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7강 -2(2009.11.02)
14-25 無依道人(무의도인) 大徳(대덕)아 山僧(산승)이 説向外無法(설향외무법)하면 學人不會(학인불회)하고 便即向裏作解(변즉향리작해)하야 便即倚壁坐(변즉의벽좌)하며 舌拄上齶(설주상악)하고 湛然不動(담연부동)하야 取此爲是祖門佛法也(취차위시조문불법야)하나니 大錯(대착)이로다 是儞若取不動清淨境(시이약취부동청정경)하야 爲是(위시)면 儞即認他無明爲郎主(이즉인타무명위랑주)라 古人云(고인운), 湛湛黒暗深坑(담담흑암심갱)이 寔可怖畏(실가포외)라하니 此之是也(차지시야)니라 儞若認他動者是(이약인타동자시)면 一切草木(일체초목)이 皆解動(개해동)하니 應可是道也(응가시도야)니라 所以動者是風大(소이동자시풍대)요 不動者是地大(부동자시지대)니 動與不動(동여부동)이 倶無自性(구무자성)이니라 儞若向動處捉他(이약향동처착타)하면 他向不動處立(타향부동처립)하고 儞若向不動處捉他(이약향부동처착타)하면 他向動處立(타향동처립)하나니 譬如潜泉魚(비여잠천어)가 鼓波而自躍(고파이자약) 大徳(대덕)아 動與不動(동여부동)은 是二種境(시이종경)이니 還是無依道人(환시무의도인)은 用動用不動(용동용부동)하나니라 그 다음에 무의도인이라고 했어요. 의지할 依 자입니다, 의지함이 없는 도인. 또 옷 衣 자로 써서 옷 없는 도인 그런 표현도 써요. 왜냐, 우리가 경전을 통해서 아니면 법문을 통해서 이리 저리 알고 있는 것이 전부 하나의 옷이 되니까. 나를 포장하고 있는 하나의 옷이 되기 때문에 또 그 상식과 그 지식에 그냥 의지하니까. 그런데 진정 우리 자신은 무슨 지식도 아니요 상식도 아니요 누구의, 성인의 가르침도 아니라. 어디에 의지할 것도 아니여, 불조에게도 의지할 게 아니다. 그런 주체성을 표현한 말이 무의도인, 이런 표현을 합니다. 또 무의진인, 같은 뜻이죠. 大徳(대덕)아 山僧(산승)이 説向外無法(설향외무법)하면, 늘 말하기를 밖을 향해 서 법이 없다, 밖엔 아무 법이 없다 라고 했는데도. 學人不會(학인불회)야, 학인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곧 반대로 向裏作解(향리작해)라 속을 향해서 알음알이를 또 지어. 그리고 便即倚壁坐(변즉의벽좌), 벽을 의지하고 앉아있다, 곧바로 벽을 의지하고 앉아있다. 중국 선방은 전부 벽을 의지하고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전부 벽을 보고 대개 앉고 특별히 용맹정진할 때나 벽을 의지하지마는 중국 선방은 항상, 선방에 가보니까 그렇데요 보니까. 전부 방 중심을 향해서 이렇게 앉아요. 중간에 앉는 법도 없고 죽 이제 돌아 가에로만 가장자리로만 그렇게 좌선대를 만들어 놨죠. 중심에는 텅 비어놓고 거기서 포행할 수 있도록. 내려와서 포행하기 좋도록. 포행을 좌선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겼어요, 보면. 그 구조가 그렇습니다. 의벽좌란 것도 꼭 다 의벽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면벽도 있습니다마는 여기는 표현이 벽을 의지하고 앉아 있다. 그리고 舌拄上齶(설주상악)하고, 혀는 입천장에 딱 대고, 湛然不動(담연부동)이라, 고요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取此爲是祖門佛法(취차위시조문불법)이다, 그러면서 이것을 취해서 그 모습을 가지고 조사문중의 불법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거에요. 그냥 무조건 탁 앉아가지고 이게 묵조선을 은연 중에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죠. 거기 뭔가 깨달음이 있어야지 덮어놓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은 그건 또 문제가 되는 거죠. 사실은 송나라때 대혜스님이 간화선을 아주 크게 주창을 했는데 그러기 전에 선방에서의 어떤 수행은 바로 이런 데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좌선을 하긴 했어요, 가만히 앉아서 좌선을 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화두를 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어떤 무슨 속으로 생각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이제 오로지 앉는 것, 只管打坐(지관타좌)라고 해 가지고 오로지 앉는 것을 중심으로 하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앉는 것을 가지고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않았는데 간혹, 앉아서 공부를 주로 하다 보니까 앉는데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는 거야. 그러다 나중에 송나라때 내려와가지고는 그저 앉는 데만 매달리니까, 앉는게 법은 아닌데 행주좌와 중에서 어쩔 수 없이 단체생활을 하면은 앉아야 정리가 되고 앉아야 질서가 잡히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관리하는 데는 앉히는 게 우선이라고요. 