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도에 오르며.
3년전 런던, 파리, 스위스, 로마 4개국 기행을 시작으로 2년전 그리스, 터키, 이집트의 지중해 기행, 작년의 호주, 뉴질랜드 기행에 이어서 올해의 무한산악회가 1년 전부터 준비한 백두산, 북경 기행에 참가하면서 많은 망설임과 고민을 거듭했다.
산악회 차원에서 특별 기획한 행사이고 사무국장으로서의 중책을 맞고 있는 터라 여러 경황을 억누르고 강행을 하기로 용단을 내렸다.
울산-김해를 경유하여 북경에 도착 할 때까지는 1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남한 면적의 100배, 한반도의 44배, 13억 인구를 가진, 그 옛날에는 몇 개월씩 걸렸던 중국 땅을 짧은 시간에 쉽게 밟을 수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고 싱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2.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 못을 보는 행운을 누리다.
8월1일, 북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첫 번째 기행지인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 연길 공항에 당도한 시간이 밤 9시 14분이었다. 1시간40여분이 걸린 셈이다.
인구 220만 명중 우리 민족이 50% 살고 있다는 연길시는 곳곳에 한글로 된 간판이 눈에 많이 띄었고 우리의 중소도시 풍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밤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부족한 전력 사정 때문에 어두운 골목이 많았다. 이곳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대우호텔은 우리의 A급 호텔 못지 않게 좋았다.
시내 탐방을 위해 가이드를 꼬드겨서 몰래 비가 내리는 연길 시내로 나섰다.
장미 한 송이를 들고 1,000원을 외치는 동포 아주머니의 악착같은 구걸도 애써 마다하고 생맥주 집에 들어갔다. 밤 문화는 술집에 가 봐야 잘 알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평상복 차림의 연길 아가씨가 신식 노래를 연달아 부르지만 관중들의 관심도는 별로다.
주인의 말로는 이곳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라 했다.
생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자리에 일어서기까지 순수해 보이는 이곳 젊은이들의 표정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맞는가에 대한 아이러니를 갖게 했다.
우리의 티코 크기의 이곳 택시는 그야말로 무법천지다. 지나가는 행인들도 무질서하게
도로를 넘나들고 앞부분을 먼저 들이미는 차량이 우선 이다.
그래도 교통 사고율은 매우 낮다고 했는데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밤늦게 까지 현지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시내를 배회했지만 그저 그랬다.
하여간 중국에서의 첫 기행은 어두운 골목과 유흥이 살아 있는 밤 문화로 시작했다.
우리의 70년대 초의 상황과 비슷한 거리였다.
건널목 표시는 아예 찾아 볼 수 없는 차도를 곡예를 하듯 넘나드는 택시는 무질서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고 덜컹 겁이 나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와 자정 무렵에 잠을 청했다. 다음날 한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버스로 백두산을 향하기 시작했다. 다행이 비는 멎었고 날씨가 흐렸다.
가변적인 기후 때문에 천지 못을 볼 확률이 매우 적다는 염려를 안고 일행은 그래도 경건한 마음으로 행운이 함께 하도록 기도를 드렸다.
말수가 적은 조선족 기사가 운전하는 전용 버스는 호텔을 빠져 나와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연변자치시는 인구 30만 명중 70%가 조선족이 살고 있다 한다.
연길은 중국에서 택시가 두 번째로 많은데 7천여 대가 운행되고 있으며 요금은 일률적으로 중국 돈으로 5원 이고 시내에서 공항까지는 10원의 요금을 준다고 한다.
여자 택시 기사도 있지만 오후 5시 이후에는 법적으로 운행을 금지시키고 있다 한다.
시내를 벗어나 연길에서 유일한 고속도로를 달렸다.
곳곳에 어김없이 통행료 30원을 내야 한다.
현지가이드인 이철옥씨의 조선족의 생활상과 띄어난 유머와 노래가 지루함을 달랬다
한국으로의 진출과 출세, 흥망, 좌절감과 원망을 들으면서 동족으로서 동정심이 많이 갔다.
순수한 이미지의 그녀가 우리에게 준 메시지는 여행이상으로 값진 것이었다.
