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행과 삶과 죽음의 혼재
이성혁(문학평론가)
1
한 권의 시집에는 시인의 시론이나 시인의 시작詩作 자세를 담은 시가 실려 있기 마련이다. 권혁재 시인의 이 시집 누군가의 그늘이 된다는 것은에서는 첫머리에 실린 「독주」와 다음에 실린 「목련」이 그러한 시로 보인다. 이 두 시는 서로 깊은 관련성이 있다.
내일 새벽에
시 한 편이
그를 죽인다고 했다
예리하고 날카롭게
시를 가는 소리
시에 손이 베였는지
손이 따끔했다.
- 「독주獨酒」 전문
시를 갈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나’, 즉 화자인 것 같다. 시에 손이 베여 손이 따끔한 주체가 화자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를 갈고 있는 이는 화자 같으면서도 3인칭인 어떤 대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3인칭 ‘그’가 시를 갈고 있고 화자는 “시를 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애매함을 권혁재 시인이 노린 것일 수도 있겠다. 시를 쓸 때의 ‘나’는 ‘그’일 수 있는 것이다. 시를 쓸 때 ‘나’는 이전의 ‘나’와는 다른 시공간에 들어선다. ‘나’는 ‘그’가 된다. 타자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시, 나아가 예술을 하는 이유이지 않겠는가. 권혁재 시인은 <자서>에서 “시를 위한 시인으로 늙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는 시가 다른 삶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볼 때 1연의 ‘그’는 시인 자신 역시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시인이 언어를 “예리하고 날카롭게” 갈아 시를 완성했을 때 그 ‘시 한 편’은 ‘그’를 죽일 것이다. 시 한 편을 쓰는 과정에서 특이화 되는 ‘나-그’는 그 시가 완성되었을 때에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을 가리킨다고 여겨지는 시 제목 ‘독주’란, 시인이 단 한자에 따라 홀로 마시는 술이란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홀로 연주한다는 ‘獨奏’ 또는 독이 든 술이라는 ‘毒酒’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다. 시 쓰기란 홀로 언어를 연주하는 일이며, 한편으로 어떤 작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 한 편이 완성되면 그 시를 썼던 ‘나-그’는 사라지기에. 그렇다면 그 시라는 칼의 날은 자신을 베는 데 쓰인다고 할 수도 있을 터, 「목련」은 바로 ‘시-칼’을 가는 일이 어떠한 현상을 낳는지 보여주고 있다.
바람에 칼날을 갈아
허공을 하얗게 깎는다
떨어지는 허공에서
칼 냄새로 번지는 꽃잎
베인 자국마다
몸살 난 사랑이,
환절기 기침 소리로
봄날을 건너간다.
- 「목련」 전문
시인이 “바람에 칼날을 갈아” 하는 일은 무엇인가? 즉, 시를 쓰면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허공을 하얗게 깎는” 일이다. 허공을 깎는다는 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인은 삶을 허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재 시인의 관념 또는 의식? 여하튼 시인에 따르면 허공은 비어 있는 것 같지만 비어 있지 않다. 허공을 깎으니 꽃잎이 “칼 냄새로 번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때 ‘시-칼’을 갈 때 부싯돌 역할을 하는 것이 허공을 횡단하는 바람이다. 여기서 바람이란 삶을 가로지르는 정동 또는 마음의 흐름 아닐까. 우리가 삶을 회억할 때 닥쳐오는 마음의 격정을 생각해보라. 이 바람으로 시어의 날을 갈고 그 시어를 통해 삶의 껍질을 깎는 것. 위의 시는 그것이 바로 시 쓰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때 꽃잎처럼 아름다운 기억들이 시의 냄새를 풍기며 번져나가고 ‘삶-허공’의 껍질이 벗겨진 자국에는 “몸살 난 사랑이” 드러난다. 시 쓰기란 이 아프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드러내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시 쓰기는 사랑을 몸살 나게 하여 기침을 터뜨리게 한다. 그럼으로써 사랑을 드러낸다. 사랑이 몸살을 앓는 것은 환절기이기 때문이다. 환절기를 맞이해서 사랑은 “봄날을 건너”가고 몸살을 앓는다. 그런데 계절을 바꾸는 주체, 그것은 바람 아니겠는가. 시 쓰기는 그 바람에 자신의 날을 갈고 허공을 깎는 일, 하여 허공 안에 감추어져 있던 사랑은 칼 냄새, 즉 환절기의 바람 냄새에 의해 몸살을 앓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시 쓰기는 사랑을 아프게 만들고 기침을 하게 만들어 밖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계절과 계절의 경계를 넘어가는 환절기의 바람처럼 시 쓰기가 어떤 경계를 넘어서면서 이행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카루스의 시간」에 따르면, 그러한 작업이란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땅과 하늘의 경계를 가르며 허공 위로 날아가는 일이다. 그리하여 권혁재 시인은 시집에 제각각 달려 있는 이카루스의 날개를 상상할 터인데, 자신의 시집에도 이카루스의 날개를 꽂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빛으로 젖어가는
너의 날개를 보며
나는 불새라 했다,
불타지 못한 사랑이라 했다
시집에 꽂힌 날개를 꺼내
시들이 낙인찍힌 깃털을 세우며
신화의 집으로 날아가는 너를 떠올린다
밀랍 방울에 섞여 떨어지는
너의 빗줄기 같은 눈물.
