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현재를 우리의 미래로 만들기 위한
유럽 3개국
농업농촌연수 보고서
김 훈 규
사단법인 거창군농업회의소 사무국장
[ 목 차 ]
1. 연수개요 및 일정 ......................................................... 1
2. 연수 일지 ....................................................................... 4
3. 독일 농업 정책과 제도에 대한 면담 내용 ........... 27
1. 연수개요 및 일정
□ 주제
: 농업으로 지속 가능한 유럽 농촌
□ 연수국
: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 연수일정
⋅국내연수: 2015년 4월 30일(목) 14:00~18:00, 1일
⋅현지연수: 2015년 5월 6일(수) ~ 15일(금), 8박 10일
□ 연수참석자
: 농업인, 농업 관련단체 실무자, 농업전문기자, 주관단체의 수행자 등 21명
□ 교육내용 및 주요 방문지
⋅유럽의 생산자 조직 활성화 사례
: 슈베비쉬할 생산자 조합ㆍ농민시장, 렉아우 지역농민 생산자조합 등 다양한 지역농민조직체
⋅농산물 가공 직판, 농촌관광 등 농가의 부가가치 창출 현장
: 명품치즈 가공ㆍ직판 농가, 훈제생햄ㆍ전통제빵 맛인증 농가, 포도주마을 관광민박 농가 등 ⋅농촌에서의 휴가: 오스트리아 엘마우 농가민박 체험
⋅농민이 되기 위한 자격을 키우다_ 교육시스템
: 오스위스 인포라마, 독일 켐텐농업국 가정경영학교
⋅도시와 농촌이 함께하는 지속 가능성의 현재와 미래
: 도심 속 푸른 정원 클라인가르텐
⋅수백 년 역사가 그대로 보존된 유럽
: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스위스 쉴트호른, 독일의 크고작은 중세도시 등
□ 일정표
1일차 5/6(수)
◇ 인천 출발
◇ 프랑크푸르트 도착
* 숙박: 에틀링헨 / 독일
2일차 5/7(목)
◇ 슈베비쉬할 생산자 조합
◇ 슈베비쉬할 농민 직영 판매장
◇ 슈베비쉬할 생산자 조합 회원 농가
◇ 슈베비쉬할 지역농산물 시장
◇ 지역문화탐방 _ 로텐부르크
* 숙박: 뉘른베르크 / 독일
3일차 5/8(금)
◇ 지역문화탐방 _ 뮌헨 시내(피나코텍 미술관 등)
◇ 이동(뮌헨 → 상트요한)
◇ 피쉴러 호퍼 전통제빵 맛 인증 농가
◇ 분임토의
* 숙박: 엘마우(농가민박) / 오스트리아
4일차 5/9(토)
◇ 지역문화탐방 _ 산촌문화경관
◇ 빌더케제 티롤특산 치즈 공방
◇ 중간토론
* 숙박: 엘마우(농가민박) / 오스트리아
5일차 5/10(일)
◇ 미탁 알프스 등정, 허브 농가
◇ 지역문화탐방 _ 인스부르크
◇ 디스마스 특산 훈제생햄 맛 인증 농가
* 숙박: 베르타하 / 독일
6일차 5/11(월)
◇ 렉아우 지역농민 생산자조합
◇ 독일 바벨 관광민박 농가
◇ 켐텐농업국 농업가정경영전문학교
* 숙박: 베르타하 / 독일
7일차 5/12(화)
◇ 그린네바하마을 치즈공장(마을공동체)
◇ 이동(리히텐슈타인 공국 경유)
◇ 스위스 쉴트호른 등정, 인터라켄 폰알멘 알프스치즈 농가
◇ 분임토의
* 숙박: 에쉬 / 스위스
8일차 5/13(수)
◇ 스위스 베르너오버란트 INFORMA(농촌여성직업학교)
◇ 지역문화탐방 _ 프랑스 리크뷔르 중세 농촌마을
◇ 종합토론
* 숙박: 라슈타트 / 독일
9일차 5/14(목)
◇ 칼스루에 클라인가르텐 협회 _ 클라인가르텐 단지
◇ 라인스바일러 포도주 마을 민박농가
◇ 프랑크푸르트 출발
10일차 5/15(금)
◇ 인천국제공항 도착
2. 그들의 현재를 우리의 미래로 만들기 위한
유럽 농촌 연수 일지
3년 전 유럽의 농업회의소 운영현황 조사 목적으로 일주일간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3개국을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당시에는 각국의 농정시스템을 직접 보고 청취하며 농업회의소 및 농업관련 단체 관계자와의 미팅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무척 바쁘게 보냈었다. 너무 빡빡한 일정으로 놓친 것이 너무 많아서 아쉬움이 큰 터였다. 각국의 지역과 마을,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유럽의 농업인들과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도 해보고 싶었고,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농업과 농촌의 현주소를 되짚어 보는 기회를 언젠가는 꼭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최근 지역농정 및 로컬푸드 관련 현안, 마을만들기를 통한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우리지역 생산자 조직과 농업인, 지역주민을 집중적으로 만나면서 현실적인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다. 당연히 다른 지역 및 외국의 사례를 폭넓게 조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거창군에서 추진하는 마을만들기 사업에 정책자문단으로 참여하면서 지속가능한 우리농촌의 미래에 대한 희망 보다는 의구심을 점차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조금 더 깊은 공부를 해야겠다, 더 넓은 식견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싶을 때, 무엇인가 강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때, 마침 대산농촌재단의 해외연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청을 했다. 신청을 한 전국의 수많은 농업인과 농업관련 전문가, 실무자들 가운데 당당히 선발이 된 것을 무척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유럽 농업농촌 현장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출발 전부터 흥분은 생각 이상이었다.
- 출발과 도착
10시간 이상을 날아가면서 비행기 안에서 총 4번의 잠을 잤다. 기내에서 주는대로 먹고, 먹고 나면 무조건 잤다. 그렇더라도 30분 이상 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현지시각 저녁 6시40분 즈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니 여전히 환했다. 내릴 때 스튜어디스는 빨간 장미꽃을 선물로 주었다. 느낌이 좋았다.
우리 일행을 기다린 인솔교수인 황석중교수님과 상봉을 하고, 콧수염이 멋진 어느 노기사가 운전하는 버스를 타고 아우토반을 달렸다. 시내로 들어갈 참이었다.
숙소에 짐을 갖다놓고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커다란 식당을 찾아갔다. 마침 축구경기에 열중인 분위기였다. 식사와 함께 나온 맥주를 곁들이고 그들과 축구를 시청했다. 맥주와 축구의 본토에 온 것에 대한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 날씨가 너무 좋아서 다행이었다
- 유럽 농촌마을 마실 1일차
새벽 4시. 첫날부터 시차를 극복하기 위한 안간힘을 썼다. 마침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고 한 시간 여를 배회하다가 잠시 길을 헤맸다. 시내 곳곳에 숲이 있고 그 숲 안에 만들어진 아이들의 놀이터. 이곳은 대체로 다 그러했다. 우리네처럼 땡볕에 놀이터를 만들고 작은 나무 몇 그루 심는 개념과는 달랐다. 에틀링헨 숙소의 첫 아침식사는 먹으면 그냥 건강해질 것 같았다. 그게 빵이나 고기, 치즈 뭐 그런 것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그러면 안되겠지만, 이곳 사람들의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원산지나 첨가물 그런 것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괜한 신뢰가 갔다.
연수 첫날의 날씨는 대단히 화창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황석중교수님의 말씀 중 독일 속담 중에 “마음이 착한 사람이 여행을 하면 날씨가 좋다”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 기대는 연수기간 내내 유효했다.
농민생산자조합과 로컬푸드 매장을 찾아갈 예정이다. 철도 파업 중이라 도로사정은 좀 걱정이 되었다.
[ 슈베비쉬할 생산자조합 ]
프랑크푸르트 아래 하이델베르그 주변을 지나 2시간을 달려 슈베비쉬할이라는 지역의 생산자조합을 찾았다. 도로의 정체가 약간 있었다.
80년대 8명의 생산자로 시작해서 1,400명이 넘는 회원에 년 1,400억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영향력 있는 조합이었다. 제주흑돼지 같은 검은 돼지와 소, 양이 주생산물이다.
안내하고 설명하는 담당자는 돼지를 키우는 농민이었다. 재래종 흑돼지를 살려서 지역의 소득과 활성화를 도모했으며, 이제는 지역과 문화, 경관, 공기·물·토양 등의 생존기반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농업으로, 젊은이들의 미래가 있는 농촌을 만들겠다는 의미를 강조했다. 오히려 동물보호협회 같은 곳의 칭찬을 받는 곳으로 만들고 있었다.
농민이 떠나지 않는, 그리고 아무나 농민이 될 수도 없는 곳......
농민 스스로 소득을 강조하지 않는 구조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농업정책의 혁신과 농촌의 구체적 구조개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1억 소득이 가능한 농부로 만들어주겠다며 농촌으로 모시기 급급한 우리의 귀농귀촌 정책이 얼마나 천박한지를 느끼게 했다.