세워놓으면 그거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또 서 있기는 힘들고. 그러니까 한 사찰에서 사람들이 많으면 앉아서 수행하도록 된 거라, 자연스럽게. 부처님도 뭐 앉아서 명상했듯이. 그런데 그것만 앉는 것만 위주로 일변도로 나가니까 대혜스님은 끊임없이 그걸 비방한 거요. 아주 사정없이 외도라고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뭐 외도 중의 상외도라고 이렇게 비방을 하면서 화두를 들어라, 그리고 行住坐臥 語默動靜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까짓것 앉는게 꼭 중요한 게 아니니까 화두만 챙겨라 라고 이렇게 가르치기 시작한 거죠. 그럼 그 전에는 그전에는 역시 사실은 앉아서 공부를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앉는다고 하는 이 사실에 치우친 건 아니고. 그래서 간화선 이전에는 묵조선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사실은. 그러나 형식은 묵조선이야. 형식은 묵조선이지만 묵조선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요. 그럼 뭐라고 앉아 있어라 뭐 어떻게 해라 이것이 없어. 그냥 그야말로 임제스님에 의하면은 자기의 관심사가 그냥 그게 굳이 화두라면 화두고 명상이라면 명상이고 정진이라면 정진이야. 그러니까 임제스님 같은 경우는 무엇이 진정한 불법일까 이거죠. 화두 중에도 그런 화두는 없어요. 화두1700 공안에도. 무엇이 진정한 불법일까 하는 것은 교리상의 용어라 사실은 그거는. 교리상의 용어지마는 진정한 불법을 알고 싶은 그 마음은 지금 말하자면 간화선에서 하듯이 하는 그런 형식으로 의식이 흘러간 거죠. 뭐 대강 말씀드리면은 그런 것이 됩니다. 이것이 불법이라고 생각하는데 大錯(대착)이로다, 앉아있는 것이 그게 불법이 아니다 말여. 조문불법이 아니다 크게 잘못됐다. 이것은 그대들이 만약 不動清淨境(부동청정경)을 취해서, 움직이지 아니한 깨끗한 마음 상태, 그게 清淨境이죠. 그것을 옳은 것이다, 좋은 것이다 라고 삼을 것 같으면(爲是(위시)) 그대는 곧 저 無明(무명)을 오인해가지고 어진 주인(郎主(양주))으로 삼는 것이다. 무명을 오인해서 본심으로 삼는 것이다, 郎主 라고 하는 건 옳은 주인, 주인을 삼는 것이다 라는 것은 본심을 삼는다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무명이 본심은 아닌데 그걸 이제 오인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건 이제 예컨대 古人(고인)이 말하기를, 湛湛黒暗深坑(담담흑암심갱)이, 맑고 맑으면서 그리고 캄캄해. 캄캄한 깊은 구렁텅이야. 우리의 의식이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사량분별도 없는 상태에서 가만히 그렇게 있으면은 그것이 말하자면 담담흑암심갱이다 이렇게 보는 거야. 그래서 대혜스님이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가지고 새로운 공부 방법을 만들어낸 것이 문제를 생각하라, 그걸 이제 화두를 생각하라, 네가 알 수 없는 그런 이치를 하나 생각을 해봐라, 이래서 화두가 개발이 된 거죠 그 때부터. 그냥 앉아있으면은 湛湛深坑이 되버려요, 黒暗深坑, 캄캄한 깊은 구렁텅이가 되는 거라. 寔可怖畏(실가포외)라, 실로 가히 두렵고 두려운 일이다 라고 하니 此之是也(차지시야)다, 이것을 바로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의 공부인들의 폐해를 이야기한 겁니다. 그런데 정말 수준이 높고 근기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공부를 아주 잘 할 수 있죠. 아무 뭐 방법이 없잖아요. 뭘 생각하라 한다든지 외우라 한다든지 그런 게 아무 것도 없는 거야. 그냥 앉아 있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지어가는데 이게 하근기한테는 크게 문제가 되니까 그래서 대혜스님이 그렇게 하느니 하나의 문제를 떠올려서 그것을 참구하라, 그것을 의심해 들어가라, 의심해 들어가라. 이렇게 그 근기에 맞춰서 개발한 화두법, 참 그거는 아주 잘 만든 거에요, 사실은. 그래서 정신을 또록또록 차리게, 캄캄한데 빠져있지 말고 정신을 또록또록 차리게 만드는 거지, 惺惺寂寂(성성적적)하게 만드는 거죠. 그런 관계로 이어지기까지의 선방에서 공부하는 것을 여기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認他動者是(인타동자시)하면, 저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좋은 경계라고 하니까 여기는 이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자리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죠. 저 움직이는 것을 오인해서 좋은 것이라고 여긴다면은 그러면 一切草木(일체초목)이 皆解動(개해동)이라, 다 움직일 줄 안다 이거요. 일체초목도 바람 불면 다 움직이니까. 아 그것도 움직일 줄 아니까 應可是道也(응가시도야)니라, 응당히 가히 이것도 다 도가 아니냐. 