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臣曰,自烈宣肅惠,世歷四代,父子相夷,至與之訟于天子之朝,貽笑天下後世,父子,天性之親,孝爲百行之先,而政事之本也,本旣失焉,其他無足觀者,忠肅,晩年,遺棄國事,出舍外郊,信任朴靑等三豎,威福下移,若子若孫,皆罹凶夭,可勝嘆哉。
夏四月,前王,遣三司右尹金永煦,如元獻畫佛。○前王,下申靑獄,靑,古名松,嘗入元,爲瀋王暠從者,得幸,及大行王之求復位也,館於瀋邸,靑由是得進,以前散員,拜護軍,累遷上護軍,及王,倦于勤,靑,假威用事,略無忌憚,與,朴靑,李靑,齊名,時號三靑,大行王,每言前王過失,其從臣前大護軍曹益淸,前代言尹桓,謀去前王所狎惡小輩,以前上護軍吳子淳,前大護軍洪瑞,與靑善,遣二人圖之,時,靑爲巡軍千戶,稱奉旨,執其惡小之尤者,宋八郞,洪莊等囚之,栲掠甚嚴,前王,欲其疏放,屢召靑不至,前王憾之,至是,令權省,洪彬,枷靑于理問所,命耆老永嘉府院君權溥等,具疏靑所犯,告行省,行省,錄其書,授金永煦,轉呈中書省。○五月,前王,私置寶興庫。○辛酉地震。○前王,淫其舅三司左使洪戎繼室黃氏,黃氏,萬戶元吉之女也,有姿色,戎,常閉之閨房,雖親戚,不許相見,戎,卒,內豎崔和尙,譽其美,王,夜至其家私焉,賜黃氏金銀器,綵帛十匹,苧布百匹,米豆各百碩。○前王,烝庶母壽妃權氏,前王,若聞人妻妾有姿色,則無問親戚貴賤,使嬖幸群小往奪之,或至其家,荒亂無度。○前王,聞宦者劉成妻印氏,美,率丘天佑,康允忠,幸其家,命成進酒,旣而成白王曰,殿下,明日當復位,宜存恤百姓,毋惜賞賚,王,意在挑其妻,成,不知,反以爲王,心誠眷我,進退惟謹,左右竊笑。○譯語郞將全允藏,還自元,初,前王,以世子入朝,丞相燕帖木兒,見之大悅,視猶己子,因大行王辭位,奏帝錫王命,時太保伯顏,惡燕帖木兒專權,待前王,以不禮,大行王,復位,前王,宿衛于元,時,燕帖木兒已死,伯顏,待前王益薄,前王,與燕帖木兒子弟,及回骨少年輩,飮酒爲謔,因愛一回骨女,或不上宿衛,伯顏,益惡之,目曰,撥皮,撥皮,豪俠者之稱,從臣,皆觖望,不敢言,前軍簿判書李兆年,進戒曰,殿下,事天子,宜日愼一日,何乃棄禮縱情以速累乎,然,此非殿下之過,殿下,長於阿保之家,所共遊者,多無賴子,殿下孰從而聞正言見正事乎,夫儒者,雖朴拙,皆能習經史識廉恥,殿下,目之爲沙箇里,此何等語耶,殿下,能遠佞倖親儒雅,改行自飭則可,不然,天威咫尺,其嚴乎,王,不能堪其言,踰墉而走,伯顏,奏帝云,王禎,素無行,恐累宿衛,宜送乃父所,使敎義方,制可,大行王,常呼曰,撥皮,待之少恩,然,遺命襲位,由是行省左右司,轉達中書省,前王,亦遣前僉議評理李揆等,求襲位,而伯顏爲太師,寢不奏,且言,王燾,本非好人,且有疾,宜死矣,撥皮,雖嫡長,亦不必復爲王,唯暠,可,王揆等,百計請之不得,遣允臧來告。○巡軍萬戶全英甫,邀前王宴其家。○前王,召省郞,督署及第崔璟依貼,璟,借筆登第,祖母又賤,郞舍許邕等,不署依貼。○前王,遣大護軍孫守卿,全允臧,齎金銀等物,如元,將以賂執事者,求復位也。○前王,宴慶華公主于永安宮。○黃氏,邀前王宴其家,王命醫僧福山,治黃氏淋疾,王,常餌熱藥,所幸婦人,多有是疾。○前王,貶曺益淸爲濟州安撫使,放尹桓於漆原,杖吳子淳,放于海州,洪瑞,流于島,執前大護軍金鏡,叱曰,此奴,何故,昔與洪瑞等同謀,遂以鐵骨朶擊之,時洪莊,方有寵,欲釋憾於益淸等故,四人皆得罪。