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활성리(活城里)
친애하는 영지초등학교 동문 여러분!
지금은 왜소하게 웅크리고 앉아 ‘원동들’ 설한풍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우리들의 모교 영지초등학교가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지난 1963년 괘릉초등학교가 분리되어 나가기 전 전성기에는 600여 명의 재학생에 한 해에 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유수(有數)의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1963년 이전 우리들 모교의 학구(學區)인 방어리(防禦里)와 북토리(北吐里), 제내리(堤內里), 신계리(薪溪里), 괘릉리(掛陵里), 활성리(活城里), 시리(矢里 ; 지금의 시동)에는 때 묻은 가로등 전봇대에 달라붙은 껌딱지 만큼이나 많은 사연과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파일에서는 그 시절 우리들이 살던 영지초등학교 관할구역의 마을마다 얽히고설킨 아련한 사연들을 골라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분량이 너무 많아 새로이 작성하는 것보다는 저희 ‘영지국민학교 제7회 동기회 카페’에 수록되어 있는 기사를 그대로 옮겨오고자 하니 동문 여러분의 깊으신 양해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 파일에서는 동대산맥(東大山脈)의 동산령(東山嶺) 기슭에 자리 잡은 활성리(活城里)와 관련된 파일을 옮겨 개재합니다.
영지국민학교 제7회 동기회 카페지기 이 용 우 드림
※ 제가 카페지기로 있는 영지초등학교 제7회 동기회 카페(다음카페)의 문패는 ‘영지초등학교’가 아니고 ‘영지국민학교’로 명명되어 있음을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그리고 일부 기사 내용에서 필자를 ‘카페지기’라고 칭한 것은 이 글을 제가 카페지기로 있는 ‘영지국민학교 제7회 동기회 카페’에서 퍼 왔기 때문에 ‘영지초등학교 제7회 동기회 카페지기’라는 말이 그대로 옮겨진 것이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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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리(活城里)는 카페지기의 향리 괘릉리의 앞 마을로 아랫말(下村), 웃말(上村), 중울리(僧鳴), 텃골(基谷)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활성리(活城里)는 약 350년 전 장이영(張以英)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이곳에 장군수인 활수(活水)가 용출했다 하여 ‘활성(活城)’이라고 하였다 한다.
활 성 리
활성리(活城里)에는 조선조 당시 정5품 벼슬을 한 김천익이란 사람이 낙향하여 살고 있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나자 그의 아들 김득례(金得禮)가 창의하여 수백 명의 의병을 모아 아우 득의(得義)와 함께 권응수(權應銖)의 진(陳)에 군량을 운반하였으며, 울산 대천제(大川堤) 아래에서 왜적 천소(千所)등 1백여 명을 죽이고 30여명을 생포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이후 김득례(金得禮)는 1581년(선조14)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 다시 아우와 함께 울산에서 적장을 죽이고 크게 이기더니 적탄에 맞아 숨졌다. 청의장군(靑衣將軍)으로 불렸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증(追贈)되었다.
이후 철종 임술년에 영호남 유림에서 상소하여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의금부사에 추증되고 계해년에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에 가증(加贈)되었으며, 이듬해 경주 동면에 활천사(活川祠)가 건립되었다. 순국(殉國)한 그의 산소는 현재 울산 양정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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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리(活城里)에는 또 뇌성마비(腦性麻痺) 시인인 김준엽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김준엽 시인은 양손과 양다리를 못 쓰는 중증 뇌성마비장애인으로 1995년도 뇌성마비 전국 ‘보치아(Boccia)’ 경기대회 금메달 획득을 시작으로 수많은 장애인(障碍人) 체육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했었다.
여기에다 뇌성마비 시인들의 시낭송회(詩朗誦會)에 참가하는 등 시작활동(詩作活動)에 정진하여 지난 2012년도에는 첫 시집 ‘그늘 아래에서’를 발간하여 불굴의 의지를 과시하고 있다.
보치아 경기
위에서 말한 ‘보치아(Boccia)’란 ‘패럴림픽(Paralympics)’ 정식종목으로, 가죽으로 된 공을 던지거나 굴려 표적구(標的球)와의 거리를 비교하여 점수를 매겨 경쟁하는 스포츠이다.
뇌성마비(腦性麻痺) 장애인들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고안(考案)되었고, 현재는 각종 운동기능 장애(障碍)를 겪고 있는 장애인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향유되고 있다.
그리고 ‘패럴림픽(Paralympics)’이란 국제 신체장애인(身體障碍人) 체육대회로 영국의 ‘스토크 맨데빌’ 병원의 의사 ‘구트만’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952년 국제 대회로 발전했다. 1960년 로마올림픽대회 이래 올림픽에 이어 같은 장소에서 거행되고 있다.
