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별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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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장리 | 고려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 세분의 安胎地가 됨으로 台庄으로 부르고 있으며, 태는 三公을 말하고, 장은 곳을 말함 |
지동리 | 지곡지, 재방지등 마을주변에 池이 많아 못(池)자를 따서 池洞으로 부르고 있음 |
석교리 | 하천건너 지형이 고양이 몸체형이고 고양이가 쥐있는 곳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600년간 돌다리를 놓고 돌다리로만 건너 다니게 한데서 생긴 지명임 |
읍내리 | 순흥면 소재지가 있어 1909년 행정구역 책정시 읍내리라고 칭함 |
내죽리 | 속수 : 순흥, 비봉산 밑에 있는 큰 마을을 내죽1리라고 말한다. 송림동 : 개척 당시 마을 입구에 커다란 솔밭이 있엇던 것이 연유되어 생긴 지명임 |
청구리 | 본래 순흥부 내죽리의 지역으로서 청뚜들 또는 청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옥계리, 여근리를 청구리라 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음 |
배점리 | 조선 선조때 무쇠쟁이 裵純이 국상을 당하자 상복을 입고 소백산 위에 올라가서 삼년동안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통곡망배하여 忠臣정문이 1615년에 내려져서 배충신이라 하고 망배하던 산봉을 국망봉이라 칭하게 되었고 나라에서는 무쇠점을 주었다. 그 연유로 배점이라 부르게 됨 |
덕현리 | 박동수라는 선비가 약 400여년 전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개척당시 옆고개에서 다래와 머루를 얻어 허기를 면했다하여 덕이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덕현리라 칭하게 되었음 |
단산면 지명유래
리별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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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리 東園里 |
본래 순흥부 동원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미리와 오상리 등영리 구구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동원면이 되었는데 그 이름을 동원리라 하였음 |
사천리 沙川里 |
옛날 순흥부 때 沙上이라고 불렀으나, 조선조 때 행정 구역명으로 沙川이라고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구구리 九邱里 |
거북이 모양이라 하여 龜頭들이라 칭하였으며 또한 아홉 언덕에 학이 춤을 추고 놀았는데 그 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지금 구구리 뒷산 舞鶴峰이었다고 한다 |
병산리 屛山里 |
이 동리에서 대I지리로 가는 뒷골의 지형이 병 주둥이가 병목처럼 생기고 병 밑 부분이 큰 마을을 이루고 있어서 흡사 甁과 같아 甁山그후 행정구역 개편시 동리 뒤편에는 좌우로 군자봉과 옥녀봉이 솟아 있으며 앞산이 병풍을 두른 듯 아늑하게 마을을 감써 주고 있어서 屛山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
단곡리 丹谷里 |
한일 합방을 반대하는 의병들이 진을 치고 싸운 곳이라 하여 진막이라고 하였다 한다. |
옥대리 玉帶里 |
산의 능선이 옥띠와 같이 곧게 뻗어 나와 감싸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옥대하고 하였다. |
좌석리 座石里 |
마을 한 중간 논바닥에는 앉은 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옛날 마귀할멈이 소백산에서 반지를 잃었는데 그 반지를 찾아 산을 파 내려가 골짜기가 생기고 땅 속에서 나온 큰 바위가 골짜기를 굴러내려 오다가 자리에 멈추어서 자리잡았다 하여 앉은 바위라고 불러왔다. 이바위를 중심으로 윗마을을 上座石,下座石이라 부르고 있다 |
마락리 馬落里 |
큰 바위로 된 절벽이 있는데 죽령 다음으로 영남과 충북, 강원, 서울 등지로 통하는 주요 통로였다. 상인이 말에 짐을 싣고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광풍으로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게 되었는데 말이 죽지 않았다 하여 말굴이라는 한자어인 마락이라고 하였고, 도 조선시대 금성대군과 단종사이에 왕래하던 밀사가 말에서 떨어진 곳이라 하여 마락이라고 하였다는 설도 있다. |
봉현면 지명유래