한족들의 지붕 모양이 일자라면 조선족의 지붕은 기와집 모양이어서 쉽게 구분되었다.
가스가 부족하여 석탄을 때는 데 그것도 부족하여 옥수수 줄기를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다 초가집도 더러 있었는데 중국 돈으로 2,000원, 기와집은 3,000원이면 살수가 있다 한다.
이곳 말로 층집이라 부르는 아파트는 거의 없었고 이농 현상으로 인하여 처녀들이 거의
없어 한국처럼 농촌에는 노총각이 많다 한다.
인구 억제 정책의 일환으로 1명의 자녀만 호적 등재를 인정하고 둘째 아이 즉 흑해자라 부르는 아이를 호적에 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주고 음성적으로 처리를 해야 한다.
56종의 소수 민족은 2인까지 호적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도 첫째와 둘째가 5년 터울이라
야만 가능하다. 그래서 중국의 인구는 고무줄 인구 일 수밖에 없다 한다.
근자에 들어 베이징 당국은 2자녀를 일부 허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증가율이 0.9%인 현실을 감안한 결과라 한다.
1자녀를 준수하여 부모가 60세/55세 되면 2,000위안(30만원)의 장려금을 지급한다.
탈북한 이북 여성들은 2,000원만 주면 살 수 있지만 혼인은 승인이 안 된다 한다.
곳곳에 작은 사과 배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고 중국인과 조선족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일컬을 때도 사과 배나무라 한다 했다. 농사가 잘 안되어 양봉을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또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해야 하는데 무덤은 인가가 안 된다.
우리의 북부 지방에서 자라는 수목들과 흡사했고 큰돌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백두산이 가까워 올수록 날씨가 마음에 거슬렸는데 조금씩 하늘이 맑아지고 있었다.
어제 밤에 호텔에 당도했을 때 내렸던 소나기 때문에 무척이나 마음을 조였는데
백두산이 가까워 오면서부터 조금씩 맑은 날씨를 하고 있었다.
목욕 재계 하고 밤새도록 천지신명께 빌었다는 양계순 할머니의 이야기가 위안을 주었다. 천지를 볼 확률이 30%라니 마음을 조이게 할뿐이었다. 출발 30분만에 안도현에 도착했다.
중국 사람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른다.
높이도 우리의 2,744M 보다 높은 2,749M으로 주장하고 있다.
백두산은 모두 16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중국 지역에 백운봉, 천문봉을 비롯한 6개 봉우리
북한 지역에 백두 봉을 비롯한 7개 국경 지역에 3개가 있다.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물은 송하강, 압록강, 두만강 등 3개강의 원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천지 못은 넓이 1,250M, 깊이 373M, 물의 온도는 5-7도로 매우 차갑다.
꿈에서 그리던 백두산에서 가장 가까운 첫 민가인 이도백화시에 당도했다.
길이 20-30M의 미인 송의 울창한 숲을 헤치고 하늘은 우리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곳의 전용 차량인 지프차에 6명씩 나누어 타고 드디어 백두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꼬불꼬불한 포장도로를 따라 3여분을 아스라하게 오르자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산 아래에 펼쳐져 있는 산과 벌판은 광활하면서도 장엄했다.
그 옛날 징기스칸의 몽고족들의 기마 부대가 누비던 그 무대가 아닌가.
불길한 구름 떼가 여러 번 백두산 정상을 덮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지막 50여 미터를 눈앞에 두고 신비하게도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고 천문이 열렸다.
지프를 전용으로 몰고 있는 중국인 기사의 알아들을 수 없는 제스처에서 천지를 볼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가졌다. 지프차는 15미터 전방에 우리 일행을 내려 주었다.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자 고도로 인한 어지럼증이 오기 시작했다.
사진에서만 보았던 천지를 직접 보았다는 자부심, 그것은 감격적이었다.
천지 못까지는 내려 갈 수 없었지만 검푸른 물을 담고 천문(天門)을 연 장엄한 모습이
너무도 감격적이었다. 상술이 뛰어 난 중국인들에게 12곳의 비경을 골라 사진을 찍었는데
4만원의 한국 돈을 내란다. 사실 우리 카메라로는 천지의 전면이 나오지 않았다.
