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카테고리 이동
kth360205님의 블로그
검색 MY메뉴 열기
보학
14世 仲炎 後孫 入譜
kth360205
2020. 10. 18. 21:31
이웃추가본문 기타 기능
한글판전산대동세보 運營者 귀하
仲炎公(僕射公派 13世 文坦公 3子) 後孫 入錄에 대하여
無後했던 傍祖의 後孫이 나타났다기에 매우 반가웠다. 하나 世傳家寶로 제시한 家牒의 先系가 疑問 투성이라 接受者도 이를 摘示하여 놓고 考證이나 族親間 協議도 없이 국문판전산대동보에 그대로 編入하였다. 이는 朝鮮 中末 族譜僞造꾼의 所行과 무엇이 다르랴?
文坦公宗會는 부정입록부분을 削除하여 吾門族譜의 尊信性 회복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政丞을 行職하고 文字 諡號를 받은 사람의 글 한줄, 事蹟 한件이 文獻에 안 전한다니 말이 됩니까?
關聯 宗派間 同意의 入譜節次가 없었다.
申請者(창수)가 입록이 덧덧하게 이루졌다고 생각한다면 입록후 6년여간 傍系宗親을 한번도 안 찾았을리 없습니다.
2018년 12월 일
文坦公宗會長 權寧沃
<文坦公:僕射公派 13世 諱:漢功 號:一齋 諡:文坦 高麗 忠肅王朝 都僉議右政丞>
<입록 및 중요 변경절차>
<능동춘추 2011년 5월호 4면> 급사중공파 파조派祖제단 봉설 고유제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행정리 종손 세거산에 <전략> 급사중공 형윤(衡允)은 <중략>1982년에 임술보壬戌譜를 편간하면서 급사중공 후손의 가첩과 세전문헌을 재계고한 결과, 호장동정 염廉아래 호장 이여利輿로 이어지고 급사중공의 선고가 동정배융교위 엄嚴이며, 이 교위공 엄이 호장공 이여의 아들이되 그 서차는 미상이라, 호장공 이여의 계자위季子位에 입록하여 계대를 이정釐整하고 1985년에 안동의 태사묘太師廟숭보당 회의에 각파 대표 78인이 참석하여 토의 끝에 이를 확정하였다. 그리고 2000년에 국문판전산대동보를 편제하면서 급사중공에 대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기록이 발굴됨에 따라 급사중공의 계대상 세대차에 대한 시비는 사라지게 되었다. 후략>
능동춘추 2011년 07월호 6면
복야공파 14세 중염仲炎공 후손 나타나
600년만에 세전 가첩과 호구단자로 입증
여말선초 이후 6백여년 동안 잃었던 계대를 찾아 족보를 복원하게 되는 매우 귀한 일이 우리 안동권씨 문중에서 발생하였다. 복야공파 시조후 14세로서 일재一齋문탄공文坦公 휘 한공漢功( ?~1349)의 셋째아들 휘 중염仲炎의 후손이 자그마치 6백여년 만에 출현한 것이다.
