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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한국문학신문 주최(2024년)
제8회 전국시낭송경연대회 본선 진출자 원문(18편)
1. 검정 고무신/ 한석산
2. 겨울의 춤/ 곽재구
3. 곡비(哭婢)/ 문정희
4. 그 강에 가고 싶다/ 김용택
5. 꽃피는 시절/ 이성복 (2명)
6. 나의 강산이여/ 심훈 (3명)
7.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정진규
8. 대숲 바람소리/ 송수권
9. 못 위의 잠/ 나희덕 (3명)
10. 백발의 그리움 하나/ 홍윤숙 (2명)
11.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김선우
12. 세상에 어머니 같은 여자는 없다/ 한석산
13. 아버지의 등/ 이정하 (3명)
14. 어머니라는 말/ 이대흠
15. 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2명)
16.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김기택
17. 한강 아리랑/ 한석산
18. 황옥의 사랑가/ 정일근 (3명)
1. 검정 고무신 / 한석산
눈 덮인 초가지붕 아랫목 화롯불이 피어나던
뭔가 아련하고 애잔한 느낌의 시절
인생의 길모퉁이서 만난 사람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지쳐 버린 내 마음 아는 이 없어도
진한 그리움에 가슴 저린 보고픔이 이는데
이름만 불러도 눈물이 아리 아릿한
나의 인생에 함께 했던 수많은 얼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사는 게 힘들어 잊고 살았던
사랑했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묻어둔
검정 고무신 시절 황소보다 못한 찬밥 덩어리 같은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니 사는 게 눈물입니다.
가고 싶은 그 시절 그리움 속 깊은 사랑
내 어린 날 어머니 아버지 지금 나를 보시면
얼마나 만지고 싶고 말하고 싶으실까
울고 싶은 가슴 짓누르는
아픔으로 그려지는 어머니 엄마 보고 싶어요.
지난 인생길에 함께 했던 잊혀진 얼굴이 보고 싶다.
풍금/ 한석산/ 한국문학신문/ 2020
2. 겨울의 춤 / 곽재구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튼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낙엽 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들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세노야/ 곽재구/ 문학과 지성사/ 1990
3. 곡비哭婢 / 문정희
사시사철 엉겅퀴처럼 푸르죽죽하던 옥례 엄마는
곡(哭)을 팔고 다니던 곡비였다
이 세상 가장 슬픈 사람들의 울음
천지가 진동하게 대신 울어 주고
그네 울음에 꺼져 버린 땅 밑으로
떨어지는 무수한 별똥 주워 먹고 살았다
그네의 허기 위로 쏟아지는 별똥 주워 먹으며
까무러칠 듯 울어 대는 곡소리에
이승에는 눈 못 감고 떠도는 죽음 하나도 없었다
저승으로 갈 사람 편히 떠나고
남은 이들만 잠시 서성일 뿐이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요염하게 울음 우는
옥례 엄마 머리 위에
하늘은 구멍마다 별똥 매달아 놓았다
그네의 울음은 언제 그칠 것인가
엉겅퀴 같은 옥례야, 우리 시인의 딸아
너도 어서 전문적으로 우는 법 깨쳐야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의 울음
까무러치게 대신 우는 법
알아야 하리
지금 장미를 따라/문정희/ 민음사/ 2016
4. 그 강에 가고 싶다 / 김용택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을 볼 일이다
무엇이 바쁜가
이 만큼 살아서 마주할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 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도 저 혼자 돌아간다
그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시 읽는 기쁨/ 정효구/ 작가정신/ 2019
제12회 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 김용택/ 문학사상/ 1998
5.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내는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 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그 여름의 끝/ 이성복/ 문학과지성사/ 2020
6. 나의 강산이여 / 심훈
높은 곳에 올라 이 땅을 굽어보니
큰 봉우리와 작은 뫼뿌리의 어여쁨이여, 아지랑이 속으로 시선이 녹아드는 곳까지 오똑오똑 솟았다가는 굽이쳐 달리는 그 산 줄기
네 품에 안겨 딩굴고 싶도록 아름답구나.
소나무 감송감송 木覓(목멱)의 등어리는
젖 물고 어루만지던 어머니의 허리와 같고 삼각산은 적의 앞에 뽑아든 칼끝처럼 한 번만 찌르면 먹장구름 쏟아질 듯이
아직도 네 기상이 늠름하구나.
