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도: -곡 (穀)-색 (穡)-종선 (種善)-계전 (季甸)-봉 (封)-]
휘 계전 (季甸) 문열공 (文烈公) 의 넷째 며느리가 되시며 휘 봉 (封) 헌평공 (憲平公) 의 배위가 되시는 정부인 (貞夫人) 안동김씨 (安東金氏) 는 현감 (縣監; 종5품) 김삼노 (金三老) 의 2남3녀중 장녀요, 직제학 (直提學; 정3품) 김진 (金瑱) 의 손녀요, 군사 (郡事; 정5품) 김칠양 (金七陽) 의 증손녀요, 상락군공 (上洛君公) 첨의평리 (僉議評理; 정2품) 김후 (金昴) 의 현손녀요, 연일인 (迎日人) 부사 (府使; 정3품) 정효완 (鄭孝完) 의 외손녀였다.
[참고: 문열공에겐 휘 육 (堉) 이란 맏아드님이 계셨으나, 일찌기 졸 (卒) 하여 후손들이 전하지 않아 보통 세간에는 휘 우 (堣), 휘 파 (坡), 휘 봉 세아드님들만 알려져 있음.]
정부인은 여느 한산이문의 며느리처럼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며 사대부 (士大夫) 신분에 계속 머물렀던 명가의 귀한 후손으로 태어나 곱게 성장하시다 나중 한산이문에 시집을 오셨다.
우리는 구 안동김씨를 휘 숙 (塾) 상예공 (相禮公) 배위 숙인 (淑人) 안동김씨편에서 살펴본적이 있는데, 정부인 김씨역시 숙인 김씨처럼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敬順王) 의 후예로서, 구 안동김씨의 중시조 (中始祖) 가 되는 충렬공 (忠烈公) 김방경 (金方慶) 의 후손이다. 굳이 촌수를 따진다면 상예공 배위 숙인 김씨는 헌평공 배위 정부인 김씨보다 한 항렬 위로 촌수로는 13촌간이 된다.
정부인 김씨의 고조부되신 상락군공 김후는 보문각대제학 (寶文閣大提學) 충숙공 (忠肅公) 김승용 (金承用) 의 장자가 되는데, 행장에 따르면 타고난 천성이 겸손하고 부지런하였다 한다. 용모가 장준하고 엄숙하여 어릴때부터 조부가 되는 전법판서 (典法判書) 김선 (金瑄) 에게서 학문을 수업할때, 조부의 명령에 거슬리는 일이 없었고, 밤낮으로 학문을 닦는데 게을리 하지 않아 저술에 능했고 겸해서 전서 (篆書) 와 예서 (隸書) 를 배워 성년이 되어선 문장과 필법 (筆法) 이 세상사람의 귀를 울렸다 한다.
공은 일찌기 과거공부를 그만 두시고 산수 좋은 곳에 뜻을 붙이시어 경서 (經書) 의 도리를 독실하게 실행하였는데, 충혜왕 (忠惠王) 이 여러번 예물을 보내어 음직 (蔭職) 을 내리니, 광정대부 (匡靖大夫) 검교 (檢校) 첨의평리 (僉議評理) 를 지냈다.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고, 정성을 다해서 나라를 도움으로 해서 상락군 (上洛君 ) 에 봉하여 졌다. 원나라에 들어가선 황제로부터 합포만호 (合浦萬戶) 의 벼슬을 받았다. 공의 생몰년은 미상이다.
공은 여흥민씨 (驪興閔氏) 에게 장가를 드셨는데, 부인 민씨는 너그럽고 온순한 덕이 있으셨다 한다. 슬하에 3남3녀를 두셨는데, 1남 김칠우 (金七祐) 는 밀직사사 (密直司事) 였으며 구 안동김씨 밀직사사공파 (密直司事公派) 의 파조가 된다. 2남 김칠림 (金七霖) 은 개성윤 (開城尹) 을 지냈는데 구 안동김씨 개성윤공파 (開城尹公派) 의 파조가 되고, 3남되는 김칠양은 정부인 김씨의 증조부가 되셨던 것이다.1녀는 함양인 (咸陽人) 판서우윤 (判書右尹) 박거실 (朴居實) 에게 출가하였고, 2녀는 선산인 (善山人) 대언 (代言) 김군정 (金君鼎) 에게 출가하였고, 3녀는 광산인 (光山人) 정승 (政丞) 경평공 (敬平公) 노숭 (盧崇) 에게 출가하였다.