그 주인공은 휘 중염공의 20대손으로 판명되고 있는 충남 서천군 서면사무소 직원 권창수權昌洙씨이다. 일재 문탄공은 일가 내외손 20여인이 경상의 지위에 올랐을 만큼 고려말에 그 영달이 지극하였거니와 자녀가 5남7녀였다. 그 장남이 화원군花原君 충헌공忠憲公 중달仲達이고 7녀서가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1304~1382)이다. 2남 동고東皐 중화仲和(1322~1408는) 영의정 문절공文節公인데 아들로서 이하 3남 중염, 4남 중산仲山, 5남 가봉可封은 휘자 외에 일체 기록이 없다. 어떤 일에 연좌 피화하였거나 하는 역사 기록의 편린도 없이 인신의 영달을 극한 부원군의 세 아들이 이름만을 남기고 자취가 없다는 것이 아무래도 의문스런 일이었다. 일가의 동기남매간과 같이 재상의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더라도 적어도 대부직大夫職이나 그 이하에 해당하는 관품의 기록조차 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권창수씨 소장의 가첩에 의하면 중염공은 ‘호동재號東材익찬공신益贊功臣우의정치사右議政致仕화릉군花陵君시문평공諡文平公배평산신씨봉훈대부첨정태륜지녀配平山申氏奉訓大夫僉正泰崙之女’로 그 주기註記가 달려 있다. 우선 호가‘동재東材’인 것은 그 중형 문절공 중화의 호가‘동고東皐’이니 이를 본받아‘동東’자를 붙여 지었음직 함이 있다. 그러나 익찬공신益贊功臣의 ‘益贊’은‘翊贊’이나‘翼贊’의 오기인 듯 하거니와, 조선조에서 개국 초기에 의례적으로 받은 것의 일종인지, 혹은 고려조에서 받았다면 언제 어떻게 받았을지 고증이 어렵다. 다음 ‘우의정 치사’는 우의정을 명예직으로 받으면서 벼슬살이를 끝냈다는 것인데, 조선초에 이같은 재상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 어떤 사책의 기록에도 오르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 다음의 ‘화릉군花陵君’의 봉군호 또한 어떤 공훈으로 받았을지 추측이 어렵고 시호‘문평文平’에 이르면 이 가첩 자체의 현실성을 의심케 한다. 그러나 그 배위가 ‘평산신씨’로서 ‘첨정 태륜의 딸’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에 이르면 이를 부인할 근거가 또한 없으니 장차 평산신씨의 족보를 찾아 열람 고증을 더 해봐야 할 것이다. 이 가첩은 전체적으로 오탈자가 있고, 대개의 가첩이 그렇듯이 세월이 지나 옮겨 필사하면서 범하는 다소의 가감이나 오류가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가령 6세조 휘 선개先蓋의 ‘개蓋’를‘익益’으로, 그 재종제가 되는 유윤儒允·황헌黃軒·안굉安宏을 다‘제弟(아우)’에 포함시켜 쓰고, 10세에 가서 복야공의 아우 차평次平의‘차次’를‘공攻’으로 잘못 베낀 것 등이 눈에 띈다. 그러나 9세 휘 중시仲時의 주기를 보면 ‘형제 6인, 백시伯時호장戶長, 취의就宜호장, 통通호장, 취정就正융瀜구보부재舊譜不載신사보종권상공상하가첩입록辛巳譜從權相公尙夏家牒入錄’이라 쓰고 있다. 현재 13인인 9세의 형제가 당시는 6인이고, 그 6인 가운데도 ‘취정과 융은 구보에 없었는데 상공相公 권상하權尙夏의 가첩에 따라 신사보辛巳譜(1701)부터 입록되었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융融’의 휘자가 ‘융瀜’으로 오기된 것을 빼고는 이 가첩이 본디 매우 오래 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또 10세 파조 복야공 휘수홍守洪의 주기를 보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상장군上將軍’이라한 다음에 ‘형제4인, 형수평兄守平광록대부光祿大夫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여사입전麗史立傳, 공(차)평攻(次)平정용별장精勇別將무후無後, 성원性源대선사大禪師, 수평파내양촌선생근여상공대운가야守平派乃陽村先生近與相公大運家也’라 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수평파守平派, 즉 추밀공파는 곧 양촌선생 근近과 상공(영의정) 대운(權大運)의 집안이다’라 하고 있는 곳인 바, 이로써 이 가첩의 작성 시기가 권대운(1612~1699)공이 영상으로 현임중이던 조선 숙종 시대인 것으로 비정되는 점이다. 다음 13세 문탄공 휘 한공漢功의 주기에 그 장자 화원군 휘중달仲達의 기사가 나오는데 ‘정책안사공신定策安社功臣화원군花原君시충헌공諡忠憲公’이라 한 다음에‘묘재흥해가첩불록墓在興海家牒不錄형제5인兄弟五人제중화호동고弟仲和號東皐영의정예천백치사領議政醴泉伯致仕시문절공諡文節公’이라하였다.
