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어머님의 은반지(銀斑指)
한성구 • 김금순 가정
1. 목회 은퇴 및 중국 선교, 2. 문윤국 목사님의 셋째 아들 문경봉 할아버지, 3. 춘실이 엄마, 4. 문윤국 목사님의 셋째 아들 문경봉 할아버지와의 만남, 5. 참어머님의 은반지, 6. 문윤국 목사님의 여생터 복원 사업
주요 내용 : 중국 선교를 인연으로 하여서 문용현 회장님을 모시고 단동으로 가서 문윤국 목사님의 셋째 아들인 경봉할아버지를 만난 이야기, 김경계 충모님께서 배가 고파서 은반지를 맡기고 보리쌀을 빌려간 이야기, 그 반지를 참아버님께서 참어머님께 끼워주심 등
1. 목회 은퇴 및 중국 선교
1982년 10월 14일, 6000가정 축복을 받았다. 인류역사 6천년의 한(恨)을 푸는 사명을 가진 축복가정의 일원(一員)이 되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뜻길을 따르는 길은 쉽지 않았다.
12월에 남자들이 동원의 특명을 받았고, 나는 기꺼이 출가하였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고향 땅 하란을 떠나서 미지의 땅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처럼,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짐을 챙겼다. 아내도 나의 결심에 동의하였다. 동원자들은 수택리 중앙수련소에 모여서 이요한 목사님의 특별지도를 받으면서 40일 수련을 수료하였다.
1983년 2월부터 목회를 시작하였지만, 개인 사정이 생겨서 1997년 초에 은퇴를 하고 집에서 머물면서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뜻의 성취를 향한 마음의 열정은 나로 하여금 편하게 쉬게 하지 않게 하였고, 파도처럼 나를 밖으로 밀어내었다.
나는 참부모님과 하늘부모님께 기도를 드렸다. 이왕이면 아직 육신을 갖고서 실적을 봉헌할 수 있는 나이에 체력이 있으므로 좀 더 멋지게 일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마침내 1997년 4월에 “중국으로 가라.”는 마음의 계시를 받고서 세계통일을 위한 심정 용사로서 당당하게 중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중국 선교를 위해서 중국에 갔지만 중국은 종교의 자유가 없는 국가라서 내 뜻대로 선교를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다. 중국에는 이미 1985년 12월에 황엽주 선교사가 파송되었으나 여전히 비밀스런 선교(宣敎) 잠행(潛行)을 하고 있었다. 6500가정의 윤경환씨는 북경에서 사업비자로 들어가서 전도하고 있었다.
나는 13억 중국 인구를 식구로 만들고 축복가정으로 만들어서 하늘 앞에 봉헌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과도 같은데, 현실에서는 마음 놓고 통일원리를 전할 수가 없었다. 창조원리를 전파하면서 하늘부모님의 슬픈 사정과 원한을 가르쳐 주고, 회개시키고, 참된 아들과 딸로 만들고, 진주처럼 빛나고 아침 이슬처럼 맑은 축복가정으로 만들고 싶은 열정이 내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었지만, 겉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제약이 많았다. 중국인들이 무신론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자랐기에 하늘 앞에 흠이 없는 선남선녀는 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저들을 유사선남선녀(類似善男善女)로 중생 부활시켜서 면사포와 예복을 입히고 축복식장에 들여보내고 싶었다.
중국 선교를 위한 내적인 나의 욕구는 가슴 속에서 활화산처럼 용틀임하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출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가 마치 감시 카메라처럼 전 국민을 늘 감독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외국에서 온 종교인에 대해서는 각별한 밀착 감시를 하였다. 저들이 보기에 만약 나에게 작은 실수라도 있다고 판정을 받게 되면, 나는 당장 한국으로 추방을 당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밞고 전진하는 듯했다. 초긴장의 연속이라서 몸의 근육이 늘 경직되어 있었고, 두통이 자주 생겼다. 이러다가 혹시 건강이 악화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되었다. 한국에 있는 아내와 가족들도 나에 대해서 걱정이 많았고, 나를 위한 특별기도 정성을 많이 드렸다. 그 덕분에 나는 뜻있는 선교를 할 수 있었다. 아내와 가족들에게도 크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고, 가족의 힘을 체휼하였다.
