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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곤재 행장(鄭困齋行狀)
선생의 성은 정씨(鄭氏)요, 휘(諱)는 개청(介淸), 자는 의백(義伯)이며 본관은 철성(鐵城 고성(固城))이다. 7대조의 휘는 몽송(夢松)인데 고려 말에 벼슬이 영동정(令同正)에 이르렀으나 사건에 관련되어 귀양가 그 후손이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 기슭 대곡동(大谷洞)에 살았다. 아버지의 휘는 세웅(世雄)이며, 어머니는 나씨(羅氏)이니 신라의 상(相) 벼슬인 구영(九英)의 13대손이다. 선생의 성품이 독실하고 뜻을 세움이 견고하였다. 처음에는 세상 사람들이 과거를 보아서 어버이를 기쁘게 함을 보고 과거 공부를 하여 향시에 여러번 합격하였다. 일찍이 사서(四書)를 읽어 정미(精微)한 것을 강구하여 의리있는 것을 깨닫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써 책상을 짊어지고 영주산(瀛州山)의 절로 들어갔다. 절 북쪽의 그윽하고 끊긴 곳에 흙을 쌓아 집을 만들어 홀로 단정하게 앉아 《대학》ㆍ《소학》의 절목과 《중용》ㆍ《논어》ㆍ《맹자》의 여러 책을 차례로 연구하고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을 차례로 따라 읽고, 〈태극도(太極圖)〉의 이기오행(二氣五行)의 오묘한 뜻과 선천ㆍ후천의 수(數)를 정밀히 공부하여 깊은 뜻을 강구하지 않음이 없었고, 《서전》의 기삼백(朞三百)과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주(註)ㆍ주천(周天)의 도수(度數)ㆍ성기(星紀)의 전차(躔次)ㆍ일월의 운행을 정밀히 공부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손으로 계산하면서 마음으로 계획하여 입으로 분별하여도 서로 부합되었다.
〈홍범(洪範)〉의 강일함삼(剛一函三)의 주설(註說)에 분명치 못한 곳이 있으므로 분발하여 밥먹는 것조차도 잊어버리고, 홀로 깊이 생각하고 생각해 알아서 습지에 앉아도 움직이지 아니하니 지렁이의 똥이 옷에 가득하였다. 이런 지 8, 9일만에 비로소 환히 통하니 그 근고(勤苦)하게 공부한 것이 이와 같았다. 《주역》ㆍ《소자율려신서(邵子律呂新書)》ㆍ《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더욱 독실하여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卜筮)ㆍ산수(算數)ㆍ전진(戰陳)의 법과 황왕제패(皇王帝覇)의 도덕공력(道德功力)의 술(術)에 대해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일찍이 거처한 곳이 먼 벽촌이므로 견문이 고루하다고 여겨 서울에 놀러 와서 널리 서적을 구하였다. 또한 서화담(徐花潭 서경덕) 문하에 공부하면서 쉽게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었고 그런 뒤에 오랫동안 의심나던 것이 한결같이 바로 잡혀 닿는 곳마다 밝아 일을 만나면 환하였다. 그 넓고 요약하는 공력이 이와 같았으나, 마음이 겸손하여 아는 체하지 아니하고 곤(困)하게 얻었다 하여 곤재(困齋)라고 별호하였다.
만년에는 무안(務安) 엄담(淹潭)에 살았고, 윤암(輪巖)에 정사(精舍)를 지어 도를 강론하니 배움에 뜻이 있는 원근의 선비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선생이 강의계(講義稧)를 만들고 공부를 가르칠 때 나덕준(羅德峻)ㆍ나덕윤(羅德潤)ㆍ안중묵(安重黙)ㆍ최홍우(崔弘宇)ㆍ나덕원(羅德元)ㆍ송제민(宋濟民)ㆍ나덕현(羅德顯)ㆍ정식(鄭湜)ㆍ유양(柳瀁)의 무리들이 특히 배움을 깊이 받았으며, 먼 곳에서 공부하러 온 사람으로는 남이공(南以恭)과 종실의 화천정(花川正) 이수붕(李壽鵬) 등이 있으며,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선생이 여러 사람들의 자실과 성품에 따라 힘껏 가르쳐서 반드시 귀로 듣고 마음으로 알게 한 후에야 그만두니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라도 점차 성취되었다. 집에 있을 때에는 닭이 울면 낯을 씻고 머리를 빗어 부모의 앞에 나아가 문안하고, 나오면 처자와 종이 차례로 인사하는 등 예법이 엄정하고 집안이 엄숙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죽도 넉넉히 먹지 못했으나 초하루와 보름날마다 반찬을 갖추어 부모를 봉양하고 향당에 처할 때는 존비(尊卑)와 장유의 차례와 경조의 예법을 곡진히 차려 온순하고 간곡한 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따랐고, 또한 《예기》사상례(士喪禮)를 참고하여 적용하였는데 몸을 상하도록 애도한 모습은 사람이 모두 탄복하였다. 관혼의 예법은 시속(時俗)에서는 모두 폐하였는데, 선생은 아들 정민복(鄭敏復)을 위하여 처음으로 고례(古禮)를 행하니 사대부 집안에서 많이 사모하여 본받았다. 선생은 예가 아님에 대하여는 사물(四勿)의 공부에 더욱 힘쓰니 기상이 엄숙하고 방정하여 사람이 바라보면 스스로 공경하고 두려워할 만하나, 말로 응접할 때는 화기(和氣)가 넘쳐났다. 일찍이 태극무(太極舞)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되 모두 순임금과 문왕의 제도를 쓰니 그 길이가 다른 거문고보다 길고 커서 소리가 맑고 장대하였으며 책을 읽고 난 틈에 무릎에 얹어놓고 연주하였다. 또한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청도ㆍ황도ㆍ적도ㆍ백도와 태양 운행의 도수를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집안살이에 있어서는 담박하고 욕심이 없었다. 항상 말하기를, “도를 쌓는 것으로 공부를 삼으며, 재물로써 부를 삼지 않았고, 덕의 성대함으로써 귀함을 삼지 벼슬로써 귀함을 삼지 않고, 인(仁)을 얻음이 영화이지 높은 벼슬이 영화가 아니요, 구차히 이익을 구하는 것이 욕이 되지 곤액은 욕이 아니다.” 하였다. 주자의 글에 “심하다. 사람의 착하지 못함이여, 소가 젊었을 때는 그 힘을 빌리고 늙으면 잡아 먹는구나.”라는 구절에 감탄하여 이후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학문하는 자는 또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는데, 그 요점은 의관을 바르게 하고 안색을 반듯하게 하는 것보다 절실함이 없다고 여겨 위아래의 옷을 자주 빨아 항상 깨끗이 하며, 관ㆍ신ㆍ건ㆍ띠를 매우 단정히 하였다.
