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6주일(신학교육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2월 11일(주일)
시편 119:1-8
“행복한 삶이란?”
시편 119편 10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119:105/표준새번역)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의 의미는 주의 말씀이 어두운 인생길에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지금껏 그렇게 살았다면 그 사람은 큰 복을 지닌 사람입니다.-(『시편명상』, 김정준 지음, 한국신학연구소, P.371)
어린 시절, 아직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밤이 되면 호롱불 등잔 밑에서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달도 잠자는 밤이면 밖에 나가기가 쉽지 않았지요.
요즈음처럼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게 아니기에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면 등잔이 있어야 했어요. 밤이 되면 등잔이 있어야 길가는 데 편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밤길을 더듬더듬 가야 했지요.
밤 중에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반갑기만 했어요.
캄캄한 밤, 호롱불이 켜진 방 안에 들어서면 어찌나 밝던지요. 심지어 마음속까지 환해졌지요.
날이 어둑해지고 어둠이 내리는 퇴근길을 유심히 살펴보세요. 길가 가로등 불빛, 휘황찬란한 가게 간판 불빛, 가게 밖으로 쏟아지는 불빛이 불야성을 이루지요. 밤인지 낮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불 꺼진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현관 등이 자동으로 켜져요. 얼마나 밝습니까? 피곤으로 지친 나를 반갑게 맞이하듯 현관 등은 그렇게 우리를 반깁니다. 그리고 거실 등을 켜면 마침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깜깜한 어둠이 스위치를 켜자마자 한순간에 흩어져 버리지요.
시편 119편 시인도 등불의 소중함을 경험했을 거예요.
하여 어두운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할까 고심했을 겁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등불을 의지하듯 험한 인생길을 걷는 시인에게도 주님의 말씀은 마치 등불이요, 빛과 같이 느꼈던 거예요.
어두운 길 해 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 발을 비추는 등불이 필요하겠지요. 그렇듯 하나님을 의지하던 시인은 주의 말씀이 등불임을 깨달은 거예요. 시인의 고백이야말로 신앙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어요.
주의 말씀이 어두운 인생길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내 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빛입니다. 주의 말씀을 평생 등불 삼고 인생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빛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살다가 힘들고 괴롭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슬플 때마다 주의 말씀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주의 말씀이 등불이 될 거예요. 보이지 않던 길이 점차 드러날 거예요. 새벽녘 안개 낀 오솔길이 아침 햇살에 벗겨지듯 내가 가야 할 길이 선명하게 드러날 겁니다.
그렇습니다. 어두운 인생길에 주님은 분명히 빛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지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질 것이다.”(요 8:12)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고자 애쓰는 사람, 그 사람은 진짜 행복한 거예요. 복(福) 있는 사람이에요. 다 가진 겁니다.
복(福)이란 한자를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보일 ‘시’(示)는 보통 신(神)을 의미해요.
한 ‘일’(一)은 ‘하나’를 뜻하고요.
입 ‘구’(口)는 ‘입’을 뜻하지만 보통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밭 ‘전’(田)은 밭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누릴 복을 갖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복이란 한자를 직역하면, 신은 세상에 태어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밭을 선물로 주셨다는 의미로 풀 수 있어요. 말하자면 복이란 한 사람이 선물로 받은 자기 몫(먹고 입고 누리는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에요. 이게 복(福)이란 말에 진정한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흔히들 복을 이렇게 말하지요.
복(福)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자기 이름을 더 알리는 거라고요. 그러나 누구나 하늘로부터 받은 자기 몫 외에 먹고 입고 누리는 건 복이랄 수 없지요. 복도 따지고 보면 누구나 먹고 입고 누리는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福/幸福)은 무엇일까요?
복이란 온전한 거예요. 그게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걷는 길이에요. 주님의 법대로 사는 게 복이요 그렇게 행동하고 사는 게 온전한 겁니다(1절).
또한 복이란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온 마음으로 여호와를 찾는 거라고 했습니다(2절). 더구나 불의를 행하지 않고 주의 길(道)을 걸어가는 것입니다(3절).
그렇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면서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고 살아가는 거지요. 우리가 날마다 주님과 사귀어요. 그분과 함께 걸어요. 그리고 내가 힘들 때 주님이 나를 업고 있어요. 이러하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더 바랄 게 없지요.
따뜻한 엄마 품이 아기에게는 더 바랄 수 없는 복이지요. 내가 하나님 품에 안겨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먹고 마시고 누립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루하루 삶을 새롭게 꿈꾸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을 만나니 그 사람이 소중할 수밖에요. 하나님 안에서 인생길을 걸어가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고 돌보시니 세상에 이런 복이 또 있을까요?
