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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1] 금강산 여행기
나는 금강산 육로관광 집결지인 강원도 고성으로 가기 위해 2004. 6. 23. 07시에 출발지에 도착하여 도로에 주차해있는 관광버스에 올랐다. 우리 일행은 총81명이어서 2대의 관광버스로 나누어 출발했는데, 나는 2호차에 승차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서울시내 88도로를 지나 미사리, 청평대교를 건너 홍천을 벗어나 한참 가다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인제, 진부령을 거쳐 마침내 동해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송림을 지나 고성에 있는 금강산 콘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금강산관광증과 남북한 통과에 필요한 서류를 받았다. 버스를 타고 20여분 더 북쪽으로 올라가니 남한의 통일전망대가 보이고 바로 옆에 동해 출입국사무소에는 일찍 도착한 북측 금강산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다. 까다로운 통관 절차를 끝내고 나가니 “금강산 관광”이라고 글이 쓰인 33인승 버스가 주차장에 도열해 있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관광사에서 정해준 번호대로 버스에 승차하였다. 맨 먼저 반겨주는 사람은 현대아산(주) 관광 대행사 직원인 남한 측 여직원이었다. 그녀는 아직 미혼인 것 같았는데 북한 출입에 필요한 주의 사항을 여러 가지 이야기하고 관광 일정과 코스를 상냥한 말씨로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 해주어 긴장이 다소 풀리었다. 그녀가 한 이야기중 가장 머리에 남는 것은 차가 북한 땅을 넘어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사진 촬영은 일체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광버스 기사는 벌써 6년이 넘는 베테랑 기사로서 중국 조선족 동포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가 비포장 임시 도로를 거쳐 흙먼지를 날리며 동해 바다 쪽으로 계속 가니 군사분계선 철책이 보이고 비무장지대 출입문 앞에서 우리 국군들이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50년 이상 막혀있는 남북한 비무장지대에 나있는 임시 관광 도로를 지나니 저 멀리에 북한군이 보였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한 땅과 북한 군인을 바라보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를 태운 버스는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북녘 땅으로 계속 올라갔다.
나는 남북한 비무장지대를 지나며 문득 일제 침략의 아픔을 노래한 이상화님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한 구절이 머리를 스쳐갔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해라! 말을 해 다오."....(중략)
반세기 동안 아무런 왕래 없이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린 것 같은 비무장지대에도 봄은 어김없이 왔다 갔고, 이름 없는 들꽃도 이곳저곳에 피어 있었으며, 벌써 초여름의 짙은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그 곳을 지나가면서 내 눈에 인상 깊게 한 것은 지뢰 위험 표시이었다. 임시 개통된 관광 도로밖 남북한 비무장지대 곳곳에 지뢰가 매설된 것처럼 생각이 들었으며 만약 혼자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향후 통일이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우리 군인들이 다치지 않고 지뢰를 제거할 수 있는 기술을 지금부터라도 독자적으로 연구 개발하여야 좋으리라고 생각되었다. 국토 분단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며 북으로 올라가다 보니 동해안쪽으로 강원도 고성에서 금강산까지 철로와 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이었다. 관광 안내원의 이야기로는 올해 안으로 기차나 자동차로 금강산 여행을 다녀올 수 있도록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다니 참으로 기뻤다. 북한 땅에서도 남한과 똑같이 동해안 철로와 고속도로 건설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 했듯이 함부로 사진 촬영은 절대 할 수 없었다. 금강산 관광에 가지 않은 사람들은 몰래 사진을 찍으면 될 것으로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미 북한에서는 50~100M 간격으로 군인을 사전에 배치시켜 북방한계선 주변의 군사시설물을 무단으로 촬영하는 것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으며, 만약에 남한 관광객이 사진 촬영으로 적발될 경우에는 바로 연락하여 검문검색이 이루어지고 사진기 몰수뿐만 아니라 북한 당국의 처벌도 받게 된다는 것을 관광 안내원이 미리 주의사항으로 알려주었다.
