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우대는 위장술의 풍물패거리단
동북의 기운을 서남의 기운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말이 있다. 서세동점은‘서양 세력을 차차 동쪽으로 옮긴다’는 뜻이다. 양달사 의병장의 큰 활약상을 볼 때 동북쪽의 세력을 차차 서남쪽으로 옮기는‘동북세서남점(東北勢西南漸)’이 되어야한다. 다시 말하자면 양달사 의병장 같은 인물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평가가 되어 훌륭한 대한민국 인물로서의 인정을 확실히 해 그를 이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받도록 해줘야한다는 것이다.
조선최초 의병장으로 알려진 양달사에 대해‘리메이크(remake.재구성), 리엠파시스(reemphasis. 재 강조, 재 역설)’, 다시 한 번 그의 인물에 관한 기술을 해본다.
영달사는 1518년 2월 2일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 봉호정에서 양승조씨의 4남 2녀 중 2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힘과 담력(膽力)이 남달랐다. 그는 말 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고 운동신경이 잘 발달돼 운동능력과 기량이 탁월했다.
형 달수와 더불어 화순(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411)에 사는 아버지 8촌 벌 된 삼종숙(三從叔) 양팽손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화순에 있는 학포당(學圃堂)에서 수학을 하게 된다.
잠깐!
학포당은 어떤 곳인가?
학포당(學圃堂)은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411번지 위치하고 있다. 학포당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서화가인 학포 양팽손(1488~1545)이 사용하던 서재이다. 학포 선생은 능성현에서 양이하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중종 때 선비이며 가묘명현 가운데 한 사람인 학포 양팽손은 중종 5년(1510) 조광조와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중종 11년 식년문과에 감과로 급제한 후 정연을 거쳐 중종 14년(1519) 교리로 재직하던 중 기묘사화로 삭직 당했다. 중종 16년(1521) 기묘사화의 여파로 신사무옥이 발생하자 은거의 뜻을 두고‘학포당’을 건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중종 32년(1537) 복관되어 중종 39년(1544) 용담현령을 지냈다. 서화에 능하였고 호남화단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저서로는‘학포유집(學圃遺集)’이 전한다.
무과에 뜻을 두고 열심히 양팽손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과 무예(武藝)를 연마한 그는 19세 나이에 1537년(중종 32) 9월 10일‘모화관’에서 열린 무과전시에 응시해 28인 중 병과로 무과에 급제한다.
훈련원습독관(지금의 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임하던 명종 1년(1546년) 11월 10일에는 10년 만에 한 번씩 당하관(정 3품 이하 문무관)들을 대상으로 치러지는 일종의 승진시험인 중시(重試)에 응시해 합격자 35명 중 5위의 성적을 거둬 진해와 남해현감으로 부임한다.
양달사는 공직에 있어서는 항상 청렴하고 근검하였으며 집에서는 형제들과 우애가 좋았고 깊었다. 서두에 다룬 기술이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해본다.
해남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뜻하지 않는 소식을 듣게 된다. 37세가 되던 해 1555년 2월 4일 어머니(淸州韓氏)가 돌아갔다는 부고의 소식을 접한다. 양달사는 해남현감 직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바로 고향 도포 봉호정으로 떠난다. 상을 당한 어머니를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모시기 위해 그는 눈물을 앞세우며 고향 마을로 발길을 재촉한다. 양달사는 상을 어머니를 세종산 선산에 묻히기도 3년상을 치르고자 시묘(侍墓)살이에 들어간다. 그러던 중 2개월 뒤 1555년 5월 11일 왜구가 영암성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무과를 급제해 전라좌우우후와 중시에 급제해 진해현감과 해남현감을 역임한 양달사는 시묘살이를 잠시 접고 영암읍성으로 형 달수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들어간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술해본다. 더 깊이 강하게 뇌리에 심어주기 위해서다.
당해 5월 13일 달량진 전투에서 전라병마절도사 원적(元績)과 장흥부사 한온(韓蘊)이 전사했고 영암현감 이덕견(李德堅)이 포로로 잡혀 항복했다. 인근의 성들도 잇달아 함락되면서 서남해안은 왜구들의 살인과 약탈과 방화로 끔찍한 전쟁터로 변해 백성들을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런 상황을 들은 양달사는 머지않아 영암읍성을 습격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시묘살이를 접고 형 달수 등 형제들과 함께 봉호정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격문(檄文)을 각 지역으로 보내 의병을 모집하여 단시일에 훈련을 시키고 무기를 배부하여 왜구들이 포위한 5월 24일 저녁에 은밀히 영암으로 이동을 했다. 무기라고 하지만 낫, 칼, 쇠스랑 등이 우선 슬 수 있는 무기로 무장한 채 영암읍성 안으로 들어갔다.
