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나슬루 [Manaslu, 816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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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 북서 120km에 있는 마나슬루 산군의 최고봉이다. 정상에서 플라토가 북서로 뻗다가 북서릉 그리고 서벽과 남서벽으로 갈리는 산릉이 이어지며 서쪽에서 풍기(6533m)에 이른다.
북북서 2km의 일각에서 노스콜, 마나슬루 북봉. 랑캬 피크로 이어지는 북방 능선이 뻗고 북쪽 0.7km 지점에 이스트 피나클(East Pinnacle, 7992m)이 있고 거기서 동릉이 길게 뻗어 부리 간다키까지 이른다. 플라토 북단은 빙벽으로 마나슬루 빙하로 떨어져 빙폭을 형성하고 북동 방향으로 흐른다.
정상에서 남릉이 6750m의 콜(풍기엥 라)을 지나 남쪽 피크(Peak 29)로 이어진다. 남동벽은 풍기엥 빙하로, 남서벽은 츠라기 빙하 원두에 면하고 서벽은 도멘 빙하 발원지다.
산 이름은 「영혼의 나라」라는 뜻이다. 마나슬루의 등로 탐사는 1950년 영국대가 시작하고 52년에는 일본이 나서 56년 초등하는데까지 이르렀다.
한국은 71년부터 76년까지 김정섭 대장의 집념으로 등반을 시도했으나 불운이 계속되어 큰 희생을 겪고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72년 메스너의 단독 등정과 74년 일본여성대의 8000m봉 초등 기록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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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슬루 조난 30주년(등반사) - 일본의 산’ 마나슬루는 국내엔 가장 비극의 산
총 12개팀, 87명 대원이 시도해 6개팀 6명 등정
마나슬루(Manaslu․8163m)는 네팔 히말라야의 중앙에 있는 세계에서 8번째로 높은 산이다. 이 산의 이름은 산스크리스트어로 ‘마음’, ‘정신’이란 뜻의 ‘마나사(Manasa)’에서 유래된 것으로 ‘정신이 깃든 산’이라 풀이할 수 있다.
이 산의 북쪽면 등반시 거치게 되는 마지막 마을인 사마에서는 이 산을 토지의 수호신이 사는 신성한 지역이라 여겨 외부인의 접근을 금기시 해왔다. 그래서 초등을 노린 일본대는 여러 차례에 걸친 현지 주민의 집요한 방해를 받기도 했다. 결국 일본대는 이 마을의 사원 재건비를 내고서야 등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외부인의 접근을 꺼리는 마음은 지금도 남아 있어 이곳을 등반하려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잘 추슬러야 순조롭게 등반을 할 수 있다.
이 산은 일본의 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일본인에게는 많은 영광을 선사한 곳이지만 우리에겐 비운의 산으로 각인된 곳이다. 서구 제국주의 나라들이 서로 경쟁하듯 히말랴야의 고봉들을 초등함으로써 그들의 국력을 자랑했듯이 일본도 2차대전 패전의 국민정서를 히말라야에서 보상받으려 했다. 일본은 거국적인 원정대를 구성해 당시까지 미등으로 남아 있던 마나슬루를 일본의 산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1952년부터 이 산을 세 번이나 등반한 끝에 네 번째 도전인 1956년 5월 9일, 토시오 이마니시와 셀파 갈첸 노르부가 정상에 첫 발자국을 남겼다. 이어 이틀 후엔 다시 두 명의 대원이 재등정에 성공했다. 이 등정으로 셀파 갈첸 노르부는 1955년 프랑스대와 함께 오른 마칼루에 이어 최초로 8천미터급 두 개봉을 초등한 사람이 되었다.
두 개봉 등정은 독일의 헤르만 불이 낭가파르밧(8125m)과 브로드피크(8047m)를 초등했으며, 쿠르트 디엠베르거가 헤르만 불과 함께 브로드피크를 초등한 후 1960년에 다울라기리(8167m)를 초등해 역시 8천미터급 두 개봉 초등자가 되었다.
일본대는 이후에도 1971년 북서릉에 새 루트를 개척했으며 1974년에는 동릉을 통해 여성원정대의 대원 3명이 등정에 성공, 여성 최초의 8천미터봉 등정을 이뤄냈다. 이처럼 일본은 마나슬루를 ‘일본의 산’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족적을 남겼다.