리별 | 자연부락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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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1리 | 주치골 | 주치골(朱致谷)-약 400여년 전 조선조 명종때 남사고란 사람이 뒷 산목에 움막을 치고 살았다하며 사고막재 라고 불리운 고개가 있었다 한다. 이 고을에서 생산품으로 두류(豆 類)가 많이 생산되어 두치(豆致),두치(斗致)라고 하였고 질그릇을 칠하는 주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주치(朱致)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재는 주치골로 불리고 있다. |
두산2리 | 소 미 | 소미-구한말 이지역명이 풍기군와룡면우산리(牛山里)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영주군 봉현면 두산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마을 뒷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우산리 즉 소우(牛)자의 “소”자를 따고 뫼산(山)자의 “뫼”자를 따서 “소뫼”라고 부르게 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와전이 되어 “소뫼”가 “소미”로 되었다 한다. |
수용골 | 수용골(水龍谷)-1850년도부터 주민들이 살게 되었으며 모양이 용 같이 생긴 곳에서 물이 솟아 나와 흐른다하여 마을을 수용골이라고 불러 왔다 한다. | |
두산3리 | 홍정골 |
홍정골(洪井谷)-옛날부터 홍정골이란 기러기 홍(鴻)자,머무를 정(停)자로 썼는데 어쩐 일인지 마을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여 고민
했었는데 어떤 무명의 대사에 의하여 마을 이름을 넓을 홍(洪)자 우물 정(井)자로 개명했더니 화재의 빈도가 현저히 줄어졌다 한다. 일 설에 의하면 홍(洪)씨가 바위 밑에서 맑은 물이 나온다는 우물 곁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나막신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한다. 그 사람이 어쩐일인지 5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이 우물에 백일 정성을 들여 생남 하였는데 그 태몽에 용의 꿈을 꾸었다. 그래서 그 바위를 용수암(龍水岩)이라고 하였으며 그 우물에 자신의 성을 따라 홍정(洪井)이라 이름 짓고 마을 이름도 홍정골이라 불러 왔다 한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본 마을 앞에 숲이 있었고 앞들에 철따라 기러기와 학이 이 숲과 들에 날아와 가관을 이루어 홍정골(鴻停谷)이라고 불었다 고도 한다. |
꺼치네 |
꺼치네-홍정골에서 東으로 약 700m 거리에 위치한 마을로서 홍정골 뒷산 마늘봉에서 산 능선이 쭉 길게 뻗어 지경터까지 연하였고
그 야산에 쌓인 외딴 마을이다. 西로는 도솔봉이요 北으로는 소백산 줄기로 내려온 금계바위를 앞으로 보고 있다. 1900년경 봉화 해저에서 이주 해온 의성김씨 창원(昌遠1879-) 호는 도은공(도솔봉下에서 은거하여 살아 간다는 뜻)께서 이마을을 신개척하여 샛터(新基洞)라고 하였으며 이 마을에 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솟는다 하여 거천리(巨泉里 또는 居泉里)라 하였다가 1980년경에 와서 “꺼치네”로 와전되어 좋지 못한 음감이라 하여 이름을 서로 친(親)하고 사랑(愛)하는 뜻으로 살아가고자 거친애(居親愛)라 칭하였다 한다.현재는 꺼치네라고 불리고 있다. | |
지경터 | 지경터(地境터)-주치골과 수용골 방향에서 흘러 내려오는 냇물이 지경터에 이르러 하천 양쪽에 산재해 있는 마을을 지경터라 칭한다.하천을 경계로 서북편은 행정구역산 두산2동에 속하고 하천 동남편은 두산3동에 속한다. 1856년 경에 김해김씨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인근 마을 남원촌(南院村)과 떨어져 경계를 이루는 곳이라 하여 지경터라고 칭하였다 한다. | |
오현1리 | 남 원 | 남원(南院)-남원은 풍기군 당시 행인과 관원들이 유숙하는 국영여인숙(國營旅人宿)이 풍기 남쪽에 위치하여 남원이라 불렀다. |
까치섬 | ||
오현2리 | 엄고개 | 엄고개-오향골 서쪽에 있는 긴 고개 이름이 엄고개인데 그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도 엄고개라 불렀다. 이 마을은 약 700년 전에 都氏라는 선비가 이 곳에 정착하였다고 하며 마을 앞에 있는 동산을 넘어서 마을에 들어온다고 엄고개라 불러 왔다고 한다. |
자갈모래이 | 자갈모래이-오향동 북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로서 자갈이 많고 뒷산에 밤나무가 많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밤수산골, 자갈모래이등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 |
오현3리 | 오향골 | 오향골(梧香谷)-오향골은 오현동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서 모양이 외양간과 같다하여 오향골이라 불렀다 한다. 또 이골은 약 480년전에 梧香寺라는 寺刹이 건립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인하여 없어졌다. 그 후 오향사 절 이름을 따서 오향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현동으로 개칭되었다. |