정부인의 증조부되신 수안군사 김칠양은 안동김씨 군사공파 (郡事公派) 의 파조가 되는 분으로 호는 강은 (康隱) 이였다. 행장에 의하면 공은 타고난 바탕이 맑고 곧았고 위엄한 거동이 단정하였다 한다. 가정 (稼亭) 휘 곡 (穀) 선조의 문인으로 가정 선조에게 나아가 수업을 할제 재주가 보통이 아니었고, 지혜와 계략이 보통 사람을 넘었으며, 부지런히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한다. 때로는 시부 (詩賦) 와 예서 (隸書) 를 익히셨는데, 부모께서 기뻐하시면서, “능히 우리 가문을 보전할 것이다.” 라 하였으며, 가정 선조께서도 자랑하시길, “나라의 그릇으로 나아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공은 과거에 힘쓰지 않으시고, 포은 (圃隱) 정몽주 (鄭夢周), 목은 (牧隱) 휘 색 (穡) 선조 및 재종 (再從) 인 척약재 (惕若齋) 김구용 (金九容) 들과 더불어 성리학의 정론을 강구하였다 한다. 비록 늦게나마 한 고을의 수령 (=수안군사) 을 지냈으나, 공의 참다운 충성은 태양을 꿰뚫은듯 하였고, 고려의 사직을 지키려고 천한 거동이 없었다 한다.
공은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 (不事二君) 의 굳은 절개를 지키고 강진 (康津) 금릉산 (金陵山) 선묘하 (先墓下) 에 은거하며 학문을 벗삼아 세월을 보냈다. 태조 이성계가 예의를 갖추고 어진 정성으로 여러번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시고 자제분들을 불러 꿇어 앉게 하시고 훈계하기를, “우리는 나라에 거목 (巨木) 같은 세신 (世臣)) 으로 나라의 녹을 먹었으니, 마땅히 이 나라가 패하고 임금이 죽었을때 함께 죽지 못하고 국은 (國恩) 의 중대함을 생각지 못했다 하더라도 망령되게 새 임금의 사랑을 구한다는 것은 이심 (二心) 을 품은 것이라 지하로 돌아가서 어찌 무슨 면목으로 선왕 (先王) 과 선조 (先祖) 를 뵈올 것인가. 내가 죽거든 선산 (先山) 에 묻되 돌을 세우지 말아서 후인 (後人) 들로 하여금 “아무개의 무덤이다” 고 손가락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나라의 운을 어떻게 할 것인가. 너희들은 학문을 닦아 충성으로 신왕을 도우러 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니라” 하였다 한다.
그리곤 공은 선영 (先塋)) 의 밑으로 물러 가셔서 문을 닫고 자청 (自淸) 하다가 향년 40세에 정침 (正寢) 에서 세상을 마치어 선영하 (先塋下) 에 장사되었다. 태조는 공의 부음을 듣고 매우 통석히 여겼으며, 가선대부 이조판서 (嘉善大夫 吏曹判書) 의 증직을 내렸으며, 모든 자제들은 유명 (遺命) 을 공손히 받들어 나중 조선조에 출사를 하였다.
공의 부인은 봉상시 (奉常寺) 예의총랑 (禮儀摠郞) 김용진 (金用珍) 의 따님이셨는데, 성품이 조용하시고 재주와 덕망이 뛰어나신 분이셨다. 예의로서 가정을 올바르게 했고 의리로서 친족을 독목 (篤睦) 하게 하셨다. 슬하에 3남을 두셨는데, 1남은 진사 김괄 (金) 인데 조요 (早夭) 하였고, 2남은 문과를 거쳐 제학 (提學) 에 오른 김진 (金塡) 이며, 3남은 역시 문과를 거쳐 제학벼슬에 오른 김돈 (金墩) 이다. 정부인의 조부가 되시는 분이 바로 2남 김진 이였던 것이다.
(군사공 김칠양 묘)
정부인의 종조부가 되는 제학 김돈은 아드님 한 분을 두셨으니 김계로 (金季老) 로 담양부사 (潭陽府使) 를 지냈으며, 담양부사 김계로는 아드님 한 분을 두셨으니 김석정 (金石精) 으로 이조좌랑 (吏曹佐郞) 에 올랐다.