4명이 1개조가 되어 3판씩 사진을 찍었고, 무한산악회의 플래카드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6번만에 처음 천지 못을 보았다는 한국인의 감격스런 외침이 우리의 감동을
더 값지게 해 주고 있었다. 반대편에 북한의 초소가 보였다.
장백 폭포에 가는 길은 주말이라서 그런지 차량이 많이 밀렸다.
한쪽 편에는 온천물이 흐르고 있고 수정 같은 맑은 물이 678M 높이의 폭포 물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얼음 같이 차가운 물을 마시며 또 하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장백 폭포를 벗어나 단체 온천 욕을 했다. 요금은 1인당 한국 돈 1만원.
저녁은 이곳에 산다는 산천어 회 맛을 보았다. 고량주로 자축의 밤을 맞이했다.
시골 호텔인 신달 호텔에서 멋진 밤을 보낸 두만강을 향해 새로운 기행을 시작했다. 시골길을 두어 시간 달렸다. 곳곳에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부락들이 여러 번 눈에 띄었다.
청산리 전투 지역에서 중국 정부의 승인 하에 북한인들이 경영하는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손으로 뜨개질해서 만든 이름 있는 수공품들이 전시실을 메우고 있었고, 북한산 우황청심환
을 팔기 위한 북한 여성 안내원의 설명을 들었다.
컨테이너를 짐칸, 골키퍼를 공알 받치게, 슬리퍼를 끌신, 머리를 골, 에어컨을 공기 조절기
전구를 불알이라 부른 다는 이북 아가씨의 웃음이 약 선전과 함께 어우러져 재미를 더했다.
가는 도중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내린 곳에서 멀리 일송정이 눈에 보여 촬영했다.
기름진 땅에서 지은 쌀밥으로 맛있게 점심 식사 후 조금 더 이동하여 용정에 도착했다.
용문교, 혜랑강, 선구자, 일송정 등 낯익은 단어들의 출처인 이곳은 인구 30만 명중
70%의 조선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우리의 시골 중학교 크기만 한 용정중학교 입구에는 윤동주 서시 시비가 반갑게 맞았다.
1946년 9월 16일, 6개의 중학교를 합쳐 만든 이 중학교는 지금까지 2만 명의 학생을 배출
했는데 일제시대를 전후하여 저명한 열사와 시인, 언론인, 종교인이 많다 한다.
지금도 중국은 물론 북한과 한국의 곳곳에서 활동 중인 인사들이 이 학교 출신이라 한다.
민족의 개척지, 반일 운동의 책원지, 민족문화의 발상지, 종교 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는 안내 아가씨의 학교 내력과 인물에 대한 설명을 경청하고 방명록 기록과 기부금을 냈다.
근자에 한국의 기업인의 기부로 새롭게 기념관을 지을 계획이란다.
윤동주 시집을 비롯한 책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관광 코스도 획일적으로 정해 져 있었고 가는 곳곳에 당에서 지정한
판매소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데 곰쓸개 판매소도 그 중에 하나였다.
100여 마리의 곰을 사육하면서 곰쓸개를 체취, ?敾막? 판매하고 있었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시험으로 주는 쓸게 술은 몹시 쓴맛이었다.
가격도 B급 상품이 한국 돈으로 11만원이나 했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다시 연길시를 거쳐 고속도로를 따라 두만강 근방 도문시를 향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중국의 경계선을 이루는 두만강에 왔다는 것이 감개무량했다
중국 쪽은 낚시질을 하는 강태공도 보일 만큼 자유스러웠지만 북한 진영은 은폐된 초소만
보일 뿐 잠잠했다. 동동주도 마시고 쾌속정을 타고 북한 진영 다리까지 왕복하기도 했다.
다리를 기점으로 북한 쪽의 다리가 더 길었다.
다리 안쪽으로 다가가고 싶었지만 중국 돈 50원을 내란다.
북한인들이 강을 건너 몰래 탈북이 가능할 듯싶었다. 그러나 요즘은 성공한다 해도
이곳에서의 생활을 영위하기가 어려워서 그 수가 많이 줄었다 한다.