다시한번, 독일의 농업정책 제일 우선인 “농민으로 하여금 농촌을 떠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겠다”라는 문구를 가슴 깊숙히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직거래 판매장에는 항상 꽃을 팔았다.
- 유럽 농촌마을 마실 2일차
“국민은 건강한 농산물을 적정한 가격으로 안정적으로 먹을 의무가 있다. 세금을 내는 이유다. 농민은 모든 국민과 동등한 소득과 삶의 질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농민은 국가와 사회 발전에 동참하여야 하며, 다른 산업이 발전하면 농업도 당연히 발전해야 한다.
농업의 근간인 토양의 토질에 따라 땅값이 좌우되며, 하여 토양검정의 소관부처는 세무서이다. 농업기술센터 등의 행정기관은 비료의 적정사용 등을 권장하고 감시할 뿐이다.
여기 농촌에는 도로가 새로 나면 땅값이 오히려 떨어진다. 큰 도로가 굳이 없어도 필요한 생활 인프라가 갖춰져 있으며 15분 내에 닿을 수 있는 교육, 의료, 복지시설들이 다 있다.
제철 음식 먹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온실 등 하우스시설의 농산물은 인기가 없다. 온실은 그만큼 에너지가 과다 투입된 것이다. 그래서 비닐하우스 시설을 하는 농가가 거의 없으며 혹시 있더라도 그들은 농민 보다는 업자 취급을 받는다.”
뮌헨으로 가는 길. 호프 최대 생산지역을 지나며 지도교수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들의 농업철학에 깜짝깜짝 놀라며 심지어 취하기까지 했다.
잠시 들른 뮌헨의 미술관에서 고흐의 해바라기 원본을, 클림트를, 르느와르를 볼 줄은 몰랐다. 본연의 목적이었던 사람과 경관과 지역과 마을을 애타게 찾으려 하다가, 비록 문외한일지라도 매력적인 미술관 이런데 한번쯤 들어가기라도 하면 왠지 좀 있어보이기라도 하는 듯 했다.
‘그림 속의 배경과 거의 다름이 없는 유렵의 오래된 거리’를 걷다가 다다른 오랜 시청의 광장은 햇빛을 쫓는 젊은이들이 들어차고 주변 벤치마다 노인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여행이 어설픈 이방인은 길거리 과일가게(생산자가 직접 판매하는 지역농산물 판매대)에서 맛나게 익은 딸기 한팩을 2유로에서 1센트 빠지는 가격으로 사들고 잔디밭 한구석에 앉아 다리를 잠시 쉬었다. 딸기 하나를 입에 넣어보니 어쩌면 이다지도 단단한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뮌헨에서 한시간 삼십분쯤 버스로 달려오니 오스트리아 국경이었다. 깜빡 졸다가 깨더라도 비슷한 풍광이 이어졌다. 목초지를 낀 마을, 호수를 낀 마을, 숲을 낀 마을, 마을과 마을을 잇는 ‘국도’를 따라오는 것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보다 여행자에겐 큰 도움이 되었다. ‘인위적인 국경 표시도 거추장스럽고 무의미하며 오히려 경관을 헤친다’는 이야기에 잠시나마 훗날 우리의 국경을 상상해봤다.
조금더 달리니 바로 앞산은 흰눈이 녹지 않고 있었다. 폴카 음악이 유래된 칠러타 지방을 지나서 인구 1천만도 되지 않는 국가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로트홀쯔를 가서 더 작은 마을의 아주 작은 농가를 찾아가야 했다. 오직 빵으로 유명해진 집.
음악의 도시 짤쯔부르크를 가기 전의 행선지로 빵으로 배를 채우는 건 좋은 일인 듯 했다.
[ 피르흐너호프 농가(제빵 맛인증 농가) ]
티롤 지방의 발터씨 집이 마침 빵 굽는 날인 듯 했다. 집안 가득 효모냄새, 빵냄새가 가득했다. 부부가 같이 농업인 마이스터이고 23살 막내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짓기 위해 농고를 나와서 가업을 잇고 있다 했다. 아들의 이름도 존경하는 농민 아버지를 그대로 따라 '발터주니어'라고 했다.
6마리의 소는 6헥터 규모의 경지를 일굴만한 거름을 준다하고 닭은 아침마다 계란을 찾는 사람들로 인기가 많다. 아이들의 빵만들기 체험은 언제나 무료이며, 집에서 모든 신선한 재료를 다 마련한다 하여 시중의 빵집의 빵값 보다 더 높게 값을 받지는 않는다 했다. 적정가격으로 주변 상권과 경쟁하지 않는다.
직접 재배한 밀로 빵을 만들어 파니 60헥터 면적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보다 낫다고 했다. 허브시럽을 만들고 생우유, 요구르트 정도는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다. 그리고 치즈까지 제조하기가 너무 벅차다는 말을 곁들였다.
빵은 일주일에 한번 만들고 빵 굽는 날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구입하기 힘들 정도였다. 우리가 방문한 날도 마침 진열대의 빵은 다 팔려나간 터였다. 다년간의 전국대회에서 빵으로 '맛의 왕관'을 차지했으며 수시로 교육과 위생점검도 받는다 했다. 교육은 농업회의소가 지원 및 주관하며 그가 1년에 내는 농업회의소 회비는 40유로 정도라 했다. 농사규모가 좀 더 큰 농가는 회비를 100유로까지 내기도 한단다.
씨감자를 잘라서 심지 않은지가 오래 됐으며 통째로 심는 새로 산 기계를 자랑했다. 찾은 손님을 위해 그의 아내는 그녀의 텃밭을 일일이 소개했고, 이내 빵과 거기에 발라먹는 버터, 치즈, 요구르트와 거기에 섞어먹는 복분자쨈, 허브시럽과 물을 끊임없이 대접해 주었다. 남은 빵은 다 싸서 가라 했다. 그리곤 어떤 선물도, 돈도 받지 않을거라니...... 유럽 어느 농가의 인심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 유럽 농촌마을 마실 3일차
알프스 자락의 농가에서 눈을 뜬 시간은 새벽 5시30분. 점점 적응이 되는 듯 했다. 간밤에 농가의 소들은 축사에 들어가지 않았는지 저 푸른 초원 위에 여전히 앉아 있었고, 아랫집 농가에서 들리는 기계소리에 잠시 들여다보니 소젖을 짜고 있었다. 안개비가 스미는 길을 따라서 골짝을 따라 걸으니 집집마다 민박을 운영하는 듯 하지만 닭소리, 염소소리가 헛간 근처, 숙소의 1층에서 들려왔다. 농가민박이 어때야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알프스의 눈 녹은 물인 양 뻐국새와 종달이 소리와 유쾌히 섞여 흘러가고 잘 빠진 침엽수의 향은 날카로운 낱잎 처럼 코를 콕콕 찔렀다. 우리 숙소의 주인집 아주머니가 아니라 아저씨가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 여자들은 곤히 주무시는지 농장에도 부엌에도 보이질 않았다.
30여분을 걸었을까? 저 멀리 앞마을에서 들리는 성당 종소리에 아침밥 시간을 알아채고 발길을 돌렸지만 어느새 옷이고 신발이고 눅진하게 젖어있었다.
숙소에서 짤쯔부르크를 가는 도중에 독일 국경을 다시 지나서 또다시 오스트리아로 들어서는 중 산간 마을 한곳을 들렀다. 교회 하나 보러 가는 길. 기껏 교회 하나 공동묘지 한곳 때문에 굳이 들렀다.
람사우교회! 유럽의 풍경사진, 퍼즐맞추기 배경의 대명사인 그런 곳이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래를 작사한 수도사가 머물렀던 교회라 했다. 뮌헨, 짤쯔부르크 미대생들의 스케치 실습 공간으로 인기가 많은 곳이기도 했다.
5백년이 지난 교회와 그 주변의 풍광이 1,800년대 어느 화가의 그림과 큰 차이가 없었다. 마을의 모습이 이토록 변함없이 유지되는 비결에 감탄하고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이 그 교회 앞의 우물에서 잠시 목을 축였다. 우리네 관광지 같으면 주변에 장사치들이 난전을 펼칠 만도 한데 여긴 작은 카페 하나 기념품점 하나 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남의 동네 공동묘지에서 사진 찍는 것은 처음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접경을 지나는 산을 넘다보니 절경이라 버스를 세우기에 이유를 들어보니,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지막 장면의 촬영지라 했다. 온 가족이 산을 넘어 도망을 가는 그 장면.
녹지 않은 눈이 눈을 즐겁게 하고 하얀 구름안개가 온몸을 감싸지만 오히려 몸에서 열이 났다. 남해 독일마을이 아니라, 언양 알프스가 아니라, 무주 티롤이 아니라, 진짜 알프스 자락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티롤을 넘나들다보니, 50년 전 영화는 더욱 현실감이 생겼고 곧 도착할 짤쯔부르크는 또 어떤 선물을 줄까 기대가 커졌다.