중국은 파륜궁과 통일교회, 두 교단을 반대하기 때문에 나는 가정교회 형태로써 어렵게 지하 선교를 하였다. 참부모님께서는 1989년 8월에 중국 광동에 팬다 자동차 설립을 하면서 엄청난 자원을 투자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그것을 삼키고 말았다. 중국 정부는 엄청난 이익을 챙겼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에 대한 금지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고, 우리 통일교회에 대한 감시도 철저하였다.
1985년, 참아버님께서 미국 댄버리에서 옥고를 치르고 계실 때에 중국 연변대학교 총장이 찾아가서 만주에 살고 있는 250만명의 중국 조선족들의 어려운 상황을 참아버님께 보고를 드렸다. 참아버님께서는 보고를 들으시고 나서 바로 250만 달러를 주시면서 연변대학교를 잘 육성하라고 지시하셨다. 총장은 모택동의 동상을 없애고 그 자리에 공과대학을 만들었고, 그 입구에는 참아버님의 이름을 새기는 대신에 미국의 국제교육재단에서 250만 달러를 주어서 만든 건물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중국이 종교를 거부하는 분위기를 고려한 처사였다. 내가 연변대학교에 갔을 때에는 많은 세월이 흘러서 기단의 벽돌들이 떨어져 나가서 보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곳을 성지(聖地)로 삼고 새벽마다 거기서 기도하였다. 특히 낯선 중국에서는 기도의 정성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하늘에 매달렸다.
중국은 국가가 인정하는 기독교 신학교를 나온 목사만 교회 단상에 올라가서 설교를 하게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간 나의 경우에는 공안의 단속이 심하였고, 공개적으로 설교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지하교회 즉 가정교회를 비밀스럽게 진행하게 되었다. 대만 식구로서 중국에 가서 활동하는 선교사들도 늘 감시를 당하며 전화 도청도 당하였다. 사적인 자유나 인권 존중은 전혀 보장을 받지 못하였고 나도 그러하였다.
나는 관광비자로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조선족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였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쑥뜸을 하면서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눈치를 보면서 원리를 가르쳤다. 다행히 소수가 동의하여서 성주를 마시게 인도하면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공산주의를 주창한 마르크스는 “미래에는 공산주의가 확장될 것이고 민중을 기만하는 아편과 같은 종교는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이다.”라고 전망하였는데, 중국은 이 견해를 따르고 있었다. 종교는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불건전한 조직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현대에는 종교를 허용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종교를 부정하고 탄압하는 공산주의 두 이념 공동체가 확연히 구분되면서, 종교를 허용하는 국가나 체제가 훨씬 더 잘 산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신봉자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른다. 아니 소수의 지배층 사람들이 자기 권력 유지를 위하여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한다. 인민을 위한다고 하는 구호는 지배를 정당화하는 허구라는 것이 세상에 드러났다. 인민 해방이 아니라 인민을 노예화하고 공산당원들이 온갖 특혜를 받으면서 사는 정치체제가 저들의 속셈임을 만천하가 알게 되었다. 참부모님의 생애와 사상으로써 진정한 인민해방을 가져다주어야 할 것이다.
2. 문윤국 목사님의 셋째 아들 문경봉 할아버지
문윤국 목사님은 참아버님의 셋째 작은 할아버지(문치국, 문신국, 문윤국)로서 종조부가 되신다. 목사님은 해방이 되고 나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7만원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어 독립자금으로 사용하게 하였다(《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30쪽). 그 당시 하루 일당(日當)이 약1원이었다. 현재에 일당을 10만원으로 볼 때에 7만원을 요즘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70억 정도가 되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문윤국 목사님은 물려받은 전답을 팔고, 금광 개발을 한다고 하면서 친척들의 돈을 거두어서 상해로 보내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으로서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을 파악하셨고, 또한 일제의 불의한 조선 침탈에 대해 종조부님은 목사 및 정의의 사도로서 일제 침탈에 맞서 싸웠다.
