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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전국도보성지순례를 마치고
주님의 기도로 시작하겠습니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무엇이죠? ‘행운’입니다.
그럼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예 ‘행복’입니다.
저는 여름에 출발했다가 가을이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또 어느 날은 시원한 들판을, 그리고 많은 날을 그 지긋지긋한 빗속에서, 전국 각 교구를 40일간 공
식적인 거리 1,113km를 걸었는데, 출발할 때 교구 주간님께서 “살아서만 돌아와 다오!”하셨는데 아주 건강하게 돌아왔습니다. 이렇
게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전국의 꾸르실리스따 여러분들의 기도와 성원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번 도보성지순례의 목적은 무었이었는가?
이번 도보순례의 목적이 공식적으로는 그동안 크리스천적 삶을 살지 못함을 회개하고, 꾸르실료 발상 당시의 의미를 느끼며, 한국꾸
르실료 40년의 반성과, 꾸르실리스따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순교자들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이며, 그리고 성지순
례에 대한 의미의 정립과 개선이라는데 그 목적이 있었지만,
우선 나 스스로를 알고자 함이었습니다. 사목회, 꾸르실료, 레지오, 성서 백주간, 그리고 예비신자 교리 등으로 봉사하는 과정에서 이
웃을 진정한 사랑으로 대했는가? 낯내기만 좋아한 바리사이는 아니었는가? 진정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나? 이번 순례의 길에
서 나를 뒤돌아보고자 함이었습니다.
또 주님께서 40일간 광야에서 단식하시고 기도를 하시며 사탄을 이기신 것과 같이 저 또한 고행 속에서 세속의 작은 유혹들을 뿌리치
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40년 동안에 야훼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그 모습과 같
이, 내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미움과 불만, 오기, 교만에서 탈출하고자 고행을 선택했습니다. 곧 회개의 시간을 갖고 주님을 만나보
기 위함이었습니다.
몇 년 전, 회사에 다닐 때 제가 간부라고 그 회사 은행보증과 대출명의 대여로 인해, 한 때 신용불량자가 되어서 경제적으로 엄청
난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었지만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밤에 음식배달까지 하면서 살아온 나에게 지금껏 굶지도 않고 길거리에 나
앉지도 않은 지금의 내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기만 한데, 그것은 아마도 주님께서 보살펴 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여, 약해
진 내 마음에 용기와 각오를 새롭게 하고, 어려움 속에 계신 다른 분들도 주님의 손길이 언젠가는 나에게도 미치시리라는 것을 굳
게 믿으며 희망 속에 사시라는 말씀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제게는 누나하고 17년이나 차이가 나는 아들이 있는데 마침 이 놈이 군에 입대하여 뙤약볕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나도 함께 그 고통에 마음으로 동참하며 아들에게 인내와 용기를 전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백수인 주제에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고 한가하게 무슨 도보성지순례냐?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분도 있었으리라 짐작은 합니만,
다만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겠지요. 나에게 피해를 준 그 사람들을 정말 미워했었는
데 그러다보니 오히려 내 자신이 스스로 미워지고 더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모든 일을 부정적인 시각보다도 긍정적인 시각
으로 바라보면서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들, 미움, 욕심, 가식, 교만, 불만, 질투, 이런 것들을 전부 벗어버리고자 했습니다.
순례 코스를 간단하게 소개하면 8월 23일 제주 이시돌 피정의 집에서 집결하여
8월 24일 첫날 제1구간인 제주 순교자 정난주 묘역에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이틀에 걸쳐 대정의 김대건 신부님 표착
기념관, 제주 시내, 관덕정, 황사평 순교자 묘역을 참배하고 김해로 건너왔습니다.
제2구간은 마산교구 진양의 신말구 순교자 묘역을 출발하여 삼랑진, 부산교구인 우리나라 첫 증거자 김범우 묘역을 거쳐 오순절 평
화의 마을, 그리고 밀양을 지나 대구 시내를 통과하여 청도, 팔조령을 넘어 가창, 칠곡, 동명, 그리고 한티성지 피정센터에서 2구간
을 마쳤습니다.
대구에서 관덕정과 교구청방문을 하고 3구간인 광주교구 나주성당으로 이동했습니다.
나주 무학당을 출발하여 송정, 광주시내 금호동, 비아동을 거쳐 장성사거리성당을 지나 갈재를 넘어 우리교구인 정읍시기동성당,
태인공소, 원평성당, 그리고 서천교, 초록바위, 치명자산을 거쳐 천호성지에서 숙박을 하고 3구간을 마쳤습니다.
