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춤꾼이었다. 당시 그녀의 인기는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중극 그 리고 미국과 유럽에까지 이론을 떨친 대 스타였다. 최승희가 춤에의 길 로 접어든 계기는 1926년 3월 20일 일본의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꾸의 내 한 공연을 오빠 최승일과 함께 보고 나서였다. 벅찬 감동을 안고 무대 뒤 분장실로 찾아갔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조선의 무용가로 성공하겠으 니 지도하여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시이 바꾸의 일행과 함께 연구생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피나는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1년 6개 일 후 1927년 가을, 최승희는 이시이무용단의 서울 공연에 포함되어 최 초의 고국 무대를 밟게 되었다. 이시이의 배려로 「세레나데」를 솔로 로 추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국내 언론들은 최승희의 성공적인 첫출발 을 알리는 격려와 함께 '조선의 꽃'이라고 대서 특필 하였다. 1929년 여 름 3년 만에 이시이로부터 독립한 그녀는 서울에 돌아와 무용 연구소를 열고 연구생을 모집하여 훈련에 돌입한다. 이때 나이 열아홉인 그녀를 옆에서 도운 이가 오빠 최승일이었다. 당시 그녀의 심정을 들어보자 훌 륭한 우리의 유산마저 온전히 보존하지 못해온 조건의 현실이 너무나 안 타까웠다. 그때 내게는 아직 미숙한 솜씨나마 고향에 새로운 무용을 건 설하고 사멸해가는 고전무용을 부착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무척 이나 절 실하게 박혀 있었다. 1930년 2월 1잎 서울 장곡 천정공회당에서 경성일 보 주최의 제 1회 최승희 무용 발표회를 갖게 되었다. 다행히도 발표회 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를 아직 구축하지 못하고 이 시이의 흔적을 지적(당시 동아일보 등)당하자 자기만의 춤 세계를 모색 하기 시작한다. 이때 조선 춤의 일인자인 한성준을 찾아간다. 이들의 만 남은 기간으로 생각한다면 이시이와 비교할 수 없지만 자기 세계를 찾아 나선 최승희에게는 매우 의미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 인해서 최 승희가 우리 춤에 대한 중요한 각성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러던 중 카프활동을 하던 와세다 대학생 안필승(안막)을 만나 결혼을 하 였다. 안막은 최승희와 만난 이후 그녀 춤의 기획자, 흥행사 레퍼터리선 정자, 작품조언자 등으로 활약하여 그녀를 세계적인 무용가로 올려놓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33년 9월 20일 다시 동경으로 온 지 1년 만에 최승희는 감격의 첫 개인무용발표회를 일본 청년회관에서 가졌다. 여기서 조선무용을 현대적으로 표현한 작품인 「에헤야 노아 라」가 관중들의 갈채를 받았고 여러 평론가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1935년 스승 이시이로부터 다시 떨어져나와 일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 를 설립하고 그 해 10월 22일 히비야공회당에서 제2회 창작무용발표회 를 가지게 되었다. 그녀가 독립해서 가지는 첫 무대인 만큼 심적 부담 이 컸으나 다행하게도 하루 두 차례 공연이 대성황을 이룬다 그 여세를 몰아 일본 순회공연도 호평 받았다. 그 동안 지지부진하던 영화 「반도 의 무희」가 완성되어 동경에서만 4년간 상영되는 히트를 쳤다. 그리고 1936년 9월 22일부터 3일간 하비야공회당에서 제3회 신작발표회가 있었 는데 예상대로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획득한 최승희에게 세계 각국에서 초청장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세계무대로 의 도약을 꿈꾸는 최승희는 미국행을 결심하고. 1937년 9월 27일부터 3 일간 도쿄극장에서 「도미고별 신작발표회」를 가졌다 이 공연에서 6살 된 딸(성희)도 출연을 한다. 1939년 1월 31일 유럽 예술의 중심지인 파 리에서의 첫번째 공연은 2.700여 석 규모의 극장을 가득 메워 대성황을 이루었다. 6월 15일 파리에서의 두 번째 공연은 3.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에서 있었는데 피카소 같은 예술인이 관람하는 등 좋은 반응 을 몰고 왔다. 이러한 호평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브뤼셀에서 개최되는 제 2회 국제무용경연대회심사위원으로 활약하게 될 정도였다. 1942년부터 이미 국제적인 무용가로 인정받고 있던 최승희도 전선위문공 연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 만주 · 중국에서 130회에 이르는 공연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북경에서의 18회 공연을 하는 동안 수천 년의 중국 춤의 전통을 공부하였고 매란방이 자기 집으로 초 대하는 등 그녀에게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해 12월 6일 부터 일본에 돌아와 그때까지의 자신의 작품을 총정리하는 무대를 가졌 다 일본 제국극장(수용인원 2천명)에서 17일간 24회라는 기록적인 장기 공연을 가진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그동안의 대표작과 조선춤 뿐 아니 라 일본춤, 중국춤까지 선보임으로써 새로운 춤을 위한 시험무대로 삼았 던 것이다. 그 후, 자신의 대중적인 기반을 염두에 둔 회원제도를 모색 하여 당시 문화인을 망라한 500명의 특별회원과 동일한 인원수의 일반회 원으로 구성하였다. 1943년 8월 8일 제국극장에서 그녀는 고도의 예술성 과 대중성을 가미한 새로운 춤을 선보이게 된다. 이 무대는 무용 해설 형식을 도입하였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어 1944년 1월 27일부터 2월 15일까지 총 23회의 솔로 중심의 장기공연을 극장에서 가졌다. 관객은 매회 초만원이었다. 평론가들은 "이번 공연의 경향을 보면 중국무용을 조선무용과 같은 창작수법으로 안무했으며 중국의 고전예술을 무용화한 것은 세계무용사의 신기원이 될 것"이라는 등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최승회는 처음에 발레로 시각하여 현대무용과 서양의 캐릭터를 추었으 나 1930년대부터 한국춤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유럽공연 이후부터는 동양 무용에 대한 작품에 손을 댄다. 그녀의 춤 동작은 우아하다기 보다는 흥 겨운 멋이 있었고 낙천성과 풍자 희극적인 요소가 강하며 움직임이 매 우 역동적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춤 동작 이외에 표현력에서도 남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을 중심으로 하는 얼굴 표정이 작품마다 달라서 관객으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었다고 한 다. 최승희 약력 1911년 서울 출생 1926년 숙명여학교 졸업 1926년 -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꾸로부터 3년간 무용 사 사 1929년 귀국, [최승희 무용연구소]설립 아홉차례의 무용발표회를 가 짐 1932년 카프의 문인 안막과 결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감 조선의 고전 무용을 각색한 "에헤라 노아라"를 공연해 일본에서 데뷔 1937년 -1940 년 미국, 유럽, 중남미 순회 공연 1946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 북한에 서 [최승희 무용 연구소 ]설립, 후진 양성 1950년대 말 남편 안막과 함 께 숙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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