그런 이유로 인하여 참아버님은 문윤국 종조부님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다. 그 이유는 참아버님이 10살 때에 가족들이 종조부님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여서 참아버님께서 성경을 아시게 되었고, 기도의 힘을 확신하게 되었고, 가족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전력 투입하였다는 조건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아버님께서는 16세 때에 묘두산에서 불쌍한 처지에 있는 조선인들과 죄악의 늪에서 신음하는 세계 인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셨다. 그런 중에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종조부이신 문윤국 목사님은 참아버님을 본격적인 재림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인도하신 분이 되었다.
문윤국 목사님은 전주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 경운과 경호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나서 북한에는 김일성 공산당이 생겼고, 그들은 목사님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혹시 공산정권에 대해서도 저항하는 운동을 벌이는 중심인물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박해를 가하였다. 결국 두 아들 경운과 경호를 공개 처형하고 말았다. 문윤국 목사님까지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다. 목사님은 남은 가족들과 원근 친척들에게 눈물로 작별을 고하고, 간신히 목숨을 보전하여 혈혈단신으로 탈출하여 월남하였다.
이처럼 자식을 잃은 충격적인 사건과 공산정권의 폐해를 몸소 겪은 목사님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서 남한으로 피신하여 왔고, 피신 기간에 강원도 정선의 깊은 산 중에서 은둔하셨다. 목사님은 만주를 왕래하는 중에 둘째 부인을 만나서 아들 경봉을 낳았다.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서 경봉할아버지가 되었고, 북한 신의주에 거주하고 계셨다. 내가 문용현 회장님을 모시고 중국 단동으로 가서 경봉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고향에서 참아버님과 문용현 회장님은 경봉할아버지하고 같이 함께 자랐다고 한다. 문용현 회장님은 6•25 전쟁 당시에 인민군에 끌려가서 전쟁을 하다가 유엔군에 의하여 포로로 잡혔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있던 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로 풀려나서 남한에서 살게 되었다. 휴전이 되고 나서 문용현 회장님의 형제들은 충남 아산군에서 옹기를 굽고 판매하는 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참아버님을 만나게 되었다. 문용현 회장님의 형인 문용기 장로님의 부인이 기성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재림주라고 하며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고 교회에서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상의한 후에 직접 만나보고 나서 재림주인지 이단인지를 판단하자고 하여 서울에 왔다. 문용기장로님은 북한에서 같이 성장하면서 자랐던 문용명이 문선명으로 개명을 하였고, 참아버님임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기쁘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처신을 하며 모심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 당황스런 마음도 들었다.
3. 춘실이 엄마
단동에서의 극적인 상봉 배경에는 춘실이 엄마의 역할이 컸다. 그녀는 참아버님의 고향인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 살았고, 중국 사람인 이씨와 결혼하여 살고 있었다. 이 부부는 고향 정주에서 살다가 신의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중국인이라고 많은 멸시와 천대를 하여서 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부부는 다시 중국 단동으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되었다.
그 가정의 딸 춘실이가 한국 남자와 결혼하여 한국에서 살게 되었는데, 친청 어머니를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로 단동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초청하는 비자를 만들어서 춘실이 엄마가 한국에 오게 되었다. 춘실이 엄마는 한국에 와서 옛날 고향에서 같이 놀면서 성장하였던 문용현이라는 친구가 생각이 나서 찾아보려고 이북 5도민회에 가서 물어보았다. 그리고 또한 정주 군민회에 가서도 물어보았다. 마침 그 당시에 정주군 군민회장 직위를 맡은 이가 문용현 회장님이었다.
춘실이 엄마는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문용현 회장님 댁으로 가서 며칠 지내다가 문회장으로부터 문윤국 목사님의 아들 경봉씨를 찾아보라는 부탁을 받고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며칠 후에 춘실이 엄마는 문용현 회장님을 중국으로 초청하였다. 문회장님은 중국에 가서 다시 춘실이 엄마를 만나고 귀국하였다.