4구간은 천호에서 버스로 대전교구인 갈매못을 지나 해미에 도착하여, 다음날부터 한티고개(여기는 완전 산길로 된 고개였습니다),
덕산, 신리성지, 합덕성당, 솔뫼, 아산만을 지나 공세리 성지를 거쳐 수원교구인 비전동, 안성을 거쳐 죽산성지에서 4구간을 마쳤습니다.
다음날 버스로 제5구간인 안동교구 문경으로 이동하여 마원성지, 문경새재 입구 최양업신부님 선종비, 이화령고개를 넘어 청주교구인
수안보에 도착했고, 수안보를 지나 충주댐, 종민공소, 산척공소, 천등산 고개를 넘어 원주교구인 백운에 도착했고. 다음날은 울고 넘는
박달재를 지나 베론성지와 남종삼 요한 성인 생가터를 거쳐 치악산, 원주교구청을 거쳐 태장동성당을 끝으로 5구간을 마쳤습니다.
이 울고 넘는 박달재는 제 18번 그 날 박달재를 올라갈 때 도토리 한 알이 또르르 제 앞을 굴러 갑니다. 그래서 한 곡조 읊었죠.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에 금봉이야~!
다음날은 제6구간으로 곰실공소를 거쳐 춘천의 교구청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숙소였습니다. 다시 또 의정부교구인 남양주, 마재의
정약종 형제 생가터, 덕소, 퇴계원, 의정부의 한마음 수련원에 도착했는데 다음날 이곳에서 아침미사와 추석차례를 지내고
다시 출발하여 황사영 묘를 멀리 돌아 길음동 남종삼 성인 3대가 모셔져 있는 묘역을 거쳐 고양, 벽제를 지나 서울 근교 서삼릉,
행주대교 입구 행주성당에서 의정부구간을 마치고 인천교구인 김포성당에 도착했습니다. 또 김포에서 통진 해병대청룡성당을 지나
강화 갑곶돈대성지에 도착했습니다. 다음날 인천교구청으로 주교님 예방을 끝으로 6구간을 마치고, 마지막 7구간을 갑곶돈대성지에서 출발했습니다.
다시 김포를 거쳐 서울에 입성하여 한강 둔치를 걸어 우리 전주교구 출신인 남종기 고스마신부님이 계신 해군 중앙성당에서 하루 묵고,
마지막 날 삼성산 성지와 새남터를 거쳐 마지막 성지인 절두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편에 있는 꾸르실료 회관에 도착하여,
하루 평균 31Km씩 평균속도 5-6Km로 1,113Km의 대장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 날이 10월 1일이었고,
다음날 2일은 체험 소감문 작성, 밀린 빨래, 짐 정리, 그리고 해단 미사로 조용히 보내고, 3일 잠실체육관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전국 울뜨레야에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인원은 신부님 포함 29명이 출발했는데 수원 현지에서 한명이 합류하여 30명이었는데 전주, 광주, 대전, 춘천, 수원교구에서는
각 1명씩이었고, 자매님이 7명, 부부가 한 쌍이었습니다.
평균나이 55세, 46세부터 69세... 최고령자는 아마 장사 집안 사람같더라구요.
사전 신체검사에서 몇 명이 탈락했는데 그분들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책상을 던지고 하는 바람에 다시 통과되었는데 무리한 사람이
더 고생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비모임에서 평소 하루에 30Km씩 산을 탄다고 하기에 주눅이 들었는데 제일 먼저 발에 고장이 왔습니다.
이유는 산과 아스팔트 평지가 완전히 다르고 신발이 맞지 않았던 것이죠.
저도 준비는 6월부터 시작했고 중요한 것은 평소 고혈압으로 약을 먹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좋아했던 술도 미리부터 끊었습니다.
지금은 배가 쏙 들어가서 멜빵을 하고 다닙니다만 장비구입 포함해서 경비도 제법 들었습니다.
신발도 비싼 것은 한 켤레에 39만원이나 하니까요.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리 많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교구에서,
또 본당에서 많은 분들이 빨랑까를 보내주셨거든요. 개인장비구입 외에 순례단 전체 예산으로는 약 7,000 잡았다는데
전국에서 보내주신 빨랑까로 예산은 좀 남았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수해의연금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루 일과는 새벽 5시 기상인데 저는 10분 전에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10분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죠. 왜 염감들이 잠이 없냐고.
