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섭암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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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삼존불이 미소로 반겨… 거창으로 향하는 밤, 덕유산 자락을 지나며 올려다 본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서둘러 전깃불이 없는 곳을 찾아 자동차를 세웠다. 무수한 별을 헤아리고 싶었던 까닭이다. 간혹 구름이 지나가기는 했지만 유난히 밝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는 나는 어느새 소년이 되어 있었다. 마치 떨어지는 별똥별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던 별들, 그들은 바로 코앞에까지 내려와 있는 듯 가까이 있었다. 그날 나는 별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밤이 깊도록 컴컴한 곳을 서성거렸다. 미리부터 작정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문득 만난 친구와 섣불리 헤어지지 못하듯이 그렇게 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육십령 아래 장계에서 묵었다. 휘황찬란한 도시의 불빛에 익숙해진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보다 더 번쩍이는 불빛이 아니라 오히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들만이 있는 흑백의 장면들이었기 때문이다. 새벽같이 찾아 든 국밥집. 장계장터 안에는 국밥집이 너덧 집 있지만 인연을 쌓은 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있는 순대국집이다. 4년 만이지만 그 집은 건재했고 할머니는 여전히 푸근했다. 정갈한 구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고 밥을 먹고 있는 상머리에 불쑥 낯선 이가 앉아 소주잔을 권하기도 하는 곳이지만 그래도 그 집으로 찾아 드는 까닭은 주인 할머니 탓이다. 그니는 말 그대로 할머니이다. 더 이상의 아무런 수식이 필요하지 않은 할머니 말이다. 오늘도 잘 차려입은 것이 오히려 어색한 할아버지 한 분이 새벽 댓바람부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낯선 차림의 사람이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말을 걸어 왔지만 가야 할 길이 있으니 건성건성 대답하며 국밥을 먹고는 나섰다. 육십령은 안개에 쌓여있었고 안의를 지나 마리에서 금원산(金猿山)에 닿기까지 1시간은 넘고 2시간은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대뜸 가섭암터(迦葉庵址)로 향하지는 않았다. 산중 절터에 가면서 산도 느끼기 전에 불쑥 그곳만을 향하면 마치 결론만 읽은 소설처럼 아쉬운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이제 막 동살이 비쳐 들기 시작한 갈림길에서 유안청폭포로 향했다. 엊그제까지 비가 내렸으니 볼만하다 싶었던 것이다. 30분 남짓, 과연 물줄기는 한 여름 못지않게 흘렀고 나뭇잎은 동살에 빛나고 있었다. 근처 너럭바위를 찾아 해를 마주보고 앉았다. 이른 시간의 산에서는 어느덧 햇살이 그리울 만큼 선선해진 탓도 있었지만 옛말 한 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던 까닭이다. 세 길쯤 떠오른 아침 해를 마주 한 채, 두 눈썹위에 가지런히 손을 얹고 가슴을 내밀어 환하게 열리는 것을 느끼면 마음이 바르게 된다고 했으니 그렇게 해보지만 여간 어색하지 않았다. 한동안 애를 쓰다 그만두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앉았으려니 물은 흐르되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위가 고요해져 오로지 보이는 것은 내 마음 이었으며 들리는 것은 내 속의 나와 내가 다투는 소리뿐이었다. 그들은 언제까지 그렇게 다툴 것인지 모른 체하고 지재미골의 가섭암터로 향했다. 절터로 향하는 길이 어디인들 아름답지 않을까마는 가섭암터로 향하는 길은 그 중 빼어나다. 