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유럽과 미국의 오토바이의 역사에 대해서 |
지금 우리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이 매력적인 2륜차가 태어나기 까지는 참으로 많은 선각자들의
노력이 있어 왔다. 유럽과 미국의 초창기 발명가들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점차 완성품이 되어온 오토바이의 성장과정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자. |
초기의 바이크는 동력원이 증기?
![]() 19세기 유럽과 미국 내에서는 증기 바이크를 만들고자 하는 여려가지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움직임을 쉽게 하기 위해 엔진과 증기시스템의 부피와 무게를 줄이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문제는 어떤 증기 시스템이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인가였다. 10내지 15마일마다 보일러 탱크에 물을 부어야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매번 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비축하는 물을 운반하는 것도 문제였다. 경량의 증기 차를 만드는데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은 아마도 그 유명한 디온 백작일 것이다. 그는 초기의 페트롤(벤젠) 엔진 차를 처음 접했을 때 거기에서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그후 계속되는 그의 성공은 증기와 함께 해왔다고 보면 된다. 증기는 내부 연소엔진인데 이 엔진은 상당한 기간동인 스스로 발전 정제되어갔다. 초기의 가스 엔진은 압축 스트로크가 아니었기에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I.T.N(아이티엔) 레오니어의 1860년의 성공적인 엔진은 절반의 스트로크에서 가스와 공기를 끌어들이고 나서 점화가 된 후 이어서 팽창된다. 그 엔진은 더블 액팅이었다. 배출은 피스톤의 양 사이드에서 이루어졌다. 유도, 압축, 팽창, 그리고 배출의 4스트로크 사이클은 1862년 프랑스 철도 기술자 알폰스 베아우 데 로체스가 제안하고 1876년 독일의 니콜라스 오토 (데우츠 가스 엔진 작업장)가 최초로 시도해서 특허를 받았다. |
최초의 모터 싸이클 아인스퍼
![]() 그리고 9년후 오토의 동료인 고티브 데임러와 파울 메이비치가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바퀴 두개의 4스트로크 엔진을 시험했다. 그들은 이를 '아인스퍼'라 불렀다. 종종 세게 최초의 모터사이클이라 불리는 '아인스퍼'는 그 명성이 엔진으로만 알려진 경향이 있는데 사실 '아인스퍼'는 상당히 잘 고안된 것이며 그 당시에 꽤 실용적인 차량이었다. 데임러의 엔진은 놀라우리만치 적응을 잘했다. 270cc는 가볍고, 캐스트 알미늄 크랭크 케이스 안에 둘러싸인 플라이휠, 냉각 팬이 부착된 주철 실린더와 실린더 헤드로 일체 완비된 엔진이었다. 인렛 밸브는 자동적으로 열렸고 반면에 배출 밸브는 플라이휠 중 한 개의 페이스 내 캠트랙으로 부터 작동되었다. 벤젠(페트롤)연료는 캬브레이터안의 벤젠표면위로 공기를 통과시키면서 증발되었다. 발명자는 전기 점화에 대해 반신반의 하면서 벤젠연료 버너에 의해 외부로부터 열을 받은 플래티늄의 핫튜브를 사용했다. 그 엔진은 800rpm이라는 그때당시의 엄청난 속력을 냈고 1/2마력을 발산했다. |
디온과 버튼의 싱글 실린더
엔진이 인기를 누렸다. ![]() 1885년 자동 엔진용으로 만들었던 유로페는 독일의 칼 벤츠와 영국의 에드워드 버틀러의 삼륜자동차(페트롤 엔진)와 같은 때에 출연했다. 이둘 중 버틀러의 삼륜자동차가 좀더 정교하게 개발되었다. 그러나 1896년에 이르러서야 철회되었던 억압적인 영국의 교통법규로 인해 상업적으로는 출하되지는 못했다. 버틀러의 엔진은 회전식 밸브와 일종의 초기 자석 발전기(실은 자석 발전기라기보다 정전기가 발생할 때의 에너지를 이용했다), 그리고 표면 증발이라기 보다 스프레이 캬브레이터로 맞취졌다. 