그런데 귀국 후에 어떤 경찰 간부가 문회장님을 만나자고 하였다. 그 경찰은 문용현 회장님이 중국에 갔다가 혹시 북한의 공작요원으로 부터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가면 큰일이기 때문에 문회장님이 모르는 가운데 중국까지 밀착하여 미행을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절대로 중국에 갈 때에는 혼자 가지 말라고 간곡한 부탁을 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에 문용현 회장님은 춘실이 엄마가 중국에서 문윤국 목사님의 아들인 경봉씨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서 급히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이를 따져보니 경봉씨도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상황이기에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 문회장님은 경찰의 조언을 기억하고서, 누구와 같이 중국으로 가야 할지를 고심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중국 선교사로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나와 같이 중국에 들어가자고 제의하였다. 그 당시에 우리 가족은 서울 중구 충무로에 있는 남평문씨 교회인 문중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내가 중국에 갔다가 귀국하면 항상 문중교회에 가서 보고하였고 예배를 보았기에 서로 잘 아는 식구 사이였다. 나는 흔쾌히 단동으로 동행할 것에 동의하였다. 나 역시 역사적인 상봉을 그리면서 설레기 시작했다. 두 분이 이산가족으로서 갖는 애잔한 마음에 공감되면서 나는 만남을 독촉하였다.
춘실이 엄마는 신의주에 살고 있는 경봉할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오빠야! 중국에서 어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실 상황에 처해 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들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니 한번 중국에 와서 엄마의 소원을 풀어 달라.”
경봉할아버지는 인편으로 받은 그 편지를 공산당 보위부에 보여 주면서 200달러라는 거액을 뇌물로 주고 중국 여행증을 발급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보위부는 편지를 확인하고, 또 돈을 받으면서 허가하였다. 자본주의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공산주의가 돈에 대해 더 부패한 실정이라는 모순된 현실에 웃음이 나왔다.
4. 문윤국 목사님의 셋째 아들 문경봉 할아버지와의 만남
마침내 나는 2010년 6월에 문용현 회장님을 모시고 인천에서 배를 타고 단동으로 가게 되었다. 단동 여객 터미널에 도착하니 춘실이 엄마와 경봉할아버지께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문회장님과 경봉할아버지 두 분은 서로 보자말자 알아보고는 껴안고서 한참 통곡을 하였다.
춘실이 엄마네 집에 거서 여장을 풀고 점심을 먹는데, 조선족들이 위성으로 한국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단동은 무역이나 장사가 잘 되어서 그래도 북한에 비하여 살기가 훨씬 나은 편이었기에 남한 방송 시청이 가능했다. 그 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송해의 전국 노래자랑이 방영되고 있었다. 남한의 방송을 본 경봉할아버지는 흥분하고 놀래서 점심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남한의 텔레비전을 쉽게 볼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한국 정부가 문윤국 목사님께 바친 훈장을 보여 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혈족인 문회장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북한에서 고생하시지 말고 남한으로 가서 같이 여생을 편하게 사시지요.”라고 제안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나이가 늙어서 지금 한국에 가서 잘 살면 뭘 하겠는가? 신의주로 가서 자식들하고 살다가 죽겠다. 남한으로 가자는 제안을 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나를 대신하여 우리 아버지의 묘소를 잘 모셔달라. 이것이 내 마지막 부탁이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셨다. 그의 가슴에는 아버지 문윤국 목사님의 묘소를 참배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분단 현실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분(痛憤)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경봉할아버지는 선물을 가져왔다고 하면서 오래되어 빛이 바랜 손가방을 여셨다. 가방 안에 소중하게 담겨져 있는 선물은 <손바닥 보다 작은 마른 오징어 두 마리, 작은 인삼주 1병, 그리고 삶은 밤 네 개>가 전부였습니다. 분명히 경봉할아버지께서는 당신과 가족들이 먹고 싶은 것을 참고서 고이 간직하여 갖고 오셨을 것이다. 우리가 볼 때는 보통의 흔한 먹거리이지만 북한에서는 대단한 선물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선물을 더 많이 준비하여 갖고 오다가, 중간에서 검문하는 북한 군인들에게 다 빼앗겼고, 그나마 임종 직전 상황에 처하신 우리 어머니께 드려야 한다고 사정하여서 겨우 나머지를 가지고 왔다고 목메인 모습으로 말씀하셨다. 북한의 군인과 주민들은 혹독한 기아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었기에 부정부패가 만연한 실상을 확인하면서 나는 눈물을 닦았다.