마나슬루의 루트는 초등시 일본이 오른 북동릉과 1971년에 추가한 북서릉, 1972년 오스트리아대의 라인홀트 메스너가 개척한 남벽, 1973년 서독의 슈마츠대가 초등한 동릉, 1981년 프랑스의 뛰어난 등반가였던 피에르 베긴이 개척한 서벽, 1984년 겨울 폴란드의 비엘리키가 오른 남릉, 1986년 폴란드의 쿠쿠츠카가 개척한 북서벽 등 7개의 루트가 개척된 상태다.
2000년 12월 31일까지 등정자 수는 198명이며 사망자 수는 51명이다. 등정자 수로는 8000m 14좌 중 6번째이며 사망자 수로는 5번째로 많다.
**16명의 생명을 앗아간 비극의 산 **
우리나라는 히말라야 등반 초창기인 1971년 김정섭씨가 조직한 7명의 원정대가 첫발을 내딛었다. 이때까지 국내 히말라야 등반은 1962년 경희대학교의 다울라기리 2봉(7751m) 정찰과 1971년 한국산악회의 추렌히말(7371m) 등반이 전부였다.
김정섭씨는 앞의 두 원정에 모두 참여했으며 1971년 마나슬루 원정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원정대를 꾸린 실세였다. 이후 김정섭씨는 1972년 2차 원정과 1976년의 3차 원정에 직접 대장으로 참여해 당시 7차례 꾸려진 히말라야 원정 중 5차례 원정에 관여한 국내 히말라야 원정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3차례의 마나슬루 원정을 통해 두 동생과 많은 대원들을 잃어 좋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많은 한을 남긴 채 히말라야를 떠나 살게 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 세 번의 원정에서 김정섭씨는 개인적으로 4형제와 1명의 매부까지 참가한 그야말로 전 가족이 다 동원된 등반에서 2명의 동생을 잃는 비운을 맛보고 쓸쓸히 히말라야를 떠나고 말았다. 이것은 그 개인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산악계에도 큰 손실이었다.
다음에 이 산을 찾은 팀은 동국대 산악회이다. 이 팀은 1976년부터 세 차례 정찰을 마치고 1980년 봄 이인정 대장을 포함한 7명의 원정대가 네팔로 떠났다. 이 팀은 79년 고려대 산악부의 매킨리 등반에 이어 대학산악부로는 두 번째 원정이었다. 또한 단일팀으로는 처음으로 히말라야 8천미터 봉에 도전한 것이다. 이 팀은 3월 19일에 3800m에 베이스캠프를 건설했다. 한달에 걸쳐 캠프를 올려 4월 22일에는 7500m지점에 설동을 파고 제5캠프를 설치하고 정상공격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다음날 막내인 이종량 대원과 셀파 2명이 정상공격을 하려했으나 강풍과 혹한으로 포기하고 돌아섰다. 이어서 27일 서동환 대원과 셀파 1명이 마지막 캠프를 출발해 정상공격에 나섰으나 역시 강풍으로 포기해야 했다. 이어 다음날 서 대원과 두 명의 셀파가 아침 7시 20분에 마지막 캠프를 출발해 오후 2시경 정상에 도착했다. 그러나 정상등정 후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 하산을 시작한 지 8시간만에 간신히 마지막 캠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동환 대원은 이때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귀국 후 수술까지 받았다.
이로써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세 차례의 원정에서 무려 16명의 생명을 잃으면서도 밟지 못했던 정상의 한을 마침내 풀게 된 것이다. 또한 이 등정은 77년 거국적인 지원을 받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이어 국내 두 번째의 8000m급 등정으로 일개 대학산악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데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이후에는 1983년 허영호씨가 소속된 충북 제천산악회 이름으로 회장과 단 둘이 등반을 떠났다. 허영호씨는 전 해에 마칼루를 등정해 히말라야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히말라야 등반이 꼭 많은 인원이 가야만 되는 게 아니라는 판단 아래 홀로 등반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국내의 히말라야 등반 풍조에서는 아주 혁신적인 일이었다.
