳에 唐나라 황제라 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을 가리켜 모두 당이라 하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실상은 어느 시대의 帝王인지 알 수 없다. 여기서는 두 가지 말을 모두 적어둔다-일연스님의 註)
그 화공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림을 다 그렸으나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을 찍어놓았는데, 고쳐보려 하였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붉은 점은 반드시 날 때부터 있는 것인가 보다 하고 황제에게 그림을 바쳤다. 황제는 그림을 보고 “모양은 실물과 똑 같으나 배꼽 밑의 점은 속에 감추어진 것인데, 어떻게 알고 이것까지 그렸느냐”하고 황제는 크게 노하여 화공을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주려고 하니 승상이 “저 사람은 마음이 아주 곧은 사람이오니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고 아뢰었다. 이에 황제는 “만일 저 사람이 어질고 곧다면 내가 어제 꿈에 본 사람의 형상을 그려 바치게 하라. 그 그림이 꿈에 본 얼굴과 다르지 않다면 용서해줄 것이다.”하였다. 이에 화공이 십일면관음보살의 상을 그려 바치니 꿈과 맞는지라 황제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 그를 용서해 주었다.
화공은 죄를 면하자 博士 芬節과 약속했다. “내가 들으니 신라국에서는 불법을 존경하여 신봉한다 하니 그대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곳에 가서 함께 佛事를 닦아 그 나라를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소.”
이들은 드디어 신라국에 이르러 중생사의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고 기도하여 복을 얻었으니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② 최제안(?~1046)의 증조부 최은함은 신라 제55대 경애왕 때 사람이다. 그는 자식이 없어 중생사 관음보살 앞에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지극한 정성에 감응이 있었던지 부인은 아들을 낳았다. 부처님께 감사하며 소중히 길렀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난지 석 달만에 후백제 견훤이 쳐들어와 신라왕을 죽이고 서라벌에 들어와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 난리통에 최은함의 부인도 죽었다.
최은함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을 들고 나섰다. 어쩔 수 없이 갓 태어난 아들을 포대기에 싸서 중생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기의 생명을 지켜주시어 부자가 다시 만날 것을 간곡히 빌었다. 그리고는 아기를 관음보살상 대좌 아래 두고는 전쟁에 나갔다. 그후 한 보름쯤 지나 적병이 물러가자 최은함은 곧바로 중생사 관음전으로 달려들어왔다. 놀랍게도 아들은 향을 피우는 탁자 아래 잠자고 있었다. 입에서는 젖 냄새가 났다. 최은함은 관음보살상에게 무수히 절을 하고는 아들을 데려와 길렀다.
이 아이가 최제안의 할아버지 崔承老(927~989)이다. 그는 고려조에 正匡이란 벼슬을 지냈다. 제안의 아버지는 崔肅으로 郎中 벼슬을 지냈다. 최은함은 신라의 마지막 제 56대 경순왕(927~935)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大姓이 되었다.
최제안은 內史侍郞同內史 門下平章事 柱國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1040년 고려의 번영과 왕실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폐사된 옛 절 수리사를 수리하여 큰 절 천룡사를 세우고 여러 부처님을 모시고 석가만일도량을 설치하였다.
최제안은, 천룡사의 주지는 절의 승려들 중에서 덕이 높고 존경받는 이를 추천하여 세우라는 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 절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고 한다.
③ 三所觀音은 세 곳에 나타난 관음보살상이란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아래와 같은 세가지 기적을 보인 것이다.
1. 고려 성종 11년(992) 3월 이 절의 주지 性泰가 시주가 없어 절을 유지할 수 없음을 걱정할 때 관음보살상이 金州(김해) 사람들의 시주를 얻어 주었다.
2. 절에 불이 났을 때 관음보살상이 스스로 절 마당으로 옮겨 화재로부터 재난을 피했다.