보치아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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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리(活城里)에는 최근 도·농 통합에 따른 농촌 정주권 촌락으로서 도시에 비해 상대적(相對的)으로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고, 소득수준 향상과 자동차보급 확대 등 변화하는 농어촌 지역 실정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다목적 정주공간(定住空間)을 개설하였다.
경상북도로부터 선정된 다목적광장(多目的廣場)은 자연환경을 고려한 친환경적으로 조성된 광장으로 사업비 2억원을 들여 활성리 마을 중간 2천727㎡에 조성 되어 있다.
‘활성 다목적 광장’
주요시설은 530㎡ 규모의 주차장 및 마을공동작업장과 190㎡ 규모의 수생식물(水生植物) 및 생태식물을 이용한 환경연못, 기존 수림(樹林)을 이용한 간이 운동시설과 파고라, 200㎡의 주민쉼터, 조합놀이대, 철봉, 그네를 갖춘 어린이 놀이터, 537㎡ 규모의 소공원과 노령화된 농촌마을 노인을 위한 게이트볼장 1식 등을 갖추고 있다.
위에서 말한 ‘파고라’의 어원(語源)은 프랑스 말인 ‘페르고라(pergola)’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그늘 시렁, 등나무대로 부른다. 일본에서 그들의 발음으로 ‘파고라(パ-ゴラ)’로 읽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는 단어인데, 백과사전에는 영어식(英語式)으로 읽는 ‘퍼골라(pergola)’로 나와 있다.
철(鐵), 인조목(人造木), 방부목재(防腐木材) 등으로 시렁을 만들고 등나무, 칡덩쿨 등을 식재하여 그늘을 만드는데 3~5년이 소요된다.
당장 그늘로 사용하고자 할 때는 갈대발, 대발 등을 씌워 사용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폴리카보네이트, 슁글 등을 깔아 반영구시설(半永久施設)로도 쓰인다.
파고라
활성리 다목적광장(多目的廣場)은 주위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는 마을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지를 무상으로 기증할 수 있는 적격지(適格地)에 조성되어 안전행정부로부터 지난 한 해 동안 전국 16개시도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한 농어촌주거환경개선사업 평가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활성리(活城里)에는 또 지난 1997년부터 2015년까지 계획된 ‘신계-입실’간 농어촌도로 개설사업의 연장선으로 읍소재지인 입실리(入室里)로의 안전하고 편리한 통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도로는 국도 7호선이 울산-경주-포항을 연결하는 산업도로로 최근 외동읍(外東邑) 주변 일대 교통량이 폭증하여 외동읍 중북부 지역 주민의 경우 오일장인 입실장(入室場)이나 불국장(佛國場) 또는 울산이나 경주도심지에 대한 왕래가 여의치 않아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경주시(慶州市)가 추진한 사업이다.
현재의 7번국도 외동읍(外東邑) 구간은 개곡(開谷)과 냉천(冷泉), 입실(入室), 구어(九於), 외동공단 등 650여개 기업체에서 생산되는 산업물동량 수송으로 만성적(慢性的)인 정체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관내 주민들의 일상적 교통편의를 위하여 이 도로를 개설한 것이다.
‘신계-입실’간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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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말, 하촌(下村)
이하에서는 활성리(活城里)의 자연부락과 문화재를 살펴본다. ‘아랫말’은 활성리의 아래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아랫말’ 또는 ‘하촌(下村)’이라고 불리어 오고 있으며, 1984년 8월 18일 현재 경주김씨(慶州金氏),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주최씨(慶州崔氏) 등 39가구에 203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외동읍(外東邑)의 읍사무소 소재지인 입실(入室)에서 북방 약 5km 지점에 위치하여 양계(養鷄), 양돈(養豚) 등의 부업을 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지난 1950년대 6.25동란 이후 당시의 외동읍(外東邑) 북부지역에서는 유일한 과자공장(菓子工場)이 있었다. 서울에서 과자공장을 경영하던 피난민이 이 마을 주민의 가정집에 차린 공장으로 당시에 주로 만들었던 과자는 너무나 오랜 세월 전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다마’와 유과(乳菓), 비과, 센베이(せんべい), ‘나마가시’, ‘오꼬시(おこし ; 쌀강정, 깨강정) 등을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오꼬시
그 시절에는 ‘땡전’조차 귀한 시절이라 과자공장(菓子工場)이 옆 마을에 있었어도 과자 맛을 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페지기의 경우 겨울철이면 한 달에 몇 번씩 이빨이 뻐근하게 그 귀한 과자 맛을 즐기곤 했었다.