굳이 유안청폭포로 향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계곡에 선녀담이 있는가하면 솔숲을 지나면 나라 안에 있는 바위 중에서는 그 크기가 제일이라는 문(門)바위까지 있으니 눈이 잠시도 쉴 새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대개의 절터들이 코앞에까지 자동차가 들어가지만 가섭암터를 비록 500m 남짓하지만 그 아름다운 길을 걸어야만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들떴던 마음이나 속진에 찌든 마음조차도 그 길을 걷는 동안 모두 씻어낼 수 있으니 여느 절터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아! 그곳에 계셨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한 아미타 부처님은 중품중생의 수인으로 손을 든 채 마치 나에게 숨을 고르라는 듯이 서 계셨다. 한동안 말을 잊었다. 그동안 부처님 앞에서 그 얼마나 많은 순간 말을 잊었던가. 책을 덮어야 생각이 돋아나듯 말을 잊으면 그 자리엔 마음이 자라났다. 그렇게 자라난 마음은 위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만 넓어졌으니 그 무변광대한 자리의 처처에는 부처님이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넓음을 미처 나 스스로 알지 못한다. 그것이 무지이다. 내 속에 이미 부처님이 계시지만 미혹에 빠져 그것을 찾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장대석같은 유구조차 남아있지 않는 절터…들어가는 길은 솔숲.계곡.선녀담으로 빼어나게 아름다와 천연굴 속에 서계신 아미타부처님과 두 보살…두광은 제각각 새겼지만 광배는 하나로 새겨 절묘한 표현 아미타 부처님은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섭에게 연꽃 한 송이를 들었던 밀밀의(密密意)처럼 그렇게 나에게 미소를 보내건만 나는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염화미소는 무엇이고 이심전심은 무엇인가. 주는 것 또한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귀하게 받을 줄 아는 것은 주는 것 보다 수십 배 어려운 일이지 싶다. 오늘 이곳에서 아미타 부처님과 두 분 보살님은 나에게 무엇을 전하고 계신 것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연꽃을 바라 본 가섭처럼 미소 지을 수 없음은 정녕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걸음 멈추지 않을 터이니 언젠가는 미소 지을 수 있지 않겠는가. 향 한 자루 사르고 굴 앞을 가로막은 바위 끝에 올라앉았다. 위태롭지만 먼 산이 바라보이니 그만한 곳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잠시 상념에 젖었는가 싶었는데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무엇인가 둔한 것이 머리를 내려쳤기 때문이다. 퍼뜩 몸을 돌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하늘을 봐도, 굴 안을 봐도, 그 어느 곳에, 그 누구도 몇 시간 째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일까. 다시 눈을 감았는데 이번에는 연이어 머리며 어깨를 때리는 것이 아닌가. 아! 이것이 부처와 조사도 목숨을 빈다는 죽비인가.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 익은 도토리였다. 건들바람이 한 차례 지나가면 그는 아주 단단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몇 차례 어르고 나서야 비로소 어깨에 와 닿는 죽비와는 달리 부지불식간에 떨어지는 것도 그렇거니와 바위 위로 떨어질 때마다 굴속에는 공명이 일어 호된 죽비소리보다 더 매서웠던 것이다. 굴속의 부처님은 바위벽에 새겨진 마애삼존이시다. 세분 모두 서 계시며 가운데 아미타 부처님, 그 곁으로 오른쪽에는 관음보살 왼쪽에는 대세지보살인 듯 하다. 안내판에는 지장보살이라고 되어 있지만 조각의 그 어느 곳에도 삭발을 하고 미간에 백호가 돋아 있다거나 혹은 보주를 든 채 석장을 짚고 있는 지장보살의 특징들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이곳 두 분 보살님들은 모두 보관을 머리에 쓰고 있으며 한 손은 두 분 모두 옷자락을 잡고, 또 다른 손은 연꽃을 들거나 영락의 구슬을 만지고 있을 뿐이다. 두 보살의 머리부분이 민머리여서 지장보살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좀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히려 눈여겨봐야 할 것은 광배의 절묘한 표현이다. 