여기에서 화원군의 묘소가‘흥해興海에 있는데 가첩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한 기사가 다른 보첩의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러나 화원군에 관한 여러 사적을 고찰하면, 그 묘소가 옛적 흥해에 있었는데 그 흥해가 혹은 전북부안扶安의 고명이라는 등으로 언급되고 있다. 다음에 ‘중(산)가봉차2인작실미상仲(山)可封此二人爵失未詳’이라 하여 중염공仲炎公의 밑으로 ‘중(산)과 가봉 이 두 사람은 관작명이 실전되어 미상’이라 하고 있다. 이런 몇가지 특이기재사실로 보아도 이 가첩이 상당히 오래 전, 우리 안동권씨 전체 문중에 족보가 일반화 되기 전부터 작성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이 가첩에 지금까지의 어느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14세 중염공 이하의 계대가 정연히 기록되어 있다. 중염공의 아들 15세는 성종成宗과 익종益宗 2인인데, 성종은 자헌대부資憲大夫판도사判圖事이고 배위는 상주이씨尙州李氏방춘芳春의 딸이며 묘소는 안동의 화화산化華山에 임좌壬坐로 되어 있다. 익종은 봉훈대부奉訓大夫로만 적혀 있다. 여기에서 판도사判圖事는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말하는 것 같은데 대신의 직위이고 조선 초기 권성인으로 이런 인물이 실재했는지 여부는 또한 미상이다. 이하의 계대를 보면 16세에 백겸伯謙이 성균진사成均進士로서 전의이씨全義李氏군수 지홍之洪의 딸을 배하였고 묘소는 안동 화화산 선영하에 계좌癸坐이며, 다음 17세 의신義臣은 봉훈대부奉訓大夫장수현감長水縣監으로 문화유씨文化柳氏승지 식植의 딸을 배했으며 묘소는 예천의 천양산天壤山에 해좌亥坐이다. 18세는 사문思文으로 이어지는데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전주판관全州判官을 행직하고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밀양손씨密陽孫氏정언正言도흥道興의 딸을 배하고 묘소는 예천 천양산 선영하에 임좌壬坐이다. 19세 병렬秉烈은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서 순천부사順天府使를 행직하고 원주원씨原州元氏참판 인준仁俊의 딸을 배하며 묘소는 안동·예천 지역을 벗어나 영천永川의 장지곡長芝谷에 오좌午坐로 이거해 자리한다. 20세는 익모益謨로 이어지는데 처음으로 생몰기록이 나와 인조조인 1646년에 출생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고 해주정씨海州鄭氏진사 익빈益濱의 딸을 배하며 묘소는 영천 선영하에 있다. 21세 호浩(1665~1737)는 숙종·영조조에 문과文科를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안동부사安東府使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진위를 확인하기가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다. 그 배위는 밀양박씨密陽朴氏예조참판 종태宗泰의 딸이며 그 묘소는 영천에서 다시 상주의 덕명산德明山에 자좌子坐로 옮겨 간다. 다음 22세는 채주采周로 잇는데, 또한 문과 통정대부로서 동래부사東萊府使라 하고 있다. 배는성주이씨星州李氏호조정랑 극필克弼의 딸이며 묘소는 상주덕명산 선고묘하이다. 