- 「이카루스의 시간」 후반부
한 권의 시집에 꽂혀 있는 날개, 이 날개는 “시들이 낙인찍힌 깃털”로 이루어져 있다. 이 깃털에는 태양빛에 녹은 ‘밀랍 방울’이 묻어 있다. 그 밀랍 방울은 하늘을 날아오르다 추락한 시의 눈물이다. 시는 사랑의 이행, 사랑의 비행이다. 그 사랑은 태양빛에도 불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은 스스로 불타는 불새이기 때문이다. 비행하는 사랑은 불새며 시다. 하지만 하늘로 날아오르는 사랑은 지상으로 추락하게 되어 있다. 사랑은 “하늘빛으로 젖어” 눈물을 흘리게 되기 때문이다. 시는 지상을 초월할 수 없다. 시가 종교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시는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지만, 슬픔의 무게로 다시 지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종교는 숭상하지만 시는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늘로의 비상뿐만이 아니라 지상의 눈물 역시 시의 본질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본질이 사랑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깊이 품어두고 있는 사랑, 이 사랑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2
이 시집에서 드러내고 있는 몸살 앓는 사랑의 대상은 누구일까. 아버지 아닐까. 시 「해후」는 화자의 아버지에 대한 가족사를 조금 엿보게 해준다.
꽃차례로 떨어진 동백
떨어진 동백 꽃잎만큼 붉은,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반백 년을 캐내도 없던 수족이
무연고 유해에 섞여
몇 조각 남지 않은 뼈가
마지막 고통에 스며든 유언을 하듯
검붉은 부고장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동백꽃 디딘 발걸음
그해 사월도 그랬을까요
물질을 나가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줄에 널린 미역처럼
한없이 흔들리며 간기를 빼냈습니다
뜯겨 마당에 떨어진 아버지의 옷고름과
한 집안의 살림을 흩뿌린
부엌의 깨진 그릇들
시간이 지나도 아픔은 웃자라
한 시대를 숨비소리로 건너왔습니다.
어머니의 눈물을 동백 꽃잎으로 받아드는 사월
오랫동안 참았던 말문이 트이는지
아버지의 유골이 자꾸 들썩거립니다
나의 참았던 눈물도 툭툭 떨어져
아버지의 뼈를 어루만졌습니다.
- 「해후」 전문
위의 시의 화자가 시인 자신인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시인은 시 쓰기 과정에서 ‘그’가 되기 때문에, 화자를 실제의 권혁재 시인 자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편으로 시인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아버지가 “반백 년을 캐내도 없던 수족이/ 무연고 유해에 섞여/ 몇 조각 남지 않는 뼈”로 “검붉은 부고장”과 함께 돌아왔다는 것을 보면, 수십 년 동안 아버지의 시신은 발견되지 못한 것 같다. “물질을 나가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나 “한 시대를 숨비소리로 건너왔습니다”라는 구절에 따르면, 어머니는 해녀이며 아버지의 죽음은 밖으로 발설하지 못하는 어떤 사건에 따른 것임을 짐작게 한다. 특히 “뜯겨 마당에 떨어진 아버지의 옷고름”이나 “부엌의 깨진 그릇들”과 같은 구절들로 보아,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난폭하게 끌려 나간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인지 ‘반백 년’이나 ‘그해 사월’이라는 시어는 ‘제주 4·3 항쟁’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화자의 아버지는 4·3의 희생자가 되기에, 그는 실제의 권혁재 시인은 아닐 터이다. 어떤 실존하는 인물을 ‘나-화자’로 세운 것일까? 물론 시에 따르면 “그해 사월”은 어머니가 부고를 들은 날이다. 그러나 이 ‘사월’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죽음의 달이라는 의미와 함께 아버지가 죽은 날이 그날이라고도 생각되는 것이다(‘세월호’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래서 위의 시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서술하는 듯이 보이지만 함축적이고 암시적이기에, 다면적으로 읽는 것이 좋겠다.