문풍지를 요란하게 흔드는 겨울밤이면, 한 달에 한 두 번씩 선친(先親)께서 사랑방이나 초당방 사람들의 부탁으로 활성리(活城里) 과자집에 가셔서 과자(菓子)를 조그만 ‘마다리’자루에 한 자루씩 사오시곤 하셨다.
과자공장(菓子工場) 주인과 잘 아시는 사이라 화투내기 하는 동료들이 과자를 좀 더 후하게 사오기 위해 과자(菓子)를 사오는 심부름을 주로 카페지기의 선친(先親)에게 담당시켰기 때문이다.
옛날 과자
그리고 대개의 경우 활성리(活城里) 과자공장에서 과자를 사서 돌아오실 때는 거의 집에 먼저 들려 벽에 걸어둔 ‘함지박’을 내려 몇 움큼의 과자를 담아주고 가셨다. 이때는 잠자던 동생들까지 모두 깨워 잔치가 벌어진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떤 때는 여물바가지(쇠죽바가지)에 그득하게 담아주고 가시기도 하셨다. ‘과자집’에서 덤으로 얻어 오는 것은 ‘우리 알라들 자테 준다’고 미리 선언(宣言)을 하시고 가져다주는 것이라 초당방 일행들도 불만(不滿)이 없었다고 하셨다.
어쨌든 그 때 활성리(活城里) 그 ‘과자집’에서 만드는 과자는 왜 그리 달고 맛이 좋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주로 유과(乳菓) 종류를 많이 만든 것으로 기억이 된다.
위에서 말한 ‘센베이’(せんべい)는 한자로는 ‘煎餅(전병)’이라 하는데, 그 기원은 중국에서 온 ‘지지는 떡’이라는 뜻이다.
센베이
전병(煎餠)은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제각각의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으며, 이름도 자국어(自國語) 방식으로 바뀌어 ‘전병’과 ‘센베이’로 나뉘게 되었다.
어린 시절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부모님이 오일장(五日場)에서 전병과자(煎餠菓子)를 사오시면, 형제들이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다투곤 했는데, 지금도 전병과자(센베이)하면 그 시절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비과’는 일종의 카라멜 비슷한 것이었다.
활성리(活城里) 과자공장에서 만들던 과자 중에는 단연코 ‘나마가시’가 일품이었다. ‘나마가시’의 개요(槪要)와 이에 얽힌 사연 한 가지를 소개한다.
지금의 나마가시
(1940-50년대 우리나라에서 만들던 모양과는 큰 차이가 있다.
크림과 ‘스폰지’ 케이크라는 단순한 구성에 과일 조각들이
액센트를 주어서 예쁜 모양의 단면을 만들어 주고 있다)
‘나마가시(なまがし)’는 일본어(日本語)로 생과자(生菓子)라는 말이다. 만주(マンジュウ)와 모찌(モチ), 그리고 양갱(ヨウカン)을 통틀어 ‘나마가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1940-50년대 때 우리가 흔히 ‘나마가시’라고 알고 있던 ‘롤빵’은 일본(日本)을 거쳐 들어 온 ‘스위스롤(Swiss Roll)’을 말한다.
‘스위스롤(Swiss Roll)’은 스위스에서 주로 만드는 ‘롤케익’의 일종으로 ‘스펀지’ 반죽을 이용하여 ‘롤’의 형태로 말아 만든다. 스위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스위스롤’은 보통 ‘초콜릿 스위스롤’과 ‘스위스롤’ 두 종류로 만들어 진다.
과거 외동읍 지방의 경우 ‘야마가시’라고도 했는데, 이는 ‘나마가시’를 잘못 발음한 당시의 신조어(新造語)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쨌든 1950-60년대 당시 구멍가게마다 조금씩 팔고 있던 ‘나마가시’는 정말 기가 막히게 맛이 좋았다. 당시에도 ‘보릿고개’가 온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든 맛없는 것이 없기는 했었지만, ‘나마가시’는 모든 다과류 중에서도 최고의 맛을 자랑했다.
그때의 ‘나마가시’와 엇비슷한 지금의 쵸콜렛식빵
카페지기는 ‘나마가시’에 대하여 조금은 특별한 추억(追憶) 한 가지를 갖고 있다.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학창생활 때의 일이다. 2학년 2학기 때로 기억이 되는데, 죽동리(竹洞里) 못 미쳐 말방리(末方里) ‘장산부락’의 7번국도 변에 있던 구멍가게에서 죽동리 상급생과 괘릉리와 구정리 동기생 몇 명을 상대로 ‘나마가시’ 먹기 ‘내기’를 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하학(下學) 길에 필자가 호기롭게 ‘나마가시’ 20개를 먹겠다고 도전장(挑戰狀)을 내기는 했는데, 열서너 개를 먹고 손을 들어버렸다. 점심을 굶은 터에 ‘나마가시’ 맛이 너무나 좋아 족히 먹을 줄 알고 도전을 했지만, 반을 조금 더 먹고 져버린 것이다.