3. 고려 명종 3년(1173) 문자를 모르는 占崇이 주지로 있었는데, 한 승려가 점숭을 몰아내고 자신이 주지직을 맡으려고 나라에서 보낸 사신에게 점숭을 모함했으나 점숭이 축원문을 거꾸로 들고도 잘 읽어내자 사신은 ‘이 스님은 관음대성이 보호하는 분’이라 하여 점숭을 그대로 이 절에 머물게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나라의 은혜를 빌고 복을 구하는 역할을 했다.
씩 웃는 이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은 중생사 근처에서 출토되었다.
국립경주박물관 불상전시관에 있다.
■ 독서당은 고운 최치원(857~?)이 어린 시절 공부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에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 남쪽 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최후의 옛집임이 분명하다.”는 기록이 있다.
경주 부윤이었던 凝窩 李源祚(1792~1871) 쓴 <낭산독서당유허비문>에 “빈 터에 옛 우물이 아직도 남아있고, 옛 주춧돌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공부할 곳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원조가 경주부윤이 된 것은 58세 때인 1849년(헌종 15년)이었다.
구황리 삼층석탑으로 가는 길
■ 황복사터는 경주시 구황동 보문평야에 있다.
1937년 낭산 동쪽 기슭에서 일본인이 수집한 기와 조각 뒷면에 ‘皇福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삼층석탑이 서 있는 이곳을 皇福寺 터로 추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탑을 황복사터 삼층석탑이라고 하고, 그냥 이곳 지명을 따서 九黃里 삼층석탑이라고도 한다.
1968년 신라삼산오악조사단이 발굴 · 조사하였지만 절의 전체모습은 밝혀지지 않았다.
1943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지붕돌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사리함 표면에 99개의 소탑이 새겨져 있고, 안에는 금으로 만든 여래좌상, 여래입상, 유리구슬, 팔찌, 금실, 사리 4알 등이 있었다.
사리함 뚜껑 안쪽에 있는 명문에 따르면, 석탑은 692년에 신문왕이 돌아가자 곧 효소왕이 즉위하여 그 원년(692)에 효소왕이 부왕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
그후 702년 효소왕도 돌아가자 효소왕의 동생 성덕왕이 706년에 이미 있던 탑에 불사리 4알, 순금아미타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안치하여 돌아간 3왕(신문왕, 신덕왕후, 효소왕)의 명복을 비는 동시 현재의 왕과 왕후의 수복과 왕의 내외권속의 번영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
의상대사(625~702)는 19세 때인 643년 이곳에서 출가한다. 그렇다면 이 절은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을 것이다. 본디 작은 절로 있던 것을 뒤에 크게 중창하여 왕실의 원찰로 삼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무리들과 탑을 돌았는데, 항상 허공을 밟고 올라가 층계를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지금은 삼층석탑과 십이지신상, 머리가 잘린 비받침 3개가 남아있다. 십이지신상은 현재 9상이 남아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돌의 생김새나 배치 등이 방위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근처 어느 왕릉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신라 왕릉에서 십이지신상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성덕왕릉이다. 황복사터의 십이지신상은 성덕왕 때를 지난 8세기 중엽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층기단 면석의 버팀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었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경전을 봉안한 최초의 탑이다. 그러나 이 경전은 보이지 않는다.
이 두 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금제여래여래좌상의 높이는 12.2cm이다. 몸체만 순금이고 광배와 대좌는 금동이다.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가 있다. 눈, 코 입의 표현이 분명하고 균형이 잡혀있어서 이상화된 모습을 보인다. 목에는 삼도도 표현되었다.
왼손은 항마촉지인처럼 무릎 위에 올렸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갖추었다. 통견으로 입은 법의에 드러난 앞가슴에는 대각선으로 걸쳐입은 승기지가 나타나있다. 법의의 주름은 결가부좌한 다리를 거쳐 대좌 밑으로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늘어져 있다. 앞무릎에는 팽팽한 양감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옷주름이나 입체감의 표현은 무르익은 당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국제적 성격을 지닌다. 삼국시대 불상이 건강한 근육질인데 비해 살찐 모습이다. 살찐 모습은 안정기에 접어들 때 보이는 현상이다. 효소왕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입상보다 좀더 발달된 형태를 보여 706년에 안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제여래입상은 높이 14.4cm이다. 낮은 복련대좌 위에 바로 서있다. 광배는 불꽃무늬가 투각된 보주형 두광만 남아있다.