데 디온,버튼회사의 알버트 데 디온백작과 그의 파트너 죠지 버튼도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초기 모터 싸이클에 대해 심도 깊은 활동을 했다. 1890년대 그들은 이륜보다는 페트롤(벤젠)의 삼륜 자동차에 집중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싱글 실린더 엔진은 이륜과 삼륜 둘다에게 적합했다. 1897년 디온과 버튼은 희망자 모두에게 이 엔진을 판매했다. 에에 따라 많은 실험가들이 엔진을 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중 베라네르 형제들이 복제한 엔진이 성공적인 인기를 누렸다. 결과적으로 데 디온엔진이 복제된 것이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들이 엔진을 제조하였다. 초창기 형태의 데 디온엔진은 보어 X 스트로크, 배기량이 70mm X 70mm 270cc였으나 곧 86mm X 86mm 500cc로 향상되었다. 이 데 디온의 뛰어난 시장공략으로 이것들이 1903년 영국의 새로 형성된 오토 사이클 클럽에서 선택된 것은 아주 의미있는 일이다. 이때 데 디온은 경쟁할 수 있는 표준 용량이 된 것이다. 그래서 후에 오늘날까지 500cc 모터레이스 GP경기가 있게 된 기틀이 되었다. |
배터리와 코일점화 시스템은
점차 자석발전기로 바꿔갔고... ![]() 이엔진은 전적으로 전통적인 공냉식이며 자동 인넷 밸브, 표면 캬브레이터, 그리고 배터리와 코일 점화방식이다.그러나 정확한 공학과 그 시대의 다른 모든 엔진들과 비교해 판단하는 벤치 마크속에 새로운 기준이 새워졌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곧이어 많은 경쟁자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 벨기에의 미네르바와 프랑스의 클레멘트가 가장 유명했다. 또한 발명가들은 기본적인 개념을 토대로 빠르게 향상해 나갔다. 1898년 초 영국에서 컨벤트리의 퍼시 릴레이(나중에 유명한 차 제작사가 된다)가 기계적으로 작동되는 인렛밸브를 만들었으며 또 오버랩 밸브 타이밍을 개발했다. 추진력에 이용되었던 스프레이 캬브레이터 중 최고는 1903년 영국 Amac이다.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았던 배터리와 코일점화 시스템은 점차적으로 마그네트(자석발전기)로 바뀌어갔고 이 스스템은 영국의 프레드릭 심스와 스튜가르트의 로버트 보쉬의 합작으로 완성되었다. 처음엔 저전압 시스템이었다가 1902년에 회전식 전기자(電機子)의 고전압 시스템으로 저환되었다. |
모토라도 - 1490cc 380rpm
그리고 2마력 초기 모터싸이클 개발은 실용적인 사람들 그전 엔지니어들보다 타고난 재능을 지닌 뛰어난 대장장이들의 직관력에서 벗어나자 아주 진보된 듯 보였다. 디자인이 상당히 진보화되긴 했지만 1894년 디자인된 힐데브란드와 울프멀러의 모터라드는 실패였다. 그러나 몇 년 후 코로넬 홀덴에 의해 디자인된 4실린더 모터 사이클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 두 바이크는 뒷축에 곧바로 크랭크 액셀을 연결시켜 작동이 되었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엔진스피드와 플라이 휠 효과를 제한했다. 사실 모토라드는 1490cc 못지 않은 용량과 약 380rpm에 2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대략 25mph 엔진의 스피드이다. 그러나 베르너 형제는 크기나 무게, 그리고 복잡함을 좀 거북스럽게 여겼다. |
디자인은 획기적이었지만 판매는
부진했던 500cc 싱글 실린더 SV엔진 ![]() 당시 다른 기술자들은 모터 사이클을 보고 나서 자신들이 좀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례로 1908년 제임스 사리클사의 TWB 배져리가 엔지니어 PL 레나우프에게 의뢰한 디자인은 그해 런던 모터 사이클쇼에서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차는 (Safty James)차선에 튜블러 샷시를 했고 센터 허브 스티어링, 스터브 엑셀 옆에 있는 쉽게 분리할 수 있는 바퀴, 그리고 안쪽이 확장된 앞, 뒤 브레이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차는 제임스 자신이 만든 500cc 싱글 실린더 SV엔진과 엔진 풀리 클러치를 단 밸트 드라이브 구동방식의 차였는데 이차는 터무니없이 경쟁에 밀려 허물어져 버렸다. 그래서 제임스 회사는 전통적인 디자인으로 차의 모양을 급선회했다. 2가지 모델로 만들었는데 680cc 공냉식 4사이클의 윌킨슨 TAC와 나중에 나온 850cc 수냉식 TMC 모델 또한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1910년부터 12년까지 이차들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화려한 설계를 제시했으나 판매는 이와 별개였다. |