내기의 조건(條件)은 필자가 이기면 ‘나마가시’ 20개를 공짜로 먹게 되고, 지면 먹은 것을 포함하여 두 배를 상대방(相對方)들에게 사는 조건이었다. 가난한 시골 중학교 2학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도박을 한 셈이다.
다행히 죽동리 선배(先輩)들이 필자의 난처함이 안쓰러웠던지 필자가 못 먹고 남은 것을 하나씩 나누어 먹고, 더 이상 벌칙(罰則)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20개의 ‘나마가시’ 가격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일단 외상(外上)으로 처리해 놓고 어머님을 속여 어떻게 갚아주기는 한 것 같은데 ‘간이 배밖에 나온’ 행동이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당시의 ‘나마가시’는 참으로 맛이 좋았다.
지금의 롤빵(나마가시)
앞에서 카페지기가 ‘땡전’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의 개요(槪要)와 얽힌 사연을 잠시 소개한다. 예부터 우리나라에는 ‘땡전’이라는 ‘돈’이 있었다.
가진 ‘돈’이 없거나, ‘돈’이 없다는 것을 강조(强調)하기 위하여 “땡전 한 푼 없다”고 할 때의 ‘돈’이 ‘땡전’이다. 그러면 우리 고향에서 흔히 쓰는 말 ‘땡전’은 무슨 돈을 말하는 것일까.
우선 이를 표준어로 직역(直譯)하면 ‘푼전’이라는 말이 되는데, “내 주미에너 땡전 한 푼 엄따”, “그거너 땡전어치도 앤 된다”는 용례들이 있다. “내 주머니에는 푼전 한 푼도 없다”, “그것은 푼전 값어치도 안 된다”라는 말이다.
땡 전
그러나 이러한 직역(直譯)의 의미보다는 ‘땡전’의 어원은 조선조(朝鮮朝) 후기에 무제한으로 만들어 낸 ‘당전(當錢 ; 당일전, 당이전, 당오전 등)’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 유래와 내력(來歷)을 알아본다. 먼저 그 당시 우리나라 화폐(貨幣)의 최소단위는 ‘푼(分)’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의 ‘푼’은 우리나라에 근대 화폐, 즉 신식화폐가 등장하기 이전에 썼던 조선통보(朝鮮通寶)와 상평통보(常平通寶) 등의 단위를 일컫는 ‘엽전 한 닢’을 의미하는 말이다.
10전짜리 엽전
10푼은 1전(錢)이며, 10전(錢)은 1량이다. 그리고 ‘푼(分)’은 작은 돈의 단위(單位)나, 하찮은 것을 비유(比喩)할 때 자주 쓰이는데, 거지들이 “한 푼 줍쇼”라고 하는 말도 “적더라도 조금만 도와주십시오”라는 뜻이다.
그러면 ‘땡전’이란 말은 어디에서 나온 말일까. ‘땡전’은 고종 3년(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景福宮)을 다시 지을 때 막대한 건축경비 조달을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제조·통용시킨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당백전’은 실질가치[소재(素材)가치]가 ‘상평통보’의 5~6배에 불과한 반면에 그 명목가치(名目價値)는 실질가치의 약 20배에 달하여 발행 초기에 쌀값을 6배로 폭등(暴騰)케 하는 등 국민들의 생활을 극도로 피폐(疲弊)하게 만들었다.
해동통보
그리고 이렇게 되다보니 기존(旣存)의 ‘당전(當錢 ; 당일전․당이전․당오전)’은 ‘쇠값’도 못하는 ‘똥값’이 되고 말았다.
서민가정(庶民家庭)의 경우 한푼 두푼 모아 항아리에 숨겨둔 ‘당전’이 ‘똥값’이 되고 보니 울화(鬱火)가 치밀어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똥값’이란 지나치게 싼 값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엽전 돈 괘
부잣집에서도 비슷한 처지였다. 세도(勢道)와 착취로 서민들로부터 엄청난 ‘소액당전(少額當錢)’을 긁어모으기는 했는데, 대원군의 ‘당백전(當百錢)’ 발행으로 모두 쇠붙이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나 분노(忿怒)하면 그 분한 마음이 말의 발음(發音)을 격하게 만드는데, ‘똥값’이 되어버린 ‘당전’도 ‘땅전’이라는 된소리로 발음하게 되었고, 세월이 흐르자 이 말이 ‘땡전’으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옛 신라조(新羅朝) 당시 당(唐)나라 군사들이 주둔했던 외동읍 모화리(毛火里)의 ‘당진(唐陳)’을 당나라 군사들의 횡포를 참지 못한 당시의 신라백성들이 ‘땅진’이라고 부르다가 ‘땅지’가 된 경우와 같은 예라 할 수 있다.