초목도 다 움직일 줄 아니까 그것도 도가 아니냐. 所以(소이)로 動者(동자)는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은 이 風大(풍대)요, 그 다음에 不動者(부동자)는 是地大(시지대)니, 움직이기 않는 것은 지대니. 動與不動(동여부동)이,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 倶無自性(구무자성)이라, 다 자성이 없다. 그러니까 일체초목이나 지대나 땅이나 이것은 전부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向動處捉他(향동처착타)하면, 움직이는 곳을 향해가지고서 거기에서 그것을 잡으면, 그랬어요. 그것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주인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不動處(부동처)를 向(향)해서 서고, 움직이지 아니하는 곳에 가있다 이겁니다. 또 반대로 그대가 만약 不動處(부동처)를 향해서 捉他(착타), 그것을 잡으면 그 주인공을 그것을 이제 붙들려고 하면은 그것은 이미 또 動處(동처)에 가서 서있다, 向動處立(향동처립)하나니. 비유컨대 潜泉魚(잠천어)가 물에 잠겨 있는 고기가 波鼓而自躍(파고이자약)이라, 물결을 따라서 타고 스스로 뛰는 거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비유할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을. 참 이게 당시 공부 방법을 엿볼 수가 있는데 아주 어려워요. 아주 구체적으로 뭐라고 탁 어떻게 한다 어떻게 한다 하지를 않고 잘못 하는 것만 여기서 지적을 해 놨습니다. 大徳(대덕)이여 動與不動(동여부동)은 是二種境(시이종경)이니,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다 두 가지 경계다, 양변이다 이거죠. 우리의 주인공은 마음자리는 양변에 치우친 것이 아니죠. 움직이는 것도 마음이요 움직이지 않는 것도 마음이라. 그러면 움직이는 것에나 움직이지 않는 것에 치우치면 이건 이제 우리 마음자리를 제대로 못 보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 無依道人, 여기 의지할 依 자, 의지함이 없는 도인 했잖아요. 그래서 還是無依道人(환시무의도인)은, 또한 이 무의도인,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를 들어서 有無에도 의지하지 않지마는 부처나 보살이나 조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니까, 用動用不動(용동용부동)하나니라, 그러면서 그것을 다 조화롭게 수용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動도 쓰고 不動도 쓴다, 쓴다는 말은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거죠.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은 고요할 수도 있고 또 어떤 경계 따라서 인식분별하고 작용할 수도 있어요. 본래는 작용하지 않는 그런 상태인 것 같지마는 그러나 작용이 늘 있어요. 우리 마음은. 그 마음 실체를 우리가 알려면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말도 사실은 우리 마음을 이해하는 그런 하나의 길로도 충분히 그게 이해가 되는 것이 비유 들면은 그런 거에요, 우리 마음의 실체, 여기 동과 부동을 이야기했으니까. 물은 어떤 형태든지 물이 움직이든지 어디에 담겨있든지 그 물결이라고 합시다, 하여튼 물은 물결을 떠나있지 않다는 겁니다. 不動하는 것은 물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動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물결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곧 움직이는 것이 곧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고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곧 움직이는 마음이라. 물을 떠나서 물결이 없고 물결 떠나서 물이 없어요. 물결과 물은 다른 것이면서도 또 하나야. 하나면서 다른 것이고. 그래 여기서 동과 부동을 이야기했는데 여기에 하나의 공부 방법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를 들어서 임제스님 당시 소위 화두가 생기기 전, 그렇다고 묵조도 아니고 말하자면은 바로 우리의 본심을 간파해 들어가는데, 간파해 들어가는데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뭐라고 설명하면은 그게 병이 돼 버리니까 이렇게 하고 마는 거여, 이야기가. 그러니까 동도 부동도 다 우리 마음이다, 또 그렇게 설명은 하진 않았단 말여, 이건 내가 설명하는 거니까 그렇지. 그래서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게 결국 한마음 상태인데 그렇다고 움직이는 것이다 라고 해도 안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해도 안되는 거여. 