오현4리 | 뒤밭 | 뒤밭-오현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띠(잔디)가 많이 나는 밭이 많아서 띠밭이라 불리웠다. 옛날 문경과 충주로 왕래 하는 과객을 숙박시키기 위한 마방(馬房)으로 하여금 마을이 형성되고 개척 되었다고 전한다. |
윗뒤밭 | ||
대촌1리 | 와룡골 | 와룡골-용감동이란 산이 있는데 이 산모양이 용이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룡골이라 하였다 와룡골이라 하고 면 이름도 와룡면이라 칭하였는데 마을이 크므로 큰 마을 또는 大村이라 하였다. 마을 한복판에 흐르는 석평천(碩坪川)을 중심으로 북쪽 산기슭 양지쪽을 양지마을, 남쪽을 음지마을이라 하였다.이 마을은 예전에는 땅이 아주 메마른 곳으로 불모지로 내려왔다. 그 때문에 일명 갱변마을이라고도 하고 방아두들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동으로 희나무 고개와 영등 바위가 있고 희나무 고개에는 큰 희나무와 노송이 있어서 희나무 고개라 하였으며 영등 바위에서는 영등 제사를 올렸다고 전하여 온다. |
백부이 | 백부이-백부이는 이곳에 밀이 잘 되어 밀가루를 많이 생산한다 하여 백분 또는 백부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은 아래 백부이는 안정면 생현동으로 편입되고 윗백부이는 봉현면 대촌동에 속하고 있다. | |
대촌2리 | 주성골 | 주성골(珠星谷)- 용이 와룡청수에서 물을 마시고 주성동에서 여의주를 얻은 형상이라 하여 주성동이라 하였다. 다른 설에 의하면 약 340년 전에 광산김씨의 선조인 振鉉이란 사람이 다래 덤불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하면서 주성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대촌2동으로 분동되었다. |
한천리 | 샘골 | 샘골-집집마다 샘이 있어 샘골이라 칭하였다.본래 풍기군 와룡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한동(水寒洞),천동(泉洞),대촌동(大村洞)일부를 병합하여 수한과 천동의 이름을 따서 한천동(寒泉洞)이라 하였다. |
무래이 | 무래이- 한천동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물이 매우 차다하여 물한이라하고 또 무래이라 불러왔다. 마을 위쪽에 위치한 마을을 웃무래이라 부르고 있다. | |
윗무래이 | ||
유전1리 | 주막거리 | 주막거리-진밭 남동쪽에 있는 이 거리 마을은 예로부터 진밭, 버드래이, 짤드매기, 점말로 가는 분기점이며 풍기에서 예천으로 통하는 행인이 많아 객주집 비슷한 주막이 잇어서 주막거리라고 불리어 왔다. 마을에 큰 노송이 있기 때문에 송정골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진밭 | 진밭-옛날부터 마을주위에 진흙밭이 잇어 일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여 진밭(泥田) 또는 이전동(泥田洞)이라 칭하였다 | |
유전2리 | 힛트재 | 힛트재-힛트재라고 이름지어 부르게 된 연대는 미상이나 처음에는 시령(尸嶺)이라 부르던 것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힛트재로 변했다고 한다. 처음의 시령이라 이름 지어진 것은 그 재의 서편에 둥지리 봉이 있고 그 밑에 약물탕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처녀가 그 약물을 먹고 재에 와서 까닭 모르게 죽었다 한다. 그래서 시령이라 이름 짓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현판명을 영왕(靈王)이라 서 붙이고 인근 마을에서 매년 무사고를 빌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 집없는 마을로 수백년이 지나오다가 1900년 초부터 인근에서 한집두집 모여 들기 시작하여 재말, 힛트재말이라 불렀다. |
버드래이 | 버드래이-옛날 버드나무 그늘이 좋아서 유음동(柳陰洞) 또는 버드래미라 칭하였다.버드나무 둘레가 약 10m가량 되며 높이도 약 20m정도 되는 큰 버드나무가 있어 여름의 휴식처가 되었으며 인근 마을의 힘센 장사들이 모여 씨름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 |
짤드매기 | 짤드매기-건너마을에서 보면 마을 바로 뒤에서 달이 뜨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달뜨매기 또는 월현(月峴)이라 불렀던 것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음이 변하여 짤드매기로 불리고 있다. | |
노좌1리 | 노재이 | 노재이-약 800여년전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전하여 오나 개척인물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산 주마산밑에 마부가 살았는데 이 마을 이름이 노자(奴字),자자(者字)로 전해 왔는데 약 250년전 진성이씨 경활이라는선비가 洞名이 상스럽다하여 노자(奴者)를 노좌(魯佐)로 바꾸었다고 한다. 노좌라는 명칭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재이라 하였다. |