정부인의 조부가되는 제학공 김진 (1382~1447, 우왕8~세종29) 은 1414년 (태종 14) 에 진사시를 거쳐 식년시 (式年試) 을과 (乙科) 3등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禮曹佐郞), 예조정랑 (禮曹正郞), 영암부사 (靈岩府使), 사재감정 (司宰監正), 사헌집의 (司憲執義), 예문관직제학을 거쳐 내자판사 (內資判事), 보문각직제학 (寶文閣直提學) 을 역임하였다.공의 묘는 원래 경기도 여주군 백양동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연풍리산1번지 인좌에 설단 제향하였다 한다. 부인되시는 부은 정부인 (貞夫人 ) 광주노씨 (光州 盧氏) 였다. 슬하에 1남을 두셨으니, 바로 정부인 김씨의 친정 아버지되는 김삼노 (金三老) 였다.
(제학공 김진 설단)
정부인의 친정 아버지 김삼노는 묘갈명에 의하면 세종때 출생하였고, 어릴때부터 서책을 탐독하고 문장과 필법이 당시에 홀로 뛰어 났다 한다. 겨우 성균관 진사에 합격하였을 뿐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다가 음관 (蔭官) 으로 토산현감 (兎山縣監) 에 발령되어 나갔다. 토산현은 황해도 해주영 (海州營) 에서 멀지 않은 극빈의 고을이라 비로서 이 고을에 부임하셔서 먼저 서당 십여간을 읍내 고요한 곳에 짓고, 문학이 풍부하고 품행이 단정하고 우아한 선비를 구해서 교사로 앉히고 연소한 자로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을 불러 모아서 이들로 하여금 수학케 하였다. 공은 창고에 저장된 양곡을 가난하여 배고픈 자에게 풀어 먹이니 불과 수개월만에 백성중에 굶주리는 폐단이 없어지고 고을이 안정되었고다 한다.
몇 해 후에는 여러 해 동안 수해 (水害) 와 한재 (旱災) 로 팔방에서 크게 굶주리고 있으니 모든 백성이 진흙 구렁이에 빠진 참상이며 심지어 병화 (兵火) 까지 있으니, 눈으로 차마 볼수 없었다 한다. 공의 가산 (家産) 이 원래 풍요하였는데 조금도 아끼지 않으시고 사재 (私財) 로서 먼저 구렁속에 눌려 있는 참상을 구제한 후에 가난속에서 굶주린 생명을 구제하였다. 모름지기 힘을 다해 뜻에 거의 실증이 날것이나 십수간의 객관 (客館) 이 퇴락한지 오래되어도 고져짓지 못했는데, 다시 녹봉 (祿俸) 으로 인부를 고용함으로서 민폐를 끼치지 아니하고 옛날 제도대로 역사 (役事) 를 일으켜 다시 새롭게 지었다 한다. 이는 범문정공 (範文正公) 이 흉년에 역사 (役事) 를 일으키는 유의 (遺意) 에 따름이었고, 관민이 일체로 그 덕을 칭송하면서 청덕선정비 (淸德善政碑) 를 세웠다. 해주감사 (海州監司) 는 공의 선정을 들어 포장할 것을 장계로 올렸는데 해주감사가 전교 (傳敎) 하기를, “백성을 다스린 치적이 이와 같이 특이하니 장차 판관 (係權) 이나 서윤 (原尹) 으로 승진시키겠다” 하였다 했다.
그러나 만기 (滿期) 가 점점 임박해 오자 백성들이 먼저 바뀌어 가실것을 근심하였고, 졸지에 공에게 병환이 발생해서 월여 (月餘) 가 되면서 크게 위중하였다; 의원을 불러 문약을 십여차나 하였으나 시약이 끝내 효과가 없이 급작스레 관사 (館舍) 에서 공이 운명하시니, 백성들은 부모의 상사 (喪事) 와 같이 울음의 소리가 끊이지 아니했다 한다. 백성들이 백여리 길에 객지에서 돌아가는 영구 ((靈柩) 를 배향하였고, 이웃 고을의 수령들은 시신을 안고 모두가 통곡하고 만사 (輓詞) 를 지어 정의 (情誼) 를 표하였다. 황해감사는 부음을 듣고 상사 (喪舍) 로 달려와서 슬픔을 품은 눈물을 흘리면서 장막을 치고 영구를 정상 (停喪) 하였으며 만사를 올렸다 한다. 조용히 파주 칠정면 막적동 경좌 갑향에 장사하였다.
공의 부인은 숙인 연일정씨 (迎日鄭氏) 로 부사 정효완 (鄭孝完) 의 따님이셨는데, 시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부군의 말씀을 잘 순종하였으며, 사이에 2남3녀를 두셨는데, 이 글의 주인공 정부인 김씨가 장녀가 되는 분이셨던 것이다.