선생은 성현(聖賢)을 독실하게 믿어 한가지 잘하는 것으로 명성을 떨치려고 아니하고 항상 원대한 목표에 뜻을 두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주장하였는데 존양하려면 반드시 경(敬)을 주장하고, 행동은 반드시 신독을 주장하여 신독은 기미를 살펴서 천리(天理)에 따라 사람의 인욕을 깨끗하게 하는 데 힘쓰는 것이라 하였다. 실지로 식견이 고명(高明)하였으나 항상 통하지 못한 사람처럼 하고, 조예가 정묘하고 깊어도 진보하지 못한 사람처럼 겸손하고 아름다운 덕이 쌓였으나 스스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쉬지 않고 부지런히 반성하는 공부를 밥먹을 때나 잠잘 때도 게을리 않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 아! 우리 동방에 도학이 전하는 유래가 있으나, 5현(五賢 일두(一蠹)ㆍ한훤(寒暄)ㆍ정암(靜庵)ㆍ회재(晦齋)ㆍ퇴계(退溪)) 뒤에는 이름이 들리는 사람이 없더니, 선생이 남쪽에서 우뚝 일어나 사도(斯道)로써 자임하여 회재ㆍ퇴계 두 선생과 더불어 말과 행실이 서로 드러내셨으니 어찌 맹자의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고도 오히려 일어났다는 호걸이 아니겠는가. 사암(思庵) 박 상국(朴相國 순(淳))ㆍ아계(鵝溪) 이 상국(李相國 산해(山海))ㆍ소재(蘇齋) 노 상국(盧相國 수신(守愼)이 모두 당대의 명현이었는데 선생의 도덕이 순수함을 인정하였으며, 혹은 치도(治道)를 논의하기도 하고 더러는 예문(禮文)을 풀이하며 서신 왕래가 끊이지 아니하였고, 천거하고 부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덕윤(羅德潤) 등이 서울에 가서 사암을 뵙자 사암이, “시골에 교유할 만한 선비가 없으나 오직 정개청만이 도덕이 성취되어 정자ㆍ주자의 정통을 얻었으니 자네가 자주 가서 교유하라.” 하였다.
○ 선조(宣祖)가 동쪽 오랑캐를 걱정하며 일찍이 탑전에서, “만일 왜란이 발생한다면 누가 원수 (元帥)가 될 만한가?” 하고 묻자, 상신(相臣) 박순이, “신의 의견으로는 정개청이 팔도 도원수가 될 만합니다. 신이 그 사람됨을 보니 학행뿐만 아니라 인물과 재지가 뛰어나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드물 것 같습니다.” 하였다.
만력(萬曆) 정축년에 선생을 북부 참봉으로 임명하였으나 선생은 사은숙배만 하고 곧 돌아왔으며, 경진년에는 연은전(延恩殿) 참봉에 임명하였으나 역시 사은숙배만 하고 돌아왔다. 신사년에 동몽(童蒙) 교관(敎官)에 임명하고 《이륜행실(二倫行實)》 한 권을 하사하였다.
나덕준(羅德峻) 등이 나주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세우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할 때 선생을 받들어 빈(賓)으로 삼았더니, 목사 유몽정(柳夢井)이 듣고 가서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고례(古禮)의 행함을 오늘날에 다시 보겠으니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땅은 인재의 고장이나, 오직 문장에만 힘쓰니 반드시 선생을 얻어야 선비의 풍속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상소하기를, “신이 정개청이 대안동에서 제자를 모아놓고 예법을 강론하는 성대한 의식을 보니 참으로 사표(師表)에 합당합니다. 본주 고을 훈도로 임명하여 여러 선비의 모범이 되게 하시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특별히 이를 허락하였으니 그해가 임오년이다. 선생이 재삼 사양하였지만 임금이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지못해 부임하였다.