물과 물결의 관계입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 마음은 비유를 하자면 물과 물결의 관계다, 지금 사량분별하고 말 듣고 뭐 이렇게 견문각지하는 그것이 곧 진심이야, 사실은. 그런데 그것만 진심이다 라고 이해하면 안되는 거지. 진심은 또 그런 사량분별하고 견문각지하는 것 이전에 있어요 이전에 또. 물결 이전에 물이 있어요 또. 이게 설명으로 다 될 수 있는 건 아닌데 설명을 하자면 그렇게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은 공부 끝이거든요. 여기 늘 무의진인 이야기를 하니까. 이 대목은 그 당시 공부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표현한 거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14-26 三種根器(삼종근기) 如諸方學人來(여제방학인래)하면 山僧此間(산승차간)은 作三種根器斷(작삼종근기단)이라 如中下根器來(여중하근기래)하면 我便奪其境而不除其法(아변탈기경이부제기법)하고 或中上根器來(혹중상근기래)하면 我便境法(아변경법)을 倶奪(구탈)하고 如上上根器來(여상상근기래)하면 我便境法人(아변경법인)을 倶不奪(구불탈)하고 如有出格見解人來(여유출격견해인래)하면 山僧此間(산승차간)은 便全體作用(변전체작용)하야 不歴根器(불역근기)니라 大徳(대덕)아 到這裏(도자리)하야 學人著力處(학인착력처)니라 不通風(불통풍)하며 石火電光(석화전광)도 即過了也(즉과요야)니라 學人(학인)이 若眼定動(약안정동)하면 即沒交渉(즉몰교섭)이니 擬心即差(의심즉차)요 動念即乖(동념즉괴)라 有人解者(유인해자)면 不離目前(불리목전)이니라 大徳(대덕)아 爾檐鉢嚢屎檐子(이담발낭시담자)하고 傍家走(방가주)하야 求佛求法(구불구법)하니 即今與麼馳求底(즉금여마치구저)를 爾還識渠麼(이환식거마)아 活撥撥地(활발발지)하야 秖是勿根株(지시물근주)라 擁不聚(옹불취)하며 撥不散(발불산)하야 求著即轉遠(구착즉전원)이니 不求(불구)면 還在目前(환재목전)하야 靈音屬耳(영음속이)어니 若人不信(약인불신)하면 徒勞百年(도로백년)이니라 그 다음 이제 삼종근기. 여기 사실 삼종근기를 말하고 그 다음에 그 삼종근기에서 더 초월한 근기 그것을 또 소개하고 있어요. 如諸方學人來(여제방학인래)하면, 예컨대 제방에서 학인이 오면은, 山僧(산승)의 此間(차간)에는 三種(삼종) 根器(근기)로서 판단을 짓는다 그랬어요. 예컨대 中下根器(중하근기), 중근기나 하근기가 올 것 같으면은 나는 곧 그 경계를 빼앗고 그 법은 제하지 않는다.(我便奪其境而不除其法(아변탈기경이부제기법)) 빼앗지 않는다 이렇게 보아도 좋아요, 제하지 않는다. 경계를 부정하고 법은 부정하지 않는다 놔둔다 이런 뜻이 되고. 그 다음에 或中上根器(혹중상근기), 중상근기가 오는 것을... 그러니까 근기도 딱 잘라서 말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앞에는 중하라고 했고 여긴 중상이라 했고 그렇습니다. 중근기는 밑으로도 갈수가 있고 위로도 갈수가 있고 그렇죠. 그러니까 이렇게 표현한 게 이게 맞아요, 사실은. 딱 잘라서 그게 꼭 중근기다 뭐 하근기다 그렇게 말할 순 없으니까요. 중상근기가 올 거 같으면은 我便境法(아변경법) 倶奪(구탈)이라, 경계와 법을 함께 빼앗아버리고. 만약에 上上根器(상상근기)가 올 거 같으면 나는 곧 경계와 법과 人, 여기는 인까지 다 포함이 됩니다. 인을 함께 빼앗지 않는다.(我便境法人(아변경법인) 倶不奪(구불탈)). 그리고 만약에 出格見解人(출격견해인)이 올 거 같으면은, 요건 이제 네 번째죠. 출격견해인이 올 거 같으면은 山僧此間(산승차간)은 便全體作用(변전체작용)한다.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갔을 때 황벽스님은 전체작용했다, 다짜고짜로 두들겨 팼거든, 이십 방망이. 그게 이제 그대로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의진인이 됐든지 뭐 마음이 됐든지 불성이 됐든지 진여작용이 됐든지 아니면 깨달음의 경계가 됐든지 간에 황벽스님의 불법은 그렇게 그 사람에게 죽어라고 후두둘겨 패는 것으로서 다 보여준 거에요. 한마디로 한순간에 팔만대장경을 다 보여준거라, 부처님이 49년간 설하신 것을 방망이 20방 후려친 것으로서 다 보여준 거야. 이게 전체작용이야. 그러니까 그 법을 그대로 이어받았거든요,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의 그 법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니까 산승의 차간에는, 산승이 사는 여기에는 곧 전체작용한다. 그래 不歴根器(불역근기)야, 뭐 상근기다 하근기다, 이게 예를 들어서 통하면 통하고 뭐 모르면 그뿐이고. 근기를 지나지 않는다 하는 것은 근기를 감안하지 않고 근기에서 뛰어난다, 이런 표현이죠. 그래서 선지식이 평생을 통해서 혹 하나를 건지거나 뭐 반 개를 건지거나 뭐 건지게 되면 건지고 말게 되면 만다 이거요. 일생을 통해서 사람 하나 건지면 뭐 그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일생 자기의 사업을 마친 걸로 그렇게 본다 하는 표현들이 조사 어록에는 간혹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선에서는 그게 어떻게 보면은 너무 대중성이 없고 또 그러면서 아주 고준한, 예를 들어서 뭐 글쎄요 한 수십 만명 중에 한 두 사람 될까 말까한 그런 어떤 라인을 설정을 해놓고 거기에 올라서는 사람은 인정을 하고 그렇지 아니한 사람은 인정을 못하는 그런 입장으로 이야기되고 있어요. 