정부인 김씨의 첫째 친정 오래비 김곤 (金坤) 은 1446년 병술 (丙戌) 무과를 거쳐 선전관 (宣傳官), 부령부사 (富寧府使), 강원도 경차관 (江原道 敬差官), 철원부사, 경원부사 (慶源府吏) 를 지냈으며, 묘는 경기도 파주시 문상읍 장산리산75번지 유좌이다. 둘째 친정오래비 김우 (金堣) 는 장흥고주부 (主簿) 에 이르렀다. 정부인 김씨의 바로 밑 여동생은 단양인 (丹陽人) 사과 (司果) 우인손 (禹麟孫) 에게 출가하였고, 막내 여동생은 연안인 (延安人) 김개신 (金愷臣) 에게 출가하였다.
정부인의 큰 오래비 철원부사 김곤은 2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 즉, 정부인의 큰 조카되는 김윤수 (金允粹) 는 성균생원 (成均生員) 이며, 그 다음 작은 조카 김윤정 (金允精) 은 자산도호부사 (慈山都護府使) 이며, 막내 여조카는 현풍인 (玄風人) 곽계원 (郭季元) 에게 출가하였다.
정부인의 작은 오래비 장흥고주부 김우는 2남5녀를 두었는데, 장남 김윤강 (金允剛) 은 옥동처사 (玉洞處士) 라 하여 사육신 (死六臣) 의 순절 (殉節) 를 보고 숨어서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한다. 둘째는 김윤의 (金允毅) 이며, 장녀는 정세걸 (鄭世傑) 에게, 둘째 따님은 이인독 (李仁禿) 에게 출가, 셋째 따님은 직장 (直長) 김기광 (金器光) 에게 출가, 넷째 따님은 유종무 (柳宗茂) 에게 출가, 다섯째 따님은 윤사익 (尹思翼) 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정부인의 외증조부는 판서 오천부원군 (鳥川府院君) 정원공 (靖元公) 정진 (鄭鎭, ?~1418) 이였는데, 대제학 정홍 (鄭洪) 의 아드님이셨다.
평양백 (平壤伯) 조준 (趙浚) 의 사위로서 나이 18세에 대언 (代言) 에 임명되고, 20세에 중추 (中樞) 에 임명되니, 한 때에 소년으로 귀히 된 사람으로서 그 위에 오르는 이가 없었다.
용모와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온화하고 근신 (謹愼) 하며, 공평하고 청렴하며,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사람들과 신의로써 사귀어 세력가의 기습 (氣習) 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지내본 모든 사람들은 다들 그를 사모 (思慕) 하였다 한다.
1410년 형조판서 (刑曹判書) 가 되고, 1412년 중군도총제 (中軍都摠制) 이 되었다. 1412년 판경승부사 (判敬承府事) 에 오르고, 1417년 사은 (謝恩) 하기 위하여 중국 서울에 갔다. 1417년 우군도총제 (右軍都摠制) 에 오르고, 1418년 공조판서 (工曹判書) 가 되었다가 다시 우군도총제가 되었으며, 삼번절제사 (三番節制使) 에 임명되었다.
정원공은 나이 41세에 사망하였는데, 당시에 모두들 애석하게 여겼다. 조정에선 3일 동안 정사 (政事) 를 정지하고 정원 (靖元) 이란 시호 (諡號) 를 내렸으니, 〈시호법[諡法]〉에 몸을 공손히 가지고 말이 적음 [恭己鮮言]이 정 (靖) 이요, 의 (義) 를 행하여 백성을 기쁘게 함 [行義悅民]이 원 (元)이다.
정원공은 다섯분의 아들을 두었으니, 정효손 (鄭孝孫), 정효순 (鄭孝順), 정효완 (鄭孝完), 정효강(鄭孝康), 정효전 (鄭孝全) 이었으며 정부인의 외조부되는 분이 셋째 정효완이였다. 이중에 정부인 김씨의 막내 외종조부되는 정효전은 태종 이방원의 네번째 딸, 즉 신녕옹주 (愼寧翁主) 신씨 (辛氏) 소생인 숙정옹주 (淑貞翁主) 와 혼인하여 부친되는 정원공 정진, 즉 정부인 김씨의 외증조부 정진은 일성부원군 (日城府院君) 에 봉해졌으며 병조판서를하는 역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부인 김씨의 외가인 연일정씨는 한때 너무나 잘 나가는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던 집안이였다.
그러나 태종대를 거쳐 세종대를 지나 단종대에 이르렀을 때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인 계유정난 (癸酉靖難) 의 희생양이 되어 정부인 김씨의 외가 연일정씨 가문의 정원공파 (靖元公派) 는 계유정난의 회오리 바람속에서 거의 멸문의 화를 입게 된다.