결론적(結論的)으로 “땡전 한 푼 없다”라는 말은 대원군(大院君) 당시 그토록 가치가 없었던 ‘소액당전(少額當錢)’ 한 푼도 없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당전’은 그 시절 화폐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 당일전(當一錢), 당이전(當二錢), 당오전(當五錢)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해동중보(1103년)
어쨌든 이처럼 ‘엽전’의 가치가 땅바닥에 떨어지다 보니 당시의 ‘엽전(葉錢)’들은 아이들의 ‘엽전치기’ 도구로 전락(轉落)될 수밖에 없었다.
부잣집 머슴들도 부잣집 광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엽전(葉錢)’을 자기 집 아이들에게 여물바가지로 한 바가지씩 퍼다 주기도 했었다. ‘엽전치기’나 하라는 뜻에서였다.
당시의 ‘당전(當錢)’이 어느 정도로 ‘똥값’이었는지 그 증거가 되는 얘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인 서기 1904년 6월 미국(美國) 콜리어스(Collier’s) 신문사의 특파원 로버트 던(Robert L. Dunn)은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부산(釜山)에 도착했었다.
‘던’기자는 한반도(韓半島) 남쪽에서 북으로 진격하는 일본군(日本軍)을 종군하기 위해 취재경비로 사용하기 위해 갖고 온 달러를 조선화폐(朝鮮貨幣)로 환전했다.
당 전
(위로부터 당일전, 당이전, 당오전, 당백전)
서울을 떠날 준비를 하던 날 아침, ‘던’은 일본인 통역(通譯) ‘구리타’에게 150달러를 바꿔오도록 지시했다. 미국(美國)의 경우 이 정도의 경비(經費)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에 상당하는 달러를 우리나라 돈으로 환전(換錢)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던’은 당시의 우리나라 화폐(貨幣)의 가치가 어느 정도 하락세(下落勢)였는지를 알지 못했다. 때문에 아침에 나간 ‘구리타’가 저녁때에야 짐꾼들에게 지워 가지고 온 ‘엽전(葉錢)’ 더미를 보고 ‘딘’은 놀라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150달러를 바꾸어 온 ‘엽전(葉錢)’이 거의 한 트럭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당백전
그가 미국에 송고(送稿)한 ‘한국에서의 현금 환전’이란 제목의 기사는 미화(美貨) 1센트가 종류에 따라 ‘엽전’ 15~30개와 맞먹는 액수(額數)였으며, 1달러를 환전(換錢)하면 장정 한 사람이 지고 가야 할 지경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콜리어스, 1904.6.4).
당시의 미화(美貨) 150달러면 장정(壯丁) 150명이 지고 와야 할 무게와 부피였고, 그래서 그 ‘엽전’이 한 트럭이나 되었다는 얘기다.
150달러를 환전하고 엄청난 엽전더미 앞에서 기념촬영한 ‘던’기자
이 당시 독립신문에서는 “정부의 화폐정책 부재로 동전 가치는 갈수록 추락했다. 나라의 앞날은 생각지 않고, 동전과 백동전(白銅錢)을 과다히 만들어 세상에 펴놓으매, 외국인들이 물건을 팔 때는 은전(銀錢)을 받고, 살 때는 동전을 주며, 대한(大韓) 사람들도 점점 은전을 거두어 혹 감추며, 일시 이익을 도모하니 세상에 남는 것은 추한 당오전(當五錢)과 무거운 동전뿐”이었다고 보도하고 있다(독립신문, 1899.2.3).
‘당오전(當五錢)’은 거두어들이고, 동전(銅錢)을 더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 당시 정부의 통화 팽창정책(膨脹政策)을 질타하는 보도내용이었다.
상평통보
화폐정책(貨幣政策)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조정(朝廷) 중신들이 한 독재자의 무계획한 통화증발(通貨增發)을 막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독일(獨逸)의 경우 2차 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을 살상(殺傷) 당하게 한 히틀러정부가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무제한(無制限)으로 발행한 마르크화가 그야말로 ‘똥값’이 되어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던 사례를 우리가 먼저 겪어야 했던 부끄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벽난로 불쏘시개로 쓰던 2차대전 당시 독일 ‘마르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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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리(活城里) 사연에 엉뚱한 잡설(雜說)이 너무 길어져 활성리 동기생(同期生)들과 출향인사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활성리의 ‘아랫말’에는 카페지기의 영지초등학교 제7회 동기생(同期生)인 김화자(金花子)양이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부산(釜山)에 거주하고 있다. 지금은 김경순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김화자(金花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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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말’ 7번국도 입구는 ‘주어리’라고도 했는데, 그 곳에 있는 공굴다리(콘크리트 다리)도 ‘주어리 공굴다리’라고 했었다. 이곳은 옛적에 ‘걸비(거러지)’들이 많이 살았는데, 밤늦게 불국장(佛國場)에서 소 팔아 가지고 오다보면 제일 무서분(무서운)데가 괘릉(掛陵) ‘능갓’입구와 ‘주어리 공굴다리’라고들 했었다.