밤새도록 날이 새기를 기다린 양달사 의병부대는 1555년 5월 25일 미리 분장시킨 창우대(남사당패)로 하여금 굿판을 벌이게 하여 왜구들을 방심시킨 뒤 매복하고 있던 향교 뒷산(역리)에서 일시에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창우대는 도대체 무슨 패거리일까?
창우대(倡優隊)는 광대와 패랭이들로 구성된 남사당패로서 일종의 농악대다. 왜구들에게 연희를 베풀겠다는 꼬임으로 창우대를 조직하여 향교에서 진을 치며 공략태세를 취하면서 노리고 있는 왜구들이 보이는 곳에서 온갖 굿을 하였다. 꽹과리, 장구, 징 할 것 없이 악기는 다 동원시켜 광대와 함께 농악대들이 마치 굿판을 벌이듯이 치며 놀았다. 이 장면을 본 왜장이나 왜 군졸들은 신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놈들이 이 전쟁터에서 우리를 불러 왠 굿판을 벌이지하면서도 처음 보는 장면이라 흥미 있게 생각하고 넋을 나간 채 구경했다. 창우대는 그럴수록 더 신나게 쳐 됐고 놀아났다. 창우대에 넋이 나간 왜구들은 전투하러 온 것임을 깜박 잊고 창우대에만 정신이 팔렸다.
성안에서 벌인 창우대 놀이패에 빠진 것을 왜구들을 서서히 성 밖으로 유인해 갔다. 왜구들은 무슨 꾀를 부린지도 모르고 창우대에 따라나섰다. 진흙탕인 군더리방죽에 이르자 그런 찰나 기회는 이때다 하며 역 고개에서 넘어온 병사들과 성에서 나온 병사들이 협공하고 뒤에서는 성안의 노소 백성들도 징과 꽹과리를 치며 의병의 뒤를 따라 구경만 하고 있었던 왜구를 집중 공격했다.
적의 예봉을 꺾고 적군을 크게 이겨 110여 명의 왜구들이 목을 베자 왜구들은 줄행랑을 치듯이 물러났으며 조선군은 물러나는 왜구를 끝까지 공격하는 등 승리를 거두었다. 일격에 당한 왜구들은 지금의 덕진다리까지 도망을 갔다. 이들을 다시 지금의 공설운동장인 군더리방죽의 진흙 밭으로 다시 유인하여 적들을 꼼짝 못하게 하여 참살하기도 하고 관군과 함께 추격하여 전당을 몰아내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굿패거리, 농악대, 남사당패 이런 수식어가 붙은 창우대, 창우대를 본 왜구들은 듣도 보도 못 했던 광경을 접하게 된 그들은 영암 사람들의 꾀에 꼴깍 속고 말았다.
양달사 의병장의 계략을 어느 장수도 생각해내지 못한 뛰어난 전략전술이었다.
양달사 의병장은 성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비밀리에 광대와 농악대 등에 대해 말씀드리고 동참해주기를 호소한다. 여기에 참여를 한 분들은 좀 해봤던 사람도 있었고 흥미를 갖고 있었던 사람, 전혀 한 번도 해보지는 안했지만 가담했다.
왜구들을 위해 연희(演戱)를 벌이겠다며 마을마다 집집마다 있는 기구들을 다 동원하여 조직을 구성한다. 창우대, 병신춤을 잘도 춘다. 꽹과리를 신에 흔들린 듯 친다. 북.장구.징 잘도 쳐 된다. 상모도 잘 돌리고 소구도 미친 듯이 흔들어 된다. 팀원들이 호흡을 잘 맞추니 굿판이 그저 웃음이 나온 굿판의 패거리였다.
이런 장면을 보여주면서 보는 이의 혼을 빼는 마음으로 기회를 엿본다. 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전쟁하러 온 저 놈들을 혼란스럽게 해 전쟁하려는 생각은 어디 가고 굿판에 정신 팔리게 하겠다며 조직한 창우대 전술, 연희란 핑계로 그들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막 두드리거나 흔들어 됐다.
왜구들은 이 광경을 보고
“저게 뭐지!”
“저들이 갑자기 저리지!”
“무슨 일이 있는가?”
“우리를 갑자기 초대해 연희를 베풀겠고 하지!”
“전투하다 말고 축제를 하네!”
눈치를 채지 못한 왜구들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한 왜구들을 양달사 의병장은 이때다 하며 성을 포위하고 있는 왜구들을 성 밖으로 유인해 간다. 지금의 공설운동장이 있는 수렁이 많은 진흙구덩이 논으로 왜구들이 오게 해 진흙탕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하려고 미친 듯이 쳐대고 춤을 추어 된다. 창우대에 그저 눈을 빼긴 왜구들은 칼과 화살과 창을 질질 끌고 굿패거리들만 쳐다본 채 따라 움직이었다. 진흙탕으로 유인한지도 모르고 그들은 넋이 나간 채 따라만 갔다. 마치 시골에서 어떤 축제가 있게 되면 동네 어린꼬마들이 흥미 넘친 신기하고 이색적인 장면을 보려고 눈을 떼지 않은 채 따라다니듯이 왜구들도 그랬다.