소발의 머리에 큰 육계가 있고, 통통하고 긴 얼굴에 미소를 보인다. 목은 짧고 삼도는 없으며 어깨는 좁은 편이다.
왼손은 들어 옷자락을 잡았으며,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갖추고 있다.
통견의 법의에는 반원형 주름이 반복해서 흘러내렸고, 팔을 거쳐 늘어진 옷자락은 조금 옆으로 전개된다. 그 끝에는 잔주름이 나있다.
상의 뒷면에도 U자형 모양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옷자락 표현은 고식이다. 탑을 건립한 692년에 안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등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황리 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
구황리 금제여래좌상은 불신과 대좌, 광배를 분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연결된 금판이다. 여기에 여러 문양들을 아름답게 투각했다.
신광 중앙에 찍어낸 인동당초문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보인다.
금제여래입상 보주형 광배에는 불꽃무늬를 투각했다.
등에 있는 구멍은 신광을 끼웠던 자리일 것이다.
이런 비받침이 구황리 삼층석탑 앞 논둑에 나란히 있다.
이 근처에서 비의 파편이 발굴되었다.
이 탑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논 가운데 이런 돌들이 둘러져 있는 곳을 왕릉터로 추정하고 있다. 언젠가 홍수로 봉분은 다 떠내려가고 이 석재들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 폐왕릉이 신문왕릉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앞의 신문왕릉은, 신문왕릉이 아니고 효소왕릉이라는 것이다.
■ 진평왕릉
■ 설총무덤
비에 "弘儒侯薛先生諱聰之墓"라 썼다.
비는 단기 4317년(1984)에 세웠다.
설총은 655년경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효대사(617~686), 어머니는 요석궁에 있던 과부로 태종무열왕의 따님이다.
<삼국유사>에, 薛聰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10현 중의 한 사람이다. 방언으로 중국과 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六經과 문학을 훈해하였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명경(경전 강론)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이를 전수해서 끊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설총은 아버지 원효가 불교에서 차지했던 것과 같은 위치를 유학과 문장에서 차지했다.
그러나 원효의 불교는 천지만물의 근본을 밝히고 정신세계를 지도할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설총의 문장은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문신으로 진출하면서 처세하는 데 필요한 정도의 지혜나 기술이었다.
방언으로 유학의 경전을 풀이하는 방법을 가르쳐 후세까지 널리 통용되는 공부 요령을 마련했으나 경전에 대한 사상적 탐구는 본격적으로 이루지 못했다.
설총이 지은 글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삼국사기>에도 “남쪽 지방에 설총이 지었다는 비명이 있는데 문자가 결락되어 읽을 수 없고 뜻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설총은 아버지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그 유해를 부수어 소상으로 진용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終天(終天抱恨 평생 슬픈 한을 품는다)의 뜻을 표했다.” 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설총이 지은 글로 <花王戒>라는 것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 설총 조에 있고, <동문선>에도 <諷王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화왕계>라는 제목은 그 내용을 따라 후대 학자들이 다시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신문왕은 어느 여름날 밤 설총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하였다. 그래서 설총은 옛날 이야기하듯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온갖 꽃이 피어있는 동산을 꽃나라라 하고 그곳을 화왕이 다스렸다. 화왕은 처음 아름다운 여인인 장미에게 마음이 끌렸다가 머리가 센 늙은이 백두옹(할미꽃)의 말을 듣고 요망한 무리를 멀리하고 정직한 도리를 숭상하게 되었다.
신문왕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대의 寓言은 참으로 깊은 뜻이 있으니 글로 써두어 임금을 경계하는 말로 하라”고 하였다.
백두옹이 화왕 앞에 나아가 그 동안의 생활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충간한다. 설총은 임금의 도리를 화왕에 빗대어 은근히 풍자한 것이다.