10분 더 잘 수 있는데 깨운다고...
아무튼 일어나서 제일 급한 화장실, 세면, 짐꾸리기, 아침기도, 순례자의 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꾸르실리스따의 기도,
삼종기도를 바치고, 짐 싣기, 식사, 미사(이것은 합류단 들 때문에 기다려주기 위해), 잠시 쉬었다가 8시 쯤 집합,
그리고 구호 외치고 4개조 별로 출발합니다.
이 때 각 교구에서 온 분들이 그날그날 합류하게 됩니다.
배낭은 필수인데 우의, 식수, 간식, 의약품, 수건, 지급된 책자... 무거울 땐 10Kg정도 됩니다.
걸을 때는 시계, 휴대폰, 카메라 모두 안 되고 옆 사람과 대화도 금지, 오직 기도만 하면서 걷습니다.
하루 많게는 100단까지 묵주기도를 해보았는데 저는 평균 70단, 끝나고 보니까 2,775단밖에 못했습니다.
5Km 정도 걷고 쉬고, 그날 목적지에 도착하면 먼저 배낭은 멘 채 성체조배하고 숙소확인, 집 내리고, 씻고, 세탁, 저녁식사,
1주일에 한번은 팀회합, 저녁기도, 하루 기록, 상처치료, 그리고 취침인데 저녁 9시 이후에 통화는 금기사항인데
그 시간은 이미 한밤중입니다.
하루에 많게는 42km, 적게는 23km씩을 걷는 40일 동안에 어려움도 많이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와 비옷을 입어도 안에는 습기가 차서 모두 젖어버리고, 감기몸살로 3일을 정말 되게 앓았고, 물집이 생겨 발바닥을
바늘로 뚫고 실로 꿰맸고, 8일간을 쉬지 않고 비를 맞을 때는 발은 부르트고, 비닐로 싼 빨래가 마르지 않아 쉬어서 냄새는 진동하고,
그래도 양말과 수건은 배낭에 걸어서 말리면서 걷고, 쉴 곳이 없는 도로에서는 배낭을 멘 채 그냥 서서 쉬었고,
어느 때는 간식이 없어서 배도 고파보았고, 또 어느 때는 격려차 가지고 온 떡이 남아 그냥 두면 쉴까봐 저녁밥 대신 떡으로
끼니를 때우며 그 정성을 기억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춘천구간을 걸을 때인데 휴식시간에 제가 깜빡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았어요. 꼭 이럴 때 사단이 납니다.
가다가 소변이 마려운데 형편이 길가에서 해결할 수가 없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맨 뒤로 쳐졌다가 볼일을 본 뒤 뛸 수는 없고
속보로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이틀 고생했습니다. 걷는 리듬이 깨져가지고...
끝나고 나서보니 제 앞니에 변형이 왔고, 발톱은 두 개가 망가지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구두가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래도 제 상태가 최상위급으로 양호한 상태였습니다. 지금도 병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전국 울뜨레야 행사 때 화면에 보여준 맨발의 단원은 우리 순례단원이 아니고 부산 출신인데 'T.V 세상에 이런 일이'에 출연한 분으로
보통 산에 오를 때도 맨발이라는데 한나절 따라 걷다가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아스팔트라 너무 발이 뜨거워져서 못 걷고
결국은 발에 물을 부어가며 한나절 같이 걸었죠.
피정센터는 최고급이고, 회합실이나 강당 같은 곳에서 자고 샤워라도 할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습니다.
어느 때는 겨우 새우잠으로 때웠고, 비를 몽땅 맞고 씻지도 못하고, 빨래도 못했죠. 빨래가 이렇게 중요한지는
이번에서야 절실하게 알았으며 빨래 때문에 웃지 못 할 일도 많았습니다.
용케 숙소 주변 목욕탕이라도 가게 되면 샤워보다도 빨래가 우선이라 빨래를 숨겨가지고 들어가 얼른 비벼 빨아서 건식 사우나실에서
감추어 말려 나오고, 들켜서 창피도 당하고... 어느 날인가는 제가 목욕탕으로 들어가는데 관리인이 보고는
“아저씨, 양말신고 들어가시면 안 되는데요.” 하기에 돌아보니 제 발이 양말을 신은 부분만 빼놓고 까맣게 그을려서 착각을 했더라고요.
코고는 소리와 이가는 소리 때문에 귀마개도 지급되었습니다.