중국 통관문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이곳에서만 성행 중인 중국식 인력거를 탔다.
사진도 아무나 찍을 수 없었는데 5,000원을 주니 멋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북경으로 가기 위해 다시 연길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은 경치가 좋은 국도로 택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볼 수 있었고 조선족 부락도 자주 눈에 들어 왔다.
도문시도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한가한 시골 같은 분위기였다.
북경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연길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했다.
자치시 출범 50주년을 맞아 우리의 여의도에 버금가는 광장에 회관을 짓고 광장에는 수천 명의 조선족들이 나와 자유 분망 하게 놀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원형으로 둘러서 배구도 하고, 야외 노래방도 열고,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의 옛 가요, 한족은 가족 전체가 나와 그들식의 포크댄스를 추고 있었고, 곳곳에 노점상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름 저녁은 연날리기처럼 시원했고 사회주의 나라에서의 자유의 의미를 염탐했다.
백두산 지역 탐방을 마치고 비행기를 타고 밤 11시가 넘어서 다시 북경에 도착했다.
3. 역사와 전통의 고도 북경, 궁중의 위력 중국의 잠재력.
숙소인 광서 호텔은 우리의 특급 호텔과 버금가는 깨끗한 곳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도 북경, 13억 인구, 보통어(한어), 남한의 100배, 한반도의 44배
한족, 장족, 회족, 묘족, 만주족, 조선족 등 56개 소수민족, 한족이 94% 차지
성격은 느긋하고 대범하며 관계(꽌시)를 매우 중요시하여 쉽게 속을 드러내지 않고 깊이
친해진 후에야 본색을 드러내며 시차는 우리보다 1시간 늦다. 화폐는 인민폐(rmb)사용.
북경 : 도시 전체가 고대 박물관이라 할만큼 3,000년 고도이자 중국의 수도이다.
봄가을이 짧고 여름 겨울이 길며, 인구 1,100만 명, 시내에 500만 명 살고 있다.
고대 춘추전국시대 잠시 연의 수도이었다가 원나라 이후에야 비로소 수도로 부각된다.
북경은 서안과 더불어 세계 7대 고도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의 단군신화에 비유되는 중국의 신화도 재미있다.
반고라는 신이 도끼로 갈랐다는 것이 천지개벽, 반고가 죽고 신체 부위에 따라
산, 강, 등을 만들었다 한다.
또 느와신이 자기의 갈비뼈로 황화강 유역에 흙으로 인형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인간의 시효이며 중국 최초의 국가인 하나라에 유구한 역사가 전개된다.
또 황제란 칭호도 3황 5제에서 딴 것인데 3황은 하늘과 땅 태황을, 5제는 황제를
비롯한 순제 등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중국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은 중국 황제의 시효다.
군현제, 중앙집권제, 도량형과 문자의 통일, 분서갱유의 실시, 장성을 쌓아 흉노족을 토벌했으나 아방궁 및 자신이 묻힐 거대한 능을 만들었다.
무덤은 길이가 350M, 높이 46M이며 이를 외곽 성이 에워싸고 있는데 길이가 2,165M나 되며
30년 동안 70만 명을 동원하여 건설한 거대한 유적이라 한다. 금세기 최대의 발견이라 부르고 있으며 7,000체의 병사 인형, 전차 100량, 도자기 말 100체 이상이 발굴되었다 한다.
이밖에도 13년에 걸쳐 36개 나라를 개척한 한무제의 실크로드 등 중국의 장유한 역사가
전개되지만 여기서는 내용을 생략하기로 한다.
낮 최고 기온이 35도의 무더운 북경에서의 첫 문화 탐방이 시작되었다.
중국의 옥돌 공장을 강제로 둘러 봐야 했다. 화려한 옥으로 만든 제품들이 관광객들을 유혹했다. 옥은 버마 다음으로 중국이 유명하다고 한다.
첫날은 북경 시외부터 시작되었는데 명나라 황제 16명중 13명의 능이 잠들어 있는 13릉
이 첫 번째 탐방 지다. 명의 16명의 황제 중 두 번째, 세 번째, 6번째 황제의 무덤은 행방불명, 적자 등의 이유로 모셔지지 못했다 한다.