노좌2리 | 사리미 | 사리미-고려말 한추월(韓秋月)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개척 당시 뒷산 형세가 “白”자 모양이어서 백산이라 칭하고 마을을 백산동이라 칭하였다. 그후 조선조 말에 김경업(金敬業)이라는 선비가 추월공이 독서를 하였다 하여 사림리(士林里)라 하였다. 현재는 사리미로 불리고 있다. |
새 말 | 새말-사리미 마을에서 디리목 마을로 가는 우측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은 1905년경 입주자가 생기기 시작하여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새말(새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
노좌3리 | 추월당 | 추월당(秋月堂)-조선 중엽 자구산 중턱 다래덩굴을 헤치고 처음 이곳 피난지를 찾아 은거한 사람의 성은 韓이요 호는 秋月 인데 추월당을 짓고 훈학도 하였다는 이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추월선생의 호를 따서 추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다리목 | 다리목-옛날 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자구산과 천부산 골자기에 약초 캐는 사람이 산삼을 캐러 왔다가 마을골 안이 다래기 같이 생겼다고 다래골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으며 또 처음 이골을 개척할 때 많은 다래 숲을 헤치고 개척하여 다래가 많은 골이라하여 다래골(多來村)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으며 마을 앞에 돌다리가 있었다 하여 다리목으로 불린다는 설도 있다. | |
중 말 | 중말-동네를 양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가 있어 전란 때 피난지로서 적합한 곳이라 하여 생긴 마을로서 추월당을 중심으로 해서 산중간이며 상말과 추월당과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중말(중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 |
하촌1리 | 하 촌 | 하촌(下村)-본래 풍기군 노좌면의 지역으로서 옛날 이 마을에 큰 못이 있어 못에 연꽃이 많이 피어 꽃마을이라 하여 화촌(화촌)이라 부르다가 그 후 노좌동에서 볼 때 아래쪽에 있다하여 하촌이라 하였다. |
한 티 | 한티-하촌에서 예천군 하리면 탑리로 넘어가는 한티재 밑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해발 7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기온이 냉하나 산능선을 따라 이 마을에 이르면 땀을 흘린다 하여 한현(汗峴)이라고 하였다 한다. | |
하촌2리 | 배 골 | 배골(梨谷)-마을 뒷산이 고무산인데 중턱에서 양쪽으로 뻗어 내린 도장골에 참배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 하여 배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 배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배골이라고도 한다. |
쟁피밭 | 쟁피밭-제방에 쟁피초가 무성하여 쟁피밭이라 불렸다. | |
새터말 | 새터말-주마산 기슭 서향지의 아늑한 이곳에 약300년 전 새로운 터에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새터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
하촌3리 | 배리들 | 배리들-이 마을의 지형이 벼루처럼 생겼다 하여 벼루들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배리들로 변하였다.봉현면과 감천면의 경계에 있는 지경터와 통틀어 배리들이라고 부른다. |
안정면 지명유래
리별 |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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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리 (新田) |
본래 풍기군 생현면의 지역으로서 새로개척된 마을이므로 새기실 · 샛기실 또는 신전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가 영주가 시로 승격하자 영주군 안정면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는 九老人이 마을앞 언덕위에 서있는 큰 香나무 그늘에 모여서 바둑을 즐기며 詩文을 읊었다고 한다. 이들은 또 마을앞의 들을 개척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하는바 구노인이 농사를 지어서 九億石을 얻었다고 하여 구억들이라고도 칭한다 |