○大護軍韓不花,還自元,傳李揆言曰,丞相,固執如初,他省官,雖欲申覆,固無可假以爲辭者,若有本國耆老,上疏陳請,則庶可因以圖之,前王,命耆老宰樞會議。○六月,耆老權薄等,上書行省,請復立前王,行省以其書轉達中書省。○瀋王暠如元,至平壤而止,陰與政丞曹頔,有所謀也。○判三司事金元祥,卒。○己酉,葬毅陵。○籍中靑家。○秋七月,前王,宴慶華公主于永安宮。○八月,前王,以南氏,妻盧英瑞,南氏,曾適士人,大行王,奪而幸之,嬖臣崔安道,金之鏡,皆通焉至是,前王,亦私之,旣而,以與英瑞,又數幸其家。○慶華公主,邀前王宴,及酒罷,前王,佯醉不出,暮入公主臥內,主驚起,前王,使宋明理輩,扶其身,使不敢動,掩其口,使不敢言,烝焉,主恥之,欲還于元,使買馬,前王,命李儼,尹繼宗等,禁馬市,時,曹頔,稱疾不出,主召之,具道見暴狀,頔,與洪彬及省官,詣前王宮,群小當門不得入,乃還,前王,追召,不聽,至永安宮,招集百官,頔聲言逐去群小,而陰爲瀋王地,前王,與萬戶印承旦,全英甫等二十餘騎,至永安宮,門閉不得入,乃使尹繼宗,丘天佑,召頔,又不出,頔,使前護軍李安,張彥,吳雲,爲巡軍首領官,取國印,置于永安宮,使前軍薄摠郞柳衍,左思補李達衷,軍簿佐郞成元度,藝文檢閱金得培守之。○瀋王從臣朴全,來自平壤,詐言瀋王,已爲國王。○金注莊,來自元,詐言前王承襲,前王,大喜,賜馬二匹,頔黨,聞之稍稍遁去。○乙巳,前王,牓諭云,頔等,不畏朝廷,佩執弓刀,脅聚國人,謀逆作亂,罪莫大焉,群官,有能歸正者,宥,乃使前判書李兆年,召省官及諸宰相曰,曹頔,久爲瀋王臣僕,潛畜異志,諸君,胡爲助之,頔聞之曰,我爲政丞,見荒淫無道之行,若不聞于朝廷,罪在我身,王,雖欲殺我,我不懼,遂使閔珝,連車綴宮門外以備之,庚戌夜,與洪彬,申伯,黃謙,白文擧,王伯,洪晟,趙廉,全思義,朱柱等,及征東省官使趙炎輝,李休,李英富,李安,韓昇,張巨才,
,閔珝,吳雲等,點軍千餘,翦紅綃貼衣爲識,皆執刀杖,進襲前王宮,前王,率幸臣,騎而出射,頔軍敗走,追至巡軍南橋,李安,射王臂,頔,使人設布帳於連車上,以防流矢,先鋒,攻破連車而入,頔,勢窮,走入永安宮,有親故,誘以出亡,頔不聽,入公主殿,王軍,追入射殺之,尸于巡軍南橋下,遷公主于萬戶林淑第,執謙柱,昇安,文擧,炎輝,巨才等,繫巡軍,獨宥彬,及省官等,時金倫,韓宗愈等,治其獄,一府,疾其從逆,皆欲嚴加栲掠,倫獨曰,此輩詿誤於頔指嗾,何足責哉,若使傷肌膚毀筋骨,必謂我枉法强服,以欺朝廷,乃弛其刑,囚感悅,首罪無隱。○前王,遣鷹坊忽赤六十餘騎於平壤府,欲止瀋王,不及而還。○九月,前王,遣護軍康因,安撫義靜二州,二州之人,聞國亂,渡江而去者甚多。○丁卯地震。○征東省員外韓帖木兒不花,前贊成事金仁沇,前郞將盧英瑞等,如元,請前王襲位。○冬十一月丙辰,元,遣中書省斷事官頭麟,直省舍人九通等來,前王,迎于宣義門外,頭麟等,先至慶華公主宮,進御酒,遂往前王邸,授傳國印,癸亥頭麟,以帝命,使樂安君金之謙,前僉議評理金資,權管國事。○丙寅,頭麟等,執前王,及洪彬,韓帖木兒不花,趙雲卿,黃謙,白文擧,王伯,朱柱,趙炎輝,李安,韓昇,張巨才,
等以歸,蓋因頔黨之訴也前王在途,召金倫偕行。○慶華公主,囚贊成事鄭天起于征東省,德寧公主,釋天起,匿之宮中。○十二月慶華公主,命金之謙,權征東省,金資,提調都僉議司事。○判密直事辛蕆卒。
○ 봄 3월 계미일에 왕이 침전에서