짤쯔부르크에 닿자 사부작사부작 비가 내렸다. 미라벨 정원을 가노라니 카라얀 생가와 도플러 생가를 지나쳤다. 이 동네는 터가 얼마나 훌륭하기에 바로 이웃에 세기의 위인들이 줄줄이 태어나는가 싶었다.
50년 전 아이들과 마리아가 뛰어놀던 미라벨 정원은 영화 속과 다름이 없었다. 길거리 연주자의 배려로 동전 한닢으로 아코디언을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고마운 체험을 해봤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들여다보니 모짜르트의 생가였다. 1천년이 넘은 교회를 기웃거리다 마침 활기찬 농민들의 장이 선 광장에서 이것저것 흥정을 해보고는 괜스레 시식만 잔뜩하며 배를 채우고는 밝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오스트리아 농가민박의 개념은 철저하게 휴양에 목적이 있다. 체험이니 관광이니 하는 개념과 차이가 크다. 1박 손님은 잘 받지도 않는다. 손님의 8할이 단골이며 도시의 사람들은 대를 이어 같은 농가를 찾아 휴양을 즐긴다. 왕래가 잦으니 먼 친척 보다 낫다. 이는 일본의 개념과 유사하다. 도시의 아이와 농촌의 아이가 어릴 때부터 자주 만나서 짝이 되는 일도 많다 하니 그 왕래가 어떠한지 알만하다.
농가는 저녁식사는 제공할 수 없다. 지역의 식당과의 공생 때문이다. 주변의 상공인들, 호텔업자들은 농민들에게 항상 무척 감사하고 있다. 방문객 유치의 힘은 경관을 보존하는 농민들의 역할 때문이기에 상공인들의 재원으로 지역의 농민들을 위해 농산물직판장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식당과 호텔은 생산자 표시 로컬푸드 식재료 사용을 자랑스러워하며 그것들만 고수한다. 농산물을 고소득 블루오션으로, 건강 기능성 농산물 등으로 홍보하는 것을 얼마나 천박하게 여길텐가. 아니 전혀 이해를 못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생각하는 건강은 좋은 농산물을 골고루 잘 먹으면 된다고 여긴다.
여기서 잠깐, 최근에 접한 일본의 그린투어리즘과 유사한 점이 떠올랐다.
일본 그린투어리즘의 이념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남녀 공동으로 성립되는 마을 만들기, 매력적인 가족관계 만들기, 여행자의 의해 마을의 품위 향상, 어린이의 꿈과 자긍심 고취”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항목들을 보면, 그린투어리즘의 배경에는 다만 경제적 목적만이 아닌 마을에 대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녀 공동’, ‘매력적인’, ‘품위’, ‘어린이의 꿈’ 같은 단어들, 우리의 농촌 마을사업에서 이러한 단어들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성공적 마을사업의 바탕에는 이와 같은 인식이 반드시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교육과 학습을 통한 든든한 인문적 인식 수준은 사업추진에 있어서 사소한 분쟁을 방지하고, 사업을 보다 폭넓고 멀리 바라보게 하며, 사업을 창의적으로, 사람 중심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그들은 또 민박을 운영할 사람을 교육하는 문제, 요리 강습, 화재 및 안전교육 등등 관련된 여러가지 교육들은 지역에 있는 그리투어리즘 대학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교육되고 관리되고 있다. 또한 매년 유럽 연수를 통해 선진 사례를 배우는 것 또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홍보 자료를 보면 NPO조직은 농가민박 뿐만 아니라 그린투어리즘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을 해오고 있는데 홍보, 기획, 환경미화, 응원(후원) 등 여러 조직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적성 및 지향에 따라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교육을 통해 이와 같은 인문적 가치들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만 ‘비어 있는 집을 사용한다’, ‘바쁠 때는 거절한다’라는 규정이 자연스레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을회관이 있어도 체험관을 새로 짓고, 바쁜 농사일 중에 허겁지겁 체험객을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농촌관광 또는 도농교류를 다만 소비자를 끌어들여 농가 소득을 높이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한, 그 사업의 장기성 전망은 결코 희망적일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일본은 독일 등 유럽의 그린투어리즘을 그대로 옮겨온 듯 하면서도, 그들의 성격에 맞게 대단히 섬세하고 서비스 영역이 확대된 방향으로 변모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비교는 두고두고 해봄직한 영역인 듯 하다.
다시 돌아와서......
그들은 아버지 때 할아버지 때 심어놓은 사과나무 한그루 쉬 베지 않는다. 농작업에 걸리적거리기도 하거니와 오래된 나무의 과일은 따먹지도 않지만 그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철칙이 있다. 오래된 나무 한그루 마저도 경관이자 문화로 바라본다. 또한 다양한 동식물의 보전과도 관련을 짓는다. 이미 60년 전에 갖춰진 정책이다.
우루과이라운드 당시 국제적인 압박으로 농업보조금 지급 금지를 강요 받을 때 독일과 아울러 이들은 농업보조금이 아니라 '문화경관'에 보조금을 주는 것이라 선언하며 그들만의 구실로 대응을 했으며 이내 국제적 압력을 이겨냈다. 나무 한그루, 농촌의 경작지 곳곳이 바로 문화경관으로써 보존해야 할 그들의 근거를 법으로 명확히 해버린 것이다. 농업 자체가 문화라는데 어찌할 것인가!
Agriculture라는 활자 속에 깃든 문화의 어원을 있는 그대로 실천한 것이며 현대적 통찰력으로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 농민은 생산자이면서 지역문화 기획자이자 해설사, 관리자로써 자연스럽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근현대 경제발전 속에서 철저히 저평가되고 희생된 우리 농업, 농민의 의미가 작금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다시 융성, 아니 유지라도 될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주택 건축과 관련된 철칙이 있다.
"주변 경관에 어울리게!"
지켜야 할 지붕의 모양과 각도가 있고, 농촌마을에 자기 땅이 있어도 집을 신축하기 위해선 관공서의 승인절차 외 이웃들의 동의서를 다 받아야 한다. 시골에서 외지인의 주택 신축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스치듯 느낀다.
아이들의 교육 내용엔 반드시 농사일과 관련된 것이 있고 생활 자체를 농업과도 결코 떼지 않는다. 아이들의 장난감은 농기구이며 유치원 다니는 꼬마도 트렉터를 예사로 몰기도 한다. 장화를 신고 온몸에 똥칠, 흙칠하는 것이 익숙하기 그지없다.
60여년 전, 전후 복구의 첫번째 정책기조가 녹색계획이었다니 반드시 농촌부터 살리자는 것이었으리라. 그때의 철학이 지금까지 이어지니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우리네 농업정책은 할 말이 없다. 바뀌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면 일관성 있는 수입개방정책에 식량자급 말살정책, 그리고 농업 농촌조직의 수단화 또는 계열화 오직 그것이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 우리는 ‘땅 없이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 ‘식물을 공장에서 키우듯 해야 한다’, ‘마을 마다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 ‘권역별 마을별 관광상품을 개발하여 도시민 유치를 통해 또다른 활력을 만들어야 한다’, ‘폭발적인 귀농귀촌을 통한 인구유입으로 농촌마을을 재생해야 한다’, ‘6차 산업의 전초기지로 농가소득의 혁신사례를 구축해야 한다’, ‘억대 몇명, 5천만원 소득농가 몇 명’ 등등 여전히 숫자와 실적 놀음으로 서류 만큼 쌓이는 불신과 도시소비자의 농업과 농촌에 대한 인식 부족, 농민 스스로의 철학적 부재로 인해 혹시나 더 힘들어 하고 있진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나 또한 문제의 중심에 서 있으니 더욱 우울하기만 했다.
그들은 또 말했다.
"농지 속과 밖의 모든 생명을 살려야 한다. 그것이 비록 해충이거나 잡초라 할지라도...... 그것이 또한 인간도 사는 길이다"
통일독일 시절, 부족하고 열악한 농업환경 속에서 동독의 노동력과 서독의 기술력이 합쳐져 선택한 것이 오로지 유기농이었다니, 그것이 지금의 근거라 하니 우리의 통일농업 또한 서로의 우열을 떠나 마주하는 원칙 하나에 집중하고 접근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지속가능이라는 화두로!
저녁을 먹고 나오니 알프스의 산간마을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7시가 되자 어김없이 성당의 종이 울렸다. ‘이 마을은 이장님 마을방송 이런건 없을테지’ 뭐 이런 생각을 해봤다.
아침. 농가민박 아래서 초지에서 소들이 참 맛나게도 풀을 뜯고 있었다.
"너희들 팔자가 어떻노?"라고 물으니 "한국소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라고 건방지게 대답하는 듯 했다. 허나 틀린말은 아니었다. 이 동네 사람들 하고는 말이 전혀 통하지 않지만 소들 하고는 통하는 것 같았다.