여기도 보면은 예를 들어서 임제스님이 가서 얻어 맞았을 때 사실은 그땐 몰랐거든요, 모르고 대우스님한테 가서 비로소 눈을 뜨게 됐지 않습니까. 임제스님도 황벽스님한테 맞을 때는 몰랐다고요. 한번 거쳐서 대우스님한테 가서 눈을 떴지. 그러니까 우리가 전통선을 계승해서 우리 조계종이 형성이 돼 있지마는 이해는 하고 넘어가야 된다고. 그래서 대승불교의 아주 폭넓은 그런 불교 세계하고는 이게 영, 뭐라고 할까, 다른 세계죠. 몇 명이나 거기 해당되는가. 몇 명이나 정말 그 설정해 놓은 경계에 합격점을 받는가 하는 것, 이 시대는 참 그게 문제예요. 옛날에는 그래도 저기 아주 아주 옛날에는 간혹 그런 사람들이 만 명에 한 사람, 십만 명에 한두 사람 있었을지 모르는데 그 이후에는 정말 전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사실은. 그런 수준에 도달한 사람은.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꼭 불교라고, 그 수준에 꼭 도달해야만 불교라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그건 선불교의 세계에서 하는 소리고 대승불교에서는 그런 차원이 아니죠. 그거를 우리가 알긴 알아야 되는 거에요. 너도 나도 최고 경지, 그걸 가서 태극기 하나 있는데 그거 하나 잡겠다고 우리가 모두 그쪽을 향해서 가고 있죠 대개. 참선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그걸 향해 가고 있는 거야. 그 성철스님 같은 이는 국민 선사라고 추앙받지마는 당신이 그런 것을 전통 선법에 의해서 그대로 오매일여를 통과한 뒤에 말하자면 큰 깨달음을 얻어야 다시 말해서 靜中一如, 앉아서 좌선할 때 한결같이 화두가 되어야 되고 그 다음 動靜一如, 일을 하나 앉아서 좌선하나 대인 접화를 이야기하나 어떤 일을 하든지 역시 한결같이 화두가 돼야 되고 그 다음에 夢中一如, 꿈 속에서도 한결같이 화두가 돼야 되고 그리고 거기서 또 한 단계 올라가면 이제 푹 깊이 잠들었을 때하고 아주 곤해 가지고 깊이 잠들었을 때도 역시 화두가 한결같이 돼야 되는 그런 경지까지 설정을 해 놨거든요. 이론적으론 그렇게 설정을 해 놨어. 하지만 누구 하나 그 경계에 도달한 사람은 없어. 그래서 성철스님도 당신 이론은 그렇게 척 해놨지만은 당신도 못 깨달았다고 분명히 책에도 이야기해 놨으니까. 그걸 가지고 그전에. 자기가 설정해놓은 그 경계에 도달한 사람은 없고 자기도 어림도 없고… 그게 큰 문제인 거여. 경계를 그렇게 설정할 일이 아닌 거여 그게. 그거는 하나의 골동품으로 지금 남는 거여. 그것만 가지고 불교라고 주장하면은 골동품으로 남는다고 이게.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한 시간 좌선을 정말 신심을 내 가지고 정말 아무 생각없이 신심을 내 가지고 거기 매진할 때도 한 시간 동안 좌선하면은 화두를 여러 수십 번 놓쳤다가 수십 번 다시 들고 하는데 그런 정신 가지고 언제 一如가 되겠어요? 앉아서 좌선만 할 때도 그런데 일어나서 일하고 밥먹고 무슨 딴 사람들하고 말하고 할 때 무슨 화두가 되겠어요? 그래서 요즘 선방에서 월암스님은 일어날 때 화두 좌복 밑에다 넣어놓고 일어나고 실컨 돌아다니다가 와서 좌복에 앉으면 그때서 화두 좌복 밑에서 꺼내서 이제 화두 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거든요. 저기 벽송선원에서. 그러니까 수좌들이 사실은 사실인데 그 소리 듣기 싫은 거야. 사실이거든 그게. 그런데 그 소리가 듣기 싫으니까 싫어한다고요 그 스님, 바른 말만 한다고 싫어하는 수좌들이 또 싫어하는 거야. 우리는 경전을 보고 강의하는 자리니까 아무 이야기 다 해도 아무 상관없어요, 여기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일이니까 냉정하게 그러한 사실들을 알고는 넘어가자는 거지, 알고는. 정중일여, 그러니까 참선만 한다고 한 시간 용맹정진, 눈을 부릅뜨고 용맹정진해도 한 시간에 수십 번 화두 놓쳤다가 수십 번 화두 다시 들고 하는 그런… 몇 번 화두 드는지 몰라. 그러니까 염화두니 송화두니 하는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야. 안되니까 그저 염불하듯이 외우는 거야. 如何是祖師西來意(여하시조사서래의)닛고. 庭前栢樹子(정전백수자)니라. 여하시조사서래의닛고 정전백수자니라, 속으로 그러는 거야. 그러다가 외우는 것까지도 놓쳐. 놓치고는 망상 따라서 한참 흘러가. 흘러갔다간 정신 차리고 다시 돌아오고. 그런 세월만 계속 몇 년이고 보내는 거요. 그게 이제 불교라고 생각을 해 가지고 참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이 선에서는 그 경계를 높이 잡아놨어요. 경계를 너무 높이 잡아놓고 아무도 이르러가지 못하는 경계에다가 딱 선을 그어 놓고는 거기에 이르러 가야 된다 라고만 말하지 아무도 이르러 가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돼 있어요. 