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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km 이상 삼남대로 천리 길 1부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배병만 추천 2 조회 640 24.01.10 11:05 댓글 1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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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1.10 14:42

    첫댓글 천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

  • 24.01.10 14:56

    타키님,민규님 웃음끼는 사라지고ᆢ
    원샷으로 삼남대로 하시구 고생많으셨습니다

  • 24.01.10 15:02

    나주에 유명한 곰탕집이 하얀집 아니면 노안곰탕이겠습니다..
    함께하면 길이된다는 요즘 트렌드를 실천하시는듯...

  • 24.01.10 15:28

    방장님~
    읽는 내내.. 그 때.. 그 시간.. 그 곳으로 되돌아 간듯한 착각이 들어..
    숨이 안쉬어지려고 합니다!!
    얼마나 아팠던지..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게 돋아납니다!!😭😭😭
    민규님 무릎 꿇고 기도하시던 때..
    방장님 삼다수로 발바닥 샤워하실때..
    강진.. 저 쉼터에서 너무너무 나가기 싫었던 기억이.. ㅋㅋㅋ
    먼길 준비하던 조상님들 보따리에 짚신이 주렁주렁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혹 다음에 다시 이런길을 걷게 된다면..
    장말로.. 신발만 주렁주렁 달고 가렵니다..😭

  • 24.01.10 16:39

    멀고도 힘든 길
    그 길을 몸소 체험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계속되는 다른 길들도 무탈한 발걸음 하시길 바랍니다.

  • 24.01.10 16:40

    그냥
    입가에 미소만 생길뿐
    뭐라 애기하기가 힘드내요
    웃음이 답인듯 싶고요
    ~~~~~~~~~^^
    수고하셨습니다 ,

  • 24.01.10 17:01

    삼남길에서 올려다 보는 산들이 새롭네요.
    산에서 늘 내려보다가 이런 시간도 좋겠다 싶습니다.
    영남대로,삼남길 말고도 많은 도로가 있었군요.
    모든 것은 한양으로 통한다.
    이말이 실감이 나네요 ㅎㅎ
    혹한기에 삼남길 이야기 재밌게 보고 갑니다.
    2부도 기대하겠습니다^^

  • 24.01.10 19:08

    수도를 정하고 도로망이 구축되고...
    사람들이 그 길을 끝도 없이 오갔을 터.
    산길을 걷고, 물길을 걷고,
    그리고 이제는 인도-사람의 길을 걷는 방장님의 행보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길에 나서야 했던 조선의 정치 불운아들
    배방장님의 방장체도 이런 고난의 길 위에서
    언젠가 제대로 완성되어질 듯
    ^^ 방장님 늘 화이팅입니당.

    그림 속에서 툭~ 하고 솟아 오른 듯한
    월출산의 모습에 읽던 길 멈추고
    가보고 싶게 만드는 사진과 글
    아니면 삼남길 일부 걸어보고 싶기도 합니다.
    월출산 때문에라도 꼭 영암 가봐야지요.

    잘 엮어내신 소중한 후기글 감사히 보며.
    글 보고 또 존경 업그레이드~
    역시 굿~ 멋지십니다. 방장님.
    이번 삼남길은 몇 편의 대하드라마가 펼쳐질런지...

  • 24.01.10 20:23

    잘보고 갑니다 어린양들 델고 수고 많았습니다

  • 24.01.11 09:26

    [다산초당에 얽힌 멫 가지 얘기]

    1.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간 경로는 충청도를 거쳐 곧장 내려간 게 아님. 1801년 11월, 포항 장기로 유배를 갔다가 바로 강진으로 이배(유배를 옮김). 다산에게 사형 명령을 내리기에 부담을 느낀 노론 정권은 일부러 겨울철에 이배를 명하여 걷는 중에 사망하기를 바랐고, 실제로 강진에 이르러서 드디어 길바닥에 쓰러져버리자 호송하던 관리들이 그대로 돌아가 버림. 다산 선생이 얼어죽기 직전에 주막 노모가 발견하여 살림. 이후 4-5년 가량을 불도 안 들어가고 습기찬 그 주막 웃방에서 지내면서 막걸리 알바. 나중에 이 주막의 현판을 다산이 '사의재'라 써 줌.