유생을 모으고 알성(謁聖)의 예를 행하는데 제자를 동ㆍ서재(東西齋)로 나누어두고 새벽에 선생이 의관을 갖추고 명륜당에 앉으면 여러 유생이 당(堂) 아래에 열지어 서서 선생에게 읍하고 나서는 또 동재ㆍ서재의 제자들이 서로 마주보고 읍한 뒤에 책을 잡고 당에 올라 재배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성현의 경전부터 《성리대전》ㆍ《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에 이르고 간간이 《가례》ㆍ《의례(儀禮)》ㆍ《예기》를 가르치는데 차례가 있으니, 일 년 남짓하여 효제와 예의의 풍속이 고을에서 날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문인이나 재자(才子)들이 문사(文詞)로써 스스로 뽐내던 자들이 다투어 조롱하였는데, 유독 교생 홍천경(洪千璟)이란 자가 자만하여 한번도 향교에 들어오지 아니하거늘 선생이 목사에게 알려서 종아리를 치도록 하였더니 분을 품고 비방하고 욕하게 되었으니, 기축년에 모함을 꾸며낸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곧 사직하고 돌아가려고 하니 사암(思庵)이 듣고 급히 글을 보내 만류하기를, “인심의 타락은 서울과 지방이 모두 그러하여 막연하게 끝이 없으니 민망한 일이로다. 원컨대 참고 머물러서 가르쳐 다른 사람의 말에 개의하지 말라. 모욕은 공자와 맹자도 면치 못하였네. 더구나 지금은 말속(末俗)이 아닌가.” 하니, 선생이 그 뜻을 중히 여겨 사퇴하지 아니하였다가 얼마 뒤에 유 목사가 갈리니 선생도 하직하고 돌아왔다. 계미년 가을에 학봉(鶴峯) 김 선생이 목사로 와서 예로써 간절히 하던 일을 끝맺어주기를 청하였지만 선생이 굳이 사양하고 다시 나가지 않았다. 갑신년에 사옹원의 참봉을, 을유년에는 소격서 참봉과 또 교정낭청을 제수하였고, 병술년에는 전생서 주부로 천거되었으나 숙배만 하고 돌아왔다. 정해년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임금의 덕(德)을 진술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하교하기를, “늙은 어버이가 있어 봉직하지 못한다고 들었으니 가까운 고을의 수령을 제수하라.” 하였다. 곡성 현감을 제수하니 무자년 2월에 부임하여 농상(農桑)을 권하며 민력(民力)을 기르고 은혜와 예로써 백성을 다스리니 한 달 사이에 고을 안이 크게 다스려져 백성이 부모같이 여겼다. 얼마 지난 뒤 부모 공양을 위해 관직에 오래 있을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려 하니, 고을 백성 남녀 수천 명이 선생의 아버지에게 말하여 돌아가는 것을 만류하도록 부탁하였으나, 선생의 아버지는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백성이 물러가지 않고 찾아오는 자는 날로 더하여 마을에다 수용하지 못하여 집안이 모자라 들판에 막을 치고 청을 들어줄 때까지 물러나지 않으므로 밥 짓는 연기가 들을 가득 덮었으며 길에서 보는 자가 감탄치 않음이 없었다. 선생의 아버지가 백성들의 마음에 감격하여 한 달 남짓 머물다 돌아오게 하였으니, 관직에 있은 지 전후 8개월이었다. 그 거사비(去思碑)에 이르기를, “소부와 두모가 되니 떠나간 뒤에 더욱 생각하네.” 하였다. 이해 가을에 상소문을 올리고, 기축년에 또 상소문을 올려 군덕(君德)을 개진하였다. 정철(鄭澈)이 호남에 있을 때 주색에 미쳐 날뛰며 예법을 멸시하니 구속을 싫어하고 방자함을 즐기는 자가 모두 휩쓸려 본받으니, 선생은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주색처럼 빠지기 쉬운 것이 없는데 정철이 후배를 이것으로 유인하여 습속이 무너져 장차 구하기 힘들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 하였다. 선생이 또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읽다가 34권의 ‘자위안연장(子謂顔淵章)’과 25장의 절의(節義)를 논한 대목에 이르러 감분하여 그 말을 인용하여 한 논설을 지었는데 그 이름을〈동한절의 진송청담 소상부동설(東漢節義晉宋淸談所尙不同說)〉이라 하였다. 그 서설이 《우득록(愚得錄)》에 실려 있으며 이는 대개 성현이 논한 내용을 밝혀 저술하여 참다운 절의로써 당시 습속의 폐단을 바르게 고치고자 하였는데 정철이 깊은 원한을 갖고 중상하고자 하여 사암을 보고 심한 험담을 하게 하였으나 사암은 묵묵히 불응하였다. 그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의백(鄭義伯)은 실지로 몸소 행함이 진실하여 정자ㆍ주자 뒤의 인물이다. 나와 같이 높은 벼슬에 추천할 뜻이 있으나, 공경(公卿) 중에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어 기어코 방해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정철을 가리켜 하는 말이었다.
그때 정여립(鄭汝立)이 거짓 학문과 문장에 능한 것으로 온 세상을 다 속이니,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 중 이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속았다. 역시 선생도 교정낭청의 동료로 서로 면식이 있었다.