진흙구덩이(탕.밭.수렁)에 말과 함께 빠진 왜구들은?
“아! 이게 뭐냐 안전 흙탕 속에 빠져버렸잖아!”
“이 것들이 일부로 우릴 빠뜨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아이구야 속았다.”
“이일을 어째 환장하고 미치겠네!”
말도 빠져 제몸을 못 가루었다.
"히이잉!" 하며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다.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쉽지가 안았다. 발목 이상의 온 몸이 빠질 정도로 진흙구덩이이었으니 발 한발을 빼기가 매우 힘들었다. 빼려면 더 들어가곤 했다. 자빠진 놈, 아예 누워버린 놈, 우는 놈, 소리 꽥꽥 지른 놈과 말은 말도 못한 채 그저 진흙에 어쩔줄을 몰핬다. 별별 장면들이 연출됐다.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꼼짝없이 진흙탕에 갇혀 있어야만했다. 진흙탕은 방죽(저수지)이어서 진흙탕이 깊이 빠질 정도로 온 몸이 진흙으로 범벅이 될 만큼 물컹물컹 했다. 수렁이 많은 저수지여서 그걸 이용했고 노렸다.
난처한 상황을 본 의병들은
“하하하!”껄껄 웃어대며 배꼽을 잡았다.
“아이고야! 우습다.”
“이 봐보들아 꼴좋다.”
“이 왜놈아 맛 좀 봐라!”
양달사 의병장은 의병들에게
“저 놈들을 쳐라!”
“한 놈도 남겨두지 말고 다 죽여라!”
하고 호령을 했다. 호령이 떨어지자마자 의병들은 일격을 가하려고 활과 창을 던졌다. 인정사정없이 왜구들을 향해 활을 쏘거나 창을 던지거나 칼을 휘둘려 됐다. 심지어 동네 아낙네와 어린애들도 나와 돌멩이를 던지며 왜구들에게 난타 질을 해됐다. 대나무 죽창도 던졌고 집에 있는 쇠스랑도 가져와 왜구들을 찔렸다. 진흙탕으로 범벅이 되어 나온 놈들은 바로 목을 쳤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이런 것을 두고 바둑에서는‘신의 한수’라고 한다. 결적인 순간에 한수로 상대를 제압하는 양달사 의병장은 고수 중에 고수(高手)였다.
진흙구덩이는 악마의 소굴이었다. 왜구들은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그러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완전히 당했다는 푸념의 한숨소리가 컸다.
왜구들은 패전한 듯 했지만 다시 결전태세를 갖춰 영암성을 공격하였다. 한편에서는 싸우고 한편에서는 퇴각하던 중에 양달사 의병장은 왜구에게 쫒기다 그만 말이 진흙구덩이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양달사 의병장을 향해 왜장은 창을 던졌다. 다행히 양달사 의병장은 간신히 피했고 말은 칼과 창을 맞고 쓰러졌다.
위기상황 벗어난 양달사 의병장의 재치.
말이 진흙에 빠져 그만 말이 창에 맞고 쓰러지자 양달사 의병장의 재치, 두뇌회전이 빠른 그는 위기를 면해야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위기를 빨리 벗어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자 그는 말을 버리고 손을 드는 듯하다가 왜구에게 소리를 지른다.
“저기 조선군들이 몰려 온다.”
“저수지에 물이 들어와요.”
"뱀이 우굴거려요!"
“빨리 벗어나지 못하면 다들 죽습니다.”
"저기 보세요!"
횡설수설하듯 말하자 왜구들은 어떤 꾀인지도 모르고 시선을 양달사 의병장이 가르친 쪽으로 돌린다. 그때 양달사 의병장은 진흙탕에서 잽싸게 빠져나와 재빨리 성안으로 도망을 쳤다.
몸만 빠져나온 양달사 의병장은 성안으로 달려가 만호 박천주의 말을 빌려 타고 다시 잽빠르게 수렁(진흙구덩이)이 있는 군더리방죽으로 갔다. 진흙탕에서 말이 다치는 바람에 적을 치려다 자신이 죽을 뻔했던 그만 작전에 실패했던 것을 반드시 끝장을 내려고 재 결전에 나섰다.
진흙구덩이에 적은 옴딱달싹 못하였다.