수원교구를 지날 때 길가에 한 80세 되어 보이는 어느 노부부가 손을 흔들고 계시다가 저를 보고 하시는 말씀
“어이구 저런 노인네도 가네.” 하시더라고요.
아마 시력이 안 좋아 그러셨겠지만 제 모습이 수염이 덥수룩하니 오해할 만 했겠죠.
또 다른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수원교구 어느 도로변 남산 휴게소라는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되어 있었는데 신부님께서
인천교구 자매님 셋과 형제를 부르시더니 오늘 점심을 굶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옆 사람이 음료수도 주어서는 안 된다면서 그 이유는
걸으며 기도하는 태도가 나빴고 이야기하며 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식사시간에 가방을 지키고 있으라고.
네 명은 한쪽에 모여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한나절을 걸었는데...
약 40분 뒤에 신부님께서 휴게소 주차장 한쪽으로 그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들도 영문을 모르고 있었는데, 네 명이 그리로 간 순간
울음이 터져 나오고 한참 소란스러웠습니다.
알고보니 인천교구에서 교우들이 버스 두 대로 격려차 온 것이었습니다. 그중에는 자기 남편도 왔고. 반가워서 울고,
신부님께 속아서 울고, 기뻐서 울고, 한바탕의 마냐니따였습니다.
치악산에 오를 때랑 추석날 남종삼 성인 묘역에 오를 때, 경사가 너무나 급해서 정말 코가 땅에 닿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원주에서 합류한 일반 교우들은 한나절 만에 완전히 포기한 경우도 생겼습니다.
문경새재를 넘는 하루 42km코스도 참 어려웠습니다.
마침 서울에서 영화배우 홍진경 비비안나랑 청년꾸르실리스따 세 명이 합류했는데, 본 순례단이 아니라 준비된 밥이 없어 컵라면으로
때우면서 따라왔을 때 그 젊은이들 참 고생했죠. 우리 순례단에서도 준비가 부족한 몇 명은 결국 병원에 실려 갔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며칠 치료를 하고 다시 도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실 29명 중 8명은 하루라도 빠졌기에 엄격하게 말하면 완주라고 할 수 없습니다만)
순례단을 위해서 고생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전주교구 봉사자와 송천동 식구들이었습니다.
내리 8일 째 비가 오는데도 우리 교구 구간을 다 지날 때까지 쉬는 곳마다 천막을 쳤고, 간이의자를 준비했고,
간식과 음료를 준비해줬고...
또 9월 6일 그렇게 많은 비가 오는데도 송천동에서 12명이나 대열에 합류하여 발이 부르틀 때까지 함께 합류해줘서 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전주교구가 15개 교구 중에서 제일 적은 인원이 그것도 하루 합류했었지만 그래도 전주교구 체면은 세워준 셈이 되었습니다.
이번 순례단원 중 한명은 중도에 부친상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상 치루고 다시 합류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도 아버지 제사도, 추석도, 영명축일도 모두 반납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번 도보순례를 하면서 마음이 편했을까요?
사실 저로서는 출발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회개의 목적보다는 가식적이고, 남들이 하기 힘든 일을 한다는 교만함과 현실 도피적이며
그래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라는 얄팍한 생각으로 출발했으니 잘못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첫날부터 불만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더워도 짜증이요, 비가와도 짜증이요, 바람이 없어도 짜증, 습도가 높아도 짜증, 길가에 그늘이 없어도 괜히 짜증이 나고 싫었습니다.
발에 물집이 생겨도, 감기에 걸려도, 근육통이 있어도 짜증이 나고, 묵상에 젖어 걷는데 말을 걸어와도 짜증이 가중되기 일쑤였습니다.
이곳도 단체라고 미운사람 예쁜 사람이 생깁니다. 쉬는 시간에 꼭 물 좀 달라고 하고, 남의 물건을 자기 물건이양 쓰고,
길가면서 쓰레기를 버리고, 카메라만 나타나면 옆으로 삐져나와 양팔기도하고, 각 교구 봉사와 안내를 비교하고,
뒤돌아서면 남 흉보고...
그래서 계속 묵주를 돌리죠. 그런데도 지금 어느 신비를 묵상하고 있는지 몇 단 째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를 경제적으로 어렵게 한 친구가 또 미워지기 시작하고, 기도 끝에도 불만이 쌓이고 미움이 자라고 스스로에게 짜증이나니
남에게 그 짜증이 전가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악순환의 순례를 계속해야만 할까?
그러던 어느 날 미사시간에 다가오는 말씀 한마디가 들려왔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십자가가 주어진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않으신다.