기축년 겨울에 정여립의 옥사로 선비들에게 그 화가 미치게 되자 진사 정암수(丁巖壽) 동복(同福) 사람임 가 명류들을 배척하라는 정철의 꾀임을 받아 정철과 의논을 같이하지 않은 자를 모두 역당이라 하였는데 선생의 이름도 그 가운데 들었다. “정여립과 더불어 사사로이 사특한 글을 주고 받았다.” 하고, 또, “일찍이 배절의(排節義)의 설을 지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선생이 지은 논설에 거짓으로 배(排)라는 글자를 더하여 죄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임금이 무고임을 알고, “정암수 등이 국가 역적의 변란을 틈타 모함하는 술책을 감행하여 형적도 없는 말을 날조하여 간사한 상소를 올려 어진 재상ㆍ뛰어난 관원들을 지적하여 배척하지 않음이 없어서 반드시 나라를 텅 비우고야 말려고 하니, 이것은 반드시 간인(奸人)의 사주를 받은 것이니 체포하여 추국하여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라.”라고 전교를 의금부에 내리고, 정암수 이하 10인 정암수ㆍ박천연(朴千挻)ㆍ박대붕(朴大鵬)ㆍ임윤성(任尹聖)ㆍ김승서(金承緖)ㆍ양산룡(梁山龍)ㆍ이경남(李慶男)ㆍ김응회(金應會)ㆍ유사경(柳思卿)ㆍ유영(柳瑛) 을 모두 잡아들이니 대간이 입계하고 태학생 조기서(曺麒瑞)ㆍ이연귀(李延龜) 등이 또한 상소하여, “언로를 막음은 옳지 않다.” 하였으니, 그 당시의 일을 알 만하다. 임금이 국문하지 말라 하여 상소문 중의 일을 다시 묻지 않았다. 경인년 여름에 조정에서 다시 각 고을에 분부하여 역적과 서로 친한 사람을 수색하라 하였는데 이는 대개 의도한 뜻이 있었다. 나주 유생 90여 인이 모여서 의논하고 본 고을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보고하였으나 얼마 후에 정여릉(鄭如陵)이 자기 삼촌의 원한을 보복하고자 하여 홍천경(洪千璟) 및 품관 유발(柳潑)과 더불어 목사 윤우신(尹又新)에게, “역적의 무리들이 우리 고을 내에 있으니 지금 적발하지 아니하면 뒤에 반드시 죄가 있을 것이다.” 위협하였다.
윤우신이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정개청에게 배운 고을 사람 조봉서(趙鳳瑞)가 그를 따라서 정여립의 집에 가서 집터를 보아주었다.” 하고, 감사에게 보고하니 선생과 조봉서가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날 밤에 심한 서리가 내려 나주 함평 등지의 지붕이 모두 희어졌고 아침에는 대추같은 우박이 내리더니 3, 4일만에 그쳤다.
선생이 의금부에 나가 죄상을 진술하는데, 정정당당하니 임금이 위관(委官)에게 “의논하여 알려라.” 하였다. 그때 정철이 위관이었는데, “집터를 봐준 일을 한결같이 억울하다고 하여 정여릉과 사실의 증거를 열거하고자 하니 불실한듯하고 절의(節義)를 배척한다는 논설을 지어 후배들을 현혹하니 그가 끼친 폐해는 홍수와 맹수보다 심합니다. 형벌을 가하여 실상을 알도록 청합니다.” 하여 마침내 한번 장형(杖刑)을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그가 이미 절의를 배척하였으니 반드시 절의와 상반된 일을 좋아할 것입니다. 절의에 상반되는 일은 어떤 일이겠습니까. 형을 더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님이, “법률대로 시행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처음에는 위원(渭原)으로 정배하였다가 다시 경원(慶源) 아산보(阿山堡)로 정하였다. 선생은 6월에 유배지에 도착하였는데, 상처가 병이 되어 7월 27일에 별세하였다.
그때에 나덕명(羅德明)ㆍ나덕준(羅德峻)ㆍ나덕윤(羅德潤) 삼형제도 함께 화를 입어 먼저 북쪽으로 귀양을 갔었는데, 선생이 지나다가 서로 만났다. 조금도 탄식하는 말이 없고 다만 《주역》을 강론할 것만 약속하였다가 선생이 죽으니 나덕윤 등이 지성으로 염습하였다. 아산 만호 정문립(鄭文立)이 말하기를, “선생이 비록 귀양살이로 죽었으나 속인의 죽음과는 다르니 만일 돌보아주지 아니하면 뒤에 공론이 있으리라.” 하고, 정성을 다하여 빈소의 재물을 마련하여 상여를 메고 올 때에 병사(兵使)가 부의를 후히 하고 수레끄는 말 두 필을 주어 보냈다.
역적에 대한 법이 엄하게 시행되었지만 무인(武人)도 오히려 화가 미침을 꺼리지 아니하였으니 덕이 사람을 이처럼 감화하였다. 선생의 아들 정민복(鄭敏復)이 그해 겨울에 달려가 통곡하고 임진년 정월에 관을 받들고 돌아오다가 영평(永平)에 이르니 때는 이미 4월이라, 왜구가 길을 막아 정민복이 영동으로 돌아 연풍(延豐)에 장례하였다. 8월에 진안 현감 정식(鄭湜)이 정민복에게 자금을 주어 무안(務安)으로 봉환하였는데, 나덕순(羅德循)은 산을 잡아주고 나덕준ㆍ나덕윤ㆍ나덕현ㆍ나덕원ㆍ안중묵(安重黙) 등이 의논하여 마침내 현(縣)의 남쪽 도산(道山)의 북쪽에 안장하였다.