내가 탄 버스가 비무장지대를 벗어나 한 이십 분정도 새로 난 폭 6m정도의 차선이 전혀 없는 아스팔트 포장 도로를 따라 금강산 쪽으로 올라 가다가 잠시 북한군 검문 장소에 멈추었다. 나는 판문점의 북한군 병사들이 좌우로 팔을 흔들며 걷는 모습을 남한 TV.에서 자주 보았는데, 금강산으로 가는 검문 장소에서 내 눈으로 북한군이 걷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북한 땅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관광버스 속에 위험물이 있는가를 검색하기도 하고 인원수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북한군 병사는 한결같이 미소나 웃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딱딱하고 무표정하게 검문검색만을 하여 같은 민족으로서는 씁쓸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차가 출발하여 북방한계선 주변의 나무가 없는 민둥산을 바라보기도 하고 차창으로 비쳐지는 북한의 농촌 모습을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남한에서 60년대 중반에 새마을 운동으로 바꾼 스레트 지붕처럼 비슷한 오래되고 낡은 회색 스레트나 기와지붕으로 덮여진 집단 촌락이 금강산에서 가까운 북한 농촌 모습이었다. 낡은 나무로 된 전봇대도 보여 심각한 전력난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곳 농촌 집 방에 60와트 정도의 전구가 켜있는 모습도 멀리서 보였고, 건축 자재 및 건축술이 남한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5층짜리 아파트도 슬럼화 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환경은 농촌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농사일이 집단 농장으로 이루어져 동네 사람들이 한 군데 모여 경운기나 트랙터 한 대 없이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꽤 넓은 들판이 보였는데 남한에서는 모내기가 6월초까지 다 끝났으나, 이제야 모내기를 손으로 하고 있었다. 그렇게 늦게 모내기를 하면 북한이 추위가 일찍 찾아와 남한에 비해 단위 면적당 수확이 훨씬 줄어 식량난이 생기게 된다는 것은 예견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누런 소들이 들판에서 자주 보여 60년대 남한의 농촌 모습을 보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남한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으로 출반한 지 약 50분 만에 외금강 입구의 온정리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온정각이 보였고 바로 옆에는 원형 지붕으로 된 체육관처럼 생긴 건물이 있었다. 온정각은 금강산 관광사업 시작으로 최근에 지은 것으로 외국풍의 건물이었는데, 그 곳은 관광객 식당과 휴식코너, 기념품 판매장, 면세점 등이 있었다. 바로 옆의 원형 건물은 금강산문화회관으로 주로 “평양 모란봉 교예단” 공연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타고 온 버스를 타고 출입국 절차를 거치기 위해 장전항으로 향하였다. 온정각에서 10여분 동해 바다 쪽으로 가니 보름달처럼 둥글고 잔잔한 바다가 있는 항구가 보였는데, 그곳이 활시위를 길게 벌린 모양 같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장전항이 있었다. 항구 뒤로는 그림같이 금강산 줄기가 병풍처럼 높이 둘러쳐져 있고 멀리 바닷가 해수욕장에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서 어머니 품같이 아늑한 천혜의 아름다운 항구이었다. 그리고 장전항 부두가 선상에 떠있는 호텔이 눈에 보였고, 바로 옆에 북한 측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북한 측 출입국 직원들에게 외국인 입국 절차와 똑같이 관광증을 통한 신원 확인과 소지품 검사를 거쳐야 했다. 통관 절차를 마치고 숙소인 선상 호텔 해금강으로 들어서니 남한 측 여직원들이 많이 나와 “어서 오세요” 반갑게 인사를 하며 우리를 맞이하였다. 외국에서 빌려왔다는 선상 호텔이었지만 숙박하기에는 별로 불편이 없을 정도로 시설이 깨끗하였다. 숙소인 호텔방 키를 받아 방에 들어가니 오후 3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가져온 짐을 풀어 놓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간소복으로 갈아입고 관광 일정을 살펴보았다.