그리고 23세 갑순甲淳도 영조조인으로 문과 급제를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상 3대 호浩·채주采周·갑순甲淳 3인의 이름이 조선조 문과방목文科榜目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가령 소과小科 사마시司馬試를 문과로 기록하였다면, 조선조 사마방목司馬榜目이 부실하여 더러 누락이 있는 게 사실이어서 방목만으로 진위를 확인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나, 사마시로서 음직蔭職에 나가 당상관 통정대부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문과 아닌 무과武科를 하였다 하더라도 서반西班의 당상 품계에 통정대부를 주는 일이 없었다. 갑순의 배는 남양홍씨 의범義範의 딸이고 그 묘소는 다시 상주에서 선산善山으로 떠나 광암산光巖山에 해좌亥坐이다. 24세 희규希圭는 숙종말 1772년에 62세로 졸하는데 덕수이씨德水李氏흥복興福의 딸을 배하고 묘소는 김산金山, 지금의 김천 예산禮山이라는 곳에 건좌乾坐로 있다. 다음 25세 수철壽喆은 정조조 1792년에 67세로 졸하며 상주김씨尙州金氏 인찬仁瓚의 딸을 배하고 묘소는 다시 창녕으로 옮겨가 화령산華嶺山에 술좌戌坐이다. 26세 시창時昌은 순조초 1802년에 58세로 졸하며 밀양박씨密陽朴氏 시민時敏의 딸을 배하였고 묘소는 창원昌原 남면南面으로 옮겨가 두곡杜谷이라는 곳에 경조庚坐 상하분이다. 27세 인남仁男은 자가 내윤乃允이고 1825년에 60세로 졸했으며 김해김씨金海金氏 흥인興仁의 딸을 배했는데 묘소의 기록은 없다. 28세는 풍선豊先으로 이어지는데 초명이 인선仁先으로 그 부친을 촉휘觸諱했다가 ‘인仁’자를 ‘풍豊’자로 바꾼 흔적이 그 호구단자戶口單子에 보이니, 당시 사족士族으로서 가학家學이 미흡했던 것으로 보이거니와, 다만 그 자가 있어 원극元極인것 외에 배위 등 일체 기록이 없다. 다음 29세는 순흥順興인데 자가 있어 의첨宜詹이고 배가 진주강씨晉州姜氏인 것 외에 기록이 없다. 30세는 망태望泰인데 자가 화율化律이고 1876년에 졸했으며 배가 김해김씨金海金氏봉행奉行의 딸인것 외에 기록이 없다.
그리고 31세에 가서 망태의 아들로 인업仁業과 업상業詳 2인이 나타난다. 인업은 자가 문일文一이고 1839년에 나서 1886년에 48세로 졸했으며 수원백씨水原白氏 찬욱贊郁의 딸, 성재聖才의 손녀, 발潑의 증손, 전주全州 이수영李秀英의 외손을 배했으며 그 묘소가 충남 서천군 옛 비인庇仁고을의 서면 선돌리산고매山庫梅로 나온다. 그리고 업상은 초명이 인철仁哲에 자가 문선文善이고 1855년에 나서 1909년에 55세로 졸했으며 묘소가 서천군 서면 신합리의 산1의 1번지에 있다. 이 업상이 곧 가첩과 호구단자 등 가전 문적을 가지고 필자를 찾아온 권창수씨의 증조부가 된다. 1968년생으로 금년 44세인 권창수씨가 가져온 가전문적중에는 그 백증조 인업의 호구단자가 8장 있었다. ‘웅천현熊川縣(지금의 보령시 웅천읍에 소재했던 옛고을 이름) 하서면下西面(지금의 서천군 서면)귀곡리貴谷里제14통統1호戶유학幼學권인업 연이십이年二十二(22세) 정유丁酉본안동本安東’으로 되어 있는 호구단자는 ‘함풍咸豊(청나라 문종文宗) 8년(1858) 무오戊午’의 것에서 부터‘광서光緖(청 덕종德宗) 11년(1885) 을유乙酉’의 것까지 모두 8장이 보존되고 있는데, 거기에 권인업 본인은 신분이 계속 유학幼學으로 나오고, 부·조·증조와 외조 및 처의 부·조·증조·외조의 신분이 다 학생學生으로 나오며, 마지막 것을 보면 솔자率子, 즉 거느리는 가솔로서 아들 ‘일주日周’가 ‘동몽童蒙(장가 안든 아이)’으로서 나이가 27이라 되어 있고, ‘천구賤口(천한 인구)’로서 노奴(종) ‘말절末切’이 있음도 기록되어 있어, 갑오경장甲午更張이전까지 노비를 거느린 사족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인업의 유일한 아들 ‘일주’는 그 시대 27세가 되도록 ‘동몽’으로서 미취였으니 심신에 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사정으로 장자 인업의 계사繼嗣는 그 아들 일주의 대에서 끝나고 그 가첩 등 세전 문적은 지차인 인업의 17년 연하 아우 업상에게로 상전되고 그것이 권창수씨에게로 세전된 것이었다. 