  • 24.01.11 09:36

    2. 다산 선생에게 초당(초가집)이 마련된 이후, 대략 1808년 이후, 책이 없던 다산에게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대량의 서적이 제공됨. 그것으로 500여편의 논문을 쓰게 되는데, 그 책은 어디서 왔을까? 해남의 명가 해남 윤씨 집안에서 우마차로 실어나름. 누가? 공재 윤두서 집안. 공재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인데, 상당한 재력을 기반으로 많은 서적을 구하여 읽으면서 실학의 세계로 나아가신 분. 그의 초상화는 중등학교 미술 교과서에도 실려있으며, 지리에도 밝아 1715`1717년에 '동국여지도(보물 제481호)'를 그려내시기도 함. 이 지도에는 중요한 산이 붉은 점이나 검정색 점으로 표시되어 있고, 산과 산을 이어 표시하였는데, 대간이나 정맥 같은 개념을 쓰지는 않으셨지만. 매우 정밀한데다 '산경표'의 내용과도 대략 일치하며, 대마도를 지도 안에 포함시켜놓아 주목을 끌고 있음. 공재 윤두서의 손녀가 다산의 어머니이심. 즉, 외가에서 대량의 서적을 보내주심으로써 다산의 학문이 이루어짐. 게다가 집도 없이 떠돌던 다산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을 지어준 것도 외사촌인 윤단이라는 분이시니 다산의 학문에는 해남윤씨 집안의 뒷받침이 있었음.

  • 24.01.11 13:19

    3. 다산이 유배길에 오를 때 고향인 광주(현 양평군)에 두 아드님이 있었는데, 큰아들 정학연(당시 11세)은 천주교를 믿어 유배를 가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출세의 길이 막히자 10대 청소년기를 방황 속에 보냈고, 다산이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이렇다 할 흔적을 남기지 않음. 둘째아들 정학유(당시 7세)는 강진 다산초당을 찾아와 다산의 저술 활동을 돕기도 하고, 이후 말직이기는 하지만 지방현령을 지내기도 하면서 '농가월령가'를 남김. 다산의 학문은 이후 뚜렷한 계승자가 없음. 다산초당에 현판조차 없었으나 다산을 정신적으로 흠모하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 유배길에 쓰심.

    4. 다산초당이 초가에서 현재의 기와로 바뀐 것은 그분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서 한 일이 아님, 박정희 정권때 새마을운동의 일환. 2년마다 이엉을 엮어 올리며 관리하기가 귀찮아진 강진군에서 그리한 일임. 이후 다산초당에 관심이 높아지자 강진군에서는 초가로 복원하겠다는 약속을 하기는 했으나 현재까지 이루어지지는 않음. 다산이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샘을 파 얻은 물로 차를 달였는데, 그 흔적이 '정석'이라는 글씨로 남아있음.

  • 24.01.11 13:13

    방장님, 차가운 겨울에 해남에서 한양까지 걸어 올라가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발바닥 물집 때문이라고 하면서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딱딱하게 굳은 땅을 밟아 가시다니...

    그리고 같이 출발하신 두 분도 애쓰셨습니다. 그 기상은 가히 언 들판을 울릴 만합니다.
    새해에 건승하시길 빕니다.

  • 24.01.11 09:50

    고생하셨습니다
    이길을 도전하고 싶지만 걷고 싶은생각이 안드니 다행일까요?
    침대에 누어 글 읽는것도 힘든데 (눈깔이 시원찬아서) 긴거름 발바닥이 제일 고생이지요.
    수고하셨고 2부도 많이 궁금합니다

  • 24.01.11 10:19

    우리가 도전하는 모든길은 열정과 체력이 바탕이되어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방장님의 이번 삼남길 두분과 함께
    진행하면서 함께하는 즐거움을
    느끼시면서 추운 계절에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새로운 길을 진행하고나면 다음에 도전하는 회원이 있겠지요

  • 24.01.11 12:55

    해남에서 한양까지 천리길 1부 엄동설한에 대단하십니다
    2부 고대하겠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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