경봉할아버지께서는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하여 아주 매우 깡마른 체형이었고, 목소리는 매우 둔탁하였기 때문에 문용현회장님과 나는 은근히 내심으로 걱정을 하였다. 문회장님이 설득하여서 경봉할아버지를 병원으로 데려가서 건강검진을 받게 하셨다. 그 다음날 큰 병원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는 의사의 말을 듣고 모두가 안심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경봉할아버지께서는 그런 건강검진을 처음 받아보신다고 하면서 신기해 하셨고, 고맙다는 말을 수차례 하셨다.
그날 저녁 호텔에서 내가 가지고 간 노트북으로 참부모님께서 북한 고향에 가셔서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시고, 김일성 주석을 만났던 영상 기록물을 보여드렸다. 경봉할아버지는 깜짝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외쳤다.
“아니, 저 용명이가 어찌 위대하신 장군님을 만나는가?”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저 분을 참아버님이라고 부르면서 인류를 구원할 재림메시아로 모시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화면에 나오니까 “참아버님 안녕하십니까?” 라고 인사를 드리라고 교육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문회장님이 한국 황선조 협회장에게 스카이프 영상전화로 통화를 하도록 주선하였다. 두 분은 영상으로 인사를 나누었고, 반가워하였다. 문용현 회장님은 경봉할아버지께 “황선조 협회장이 내 사위이다.”라고 자랑스러워하면서 소개하였다.
그러나 마침 그 시간에 참아버님께서는 외국에서 온 손님을 만나고 있는 중이므로 영상전화 연결이 안 되었다. “사진을 많이 찍어서 가지고 오라.”는 참아버님의 지시가 있어서 나는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 날 저녁에 3명이 한방에서 자는데, 나는 침대가 없어서 간이 야전 침대를 펴고서 자기로 하였다. 그러나 두 분이 밤새도록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셨기에 나도 잠을 설쳤다.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호텔에서 뷔페식으로 조식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경봉할아버지는 먹는 만큼만 돈을 내는 것으로 착각하시고서는 접시에 아주 소량의 음식을 담아서 드셨다. 나는 이미 돈을 다 지불했으니 얼마든지 마음껏 드시라고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듣고서 경봉할아버지께서는 흠칫 놀라시면서 “이런 방식의 식사도 있구나!” 하시면서, 마음껏 드셨다. 그래도 믿기 힘드시는지 걱정이 되어서 식사 도중에 음식 값 지출에 부담이 안 되는지를 몇 번이나 물으셨다.
우리들에게는 뷔페 음식이 이미 일상화되어서 배불리 먹을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아직 그런 뷔페 음식문화가 일반인들에게는 전혀 소개되지 않은 것 같아서 가슴이 짠했다. 하루 속히 남북한 한민족이 만나서 마음껏 먹고 마시면서 통일된 신한국(神韓國) 국민으로서 감격을 나누면서 브라보를 외칠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그 날의 빠른 도래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심해 보기도 하였다.