훙(薨)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충렬(忠烈)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ㆍ충혜(忠惠) 왕에 이르기까지 4대를 내려오면서 부자끼리 서로 알력을 일삼고 함께 천자의 조정에 송사까지
하여 천하 후세에 비웃음거리로 남게 되었다. 부자는 천성(天性)의 지친이요, 효는 모든 행실에서 으뜸이며, 또한 정사(政事)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미 근본을 잃었다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다. 충숙왕은 만년에 나라 일을 버리고 교외에 머무르면서 박청(朴靑) 등의 세 환관을
신임하여 권력이 아래로 옮겨졌고 그 아들과 손자가 모두 불행하게 요사(夭死)를 당하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 여름
4월에 전왕이 삼사우윤(三司右尹) 김영후(金永煦)를 원 나라에 보내어 부처의 화상[畫佛]을 바쳤다. ○ 전왕이 신청(申靑)을 감옥에 가두었다.
청(靑)의 옛 이름은 송(松)인데 일찍이 원 나라에 들어가 심왕(瀋王) 고(暠)의 종자가 되어 총애를 받았다. 대행왕이 복위를 구할 때에 심왕의
저택에 머물렀는데, 청이 이로 인하여 승진할 기회를 얻어 전 산원(散員)으로 호군에 임명되었고, 거듭 승진하여 상호군이 되었다. 왕이 정치에
태만하여지자, 청이 왕의 위엄을 빌려 권력을 부리어 조금도 거리낌없이 권세를 부렸으며, 박청(朴靑)ㆍ이청(李靑)과 이름이 같으니 당시에
삼청(三靑)이라 불렀다. 대행왕이 늘 전왕의 잘못을 말하니, 그 종신인 전 대호군 조익청(曹益淸)과 전 대언(代言) 윤환(尹桓)이 전왕이 가까이
하던 불량배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는데, 전 상호군 오자순(吳子淳), 전 대호군 홍서(洪瑞)가 청(靑)과 사이좋게 지냈기 때문에 두 사람을 보내어
이 일을 도모하였다. 이때 청이 순군천호(巡軍千戶)로 있었는데, 왕의 지시를 받았다 하고 그 불량배 중에서 가장 나쁜
송팔랑(宋八郞)ㆍ홍장(洪莊) 등을 옥에 가두고 모질게 고문하므로 전왕이 그들을 석방시키려고 여러 번 청을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전왕이 이에
감정을 품고 이때에 이르러 권성(權省)과 홍빈(洪彬)을 시켜 청에게 칼을 씌워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원로인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권부(權溥) 등에게 명하여 청이 저지른 짓을 낱낱이 기록하여 행성에 고하니, 행성에서는 그 서장을 기록하여 김영후에게 주어 중서성에 올리게
하였다.