십자가는 고통이며 그 고통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만난다. 저마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그렇구나, 작은 고통도 이겨내지 못하고 분심도 털어내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이 순례의 길에 나섰던가?
예수님께서는 열두제자를 뽑으실 때 기도부터 하셨다. 그래, 기도다.
다시 분심을 털어내고 기도에 열중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드리기 며칠 째,
그때서야 안개처럼 자욱했던 미움과 불만의 그늘이 조금씩 걷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 이렇게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자.
감사하는 마음으로 걷다보니 모두가 은총인 것입니다.
무더운 날 길가의 나무그늘이, 살랑대는 바람 한줄기가 그렇게 고맙고,
비가 오면 시원해서 걷기가 좋고, 햇볕이 나면 빨래가 잘 말라서 좋고...
더 감사할일은 기도 덕분인지 몰라도 제 아들이 첫 휴가를 10월에 오게 되어 있었는데 부대장이 제가 집에 안계시다는 것을 알고
휴가 날짜를 앞당겨 추석에 맞추어서 그것도 하루를 더 얹어 보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제주도에서의 수박이, 부산에서의 쮸쮸바가, 마산 생림공소 할머니들이 만들어 주신 냉콩국이,
대구에서 멀건 국물에 건더기만 떠있는 보신탕이, 냉커피가, 광주에서의 떡 한 조각이, 전주에서 비 오는데도 쉴 때마다 내놓은
간이의자와 따뜻한 한 잔의 커피가, 대전과 수원 안성에서의 포도가, 그것도 불란서신부님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여왔던 거봉포도가,
원주에서 염소탕이, 춘천에서 사과가, 행주에서 자장면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인 줄 예전에는 왜 미쳐 몰랐던가?
그런 음식들을 내놓는 봉사자들이 왜 그리도 고맙고 그 손들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추석도 반납한 채 봉사를 해주신 의정부 봉사자들과,
순례자 개인별로 새겨 넣은 책갈피 춘천교구의 영적 빨랑까는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격려와 환영도 받았습니다.
대구 주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점심을 하시며 격려를 해주셨고, 우리 주교님께서는 천호성지까지 밤중에 직접 오셔서 격려해주셨고,
청주 주교님께서는 주일 오후에 특별미사를 집전하시면서 견진 외엔 처음이시라며 인수를 해주셨고, 원주 주교님께서는 치악산에서
아침 출발할 때 산에까지 오셨고, 의정부 주교님께서는 숙소인 수련원까지 저녁에 오셔서 식사를 대접해주시고,
인천에서도 주교님께서 교구청으로 우리를 불러 점심을 함께 하시면서 강복해주시고....
그러다보니 감사의 눈물, 고마움의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제가 전동성당 소개할 때인데 주춧돌이 바로 순교성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인 풍남문 성곽의 돌이라고 할 때,
문경새재를 넘기 전, 최양업신부님께서 하루에 평균 60리길을 걸으시면서 사목활동을 하시다가 새재입구 주막에서 선종하신
모습을 안내 받으면서,
청주교구 주교님께서 견진 외에는 처음이시라는 안수기도를 해주실 때,
9월 6일 전주를 들어오는데 효자동 입구에서 그 빗속에 누군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환호하기에 서울에서 온 봉사자들이겠거니
했는데 바로 우리 본당 자매님들이 저를 환영해줄 때 빗물인지 눈물인지를 한참을 흘렸고,
그리고 끝으로 도보를 다 마치고 마지막 꾸르실료 회관 성체조배실에서 29명이 그동안의 고생과 그동안의 애증과
서로의 마음을 열고 포옹할 때 참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성질도 변했습니다. 우선 운전습관이 바뀌었죠. 뭐가 그리 바쁠 게 있겠습니까?
40일도 걸어갔는데... 또 어디 갈 때 차타자고 하면 에이 그냥 걸어가지 뭐...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신앙문화유산해설사 자격증도 있고 해서 제법 안다고 했었는데 우리나라 103위 성인, 시복시성 절차
중인 124위, 또 성지들,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아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더 공부하고 그분들의 순교정신을 다시 배우기로
다짐했습니다.
[새남터성당에서 103위 성인 명단에 한재권 요셉의 이름이 없기에 확인해보니 지하 기념관 명단에는 수정이 되어있고
성당에는 한원서라고 되어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일명 원서라고 해도 한쪽은 재권이요 한쪽은 원서이니 혼동할 수밖에 없어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교구별 특성도 보았죠.