일행 중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남은 세월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 다시 태어난다면 여기 지방의 개나 소로 태어나면 좋겠다!”
사람도 아니고 개나 소라니! 농사에 골병만 든 한국농민이 멀리 유럽까지 날아와 그들의 농사 짓고 농촌에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란 것이, 농담이지만 이러한 것이 우습고도 슬플 뿐이다.
독일은 농민의 자식이 다수라도 땅을 물려줄 수 있는 자식은 1명에 국한되어 있다. 이는 법으로 명시되어 있다. 대체로 장남이 승계하는 경우가 많다. 농촌에 집이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시골에 허름한 집 하나 사서 별장으로 고쳐서 쓴다'는 것은 우리네 사고에서나 가능한 착각이다. 독일 농촌은 아무리 대농일지라도 값싼 노동력의 외국인 고용자를 두는 경우가 없고 농촌총각장가가기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다문화가정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물며 허술하고 나태한 우리의 귀농귀촌정책을 이 나라에서는 농촌에 대한 도시의 도발로 바라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농민은 농사기술뿐 아니라 목공, 기계기술, 숲가꾸기 등 농업 전후방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전인교육을 유지한다. 농가 1인당 우리의 10배 이상의 농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1ha 당 10톤의 곡류생산이 가능한 곡창지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곳의 연강수량이 200밀리리터 정도니 우리의 장마철 한나절 강우량수준이다.
농업 외 소득을 위해 대부분 부업을 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양태와 큰 차이가 없음에도 국민소득이 그토록 높은 도시근로자 보다 미치지 못함에도(평균 70% 수준) 이들의 생활만족도가 지극히 높은 것은 농촌에 지지되는 직불금제도 때문이다. 경관을 유지하기 위한 나무 한그루의 가치를 따지기도 한다니 생산보전, 친환경, 조건불리지역 등에 적용되는 직불금정책은 참으로 섬세하기 그지없다.
농사를 짓던 농민이 자연스럽게 농림부장관이 된다. 부처 이름도 ‘소비자식품농업부’라 부른다. 또 농민이 자연스럽게 농촌의 시장, 군수가 된다. 공직을 수행하며 어떨 때는 일찍 퇴근허가를 받고서 농사를 짓기도 한다. 소밥을 줄 시간에는 일찍 퇴근을 한다. 월급은 깎이지만 년중 농업종사일수에 따라 농업인의 자격을 유지해야만 직불금 수령을 할 수 있다. 우리네 처지에선 선출직공무원들이 이런다 하면 난리가 날 일이다.
농가민박 등 부수입을 위한 기능과 역할을 일컬어 ‘농촌을 서 있게 하는 제2의 다리’라 지칭하며 농사는 남성이, 직판과 민박 등은 여성이 도모케 하고 이런 것들에 대한 세금면제 등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농가에서 민박을 하더라도 침대숫자가 15개 이하면 세금부과 등 관련 조치가 전무하다. 브랜디 등 도수가 높은 술을 직접 만들어 파는 것도 농가마다 년 200리터 이하로 제조 판매를 할 때는 아무런 규제 없이 가능하다. 허나 규정을 어겨 200리터를 초과했을 경우에는 주세법에 의해 어마어마한 벌금과 처벌이 따른다. 그것이 민박의 침대 숫자이건 팔리는 술이건 농가 스스로 적정규모를 스스로 지키게 하고 또 그들 스스로 유지하고자 한다.
방목을 하든 가둬키우든 상관없으나 경작지 규모에 따른 철저한 사육두수 준수, 방목을 했을 때는 우유나 고기에 표기를 통해 적정가격 책정, 이런 류의 일반적인 정책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독일 농민들의 가장 큰 불만은 무엇일까?’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그들이 정부에 요구하는 주요구호는 무엇일까?’ 또한 궁금했다. 농민조합과 농민국(북부지방의 농업회의소 형태) 등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물어봐야지 싶었고 그 대답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만난 Dr. Josef Hiemer(전 켐텐농업국 국장)에게 들을 수 있었다. 그들 나라 역시 농업인의 가장 큰 욕망은 더 넓은 농경지 확보와 투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인듯 했다. 그리고 정부의 받침과 지원 하에서 계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농업에 종사하고 싶은 것이었다. 공무원 퇴직자의 입에서 전해 들은 다소 모호한 답변이었다. 이럴 때는 외국어 하나 정도는 유창했으면 싶었다. 보다 격정적으로 질문을 하고 싶는 욕망이 있었다.
- 유럽 농촌마을 마실 4일째
‘독일은 100ha당 480명의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한다. 참고로 미국은 5명이고 우리는 2천여 명이다’ 라는 교수님의 이야기가 새벽 4시에 잠을 깨운 창밖의 종달새 소리 마냥 귀에서 맴돌았다.
알프스 산간의 민박엔 여전히 비가 내렸다. 따뜻한 라면 국물에 신김치가 문득 당기긴 했으나 부지런히 아침을 만드는 민박집 주인을 생각해 또 느끼한 아침상을 받으러 가야지 싶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평소 보다 아침밥이 늦는다 했다. 머무는 손님 보다 농가 주인장 위주의 흐름들, 그냥 원래의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방문객들도 공유하는 것이다.
목축이 주업인 농가의 아침임에도 쇠똥 냄새, 거름 냄새가 거의 없었다. 내 몸의 운동부족을 감지하여 전력질주로 동네를 한바퀴 뛰고 또다시 농가의 아침밥을 받아들었다. 농가민박에서 이틀간 ‘정말 잘 쉬었다’가며 농가의 주인장과 배웅 나온 소떼와 작별을 고했다.
[ 빌더케제 티롤특산 치즈 공방 ]
5백년 된 건물, 치즈로 오스트리아를 재패, 마이스터는 단 1명. 티롤의 치즈공방에서 한상 차려주는 치즈를 종류별로 맛을 보고 실제로 만드는 과정을 봤다. 매일 만든다 한다. 30여 지역농가의 우유를 공급 받으며 그들에게 기본 우유값에 순수 목초만 먹인 가치를 더해주고 또 고산지대에서 방목한 경우엔 프리미엄을 더 준다. 자기 동네 풀을 먹고 거기에 똥을 싸는 소의 우유는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것을 그들 말로 “폐쇄된 공간에서의 지역순환”이라 했다.
농민들은 소들에게 최대한 풀을 많이 먹게 하는 것이 목적이며 겨울을 제외하곤 고산지 목동이 소를 끌고 산으로 간다. 고산지 목동은 3개월 정도의 아르바이트가 맡기도 한다. 그들 중에 상당수가 경찰이나 세무공무원이라 한다. 그들은 그 기간 동안 휴가를 내거나 퇴직을 한 이후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방법으로 전통 목동일을 한다. 좋은 공기에서 소를 돌보며 전통적인 방법으로 우유를 짜고 치즈를 만들어 먹는다 한다. 그들의 힐링이자 귀농귀촌인 셈이다. 8월 말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다시 소를 몰고 내려오는데 그때는 온 지역이 축제를 한다. 소를 위한 축제다. 사람을 위해 많은 것을 제공해준 소를 위해 축제를 연다. 주민 모두가 전통복장을 하고 그들의 농악으로 신명나게 즐기는 것이니,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위한 축제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때까지 산악에서 잘 자라온 소는 발목이 건강하며 좋은 소가 되고 그 소를 비육하면 최고의 고기로 인정 받는다. 농업과 문화, 농촌과 축제의 원형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여지없이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치즈공방의 홍보자료나 닭 사육 숫자 보다 소 사육두수가 더 많다는 등의 지역 농업현황표 등은 여기 농업회의소가 조사하고 관리하며 제작하여 비치해뒀다. 떠나는 길에 멀리 보이는 신축축사가 오히려 이색적이다. 농가의 후계자가 생기면 축사 신축을 하지 그렇지 않을 경우엔 축사를 신축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한다.
[ 바벨농가(민박·치즈·식당 복합농가) ]
옆 초지에서 기계 한대는 풀을 자르고 있고 한대는 한번 뒤집어주고 있었다. 그러고는 곧 모을 것이고 또 다음으론 거둬 담을 것이다. 바로 옆에선 맥주를 마시는 손님들이 있고 그 아이들은 놀이터나 동물들이 있는 곳에서, 또는 수영장에서 놀고 있었다. 식당 안에서는 치즈를 만들고 맥주를 만든다. 우리의 농촌도 이런 모습을 흉내내지만 뭔가 극명하게 다른 것 같았고 부아가 치밀면서 부러움도 교차했다. 머리 속으로 잠시나마 돈 버는 궁리를 하기도 했다. 이들의 일상을 파고들수록 농민과 소비자의 경계지점이 상당히 모호했으며, 굳이 그것을 알고자 하는 낯선 외국인에게는 또다른 숙제만 잔뜩 안겨주는 것 같았다.