권창수씨가 이 가전문적과 관련하여 집안에 구전해오는 바를 들려주는 내용은 이러하였다. 그 선대는 경상도 어디에선 가 형제간에 안 좋은 일로 크게 다툼이 일어나 이를 피해 머나 멀리 떠나 이곳으로 왔다. (생각컨대 사족으로서 체통에 크게 손상되는 일을 당하여 전혀 소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잠적, 이거를 단행해, 경상도 南岸 창원 지역에서 가산을 정리해 배에 싣고 이동이 편리한 해로를 통해 ‘양반의 고장’으로 알려진 충청도의 서해안 비인·웅천에 닿아 정착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 선대에서 집에 화재가 있었는데도 이 문적은 워낙 소중하여 미리 구해내 타지 않았다. 언제든 자기들의 족보는 이 문적을 가지고 안동(대종중)을 찾아가야 해결이 된다. 또한 이를 가지고 안동에 가면 해결이 되려니와, 다른 곳에 가서는 소용이 없다. 이 문적을 잃어 버리는 것은 죽는 것만 같지 못할 뿐 아니라, 함부로 꺼내보아서도 안 된다. 1924년생인 권창수씨 의 부친은 일본군 출신으로 해방후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6·2 5전쟁을 치르며 육군 상사로 전역하였다. 성품도 엄하였다.
그러한 부친 밑에서 1968년에 4남2녀의 4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운 시절 고졸 후 지방 공무원시험에 매달려 1988년 봄 서천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가을까지 발령을 기다리며 집에서 쉬게 되었다. 부친은 이미 6년 전에 별세하여 안계셨다. 집에서 쉬면서 이것저것 정리도 하고 뒤지다가 이 문적도 꺼내 살펴보게 되었다. 무슨 내용인지 읽을 수가 없고 간혹 아는 글자가 있다 해도 뜻을 몰라 요령부득이었다. 경주이씨와 해주최씨로서 족보정도는 반듯하게 갖추고 있는 매서妹壻들에게 터놓고 보여도 이러한 족보는 처음 본다 하였다. 군 공무원이 되어서는 면사무소의 호적계도 보게 되었다. 새 호적법이 시행되는 것을 보고서는 담당 공무원으로서 족보의 실용성과 가치가 절감되었다. 부면장에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문적을 갖다 보이며 문의했다. 부면장도 이런 것은 처음이라 하고 전에 면장을 지낸 이로 한문을 상당히 하는 노인에게 갖다 보여도 잘 모르겠다는 답이었다. 가첩도 가첩이려니와 호구단자에 대해 그게 무엇인지를 전자에 견문하여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인터넷에서 본사의 홈페이지에 들어와 전산대동보를 보고는 세전 문적 꾸러미를 들고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앞서 일별하며 권창수씨가의 새로 발견된 가첩의 세계와 관품官品등을 살펴보았다. 거기에 상당한 의문이 있음도 언급하였다. 무릇, 기왕에 우리나라에서 어떤 성씨문중의 족보와 가첩류를 막론하고 그 선대의 관품에 가함차작假銜借爵이 부지기수인 것은 일일이 탄을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오죽하면 조선조 5백년 영남에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 4인인데 족보에 오른 것은 40인이라는 말까지 나돌았겠는가. 그러나 어떤 가첩이나 계파보에 그 선대의 관함이 거짓되이 과장되었다고 해서 그 가첩이나 계파보 자체를 전면 부정할 수는 또한 없는 것이다.