○ 5월에 전왕이 개인적으로 보흥고(寶興庫)를 설치하였다. ○ 신유일에 지진이 있었다. ○ 전왕이 외숙 삼사좌사(三司左使)
홍융(洪戎)의 후처 황(黃)씨와 간통하였다. 황씨는 만호 원길(元吉)의 딸인데, 용모가 아름다워 융이 항상 이를 안방에 가두어 두고 친척도 서로
보지 못하게 했는데, 융이 죽고, 환관 최화상(崔和尙)이 그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더니, 왕이 밤에 그 집에 가서 간통하고 황씨에게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채백(綵帛) 10필(匹), 모시 1백 필, 쌀과 콩 1백 석(碩)을 주었다. ○ 전왕이 서모인 수비(壽妃) 권(權)씨와 간통하였다.
전왕은 남의 아내나 첩으로서 얼굴이 잘 생겼다는 말만 들으면 친척이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총애하는 측근과 불량배들을 시켜 빼앗아 오거나, 혹은
그 집에 가서 음란한 짓을 하여, 절도가 없었다. ○ 전왕이 환자 유성(劉成)의 아내인 인(印)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구천우(丘天佑)ㆍ강윤충(康允忠)을 데리고 그 집에 행차하여 성(成)에게 명하여 술상을 차려오게 하니, 조금 후에 성이 왕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 내일이면 마땅히 복위하실 것이오니, 백성들을 돌보아 주시고 상 주시는 것을 아끼지 마시옵소서." 하였다. 왕의 마음은 그의 처를
건드리는 데 있었는데, 유성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왕이 진심으로 자기를 돌보는 줄 알고 행동을 오직 지성스럽게 하니, 옆의 사람들이
속으로 웃었다. ○ 역어낭장(譯語郞將) 전윤장(全允藏)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일찍이 전왕이 세자로 조회하러 들어갔을 적에
연첩목아(燕帖木兒)가 보고 크게 기뻐하여 자기 친자식처럼 돌보았는데, 대행왕이 왕위를 사퇴하자 황제에게 아뢰어 전왕에게 왕위를 내려주도록
하였다. 이때 태보(太保) 백안(伯顔)이 연첩목아가 정권을 제마음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여, 전왕에 대한 대우를 아무렇게나 하였다. 대행왕이
복위하고 전왕이 숙위(宿衛)에 있을 때에는 연첩목아는 이미 죽고 백안은 전왕을 더욱 각박하게 대하였다. 전왕은 연첩목아의 자제와 회골(回骨)의
소년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우스갯소리를 하고 다녔으며, 이어서 한 회골 여자를 사랑하여 어떤 때는 숙위에 들어오지 않기도 하니, 백안이 더욱
전왕을 미워하여,「발피(撥皮)」라 지목하였으니, 발피는 건달이라는 뜻이다. 종신들이 모두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전
군부판서(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이 경계하는 말을 아뢰기를, “전하께서 천자(天子)를 섬기는 데 마땅히 하루하루 더욱 근신하여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예절을 버리며 마음대로 행동하셔서 누(累)를 자청하십니까. 그러나 이는 전하의 잘못은 아닙니다. 전하는 궁녀와 환관의 집에서 자라시어
함께 노는 자 중에 무뢰배가 많았으니, 전하께서는 누구에게서 옳은 말을 들으시고 옳은 일을 보셨겠습니까. 대개 유자는 비록 소박하고