왜구가 쫓아오면 진흙탕이 있는 족으로 도망을 가 그들이 진흙탕을 밟게 하여 빠져 무기력하게 만드는 작전으로 다시 끌어드렸다. 진흙탕 물을 온몸에 튀겨가면서 죽기 살기로 싸웠다. 양달사 의병장은 방죽(저수지)의 진흙구덩이(수렁)가 있는 곳을 미리 알아두고 왜구를 그 쪽으로 유인해 말과 사람이 쑥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하여 때를 놓치지 않고 허우적거린 왜구들을 즉시 찌르고 쳤다.
일격을 당한 왜구들은 격분했다. 완전 저들의 꾀에 당한만큼 갚아주겠다며 결전을 각오했다. 하지만 왜구들은 양달사 의병장의 꾀에 속고 속는 당하기만 했다.
“이 나쁜 놈들 같으니 꾀를 부리다니!”
“나를 진흙에 빠뜨려!”
“꼭 너를 죽이고 말겠다.”
“반드시 우리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말겠다. 복수하고 말겠다.”
“너희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두고 봐라!”
“저 놈들을 쳐라!”
“우리를 잔흙에 빠뜨린 저 놈들을 모조리 잡아라!”
격분한 왜구들을 군더리방죽(현 공설운동장)‘진흙구덩이’가 자신들의 무덤인줄을 전혀 생각을 못했다. 적을 치려 면은 지형 상태를 잘 파악해둬야 하고 현지지형을 활용할 줄 알아야 된다는 양달사 의병장의 전술과 전략은 뛰어난 지략과 계략이었다. 적들이 쫓아올 때 어디로 도망을 해야 만이 괜찮겠다는 순발력, 도망을 가더라도 진흙탕이 있는 쪽으로 가면 그들이 쉽게 쫓아오지 못하겠다는 판단력, 그들이 쫓아오다가 진흙탕에 빠지면 역전이 되겠다는 사고력, 진흙탕 전술은 영산강 개벌을 참고한 양달사 의병장의 지혜였다. 진흙구덩이로 유인해 참살시키는 일은 신의 한수였다. 이윤경 군대(지원군)와 관군(영암의 병사)과 함께 추격하여 잔당을 몰아내는 등의 혁혁(奕奕)한 전과를 올렸다.
진흙구덩이 전술은 굿패거리로 유인하여 왜구들을 진흙구덩이에 빠지게 해 진흙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한 것을 이때 적을 치는 전술이었다. 또한 양달사 의병장도 이 진흙탕에 빠져 그만 말은 잃었고 자신을 빠져나와 성안에 있는 장수의 말을 빌려 타고 다시 왜장을 유인하여 왜장을 죽이는 진흙구덩이이었다. 바둑에서의 대세점인 신의 한수를 둔 작전이었다.
또한 양달사 의병장이 왜구에 포위된 영암성에 들어가 병사들과 백성들이 기갈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우연하게 장독기를 땅에 내리 찍었는데 그 자리에서 물이 솟아나와 목마름을 한 장병과 백성들에게 기운을 차리게 해줬다.
창우대는 적을 현혹시켜 공격하기 위한 계략의 전술이었다.
"신난 굿판을 한번 벌려 볼꺼나!""따당! 따당!""자 우리 한번 신나게 놀아봅시다.""어 허이!""따당! 따당! 따당! 따따당 땅땅!"
상쇠의 말에 의해 너도나도 굿판을 벌었다. 꽹과리, 장구, 북, 징의 내 가지 악기와 나팔, 태평소, 소고 등의 악기를 구성하여 악기 연주와 몸동작 그리고 행렬을 지어 다채로운 집단적 움직임의 풍물굿(판굿, 풀물놀이)을 보여줬다. 풀물패 구성은 농기(농기수), 호적(날라리), 꽹과리(상쇠.부쇠.삼쇠), 징(징수)_, 장구(장고수), 북(큰북수), 소고(소고수), 법고(법고수), 무동으로 편성하여 진행했다.
양달사 의병장의 전술은 기존의 전술법을 구사하지 않았다. 왜구와 바로 맞서면 열세에 있는 조선군으로서는 왜군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다른 방법으로 적을 공격해야했다. 창우대를 조직해 적을 현혹시켜 적들이 정신이 팔릴 때 바로 집중공격을 하는 전술을 선보였다.
양달사 의병장은 왜구들이 쫓아와 도망을 가더라도 왜구들이 추격을 해오다가 함정에 빠지게 포위망 함정을 생각하며 피했다. 적들이 쫓아오다가 함정에 빠져 옴딱달싹 못하게 했다. 그 전략이 바로 '군더리방죽의 진흙구덩이(수렁)' 이었다. 진흙구덩이로 유인하면서 도망간듯이 피했다. 또한 굿패거리인 창우대는 적을 현혹한 꾀부림의 속임 수 작전을 펴 적들이 정신착란증을 야기시켜 기세를 꺾어 놓으려는 계략이었다.