스코트의 파격적인 디자인은
최초로 킥스타터를 장치한 것. 이들의 디자인은 진보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알프레드 스코트의 1909년 2스트로크 트윈은 스코트의 TT가 1912년, 1913년 성공을 거둔 후 시장성은 있었지만 그것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볼 때 궁금한 것은 스코트가 도대체 왜 팔렸나 하는 것이다. 시실 스코트는 그때까지만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2스트로크 엔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트윈이었고 부분적으로 (곧 이어 전체적으로) 수냉식이었기 때문이었다. 3분할 된 스트레이트 튜브 프레임, 그리고 새들 튜브를 가지고 있는 실린더 리컬 퓨엘 탱크가 1909년 일반적인 모터사이클에 비해 꽤 이상해 보였던 것은 틀림없다. |
라이더들은 클러치를 요구했다.
![]() 최초로 스타터를 달았던 스코트의 모양은 파격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엔진이 출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매력적인 두 개의 저기아로(사실 확장 클러치와 함께 중간축에 두 개의 스프로켓을 드라이빙한 두 개의 분리된 주요 체인으로 인해)그 기계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스코트는 킥스타트가 분리된 것 외엔 새로운게 없었다. 1904년부터 1909년사이 커다란 V트윈 삼륜차가 인기를 누렸던 때에 P & M 은 이러한 기어를 오랬동안 제공해왔다. 그코트가 그와 같은 모델을 만들었던 시기에 라이더들이 요구했던 것은 프리엔진이나 클러치였다. 1909년 리어허브에 멀티 플레이트 클러치를 장착했을 때 이는 트라이엄프사의 주요 판매포인트였다. 1907년에는 스프링 프론트 포크가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1903년 이래로 쿠아드란트가 그러한 프런트 포크를 생산해냈는데도 또다시 많은 독점적인 제품들이 나왔다. 그리고 렉스가 1906년 애래 이것들을 표준화 시켰다. |
지금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초기 오토바이 초기제품들은 현대인들의 눈에 위험하게 보일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또다시 1909년 스코트가 텔레스코픽 액션을 취했던 다른 차보다 휠씬 좋은 디자인을 선보였다. 1906년 처음 등장해 유명해진 코일 스프링(영국 바이크 시장에서 거의 표준화되었고 계속 수정되었다)에 의해 조절되는 평행레버 액션과 유명한 드루이드 프론트 포크가 30년이상 한 패션으로 정착되었다. 스프링 프레임은 초창기 발명가들에게 주된 관심거리였다. 뭐 특별한 장점은 없었지만. 그런데 신기하게도 뱃, 재네트 그리고 한참뒤에 나온 에드먼드 같이 확실히 성공을 한 제품들은 실제로 스프링 프레임이 아니고 스프링 서브 프레임이었다. 새들과 풋레스트는 도로에서 오는 충격을 받지 않게 되어있었다. |
밤에는 탈수 없는 오토바이![]() 라이트가 문제였다. 어떤 경우라도 밤에 모터싸이클을 타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리고 라이트가 부착된 모터사이클은 거의 팔리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라이트에 사이클 오일램프가 사용되었다가 곧 스터디어 버전이 반들어졌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아세틸렌 가스 라이트가 유용됐었고 곧 표준화 되었다. 물론 지저분했고 상당히 주의가 필요했겠지만 상대적으로 싸고 쓸 만했다. |
프론트 브레이크는 위험하다?