에워싼 것이 바다로되 물결이 성내지 않고 샘과 시내로 가늘게 수놓았건만 그 물이 맑고 그 바다 푸르러서,
한 모금 마시면 한 백년이나 수(壽)를 할 듯 퐁퐁퐁 솟아서는 넘쳐 넘쳐 흐르는구나.
할아버지 주무시는 저 산기슭에
할미꽃이 졸고 뻐꾹새는 울어예네
사랑하는 그대여, 당신도 돌아만 가면 저 언덕 위에 편안히 묻어 드리고
그 발치에 나도 누워 깊은 설움 잊으오리다.
바가지 쪽 걸머지고 집 떠난 형제,
거칠은 벌판에 강냉이 이삭을 줍는 자매여,
부디부디 백골이나마 이 흙 속에 돌아와 묻히소서
오오 바라다볼수록 아름다운 나의 강산이여!
그날이 오면/ 심훈/ 시인생각/ 2018년
7.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 / 정진규
놀고 있는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을 아시는가
이것은 나락도 거두어 갈무리하고 고추도 말려서 장에 내고
참깨도 털고 겨우 한가해지기 시작하던 늦가을 어느날
농사꾼 아우가 한 말이다 어디 버릴 것이 있겠는가
열매 살려내는 햇볕, 그걸 버린다는 말씀이 당키나 한가
햇볕이 아깝다는 말씀은
끈임없이 무언갈 자꾸 살려내고 싶다는 말이다
모든 게 다 쓸모가 있다 버릴 것이 없다
아 그러나 나는 버린다는 말씀을 비워낸다는 말씀을
겁도 없이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욕심 버려야 보이지 않던 것
비로서 보인다고 안개 걷힌다고
지껄이면서 여기까지 왔다
아니다, 욕심도 쓸모가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마음으로 보면 쓸모가 있다
세상엔 지금 햇볕이 지천으로 놀고 있다
햇볕이 아깝다는 뜻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사람아 사람아 젖어있는 사람아
그대들을 햇볕에 내어 말려라 햇볕에 내어 말려 쓰거라
끊임없이 살려내거라
놀고 있는 햇볕이 스스로 제가 아깝다 아깝다 한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정진규/ 문학세계사/ 1990
시 읽는 기쁨1/ 정효구/ 작가정신/ 2019
8. 대숲 바람소리 / 송수권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 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한
대닢파리의 맑은 숨소리
우리나라의 숲과 새들/ 송수권/ 고요아침/ 2005
9. 못 위의 잠 / 나희덕
저 지붕 아래 제비 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 창비/ 1994
교과서 시에 빠지리라/ 이승철외/ 비상교육/ 2013
10. 백발의 그리움 하나 / 홍윤숙
어디서 불어오던 바람 소리일까
한 시대 에둘러 돌아와 후득이던
고향의 예감 같던 바람 소리
한 시절 바람은 나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아니 내 몸 전체가 온통 한 포대의 바람이었다
나는 날마다 들끓는 바람이 되어
세상의 끝을 헤매다녔고
돌아오는 길은 고향 뒷산 밤나무 숲의
밤꽃 향기에 목이 메었다
그 시절 바람은 열이면 열 눈먼 장님이어서
분수처럼 산화하고 자폭했다
어디를 가도 꿈꾸던 나라, 도시는 없었다
인생을 나눌 사람 하나 없이
쓸쓸히 눈감고 돌아서는 뒷모습
그 등에 붉은 저녁노을 실의의 그림자
길게 멀어져 가고
젊고 푸르던 바람은 그렇게 이별했다
그 바람 언제부턴가
살 속 뼛속으로 파고드는 하늬바람 되어
내 가슴 시리게 후비고
밤새 눈뜨고 먼 하늘 중천에 길도 없이 떠돌고
한 주름 빗방울로 운명해 갔다 남은 생애,
이제 바람 한 점 없는 아득한 변경
어디로 갈까 길을 물어도
대답 없는 내 안의 산골짝에서
가랑잎 한 장 부서지는 소리로
귀를 씻는다
섬으로 쌓인 세월의 부피 키를 넘어 숨이 차고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아
가슴엔 길로 자란 백발의 그리움 하나
출구 없는 빈집 혼자 지킨다
장식론/ 홍윤숙/ 시인생각/ 2013
11.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 김선우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삐 몽돌과 놀았습니다
보랏빛 자디잔 꽃마리 어여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 사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 달고 달아 낮별 뜨며 놀았습니다
새 뿔 올린 사향노루 너무 예뻐서
슬퍼진 내가 비파를 탔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잡아주고 싶은 새들의 가녀린 발목 종종거리며 뛰고
하늬바람 채집하는 나비 떼 외로워서
멍석을 펴고 함께 놀았습니다 껍질 벗는 자작나무
진물 환한 상처가 뜨거워서
가락을 함께 놀았습니다 회화나무 명자나무와 놀고
해당화 패랭이꽃 도라지 작약과 놀고
꽃아그배 아래 낮달과 놀았습니다
달과 꽃의 숨구멍에서 흐러나온 빛들 어여삐
아주 잊듯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대 잃은 지 오래인
그대 만나러 가는 길
내가 만나 논 것들 모두 그대였습니다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문학과지성사/ 2007
12. 세상에 엄마 같은 여자는 없다 / 한석산
엄마 아이구 내 새끼 나 어떤 여자랑 살까
음 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음식 솜씨 좋은 여자가 으뜸이란다.