적에 의해 도망을 가더라도 그냥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닌 뭔가 생각해 두고 도망가는 지략, 적보다 정신력이나 힘이 약하면 그 단단점을 기회로 삼고 지혜를 발휘해 적들을 치려했던 전술이 있었기에 왜구들은 다른 성에서 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영암전투에서는 다른 성에서 써 먹었던 전략은 영암전투에서는 통하지 않으며 패할 수밖에 없었다.
창우대는 위장술의 풍물패였다.
창우대라는 뜻은 광대 창(倡)자와 뛰어날 우(優), 무리 대(隊)자를 써 창우대(倡優隊)라고 했다. 창우대는 풍물패이지만 하나의 '위장술의 풍물굿' 이었다. 풍물패에는 순수한 백성도 있었지만 그 중에는 특수군인인 '창의군' 이 들어있었다. 상황이 터지면 일시에 군인으로 변해 적을 공격하는 위장군인의 전술을 한 창우대였다. 창의군이 잎장서 정의를 부르짓으며 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듯이 창우대도 하나의 군사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띠며 활동을 했다. 창우대로 인한 적의 전술과 전력을 흐트려지게 하거나 약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된 영암전투만의 전략이었다.
영암전투에서 어느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운 양달사 의병장, 그는 조정에서도 그 공을 인정하는 공적서(功績書)하나 없었다. 엉뚱한 사람만 공적으로 올라있을 뿐이다. 있다면 전투에 참가한 자들의 명단 정도의 기록이다. 다행히 임금이 몇 번 바뀌고 난후 유림(儒林)들의 지속적인 건의로 292년이 지난 1847년 현종 13년에‘좌승지(左承旨)’로 추증(追贈)되었을 뿐이다.
왜구를 물리친 양달사 의병장은 그의 어머니가 묻힌 봉호정으로 돌아왔다. 시묘살이 중에 전투에 임했던지라 그는 다시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시묘살이를 마친 양달사는 영암전투 때 입은‘창독(瘡毒.종기가 나와 고름과 열이 생기는 병)’으로 1557년 12월 20일 40(만39)세의 나이로 여생을 마쳤다. 40세에 세상을 떠난 그는 전투를 하다가 칼과 창을 맞은 것이 그 상처가 쉽게 낫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고름이 생기는 등 상처가 커져 그만 고통을 겼다가 눈을 감았다. 그런 아픔임에도 시묘살이를 했으니 병이 낫지가 않았다.
창독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생기는 피부병이다. 칼 등 쇠붙이에 입은 상처는 쇠 독으로 인하여 살이 썩어들어 가는 심각성을 띠고 있다. 열약한 환경에서 창독은 어떻게 치료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영암전투에 참가해 전쟁이 끝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상중인 시묘살이를 하다가 2년 만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0(만39)이다.
남들처럼 전쟁에서 공을 올리면 승진을 하여 좋은 자리에서 영예의 삶과 여생을 보내는데 반면에 양달사 의병장은 불행하게도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병을 얻었고 고통의 삶을 살아야했으며 또한 시묘살이라는 일로 인하여 좋은 공직 속에 편안한 삶을 누리지 못했다.
영암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또 궤멸했던 공을 올리는 사람은 양달사 의병장을 빼놓을 수가 없다.
잠깐!
달량진왜변이라고 부르고 있는 을묘왜변에 대해 다시 한 번 상세히 기술해보자 한다. 지금까지의 기술은 대강의 설명이었다. 좀 더 현실감과 스릴 있게 다뤄보고자 한다.
460년 전 1555년 5월 11일 달량진(현 해남군 북평면 남창) 앞바다에 왜구들이 왜선을 끌고 와 정박한다.
못 보던 70여척의 크고 작은 배로 달량진 해변에 나타나 일시에 마을 사람과 수군들이 동요를 한다.
“저거 뭐지!”
“무슨 배들이 저렇게 많이 들어왔지!”
“어디서 온 거지!”
배만 봐도 겁을 먹을 정도로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고기잡이만 보다가 전혀 다른 배들을 보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놀라운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마을은 일시에 혼란 상태에 이르렀고 알 수 없는 배들로 긴장을 해야만 했다. 몸을 떨게 했던 배는 왜구들이 타고 온 배였다. 배에는 사람(왜병)은 물론 각종 무기와 깃발이 난무(亂舞)했다.
놀랄 수밖에
“이걸 어쩌나!”하며 온 마을이 비상에 걸렸다. 인근 마을까지 금세 소식이 알려졌다. 당연 다른 성까지도 일파만파 왜구들이 쳐들어왔다고 퍼져갔다.
“마을 사람들!”
“왜구들이 쳐들어왔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빨리 피힙시다.”
“뭐라구요! 왜구들이 왔다구요! 뭔 일이다요!”
“어째야 쓴당께랑!”