알프레드 스코트 같은 꼼꼼한 기술자조차도 브레이크는 프론트의 사이클 타입 스티어링보다 더 나은 것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드럼 안쪽의 슈베어링이 리어 체인 스프로켓 안에 있었다. 앞브레이크는 어느 경우에도 단지 몸을 피하는 것밖에 안되었다. 그것들이 페인트와 프론트 림 플래인딩을 손상시켰고 또한 프론트 프레미크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처음엔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잘못된 믿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1960년대 말 영국의 국제 여론조사에 따르면 모터사이클의 40%이상이 프론트 브레이크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또 다른 관심사는 기어를 바꾸는
것 ![]() 기어를 바꾸는 것이 그 시대 발명가들에게 유리한 분야였다. 조정할 수 있는 풀리는 초기에 개발된 것이고 일반적으로 독점적인 아이템으로 팔렸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 라이더들은 그래서 밸트를 2개씩 가지고 다녔다. --고비율을 주기 위해 죄여진 풀리 플랜지를 가지고 레벨에 사용했다. 울퉁불퉁한 언덕을 올라갈 때 플리 플랜지는 따로 죄여지고 고정된 밸트보다 약간 짧아진다. 한번은 유명한 제니스 그라두어와 러지 멀티시스템이 이 아이디어를 확장했었다. 이는 드라이빙 풀리를 기계적으로 통제했다.그리고 제니스의 경우 사실 자동적으로 확장되고 축소되었다. 모터 사이클의 휠베이스는 밸트를 팽팽하게 유지시켜 주었다.러지 멀티의 리어풀리 플렌지는 엔진풀리의 이것들과 함게 조화를 이루면서 안팎으로 이동하였다. 아주 단순한 두 개의 스피드 에피사이클릭 기어--명백히 NSU--가 초기에 나타났다. 그리고 나서 리어 퍼브쪽으로 옮겨졌다. 그러한 3개의 스피드 암스트롱 허브가 1911 주니어 TT 이후 강하게 나타났다. 주니어 TT는 최초로 아일랜드의 맨섬에 마운틴 서킷을 오픈했고 그해 시니어 경주에서 1,2,3위를 차지한 인디언들이 중간축 기어박스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운 인생적이었다. 그러한 기어박스의 발전은 급속히 이루어졌고 그 기어박스는 트라이엄프 회사의 걸작인 레이트 베테랑(1914년부터 1918년 사이의 전쟁기간 동안 쓰였던 550cc 모델 H)에 장착된후 수퍼브 스터메이 아처 기어박스와 클러치에 사용되는 등 광범위하게 쓰였다. |
사이드 밸브 엔진이 명성을
떨쳤다. 그긴간동은 사이드 밸브엔진은 절대적인 명성을 떨쳤다. OHV(오버 해드 벨브)형태가 레이싱용으로 가끔 등장했었지만 큰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전반적으로 밸브의 이론적인 장점은 실제보다 뚜렸했다. 밸브가 끊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OHV형태에 대한 불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레이싱 피스톤을 강철로 아주 정성을 들였다 하더라도 피스톤은 주철이 주종을 이뤘다. 볼과 롤러 베어링이 일상화되었으나 (특히 레이스에서) 형광체의 청동 부시가 여전히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들은 거의 오일을 크랭크 케이스 안으로 전달하는 단순한 수작용 펌프에 의존하고 있다. 1903년 설립된 중요한 두 개 회사인 JAP와 프리시즌은 영국이 관여하기 전까지는 엔진부분에서 우위를 점해왔다.그 후 두회사는 1910년까지 엔진을 제작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제품은 급속도로 명성을 얻었다. 볼보 햄프튼의 스티븐 형제가 350cc AJS모터사이클을 만들어내 그것이 정착하기 전에는 다양한 엔진이 만들어졌다. 반면에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달톤과 와이드. 블럼펠드 그리고 다른 여러 사람들이 이 시장에서 경쟁을 했었다. 제네바의 모토사코세에서 수입된 엔진인 MAG도 오랫동안 우위를 지켰었다. '롱 스트로크'엔진은 사람들 사이에 인식이 잘못되는 바람에 널리 사랑받지 못했다. 그 시대가 끝나갈 즘 작은 용량의 V트윈이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경쟁력도 있었다. |