계유정난이란 단종 원년인 1453년,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 (首陽大君) 이 세종시대의 원로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은 정난을 일으켜 말하는데,이때 김종서 (金宗瑞) , 황보인 (皇甫仁) 등 여러 고명 대신을 제거할 때 정원공 정진의 다섯째 아들 정효전은 삼군도진무사 (三軍都鎭撫使) 의 직위에 있었다.
단종 원년인 1453년 10월 10일자 실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진무 정효전은 안평대군 (安平大君) 의 처족인데 본래 안평대군과 친밀하였다. 그 집이 시좌소 (時坐所: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는 궁전) 에 가까운데, 이날 문을 닫고 나오지 않고 울며 말하기를, "우리들의 일은 이미 틀렸다" 하였다."
안평대군과 가까웠던 정효전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에 심한 낭패감을 토로하고 있다.
단종 2년 3월 4일자 실록은 "정효전이 병으로 인하여 외방에 보석되어 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어 단종 2년 4월 23일자 실록은, "...... 봉교하기를 정효전은 이미 일찍 죽었으니 관을 베고 재산적몰하며, 그 연좌된 정효전의 큰 아들인 정원석 (鄭元錫) 은 남해 (南海) 관노에 영속시키고,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효전이 시좌소에 가까이 살면서 정난하는 날, 대궐에 나와 시위하지 않았고 다음날에는 병을 핑계로 대궐에 들지 않은 것이 이유가 되어 일족이 멸망하는 화를 당한 것이다.
사실 정효전은 계유정란 직후 수양대군에 의해 파면되었으며, 몇개월 지난 이듬해 병을 얻어 집에 돌아와 있던중 의분을 참지 못하여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이듬해 죄를 추론 (追論) 당한 끝에 부관참시 (剖棺斬屍) 되었으며, 성종 때인 1804년에야 비로서 신원되고 충경 (忠景)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454년 (단종 2) 에 정부인 김씨의 외종조부들이 차례차례로 추문을 당하며 화를 입는데, 큰 외종조부되는 정효손이 연좌죄에 걸려, 장남 정유석 (鄭維碩) 은 거제 (巨濟) 에 유배되었다 죽음을 당했고, 차남 정신석 (鄭臣碩) 은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정부인 김씨의 둘째 외종조부되는 정효순 역시 연좌되어 진도 (珍島) 에 유배되었다 풀려났으며, 차남 정석례 (鄭錫禮) 는 첨지 (僉知) 를 지냈는데 이 사건에 연좌되어 가산 (家産) 을 몰수 당했다.
정부인 김씨의 셋째 외종조부되는 정효강 (鄭孝康) 은 지병조사 (知兵曹事) 를 거쳐 1453년(단종 1) 형조 참의 (刑曹參議) 에 올랐으나 역시 막내 동생 정효전과 안평대군에 연좌되어 부자 (父子) 가 보성관 (寶城官)의 노비가 되었다가, 1454년 (단종 2) 부자 (父子) 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처자 (妻子) 는 노비 (奴卑) 가 되었다.
왕조실록의 기록에 보면 정부인 김씨의 외조부되는 정효완의 서자들인, 즉 정부인 김씨에겐 서외삼촌들이 되는 정생 (鄭生), 정흥생 (鄭興生) 들이 연좌죄에 걸려 외방 (外方) 에 안치(安置)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정효완에 대해선 이렇다하는 기록이 없어서 정효완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다만 추측을 낳을 뿐이다.
정부인 김씨는 남편 헌평공과의 사이에 4남1녀를 두셨는데, 첫째 1남은 휘 덕홍 (德洪) 판관공 (判官公) 이요, 둘째 2남은 휘 덕제 (德濟) 별좌공 (別坐公) 이요, 셋째 3남은 휘 계금 (繼金) 판관 (判官) 이요, 넷째 4남은 휘 덕부 (德溥) 현감공 (縣監公) 이요, 다섯째 1녀는 파평인 (坡平人) 윤수강 (尹秀岡) 에게 출가하였다.
이상 내 멋데로 풀어본 우리 할머님네 이야기였다.
첫댓글 다음편엔 10세 휘 파 명헌공 배위 정부인 파평윤씨편이 실리겠습니다. 휘 봉 헌평공 배위 정부인 안동김씨편과 순서가 뒤바뀐점은 관계되는 후손들께 삼가 사과말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