집밖으로 나온 마을 사람들은 바다에 정박해 있는 수많은 배를 보고 기절초풍을 했다. 당황한 눈치였으며 어떻게 할 바를 몰라 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될꺼랑!”
“도망가야 되요 아니면 우리도 왜구가 못 들어오게 막아야 되요!”
안절부절 하며 어떤 수단을 싸야할지 혼란만 가중됐다.
이러고 있을 때 왜구들은 한 명 한 명 배에서 내려와 육지로 들어온다. 들어와서는 바로 마을 사람들을 보자마자 칼과 창으로 위협하며 닥치는 대로 집에 있는 곡식과 짐승, 패물 등을 약탈하고 나서 집을 불사른다. 심지어 사람을 죽인다.
마을이 일시에 폐촌이 되고 달량진성은 함락되고 만다.
왜구는 6000여명, 달량진성은 지원군을 포함 500여명에 불과해 상대의 놀라운 숫자에 이길 재량이 없었다. 수를 떠나 왜구들의 중무장만 봐도 기가 죽었다. 압도한 숫자에 장비들이 조선군과는 상대가 안됐다. 싸움보다는 그 많은 왜구들을 보고 겁에 질려 숨거나 도망간다. 당연 성을 포위되자마자 함락될 수밖에 없었다. 달량진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한 전라병마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영암현감 이덕견은 부랴부랴 달량진성으로 나선다.
달량진성을 차지한 왜구들로 인하여 온 마을이 공포에 빠진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 더욱 무서웠고 온 사지가 치가 떨 정도로 식은땀이 날 정도로 오싹했다. 이때 주변의 수군 등 군관과 현에서는 긴급 상황으로 여기고 긴장한 채 서둘러 비상체제를 선언하며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어전에 나선다.
전라병마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그리고 영암현감 이덕견 등이 군사를 데리고 달량진으로 급파(急派)한다. 진격의 순간, 숨을 죽여 가며 말고삐를 바짝 당긴 채 말 배를 발로 차거나 엉덩이를 채찍 한다.
“이라! 이라!”
“이히히잉!”
말갈기는 솟구쳐지고 깃발은 휘날리면서 말은 속도를 높인다. 장수들의 발참과 채찍도 분주해진다. 고삐를 좌우로 당기면서 단숨에 가고자 정신없이 말을 타고 달린다. 사람도 담, 말도 땀 정신없이 달려야만 했다.
왜구들은 대마도를 근거지로 해 조선 남해안 일대를 수시로 쳐들어와 약탈을 해가던 해적(海賊)들이었다. 해남 땅 달량진(조선시대에는 영암 땅임)에 상륙한 왜구(倭寇)들은 분탕(焚蕩)질을 시작했다. 일시에 모조리 불사르고 쓸어버리겠다고 인정사정없이 잔인하게 무차별적으로 강력하게 대했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죽였다.
공포에 질린 백성들은
“살려주세요!”
“한번만 꼭 봐주세요!”
“무서워요!”
“응응!”
"흥흥!"
헉헉 울면서 사정을 했다. 치가 떨었고 눈을 감을 정도로 보는 게 무서웠다. 창으로 꾹 찔러가면서 칼로 위협하면서 머리카락을 잡아가면서 민가에 있는 백성들을 괴롭혔다.
왜구들은 짐승 같은 행동을 하며
“이 계집년 뭐라고 하는 거야!”
“저 놈은 왜 저려는 거냐!”
“야 이 여편네야!”
“허튼소리하지 말고 하라는 대로 해!”
“개소리하지 말고 따라와!”
하며 말 안 들면 인정사정없이 찔러죽었다. 반항하지 않았는데도 칼을 휘둘렀다. 응응! 눈물바다는 파바다가 됐다. 이것도 부족해 집은 닥치는 대로 불살랐다. 민가는 눈물바다, 피바다, 불바다가 됐었다.
젊은 남자들은 노예(奴隸)로 삼기위해 끌고 갔다. 또 젊은 여자들은 왜구들한테 성적 수치심을 많이 느낄 정도로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배로 끌려온 사람들은 허드렛일을 시키거나 약탈한 물건들을 저장한 창고에서 노동 일을 시켰다. 끌려온 남자들은 약탈해온 물건들을 배까지 옮기게 하거나 전쟁 터에 쓸 군량미의 식량을 옮기는 일을 시켰다.
왜구의 잔인성, 끌려온 여자들을
배로 끌려온 여자들은 장수의 짐승 짓에 떨어야만 했다.
“야!" 하며 고양이 쥐 잡는 듯이 몰아 넣어 벌벌 떨게 만들었다.
여인들이 놀아감으로 취급당하는 장수의 눈을 살기했고 말은 거칠였다.
겁에 질린 여인들은
“그러지 마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괴롭히지 마세요!”
울면서 사정을 했다.