금강산 관광 첫 일정으로 오후 4시부터 온정각에서 온천을 하기로 하였으나, 사정상 “평양 모란봉 교예단” 공연부터 관람하기로 하였다. 이번 금강산 여행으로 방북한 관광객 대부분이 금강산문화회관에 입장한 가운 데 공연이 시작되었다. “반갑습니다!” 노래가 흐르는 가운 데, 교예 단원과 아리따운 한복을 입은 여자 사회자가 무대에 나와 특유의 북한 사투리로 금강산 관광객에게 환영 인사를 하였다. 남한의 서커스 공연처럼 북측이 자랑하는 1급 남여 교예 단원들의 공연이었는데, 곤봉 묘기, 원통 위 물구나무서기 묘기, 줄 철봉 묘기, 그물 위 공중회전 묘기 등 공연이 이어졌다. 그와 같은 공연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피나는 연습을 거듭해 왔는가를 안보고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공연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왜냐하면, 우리와 똑같은 한민족인 북녘 동포인 데 인간으로서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고난도 육체적 묘기를 보여주기 위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렸으며, 그리고 공연 때마다 얼마나 많은 긴장하며 지내야 하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구나 연민의 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연이 끝나고 곧바로 지하 200M이상을 파서 현대식 건물을 지어 개발한 온정각의 온천으로 갔다. 온정리(溫井里)라는 마을 이름은 옛날 임금님이 온천욕을 하기 위해 찾아 왔을 정도로 좋은 온천수가 나왔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나는 그곳 온천수가 금강산 입구 지하에서 나오는 물이라 그런지 몰라도 남한의 유명한 온천수보다 좋다고 느껴졌다. 온천장 유리창을 통하여 금강산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보였다. 원래 금강산은 음기가 강하므로 온천욕으로 양기를 보충하는 것이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온정각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가 있는 호텔 해금강에 돌아왔다. 장전항에 비친 푸른 달빛이 어딘지 모르게 슬프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이튼 날(2004. 6.24.)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일찍 식사를 하고 금강산 산행 준비를 서둘렀다. 해금강 호텔에서 바라보는 아침의 고요한 장전항 바다를 바라보니 날씨가 맑으리라 여겨져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금강산 관광을 잘하려면 우선 날씨가 좋아야 천하제일의 명산이라는 말하는 진면목(眞面目)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에서 금강산 관광으로 허가한 곳은 외금강 쪽만 제한적으로 개방하여 남측 여행객은 외금강 일부만 관광하는 실정인데, 외금강 관광은 구룡연, 만물상, 해금강 코스로 3가지 나누어 이루어졌다. 나는 구룡연, 만물상, 삼일포 관광 코스를 선택하여 먼저 구룡연 산행에 나섰다. 구룡연 관광은 온정각에서 구룡폭포까지 올라가는 산행 코스로 건강한 젊은이들이 왕복 5~6시간 정도 소요된다. 구룡연 코스로 가면서 거치는 중요 관광지는 술기넘이 고개, 신계사 터, 앙지대, 금강문, 옥류동, 연주담,비봉폭포, 구룡폭포, 상팔담 등이다. 먼저, 온정각에서 소형 관광버스로 출발하여 북서쪽으로 10여분 올라가다 보면 술기넘이 고개에 이른다. 이 고개는 옛날 고개 너머에 있는 창고에 양곡과 물자들을 술기(수래)로 싣고 넘어갔던 곳으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술기넘이 고개를 넘다 보면 남한에서는 거의 보기 어렵고, 껍질에 붉은 색을 띠고 있으며, 수령이 3~4백년 이상 넘게 꼿꼿하게 자란 소나무 숲을 보게 되는 데, 이 소나무를 홍송(紅松), 적송(赤松), 금강송(金剛松), 미인송(美人松 ) 등으로 불린다. 조선 시대에 왕궁을 지을 때 이 소나무를 이용하기도 하였다는 데, 금강송을 베기 위해서는 임금님의 윤허가 있어야 했을 정도로 엄격히 관리하여 보호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북한에서 잘 관리하여 관광객들이 오래된 송림(松林)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어 금강산의 보배라고 생각되었다. 그 곳을 지나서 가다 보면 솔밭 사이로 신라 법흥왕 시절 보운선사가 세운 절인 신계사 터가 보이는 데, 이 절은 6. 25. 전쟁 때 아깝게도 전소되었다. 현재 남한의 불교계에서 신계사 재건을 하기 위해 북측과 협상이 잘 이루어지고 있어 앞으로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니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다시 계속 올라가니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관광 안내원은 우리 일행에게 차에서 내리면 화장실에 가서 꼭 일을 보고 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곳부터 구룡폭포까지는 화장실이 하나도 없으며 아무 곳에나 용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란다. 옥류동 계곡의 맑은 물은 고기가 살지 못할 정도의 1급수 이상 되는 깨끗한 물로서 하류 온정리로 흘러 내려가 그 곳 주민의 식수로 그대로 이용되며, 또한 온정각 관광객의 식수로 이용되기 때문에 북측에서는 계곡 물 관리에 철저하였다. 만약에 남한의 관광객이 몰래 아무 곳에나 대, 소변 일을 보다 적발될 경우에는 아마 북측 당국에 소환되어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 하고 처벌도 받게 될 것이다. 