응 엄마 같은 여자! 아야, 징그럽다
곁에서 잠잠히 있던 아빠
야 이놈아 세상에 엄마 같은 여자는 없다.
청 보릿대 같던 시절 엄마와 할머니가 담근
김장김치 밑반찬 간장 된장 고추장
귀 떨어진 뚝배기 보글보글 된장찌개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이 눈물 나게 그립다.
어머니의 젖내 나는 그 품속이 그리워 운다.
투정 부리면 달래주고,
칭얼거리면 젖가슴을 내주시던
그리운 어머니 엄마가 보고 싶다.
오늘 저녁 밥상은 엄마 손맛 같은 여자
밥숟가락에 묵은지 쭉 찢어 얹어주는
아내가 차려주는
자글자글한 고등어구이 한 손
된장찌개 호박잎 상추쌈에 보리막장
열무김치 배추 겉절이 곁들인 보리 밥상이면 좋겠다.
풍금/ 한석산/ 한국문학신문/ 2020
13. 아버지의 등
-수없이 업힌 어머니의 등보다 더 기억나는 것은
단 한 번 업힌 아버지의 등이다
/ 이정하
일곱 살 되던 해 겨울,
눈보라치는 들판을 건너가기 위해
아버지는 처음 내게 등을 내주셨다
심한 고열로 밤을 꼬박 새웠던 나는
아버지의 넓은 등판에 뺨을 댄 채 잠이 들었고
읍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내 병은 말끔히 나아 있었다
객지에 계신 아버지가 집에 오는 것은
일 년에 어쩌다 한두 번
그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동네 목욕탕에 가고 싶어 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부리나케 도망쳐
혼자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곤 했다
막노동 탓에 표시나게 굽어 있는 등을
세월이 한참 흘러
아버지와 함께 간 동네 목욕탕
그때도 나는
늙고 말라빠진 아버지의 몸을 외면했다
야야, 쓸데없는 돈 말라꼬 써
등만 밀어주면 되는데
세신사에 이끌려가며 힘없이 남긴
아버지의 말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월이 더 흐르고 흘러
아들과 함께 간 동네 목욕탕
자식새끼의 등을 때수건으로 벌겋게 밀며
나는 소리 없이 눈물 흘렸다
샤워기 세차게 틀어놓고 목 놓아 울었다
어릴 적 그 따스했던 아버지의 등
이제는 밀어드릴 수도 없는 아버지의
그 굽은 등이 간절히 생각나서....