두광은 제각각 따로 새겼지만 광배를 전체적으로 하나로 새겨 그 안에 세 분이 모두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본존인 아미타 부처님이 서 계신 좌대 또한 독특하다. 흔히 보지 못하는 凸형으로 생긴 것으로 안에 세 잎의 연화문을 새겼으며 좌대의 위쪽 끝 부분에 다섯 잎의 연꽃을 새겨 모두 여덟 장의 꽃잎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는 연꽃잎의 표현에 있어 여덟 장을 맞추려는 노력인 듯 하다. 凸형 좌대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불상의 좌대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어서 더욱 신비스러움을 더한다. 더군다나 마애불 전체에 걸쳐 빗물이 스며들지 않게 삼각형의 홈을 파 놓은 배려 또한 돋보인다. 대개의 마애불들을 눈여겨보면 빗물을 막으려는 노력들이 보이지만 이처럼 선명하게 갓을 씌워 놓은 것처럼 보이는 예는 드물기 때문이다. 또한 세 분의 조각 솜씨 또한 다른 듯 해 흥미롭다. 본존불은 구리나 대리석을 매만져 놓은 것처럼 부드러우며 원만한 저부조이지만 양쪽 보살들은 마치 목판을 깎아 놓은 듯 투박하면서도 똑 떨어지는 날카로움을 보인다. 보살들이 서 있는 연꽃잎은 본존의 그것과는 달리 마치 불꽃과도 같아 보인다. 더군다나 왼쪽의 보살이 오른손으로 옷자락을 슬며시 당겨 올려서 잡고 있는 표현은 투박한 가운데에서 여성스러운 자태를 볼 수 있는 빼어난 것이라 말하고 싶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성거렸지만 햇살은 끝내 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햇살이 비쳐들면 좀 더 또렷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새 해는 산등성이에 걸려 버렸고 나는 호젓한 산길을 아쉬운 걸음으로 내려 와야만 했다. 논설위원.전 ‘디새집’ 편집장 거창 가섭암터 보물 마애불은 고려 숙종 때 조성
위천면소에서 휴양림까지는 4km 정도이며 면소에서 2km 정도 휴양림으로 향하면 왼쪽으로 강남리가 있는데 이곳에도 예전에 강남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 그곳에 훼손이 심한 석불 한 기가 논 한가운데에 있다. 마을에서 1km 정도 더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미폭이라는 곳이 있는데 조선후기의 진경산수화가인 진재(眞宰) 김윤겸이 가섭암과 함께 그 빼어난 풍광을 그렸다는 곳이다. 매표소를 지나 오른쪽으로 오르면 다시 갈림길이다. 그곳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100m 가량 오르면 왼쪽으로 주차장이 연이어 세 곳이 있으니 그곳에 자동차를 세워야 한다. 유안청폭포를 갈 양이면 어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주차장에서 산 위 쪽으로 보면 나누로 걸쳐 놓은 다리가 하나 보이는데 그 다리를 건너 가섭암터까지는 채 500m가 되지 않는다. 문바위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가섭암터 마애삼존불관리사 라는 한옥이 한 채 보이고 그 일대가 가섭암터였다고 전해진다. 건물 왼쪽 옆으로 보이는 돌계단을 오르면 그곳에 마애삼존불이 있다. 가섭암터 마애삼존불은 보물 530호로 지정되었으며 삼존불 오른쪽에 부처님 조성기가 따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글씨는 마멸이 심해 잘 알아보지 못한다. 1989년 김길웅 선생의 판독에 따르면 새긴 글자는 모두 540자이다. 마애불을 새긴 해는 천경원년(天慶元年), 곧 고려 숙종 6년인 1111년이며 조성과 관계된 사람으로는 왕과 제복법사(堤福法師) 법운(法曇)이다. 또 ‘염망모이□은(念亡母以□恩)’이라는 글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고려의 왕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세운 것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명문은 현장에서 확인하기는 지극히 어려우며 탁본 한 것을 보려면 거창 국립박물관으로 가면된다. 또 이곳에 있던 3층탑은 위천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옮겨 놓았으나 지난해까지 세 차례나 도둑을 맞는 바람에 지금은 거창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