왜구들은 호소해도 전혀 들어주지 않고 그럴수록 시퍼런 눈으로 응시했다. 거친 말에 기절할 정도였다. 온몸은 부들부들 떨어 코너에 몰린 쥐 신세가 되어버렸다.
짐 나르는데 써 먹으려고 끌려온 남자들은 왜구들이 민가에서 약탈해온 식량이나 패물과 문화재 등을 배에 싣도록 잡업 꾼으로 부려먹었다.
“야! 빨리 안해!”
“이것 저쪽으로 옮겨 나!”
“어서 빨리 하라무스까!”
일이 힘들어 지쳐 있으면 마구 때리곤 했다. 맞아가면서 피터져 가면서 시키는 대로 했어야했다.
칼로 위협하며 짐을 옮기게 했다.
“아아!” 고통의 소리를
“오오!” 힘듦의 소리를
왜구들의 폭압에 바다는 파도소리보다 조선인들의 고통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릴 정도였다.
인정사정없이 노역(奴役)을 시키는 일임에도 참아야만했다. 짐을 옮기다가 바닷물에 쓰러지면 그만 칼로 찔러 바다에 빠뜨렸다. 발로차고 때리고 찔리고 치고 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노역을 시켰다.
민가에 쳐들어온 왜구들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은 다했다. 약탈과 방화는 고자하고 여자들을 괴롭혔다.
“이러지 마세요!”
“이년아 말한 대로 해!”
“살려주세요!”
“이년 죽고 싶어 시키는 대로 하라이!”
왜구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이었다. 아니 짐승만도 못했다.
그런 장면을 보거나 처한 백성들은 그저 통곡하며 울어야만했고 공포에 질린 채 떨어야만했다. 살려달라는 말은 죽여주겠다는 말로 들어줬고 말없이 있으면 입을 더 뭉겨버렸다. 어쩔 수 없이 왜구의 폭력에 당해야만 했던 눈물 속에 끌려가야만 했던 공포의 순간은 그저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왜구들이 상륙해 백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성폭행하고 약탈하고 방화하면서 노략질을 하고 있다는 이 처참하고 비굴한 장면과 상황을 가리포 첨사(僉使) 이세린(李世麟)의 보고를 받고 전라병마절도사 원적(元績)이 강진 병영의 군사를 이끌고 달량진으로 급히 출동했다.
또한 장흥부사 한온(韓蘊)과 영암현감 이덕견(李德堅)도 수하의 군사들과 함께 달량진성으로 향했다.
장흥부사 한온은
숨을 가르며 강진을 통해 쉬지 않고 달린다. 그래서인지 숨 차는 모습이 영력했고 말 또한 땀이 범벅한 채 지친 듯 해보였다. 같이 온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싸울 기력조차 없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아이구야 힘들어 죽겠다.”
“이런 생고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놈의 왜구들이 쳐들어와서 우리를 못살게 하구나!”
“아이구 힘들어!”
하면서도 왜구들을 무찔려야하기에 힘을 다시 찾고 정신을 차려 왜구들과 결투했다. 이미 달량진성을 포위하고 있던 왜구들도 마구 덤벼들었다.
한온은
“다들 정신을 차리십시오!”
“우리는 왜놈들을 치려왔습니다.”
“자! 왜놈들을 향해 돌진합시다.”
“한 놈의 왜구들을 남기지 말고 죽이거나 체포하십시오!”
하자 관군 병사들은 바짝 긴장을 한 채 칼과 창과 화살을 들고 왜구들을 향해 돌격했다.
“저 놈들을 죽이자!”
한 병사가 외치자 다른 병사들도 더 큰소리로
“죽이자! 초전박살내자!”
“와와! 와우! 우우우후!”
하며 진격했다.
달량진성을 포위하고 있는 왜군들은 엄청난데 달량진성을 지키고 있는 조선군사의 수가 몇 명이나 됐는지는 분명하지가 않았고 잘 파악이 안 됐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新錄地理誌)에는 병영성의 정군(正軍)이 498명, 수성군(守城軍)이 51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참조해볼 때 달량진성에 급파된 병영성 군사의 수는 최대 500여명이다. 그러나 병영성 수비를 위해 병력을 조금 남겼을 것을 감안하면 300~400여명의 군사가 달량진성 수비를 위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과 영암에서 출동한 군사수를 100여명으로 보았을 때 모두 500여명 정도가 왜구들과 맞서 싸운 것으로 보인다. 아군의 군사력은 적군의 군사력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한마디로 적수가 안 됐다.
우세에 있는 왜구들은 달량진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총대장인 왜장은 왜군들에게
“저들을 쳐 죽어라!”
“한 놈도 살려주지 말고 마구 쳐라!”
“저들의 기세를 꺾어 반드시 성을 차지하라!”
“그리고 다른 성으로 가서 모두 우리의 손아귀에 넣어야한다.”