생현리 (生峴) |
본래 풍기군 생현면의 지역이었다. 그위치가 사실고개 밑이 되므로 사실고개 또는 생고개 · 생현리라 하며 이 이름을 따서 조선조 때는 생현면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松洞을 병합하여 생현동이라 하며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
봉암리 (鳳岩) |
본래 풍기군 생현면의 지역이었다. 뒷산에 부엉바위가 있었다 하여 부엉바우 또는 부암 · 봉암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부암동 · 외부암동을 병합하여 봉암동이라 하고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
용산리 (龍山) |
본래 순흥부 대룡산면 대촌리,어은리,도촌리,사계리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4개 법정리를 용산리로 통합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약,섬마,고촌,재실,대촌,사계 등의 6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이 마을은 1400년경 순흥안씨가에서 개척한 이후 1573년경 창원황씨가 취락을 형성했다고 한다. |
여륵리 (汝勒) |
이 마을의 뒷산은 주마산과 용암산이 맞닿은 곳이며 이 두산을 한데 묶어 보면 주마산은 말의 등과 배의 모양이고 용암산은 말의 모리와 굴레의 형상이므로 주마산아래 마을을 배태마을이라 하고 말의 굴레 부분에 위치한 이마을을 여륵리 · 너르기 · 광천 · 사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묵리 (墨) |
한고개 서쪽에 깊은 산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는 깊고 길어서 한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이 때문에 이마을의 이름을 가막골 · 까막골이라고 부른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루모기 · 한고개 · 반지미 · 새마을을 병합하여 묵동이라 한다. |
내줄리 (內茁) |
골이 깊고 풀이 무성해 풀을 베어낸 뒤 마을은 만들었다 하여 내줄동(內茁洞)이라고 한다. 자연부락은 내줄 · 점마을 · 동명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일원리 (逸園) |
본래 풍기군 동촌면의 지역이었으며 딱밭 또는 일언 · 일원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입암동을 병합하여 일원동이라 하고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
안심리 (安心) |
본래 풍기군 동촌면 지역이었다. 안시미 또는 안심 · 안심리라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제동 · 일원동 일부를 병합하여 안심동이라 해서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기름지고 넓은 토지가 있어서 주민이 안심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
옹암리 (瓮岩) |
마을 뒷산에 독바위가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독바우 또는 옹암이라 한다. 본래 풍기군 동촌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안심동 일부를 병합하여 옹암동이라 해서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
단촌리 (丹村) |
백골 · 저술 · 홈다리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래 풍기군 동촌면 단촌리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안정면 동촌리로 개편되었다. |
대평리 (大坪) |
본래 순흥부 대평면의 지역이며 큰들이 있으므로 한들 또는 대평이라 하였다. 조선조 세조3년 순흥부가 폐지되자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홍교동과 단촌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평이라 하고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
오계리 (梧溪) |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전에 개척된 마을이며 개척당시 오동나무가 뒷산에 많으므로 오산이라고 불렀다. 1909년 오산을 오미로, 오미를 다시 오계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
동촌리 (東村) |
본래 풍기군 동촌면의 지역으로서 동촌면사무소가 있으므로 동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합도동 · 아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동촌동이라 해서 영주군 안정면에 편입되었다. |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