셋이 오전에 함께 외출하여 산책을 즐겼다. 압록강의 위화도를 바라보는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갔다. 문용현 회장님은 참아버님의 업적을 자랑하면서 인류의 구세주, 참부모이심을 강조하였다. 일화제약의 맥콜, 통일산업의 발칸포 제작 이야기, 자동차 부속품 생산, 선문대학교에서 세계 70개 국가에서 학생들이 와서 공부를 하면서 하나님 아래 인류 한가족(One Family under God) 지구촌 창건에 앞장서는 세계적 인재로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 세계적으로 우파 언론 핵심의 자리를 차지하는 미국의 워싱톤타임즈 신문 이야기, 일본 식구들이 많은 헌신적 희생을 하면서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것, 등 신나게 설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경봉할아버지께서는 생전 처음 들으시는 내용인지라 눈만 끔뻑이면서 듣고 계셨다. 그는 실제로 참부모님의 업적을 체험해 보지 않으셨기에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였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로 상상을 하시는 경봉할아버지는 문회장님의 이야기를 마치 어린이가 동화를 듣는 것처럼, 신기하고 의아해 하면서도 재미있게 들으셨다.
나는 빨리 경봉할아버지를 한국으로 모시고 와서 참부모님의 업적을 직접 보시게 해 드려서, 감동을 받으시고, 문용명이 아니라 참아버지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축복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참아버님께서는 재림메시아로 오셨지만, 당신 스스로 가족들이나 친족들에게 새 진리를 말씀해 주실 수도 없고, 전도를 하실 수도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하면 사탄이 참소를 하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고 구원의 반열에 세우시고 나서 가족들을 사랑하셔야 하는 애절한 참아버님의 속사정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참부모님의 가족과 친인척들이 갖는 원한을 해원해 드리는 효자가 되는데 일조를 하려고 다짐하고 노력하였다.
두 분이 말씀을 나누는 중에 하루가 금방 지났다. 문용현 회장님은 참부모님의 더 큰 비전을 설명하셨다. “앞으로 남북통일이 되면 중국 단동에 우리의 호텔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참아버님의 말씀이 있어서 어느 호텔을 사면 좋을까?” 하고 문용현 회장님이 운(韻)을 떼셨다. 그리고 셋이 함께 단동 시내의 여러 호텔들을 구경 다녔다. 나는 이미 호텔을 구입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경동할아버지께서도 덩달아 기뻐하셨다. 호텔을 구입하거나 건축하여서 참아버님의 말씀을 이루고, 선교의 거점으로 삼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 단동으로 가서 여생을 바칠 것을 다짐해 보았다.
대화가 무르익고, 셋이 산책의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마음이 통하게 되었다. 문용현 회장님이 경봉할아버지께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줄 것이니 말해보라고 권유하셨다. 경봉할아버지께서는 3가지를 요구하셨다.
첫째는 북한에는 도로가 전부 비포장도로인지라 비가 오면 길이 질퍽해서 걸어 다닐 수 없으니까 장화(長靴)가 꼭 필요하다고 하셨다. 둘째는 카바이트 돌을 사달라고 요청하셨다. 경봉할아버지의 집 뒤에 심어 놓은 감자 밭을 북한 군인들이 밤에 몰래 와서 캐 가니까 불을 켜고서 지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카바이트 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카바이트 돌을 물속에 담그면 가스가 나오고 그것으로 불을 밝힌다. 이 방법은 남한에서도 1970년대에 불을 피웠던 방식인데, 할아버지께서는 지금도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계셨다. 나는 곧장 시장으로 가서 장화와 카바이트 돌을 사다가 드렸다. 경봉할아버지께서는 매우 만족하셨다.
또 다른 필요한 것을 말씀하라고 권유하였다. 경봉할아버지께서는 북한의 신의주에 사는 아들이 목탄차(木炭車)를 운전하면서 돈을 벌어서 사는데, 성능이 좋지 않아서 기름을 사용하는 자동차를 아들에게 사 주고 싶다고 했다. 문용현 회장님과 나는 자동차 시장에 가서 여러 자동차를 구경시켜 드리면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경봉 할아버지께서는 구경만 하시고 구입을 포기하였다. 왜 포기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는 새 자동차를 구입하여 끌고 가더라도 결국 공산당에게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씁쓸하고 아쉬운 실망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문용현 회장님과 나도 더 이상 도와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치면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실망과 아쉬움을 가졌다. 말을 안 해도 경봉할아버지의 슬픈 마음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와 닿았다.