옹졸하지마는, 모두 능히 경전과 역사공부를 하였고 염치를 아는 사람인데, 전하께서는 이들을 지목하여 사개리(沙箇里)라 하시니, 이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는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시고 학자를 가까이 하시어, 행실을 고치고 스스로 조심하시면 좋으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천위(天威)가 지척에 있으니 엄중할 것입니다." 하였다. 전왕이 그 말을 듣다가 견디지 못하여 담을 뛰어넘어 달아났다. 백안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왕정(王禎)은 본시 행실이 나빠서 숙위에 누를 끼칠까 염려되오니 마땅히 그 아버지 있는 곳으로 보내어 바르게 지도하게 하옵소서."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대행왕이 늘 '발피'라고 부르면서 그를 대하는 데 은정(恩情)이 적었으나, 유명(遺命)으로 왕위를 계승하라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행성(行省)의 좌우사(左右司)가 이것을 중서성(中書省)에 전달하였고, 전왕도 전 첨의평리(僉議評理) 이규(李揆) 등을
보내어 왕위의 계승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백안이 태사(太師)가 되어 이를 보류하고 아뢰지 않았으며, 또한 말하기를, “왕도(王燾)는 본래 좋은
인간이 아니며, 또한 병이 있으니 곧 죽을 것이고, 발피는 비록 적출의 장자라 할지라도 복위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고(暠)만이 왕이 될
만합니다." 하니, 규(揆) 등이 온갖 계책으로 이를 청하였으나, 되지 아니하여 이규가 윤장(允藏)을 보내서 전왕에게 고한 것이다. ○
순군만호(巡軍萬戶) 전영보(全英甫)가 전왕을 맞이하여, 그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 전왕이 성랑(省郞)을 불러, 급제(及第) 최경(崔璟)의
의첩(依貼)에 서명할 것을 독촉하였다. 경(璟)은 다른 사람에게 글을 쓰게 하여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그의 조모가 또한 천한 사람이었으므로,
낭사(郞舍) 허옹(許邕) 등이 의첩에 서명하지 아니하였다. ○ 전왕이 대호군 손수경(孫守卿)ㆍ전윤장(全允藏)으로 하여금 금은(金銀) 등의 물품을
들려서 원 나라에 보냈는데, 집권자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복위를 요구하려 했기 때문이다. ○ 전왕이 영안궁(永安宮)에서 경화공주(慶華公主)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황(黃)씨가 자기집에서 전왕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왕이 의승(醫僧) 복산(福山)에게 명하여 황씨의 임질을 치료하게
하였다. 왕은 항상 열약(熱藥)을 복용하므로, 관계한 여자들 중에 이 병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 전왕이 조익청(曹益淸)을 제주
안무사(濟州安撫使)로 좌천하고, 윤환(尹桓)을 칠원(漆原)으로 추방하며, 오자순(吳子淳)에게 장형을 실시하여 해주(海州)로 추방하고,
홍서(洪瑞)는 섬으로 유배하고, 전 대호군 김경(金鏡)을 붙잡아 꾸짖기를, “이놈, 어찌하여 과거에 홍서 등과 함께 모의를 하였느냐." 하고는,
드디어 철골타(鐵骨朶)로 후려쳤다. 이때 홍장(洪莊)이 총애를 받았는데, 익청(益淸) 등에게 묵은 감정을 풀어 보려고 하였기 때문에 네 사람이
모두 죄를 얻었다. ○ 대호군 한불화(韓不花)가 원 나라에서 돌아와 이규의 말을 전하기를, “승상의 고집이 여전하여, 다른 성의 관원들이 비록
되풀이해서 거듭 아뢰고자 하나, 진실로 대신 나서서 말해 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본국의 원로가 글을 올려 진정해 본다면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전왕이 원로들에게 명하여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게 하였다.
○ 6월에 기로 권부(權溥) 등이 행성에 글을 올려
전왕을 복위시켜 줄 것을 청하니, 행성에서는 그 글을 중서성(中書省)에 보냈다.
○ 심왕(瀋王) 호(暠)가 원 나라로 가다가
평양(平壤)에서 머물렀는데, 몰래 정승 조적(曹頔)과 모의가 있었다.
○ 판삼사사(判三司事) 김원상(金元祥)이 졸하였다. ○ 기유일에
의릉(毅陵)에 장사지냈다. ○ 신청(申靑)의 가산을 몰수하였다.