당시의 ‘주어리’에는 7번 국도변(國道邊)에 초가집 한 채가 있었으나, 공굴다리 앞쪽 언덕배기 아래쪽 활성리 진입도로(進入道路) 입구에 있었기 때문에 집 뒤 언덕 뒤쪽에 있던 공굴다리와는 구획되어 있었다.
지금은 활성리(活城里) 진입도로가 국도에서 하천 좌측으로 개설되어 있고, 옛적 초가집 자리에는 ‘화이트모텔’이라는 숙박시설(宿泊施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괘릉입구(1km 북쪽에 있는 ‘웽고개’ 입구의 괘릉리 입구와 다른 입구임)는 지금은 도로 양 옆에 주유소(注油所)와 휴게소까지 등장해 있으나, 그 시절에는 집도 절도 없었고, 비포장(非鋪裝) 2차선 국도에서 괘릉으로 진입하는 트럭 한 대가 겨우 다닐 정도의 좁다란 농로(農路)가 있었으며, 그 옆에 조그마한 괘릉 ‘공굴다리’가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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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말, 상촌(上村)
‘웃말’은 활성리(活城里)의 마을 윗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웃말’ 또는 ‘상촌(上村)’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 년 전 장(張)씨가 개척하여 김해김씨(金海金氏), 청안이씨(淸安李氏), 단양우씨(丹陽禹氏), 경주최씨(慶州崔氏) 등이 차례로 들어와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는 이들 중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제일 많다고 한다.
웃말 당수나무
윗말 455번지에는 인천소년교도소 근무 후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한 김종택(金宗澤)씨가 거주했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살았던 영지초등학교 제7회 동기생으로는 이미 고인이 되신 카페지기의 사촌 형이자 동갑네기인 이진우(李鎭雨)군과 김종원(金宗遠)군이 있었다.
이진우(李鎭雨) |
김종원(金宗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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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리 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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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어리, 승명(僧鳴)
‘중울리’는 ‘수리방’ 북쪽에 ‘중어리’라는 들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이 지역이 불국사(佛國寺)에 속한 전답들이 있었다. 그런데 가뭄이 극심했던 어느 해에 이곳에 불국사의 중들이 추수(秋收)하러 왔다가 심한 한재로 소출이 너무 적어서 울고 갔다 하여 ‘중울리’ 또는 ‘승명(僧鳴)’이라고 불리어 오다가 그 후 ‘중어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벼 베는 승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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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골, 기곡(基谷)
‘텃골’은 ‘송골’ 남쪽에 골짜기가 있는데 병풍처럼 산이 가려 ‘골(谷)’을 이룬 마을이라 하여 ‘텃골’로 전해 내려오고 있고, 한자로 기곡(基谷)이라고도 한다.
1984년 8월 18일 현재 경주김씨(慶州金氏) 3가구, 인동장씨(仁同張氏) 2가구, 경주이씨와 경주최씨(慶州崔氏) 각 1가구 등 7가구에 43명이 거주하였으며, 사과와 복숭아 등의 과수원을 경영하여 농가 소득을 높이고 있었다. 카페지기의 사촌동생(이철우)이 오래 전부터 거주하면서 벼농사와 채소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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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10반)
‘텃골’ 아래쪽에는 5~6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열반’이라는 작은 부락(部落)이 있다. 조그마한 저수지 옆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마을은 중요한 지형지물(地形地物)이 없어서인지 활성리 행정구역의 ‘제10반’으로 편성된 마을이라 하여 그냥 ‘열반(10반)’이라고 칭한다.
독음(讀音)으로 ‘십반’이라고 하면, ‘십’이라는 말이 성숙한 여자의 성기(性器)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인 ‘씹’과 혼동(混同)되어 같은 숫자인 ‘열’로 바꾸어 ‘열반’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경주식 발음(發音)으로는 ‘씹’도 ‘십’으로 발음되고 ‘10’도 ‘십’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지은 마을 이름이다.
열반(10반)
이 마을에는 몇 해 전에 작고하신 카페지기의 고모님께서 거주하시던 마을로 카페지기의 영지초등학교(影池初等學校) 선후배가 되는 고종형제와 누이는 모두 울산공단(蔚山工團)으로 분가하여 살고 있고, 하나밖에 없는 영지국민학교 제7회 동기생인 김종기(金宗琪)군도 울산공단에 살고 있다.