불교를 다시 신대승불교, 새로운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야 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바로 그 점입니다. 사실은 해보니까 정말 신심 가지고 할 때는 어떤 누구도 못해도, 석가모니는 못해도 나는 한다 하는 정도로 하거든요, 용기가. 그렇다고 석가모니가 못해도 나는 한다 라고 하는 그런 용기를 가지고 하지마는 그런 용기로도 안되거든 이게. 되는 일이 아냐. 너무 선을 높이 잡아놨어. 그래서 이런 문제를 우리가 지금도 저기서 백양사에서 뭐 깨달음에 대해서 야단법석을 가을에 십일월달 몇일 이후에 또 다시 연다고 오느라 가느라 하는데 이야기해봐야 그게 달리 없는 이야기죠 다. 정직하게 정말 정직하게 우리가 화반탁출해서 깨놓고 이야기를 하고 불교를 재정립을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대승불교가 좋은 불교에요 사실은. 선불교는 아주 특수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고 뭐 몇 만 명 몇 십만 명에서 그저 한 두 사람 턱걸이 할까말까하는 그런 거고 대승불교는 정말 많은 중생에게 바로 이익이 돌아가는 그런 정말 바람직한 불교다, 나는 그런 생각이 근래에는 많이 들어요. 저도 뭐 십 년 이상 용맹정진도 하고. 한 철을 해 본 적도 있어요, 해인사에서. 용맹정진 보통 일주일씩 하지만 우리가 안 태어난 폭 잡고 목숨걸고 한번 하자라고 그때 총림 두번째 겨울철인가 그때 이제 조사전에서 열 명인가 열한 명이 목숨걸고 우리 한 번 하자 해서 한 철을 용맹정진 해 봤어요. 정말 그때 아주 열심히 한다곤 했었죠. 한 철 용맹정진하나 하루 하나 뭐 화두 안되기는 똑같고 계속 그냥 염화두 송화두야, 염화두 송화두. 어쩌다가 순조로우면은 잠깐 깨끗한 정신이 한참 가는가 싶지마는 그래봤자 상당히 시간이 간 거 같은데 불과 몇 분 밖에 안되는 거야. 그건 네 경험이지 딴 사람도 다 그러냐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어요. 딴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있지마는 거기 거기죠 뭐. 그런 것을 성철스님이 당신이 최근에 선문정로라 해 가지고 정확하게 그걸 잡아놨잖아. 이론을 정립을 딱 해 놨다고 그 동안 중언부언하던 별별 이야기를 선문정로라고 하는 것을 탁 해 가지고 寤寐一如라고 하는 그런 단계를 투과를 해야 된다, 통과해야 비로소 된다 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만 해 놨지 당신도 경험 못 하는 거지. 당신도 경험 못 한 거죠. 그러니까 답이 없는 문제만을 내놓고 그것이 최고라고 그렇게 자꾸 말로만 떠들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이런 것들도 이런 자리에 실컨 이야기해도 좋죠, 뭐. 세금내는 것도 아니고요. 大徳(대덕)아 到這裏(도자리)하야는, 이러한 경계에 이르러서는, 전체작용하는, 황벽스님이 임제스님을 후둘겨 패던 그 자리, 전체작용하는 그런 입장에 이르러서는, 學人(학인)이 著力處(착력처)니라, 학인이 거기서 한번 힘을 붙힐 곳이다. 不通風(불통풍)하며, 이것은 바람도 통하지 않는 자리여, 정말 임제스님이 정말 순일무잡한 그런 정신으로 삼년 동안 그렇게 열심히 정진하다가 처음으로 비로소 선지식 앞에 가서 뭔가 물었는데 이십 방망이 후둘겨 팼을 때 거기에 불통풍이여,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도리여. 石火電光(석화전광)도 即過了也(즉과요야)라, 석화전광, 전광석화, 우린 그런 말 하죠. 전광석화도 곧 거기서는 지나가 버리는 곳이다. 거기 닿을 수 없는 곳이다 이런 말이요. 學人(학인)이 若眼定動(약안정동)하면, 학인이 만약에 눈이 조금만 깜빡해도, 이런 말이여. 即沒交渉(즉몰교섭)이다, 교섭이 없다. 擬心即差(의심즉차)요, 마음을 헤아리면은 곧 어긋나고 動念即乖(동념즉괴)라, 생각을 움직이면 곧 어긋난다. 그렇습니다. 전체작용하는 그 순간 거기는 사량분별이 낄 수가 없는 거여. 이러니 저러니 궁리가 안 되는 거라, 바로 직관, 바로 그 순간 사과구나, 보면 사과구나 하는 거, 거기에 무슨 뭐 0.01초의 사량분별이 거기 낄 까닭이 없는 거죠. 有人解者(유인해자)하면은, 아는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이 아는 자라면은 不離目前(불리목전)이니라, 그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야, 바로 눈 앞에서 떠나있지 않다. 바로 눈 앞에 있고 항상 우리가 일상에 가지고 쓰는 그 자리다 이겁니다. 매일 가지고 쓰고 보고 듣고 하는 그 물건이야, 결국은. 불리목전이니라. 이런 말 들으면 금방 알 듯도 해요. 그런데 알고 있는 것이 짐작으로 알고 사량으로 아는 것이지 직관으로 아는 것이 아니니까, 그게 이제 임제스님이 요구하는 바에는 못 미치는 거죠. 大徳(대덕)아 爾檐鉢嚢屎檐子(이담발낭시담자)하고, 그대들이 발낭과 그리고 시담자, 똥짐 이런 말입니다. 똥덩어리, 이 육신을 말하는 거요. 그것을 짊어지고. 그러니까 이 육신 똥덩어리가 바랑을 짊어졌잖아요, 그 모두를 짊어지고, 그 짊어진 사람이 또 따로 있어. 