다시 사랑이 온다/ 이정하/ 문이당/ 2016
14. 어머니라는 말 / 이대흠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리고 머리가 울리고
이내 가슴속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려나온다
어머니라는 말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웅웅거리는 종소리 온몸을 물들이고
어와 머 사이 머와 니 사이
어머니의 굵은 주름살 같은 그 말의 사이에
따스함이라든가 한없음이라든가
이런 말들이 고랑고랑 이랑이랑
어머니라는 말을 나직이 발음해보면
입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웅얼웅얼 생기는 파문을 따라
보고픔이나 그리움 같은 게 고요고요 번진다
어머니라는 말을 또 혀로 굴리다보면
물결소리 출렁출렁 너울거리고
맘속 깊은 바람에 파도가 인다
그렇게 출렁대는 파도소리 아래엔
멸치도 갈치도 무럭무럭 자라는 바다의 깊은 속내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그 바다 깊은 속에는
성난 마음 녹이는 물의 숨결 들어 있고
모난 마음 다듬어주는
매운 파도의 외침이 있다
귀가 서럽다/ 창비시선311 / 이대흠/ 창비/ 2017
15.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 소리 같은 - 바위들이 흔들 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창비/ 2019
16.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 김기택
잠깐 초록을 본 마음이 돌아가지 않는다
초록에 붙잡힌 마음이
초록에 붙어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마음이
종일 떨어지지 않는다
여리고 연하지만 불길처럼 이글이글 휘어지는 초록
땅에 박힌 심지에서 끝없이 솟구치는 초록
나무들이 온몸의 진액을 다 쏟아내는 초록
지금 저 초록 아래에서는
얼마나 많은 잔뿌리들이 발끝에 힘주고 있을까
초록은 수많은 수직선 사이에 있다
수직선들은 조금씩 지우며 번져가고 있다
직선과 사각에 밀려 꺼졌다가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흙이란 흙은 도로와 건물로 모조리 딱딱하게 덮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초록이 갑자기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잘리고 갇힌 것들이
자투리땅에서 이렇게 크게 세상을 덮을 줄은 몰랐다
콘크리트 갈라진 틈에서도 솟아나고 있는
저 저돌적인 고요
단단하고 건조한 것들에게 옮겨붙고 있는
저 촉촉한 불길
소/ 김기택/ 문학과지성사/ 2010
17. 한강 아리랑 / 한석산
천년을 흘러도 한 빛깔, 물 파랑 쳐 오는
갈기 세운 물소리 조국의 아침을 깨운다.
한강 1300리 물길 하늘과 땅 이어주는
구름 머문 백두대간 두문동재 깊은 골
뜨거운 심장 울컥울컥 꺼내놓는 용틀임 춤사위
우리 겨레의 정신과 육신을 가누는
민족의 젖줄 한강 발원지 여기 검룡소.
큰 물줄기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골지 천과 아우라지 조양 강 휘돌아 친 두물머리 이끈
한강 한복판에 떠 있는 선유도 갈대숲
물새 둥지 튼 그 속에서도 꽃 피웠네.
대한민국 서울 기적 이룬 한강
굴절된 역사의 아픈 눈물 삼키며 제 몸 뒤집는다.
이런 날에 우리 다 같이 부르는 가슴 벅찬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가는 곳 어딘지 몰라도
가버린 것들은 허망하게 아름다운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동기 문화를 세운, 오늘날 우리 민족의 선조
이 땅 순한 백성들이 원시생활 하던 시절부터
강에 안기던 사람 품을 내주던 강
세월이라는 깊은 강가에 서면
고요한 강물이 내 영혼을 끌고 가네.
먼 옛날 삼각산 소나무 아래 어매 아배 뼈를 묻고,
삽을 씻으며 민초의 한을 씻던 아리수
넓고 깊은 어머니 가슴 강물도 차운 날에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젖가슴 여미는 어머니 가슴 헤집는 젖둥이
온갖 풀꽃 향기에 젖은 물가에 앉아 있어도 목이 마르다.
한강아리랑/ 한석산/ 동학사/ 2013
18. 황옥黃玉의 사랑가 / 정일근
운명의 맥을 짚어 누런 바다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바다 건너 동쪽나라에 하늘에서 알이 되어 내려왔다는
수로, 그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먼 나라 나사렛에서 태어난 야소라는 남자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하늘에 있고
죽어서 다시 사는 일이 하늘에 있다면
제가 그대에게로 가는 것도 하늘이 정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랑이 하늘의 신탁이라면
그대는 그 나라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어머니가 주신 붉은 속곳을 준비하며 저는 자꾸만 붉어집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두려움은 잊기로 했습니다.
이만 오천 리 뱃길 내내 초야의 뜨거움을 꿈꿀 것입니다.
첫날밤 그대가 열여섯 내 나이를 묻는다면
붉은 저 속곳보다, 바다를 건너며 붉어진 내 몸보다
더 붉은 처녀의 피로 답할 것입니다.
내 배 안에서 하늘의 흰 피와 땅의 붉은 피가 섞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왕조의 피를 만들고
그 피 세세년년 붉게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건강한 남자로 곧추서서 저를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아유타국에서 허許씨 성을 가진 황옥이
물고기 두 마리 문양을 증표로 수로, 그대에게로 갑니다.
사과야 미안하다/ 정일근/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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