구룡폭포 인근에 화장실이 하나 있는 데, 이곳은 주차장과 멀리 떨어져 있고 차량 진입이 전혀 안 되는 곳이어서 사용 요금으로 1~2불을 지불하여야 출입이 가능하였다. 남한 국립공원의 경우는 북측의 금강산처럼 철저히 산의 계곡물 관리하는 곳이 없다고 생각되는 데, 앞으로 이러한 자연보호는 남한에서 꼭 배워서 실천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주차장을 출발하여 조금 올라가 다리를 건너가니 목란관이라는 쉼터가 소나무 속에 아담하게 지어져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여기는 여러 가지 음료와 북한산 소주, 막걸리 등을 마실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금강산의 기암괴석에는 예로부터 전설이 많이 내려오고 있다. 앙지대에는 코끼리, 거북이, 도마뱀, 악어 모습의 바위들이 있는 데, 그 바위들은 그들이 비로봉을 올라가다 굳어져 변하였다고 하지만 옛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여겨지며, 금강산은 중생대(약1,000만 년 전)이후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풍화, 침식 작용에 의하여 만들어진 바위 덩어리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기기묘묘한 형태로 변하여 관광객들에게 각기 다른 형태로 보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이어서 외금강 구룡 계곡을 보려면 금강문을 지나야 하는 데, 이곳은 조그만 집채만큼 큰 바위가 갈라지고 구멍이 뚫려 길이 나서 어른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의 문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문을 지나 좌측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와 크고 흰 바위들을 보면서 한참을 오르다가 서쪽 방향의 계곡으로 들어서면 옥류동 계곡이 눈앞에 펼쳐진다. 옥류동은 옥(玉)구슬 같은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데, 말 그대로 옥같이 깨끗한 물이 옥류담으로 흘러 내려 수심 6M정도의 초록빛 바닥까지 보일 정도이었다. 옥류담 바로 밑에는 넓은 무대 바닥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데, 이곳을 옥류동 무대바위라고 한다. 나는 무대바위에 서서 아름다운 금강산 옥류 계곡을 바라보니 신선이 사는 나라에 온 것으로 착각되었다. 그 곳은 예로부터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찾아와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시를 노래하고 그림을 화폭에 담았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나는 그곳에서 옥류담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받아 마시고 시 한수를 지었다.
< 옥류동 무대바위에서>
비로봉에 걸친 구름이
아름다운 금강에 취해 머물다
비를 내리나니
봉래산 맑고 깨끗한 계곡을
흐르고 흘러
새악시 손처럼 고운
흰 바위와 돌을
어루만지고 구르고 굴러서
이곳 옥류동에 이르러
마침내 옥구슬로 변하여 떨어져
푸른빛 옥류담이 되었구나!
너의 맑은 물에 놀라
산천어조차도 살지 못하나니
내 어찌 감히 너를 범할 수 있으랴.
아! 금강의 아름다움은
바위와 돌과 물에 있노라!
옥류 계곡을 따라 비경에 빠져 올라가다 보면 옥류담 절벽 위에 붉은 색 단청을 한 무지개 모양의 옥류다리(무지개다리라고도 함)가 관광객을 기다린다. 이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구룡 계곡이 시작되는 데, 바로 이 때 좌측 계곡에 초록색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은 맑은 물을 담고 있는 2개의 연못이 고리로 이어 놓은 것처럼 눈에 보인다. 이곳을 연주담이라고 한다. 옥류담보다는 크기는 훨씬 작고 물도 적지만 수정같이 깨끗한 계곡물을 담아 놓은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았다. 연주담은 구룡연 코스의 중간 정도 되는 지점으로 등산객이 잠시 땀을 식히고 쉬었다 가기 좋은 장소라고 생각된다. 구룡 계곡을 따라 산행을 다시 시작하여 올라가면서 왼쪽 절벽을 바라보면 봉황이 날아가는 듯 한 바위 언덕 위에서 가느다랗게 물이 떨어지는 폭포와 마주치게 되는 데, 이것을 비봉폭포(飛鳳瀑布)라고 한다. 여름철 비가 내려 폭포수가 많을 경우에는 장관을 연출할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봄철에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아 폭포의 물줄기가 가늘어서 서운하였다. 비봉폭포를 뒤로하고 계속 북쪽으로 오르다 보면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을 가로막고 있는 바위산들이 나를 압도하며 호령하듯이 서있었다. 층층암벽이 금강석처럼 빛나는 황홀경에 빠져 오르다 보니 어느 덧 구룡폭포(九龍瀑布)가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구룡폭포는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로서, 옛날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의 명승지이었다. 이름 그대로 폭포 밑의 깊은 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연못의 수심은 13m나 되고 유량이 많을 때 폭포의 길이는 120m나 된다고 한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구룡폭포 위는 바위로 이루어진 높은 산인데, 금강산 산마루 어디에 흰 비단결같이 깨끗하고 맑은 폭포수를 몰래 숨겨 놓았다가 하루도 쉬지 않고 내려 보내는가를 생각해보니 신기하기만 하였다. 나는 그 곳에서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떨어지는 폭포수를 바라보다가 시 한수를 읊었다.