「해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시로 보이는 「제주여자」에서 어머니는 화자에게 “아버지에 대해 알 나이가 되었다”며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행방불명된 아버지는 이미 물에 묻었”다니, 갑자기 행방불명된 아버지는 수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뱃사람 계집으로 숨죽여 살라”는 위협을 듣는 것을 보면,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난/ 아버지”의 죽음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그리고 이 시에서 어머니는 제주도 출신임이 확실하게 드러나며,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지아비 생사도 모른 채 낳은”이라는 이 시의 구절을 볼 때 화자는 당시 어머니의 배 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을 터, 아버지의 존재를 “섬의 끝없는 궤도 속”을 돌고 있는 “아버지의 비명소리로 불어간 바람”을 통해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구절은 ‘바람’이 권혁재 시인에게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려준다. 그에게 ‘바람’은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의 시간,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시인의 마음을 중첩하여 상징한다.
아버지에 대한 또 다른 시 「가을밤」에서도 ‘바람’이 등장한다. 화자가 “아버지의 유분을/ 산등성에서 뿌리”자, 이 ‘유분’을 “바람이 골짜기 아래로/ 구석구석 갖다” 나른다. ‘아버지의 비명소리’인 바람이 죽임을 당한 아버지의 시간을 상징화한 것임과 함께 이에 대한 시인의 마음의 격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시인의 마음은 ‘아버지의 유분’과 함께 흐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저 ‘골짜기 아래’ ‘구석구석’은 시인 마음의 지대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유분’으로 존재하게 된 아버지는 ‘바람’을 매개로 시인과 경계 없이 섞이면서 시인의 마음 이곳저곳으로 날아가 내려앉는다. 그것은 시 쓰기를 통해 가능한 것, 이 사랑의 이행인 시 쓰기는 아버지와 시인 사이의 경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이 앞서 걸어간 바닷길
아침에 부표를 던져놓고 돌아왔다
바람과 파도가 지워버린 길
뒤처진 숭어 한 마리가
당신이 흘린 길을 주워 담았다
당신의 길과 바다의 길
길은 길끼리 이별하지 않았다
당신이 걸어간 길을 위해
바다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당신과 바다의 경계도
길처럼 무의미했다.
- 「바닷길」 전문
위의 시의 ‘당신’은 아버지를 가리키지 않겠는가. “당신이 앞서 걸어간 바닷길”이라는 구절을 보면 말이다. 어머니에 따르면 아버지는 시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물에 묻히신 분, 시인 역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 바다와 같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아버지를 바다로 앞서 걸어간 분이라고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 이에 시인의 시적 사유는 좀 더 심오해진다. ‘당신’이 바다에 들어감으로써 “바람과 파도가” 당신의 길을 지워버리고, 그리하여 “당신의 길과 바다의 길은” “이별하지 않았다”는 시적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당신은 결국 바다와 결합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저 바다는 자연의 세계를 상징하겠지만 한편으로 시인의 마음이 의탁된 객관적 상관물이라고도 생각된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친다. 죽은 아버지의 시간이 휘몰아치고 이에 따라 시인의 마음도 일렁인다…. 이로써 바람과 파도의 경계는 무의미해지고 “당신과 바다의 경계”도 무의미해진다. 당신과 시인의 마음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계가 무의미해진다고 해서 당신과 바다가 동일하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당신과 바다가 뒤섞이면서 하나의 시가 창출된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 바꾸어 말하면 권혁재 시인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당신’을 떠올리며 하나의 시적 인식, 나아가 시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항선」에 따르자면 ‘망망대해로’ 편지를 지속적으로 보냈을 때 ‘당신-시’는 나타난다. 이 시에서 ‘당신’은 외항선을 타고 바다 저 멀리 떠나간 사람으로 등장한다. ‘나’의 편지에 ‘당신’은 “날마다 떠오르는 수평선”으로 답장을 보낸다. 그 답장은 “먼바다 어디쯤에서/ 태풍의 눈으로/ 시를 읽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 수평선과 그 너머 태풍은 당신을 “시를 읽는” 모습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시를 읽는 주체는 ‘당신’이지만, 당신과 바다의 경계가 무의미해졌으므로, 바다에 의탁한 시인의 마음이 ‘당신’의 ‘답장’인 수평선에서 시를 읽고 있다고 방금 인용한 구절을 고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권혁재 시인은 아버지가 묻힌 바다로부터 ‘당신-시’를 발견하고 한 편의 시를 써낸다.
