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 블로그에 가 보니 "어린시절 자랐던 내 고향에 대한 추억을 소개해주세요."라는 요청이 있어 몇자 적어본다.
"논가운데"
어릴때 우리 동네를 불르던 이름이다.
큰길에서 논으로 들어가서(내 기억에는 논이 공장이 된 후만 기억) 동네가 형성 되었기 때문 일거다.
그래서 큰길에서 집으로 갈려면 좁을 길을 걸어 가야 하는데 당연히 비포장 이었기에 비만오면 신발을 버리기 일쑤다.
당시 주로 신던 신발이 검정 고무신이었기에 흙에 빠진다고 혼날리도 없겠지만.
충주라는 도시의 외곽에자리잡은 시골이었기에 학교도 멀었다.
그래서 아침이면 형들이 먼저나와 같은 학교가는 친구들을 부른다.
모두 합하여 십여명이 되었으며 우리는 형들따라 굉장히 먼길(지금 생각하면 먼길도 아님)을 놀며 등교했다.
학교 다녀와서는 대장형이 모두 집합을 시킨다.
그러면 오징어 가이생(일본말일것이다), 십자 가이생, 잣치기, 구슬치기(당시에는 봉굴잡기라 했다), 술래잡기, 몽땅(술래잡기를 단체로 하는것)등 놀 거리가 많았다.
당연히 집과 집사이에 담이 없으니 우리의 놀이터는 넓고 숨을 곳도 많았다.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이런 놀이를 했다.
그러다 5시만 되면 각자 자기의 집으로 들어갔다.
5시 5분에 "무지개마을"이라는 라듸오 프로가 나왔기 때문이다.
10분인지 15분인지 동화를 성우들이 하는 것으로 단막 형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반드시 들어야 했다.
더욱 빼먹을 수 없었던 것이 그 후 바로 방송되는 "마루치 아라치"였다.
달려라 마루치! 날아라 아라치.
태권동자 마루지 정의의 주먹에
파란해골 13호 납짝코가 되었네.
지금 기억하는 가사는 이정도 인데 처음에는 납짝코가되었네 하는 부분을 이해못해 "닥장꼬마대행진" 이라고 다들 불렀다.
마루치 아라치가 끝나고 나면 다들 놀이터(당시에 우리집 옆마당이 제일 커서 우리의 주무대 였다)에 다시 모였다.
그리고는 그날 들은 무지개 마을과 마루치아라치에 대한 Review를 서로 했다.
다들 듣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안들은 친구에게 이야기 하듯 모두 침을 튀겨가며 모션까지 써가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옆에 다른 친구는 마치 TV를 본듯 다른 모션을 이야기 하며 "이렇케 했어!" 하며 우겼다.
20분 정도 들은 라듸오 이야기를 한시간 넘도록 이야기 한것 같다.
이야기가 끝날때쯤 되면 각자 집에서 저녁먹으라는 어른들의 소리가 들린다.
그때까지 못끝난 이야기는 저녁상으로 이어진다.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이야기를 난 할아버지 할머니께 열심히 나의 상상과 친구들의 상상을 섞어가며 이야기 한다.
그러면 할아버님께서는 밥먹을때 이야기 하면 복나간다고 조용히 하라고 하시곤 하셨다.
그때는 라듸오만 들어도 많은 상상이 되었던 것 같다.
한번은 이모네 집에가서 라듸오에서 들은 이야기를 한참 설명을 하는데 이모가 열심히 들어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이 "누가 영화 구경 시켜 주었니?"였다.
너무 실감나게 이야기 해서 영화구경한 이야기를 하는줄 알았다고 하셨다.
동네에서 2~300 미터만 가면 과수원이 있는데 중학교 형들은 서리를 가끔 한다.
나는 자주 따라가지 않았지만 한번은 중학교 형이 애기 복숭아 서리 하러 가는데 같이 따라 갔다.
나에게 맡겨진 임무는 망보는 임무
그냥 철조망에 서있으면 형이 봉지에 잔뜩 따서 울타리를 넘어오면 나는 같이 오면 되었다.
그리고 나면 왕사탕 만한 작은 복숭아를 나에게도 나눠 주었다.
그 작은 복숭아는 물에 당원을 타서 한참 담다두면 맛있는 간식거리가 된다.
겨울밤에는 앞집 아저씨가 가게를 해서 늦게까지 우리들 세상이므로 그집 형이 자기 집으로 아이들을 모은다.
각자 집에서 맛있는 것을 싸가지고 가야 한다.
못가져가 아이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맛있는것을 가져온 순서대로 아랫묵 차지를 한다.
그집에서 먹던 고구마 홍시등은 정말 맛있었다.
나는 큰집이 곳감 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곳감 만들고 남은 감껍질 말린것을 자주 가져갔다.
당시에 감껍질은 아주 맛있는 간식거리 였다.
정월 보름이 되면 "망우리"를 돌리는데 당시만 해도 깡통이 귀하던 시절이라 깡통 구하느라 열심이다.
좋은 깡통을 구한 친구들은 싱글벙글이지만 못구한 친구들은 울상이 된다.
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뚫고 철사줄을 이으면 훌륭한 "망우리"도구가 된다.
저녁 하느라 지핀 불씨를 아궁이 에서 꺼내 망우리 깡통에 담아 논으로 나가면 부지런한 친구들은 벌써 불을 피워놓고 떠들석 하다.
유난히 잘 돌리던 한살 많은 형이 있었는데 그때가 그 형이 제일 인정 받는 시기다.
한참 돌리다가 위로 확 던지면 밤하늘에 불꽃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간다.
지금의 불꽃놀이 구경쯤 되었을 것이다.
당시에 우리 동네에는 TV있는 집이 두집 있었다.
한집은 아줌마와 어린 아이만 있는 집이라 내가 갈수 있는 집이 아니었고 우리 뒷집에 종식이란 친구가 살았는데 그집에 TV가 있었다.
나는 TV때문에라도 그친구와 친하게 지내야 했다.
당시에 "별당아씨"라는 연속극이 너무너무 재미있어 연속극 하는 날에는 무슨 핑게를 삼아 그 친구 집에 갈까 많은 궁리를 했다.
그런데 우리의 공공의 적은 그 친구 누나였다.
당시 집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 누님은 가요프로그램을 좋아해서 우리가 재미있는 만화나 연속극을 볼라치면 가요 프로그램으로 채녈을 돌렸다.
당시에 너무너무 미웠는데.
우리집에 전기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 들어왔다.
그전까지는 밤이면 호롱불 켜고 살았다.
전기가 들어오던날 기쁨이란...
그런 우리집도 TV놓고 전화기 설치할때쯤 우리들의 놀이터는 담이 쳐지며 자연 쫓겨나게 되었고 발전과 반비례 하여 추억이라는 열매는 점점 줄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TV보며 컴퓨터 게임만 하는 우리 아이들 보다 내가 더욱 많고 소중한 추억을 가진 것 같아 행복해 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