북경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40킬로 떨어진 천수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면적 120평방미터이다. 1409년 선조인 주원장의 장릉이 세워지기 시작되면서부터 마지막 능인 정능이 1644년에 세워 졌다 한다. 우리가 기행을 한 곳은 바로 정릉인데 1956년 발굴된 묘다.
지하 궁전은 높이 27M면적의 완전한 석조 구조로 견고하게 지어져 있었다.
후문에는 황제와 후궁, 각종 귀중품을 담았던 관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후궁이 먼저 죽으면 왕이 죽었을 때 황후의 묘를 이장한다 했다.
정능은 현재까지 13개 능중 현재 유일하게 발굴된 묘이기도 하다.
무더운 날씨가 비지땀을 흘리게 했다. 공원 곳곳에서는 노인들이 모여 카드놀이, 장기,
포크댄스, 쿵후와 가족 단위의 전통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달에서 보이는 지구상의 유일한 조형물이자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장성을 찾았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진나라 때 갓 결혼을 한 신부가 남편을 만리장성 쌓는데 징용을 당하고 호젓한 시골에서
독수공방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날이 저물어 그곳에서 하루를 묵게 되고 호색한 여인의 미모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수 차례 걸쳐 끈질기게 유혹을 하던 나그네는 여인으로부터 조건부 합방 제의를 받게 된다.
조건부란 여인이 적어 준 편지를 강제 징용을 당한 남편에게 전해 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한 나그네는 미모의 여인과 그날 황홀한 밤을 보낸다.
여인과의 약속대로 나그네는 그녀의 남편을 찾아내어 편지를 전한다.
그러나 남편이 문밖을 나오게 되면 볼모로 나그네가 노역장에 가 있어야 했다.
문밖으로 나온 남편은 아내의 편지를 읽었다. 내용은“저는 이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제가 한 일에 용서를 한다면 제게 오시고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 돌아가십시오”
남편은 몸을 판 아내가 원망스러웠지만 곧바로 밖으로 나왔고 나그네는 평생 그곳에서
노역으로 보내야 했으니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유래 된 것이다.
중국식으로 1만5천리다. 중국은 5킬로미터가 10리이고 우리는 4킬로미터가 10리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케이블카를 타고 탐방한 장성은 너무나 장엄했다.
길이가 2,700Km, 성벽의 높이가 7.5M, 성벽의 통로는 한꺼번에 말 5필이 지나 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원래 장성은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각국이 국경선을 따라 성을 쌓은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을 진시황제가 흉노족의 침입을 막고자 연과 조나라의 성벽과 성채를 하나로 잇고 더 연장시킨 것이며 지금 장성은 명나라 때의 것이라 한다.
용경협,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협곡으로 높이 솟은 가파른 봉우리들을 배를 타고 구경 할 수 있었다. 길이 7킬로미터의 배 유람을 하다 보면 종모 양의(鍾山), 봉황이 날아가는 듯한(鳳冠島) 깎아 내릴 듯한 절벽 등 30여 가지의 절경을 구경했다.
입구에서 20분 걸어서 가면 70미터 높이의 콘크리트로 댐을 만들어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1996년에 완공된 258미터의 에스컬레이터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는 조형물의 내부에 설치되어 있다. 길이 면에서는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한다.
시원한 여름날에 떠난 무릉도원과도 같은 호수와 절벽을 관람하는 절경은 황홀했다.
진강사와 같은 사찰도 보이고 산중턱에 불상도 보이는 등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 해야
옳을 것 같다. 조선족 가이드가 가져온 한국 가요가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가운데 황홀한
경치는 중국 기행의 대미를 장식하고도 남을 듯 했다.
30분 여 동안의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긴 굴속이었는데 너무도 시원했다.
다시 북경으로 돌아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단체로 가라오케로 갔다.
경비도 한국과 거의 같았고 며칠 동안 쌓아 온 우정을 마음껏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모두 하나가 되어 이국 땅에서의 추억에 남을 멋진 밤을 보냈다.
기쁨은 누릴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북경 기행의 마지막 날 아침은 비가 엄청 내린 가운데 북경 시내 탐방에 나섰다.