< 구룡폭포 >
금강석같이 단단한 바위속
그 어디메 숨겨놓고
억 만 개 진주알을 쏟아 놓은 듯
하얀 면사포처럼
깨끗한 폭포수를
하루도 쉼 없이
천 길 낭떠러지에 펼쳐 놓은 듯
구룡연에 내려뜨리는가!
저 멀리 날아가는 새들도
너의 아름다움에 반해
잠시 쉬었다가는구나!
아! 봉래산 꼭대기에서
처음 너를 만났으니
나 이제 가면
언제 또다시
너와 해후(邂逅)하리오!
나는 구용연의 마지막 코스이고 구룡 계곡과 상팔담이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비룡대를 오르기 위하여 흔들거리는 연담교를 건넜다. 비룡대는 가파른 돌계단 철계단으로만 오르고 또 오르게 되어 있는 데, 노약자는 되도록이면 등산을 피하는 게 좋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일행 중에는 사오십이 넘어 보이는 중년 여자 분들도 평생에 한번 오기 어려운 여행이라고 말하며 가파른 바위를 포기하지 않고 오르고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고르며 등산을 계속하여 마침내 비룡대에 섰다. 구정봉 정상인 비룡대는 바위로 되어 있었는데, 금강산의 아름다운 계곡과 상팔담이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이었다. 아호! 야호! 소리치니 금강산이 반갑게 메아리로 반겨주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흘렸던 땀방울과 피로가 한 순간에 없어지는 듯하였다. 상팔담은 비룡대에서만 볼 수 있는 데, 구룡 계곡의 위 산골짜기에 파여서 파란 옥수를 담고 있는 8개의 연못이다. 이곳은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에 배운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전해오는 것처럼 때 묻지 않은 처녀지이어서 신선들이 노닐다 가는 곳으로 여겨졌다. 나는 상팔담의 연못을 눈으로 세어 보며, 그 옛날 나무꾼과 살았전 선녀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비룡대를 내려오며 구룡연 코스의 아쉬운 하산길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곳을 내려오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룡대를 개방하여 금강의 아름다움을 관광객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 좋은 여행이 되겠지만, 남한의 많은 관광객이 계속적으로 등산하다 보면 현재와 같이 잘 다듬어지지 않고 위험한 철계단으로 이루어진 등산로가 훼손되어 예기치 못한 등반 사고가 발생될 수도 있으므로 안전한 산행이 되도록 많은 투자와 정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구룡연 산행을 마치고 다시 온정각으로 내려와 점심 식사를 하고 금강산 온천 노천탕에서 온천욕을 즐기며 오전 산행의 피로를 풀었다.