○ 가을 7월에 전왕이 영안궁에서 경화공주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8월에 전왕이 남(南)씨를 노영서(盧英瑞)의 아내로 삼았다. 남씨는 본래 양반의 아내였는데, 대행왕이 빼앗아서 가까이 하였고, 폐신(嬖臣)
최안도(崔安道)ㆍ김지경(金之鏡)도 그와 간통하였다. 이때에 전왕도 그와 관계하고서 얼마 후에 영서(英瑞)에게 주고는, 또 그 집에 자주 다니며
사통하였다. ○ 경화공주가 전왕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자리가 끝나도 전왕은 취한 체하며 물러나지 않고 있다가, 어두운 뒤에 공주의
침실로 뛰어드니, 공주가 놀라서 일어나는 것을, 전왕이 송명리(宋明理)의 무리로 하여금 공주의 몸을 붙들어서 꼼짝할 수 없게 하고 입을 틀어막아
말을 못하게 하여 그를 간음하였다. 공주가 이를 부끄럽게 여기어, 원 나라로 돌아가고자 사람을 시켜 말을 사려고 하니, 전왕이
이엄(李儼)ㆍ윤계종(尹繼宗) 등에 명하여서 마시(馬市)를 금하였다. 이때 조적(曹頔)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공주가 그를 불러 낱낱이
폭행당한 실상을 말하였다. 조적은 홍빈(洪彬)ㆍ성관(省官) 들과 함께 전왕의 궁으로 갔으나, 불량배들이 문을 막아서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전왕이 뒤쫓아와서 불렀으나, 적은 듣지 않고 영안궁에 이르러 백관들을 불러 모아 놓고, 모든 불량배들을 쫓아내겠다고 선언하였지만, 속으로는
심왕을 위하여 터전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전왕이 만호 인승단(印承旦)ㆍ전영보(全英甫) 등 20여 명의 기마대를 데리고 영안궁에 이르렀으나,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마침내 윤계종(尹繼宗)ㆍ구천우(丘天佑)를 시켜 적을 불렀으나 나오지 아니하였다. 적은 전 호군
이안(李安)ㆍ장언(張彦)ㆍ오운(吳雲)을 순군수령관(巡軍首領官)으로 삼고, 국인(國印)을 가져다가 영안궁에 두고, 전 군부총랑(軍簿摠郞)
유연(柳衍), 좌사보(左思補) 이달충(李達衷), 군부좌랑(軍簿左郞) 성원도(成元度), 예문검열(藝文檢閱) 김득배(金得培)로 하여금 이것을 지키게
하였다.
○ 심왕의 종신 박전(朴全)이 평양에서 와서, 거짓말로 심왕이 이미 국왕이 되었다고 선전하였다.
○ 김주장(金注莊)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전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고 허위 선전을 하니, 전왕이 크게 기뻐하여 말 두필을 김주장에게 주었다. 적(頔)의 무리는 이
말을 듣고, 차츰차츰 달아나 버렸다. ○ 을사일에 전왕이 방을 붙여 유시하기를, “적(頔) 등이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위협하여 모아서 반역을 도모하려 하니, 그 죄가 막대하다. 여러 관원들 가운데 정도(正道)로 돌아오는 자는 용서할 것이다." 하고, 곧 전 판서
이조년(李兆年)으로 하여금 성관(省官)과 여러 재상(宰相)을 불러서 이르기를, “조적이 오랫동안 심왕의 신복(臣僕)으로 있으면서 몰래 다른 뜻을
길러왔는데, 제군들은 어찌하여 그를 돕느냐." 하였다. 적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정승이 되어 황음무도한 행동을 보고도 만일 이것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으면, 그 죄가 내 몸에 있다. 왕이 비록 나를 죽이고자 하나,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민후(閔珝)를 시켜
궁문 밖에 수레를 연이어 묶어 놓고 대비하게 하였다. 경술일 밤에
홍빈(洪彬)ㆍ신백(申伯)ㆍ황겸(黃謙)ㆍ백문거(白文擧)ㆍ왕백(王伯)ㆍ홍성(洪晟)ㆍ조염(趙廉)ㆍ전사의(全思義)ㆍ주주(朱柱) 등이
정동성관(征東省官)과 함께