똥덩어리는 바랑를 짊어졌고 또 그 무엇은 그 전체를 두개를 다 짊어졌어. 그러면서 傍家走(방가주)야, 옆집으로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求佛求法(구불구법), 불을 구하고 법을 구하니 即今與麼馳求底(즉금여마치구저)를, 지금 이렇게 그렇게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구하는 그것을 爾還識渠麼(이환식거마), 그대는 또한 그것을 아는가. 그자를 아는가. 구하는 그놈을 아는가. 똥짐 짊어지고 바랑 짊어지고 옆으로 불법 구하려고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구하는 그 놈을 아느냐. 그 놈은 活撥撥地(활발발지)야, 하~ 기가 막히게 활발발, 정말 뭐 한 순간도 그냥 있지 않고 나부대는 그야말로 아주 건강한 고기가 물 속에서 아주 힘차게 헤엄치는 듯한 그런 어떤 그 작용. 그게 우리 다 있잖아요 지금. 秖是勿根株(지시물근주)라, 그것은 다만 뿌리가 없다, 물근주여, 근주가 없다, 뿌리나 줄기가 없어. 擁不聚(옹불취)여, 움켜도 움켜지지가 안해. 또 撥不散(발불산)이여, 헤쳐도 흩어지지가 안해. 그런 물건. 요런 말을 가만히 좀 사량분별 해 봐야 돼. 그래갖고 의식적으로라도 허~ 저 우리 한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맞는 소리야, 참 설명 잘 했어. 이렇게 의식적으로라도 납득이 가는 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여, 그런 걸 해야 돼요. 求著即轉遠(구착즉전원)이니, 그것을 구할려고 하면은 더욱 더 멀어지나니, 不求(불구)일땐 還在目前(환재목전)하야, 오히려 그 놈을, 그 물건을, 그 한 생각, 그 한 물건을 구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으면 차라리 눈 앞에 와 있어. 환재목전일새. 靈音屬耳(영음속이)여, 신령스러운 소리가 귀를 쑤셔. 귀에 와 닿아. 若人不信(약인불신)하면 徒勞百年(도로백년)이니라, 만약에 그 도리 그렇게 우리가 일상에서 잘도 쓰고 있건마는 그것을 만약에 사람들이 믿지 못할 거 같으면은 도로백년이야, 백년동안 한갖 수고롭기만 할 것이다. 이 대목은 참 본문이 아주 시원하고 좋습니다. 그리고 곧 알 듯 하죠? 대덕아 부터, 뭔가 우리는 우리 육신 짊어지고 육신 위에다가 또 바랑 짊어지고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눈 한 번 떠볼려고 하잖아요. 그러면 눈 한번 떠볼려고 한 그 놈을 아느냐 이렇게 물었어요. 이환식거마, 그대는 또한 그놈을 아는가. 그놈은 활발발지라. 아주 뭐 한 순간도 그냥 있지 않고 나부댄다 이 말이여. 아주 건강한 고기가 이리 튀고 저리 튀면서 그냥 자유롭게 헤엄치듯이 그러고 있잖아요, 우리 각자가 다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어디 뿌리 내린 것도 아니고 움켜 쥐어도 모이지도 않고 흩어도 흩어지지도 않고. 구할려고 하면 더욱 멀어져 저만치 가 있고. 오히려 안 구하면 눈 앞에 있어. 이 사실을 믿어야 되고 이 사실에 대한 이해 있어야 되고. 그러면은 사량으로 우리가 의식적으로 사량으로 이 물건에 대해서 깊이 사유하고 이해가 깊어지고 믿음이 깊어지면 그것만으로도 큰 재산입니다, 그것만으로도. 14-27 모두 다 놓아버려라 道流(도류)야 一刹那間(일찰라간)에 便入華藏世界(변입화장세계)하며 入毘盧遮那國土(입비로자나국토)하며 入解脱國土(입해탈국토)하며 入神通國土(입신통국토)하며 入清淨國土(입청정국토)하며 入法界(입법계)하며 入穢入淨(입예입정)하며 入凡入聖(입범입성)하며 入餓鬼畜生(입아귀축생)이나 處處討覓尋(처처토멱심)하야도 皆不見有生有死(개불견유생유사)하고 唯有空名(유유공명)이로다 幻化空花(환화공화)를 不勞把捉(불로파착)이니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 모두 다 놓아버려라. 道流(도류)야 一刹那間(일찰라간)에 便入華藏世界(변입화장세계)하며, 곧 화장세계에 들어가기도 해 한 순간에. 또 毘盧遮那國土(비로자나국토), 법신세계에 들어가기도 해. 또 解脱國土(해탈국토)에 들어가기도 해. 神通國土(신통국토)에도 들어가. 清淨國土(청정국토)에도 들어가고 法界(법계)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데도 들어가고 청정한 데도 들어가고(入穢入淨(입예입정)) 범부가 됐다가 성인도 됐다가 (入凡入聖(입범입성)) 餓鬼畜生(아귀축생)도 됐다가 하지마는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다 하고 있어요 일상속에서. 한 순간에 화장세계, 비로자나국토, 해탈국토, 신통국토, 청정국토, 범부, 성인 뭐 다 심지어 아귀 축생까지도 돼. 하지마는 그것을, 되는데 아무리 그 되는 곳에서 찾아봐야 찾을 수가 없어. 處處討覓尋(처처토멱심), 곳곳에서 찾고 찾고 또 찾아봐도, 찾는다는 글자가 세 가지나 있네. 찾을 토, 찾을 멱, 찾을 심. 찾고 찾고 또 찾아보아도 皆不見有生有死(개불견유생유사)하고, 그것이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을 보지를 못하고. 唯有空名(유유공명)이다, 오직 헛이름만 있을 뿐이다 이거여. 그런데 헛이름이라고 공명이라고 해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야.