3
시를 발견하는 과정은 고통을 수반한다. 시를 통해 현현하는 ‘당신’은 만날 수는 없는 대상인 것이다. 발견된 시는 시인을 아프게 한다. 그리고 이 아픔이 시의 서정을 풀어낸다. 또 다른 ‘당신’ 시편인 아래의 시를 읽어본다.
당신에게 갔다 오면
몸이 아프다
바람의 가시로
통점을 찔러도
파도 소리 솟구쳐 오른다
아플수록 떠오르는 당신 얼굴
돌아선 발 앞에
해풍으로 스치는 꽃대
당신도 아픈지
불어간 바람에서
바다 냄새가 난다
잊지 말라는 맹세의 말을
바닷가에 앉아
바람에 새겨 보내는 의식
등에 닿은 손짓이
열꽃을 피우는지
당신에게 갔다 오면
몸이 자꾸 아프다.
- 「해국海菊」 전문
‘당신’을 느끼게 해주는 바람은 ‘가시’를 가졌다. 그 ‘가시’는 통점을 찌르지만 피할 수 없다. 아플수록 마음속의 “파도 소리”는 계속 ‘솟구쳐’ 올라 ‘당신 얼굴’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당신 얼굴이 현현할수록 시인의 마음은 더욱 아플 것이다. 하지만 바다와 당신 사이의 경계가 무의미해졌듯이, 자신이 아플수록 “당신도 아”프다는 것을 시인은 감지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당신’의 흔적을 가져오는 바람에서 나는 ‘바다 냄새’다. 앞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바다는 시인이 자신의 마음을 의탁한 곳이면서 ‘당신-아버지’가 묻힌 곳이다. 그러니 시인의 마음에 스며드는 ‘바다 냄새’는 ‘당신’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는 “잊지 말라는 맹세의 말”이 새겨져 있다. 바람이 죽은 ‘당신’의 손짓이 되어 시인의 등에 닿으면서 시인의 몸에는 열꽃이 피어오른다. 시인은 이러한 아픔을 감내하면서 계속 바닷가로 나아가 가시처럼 찔러오는 바람의 ‘바다 냄새’를 맡으며 ‘당신’을 잊지 않겠다는 맹세를 지키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바다를 마주하면서 시를 쓰는 일일 것이다. 권혁재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당신에게 갔다 오”는 일이기에.
그래서 ‘당신’은 시적 주체에게 밝은 모습으로만 현상하지 않는다. 「언뜻」과 같은 시에서는, 당신은 누군지 모르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 대상은 당신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예전에 내 편이 되어서/ 웃어주던 당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당신은 시인에게 자신을 위협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 당신은 시인의 주체성을 흡수해버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당신이 “보름달 같은 눈을 뜨고” “나를 조금씩 빨아들”이는 흡혈귀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당신은 시인을 아프게 하면서도 그를 보는 일을 거부하지 못하고 나아가 그에게 끌려들게 하기 때문에, 당신은 알 수 없고 무시무시한 존재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몰 이후」에서 당신은 어둠의 이미지를 동반하면서 등장한다. 당신 얼굴이 “물낯에” 뜨고, “딸꾹질처럼 번져”온다. 그리고는 “어둠이 물속에서 차츰 떠올라/ 물기에 젖은 당신을 감추었다”는 것. 하여 당신을 부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어둠이 당신을 삼켜버리는 장면은 당신이 죽음과 연관된 존재임을 다시 상기시킨다.
당신에게 빨려드는 삶이란, 시인에 따르면 “누군가의 그늘이 된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 ‘그늘’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이 삶이 어떠한 것인지 시적 사유를 펼침으로써 당신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는 듯하다.
누군가의 그늘이 된다는 것은
나의 색깔을 지우는 것이다
한 번도 내 빛깔을 갖지 못하고
누군가의 바탕 색깔만 되어
침묵으로 누르고 있다
길고 짧은 흔들림에
높고 낮은 출렁거림에,
한 빛으로 물들어가며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색
평생 지워야 할 망각의 그림자도
시간을 탈색하며 변해간다
삶과 죽음의 온기가
동시에 빠져 내려가는
그늘의 짙은 고요
누군가의 그늘이 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잘 섞어주는 일이다.