배수장치가 별로 인지 북경 시내 도로는 금방 물바다가 되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이자 황제가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던 천단 공원을
찾았다. 1420년 14년에 걸쳐 건축돤 것으로 면적이 270평방미터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건축물의 북쪽은 기년전, 황건적 남쪽은 원구단, 황궁우가 있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황제가 오곡이 풍성하기를 빌던 기년전이다.
삼중 처마로 된 원형 궁전으로 높이가 38M. 중앙의 용정주는 4계절을, 가운데 12개 기둥은 12달을 바깥의 12개 기둥은 12시진(2시간), 24개 처마 기둥은 24절기를 상징한다 한다.
이화원은 유명한 서태후의 휴식처라 하는데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엄청난 면적의 호수를 배경으로 서태후의 산책로인 장란은 길이가 무려 782M 이었는데
지붕과 좌우 건축물이 인상적이었다.
이어서 영화 마지막 황제의 배경 무대인 자금성을 찾았다.
“천자의 궁전은 천제가 사는 자궁과도 같은 금지구역”에서 따온 말이라 한다.
14년이나 걸려 1420년에 건축한 이 고궁은 560년이란 세월 동안 15명의 명의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일생을 보냈고 105만 점의 진귀한 문물들이 전시. 소장되고 있다.
전체 면적 72만 평방미터, 총 9,999개의 방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궁전이다.
그냥 가로질러 가는데도 2시간이 소요 될 만큼 어마한 곳이다.
방어의 목적으로 성 밖에는 10M 높이의 담이 있고 사방에 성루가 있으며 호성강이 흐른다.
자금성의 구조는 외조와 내정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외조는 가장 크며 중요한 의식이 행해졌던 궁전인 태화전이 있으며 청동 사자 상이 눈에 띄었다. 또 중화전, 보화전이 있다.
이곳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내정에 이르게 되는데 황제와 가족들이 기거하던 건천궁, 교태전, 곤녕궁이 있으며 동서에는 동육궁 서육궁이 자리 잡고 있는 등 건축물들이 즐비하고 있었다. 주요 건물에는 황제 전용의 계단이 있었는데 구름과 용을 거대한 한 장의 대리석에 새겼고 306개 청동 소방 그릇이 건물의 곳곳에 있었다.
천안문은 중국인의 기개를 대표하는 명소라 한다.
“천하를 편안하게 하다”란 뜻을 지니고 있는 이것은 1651년 처음 설계되었다가 1958년
44만 평방미터에 백만 명의 군중을 동원 할 수 있는 세계에서 제일 큰 광장이다.
북쪽의 천안문, 동쪽은 혁명발물관, 서쪽은 인민대회당, 남쪽엔 모택동 기념관이 광장 중심에는 인민 영웅 기념비가 서 있다. 천안문은 33.7M의 자금성의 입구로서 황제의 대형 의식, 대규모 군중 시위, 집회, 행렬, 경축 행사가 이루어 졌던 곳이다.
황금색 기와지붕과 높이 추켜든 추녀, 조각으로 장식된 대들보, 주홍색의 웅장한 기둥
모택동의 초상화가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중국 민주화의 상징인 1989년의 천안문 사태는 중국 총서기이자 개혁가였던 호유방의 죽음을 계기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고 점차 일반인들에게 확산되어 대규모 군중들이 손에 손을 잡고 천안문 광장에 운집하자 등소평 정권은 위기감을 느낀다.
6월4일 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강제 진압하면서 일단락 되었지만 상징성은 남아 있다.
수만 명의 북경 시민들이 운집해 있는 천안문 광장은 군중의 위력을 실감하게 했다.
북경 탐방의 대단원의 막이 다가오고 있는 마지막 시간.
한방의 권위 국가란 이름으로 일행은 진맥과 한약 구입의 권유를 받아야 했다.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의 진맥은 그들의 유혹을 뿌리치는데 인내를 요하게 했다.
중국이 자랑하는 발 마사지를 단체로 하러 갔다.
20대 젊은이들이 정성을 다해 마사지를 해주었는데 전신에 시원함을 느꼈다.
한창 유행인 이것도 경쟁자가 많이 생겨 요즘은 장사가 별로 란다.