백두옹은 서울 밖 한길 가에 산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선비의 고결한 성품에 대한 자부심을 은근히 나타냈다. 임금에게 부귀만 누리며 만족할 것이 아니라 독을 제거하는 약도 필요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약이라는 것은 마음의 바른 도리이며, 백두옹이 그약을 지시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설총은 백두옹으로 자처했고, 신문왕은 이를 인정했다.
설총 시대 선비는 왕의 신하이지, 승려처럼 임금의 스승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임금에게 직언으로 가르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우언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식물을 의인화하여 사람의 도리를 말한 <화왕계>는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후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설총무덤 앞에서 점심파티를 느긋하게 하고,
보문마을을 지나,
연화문 당간지주 가는 길 논둑에 이런 석탑 부재들이 있다.
■ 연화문 당간지주(보불 제310호)는 높이 146cm로 작은 편이다. 동서 62cm 떨어져 마주 서있다.
다른 예를 볼 수 없는 화려한 연꽃무늬 조각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다.
현재의 지주는 아랫부분이 상당히 흙에 묻혀서 그 구조를 알 수 없다.
또 보문사의 것인지, 다른 절의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 보문사터는 명활산과 낭산 사이 보문평야 동쪽에 있다. “보문”이라 쓰인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보문사가 있었으리라 추정할 뿐 절에 대한 기록은 없다. 논의 동쪽에 금당터가 있고 동서 탑자리에 초석이 남아있다.
남쪽에 남북으로 마주보는 당간지주와, 서쪽 논 가운데 연화문이 새겨진 당간지주가 있다.
이 밖에 석조, 석등의 지붕돌 및 장대석 등이 남아있다
* 석조(보물 제64호)는 큰 화강암 하나에 내부를 장방형으로 깊게 파내어 물을 담도록 하였다.
깊이 0.61m 길이 2,43m, 너비 1.85m이다. 아랫쪽에 물을 빼는 구멍이 있을 뿐 아무 장식이 없다.
소박하고 장중한 맛이 있어 통일신라시대 석조의 대표적인 것으로 본다.
석조는 절에서 쓰던 급수용구라고도 하고 부처께 공양할 연꽃을 담는 용기라고도 한다.
보문리 절터 당간지주(보물 제123호)는 높이 3.8m의 당간이 64cm의 거리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마련된 구멍이 상중하 세 곳이 있다. 부러진 남쪽 지주에는 구멍이 반쯤 뚫려있고, 북쪽의 것은 완전히 뚫려 있다.
장식없이 소박하고 장대한 맛이 있으며 바 깥쪽에서부터 각도가 좁아져 상승감이 있다.
주춧돌이다. 이곳이 금당터일 것이다.
탑 자리 2군데가 있다.
금당터 아래 사리공이 분명히 보이는 석탑 지붕돌과 석등 대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있다.
새참파티하러 가는길
멀리서 보면 나지막하여 물고기처럼 예쁘게 생긴 능선의 그윽한 솔숲길을 걸어,
어떤 무덤 앞에서 파티를 열었다.
다시 능선을 내려와 효공왕릉으로 가는 길
■ 효공왕릉(사적 183호)
원형봉토분으로 높이 4.5m, 지름이 22m다. 외부에 시설물은 없다.
신라 제52대 효공왕(897~912 재위)은 어지러운 시대 왕이다.
북쪽 중원 지방에 궁예, 양길 등 호족이 등장하여 세력을 다투다가 왕 5년(901) 궁예가 왕이라 칭했고, 904년 견훤이 대야성을 치는 등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였으나 막지 못했다.
왕 6년(912)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
守吾齋로 갔다.
수오재는 <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 등의 책을 지은 이재오씨 집 당호이다.
우리는 여기서 커피도 얻어 마시고 한참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적게 걷고 많이 보았다.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고 보람이었다.
첫댓글 경주는 찬찬히 둘러볼 곳이 너무 많습니다. 소풍삼아 문화유적답사 삼아 자연 속을 거닐어 보면 하루가 여유롭고 풍요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