아! 슬프도다. 선생이 시골에서 일어났으나, 행실은 한 세상에 높았다. 세상의 도를 만회하는 것이 평소의 뜻이기에 일찍이 말하기를, “시대는 옛날과 지금이 있어도 인성(人性)은 본래 옛날과 지금이 없으니 잘 인도하면 선비의 습속을 바꿀 수 있을 것이요, 가르치면 예의도 행할 수 있을 것이나, 한스러운 것은 입지가 확실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고, 또 스스로 경계하기를, “송 나라의 정자ㆍ주자는 몸소 인의를 행하였으나 포부는 시세로 인하여 펴지 못했으니, 당세에 구차히 타협하여 여러 소인들의 수모를 꾀할 줄 어찌 몰랐으리오. 많은 위태로운 행실이 법도에 맞아 낙당(洛黨)이라 배척받고 위학(僞學)이라 지목받아 죽을 고비에 빠지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후회하지 않은 것은 그 도(道)를 본 것이 밝고 도를 믿는 것이 독실하기 때문이다.
대개 심신(心身)과 동정(動靜)이 본래 안팎의 다름이 없는 것이니 어찌 밖으로 법도를 손상시켜 남에게 타협하면서 안으로 인의를 온전히 하여 그 정도를 지키는 자가 있으리오.” 하였다. 선생이 평생토록 세운 뜻이 대개 이러하였으니 마땅히 말세에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화천정(花川正)은 선생이 잡히던 날 목욕 재계하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의관을 정제하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밖에 서서 밤을 새우니 그 제자 권흔(權昕)이 극력 간언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부음을 듣고는 3년 동안 상복을 입었고 손님을 맞을 때는 술과 고기를 마련하여 대접하였으나 자기는 먹지 아니하였다.
선생이 모함을 당하던 처음에 유생 배명(裵蓂)무안 사람 등이 상소문을 봉하여 억울하고 원통함을 변석하였고 선생이 죽은 후에는 제자들이 말하기를, “사우(師友) 사이에 지극히 억울함이 있으면 의리상 반드시 신원해야 한다.” 하고 나덕준과 나덕윤이 먼저 대궐문 앞에서 부르짖었으며 을미ㆍ기해년 두 상소가 있다 안중묵이 이어서 상소하니 계묘년 상소가 있다 선조께서 비답하기를, “너희들의 말이 지극하다.” 하시고, 을미년 상소에 답하여 “정개청은 당초에 역적으로 지목해서 국문한 것은 아니다.” 하셨고, 기해년 상소에 답하다 서애(西崖) 유선생 성룡(成龍) 은 아뢰기를, “정개청은 호남의 인물 중 제일 이름이 있고 평생에 학술과 행실로 자임하였는데 우연히 한 편지의 저술로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였고 을미년에 다시 올림 심희수(沈喜壽)ㆍ송언신(宋言愼)이 아뢰기를,
“정개청의 억울한 실상은 설명하여 잘 밝혔으니 스승에 대해 제자들이 호소한 것이라 하여 그냥 놓아둘 일이 아닙니다.”
하였고, 계묘년에 다시 올림 임금은 방금 기축 옥사에 관련된 여러 사람의 일에 난색을 표하여 신설하는 일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선조 때에는 조수홍(曺守弘)화순사람ㆍ나덕명(羅德明)ㆍ오익창(吳益昌)무장사람ㆍ양극린(梁克遴)ㆍ최홍우(崔弘宇)의 무리, 금상(今上) 광해(光海) 때에는 나덕윤(羅德潤)ㆍ나덕원(羅德元)ㆍ나덕현(羅德顯)ㆍ강봉람(姜鳳覽)ㆍ나원길(羅元吉)나주 사람 의 무리로, 이루 다 기록하기도 어려운 많은 사람들이 모두 기축년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선생의 일을 지극히 말하였고 삼사가 함께 일어나고 대신이 협의한 것까지도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ㆍ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ㆍ한음(漢陰) 어덕형(李德馨)ㆍ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ㆍ청평(淸平) 한응인(韓應寅) 모두 억울함을 풀어주게 하니 인심이 더욱 격렬하고 공론이 크게 진동함을 보겠다. 그후 벼슬아치들이 모두 선생같은 이는 사당을 세워야 한다고 하여 도신(道臣)에게 알리니 마침내 병진년에 윤암(輪巖) 옛 집터에 사당을 세웠다.
선생이 쓴 책은 《수수기(隨手記)》 9권과 《우득록(愚得錄)》3권이 있었는데, 옥사 때에 금오랑(金吾郞)이 뒤져서 바치니 임금이 보시고 이르기를, “정개청은 옛 서적을 읽은 사람이다.” 하시고, 본현에 명령하여 본집에 되돌려주라고 하였으나, 현의 관리가 잘못 전하여 잃어버리고, 《우득록》만 다행히 잃지 아니하여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아! 애석한 일이로다.
오! 하늘이 특별히 선생을 내신 것은 하고자 함이 있어서 내신 것이니 만약 당세에 선생의 학술을 시행하게 되었던들 옛 도를 회복하고 지극한 다스림을 일으킴이 무엇이 어려웠겠는가. 위로 간신에게 미움 받고 아래로 불선(不善)한 자들에게 모함을 받아서 학술을 널리 펴지 못하고, 억울함을 품고 죽어서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길이 무궁한 애통을 지니게 하였으니 천도(天道)를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도다.
선생의 아우 대청(大淸)의 자는 의중(義中)이요, 호(號)는 관재(寬齋)니 선조 때에 학생으로 순릉(順陵) 참봉을 제수받았다. 태어난 자질이 아름답고 선생의 올바른 학문에 많이 배웠으니, 관재가 선생에게 친족으로 말하면 형제요, 의리로 말하면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그래서 선생의 비명을 비통히 여겨 상복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은 지 14년이었고 계묘년에 이르러 말라 죽었다.