이들은 네팔에 도착할 당시 카트만두에 머물러 있던 대구 파라마운트산악회의 손기오씨를 비공식대원으로 합류시켜 원정대는 3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두 명의 셀파와 함께 9월 15일 4800m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이들은 3캠프까지 진출 후 갑작스런 폭설로 인해 한동안 등반을 중단하고 베이스캠프에 인접한 사마마을까지 내려가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10월 17일 다시 베이스캠프로 올라가 5200m에 전진캠프를 설치하고 21일에는 7200m지점에 마지막 캠프를 설치했다.
**국내에선 동국대가 첫 등정에 성공 **
허영호씨는 단독으로 정상을 오르기로 하고 23일 새벽 홀로 정상공격에 나서 3시 30분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허영호씨는 산소도 사용하지 않아 당시까지 히말라야 등반에서는 당연히 산소를 써야 되는 것으로 인식하던 국내 산악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 이로써 허영호씨는 국내 처음으로 8000m 두 개봉 등정자가 됐으며 국내 산악계에 스타로 발돋움하게 됐다.
그런데 허영호씨가 돌아온 후 그가 제시한 사진 때문에 1980년 동국대 산악회의 정상 등정에 의문이 제기됐다. 허영호씨가 정상공격 중 찍은 전위봉이 동국대가 정상이라고 제시한 사진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 동국대 팀이 정상이 아닌 전위봉까지만 오른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문제 제기가 없어 동국대 측에서는 의문 자체를 일축해 오다가 1992년 자체 회지인 <동국산악>에서 1984년 폴란드의 비엘리키 팀이 정상에서 그들이 두고 온 깃발을 가져온 사실이 확인됐다며 그들의 정상 등정에는 추호의 의문이 없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비엘리키는 동국대가 오른 반대편인 남쪽으로 올랐기 때문에 그가 깃발을 가져왔다면 그것은 동국대 팀이 확실히 정상을 등정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이후에는 한동안 등반이 없다가 1992년 조선대 산악회가 다시 이 산을 찾았다. 조선대 산악회는 1972년 원정에서 사망한 오세근 선배의 한을 풀기 위해 이 산을 찾았다. 초기 조선대 산악회를 키워온 오세근씨는 뛰어난 등반력과 산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신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선배이다. 이 등반에는 그의 막내 동생인 오태근씨도 참가했다.
이들은 8월 31일 4800m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6500m의 3캠프까지 순조롭게 진행해 나갔다. 이후 날씨가 나빠져 베이스캠프에 머물다가 9월 23일 이용철 대원과 셀파 1명이 정상공격을 위해 베이스캠프를 출발했다. 24일 3캠프까지 올라간 이들은 새벽 0시 정상을 향해 출발했으며 무려 17시간만인 오후 6시 30분 등정에 성공했다. 이들은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아주 짧은 시간에 정상에 올랐지만 등정 후에는 체력이 소진돼 7900m지점에서 고통스런 비박을 감행해야 했다.
그 뒤로는 8000m 레이스를 펼치는 엄홍길씨가 1996년 가을에 정상을 밟았고, 박영석씨는 1998년 겨울, 등정에 성공했다. 한왕용씨는 1997년부터 4차례의 도전 끝에 2000년 봄, 정상을 밟았다. 이들의 등반은 그들 개인적인 8000m 레이스의 하나씩을 추구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내 마나슬루 등반사를 결산해 보면 총 12개 팀에서 87명의 대원이 등반에 참가해 6개 팀에서 6명의 대원과 6명의 셀파가 정상을 밟았다. 그리고 2개 팀에서 6명의 대원과 10명의 셀파가 목숨을 잃었다.
정상을 등정한 모든 팀에서 대원 한 명씩만 등정하는 결과를 낳았고 4개 팀에서 셀파와 함께 등정했으며 허영호와 한왕용씨는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 구간을 셀파 없이 홀로 등정했다.
이 산은 어려운 부분은 없으나 돌풍이 잘 일어나고 눈사태 지역이 많아 등반 중 항상 사고의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그동안 등반한 팀들의 등반기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팀에서 눈사태와 돌풍을 경험했다고 한다. 마나슬루에는 현재 7개의 루트가 있으며 우리나라의 모든 팀들은 노멀 루트인 북동릉으로만 등반했다.
** 글 유석재 성균관대학교 산악부 출신으로 1991년 가셔브룸 1봉을 등정했다. 1996년 충모강리와 릉보강리를 초등했다. 1997년에는 가셔브룸 2봉을 등정했으며 현재 메리츠 증권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