오후에는 해금강 관광의 하나인 삼일포 관광에 나섰다. 조선 시대에 관동8경의 하나로 이름 높은 삼일포는 온정리에서 동남쪽으로 12㎞ 떨어진 후천(북강)의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호수가의 둘레는 8㎞이며 넓이는 0.87㎢이라고 한다. 우리는 삼일포 입구에 북한에서 지은 위락시설인 단풍관이라는 곳에 도착하여 2층으로 올라가니 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호수 주변에는 해금강으로 가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아늑한 기분이 들었는데, 삼일포는 옛날 바다였으나 침식작용으로 점차 호수로 바뀌었다고 한다. 호수 가운데에는 공중에서 바라보면 소가 누운 것 같은 형상이라는 와우도라는 섬이 있는 데, 그 섬은 푸른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관광객 출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삼일포라는 이름은 옛날 임금님이 관동팔경을 유람하면서 다른 곳은 하루씩만 머무르고 갔는데, 이 곳 삼일포에 와서는 호수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삼일을 머물면서 관광을 즐겼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현재는 낚시는 물론 유람선 하나 찾아 볼 수 없었으며,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삼일포 주변에는 호수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장소에 누각이 있는 데, 그 중에서 장군대와 봉래대가 유명하다. 그리고 호수 위로 솟아 오른 큰 바위 위에 정자가 하나가 세워져 있는 곳을 사선대라고 하는 데, 이곳은 옛날에 네 신선이 삼일포에 와서 놀고 간 것을 기념하여 세웠다고 한다. 삼일포는 호수 전체를 돌 수 있도록 주변에 길이 없으므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니, 명승지로 이름난 것에 비하여 아름다운 비경으로 관광객들이 감탄할 정도의 호수는 아니었다.
나는 금강산 여행의 마지막 날(2004.6.25.) 아침에 일찍 잠에서 깨어짐을 챙겨 놓고, 호텔 해금강 선상에서 식사를 하며 장전항을 절벽으로 가로막고 있는 외금강의 산들을 바라보며 만물상 산행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물상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온정각에서 통천 방향으로 온정령 고갯길을 소형 관광버스를 타고 만물상 입구 주차장까지 올라가야 하는 데, 온정령으로 가는 고갯길은 백 개도 넘는 용(龍)처럼 구불구불한 시멘트 포장도로이었는데, 버스 한대만이 간신히 다닐 수 있는 폭 5~6m정도의 길이었다. 고갯길 양편으로는 수령 4~5백년 이상 되는 금강송이 줄을 지어 서있었는 데, 마치 그 모습이 군대에서 병사들이 사열을 받는 것처럼 적송, 홍송, 미인송들이 서로의 자태를 뽐내며 도열해 있었다. 만물상을 보아야 외금강을 여행하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만물상은 세상의 모든 형태의 모양을 한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 놓은 듯 한 명승지이다. 만물상 입구 주차장에서 정상인 천선대까지 왕복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산행 코스인데, 처음 10분정도의 삼선암까지는 누구나 올라갈 수 있으나, 그 후 귀면암(鬼面岩), 칠층암(七層岩), 절부암(折斧岩), 안심대(安心臺), 천선대'(天仙臺)에 이르는 길은 노약자가 쉽게 올라갈 수 없는 험난한 산행 길이므로 단지 어렵게 금강산에 와서 만물상을 보고 싶은 욕심으로 무작정 등산을 하다가는 예기치 않은 사망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므로, 남한에서 자식들이 부모님에게 효도 관광으로 금강산 여행을 보내실 때에는 만물상 주차장 입구에 있는 만상정(萬相亭)의 서늘한 그늘 밑에서 쉬다가 가까이에 있는 만상천(萬相泉)의 물을 마시고 하산하시도록 당부 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고 생각한다. 만물상은 오랜 세월 동안 풍화작용을 거쳐 수직으로 수백 길 넘게 서있는 바위들이 즐비하여 신이 자연을 통해 만든 예술 작품 중에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되며, 바위산으로 만들어진 하모니의 극치이다. 화가가 금강산의 사계를 아무리 잘 그린다고 하여도, 감히 만물상의 자연을 따라갈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90도 경사의 철계단을 수없이 올라 기둥바위 4개가 둘러선 가운데 10 명이 설 수 있는 천선대(天仙臺)에 올랐다. 이곳은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고 하여 천선대라고 불리어진다. 천선대는 온통 돌로 되어 있고 아래는 천 길 낭떠러지가 둘러 서있는 데, 만물상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만물상에 있는 동양화 같은 경치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전망대와 같은 곳이었다. 나는 천선대에서 내 눈 앞에 펼쳐진 비경을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에 몇 장을 담고, 바로 안심대(安心臺)로 내려와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갑자기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 때 만물상에 오르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며 천선대를 뒤로한 채 만물상을 내려오고 있었다. 만물상 관광을 끝으로 2박3일의 금강산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남한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맡겼다.