- 유럽 농촌마을 마실 5일과 6일차
피곤이 쌓였나 싶다. 4시에 한번, 5시 30분에 한번씩 깨고는 7시가 다 돼서야 온전히 몸을 일으켰다. 아주 가볍게 아침을 먹고 가방을 챙겼다. 하루 더 묵을 숙소라 큰짐은 두고 나왔다. 일러벵켈 지역의 렉아우 농민조합을 찾아갈 예정이며 이곳 켐텐의 농업국에서 운영하는 농촌가정경영직업학교를 간다. 스스로 조직하여 생산 가공 직판까지 완벽하게 체계를 갖춘 독일 남부의 사례와 우리의 기술센터와는 성격이 비슷하지만 오히려 지자체 보다 상위의 국가기관인 농업국과 거기서 운영하는 농업인, 농촌여성 전담 교육기관을 방문한다.
가는 길에 보니 농기구 가게가 있어서 들어가봤다. 주로 소와 말을 위한 도구가 대부분이었다. 남부지방다웠다. 또한 가늘 길에 저 멀리 연기가 나는 굴뚝이 무슨 공장인가 의심을 품으니 건초 만드는 공장이라 했다. 생풀을 말리는데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였다. 역시 남부지방다웠다.
가는 도중 버스의 주행을 막는게 있었다. 무엇인가 했더니 도로가의 풀을 깎는 기계를 장착한 차량이었다. 예치기 들고 공공근로로 도로 주변 풀을 깎는 우리네 모습이 생각났다.
[ 렉아우 농민조합 ]
농민조합 대표 마틴씨를 찾아가니 일단 자기 농장 소개를 한시간 가까이 했다. 마침 아들과 손주들이 트렉터를 타고 왔다. 여기는 아빠가 트렉터로 일을 할 때 집에 아이가 있으면 가급적 트렉터에 태운다고 한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농사일의 모든 흐름을 보는 것이다. 농기계 창고에는 1960년대 구입한 기계부터 최근 것까지 즐비했다. 50ha 정도의 평균치 농업경영을 하는 농가였다. 소는 50마리다. 1ha 당 한마리 기준을 정확히 지켰다.
초지에서 풀베기 작업 중 기계고장이 나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고치는 것을 어린 손자가 유심히 보고 있었다.
축사와 건초보관소, 자가 사료제조시설, 바이오 전기발전시설 등을 돌아보고 조합에서 운영하는 도축장과 가공공장, 직판장을 보러 갔다. 조합대표와 소개를 나누는 중 명함에 적힌 거창군농업회의소를 소개했다. 그의 장인인 마이어씨가 작년에 한국 방문을 했었다고, 그때 거창을 다녀왔다 했다. 농민조합 대표인 마틴씨도 그때 같이 갔었다고 했다. 괜히 더 반가웠다.
그들이 거창에서 보고 들은 것 중에서 농업기술센터를 통한 정부지원정책에 대해서 대단한 감탄을 했었다고 했다. 우리네 고민거리가 이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가 사뭇 궁금해졌다. 시간이 많이 않아서 구체적인 대화를 깊게 나눌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직매장 옆 식당에서 이 지역에서 생산한 소고기스테이크로 점심을 나누며 이곳 작목반 현황, 가공 및 순환과 관련된 로컬푸드 시스템 등을 상세히 듣고 바삐 자리를 떴다. 마이어씨에게 다시보자 하니 그는 나이가 벌써 82세인데 가능하겠냐 대답을 했다. 나는 그래도 “씨유어겐!” 이라고 인사를 했다.
[ 허브농가(Lavandula) ]
렉아우 농민조합 근처의 타냐씨는 허브를 재배하며 농가를 운영한다고 해서 들렀다. 우리에게 무척 익숙한 풀들인데 타냐씨는 전부다 길러서 차로, 각종 식재료로 만들고 연구한다. 아이들, 어른들이 체험도 온다고 한다. 잡초는 없으며 모든 것의 효과는 다 있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다. 우리와 달리 이렇게 재배한 것들이 합법적으로 제약재료로도 팔려나간다. 땡볕에서 수십 종류의 풀 맛을 보며 설명을 듣다가 큰 사과나무 아래 차려준 빵을 먹었다. "사과나무는 한 50년 됐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남편의 할머니 때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만 해줬다. 여기서 열리는 사과는 사과쥬스만 만든다고 했다.
차려준 빵은 우리나라 보리빵의 식감과 맛이 났는데 맛이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럽고 좋을까 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갈길이 바빠서 간다고 하니 뒤뜰에서 키우는 당나귀를 기어이 보여준다고 해서 잠시 보고 인사만 얼른하고 나왔다.
[ 켐텐농업국 부설 농촌가정경영학교 ]
우리의 생활개선회 조직의 양성소 같았다. 의미는 비슷하나 깊이가 분명 달랐다. 주 1회 교육을 2년간 빠짐없이 받아야 한다. 현재 농촌여성 13명과 농촌으로 가고자 희망하는 여성 7명 등 총 20명의 교육생이 있다고 했다. 농가민박 등 농촌에서 여성으로 살고자 희망하며, 창의적이고 농업 외 수입을 위한 계획을 가진 여성전문 교육기관을 국가직영기관인 농업국에서 운영하는 것이다. 교장선생님은 담당부서의 과장이기도 했다.
세탁, 다림질, 요리, 제빵, 실내디자인, 바느질, 민박경영 등 모든 교육을 2년간 진행한다. 수료하면 자격증이 주어지고 더 공부하면 마이스터, 테크니커 등의 자격도 취득할 수 있다.
농가민박 등 체험마을 운영의 체계와 현황을 자세히 들었는데 일본의 경우와 견주어 비교를 해서 따로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석구석 소개를 받고 작별을 했다. 졸업생을 60년 이상 배출했는데 해마다 교육생들의 치마길이가 짧아진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 그리넨바하마을 치즈공장(마을공동체) ]
120년이 넘은 마을공동체. 낙농농가는 치즈마이스터를 고용해서 치즈공장과 직판장을 운영케하고 치즈마이스터는 각종 대회의 상을 휩쓸었다. 농가와 전문가는 상생하고 주변의 주민과 여행객은 항시 신선하고 맛난 치즈를 쉽게 구할 수 있다. 그 세월이 120년이 넘었고 마을의 모습과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는 거의 없다.
융프라우 아래 숙소를 가는 길에 지나다 보니 반가운 태극기도 보이고 한국 간판도 보여 들어왔더니 얼큰한 육개장을 판다. 여기선 외식이니 비싸긴 하다만 한그릇 시켜 맛나게 후루룩 한다. 쌀은 자포니카는 아니고 설익은 듯 하다만, 순식간에 2유로짜리 김치와 함께 들여마셨다. 쌀밥이 이래 소중하고 먹거리가 이리도 눈물 겨운 것인데 경남의 급식문제, 한국농민들의 쌀투쟁 뉴스가 목에 턱 걸린다.
독일은 농림부의 명칭에 '소비자'가 들어가고 지방 농업국의 명칭엔 '식량'이 꼭 들어간다.
스위스 베른주의 툰지역에 속소를 튼다. 유럽축구 'FC 툰'이라고 있다. 이 지방 팀인듯 하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라는 책을 쓴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을 지낸 지글러 교수가 스위스 툰 출생이다.
숙소에 짐만 던져두고 창을 여니 8시에 맞춰 교회 종을 친다.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강과 주변의 정경을 다녀간 수많은 도시계획 공무원들도 부러워했으리라. 대한민국 곳곳의 강변이 파헤쳐질 때 아마 이런 모습을 상상했으리라. 오랜 기억을 건물과 거리,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모든 것에 그대로 실어뒀으니 문화의 우물, 샘물은 항상 솟지 않겠는가.
물소리 때문에 잠을 자기 어렵다는 도시라는데 나는 만년설이 한꺼번에 다 녹아 물난리가 나더라도 푹 잠을 잘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피곤이 밀려온다.
스위스는 내전이 가장 많았던 국가다. 200년 내내 싸우기만 했다. 산악지방과 평야지방 사람끼리 싸웠고 동쪽과 서쪽이 나눠서 싸웠고 신교와 구교가 맞서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나라가 침입을 하면 그들끼리 힘을 합치기도 했다. 그렇게 힘을 모아서 외세에 맞서서는 패배한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싸움 좀 그만하고 통합하자고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러면서 또 싸웠다. 수도를 어디로 할 것인지 수도 이름을 뭘로 할 것인지를 가지고서 또 싸웠다.
스위스에는 대형마트가 4개 있다. 이들 협회는 경쟁관계지만 우유값을 담판 짓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 낙농가 조직과 협상을 한다. 스위스의 농가 규모는 전체의 4% 미만이다. 빵이나 우유 등 농산물을 주원료로 하는 제품들이 EU 국가들 보다 다 비싸다. 경쟁력이 적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EU에 가입하지 않는다. 이유는 농업과 농업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 한다. 고속도로 과속 규정의 속도까지 결정하는 장관회의에서 그들은 농업보호를 위한 각별한 결정을 했다. 바로 전통방식의 농경과 목축에 대한 존중 부분이다. 초지와 농촌경관에 대한 관리인은 농민이며 전세계 모든 부자가 다 와도 스위스에서는 돈자랑을 못하는 절대적인 경관을 유지하는 주역을 바로 농민으로 규정했으며 모든 국민산업의 기본은 농업이라는 인식을 전국민이 공유하게 한다.