오늘 본문 시편 119편 1절은 전체 176절을 한 구절로 요약한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곧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걷는 사람이 온전한 복이 있습니다. 토라는 ‘율법’이란 뜻인데 법, 계명과 말씀, 길과 도(道), 약속, 법도, 명령, 뜻과 증거, 판단과 규례 등 여러 가지 개념으로 달리 표현합니다.-(『관주∙해설 성경전서』, 독일성서공회 해설, 대한성서공회, P.890)
시편 119편 1~176절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토라 신앙’입니다. 시편 119편은 오직 하나님 말씀을 기리고 높이는 유일한 노래이자 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요.
그렇다면 왜 오늘 시편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기리고 높이는 것일까요?
여기서 역사적인 상상력을 해 봅시다.
사실, 시편 1~150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나온 시입니다. 토라(תּוֹרָה)란 말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토라(תּוֹרָה)는 본래 ‘가르침’, ‘교훈’이란 뜻이에요. 토라의 어원적 의미는 ‘이끌다, 인도하다’예요. 이런 뜻을 가진 말씀이 잠언 6장 23절입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토라)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곧 하나님의 명령이 곧 토라예요. 또한 토라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등불이고 빛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토라는 이런 말씀입니다. “네가 다닐 때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잠6:22).
말하자면 토라(תּוֹרָה)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토라/תּוֹרָה)”–율법의 의미에 대한 묵상 : IBP 일점일획)
토라란 말속에는 이스라엘의 뼈아픈 역사적 아픔이 배어 있어요.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할 성전이 없었거든요. 게다가 바벨론 제국은 피정복민들에게 가혹한 강압 정책을 폈어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포로들은 그저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어요. 그러던 중 바벨론 제국이 멸망해요.
피정복민들을 가혹하게 통치했던 바벨론과 달리 제국으로 성장한 페르시아 고레스 왕은 피정복민들에게 유화정책을 폈지요. 그들의 종교도 인정했어요.
그는 포로를 풀어주고 고향 땅으로 돌려보냈어요.
그때부터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할 회당을 세웠고요. 과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 말씀에 그들의 희망을 걸었지요.
이방 땅에 포로의 신세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일한 소망은 예배밖에 없었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역사적 고통과 시련과 아픔을 담고 있는 말씀이 바로 시편입니다. 하나님의 토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다양하게 표현한 것 역시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희망이 없었던 거예요. 그만큼 그들의 삶을 지탱해 준 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거예요. 유일한 희망이었던 거지요.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신앙 선조들의 분투(奮鬪) 역시 바벨론 포로기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픔과 같은 맥락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찾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애썼지요. 오직 하나님만이 도둑맞은 나라를 구해 주실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어요.
그런 의미에서 시편 시인이 토라를 법, 계명과 말씀, 명령과 뜻, 길과 도(道), 율법, 법도, 증거와 약속, 판단과 규례 등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보여주는 거예요.
신앙과 믿음은 삶의 형편과 처지가 달라진다고 해서 변할 수 없어요. 기쁠 때나 즐거울 때나 항상 고통과 시련과 아픔을 겪었던 불우한 시절이 있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여 시편 시인은 토라의 신앙을 기록으로 남긴 거지요. 고난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거예요.
우리의 삶이 기록으로 남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의 일기장,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첩, 기쁘고 행복했던 시절, 아프고 슬펐던 일들, 뜻하지 않았던 일들 등등.
지나고 나면 그 기록들이 삶의 역사가 되지요. 그 페이지를 펼칠 때마다 우리는 과거를 성찰하게 되지요. 그만큼 우리 삶이 더 단단해집니다. 더욱 성숙하게 되지요.
이런 맥락에서 오늘 시편 119편을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참 행복이고 은총이고 기쁨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시편 시인은 포로 신세의 뼈아픈 고통, 시련, 아픔을 시와 노래로 기록해 놓았어요.
시편 시인은 복이란, 행복이란 하나님 말씀을 따라 행동하고 사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요, 길을 가듯 하나님 말씀 따라 걷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을 내 삶에서 보여주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을 내가 아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이 내 삶의 기준임을 깨달았던 거예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삶을 비추는 등불이자 빛입니다. 하여 시편 시인은 사람을 복 되게 하는 하나님 말씀을 찬양하고 있는 거지요.
복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깁니다. 비석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한 사람의 공적이나 업적을 후손에게 널리 알리자는 의도가 담겨 있지요.
그렇듯 하나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는 건 곧 자녀들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건 다음 세대를 위한 삶의 기록임을 명심하십시오.
‘주의 법도’(4절)을 잘 지키고, ‘주의 율례’(5절)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은 우리의 삶과 인생을 탄탄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을 따라 성실하게 살면 누구나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가꾸어 갈 수 있다는 뜻일 겁니다.