임종에 그 아들 정민흥(鄭敏興)을 불러 타이르기를, “형님이 도를 지키다가 억울함을 품고 죽었는데, 내가 이를 풀어주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은 뒤 제사에는 절대로 어육을 쓰지 말라.” 하였다. 조정에서 듣고 불쌍히 여겨 정민흥을 등용하였다. 처음에는 형조 낭관 후에는 송화 현감(松禾縣監) 선생의 제자들이 서로 모여 말하기를, “관재가 선생의 도를 잇고 선생을 위해 순사하였으니 선생 묘에 배향함이 마땅하다.” 하니, 모두 옳게 여겨 드디어 배향하였다. 선생에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민복(敏復)이라 하고, 서자 두 사람은 민행(敏行)과 민덕(敏德)이다. 민복이 또한 두 아들이 있으니 진업(振業)ㆍ창업(昌業)이다. 선생이 가정(嘉靖) 기축년에 탄생하고 만력(萬曆) 경인년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2세이었다.
[주D-001]소부와 …… 되니 : 소신신(召信臣)과 두시(杜詩)라는 사람이 백성들을 잘 다스려 남양(南陽) 사람들이 ‘소부(召父)’ ‘두모(杜母)’라고 일컬었다. 소신신은 전한(前漢)시대 인물이며, 두시는 후한(後漢)시대 인물이다
鄭困齋行狀
先生姓鄭氏。諱介淸。字義伯。其先鐵城 今固城 人。七代祖諱夢松。仕麗末。官至令同正。以事貶。世居羅州錦城山下大谷洞。考諱世雄。母羅氏。新羅相九英之十三世孫也。先生天資篤實。立志堅確。初見世之人以科第悅親。學擧業。連中鄕解額。嘗讀四書。講究精微。知義理之所在。惕然覺悟。遂專意學問。負笈往棲于瀛洲山寺。寺北索絶幽處。築土爲室。兀然端坐。大小學節目庸語孟諸書次第硏窮。心經近思錄循序讀誦。至於太極圖二氣五行之妙。先後天之數。無微不討。無奧不賾。而書傳朞三百。璿璣玉衡註。周天度數。星紀躔次。日月運行。無不精究。籌之於手。畫之於心。辨之於口。若合符契。適於洪範綱一函三之說。有所未瑩。發憤忘食。沈思默會。塊坐濕地而不動。至有蚯蚓之矢滿衣。若是者八九日。然後乃始渙釋。其勤苦攻業類如是。若至易學及邵子律呂新書。皇極經世書。用功益篤。而天文地理。醫藥卜筮。算數戰陳之法。皇王帝霸。道德功力之術。靡不歷究。嘗以所居遐僻聞見孤陋。乃遊京師。廣求書籍。又從遊徐花潭 敬德 門下。得有異聞。然後平生疑難。一皆歸正。觸處洞然。遇事廓如也。其博約之功如此。而其心謙抑。不自爲能。謂己困而得之。自號困齋。晩年卜居於務安之淹潭。築精舍于輪巖而講道焉。遠近志學之士雲集。先生乃結爲講義稧。立約束。以時課其所學。如羅德峻羅德潤安重默崔弘宇羅德元宋濟民羅德顯鄭湜柳瀁之徒。最被親炙。其自遠而來。則有南以恭及宗室花川正壽鵬等。餘不可殫擧。先生因諸生資稟。盡其敎導之方。諄諄勉勉。必使盈耳充腹而後已。雖甚昏庸者。漸至成就之域。其處家也。鷄鳴盥櫛。就省親庭。旣退。妻子婢僕以次相謁。禮法嚴正。門庭肅肅。家貧屢空。饘粥不贍。而每於朔望。必具膳以享親。其處鄕也。尊卑長幼之序。問訊慶弔之禮。無不曲當。溫諄款厚之誠。感動人心。其執喪也。式遵朱文公家禮。參用禮記士喪禮。柴毀哀戚之容。人皆稱歎。至於冠婚之禮。時俗專廢。而先生爲其子敏復始行古禮。士大夫家多慕效之。先生於非禮上。尤加四勿之工。氣像嚴凝方正。望之可畏。人自敬憚。而及至言語接應。則和氣藹然。嘗做太極舞以敎門人。制桐爲琴。皆用舜文王制度。長大異於諸琴。其聲淸壯。講讀之暇。引置膝上。鏗然鼓之。又作渾天儀。靑黃赤白之道。晷刻淹速之度。不差尺寸。其於產業。淡然無欲。嘗曰。道積爲富。不以財爲富。德盛爲貴。不以位爲貴。得仁爲榮。軒冕非榮。苟利爲辱。困厄非辱。嘗於朱子書。甚矣人之無行也。壯而食其力。老而屠之之語。感嘆不已。遂絶黃肉。又以爲學者莫先於正心修身。而其要莫切於正衣冠尊瞻視。其上下衣服。循環澣濯。常使潔淨。冠屨巾紳。亦極整飭。