- 「그늘」 전문
“누군가의 그늘이 되는 삶”이란 “나의 색깔을 지우”고 “한 빛으로 물들어가며/누군가의 바탕 색깔만 되”는 삶이라는 것. 위의 시에서 시인은 이러한 삶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삶이 가진 색깔을 탈색하는 시간을 사는 삶이 그늘의 삶이다. 이 삶을 살려면 시인의 삶을 누를 침묵을 삶의 기둥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침묵하는 존재자다.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침묵하는 존재자의 빛인 어둠으로 물들면서 형성되는 그늘은 “짙은 고요”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이 고요 속에서 “삶과 죽음의 온기가/동시에 빠져 내려”간다고 말한다. 저 “높고 낮은 출렁거”리는 바다를 통해 현현하는 당신을 묵묵히 응시하면서 당신의 빛에 물들어가는 삶이란, 온기를 서서히 잃어버리고 서늘한 그늘이 되는 삶이라는 것. 시인은 이러한 그늘이 될 때 “삶과 죽음을 잘 섞어”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당신의 그늘이 된다는 것은 당신의 죽음이 시인의 삶을 물들이는 것이기에, 그것은 삶과 죽음이 섞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일 테다.
이리하여 권혁재 시인은 당신에 대한 사랑을 통과하면서 삶과 죽음이 혼재混在하는 그늘의 삶을 자신의 삶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는 혼재의 시간에 놓일 때의 세계의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달이 가장 작아지는 ‘그믐’의 시간이 그러한 시간이다. 세계가 어둠 속으로 잠겨가는 그믐에서 세계는 삶과 죽음의 혼재를 드러내는 이미지를 발한다.
먹지에 스며든 통증
하늘빛이 자궁으로 들어가고
장승의 광대뼈도 검게 물들었다
느티나무를 뚫은 바람은
밤의 몸을 가르고
억새가 잠든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아픈 표정을 가린
팽나무의 실루엣이 더 검게 보였다
하늘에서 잿가루가 떨어져
밤길을 걷는 발자국이 지워지는 그믐
모든 하늘빛이 자궁으로 되돌아갔다.
- 「달이 돌아갔다」 전문
그믐은 “하늘빛이 자궁으로 들어가”면서 “하늘에서 잿가루가 떨어”지는 날이다. 검은 잿가루는 물론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된 이미지다. 그런데 이 죽음의 이미지는 탄생과 관련된 이미지인 ‘자궁’과 결합되고 있다. “자궁으로 들어”간 ‘하늘빛’이 잿가루가 되어 그 자궁에서 다시 나오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하여 그믐달이 뜬 밤에는 삶과 죽음이 뒤바뀌고 혼재되면서, 세계는 ‘먹지’처럼 검게 변화되어간다. 이러한 변화에는 통증이 수반되기에, 세계는 “아픈 표정을” 짓는다. 그 통증은 “밤의 몸을 가르”며 세계의 뭇 존재자들을 꿰뚫으며 지나가고 있는 바람 때문이다. 바람은 잿가루, 즉 죽음의 흔적을 여기저기 뿌리고 있는 것, 세계의 피부에 닿은 그 잿가루는 통증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렇게 그믐의 시간에서 세계는 죽은 자의 흔적들이 스며들어 형성되는 검은 그늘로 아프게 현현한다. 그런데 시인에게 이러한 시적 인식은 바다로 사라진 ‘당신’에 대한 사랑을 통해 다다를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이행. 밤의 몸을 가르는 바람, 통증을 세계에 퍼뜨리는 바람은 그 사랑의 이행이 일으킨 것. 그리하여 바람은 우리가 잊지 않고 사랑해야 할 죽은 자들을 이 세계에 부활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저 “모든 하늘빛이 자궁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에 놓인 세계의 모습에서 시를 발견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저 어두워져 가는 풍경을 시화詩化한 것 아니겠는가. 그 시는 죽음을 품고 있는 어둠이 이 세계와 공존하고 있으며, 비록 우리를 아프게 하더라도 그 어둠을 배척하지 말고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 나아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시적 진실이 현상된 것이 위의 시가 보여주는 그믐의 풍경이다. 그리고 이 풍경이야말로 권혁재 시인이 이 시집에서 도달한 하나의 경지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