도대체 공산주의는 인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하였는지?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도록 방치해 두는지? 인민이 당하는 이런 비참한 실상을 공산당 지도부는 알고 있는지? 나는 공산당에게 반문을 던지고 싶었고,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침내 2박 3일간의 상봉이 꿈처럼 지나갔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만약 미래의 시간을 빌릴 수 있다면, 나는 내 미래 삶의 시간을 빌려서 며칠동안 더 머무르면서 경봉할아버지를 잘 모시고 싶었다. 참부모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모시면서 참부모님을 더 소개하고 자랑하고 싶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일행은 눈물의 작별을 하였다. 문용현회장님과 나는 짐을 쌌다. 경봉할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오징어, 인삼주, 그리고 삶은 밤 네게>를 챙겼다. 경봉할아버지는 많은 선물을 북한 군인에게 빼앗긴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고액의 돈을 바치고 여행허가증을 받았고, 아끼고 아끼던 음식과 물건을 선물로 준비해 왔는데, 국경 초소에서 빼앗겼을 때에 얼마나 속에 화가 났을까? 울분이 터졌을 것이다.
그런데 춘실이 엄마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은반지(銀斑指)였다. 그 은반지에는 피눈물 나는 사연이 담겨져 있었다. 김경계 충모님께서 해방 이후에 상사리에서 사시는 동안에 먹을 양식이 없어서 춘실이 엄마에게 와서 보리쌀 2되를 빌려가면서 손가락에 끼고 있던 은가락지를 담보물로 놓고 가셨다는 것이다. 유능하고 잘 생기고 똑똑한 아들인 문용명이 문선명으로 개명을 하고, 인류를 구하는 재림메시아, 참부모로서 온갖 고난을 받으면서 복귀섭리를 진행하시는 동안에 김경계 충모님은 끼니를 제대로 드시지 못하셨던 것이다. 하늘부모님과 예수님과 선영들이 이 모습을 보면서 통곡을 하셨을 것이다.
문회장님과 나는 그 반지에 담긴 사연을 듣고서 통곡을 하면서 받았다. 그처럼 어질고 힘이 세시고 강건하셨던 충모님께서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아끼던 은반지를 맡기고 보리쌀 2되를 빌려가셨다. 그 반지를 다시 찾아가시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그 이후에도 충모님께서는 계속하여 기아의 고통을 혹독하게 겪었을 것이 눈에 선하였다. 그처럼 그 은반지에는 충모님의 눈물과 기아의 고통이 담겨져 있었고, 하늘부모님과 예수님과 선영들의 통한(痛恨)이 담겨 있었다.
단동에서 2박 3일 단기간의 일정을 마치고, 눈물과 아쉬움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서 문회장님과 나는 단동을 떠나서 귀국하였다. 우리가 떠나고 나서 경봉 할아버지는 춘실이 엄마네 집에서 며칠 더 계시다가 신의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중국과 북한의 자연산하(自然山河)는 예나 지금이나 묵묵히 그 자리에 있고, 물은 흘러가는데, 왜 인간 세계에는 불합리한 체제로 인한 고통과 눈물이 떠나지 않는가?
문회장님과 나는 침묵 속에서 귀국하였다. 단동으로 갈 때에는 가슴 속에 기쁨과 기대가 가득 찼는데, 귀국 길에서는 가슴 속에 눈물과 아픔이 촉촉하게 담겨 있었다. 서로 말을 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귀국할 때까지 줄곧 침묵하였다. 말은 안 했으나 나는 문회장님의 마음을 다 느낄 수 있었다. 이심전심이었다.
5. 참어머님의 은반지
한국으로 돌아와서 곧장 사진들을 앨범으로 만들어서 문용현회장님께 갖다드렸다. 문회장님은 앨범, 경봉할아버께서 주신 선물, 충모님의 유일한 유품인 은반지를 고이 싸서 참아버님께 봉헌하였다. 통한의 사연이 깃든 은가락지를 받아본 참아버님은 한참을 쳐다보시다가 방으로 들어가셔서 참어머님과 함께 정장을 하고 나오셨다. 참아버님께서는 은반지를 참어머님의 손가락에 끼워주셨다.