先生篤信聖賢。不欲以一善成名。常以遠大自期。治心則必主存養。存養則必主持敬。行己則必主謹獨。謹獨則必察危微。務在存天理凈人欲。實見高明。而常若未透。造詣精深。而常若未進。德美蘊畜。而不自表現。乾乾夕惕之工。食息不怠。嗚呼吾東方道學之傳。有自來矣。而五賢之後。尙無聞焉。先生能崛起南服。慨然以斯道自任與晦齋退溪兩先生。其立言行事。頗相發明。豈非猶興之豪傑乎。思菴朴相國 淳 鵝溪李相國 山海 蘇齋盧相國 守愼。 皆一代名賢。而許先生以道德之粹。或論難治道。或辨釋禮文。書簡聯翩。薦辟亦不一。羅德潤等入洛見思庵。思庵語之曰。鄕無可從遊之士。惟鄭介淸道成德立。得程朱嫡傳。爾其亟往從之。○宣祖以東夷爲憂。常於榻前謂曰。苟有倭亂。誰可爲元帥者。相臣朴淳對曰。以臣愚見鄭介淸可爲八道都元帥矣。臣觀其爲人。不但學行。其人物才智。鮮有出其右者云。萬曆丁丑。除先生爲北部參奉。先生肅拜卽還。庚辰除延恩殿參奉。亦如之。辛巳除童蒙敎官。上賜二倫行實一卷。羅德浚等立書齋于羅州之大安洞。設鄕飮酒禮。奉先生爲尊賓。牧使柳侯夢鼎聞而往觀之。歎曰。府禮之行。乃復見於今日。豈非盛事也。此士人才之府庫。而唯詞華以爲務。須得先生可以變士風。遂封疏曰。臣見鄭介淸。會徒於大安。講禮盛儀。眞可合師表。請授本州訓導。爲多士矜式。上特允之。卽壬午年也。先生再三辭不許。不獲已强赴任。聚儒生行謁聖禮。分置東西齋。每黎明。先生具冠帶坐明倫堂。諸生列立堂下。揖先生畢。又東西相分揖。執冊升堂。再拜承敎。自聖經賢傳。以至性理大全心經近思錄。間以家禮儀禮禮記。莫不各有次第。行之歲餘。孝悌禮儀之風。日長於鄕黨之間。而文人才子以詞華自高者。爭嘲戯之。校生有洪千璟者。自驕矜。一不入校。先生告牧伯施楚罰。遂致含忿詬辱。己丑構捏。蓋萌於此矣。先生仍欲辭歸。思庵聞之。亟貽書勸留曰。人心汚下。中外皆然。浩無津涯。是可悶也。願勉留敎誨。毋以人言爲介。侮辱之來。孔孟所不免。況今末俗頹波耶。先生重其意不果。未幾柳侯遞。先生遂辭歸。癸未秋。鶴峯金先生 誠一 來代之。以禮敦請願卒其業。先生牢辭不復至。甲申除司饔院參奉。乙酉除昭格署參奉。又除校正郞廳。丙戌以公薦陞典牲署主簿。皆肅拜卽還。丁亥上萬言疏陳君德。上嘉之。敎曰。曾聞有老親。以此不得供職云。隣近邑守令除授。遂除谷城縣監。戊子二月之官。勸課農桑。愛養民力。率土民以恩禮。旬月間境內大治。民愛之如父母。未幾先生以色養久曠。欲棄歸。縣民男女數千。提携來告于先生之父。以祈其勿歸。先生之父不頷肯。民不肯去。其來者日增。村舍不足容。迤及原野。結草爲幕。以得請爲限。炊㸑之煙。蔽截長郊。道路觀者莫不興嘆。先生之父。感激民情。命留月餘乃還。在官凡八閱月矣。其去思碑曰。爲召爲杜。去後益思。是年秋進疏。己丑又疏。皆開陳君德。鄭澈之在湖南也。猖狂酒色。凌蔑禮法。惡拘檢樂放肆者。靡然效之。先生喟然嘆曰。人之易沈溺。莫如酒色。鄭以此誘引後進。習俗壞敗。將不可捄。豈不惜哉。先生又嘗讀朱子語類。至三十四卷子謂顏淵章。及二十五章論節義處。有所感憤。採其語遂著一說。名之曰東漢節義。晉宋淸談所尙不同說。其序說備在愚得錄。蓋欲著明聖賢所論。眞節義以矯時俗習尙之弊者也。澈深蓄憾怨。思有以中之。見思庵肆然極毀之。思庵默然不應。其後語人曰。鄭義伯眞踐實履。程朱後一人。吾有同升諸公之意。而公鄕中有不說者。恐不能禁。蓋謂澈也。時鄭汝立以僞學能文。厚誣一世。搢紳間名人淑士皆被其欺。先生亦偶同校正郞廳得識面。及己丑冬。汝立獄起。禍延士類。進士丁巖壽 同福人 受澈頤指斥名流。與澈異議者。皆以爲黨逆。先生之名亦在其中。有曰與汝立壎篪邪說。曰嘗著排節義一說。蓋於先生所著說。僞加排字。欲以成案者也。上知其誣。傳曰。丁巖壽等。爲乘國家逆賊之變。敢肆構陷之術。捏造無形之言。陰陳邪譎之疏。賢相名卿無不指斥。必欲空國而後已。此必聽奸人指嗾。拿來推鞫按律定罪事。下義禁府。巖壽以下十人 丁岩壽朴千挺朴大鵬任尹聖金承緖梁山龍李慶男金應會柳思卿柳瑛 幷被拿。臺諫入啓。太學生曺麒瑞李廷龜等。亦上疏以爲。不宜蔽言路。當時之事。足可想矣。上命勿鞫。疏中事更無所問。庚寅夏。朝廷又分付各邑。搜問與逆賊相切人。