조염휘(趙炎輝)ㆍ이휴(李休)ㆍ이영부(李英富)ㆍ이안(李安)ㆍ한승(韓昇)ㆍ장거재(張巨才)ㆍ배성경(裴成景)ㆍ민후(閔珝)ㆍ오운(吳雲) 등에게 시켜서
천여명 의 군사를 점검하고, 붉은 천을 잘라서 옷에 붙여 표지를 삼고, 모두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아가 전왕의 궁을 습격하였다. 전왕이
행신(幸臣)들을 데리고 말을 타고 나와서 활을 쏘니, 적의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다. 추격하여 순군소(巡軍所)의 남쪽 다리에 이르렀는데,
이안(李安)이 활을 쏘아 왕의 팔을 맞히고, 적이 사람들을 시켜 이어 놓은 수레 위에다 포장을 치고 날아오는 화살을 막게 하였는데, 왕의
선봉군이 이어 놓은 수레를 쳐부수고 들어오니, 적은 세가 궁하여 영안궁으로 달아났다. 친구가 그에게 나아가 망명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적이 듣지
않고 공주전(公主殿)으로 들어간 것을 왕의 군사가 쫓아 들어가 쏘아 죽이고, 그 시체를 순군소(巡軍所)의 남쪽 다리 아래에 옮겨 놓았다. 공주를
만호(萬戶) 임숙(林淑)의 집으로 옮겨 놓고, 겸(謙)ㆍ주(柱)ㆍ승(昇)ㆍ안(安)ㆍ문거(文擧)ㆍ염휘(炎輝)ㆍ거재(巨才) 등을 잡아 순군소에
구속하며, 다만 빈(彬)과 성관(省官)들은 용서하였다. 이때 김륜(金倫)ㆍ한종유(韓宗愈) 등이 그 사건을 처리하는데, 부(府) 전체가 그들이
역모에 가담한 것을 미워하여 모두 모진 고문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김륜이 홀로 말하기를, “이들은 적(頔)의 지시와 사주를 받아서 잘못한
것이니, 어찌 그토록 책할 것이 있느냐. 만일 그들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근골(筋骨)을 상하게 한다면, 반드시 내가 법을 악용하여 강제 자백을
받아서 조정을 속였다고 할 것이다." 하고, 곧 그들의 형벌을 가볍게 하니, 죄수들이 모두 감격하고 기뻐하여 사실을 숨김 없이 자백하였다. ○
전왕이 응방홀치(應坊忽赤) 60여 기(騎)를 평양부(平壤府)에 보내어 심왕을 붙잡아 두게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
9월에 전왕이 호군 강인(康因)을 보내어 의주(義州)와 정주(靜州)를 안무(安撫)하게 하였다. 이 두 주의 사람들 중에 나라가 시끄럽다는 말을
듣고 강을 건너가는 사람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 정묘일에 지진이 있었다. ○ 정동성 원외(征東省員外) 한첩목아불화(韓帖木兒不花), 전
찬성사(贊成事) 김인연(金仁沇), 전 낭장(郞將) 노영서(盧英瑞) 등이 원 나라에 가서 전왕의 습위(襲位)를 청하였다.
○ 겨울 11월
병진일에 원 나라에서 중서성 단사관(中書省斷事官) 두린(頭麟), 직성사인(直省舍人) 구통(九通)을 보내 왔다. 전왕이 선의문(宣義門) 밖에
나아가 그들을 맞이하니, 두린 등은 먼저 경화공주의 궁에 이르러 황제가 주는 술을 올리고, 드디어 전왕의 저택에 가서 국인(國印)을 가져다
주었으며, 계해일에 두린이 황제의 명으로 낙안군(樂安君) 김지겸(金之謙), 전 첨의 평리(僉議評理) 김자(金資)로 하여금 임시로 나라일을 맡게
하였다. ○ 병인일에 두린 등이 전왕과
홍빈(洪彬)ㆍ한첩목ㆍ아불화ㆍ조운경(趙雲卿)ㆍ황겸(黃謙)ㆍ백문거ㆍ왕백(王伯)ㆍ주주ㆍ조염휘ㆍ이안ㆍ한승ㆍ장거재ㆍ배성경(裴成景) 등을 붙잡아서 돌아갔다. 조적의
무리가 호소하였기 때문이었다. 전왕이 도중에서 김륜을 불러서 함께 갔다. ○ 경화공주가 찬성사 정천기(鄭天起)를 정동성(征東省)에 가두었더니,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천기를 풀어 주고 그를 궁중에 숨겼다.
○ 12월에, 경화공주가 김지겸에게 정동성(征東省)의 사무를 임시로 맡게
하고, 김자를 제조도첨의사사(提調都僉議司事)로 임명하였다.
○ 판밀직사(判密直事) 신천(辛蕆)이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