<사진·글 權五焄>
능동춘추 2012년 7월호 11면
6백년 잃었던 계보 찾은 충남 서천의 권창수씨 후일담
6백년 동안 안동권씨의 모든 족보에서 후손이 끊긴 것으로 되어 있던 복야공파 시조후 14세로서, 문탄공 휘 한공漢功의 제3자 휘 중염仲炎의 20대손으로 지난해 2011년에 기적적으로 세전해온 가첩을 가지고 족보를 찾아 복원한 충남서천군 서천읍 사곡리의 지방공무원 권창수씨(본보 2011년 7월 1일자 제140호 6~7면에 특보)는, 족보를 찾아 계대와 조상을 알고 난 이후 자신의 삶과 인생관은 물론 가족과 일가의 우의와 결속력도 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사는 형제나 당내간이 무슨 행사가 있을 때는 전보다 잘 모이고 협조가 되어 분위기가 달라졌다. 금년 봄 조부의 묘소를 개사초하고 계대를 명기한 단표短表를 세워 그 생세의 한을 풀어드렸는데,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이런 산역을 해야겠다는 제의가 나오기 무섭게 합의가 되고 성금이 모아졌다. 지금 세상에 무슨 족보 타령이냐는 식의 투정이 나오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고향을 떠나 보아야 고향이 소중함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안다, 고국을 떠나야 나라가 소중함을 알고 나라를 잃으면 비로소 애국자가 되기도 한다. 그와 같이 족보가 있는 사람은 그 귀함을 모르고 천대하기도 하는데 그게 없는 사람은 이를 절실히 원하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권창수씨의 부친은 생세에 친한 벗에게, 자기네가 지금 안동권가로 문호를 세워 여러 성씨 집안과 혼반을 맺고 살지만 실은 ‘족보가 없는 돌권가’라면서 취중에 실토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한 선친의 한을 풀어드렸다고 하여 그 선친의 벗은 지금 권창수씨를 치하하고 있다. 그 조부대에서는 교통이 어렵던 시절 안동까지 불원천리로 가첩을 품에 지니고 찾아가 계대를 찾아 족보를 갖추려 하였지만 ‘남대문입납’으로 골속을 잘못 찾아갔던지 또는 찾아간 곳에 안목이 없었던지 허사일 뿐이었다. 그런 일을 생각하면 지금 권창수씨는 감개가 무량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 딸 둘을 낳고 사실상 단산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 밑의 딸아이를 잃는 천형을 만났다. 그 패닉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내와 합의하여 아이 하나를 더 낳는 것이었다. 그렇게 얻은 것이 금년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들 태인이다. 아버지를 따라 나와 같이 다니며 이것저것 쉴새없이 캐묻는 이 아이에게 근본을 물으니 마치 군대에서 병사가 관등성명을 대듯 튀어나오는 대답이 ‘안동권씨 복야공파 35대 권태인입니다’ 였다. 권창수씨네 대소가는 벌써 대가 끊겨 그가 묘소를 대신 벌초해 주는 집이 두셋이고 딸아이만 두고들 있어 ‘고추’를 달고 나와 뛰노는 사내아이는 늦게 얻은 자기 아들 태인을 포함해 셋뿐이라 했다. 그는 어릴적 전라도 김제인가 하는 곳에서 가까운 집안이라고 찾아와 족보 대책을 강구하자던 일가를 수소문하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다. 그 사람은 당시 소시이던 그의 고모더러 한집안 동항이니 자기를 오빠라 부르라고 했다더라는 것이다. 권창수씨의 연락처는 010-6678-2184이다.
<權五焄>
1
공감한 사람 보러가기댓글 1공유하기
kth360205
kth360205님의 블로그입니다.
이웃추가
이 블로그
보학
카테고리 글
14世 仲炎 後孫 入譜
2020. 10. 18.
1
댓글 1
13世 漢有 後繼(電算大同譜)
2020. 10. 17.
0
댓글 0
맨 위로
PC버전으로 보기
1
공감한 사람 보러가기댓글 1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