북경의 문화 탐방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4. 에필로그
중국에 가서 견문과 운신의 폭을 넓혀 보려는 일정을 앞두고 고민한 것은 사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덜 개방되고 아직은 사회주의 체제하에 있는 중국이 여행자 개방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대주의 선입관과
고도의 상술, 콴시로 대표되는 그들의 속마음을 염탐해 보고 싶은 욕망이 여행의 장도에 오르게 했다.
나는 1만 피트 천상의 나라에서 세계적인 마인드를 갖추기 위해 4번째 연속 해외로 나가는 나 자신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위대한 역사 학자 토인비는 “역사란 공격과 방어의 연속이다“라고 말했다.
설렘으로 다가가고 다가가면 실망 서러운 것이 역사 탐방의 속성이지만 수많은 문화가 거쳐가는 동안 베여 있는 지혜를 터득하는 즐거움이 문화 기행의 묘미가 아닐까?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천지 못을 청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정상에 올라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던 장엄한 광경, 그것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 해야 옳다.
한민족의 뿌리처럼 여겨진 조선족들의 삶을 탐방하면서 애국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하면서
내가 태어난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소중함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옛날 경험했던 암울의 시대를 그들은 지금 살아가고 있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민족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중조 국경 지대인 대동강에서의 씁쓸함은 나를 우울하게 했다.
간간이 전해 주는 조선족 가이드의 북한 실상을 들으며 가슴이 아팠고 중국 지역에 살고 있는 목숨을 걸고
탈북 하는 동포들의 한을 조금은 이해 할 것 같았다.
신의 손으로 빚어 낸 듯한 극치의 예술품들, 끊임없이 지배를 당하고 지배를 했던 역사의 굴레 속에서 남겨진 웅장하고 위대한 문화유산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명나라 13릉, 자금성, 이화원, 천제단이 그러했다.
신부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용경협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신령스러운 풍광을 가슴에 품었고, 수십억 인적 자원을 강제로 동원하여 이룩한 달나라에서 보이는 지구상의 유일한 조형물인 만리장성, 긴 세월에 걸쳐 천자의 위용을 과시하며 백성 위에 군림했던 황제와 황후의 삶을 엇볼 수 있었던 것은 고귀한 체험이었다.
1980년대 유명했던 영화 “마지막 황제”의 무대 배경이었던 자금성의 9,999개 방을 둘러보면서 위대한 영웅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곳에는 인류의 역사를 움직였던 제왕 적인 지혜와 리드력, 위대한 통지력에 대한 메시지가 있었다.
유난히도 아름다운 백두산 밤의 경치를 벗삼아 여행의 맛을 한껏 맛본 황홀함!
무지도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북경의 고궁을 밟아 보았다는 새로운 체험,
개방 된지 30년, 자유라는 아이러니 속에서도 부정부패와 비뚤어진 상혼이 만연되어 있음을 실감했다.
무섭게 다가오는 중국이란 나라의 힘은 천안문 광장에 모인 대규모 궁중의 힘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제멋대로 식 교통 문화는 그들의 문회 시민으로서의 수준을 가늠하게 했지만 곧 평정이 되리라 본다.
그들의 뇌리 속에 잠재해 있는 사대주의 사상, 즉 우리를 조공이나 바치는 민족으로 비하는 의식이 여러 방면에서 빠르게 우리의 영역을 추월해 오기 시작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때라 느꼈다.
여행의 기쁨은 여행을 경험한 사람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이번 여름휴가를 이용한 백두산, 북경 문화 기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역사를 체험한 학습의 시간이었다.
많은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느낌을 단적으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지만 다양한 체험,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부딪혀야 할 지혜를 이번 기행을 통해 미리 습득했다고 얘기하면 올바른 해법이 아닐까 한다.
닫혔던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는 고귀한 체험이었다. 소모적인 여행은 아니었다.
많은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나도 어느새 예술품의 일부로 남아 멋진 추억으로 남으리.
함께 여행을 이수만회장님을 비롯한 무한산학인들에게 고마움과 이 글을 전한다.
2003. 6. 9일 무한산악회 사무국장 배재록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