이렇듯 하나님 말씀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낱낱이 마음에 새기는 거와 같습니다. 그럴 때 어떤 상황이 닥쳐도 우리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을 겁니다(6절).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게 복이요 행복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공평(요쉐르/ר)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마음이 바르고 곧아야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정직한 마음에 자극이 되지요.
7절에서 ‘배우다’는 말로 옮긴 히브리어 ‘라마드’(ד)의 본래 뜻은 ‘뾰족한 막대기로 찌르다’예요. 말하자면 ‘가르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이 내 마음에 찔림이 되어야 배우는 거예요. 정직한 마음이라야 하나님 말씀이 마음에 찔려요.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나를 가르치기 때문에 그렇지요.
하지만 삿된 마음이면 하나님 말씀은 오히려 마음에 가시가 되어요. 욕심이 가득하면 하나님 말씀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교훈이 되지 않아요. 하나님 말씀이 자기 앞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불의하고 삿된 마음은 하나님 말씀을 멀리하게 되지요.
하여 시편 시인은 7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유학에서는 바르고 곧은 마음을 ‘정심’(正心)이라고 말합니다. 정심은 자기를 올바로 닦는 수신(修身)의 근본이에요. 이 정심의 바탕이 바로 성의(誠意)입니다. 성의는 ‘참되고 정성스럽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성의는 ‘참된 뜻’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성의를 다했는가 말할 때 바로 그 ‘성의’를 뜻합니다.
여기서 성의의 ‘의’(意)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말합니다. 뜻밖에 일어나는 생각의 첫머리들을 포함해요. 지금 막 든 생각이 진실하고 정직하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른 마음의 시작이며 자신을 닦는 길의 첫걸음인 거지요.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가 항상 성의(誠意), 곧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심성의껏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내 발의 등불이 되고 내 길의 빛이 될’ 거예요.
하여 시편 시인은 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당신의 율례들을 지키리니 저를 아주 버리지 마십시오.”(직역 성경)
말하자면 시편 시인은 오직 하나님 말씀만 지키며 살겠다는 거예요.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게 복이요 행복임을 시편 시인은 뼈아픈 자기 체험에서 깨달은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 복과 행복이 무엇인지 알겠지요. 복과 행복은 어두운 인생길을 밝혀주는 등불인 하나님 말씀에 있어요. 인생의 참 복과 행복은 하나님 말씀에 있습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요 삶의 기준입니다.
옛 고사성어에 ‘유정유일’(惟精惟一)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오직 한 가지 일에 마음을 쏟아 최선을 다한다는 뜻으로, 바른길만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이 고사성어는 공자가 편집한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극히 희미한 것이니, 오직 정신을 하나로 모아 진실로 그 마음의 중심(中情)을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徵, 惟精惟一, 允執厥中/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유정유일/惟精惟一)-고사성어-jang1338/ 다음카페)
곧 하늘의 마음은 그 드러남이 희미하여 알아채기 쉽지 않고 사람의 마음은 쉬이 위험에 빠진다. 그러므로 오롯이 살펴서 진리를 붙잡고 진리의 중심에 든든히 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정유일(惟精惟一)은 바로 유학적 사유의 핵심인 거예요.
여기서 ‘유정유일’(惟精惟一)의 정(精)은 한 마디로 ‘벼를 찧다’는 뜻이에요. 비유하자면 벼를 찧을 때 겨는 날려버리고 오직 쌀알만 남기는 거지요. 이게 정(精)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유정유일은 수단과 목적도 하나요 길의 여정과 목적지도 하나인 거지요.-(『시편사색』, 오경용 지음/송대선 옮김∙해설, 꽃자리, P.621)
그렇습니다. 벼를 찧으면 남는 건 쌀알만 남듯이 우리가 가는 삶의 여정도, 목적도 오직 하나만 남아요. 그게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인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만 붙잡고 든든히 서가는 거예요.
우리 인생길에 남는 건 오직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거예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 안에서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질 것이다.“(요 8:12/직역 성경)
예수를 따르면 결코 어두운 인생길을 걷지 않아요. 곧 생명의 빛을 가질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가지는 거야말로 복 있는 인생이 아니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마음을 다해 예수가 가신 길을 가려는 거예요.
시편 119편 105절 말씀을 우리 다 함께 낭독할까요?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우리 삶을 복과 행복으로 가꾸시려거든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인 하나님 말씀을 성실히 지키며 사십시오. 그러면 삶의 방식이 온전해집니다. 하나님 말씀 따라 걸어가는 게 복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 복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등불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성실하게 잘 지키며 살기를 원합니다. 벼를 찧으면 쌀 알갱이만 남듯이 인생 뒤안길에 하나님 말씀만, 예수의 흔적만 남게 하소서. 그렇게 평생 행복을 아름다운 꽃과 같이 가꾸어 가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