“쳐 죽여라!”
“약탈을 해라!”
“불질러라!”
명령을 해되며 왜군들을 진격하게 했다.
여기에 적극 수비를 하고 적을 무찌르기 위해 아군의 장수들도 병사들에게
“저 왜구들을 이 성안으로 못 들어오게 막아내야 합니다.”
“모두 다 쳐 죽이십시오!”
“성이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적극 방어에 나서주십시오!”
하자 아군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어
“네 알겠습니다.”
“초전박살내자!”
“쳐 죽이자!”
“쏴라! 찔러라!”
주먹을 불끈진 채 적극 방어를 했다.
그런데도 달량진성을 포위하고 공격해온 왜구들에 의해 조선군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6천여 명의 왜구들을 물리치기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적보다 열세인 군사 수나 전력이어서 무기력하게도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안에 들어오려고 한 왜구들을 활이나 창과 칼로 대항하며 막았어도 한계가 있었다. 화살은 금세 동이 났을 정도였고 창도 부족한 상태에 이르렀다. 당연 왜구들의 집단 공격에 조선병사들도 다치는 부상자가 속출했고 죽는 사람도 많았다.
성의 전투는 치열했다. 성 위에서는 성 아래 있는 왜구들이 성문으로 못 들어오게 단단히 막았었고 또 성벽을 타고 못 올라오게 온갖 것 장비들을 써서 사투를 벌이며 막아내려 했다. 불덩이를 던져도 몸에 불이 붙여도 꼼짝하나 않고 계속 공격해 온 왜구들의 끈질긴 공격에 그만 조선군에서는 손을 들고 말았다. 성문을 부수고 또 성벽을 타고 들어와 성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쳐 없애며 성문을 열고 들어오는 왜구들에게 그만 잡히거나 죽거나 도망가는 사태가 연출됐다.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전라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는 한온은 죽임을 당했다. 마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월등한 우세에 있는 치밀하게 준비한 왜구들의 전술과 탁월한 전략에는 해볼 재량이 없었으며 힘이 역부족이었다.
두 장수가 왜군한테 무참히 칼에 난도질당하고 병사들 또한 단칼에 쓰러지는 심각한 사태가 되고 하여 겁을 먹은 병사들은 목숨을 건지겠다고 줄행랑을 치고 만다. 일부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을 하며 항복했다.
“걸음아 나 살려라!”
“살려주세요!”
“항복이오!”
벌벌 떨며 눈물을 흘리고 사정을 하거나 아예 자결을 하거나 그도 못해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는 등의 왜구들에 의해 성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결국 성 주인이 바뀌는 상황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왜구들은 기세가 당당한 채로 다음 성을 공략하기 위해 전세를 가다듬고 전력의 힘을 키운다.
“왜군들은 들으십시오!”
“우리가 달량진성을 차지했습니다.”
“우리의 단칼에 조선군 장수들은 죽었습니다.”
하니 왜구들은 기립하며
“만세! 만세! 일본 만세!”
하며 승리의 기쁨의 함성을 질러 됐다.
달량진성을 함락시킨 위용(威容), 전라도 지역의 조선군사 주력부대를 무너뜨린 왜구들은 전세는 기울어졌다는 등의 그들의 행동은 더 거칠어졌고 당당해졌다. 왜구들은 거침이 없었다. 해안을 점령하여 손아귀에 넣은 왜구들은 이젠 내륙을 향해 진격태세를 갖추며 전세를 가다듬었다.
왜장은 또 다시 왜군들에게
기(旗)와 칼을 높이 들고서
“이보쇼!”
“달량진성은 우리의 것이 됐지만 다른 성도 우리의 손아귀에 넣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선 땅에 들어온 이유가 약탈입니다.”
“그러하오니 군량비도 비축을 할 겸 모조리 있는 곡식은 다 빼앗으십시오!”
“몰수해야합니다.”
“그리고 집들은 다 불태우십시오!”
“말 안든 사람은 다 죽이십시오!”
하자 왜구의 병사들은 상기된 얼굴로 왜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하며 쥐던 칼과 창을 높이 들고
“네! 원수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따라 저들을 모조리 없애겠습니다.”
하며 돌격 앞으로 하며 강진성, 해남성, 장흥성 등 각 성으로 향해 진격했다.
내륙을 본격적으로 노략질을 하려고 왜구들은 인간의 탈이 아닌 짐승의 탈을 쓰고 민가마다 쳐들어가 마구 닥치는 대로 행했다. 노략질만 하지는 않았다. 백성들을 잡아 죽이거나 끌고 가거나 심지어 성적 수치심 유발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의 만행에 치를 떨었으며 잔뜩 겁에 질렀다. 무시무시한 왜구들에게 관군과 백성들은 무차별적으로 진인하게 처참하게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