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너무 크게 있어요. 그야말로 활발발지야,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또 목전이야, 눈 앞에 있다 이거요. 그러면서 또 찾아보면 없는 게 바로 이 도리다. 그래서 이제 幻化空花(환화공화)를 不勞把捉(불로파착)이니, 이건 신심명에서 나온 소리인데 이 물건 하나도, 이 무의진인이라고 하는 이 물건 하나도 환화요 공화야. 환영이고 헛것이고 헛꽃이야. 수고롭게 그것을 잡을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 소득과 손실과 옳고 그른 것을 일시에 다 놓아버려라. 그냥 그 물건 그것이 온 세계에 다, 여기 入 자가 그런 뜻이죠, 온 세계에 다 있다. 있으면서 찾아봐야 거기는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어. 오직 헛이름 뿐이다. 여기는 어떻게 보면은 우리의 일심이 거의 무의진인, 한 물건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돼 있지마는 또 이제 入 이라고 하는 사실, 들 入 자라고 하는 것은 모든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 저런 작용 다 한다는 거죠. 훌륭한 것이 있으면 훌륭한 것 이해하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렇지 않는 것도 이해하고 그런 모든 세계를 다 이해하고 수용하고 거기에 가서 작용하고 그러면서 또 종래에는 텅 비어 없는 것이다 唯有空名이다, 오직 공명만, 텅 빈 이름만 있을 것이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참 설명 정말 잘 했어요, 무의진인이라든지 한마음이라 하든지 진여라 하든지 불성이라 하든지 뭐라고 이름 붙히든지간에 그것은 정말 여기 설명이 두 단락에서 설명을 아주 잘 했습니다. 잠깐 쉬었다 하죠.
첫댓글 得失是非(득실시비)를 一時放却(일시방각)하라...소득과 손실과 옳고 그른 것을 일시에 다 놓아버려라. 고맙습니다. _()()()_
_()()()_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고맙습니다.
動與不動(동여부동)은 是二種境(시이종경)이니ㅡ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두 가지 경계(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禪慧珠보살님. 참으로 고맙습니다. _()()()_
得失是非 를 一時放却 하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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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건(무위진인)하나도 환영이요, 헛것이요, 헛꽃이라 그것을 쉽게 잡을 일이 아니니 소득과 손실과 옳고 그른 것을 일시에 다 놓아버려라...禪慧珠 님! 고맙습니다.. 공부 잘 하고 갑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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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득실시비 일시방각,
알고 있는 것이 짐작으로 알고 사량으로 아는 것이지 직관으로 아는 것이 아니니까, 그게 이제 임제스님이 요구하는 바에는 못 미치는 거죠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어디 뿌리 내린 것도 아니고 움켜 쥐어도 모이지도 않고 흩어도 흩어지지도 않고. 구할려고 하면 더욱 멀어져 저만치 가 있고. 오히려 안 구하면 눈 앞에 있어.爾還識渠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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擁不聚 撥不散 求著即轉遠 不求 還在目前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得失是非 一時放却 ... _()_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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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唯有空名 ... _()_
고맙습니다_()__()__()_
감사합니다.()
寔可怖畏(실가포외-식가포외). 這(자-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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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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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