음식점, 빵집 등의 농산물을 원재료로 하는 모든 산업, 비료, 농기계산업 등 농업을 위해 존재하고 기여해야 할 산업 등 농업의 전후방사업을 '그린섹터'라 지정하고 다른 모든 산업 보다 그린섹터가 가장 큰 규모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국민 10명 중 6명은 그린섹터에 종사하는 것으로 판명했다. 농업자체는 GDP 대비 1%도 되지 않는 규모지만 전후방을 다 합친 그린섹터는 어마무시한 역할과 사회적 기여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수출이니 소득중시니 하는 한국농업의 개념을 납득하지 않으며, 우리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른 그들의 농업철학을 국민에게 홍보하고 합의하게 한다.
농지가 있는 공무원들은 소를 키운다. 그들에게도 농업인과 동등한 제도를 적용한다. '강제휴가제'를 둬서 본인의 휴가에는 절대로 출근을 해서는 안된다. 스위스 화장실에서 볼 일를 보노라면 이런 문구가 딱 눈에 띈다. "쉬어라! 그러면 세상이 변할 것이다!" 그 말이 왜 붙었는지 이해가 간다.
모든 국민의 군인이며 유사시 동원되고 매년 일정 시간 민방위 훈련을 한다. 집집마다 총이 있으며 농가에서 보유한 말은 매년 수의사에게 검진을 받아야 하고 검진결과를 바탕으로 건강하게 잘 키우고 있으면 말 한필 당 사육에 따른 돈을 받는다. 말은 유사시 동원할 수 있는 군사적 용도로 규정한 것이고 이를 농민이 책임지고 길러주니 댓가를 주는 셈이다. 어느 국가에선 대형 출력의 트렉터를 국방비로 지원한다더니만......
아스팔트 농사 아니면 서류농사만 쌔빠지게 짓는 한국농민. 그 서류농사 마저도 여의치 않는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스위스 아름다운 모든 경관의 수호와 관리는 농업인의 지속적인 농사를 통해서만 가능해졌으니 그것을 유지해 준 농민 모두에게 국가는 깊은 감사를 표하고 문화와 전통, 교육과 먹거리순환 등의 가장 중요한 곳으로는 이제 농촌이 아니고는 불가능 하다는게 저들의 생각인 듯하다.
- 유럽 농촌마을 마실 7일차
툰의 아침은 고요하지는 않다. 물 흐르는 소리가 익숙해지기는 하지만 이 소리에 잠을 못잤다는 일행이 있을 정도니......
오늘은 스위스 농민들의 교육기관과 기술센터 역할을 하는 인포라마를 간다. 농민교육과 평생교육 시스템과 민관협의체의 기능과 역할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이다. 근처에 리크위르라는 중세부터 내려오는 모습을 갖춘 스위스 전통농촌마을도 갈 참이다. 그리고 마지막 독일 일정으로 들어가기 전의 코스로 프랑스를 잠시 들른다. 스위스에서 프랑스로 가는 행선지가 알사스 지방이다. 알퐁소 도데의 '마지막 수업' 배경 지역이다. 이 여정도 벌써 마지막이 되어 간다.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프랑스 분위기는 잠시만 보고
숙소가 있는 독일 라슈타트로 간다. 오늘만 3개국을 경유한다.
[ 인포라마 INFORAMA(가정경영학교+농업학교) ]
“여기 입학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한국사람도 받아줍니까?”
다소 생뚱맞은 질문에 인솔교수님은 독일어나 제대로 배우고 와서 그런 질문을 하라 하신다. 가장 어려운 점이 역시 언어의 소통일 것이니 당연지사다.
인포라마!
스위스의 농민이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거쳐 가야할 곳. 젊은이들이든 귀농희망인이든 여성농민이든 예외가 없이 정규과정을 밟고 평가를 받아 국가에서 주는 공식적인 농민자격증을 받는 곳.
인포라마의 교사는 농업전문지도사 등 고등공무원이며 현장의 교육의 맡는 사람들은 농민 마이스터들이다. 짧게는 2년, 길면 3년 이상의 교육과정을 밟아도 학생들 중 2,30%는 낙제가 되기도 한다. 즉, 농민은 절대로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이다. 2년 간의 농가실습을 통해 현장의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 3학년 때부터 이론을 집중으로 파고드는 방식은 우리의 교육순서와 완전히 거꾸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실"로 일컬어지는 그 말이 풍광으로 보든 교육의 과정으로 보든 틀린게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 칼스루에 클라인가르텐 협회, 클라인가르텐 단지 ]
한국사람을 위한 배려가 고마웠다. 소개자료의 내용을 한국말로도 적어두었다. 그만큼 한국사람들이 많이 방문을 한다는 반증일까?
전체 연수과정 중 이날 듣고 본 내용이 가장 큰 자극을 주는 것 같았다. 도시재생, 생태, 에너지, 친환경, 공동체, 축제 등등 지역의 다양한 연관 속에 정책을 만들고 또 공유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써 클라인가르텐 현장은 많은 영감을 얻게 했다. 100년이 넘은 작은 정원을 거닐며 1년짜리 거창텃밭을 떠올렸다.
어제 갓 발간됐다는 공원과 정원과 나무의 이야기가 실린 책을 받았다. 처음으로 주는 책이라 한다. 싸인도 받았다. 이제 번역만 하면 된다.
그리고 휴일임에도 나와서 소개를 해준 협회장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다.
그는 한국에서 진행하는 비싸기만 한 체류형 주말농장을 비판했다. 전국적으로 클라인가르텐 단지마다 정원 동호인협회가 조직되어 있는데 그 수는 약 15,000개소이고, 회원 수는 약 120만 명에 달하며 총면적은 약 4664ha이다. 단지별 동호인회가 모여 시군별 협회가 조직되고 그 위에는 전국적으로 19개의 주단위 협회가 있으며 전국단위로 독일 연방 협회가 베를린에 본부를 두고 있다.
정원 용지는 대부분 시유지 또는 국공유지로서 시군 또는 주정부가 임차인인 지역협회에 용지를 정원용으로만 이용한다는 조건하에 임대해 주고 지역협회가 이를 다시 소속 단지협회와 개개 회원들에게 재 임대해 주도록 위임하고 있다. 지역협회는 시유지의 대리임대인으로서 전문 기술적 지도와 회원들을 보살펴줄 의무가 있으며 단지 행정적인 관리와 감독을 맡아 하고 있다. 임대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회원 스스로가 정원관리를 할 수 없어 포기할 때까지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클라인가르텐을 내 놓은 회원 수는 극히 적어서 대기하고 있는 신청자가 매우 많다. 클라인가르텐은 사적으로 매매나 양도를 못하지만 고령의 부모가 직계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고령 또는 이사 등 본인이 직접 정원관리를 할 수 없어 포기할 경우 오두막집 등 지상물에 대한 투자비용을 다음 인수자에게 받을 수 있는데 가격은 협회에서 평가하여 결정하며 3,000~4,000유로 이상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내로 제한하여 투기를 방지하고 있다.
신규회원의 입회자격은 신청순위에 따르며 아이가 많은 젊은 가정에게 우선순위를 주고 정원문화의 다양성을 위해서 외국인 가정도 우선적으로 배려되고 있다.
연간 1개 정원 당 평균 소요금액은 지방자치단체별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개 350유로 정도이며 이 이외에도 종자, 묘목, 시설물 보수 등 매년 유동비용이 추가로 300 ~ 400유로 정도 소요된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130만에 달하는 클라인가르텐은 국민산업적인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클라인가르텐은 독일국민의 50% 이상을 행복하게 한다"
굳이 비교하자면 네덜란드의 케어팜(Care farm, 치유농장)이 있다. 치매환자나 정신장애인 등의 재활을 돕기 위해 농업·농촌이 가진 치유 기능을 잘 살린 사례다. 네덜란드 치유농장은 요양원이나 병원보다 비용이 저렴하고 다양한 환자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그 수요가 급증하여 현재 1,000여곳으로 늘었다. 최근엔 알콜중독자 등을 위한 치유농장도 등장했다. 수요가 늘다보니 네덜란드 농고나 농대 등에는 10개월 교육과정도 개설됐다. 간호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했다면 별도의 수료 절차는 밟지 않아도 된다.
도시텃밭, 주말농장 등 우리나라에도 끊임없는 시도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기사를 보니 경기도 지역에는 이름도 똑같이 클라인가르텐이라고 붙여 체류형 주말농장을 만들어서 도시민에게 분양한다고 한다. 부디 좋은 취지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나가길 기대한다.