나는 이번 여행을 하면서 마음속에 깊이 느낀 것이 하나 있는 데, 우리 한반도가 이념과 정치 체제 때문에 남북으로 분단되어 지금은 아픔을 안고 살지만, 앞으로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루어 백두대간에서 태백산맥을 거쳐 금강산, 설악산을 합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가꾸어 나가면 틀림없이 유럽인이 자랑하는 알프스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2004. 6. 25. 茶園 정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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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2]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대한 소고(小考)
가을이 되면 농촌의 고양이는 주인에게 사랑과 대접을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도시의 고양이는 주인에게 버림받고 버려져 도둑고양이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똑같은 고양이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장소에 따라 차별을 받는지를 생각해보자. 먼저 시골에서는 농부들이 봄, 여름 애써 가꾼 곡식을 가을에 추수를 하여 겨울 내내 창고에 보관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농촌의 고양이는 곡식을 쥐로부터 보호하는 천적이므로 농사를 많이 짓는 농부에게는 꼭 필요로 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각종 빌라와 아파트 숲으로 이루어진 도시에서는 고양이가 곡식을 보호하는 일이 별로 없으므로, 도시인들에게는 자기 삶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 않기 때문에 고양이를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고 애완용으로 키우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고양이들이 자주 밖에 버려져 주인 없이 배회하다 도둑고양이 신세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우리는 고양이에게서 찰스 다윈의“적자생존”법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생물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적응하며 꼭 필요한 존재로 남을 경우에는 오래 살아남고, 자기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필요 없는 존재일 경우에는 결국에는 도태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인간의 삶에 있어서“적자생존”의 법칙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구약 성경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에게 선택을 받아 창조된 만물의 영장으로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은 존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을 살펴보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법칙이 냉엄하게 지배하는 세계로 점점 더 나아가고 있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선진 문명의 강대국 국민은 모든 부와 물질의 풍요 속에서 사는가 하면, 미개한 문명의 약소국 국민은 전쟁과 빈곤으로 고통 받으며 기아로 죽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인간 존엄성의 상실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천부 인권인 자유, 평등, 생존의 권리가 박탈되어 살아가는 인간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그대로 수수방관만하고 살아간다면 지구상에서 인류의 평화는 사라지고 전쟁과 테러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대부분은 종교가 다른 종족간의 종교 전쟁과 테러주의자가 거주한다고 의심되는 국가에 대한 강대국의 응징과 보복이거나, 천연자원 부국에 대한 강대국의 선점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세계질서는 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가져오기 보다는 더욱 더 잔인하게 인간을 살생하는 영원한 전쟁의 세계로 나아가게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현재의 UN은 국제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는 기구로 전락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취지에서 우리 인간이 동물처럼“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살아 가야하는 슬픈 존재로 되기보다는, 지구상 모든 인간이 좀 더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강력한 의무와 책임을 질 수 있는 새로운 국제기구의 탄생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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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3] 촛불 바다를 바라보며
1960년대 어릴 적 우리 집에서 기르던 황소는 우리 집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버지같이 듬직한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이었다. 겨우내 외양간에서 게으른 잠을 청하고 내가 가져다준 따뜻한 쇠죽을 맛있게 먹고 나서 고맙다는 듯이 연방 되새김질을 하곤 하였다.