타이스링도 그냥 보면 별것 아닌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주, 인천, 또 몇 군데 교구는 환영식에도 그걸 매지 않으면 입장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서울교구에서는 타이스링을 색깔별로 매고 있습니다.
특히 노란 줄의 타이스링은 팀회합을 승인받은 꾸르실리스따들만 매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데꼴로레스 노래도 교구별로 다 들어 보았는데 노래 합창은 전부가 박수를 치며 하고, 후렴 부분
아 모레스 데 무쵸스 꼴로레스 메 구스딴 아미 할 때...메에서 박자를 맞춥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성지도 교구별로 가난을 탄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잘 가꾼 성지는 많은 순례객이 찾아오고...]
[이번 순례 중에 우리나라 모든 성지가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도 알았습니다. 예를 들면
제주 정난주(명련)마리아 순교자(황사영의 처, 정약용의 형인 정약현의 딸) 묘역에서부터 베론 성지의 황사영 토굴, 의정부의 황사영의 묘역,
황사영 등의 순교지인 서울 서소문으로 이어지는 순교의 고리. 남종삼 성인의 아들 명희의 전주 초록바위 순교성지와 원주 배론 근처의
남종삼 성인의 생가터,
그리고 길림동성당 묘원에 모셔진 남종삼 성인 3대의 묘역, 남종삼성인의 순교지인 새남터 성지, 유해가 모셔져 있는 절두산 성지까지
이어지는 순교의 고리, 정약종 형제와 외종간인 윤지충바오로, 그 이종간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다시 내륙으로 그리고 중부지방으로 이어진 순교의 고리들... 공부하기도 쉽습니다.]
여름에 시작하여 가을에 끝난 40일간의 여정. 그냥 지나치면 평범할 것 같은 계절의 변화도 곧 하느님의 신비였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느님 손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계절의 변화 앞에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다는 것은
바로 은총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도 모르게 하루하루 쌓여가고 있었던 은총의 보따리들.
그리고 또 다른 짐들... 어려움 속에서도 참고 기도해준 아내를 비롯하여, 전국의 꾸르실리스따들, 각 교구 봉사자들,
기타 많은 교우들의 정성어린 기도와 성원들이 헤아릴 수 없게 내 배낭에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짐들을 보면서 이 짐들이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는 짐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 교우, 이웃들.... 모두의 인연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
역경 속에서의 기도가 더 간절한 것이죠. 저희 순례단은 매일 아침 미사 때 전국에서 온 기도지향을 봉헌한 뒤
그것을 나누어 짊어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신부님께서 불사르시며 또 기도하시고...
인생의 목적은 분명해집니다. 따뜻한 모습으로 가족과 이웃들에게 다가간다면 그 모습이 천사입니다.
그 천사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될 수 있는 천사, 바로 그 천사가 되는 것이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털어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교만입니다.
40일간을 해냈다는 우월감을 비롯한 우쭐한 모든 생각들과, 영육간 손해는 보지 않았으리라는 얄팍한 마음...
이런 것들이 털어내야 할 짐들입니다.
어느 주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천주교 역사에 기록될 큰일을 해냈다고,
그러시면서 이번 기간 동안 모두가 술을 한 모금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쉬운 것 같지만 어려운 일로성지순례 문화에 대해
새로운 의미의 정립과 개선이라고.
또 춘천 곰실공소의 은퇴하신 노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도보순례를 자랑으로 여기지 말라, 교만에 빠지게 될라. 왼 손이 하는 일을 바른손이 모르게 하고,
꾸르실리스따는 건축가인 하느님께서 알아서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는 자재에 불과하다고.
뱃지도 달고 다니지 말아라. 그게 무에 그리 소중한 것이냐?
10월 2일 소감문을 써놓고 절두산 성지 아래 한강변을 거닐다가 길옆에 지천으로 나있는 클로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 속에 행운의 네잎 클로버가 있지나 않을까하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는데 모두가 세잎 클로버들뿐 네잎 클로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아차! 싶었습니다. 아니 왜 그걸 깜빡했을까? 세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복'이라는 것을....
지천으로 널려있는 행복이라는 세잎 클로버를 옆에 두고, 부질없는 욕심 때문에 행운이라는 네잎클로버만을 찾으려는
우매함에서 벗어나 내 일상생활에서행복을 찾는 신앙 곧 꾸르실료 이전보다, 3박4일의 꾸르실료보다,
더 중요한 꾸르실료 이후의 삶을 살아보자고 다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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