- 연수을 마무리 하며
유럽을 가기 전에 20일 동안 거창군농업회의소에서는 12개 읍면순회를 하고 8개 분과모임을 하고 갔다. 약 300명의 거창농민들의 요구나 목소리를 듣고 모아뒀는데 채 정리도 못하고 날아갔다. 그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유럽에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며 앞에 앉은 분에게 물었다.
“많이 배웠지요? 이제 한국 돌아가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뭘 어째요! 고추밭에 짚도 깔아야 하고 밭도 돌아봐야 하고......”
가야하겠지. 현실로 돌아가야 하고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테지. 꿈도 깨야하고 현실도 직시해야 할테지.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의 꿈 같은 이들의 현실을 되돌아보며, 농민의 나라, 농촌을 위해 존재하는 그들의 철학을 존중하며 다시 비행기를 타야할테지.
그들은 말했다.
"우리가 농촌을 지키면 농촌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8박 10일 간의 연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만감이 교차를 했다. 갈 때보다 짐이 무거운 건 구입한 선물이 많아서가 아니고, 노트 두권에 복잡하게 쓰여진 먹물 때문인지, 아니면 밖으로 쏟아내고 정리해야 할 꺼리들 때문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농업연수라는 이름으로 저들의 문화, 예술, 지역, 마을, 공동체, 농전시스템, 건축, 언어, 음식, 철학, 생태 등등 너무나 복합적인 이야기를 보고 듣고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책 수십 권의 값어치를 한꺼번에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을 해서 다시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에 창밖으로 우리의 산천을 바라봤다.
‘아! 논마다 물을 받아뒀구나. 그리고 그새 모를 많이도 심었구나. 농로를 따라 전봇대는 늘어섰고 철길 주변 따라 농촌 곳곳엔 철거와 콘크리트의 상징, 고물상과 레미콘 공장은 자주도 보였다. 솟은 것은 산이고 틈만 있으면 하얀 비닐하우스 지천이구나. 마을 군데군데 농공단지 공장건물은 삭막하고 복잡하게 얽혀있고 쭉 가다 산이 막으면 여지없이 둘로 쪼개 도로로 밀었든지 터널로 뚫었다.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가장 집약적인 소득을 올리기 위해 우리의 농촌은 오랜 세월 앓고 곪고 흐트러졌겠지. 눅눅한 안개가 스며들듯 기차의 차창 시야를 가리지만 그래도 여기가 아스라이 참 좋구나. 내나라 내땅......’
우리 마을을 지나다보니 마을 초입에는 소독을 하는 초소가 있고 방제복을 입고 몇달째 근무를 하는 동네 형수님을 만았다. 그분이 말한다.
“잘 갔다왔능교? 그런데 그런데는 우짜믄 갈 수 있노? 우리도 함 갑시다! 비행기 몇시간 걸리요?”
“그래요. 함 가셔야지요. 10시간 정도 걸립니다”
“아이고매! 그 시간동안 우째 앉아가겠노? 비행기 안에 노래방도 없을낀데!”
우리동네 아줌마들은 노래방만 있으면, 비행기기 안에 음악만 틀어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논에 비료를 뿌리고 오면서 트렉터를 몰고 앞을 지나가던 동네 형님도 내려서 말을 거든다.
“고생했제? 비행기는 가다가 휴게소 같은데 들르고 그러진 않제?”
포도로 유명한 우리 동네. 사과도 많이 나는 동네. 쌀농사도 짓고 딸기 오이 하우스도 있고, 감자랑 오미자도 많이 심는 우리 동네. 소도 키우는 동네. 귀농인도 제법 많은 우리 동네.
농촌마을의 대명사를 어떻게 만들어갈꼬 하는 신나는 고민을 다시 시작해야지만, 이미 조류독감과 구제역이 하나의 상징이 되고 농촌지역과 마을과 농장의 초입 마다 경고현수막과 소독시설이 흉물스런 상징이 된 현실은 가슴 아프기만 했다.
- 덧붙임 :
잠시나마 다시 만난 그들의 농업회의소에 대한 단상
켐텐농업국 출신의 Dr. Josef Hiemer씨에게 독일 농업회의소의 지역적 양상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그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독일 북쪽은 영국 사람들이 점령했고 남쪽은 미국의 영향권에 들었다 했다. 남부는 관청과 농민협회가 분리되어 있고 행정의 영향력이 강했던 반면, 농업회의소가 발달한 영국의 영향권에 있던 북부독일은 관청과 농민협회가 함께 있었고 농민이 농업회의소에 회비를 내고 운영했었다 했다. 체계는 다르지만 모두 지자체의 상위기관으로 국가가 관리하는 시스템이라 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특히 북부지역이 진보적인 성향이 강한 반면, 남부 독일은 다소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했다. 짧은 답변 속에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법적인 보장을 받는 조직 하나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우리나라 현장 농민들의 가장 큰 바람이 있었다면 지역농정에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물론 ‘소통’을 전제로 한 지역농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통의 주체는 그간 정책의 주도성을 독점한 행정 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소외 혹은 배제된 농업인 개개인을 아울러 말하는 것이다. 소통은 일방으로 향하는 경우(하향식)가 많았으며, 소통의 가장 큰 전제인 의견과 입장의 ‘반영’으로(상향식) 나타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그 수단과 방법을 저돌적으로 표현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농민들은 대단히 침착했으며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반영’이 되지 않는 소통은 ‘신뢰’를 쌓는데 분명히 한계를 나타냈다. 행정의 신뢰라는 것은 일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오던 단체 또는 개인에게 시선과 힘이 집중되고 있었다. 행정은 성과와 실적에 시선을 맞추고 농업과 농촌의 균형을 부단히 파괴하고 있었다는 것은 억측이 아니다. 유럽 등 선진농업국과는 근간에서부터 개념이 다른 농업농촌 정책이 추진되어 오던 역사적인 과정을 일일이 짚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렇다면 오로지 행정의 책임뿐인가? 물론 농민 개개인과 단체의 오류 또한 주·객관적으로 지적당해왔다. 냉정하게 평가하고 반성할 지점이다. 최근에 와서 협치라는 개념을 현장에 갖다 들이밀 때 냉소와 함께 불안한 결과를 예측하는 농민들이 부지기수였다. 물론 주체들은 수긍하고 동의했다. 불안한 예측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인정했다. 도리가 없었다. 현장에서는 누구라도 농정협치의 선례와 올바른 사례를 제시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더구나 현재 우리의 농업회의소라는 것의 명분이 ‘정부에 의한 시범사업’이 아니던가? 민간주도의 농정협치 영역이라 하면서 농정의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체가 되어 추진한다? 농업현장과 대다수 농민단체에게는 보다 선명한 제시어와 대답이 필요했다. 협치의 의미를 명확히 구현할 이유가 생겼다. 협치 즉 ‘거버넌스'라는 단어 자체에 '자발적 협력과 경쟁을 통한 협조'가 이미 함축되어 있는 것이라는데, 과연 ’적절한‘ 긴장관계가 가능할 것인가도 의문이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행할 주체도 얼마나 제대로 준비가 되어있나 반문할 당시엔, 사실 적합한 대답은 여의치 않았다.
독일 최초로 ‘농업회의소법’이 만들어진 곳이 프로이센 지방이고, 그해가 1894년이다. 유럽의 한 나라에서 농정협치과 관련한 법이 만들어질 당시 우리나라는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선진농업국가와 우리의 처지를 극명하게 비교할 수 있다.
121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 농어업회의소법이 발의되어 겨우 법안심사소위와 상임위를 거쳤다. 그것마저도 본의회 상정은 보류가 된 상태이다. 관계법령이 통과되는 것이 무어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현재 현장에서 농업회의소를 운영하는 거창군을 포함한 나주시, 진안군, 고창군, 평창군, 봉화군, 남해군 농어업회의소 실무자들과 운영진에서 거는 기대는 대단히 크다.
현장의 눈은 정확하다. 편향과 함께 가장 우려해야 하는 것은 지속성의 담보이다. 협치라는 이름에는 반드시 상이한 의도가 있게 마련이다. 당사자 간 서로 다른 의도가 적절한 긴장과 필요에 의한 협력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장에 필요한 정책으로 구현되고 그것이 훌륭한 사례로 평가되어 성과로 드러나면 지속성은 담보된다.
농업회의소라는 실험! 2년에서 4년, 그동안 너무 짧은 기간 아니었던가. 이제 시작인데 그런 실험들의 전개과정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 실험의 현장이 결국은 지역이니 시범지역의 마음이 바쁘고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당연하다. 냉정한 곳도 당연히 지역인데, 중앙과 전국 곳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보다 따스했으면 좋겠다.