김종기(金宗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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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는 작고한 김영식 박사(경제학)의 뜻을 이어받아 그의 동생 김우식씨가 활성장학회(活城獎學會)를 설립하여 스스로 회장을 맡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업 증진에 도움을 주고 있다.
2010년에 발족한 활성장학회(活城獎學會)는 매년 활성리 주변 지역 3명의 고등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는데, 금년의 경우 생활 형편이 어려운 고등학생 3명에게 장학금 210만원(1인당 70만원)을 전달했다.
장학금을 전달하는 김우식씨와 학생들
(사진의 집은 고 김경식 박사의 집으로 사립문 앞에 '열반못'이 있다)
카페지기의 고모님댁 아래 김영식박사의 생가(生家) 앞에는 조그마한 저수지(貯水池)가 있는데, 이를 마을이름에 맞추어 ‘열반못’이라고 한다. ‘10반 못’이라는 뜻이다.
‘열반못’은 2010년, 농촌진흥청(農村振興廳)에서 실시한 수자원조사에서 등재된 저수지로 소규모 저수지로 “토언제방에 잡목(雜木)과 잡초가 많이 자라 관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달고 있다.
여기에서 ‘토언제방’이란 ‘토언제(土堰堤)’라는 말로 흙으로 제방(堤防)을 쌓은 저수지라는 뜻이다.
윗말 당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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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암(蓮池庵)
활성리(活城里) 482번지에는 오랜 세월 산이 깎여 언덕이 된 자리에 단아한 모습을 한 연지암(蓮池庵)이라는 사찰이 있다. 연지암(蓮池庵) 대웅전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6호로 지정된 석조(石造) 약사여래 부처가 있다.
이 부처는 일제(日帝) 말엽 이 절의 창건주 김연지화(金蓮池華)보살의 꿈에 현몽이 있어 노천(露天)에 있는 부처를 찾아내어 연지암(蓮池庵)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를 안 일본군(日本軍)이 약사여래를 어디서 훔쳐왔느냐며 연지화(蓮池華)보살을 고문하기 시작했는데, 그 보살을 고문한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활성리(活城里) 연지암
이 약사여래 부처는 극도로 영험(靈驗)하여 사업 성취, 학업 성취, 아픈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나 와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동네는 150여 가구가 모여 사는데도 유일하게 교회(敎會)가 없으며, 지금은 모르지만 기독교인(基督敎人)이 한 사람도 없는 불자(佛者)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
연지암(蓮池庵)은 불국사의 말사로서 통일신라시대 또는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근대에 들어서 김연지화(金蓮池華) 보살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87년에 중건(重建)한 대웅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서 근래에 지은 것이다.
연지암
안에는 중앙 불단(佛壇)에 석가삼존불상과 후불탱화로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고, 지장탱화·칠성탱화·신중탱화가 걸려 있으며 동종(銅鐘)이 있다.
칠성탱화 앞에는 석조 약사여래 입상(立像)이 있다. 사찰(寺刹) 경내에는 근래에 조성한 삼층석탑과 「김연지화 창건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활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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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리에는 지귀설화(志鬼說話)라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지귀 설화’는 일명 ‘불귀신 설화’라고도 하는데, 심화요탑(心火繞塔)이라는 제목으로 박인량의 ‘수이전’에 실렸다가 ‘태평통재’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 전재되었다. 책의 내용을 알아본다.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때에 ‘지귀(志鬼)’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지귀’는 활리역(活里驛) 사람인데, 하루는 서라벌에 나왔다가 지나가는 선덕여왕을 보았다. 그런데 여왕(女王)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그는 단번에 여왕을 사모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진평왕의 맏딸로, 그 성품이 인자하고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용모가 아름다워서 모든 백성들로부터 칭송(稱頌)과 찬사를 받았다. 그래서 여왕(女王)이 한번 행차(行次)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여왕을 보려고 거리를 온통 메웠다.
‘지귀’도 그러한 사람들 틈에서 여왕을 한 번 본 뒤에는 여왕(女王)이 너무 아름다워서 혼자 여왕을 사모(思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면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선덕여왕(善德女王)을 부르다가 그만 미쳐 버리고 말았다.
“아름다운 여왕(女王)이여, 나의 사랑하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이여!”