아마도 참아버님의 가슴에는 폭포와 같은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더 효도를 잘 하셔야 하고, 잘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림메시아로서 인류 구원 사명을 먼저 완수해야 하기에 효도를 하지 못한 참아버님 역시 통한의 심정을 가지셨을 것이다. 슬픈 심정을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참부모님의 사정을 하늘부모님 외에 누가 알겠는가?(《말씀선집》, 37권, 98쪽 등 참조).
흥진님과 영진님을 비롯하여 참자녀님들이 성화를 하였을 때에도 참부모님 양위분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다. 그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 하늘 부모님께서 더 통곡하시는 애달픔 심정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효자 효녀의 입장에서 우시지 못하셨다. 둘째, 사탄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굴복하는 속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참부모님께서는 참소할 꼬투리가 없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는 사탄에게 눈물을 흘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실 수가 없었다.
6. 문윤국 목사님의 여생터 복원 사업
그 후 경봉할아버지께서는 3년 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소식을 받았다. 좀 더 사셔서 꼭 남한으로 오시고, 천정궁에서 푹 쉬셨다가 축복가정이 되시고서 영계로 가셔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 실로 가슴 아프다. 내가 사명을 다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 같아서 참부모님께 매우 송구스럽다.
2022년 4월 7일(목), 제20대 신세계(神世界) 6000가정회에서 한식(寒食) 날을 맞이하여서 문윤국 종조부님의 여생터 및 용평 리조트 발왕산 성지순례를 하였다. 폐허가 된 여생터 집은 보는 이들의 가슴에 찡한 아픔을 전해 주었다. 재림메시아로 강림하신 참아버님께서 사랑하시고 존경하셨던 문윤국 종조부님이 사셨던 집이 아주 초라하게 세월의 흔적과 함께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매우 슬펐다. 지붕도 없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폐허의 초라한 작은 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마구 흘렀다.
다행히 참부모님께서 주신 돈으로 주위의 땅 4만평을 이미 매입한 상태라고 한다. 속히 여생터 복원 사업이 완성되어서 문윤국목사님의 업적, 극심한 궁핍과 가난을 이겨내신 문경계 충모님의 은반지, 경봉할아버지와 관련한 유품이나 내용들이 전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봄이 되면 한식(寒食) 기념 봄꽃 축제와 함께 문윤국목사님의 업적이 칭송되는 날이 도래하기를 기원한다. 그리하면 늘 순례객이 이어지고, 그들은 많은 교훈과 깨달음을 갖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정선군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는 최대한 협조하기로 내정이 되어 있다고 하니 아주 반가운 소식이다. 여생터 복원 사업은 하늘부모님 성회의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영계에 가신 문윤국목사님은 조카인 문용기 장로님에게 꿈속에 나타나서 당신의 무덤이 정선 어디에 있다고 가르쳐 주면서 통한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암시하였다. 지금은 이전하여 파주 원전에서 영면하고 계신다.
앞으로 많은 식구들이 여생터를 성지순례로 찾아보며, 또한 문윤국목사님의 애국 충정의 발자취가 한국 국민들에게도 모범 사례로서 교육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미 여생터를 일본 식구들이 많이 방문하고 있다고 한다. 한일(韓日) 국제적 공조체제로써 여생터복원 사업을 속히 완료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6000가정 형제자매들이 여생터 복원에 앞장을 서야 할 것이다. 나는 아내와 같이 쑥뜸 봉사를 하면서 유명인사들과 관계를 확장하고 있다. 저들 중에서 믿음의 자녀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며, 또한 문윤국목사님 여생터 복원사업에 동참하도록 인연을 지으려고 한다.
독립유공 애국지사 문윤국목사님이 못다 하신 사명을 우리 6000가정회의 형제자매들이 성취하여 하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 축복가정들의 영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