蓋意有所在也。羅州儒生九十餘人齊會。以本州無人回報矣。俄而鄭如陵思報其叔之怨。與千璟及品官柳潑。劫牧使尹又新曰。逆賊門徒在此境內。今不摘發。後必有罪。又新畏之。乃以爲州人趙鳳瑞學于鄭介淸。從往汝立家觀基。狀于方伯。於是先生與趙鳳瑞。同就州獄。是日嚴霜夜隕。羅州咸平等地。屋瓦皆白。朝則雨雹大如棗。三四日乃止。先生詣禁府。供辭剴切。上下委官議啓。時澈爲委官。曰觀基之事。一向稱冤。至欲與鄭如陵憑閱。似爲不實。而嘗作排節義一說。眩惑後進。其流之害。甚於洪水猛獸。請刑推得情。遂杖一次。又啓曰。渠旣以節義爲排。則必好與節義相背之事。與節義相背之事何事耶。請加刑。上特令照律。初配渭源。澈又改定慶源阿山堡。先生以六月到配所。因傷致疾。以七月二十七日卒。時羅德明德峻德潤三兄弟同被禍。已先北謫。先生路過其次。相見小無嗟咄聲。只以講周易爲約。及先生卒。德潤等實襲斂之。阿山萬戶鄭文立曰。先生雖竄死。異於凡喪。苟不顧護。必有後議。殯斂之資。極盡其誠。其舁柩還。兵使亦厚賻給二馬以駄。逆律方嚴。而武人猶不憚禍及。德之感人如此夫。先生子敏復。始以其年冬奔哭。壬辰正月。方奉櫬歸至永平。時已四月矣。倭寇塞路。敏復道嶺東。權葬於延豐。其八月鄭湜倅鎭安。資敏復奉還務安。羅德循占葬山。羅德峻德潤德顯羅德元安重默等議葬事。遂葬于縣南道山之北。嗚呼先生起自草莽。行高一世。挽回世道。乃其素志。嘗曰。時雖有古今。而人性本無古今。導之則士習可變。敎之則禮義可行。所恨立志未確耳。又嘗自警曰。宋朝程朱夫子。躬行仁義。志屈時勢。豈不知苟容當世以避群侮。然而危行中矩。至於斥以洛黨。指以僞學。濱於死地而不悔者。以其見道明而信道篤也。蓋身心動靜。本無內外之殊。豈有外損規矩以容說於人。而內全仁義以守其正者乎。先生之平生樹立。大抵類此。宜乎難免於叔世矣。花川正於先生被繫之日。沐浴祈天。衣冠露立。終夕達朝。其門生權昕極諫不聽。及聞訃。服喪三年。對客則權設酒肉而不食。先生被誣之初。儒生裴蓂 務安人 等封大疏。辨釋冤枉。先生貶死之後。則門徒等以爲師友間至冤義不可不伸。羅德峻德潤首先叫闔。 有乙未己亥兩疏 安重默繼之。 有癸卯疏 宣祖之批曰。爾等之論至矣。 答乙未疏 曰鄭介淸初非指爲逆賊而鞫之。 答己亥疏 西崖柳先生 成龍 之啓曰。介淸則於胡南人中。尤有名稱。平生以學術行檢自任。而因偶然一篇著論。以至滅身。乙未回啓 沈喜壽宋言愼之啓曰。鄭介淸冤抑之狀。申卞甚悉。不可以師生間所訟而置之。 癸卯回啓 上方持難於己丑諸人。以此事不施行。其他在宣祖世。則有曺守弘 和順人 羅德明吳益昌 茂長人 梁克遴崔弘宇之徒。在今上光海 朝則有羅德潤羅德元羅德顯姜鳳覽羅元吉 羅州人 之徒。不可盡記。皆疏辨己丑冤濫。必極言先生事。以至三司俱發大臣協議。 梧里李元翼白沙李恒福漢陰李德馨一松沈喜壽淸平韓應寅 一皆伸釋。人心之愈激。公論之大振。可見矣。其後章甫之流。皆以爲先生不可不饗。進告于道臣。遂以丙辰歲。立祠于輪岩舊居之址。先生所著書有隨手記九卷愚得錄三卷。當獄事時。金吾郞搜括以入。上覽之曰。此讀古書人也。命下縣邸給本家。隨手記邸吏誤傳失之。愚得錄幸不失。至今保有。嗚呼惜哉。噫天之篤生先生。宜若有爲。使之展布於當世。則復古道興至治何難。而上而見惡於權奸。下而見構於互鄕。學術未伸。含冤以終。使士林長抱無窮之痛。天道信難諶也。先生弟大淸字義仲。號寬齋。宣祖朝。以學行除順陵參奉。天資之美殆於先生學問之正得之。先生於先生。親則兄弟。義則師生也。痛先生非命。遂爲之服喪辟肉十四年。至癸卯。枯悴自盡。臨終戒其子敏興曰。兄守道含冤。而我不能雪。我死後祭祀。絶不用魚肉。朝廷聞而悲之。收用敏興。 初授刑曹郞官後除松禾縣監 先生門人相聚而言曰。寬齋紹先生道。殉先生以死。宜乎先生廟配。僉曰可遂配焉。先生有子一人曰敏復。庶子二人曰敏行敏德。敏復有二子曰振業昌業。先生生于嘉靖己丑。卒于萬曆庚寅壽六十有二。
정곤재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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