‘지귀’는 거리로 뛰어다니며 이렇게 외쳐댔다. 이를 본 관리들은 ‘지귀’가 지껄이는 소리를 여왕(女王)이 들을까 봐 걱정이었다. 그래서 관리들은 ‘지귀’를 붙잡아다가 매질을 하며 야단을 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선덕여왕
어느 날 여왕(女王)은 다시 사찰(寺刹)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행차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어느 골목에서 ‘지귀’가 선덕여왕(善德女王)을 부르면서 나오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떠들썩했다. 이를 본 여왕(女王)은 뒤에 있는 관리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미친 사람이 여왕님 앞으로 뛰어나오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그럽니다.”
“나한테 온다는데 왜 붙잡았느냐?”
“아뢰옵기 황송합니다만, 저 사람은 ‘지귀’라고 하는 미친 사람인데, 여왕(女王)님을 사모하고 있다고 합니다.”
관리는 큰 죄나 진 사람처럼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고마운 일이로구나!”
여왕(女王)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하고는, ‘지귀’에게 자기를 따라오도록 관리에게 말한 다음, 절을 향하여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한편, 여왕(女王)의 명령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지귀’는 너무도 기뻐서 춤을 덩실덩실 추며 여왕의 행렬(行列)을 뒤따랐다.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절에 이르러 부처에게 기도를 올리었다. 그러는 동안 ‘지귀’는 절 앞의 탑 아래에 앉아서 여왕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여왕은 좀 체로 나오지 않았다. ‘지귀’는 지루했다.
불공드리고 나가는 선덕여왕(오페라)
(‘지귀’는 탑 계단을 베고 잠이 들어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안타깝고 초조했다. 그러다가 심신이 쇠약(衰弱)해질 대로 쇠약해진 ‘지귀’는 그 자리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여왕(女王)은 기도를 마치고 나오다가 탑 아래에 잠들어 있는 ‘지귀’를 보았다. 여왕은 그가 가엾다는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팔목에 감았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 위에 놓은 다음 발길을 옮기었다.
여왕이 지나간 뒤에 비로소 잠이 깬 ‘지귀’는 가슴 위에 놓인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는 놀랐다. 그리고 여왕(女王)의 금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러자 그 기쁨은 다시 불씨가 되어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는가 싶더니, 이내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가슴속에 있는 불길은 몸 밖으로 터져 나와 ‘지귀’를 어느 새 새빨간 불덩어리로 만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가슴이 타더니 다음에는 머리와 팔다리로 옮아져서 마치 기름이 묻은 솜뭉치처럼 활활 타올랐다.
‘지귀’는 있는 힘을 다하여 탑을 잡고 일어서는데, 불길은 탑으로 옮겨져서 이내 탑도 불기둥에 휩싸였다. ‘지귀’는 꺼져 가는 숨을 내쉬며 멀리 사라지고 있는 여왕(女王)을 따라가려고 허위적 허위적 걸어가는데, ‘지귀’ 몸에 있는 불기운은 거리에까지 퍼져서 온 거리가 불바다를 이루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지귀’는 불귀신으로 변하여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불귀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선덕여왕(善德女王)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呪文)을 지어 백성들에게 내놓았다. 주문을 소개한다.
志鬼心中火(지귀심중화)
燒身變火神(소신변화신)
流移滄海外(유이창해외)
不見不相親(불견불상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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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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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지어 준 주문을 써서 대문에 붙였다. 그랬더니 비로소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불귀신을 물리치는 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는 불귀신이 된 ‘지귀’가 선덕여왕(善德女王)의 뜻만 좇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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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설화에서 등장하는 활리역(活里驛)이 과연 활성리를 이르는 말인가 하는 점이다. 관련 학자들은 결론적으로 활성리로 보고 있는데, 그 근거는 ‘지귀(志鬼)’라는 사람이 실제 살았던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명인 활리역(活里驛)의 경우, 역(驛)자가 붙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실제 지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면, 활리역(活里驛)은 지금의 외동읍 활성리(活城里)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는 것이다. 활리역 주변에 ‘싸리밭등’이란 지명으로 추정할 수 있는 ‘싸리’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그 가능성을 더하고 있다.
활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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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리(活城里)의 출향인사로는 이미 고인이 된 인사들로 앞에서 소개한 ‘열반’ 출신 김영식 박사와 ‘윗말’ 출신으로 인천소년교도소 근무 후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한 김종택(金宗澤)씨, 뇌성마비 김준엽 시인 등이 기억되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카페지기가 다른 동네 출향인사(出鄕人士)들은 잘 알면서 향리와 향리의 바로 앞 동네인 활성리(活城里)의 출향인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여간 면구스럽지가 않다.
50여 년 전에 상경했고, 그동안 활성리(活城里)에 몇 번 들리기는 했으나, 시간에 쫓겨 제대로 된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문, 특히 활성리(活城里) 출신 동문여러분께서 활성리 출신 출향인사를 아시는 분들은 자세한 내용을 ‘답글’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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