봄이 되어 소쩍새가 울고 진달래가 필 무렵이면 할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황소와 함께 갈치 꼬리와 같은 천수답을 오가며 논을 갈았고, 우리 황소가 힘에 겨워 입에서 거품을 내뿜는 모습이 어린 마음에 나에게는 어찌나 가슴 아팠는지 모른다. 이처럼 소는 무논을 갈아 모내기를 준비하고, 밭을 갈아 상추, 배추, 무, 파 등을 심게 하여 한 집안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귀중한 존재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가끔 황소가 행여 몸이 아플까 걱정이 되어 살아서 펄펄 뛰는 산 낙지를 잘라 보양식으로 먹이기도 하였다. 시골에서 태어나 대대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소가 커다란 재산이었고, 송아지라도 나면 자식이 태어난 것처럼 기쁘게 생각하며 잔치도 벌였다. 하지만, 가난한 살림에 도시로 유학 나간 자식의 대학등록금 마련을 위해 그토록 아끼던 송아지를 내다 팔 때면 가족을 잃는 슬픔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 시절에는 어느 집에 소가 몇 마리 있으며, 또한 얼마나 소가 튼튼하냐에 따라 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었다. 사람과 소와는 불가분의 관계로서 소가 없는 농촌 생활이란 커다란 짐을 혼자 지고 가는 고난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농촌에도 새마을 운동을 거치면서 전기가 들어오고 경운기라는 신기한 농기계가 들어오면서 생활환경이 급격히 바뀌고, 우리와 친숙하게 지냈던 황소들도 어느새 우리와 사이가 멀어져가더니 동구 밖 언덕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모습도 점차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한우들은 나도 모르게 우시장에 끌려가 팔려서 다른 주인을 만났거나, 그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뚝뚝 흘러내리며 도살장에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농경사회에서 최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이 지배하는 산업사회를 거치며 더욱더 잘살게 되다 보니,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고나 할까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던 그 누런 황소의 모습보다도 우유나 쇠고기를 생산하는 젖소와 육우(肉牛)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요즈음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로 이루어지는 촛불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가 소를 친숙한 식구와 같은 존재라기보다는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뭇짐승처럼 인식하게 하는 모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예로부터 쇠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카우보이의 후예들이 한민족처럼 자기의 조상이 소를 노동력의 원천으로 아끼며 사랑하였던 소에 대한 감정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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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4] 한글의 수난(受難)과 미래를 위하여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릴 적에는 소꿉친구들과의 대화중에 외국어로 된 말을 거의 쓰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고 중학교로 진학하여 영어를 배우게 된 후부터는 친구는 물론 나도 모르게 하나 둘씩 대화중에 외국어를 쓰게 되었다. 예를 들면 그 당시에 부자들만 가질 수 있었던 라디오, 텔레비전, 카메라 등등 외제 물품을 접하며 외국어로 된 우리말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외국어를 사용한 연예인 이름, 건물명, 상호, 물품명, 노래 가사 등 외국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어 어지러울 지경이다. 예를 하나 들면 2007년 10월 1일부터 000‘동사무소’라는 용어를 000‘동주민센터’라고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는 데, 아직도 50대 이상 사람들은 ‘주민센터’라는 용어를 생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센터(center)'라는 말은 영어로서 ‘중심, 중심지, 종합시설’ 등을 나타내는 말인 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각종 법령과 서비스업에서 조차도 ‘000센터’라는 용어를 너무나 쉽게 사용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000‘동주민센터’라고 부르기보다는 000‘동청(洞廳)’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청, 구청, 동청으로 일관되게 ‘청(廳)’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요즈음 여러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노래 잘 하는 신인 가수를 뽑는 장면에서 ‘멘토(mentor)’라는 영어 단어를 갑자기 많이 사용하고 있는 데, ‘멘토(mentor)’라는 뜻은 ‘스승, 선배, 지도자, 조언자, 후견인’ 등을 뜻하는 말로서 나는 순수한 우리말인 ‘스승’으로 순화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종 선거 운동기간에 ‘메니페스토(Menifesto)’라는 외국어를 쓰고 있는 데, 이것은 선거에서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유권자들이 꼼꼼히 따져보고 후보자가 당선 후에도 공약을 지켜 나가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은 ‘참공약’ 시민운동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말로 “공약(公約)”이라고 순화시켜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전자공학 등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많은 외국어가 우리말을 오염시키고 있다. ‘스마트폰, 노트북, 로그인, 아이디, 패스워드, USB, 하드 디스크, 메모리’ 등 수많은 외국어로 된 전문 용어들을 젊은이들이 우리말로 순화된 것을 사용하기보다는 외국어 그 자체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여 한글을 파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외국어를 우리 한글로의 번역을 거치지 않고 원어 발음을 그대로 사용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국어정책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궁극적으로는 아름다운 한글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외국어의 홍수와 무차별적인 사용으로 인한 폐해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외국어 및 전문 학술용어는 공인된 심의기관에서 아름다운 한글로 공시한 것만을 일반인이나 공공기관, 언론매체 등에서 사용토록 하여 외국어 남용 및 외국어로 된 전문용어를 자의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지도 및 감독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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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산(鄭以山) 프로필
* 호(號)는 다원(茶園)
* 한양대학교 법학과 졸업
* 2004년 8월호 <스토리문학> 등단
* 한국스토리 문인협회회원, 문학공원.시마을 동인
* 홈페이지 주소 :http://cafe.naver.com/i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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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고 고맙습니다 정이산 사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