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곡동(元谷洞)
-원곡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 원곡동, 백운동이 속해있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와리면(瓦里面) 원당상리(元堂上里)였다가 조선 말기 원상리(元上里)가 되었다. 모곡리(茅谷里)는 조선 말기에 처음 보이는데, 1912년 2월 5일 원상리와 모곡리를 합쳐 원곡리(元谷里)라 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4월 1일 시흥군(始興郡) 군자면(君子面) 원곡리(元谷里)로 개칭되었고, 이어 법률 제3798호에 의거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원곡동(元谷洞)으로 되었다.
원곡동은 원상리(元上里)의 ‘원(元)’자와 모곡리(茅谷里)의 ‘곡(谷)’자를 취한 것이며, 신도시개발 후 취락이 폐동되자 원주민을 위한 이주단지가 조성되어 비교적 원주민이 많이 살고 있다. 또한 이주노동자를 위한 국경 없는 마을이 조성되어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생활하는 지역이다.
• 동산골[東山谷]
안산정보산업진흥센터 동쪽 산아래에 위치해 있던 마을로, 동산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이곳은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동산(東山) 윤지완尹趾完(1635~1718)이 살던 곳으로, 그의 호도 이 마을 이름을 딴 것이다. 윤지완의 묘는 본래 시흥시 산현동 안장바위에 있었는데, 그곳에 묘를 쓴 후 서해안의 조기가 잡히지 않자 어부들이 상소해 개성 천마산으로 천장했다고 한다. 그 후 파평윤씨 문중에서 묘소가 원거리에 있으므로 가까운 곳에 사당을 짓고 위패라도 모셔야겠다는 의견에 따라 동산골에 사당을 짓고 후손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사당이 노후해지고, 이곳 주변이 반월공단으로 변모되자 1987년에 시흥시 산현동 깨꼴에 있는 윤지완의 조부 윤민헌(尹民獻) 묘 앞에 사당을 신축했다.
마을에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뒷산에서 남양홍씨가 주선해 산신제를 지냈다.
• 땟골[茅谷]
띠(외떡잎 식물인 벼과에 속하는 다년생초로 띠의 어린 새순을 '삘기'라고 하고, 꽃이 피지 않은 어린 이삭을 날것으로 먹기도 한다. 잎은 지붕이나 도롱이 같은 우장을 엮는 데 쓰이기도 한다)가 많이 자생하는 곳이라 하여 ‘띠골(띠풀 모茅 골 곡谷)’이라 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뗏(땟)골’이라 변음되었다 마을 동복쪽의 털밑봉 밑에 엎드려 있으면 화禍를 면한다는 속설이 있어 6·25 한국전쟁 때 서울, 인천 등지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 화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 또한 사망, 부상, 화재 등 일체의 재난이 없었다고 한다.
마을 북쪽지역은 집이 많아 큰말, 남쪽지역은 집들이 모두 4칸이므로 사칸통, 사칸통 서쪽은 큰말 앞에 있어 앞출이라 불렀다. 40호 남짓했던 이 마을은 1980년에 폐동되어 현재는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7월 1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던 대동우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냈다.
뗏골은 흔히 선부동지역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가 원곡동의 마을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원상리元上里(양지마을)와 모곡리茅谷里(뗏골)가 1913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원상리의 ‘원’자와 모곡리의 ‘곡’자를 따서 원곡리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원곡동이이기 때문이다.
• 백성말[百姓洞]
이곳은 풍수로 보아 백 가지 성(姓)이 살 곳이라 하여 ‘백성말[百姓洞]’이라 칭했다고 한다. 한편 하얀곱돌이 많아서 백석말[白石洞}이라는 설도 있다. 이 마을은 일제 때 군자동 사무소 초입에 태양호씨가 살았으며, 그 후 그의 아들 태응균(1935년생) 씨가 살다가 1979년에 폐동된 후 현재는 다문화 거리로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주택지로 변모되었다.
• 백운산(白雲山)
동산골 뒷산이며 중소기업연수원 길건너에 있는 산이다. 산정상에는 팔각정이 지어져 있다. 산 정상쪽으로 구름이 걸려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아서 백운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초지동 범직이 마을의 김해김씨 족보에 묘소를 백운산에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운공원(구·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만송재터[晩松齋址]
백운산 중턱에 있으며 원주민들 사이에는 예전부터 절터라고 알려져 있던 곳이다. 2015년 11월 홍명철씨의 안내로 안산향토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하였다. 소수의 그릇조각이 발견되었고, 병진(丙辰 1916년으로 추정) 8월에 정기홍(鄭基弘)이라는 사람이 새긴 암각자 ‘晩松齋’가 발견되었다.
• 신흥동(新興洞)
1937년 수인선 개통 후 원시동 범직이 출신 강모씨가 안산전철역과 수인선 원곡역 사이에 초가를 짓고 산 후 인근의 주민들이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다. 열차 신호등이 시그널이 있어서 시그너리라고도 불렀다. 신흥동(新興洞)은 1986년 안산전철역 건설 때 폐동되었다.
• 양지마을[陽谷]
백성말 동쪽에 있던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원상리(元上里)라 칭했던 마을이다. 본래의 양지마을은 동쪽으로는 중소기업연수원 앞 사거리, 서쪽으로는 원곡동주민센터, 남쪽으로는 기간산업도로, 북쪽으로는 라성호텔에 이르는 제 지역을 말하는데, 남향받이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여 ‘양지마을[陽谷]’이라 불렀다.
한양조씨가 배판한 이래 밀양박씨, 파평윤씨, 밀양손씨, 김녕김씨, 순흥안씨 등이 세거하였고, 그 중 밀양박씨가 대성을 이루었다. 동·서로 늘어져 있던 이곳은 동쪽지역인 연수원 입구 지역을 아랫말, 원곡동주민센터가 있는 서쪽지역을 웃말이라고 불렀다.
양지마을은 명당지라 하여 분묘가 많았다. 라성호텔과 남쪽도로 사이에는 파평윤씨 선산, 연수원 입구 서쪽 산 능선에는 한양조씨 선산, 반월회관 주변에는 밀양박씨 선산이 각각 있었으나 신도시개발에 따라 모두 이장 또는 화장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8월 15일 전후 길일을 택해 웃말과 아랫말 사이에 있는 대동우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냈다.
• 오지미[奧地山]
양지마을 동북쪽, 화랑유원지 서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본래 두 집이 살아 두집매라 불렀고, 원곡동에서는 가장 오지에 위치한 취락이라 하여 ‘오지미[奧地山]’라 칭했고 고개 이름도 ‘오지미고개’라고 하였다. 이곳은 일제 때 일인들이 염밭[鹽田]을 만들려 하였으나 광복으로 중단되었다. 그 후 6ㆍ25전쟁 직후에 부평 화랑농장에 살던 용사(勇士)들을 집단 이주시키면서 ‘화랑농장’이라는 마을이 이루어졌었다. 안산신도시 건설이 시작되면서 이들 용사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주해 현재는 ‘화랑농장’자리에 ‘화랑유원지’가 조성되어 있다. 일부는 초지동에 속한다.
• 소뒤
지형이 소의 뒷모습처럼 생겼다는 설과 솥처럼 생긴 지대 위에 있어서 솥위라는 설이 있다.
• 곧장거리
협궤열차 수인선이 생기고 원곡역으로 곧장가는 거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