3. 독일 농업 정책과 제도에 대한 면담 내용 정리
- 면담 : Dr. Josef Hiemer (전 켐텐농업국 국장)
- 일시 : 5.10~19:00~21:00
- 장소 : 독일 바이에른주 켐텐시 Stitute (700년 이상 된 건물 안 식당)
켐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켐텐은 2000년이 넘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입니다. 로마가 300년을 지배했고 로마의 군영이 있던 곳입니다. 2차 대전 때 파괴되어 재건했으며 인구는 17만 명 정도입니다. 독일은 전 국토에 인구가 고르게 분산되어 있어 17만 명이라 해도 작은 도시는 아닙니다.
오시다가 풀밭을 많이 보셨죠? 이곳은 주로 낙농, 축산 지역입니다. 1984년부터 우유쿼터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현재 우유 1ℓ에 32센트(약 400원), 유기농 우유는 50센트를 줍니다.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농가가 많고, 분유로 만들어 중국에 수출하기도 합니다.
농업국에서는 동물복지법, 대기오염 방지법, 환경보호법 등 농민을 감시하는 기능이 강합니다. 2차 대전 이후 먹을 것이 없던 과거에는 식량 증산이 중요했습니다. 이때 농업국의 중요한 기능 역시 식량 증산을 위한 기술지도였습니다. 이제는 농민이 비료를 너무 줘서 토양을 망가뜨리지 않을까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가 감시하는 기능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유럽연합은 50%이상 농업보조금으로 줍니다. 여성, 약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틀 안에 농업보조금이 포함되어 있지만 농업보조금이 가장 많습니다. 따라서 유럽연합이 서로 교차하여 관리하고 감시합니다. 이러한 역할이 커지면서 긍정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농산물의 품질이 많이 향상되었고, 유기농 등 건전하고 안전한 먹거리가 많아졌습니다. 또한 환경에 대한 부담도 훨씬 줄었습니다. 농민이 유기농을 하는 이유는 유기농이 몸에 좋아서가 아니라, 흙을 비롯한 환경을 보존하기 때문입니다.
윤작도 중요합니다. 농업보조금은 땅의 면적에 따라 부여하지만 예를 들어 옥수수만 계속 심으면 보조금을 받지 못합니다. 토양을 살리기 위해 작물을 다양하게 이용하라, 이것이 최근 법입니다. 보조금을 받는 만큼 농민들이 지켜야할 것도 많습니다. 매년 자신의 생산량을 보고합니다. 인터넷을 통해 보고 양식에 따라 신고합니다.
농업국이 직접 보조금을 주는 것은 아니고 서류를 검토하여 EU로 넘기면 EU에서 직접 지원합니다. 항생제는 수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쓸 수 있고 반드시 신고해야 합니다. 계속 사용량이 누적되고 평균 이상이 되면 감사를 받게 됩니다. 독일 16개 주 중 6개 주가 녹색당이 집권을 하는데 독일 녹색당은 농업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환경론자에게는 친구, 농민에게는 원수라는 표현을 할 정도입니다.(웃음) 그래서 농업에 대한 규제도 많습니다.
한국의 거창군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했는데 시설에 놀랐습니다. 농민에게 다양한 지원을 하는 한국의 농업정책도 좋다고 느꼈습니다.
[질의응답]
Q. 독일 농민의 불만 혹은 정부에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A. 정부가 투자에 보조금을 주지 않기 때문에, 농민은 투자를 해도 좋은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농업보조금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데, 불가리아, 헝가리는 농민이 기계를 구입하는데 EU차원에서 보조금을 준다.
Q 독일 안에서 왜 농업국과 농업회의소로 나누는가?
A. 2차 대전이 끝난 후 북쪽은 영국 사람들이 점령했고 남쪽은 미국의 영향권에 들었다. 미국은 관청형태로 관청과 농민협회가 분리되어 있고 국가가 관할하는 반면 농업회의소가 발달한 영국의 영향권에 있던 북독일은 관청과 농민협회가 함께 있고 농민이 농업회의소에 회비를 내고 운영한다. 체제는 다르지만 모두 지자체의 상위기관으로 국가가 관리한다.
Q. 농가 직판도 세금을 면제해주는가?
A. 독일은 기업적인 농가와 농가적인 농가 두 가지로 나누고 자기 노동력을 근간으로 하는 농가. 농가적인 농가를 지원한다. 농가에서 생산한 농산물 1차 가공까지는 부가가치세를 면제해주지만 2차 가공부터는 부가가치세를 부과한다. 예를 들어 치즈는 1차 가공품으로 면세하지만 치즈에 다른 첨가물을 넣어 가공하면 2차 가공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가공에 관한 문제는 민감한 편이고 주시하는 눈이 많다.
Q. 농가가 가공, 도축을 할 수 있는가?
A. 농가가 도축시설을 갖추었다면 도축이 가능하다. 그런데 규모가 크든 작든 똑같은 위생 규정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소농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포기하는 농가들이 있다. 농가라고 봐주지 않는다.
Q. 농가적 농가에게 지원을 집중하는 이유?
농가적 농가, 소농을 지원하지 않으면 다 사라진다. 독일은 50ha까지 농업 보조금을 주는데, 옛 서독 지역엔 상업적 축산이 거의 없다. 그런데 집단농장으로 운영했던 옛 동독 지역은 5000ha 규모도 있다. 이런 곳은 보조금을 주지 않아도 대규모라 경쟁력이 있다. 그러면 환경공해(대기오염 방지법, 환경보호법)로 제어한다.
Q. 기업농들에게 수출 장려금을 주는가?
A. 유럽연합에는 수출보조금이 없고, 스위스만 남아있다.
독일은 우유가 엄청나게 싸고, 이에 반해 후진국은 우유가 귀하니 비싸다. 만약 후진국에 독일 우유가 왕창 들어간다면 그 나라 낙농산업을 말살하는 것이다. 농업선진국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농업의 4대 목표 중 "국제 농업교역 및 식량문제 해결에 기여한다“는 조항, 먹는 걸로 다른 나라의 목줄을 쥐지 않는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국제 교역에 이바지하는 농업정책의 기본이다.
Q. 농업보조금은 나라마다 동일한가?
나라마다 주마다 다르다. 2013년도 농업정책이 바뀌었는데 이 정책으로 2020년까지 간다. 독일은 기본 1ha당 170유로를 주며, 최대 280유로를 지급한다. 독일 평균 농가의 규모는 40~50ha이다. 바이에른 주는 경사지, 응달 등 조건 불리 지역인 경우 보조금을 더 주고 유기농은 270유로를 더 준다.
이 지역(바이에른 주)의 유기농 농가는 18%(독일 전체 3%~5%) 전체 10만 호 정도다. 낙농농가는 1984년 154,000 농가에서 지금은 38,000호로 줄었다.
농민 고령화되고 후계자가 없어서 독일에서는 농민 수가 매년 3%가 줄어든다. 반면 이 지역은 “서있을 수 있는 다리”가 많다. 즉 농가민박, 겨울 스키, 숲 관리, 경관관리원 등 젊은이들이 할만한 다른 수입원이 있어 농민 수가 많이 줄지 않는다.
어릴 적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이 도시에 살다가 농촌으로 돌아와 3년간 농민이 되는 직업교육을 받는 경우가 1년에 20~40명씩 된다. 우리로 치면 그것이 진짜 귀농이다. 의사 출신 농업후계자도 있다.
Q. 농업인의 자녀가 아니어도 농업학교에 입학이 되는가?
A. 농업인의 자녀가 아닌 경우는 없다. 큰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들어오는 경우는 간혹 있을 수 있지만 이들 모두 농촌출신이다. 농민의 자식이 아니어도 가능은 하나 그런 경우는 매우 희박하다. 여성이 농업 후계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 하기도 한다.
Q. 40세 이하의 신규 농업인에게 지원이 있는가?
A. 1, 상속세를 하나도 안 낸다. 2. 1ha 당 50유로씩 더 준다. 3. 27년간 저리이자로 지원을 받는다. 농장을 물려받는 사람이 토지를 다 갖는다. (다른 형제들한테는 조금씩 나눠준다.) 저리 이자 지원은 최근에 이자율이 워낙 낮기 때문에 파격적인 혜택이라 말하지 않는다.
Q. 독일의 도시 노동자와의 차이?
A. 양돈농가는 수입이 마이너스. 도시노동자는 트럭기사 기준해서 220유로, 260만 원 정도 받는다. 공장노동자는 250유로 정도 받는다. 대신 우리나라보다 생필품이 저렴하다. 소고기 1kg 8¢(1만원이 안됨) 정도로 먹고 살만 하다. EU 통합으로 동구권의 싼 인력들이 유입되면서 소득이 낮아졌다. 나라마다 소득 차이가 있고 스위스는 독일의 3배 이상이지만, 생활비도 많이 비싸다.
Q. 토지매매가 가능한가?
A. 임대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땅을 팔고 사는 경우는 희박하다. 경매는 있다. 토지 가격은 3년 전 평당 1만원 지금은 3만 원으로 3배가 늘었다. 과수원, 밭이 아니고 초지다 그래서 싸다. 임대료는 3천 평에 25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2배~3배 늘어 60만 원 정도다. 임대료가 높아지면서 농가의 부담도 함께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