완벽에 가깝게 재등장한 250cc 경량 --250cc-- 종류는 1914년 전까지는 거의 볼 수 없었다. 1900년에는 발붙일 곳을 찾느라 무던히도 애를 썼던 모터라이스트 바이시클이라는 연약한 기계가 더 튼튼해지고 강력한 모터사이클이 되어 나타났다. 이 기계는 당시 언론에 의해 "거의 완벽에 가깝다."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였는데 이런 칭찬은 비웃음을 불러 일으켰으나 14년 내지 15년을 돌아본다면 그 비웃음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것이다. 모터 사이클은 참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그리고 완벽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들도 심도 깊게 이루어지고 있다. |
바이크의 황금시대 |
근대사에 있어 전세계의 1920년~30년대는 가장 암울하고도 참혹한 시기(경제
대공황,전쟁)였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사에 가장 암울하고도 혹독했던 이시기가 화려하고도 찬란했던 시기로 바이크의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놀랄 것이다. 경제공황, 전쟁등이 낳은 좌절과 궁핍함으로부터 우린 어떻게 바이크의 르네상스시대를 열 수 있었는지 역사의 페이지를 더듬어 살펴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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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한꺼번에 열리기도...
![]() 사실 1919년 미국내 가장 우수한 모터사이클은 당시 유럽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미국에서는 이미 중간축 기어박스를 표준화시켰지만 유럽에서는 얇은 주전원의 허브기어가 대유행을 했었다. 또한 무국은 체인 드라이브로 바꿨지만 유럽은 여전히 밸트를 고수했다. 미국은 모터사이클 자체도 디자인이 우수했고 힘도 좋고 튼튼했다. 공장에서는 제품생산을 하는데 우수한 장비와 최신의 방법을 도입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제품은 해외로 수출이 됐고 여전히 경쟁적인 가격으로 팔렸던 것이다. 그들은 영국이나 유럽내 산업을 혼란시켜 관세장벽을 반으로 낮추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해왔고 의도한 대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가의 자동차,전쟁전 골칫거리들이 미국 모터 사이크 내수산업 자체를 위협했기 때문에 미국의 제조업자들은 이진 그들에게 필수적인 해외시장에 접근하는 것을 강력히 부인했다. 많은 업체들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Big 3社 (인디언,할리 데이비슨 그리고 엑셀지어)는 어쩔 수 없이 어느 해외시장이 사라지는가 아니면 경찰이나 군대, 공익사업, 그리고 스포츠맨들에게 어떻게 판매할 것인가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엑셀지어는 1931년 공항에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인디언과 할리만을 남겨놓고... ,결국 그 둘만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점점 쇠약해져가는 미국 모터사이클 산업을 살리기 위해 1930년대에 C급 아마추어 경주가 시작됐다. 이 경주는 750cc 사이드 밸브 엔진을 사용해야 하는 표준제품으로 규제되었었다. 이 경기는 로드레이싱, 엔드로 경주, TT레이싱, 플랫 레이싱과 스피드웨이를 총 망라한 좀 이상한 행사였다. TT레이싱은 진흙바닥에 비탈길을 좌우로 헤쳐가는 경기이고 플렛트윈은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반마일 정도 오르는 경기이며 스피드웨이 경주는 좀더 긴 트랙을 이용하며 가파른 뱅크각을 도는 것이다. C 클래스의 인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37년 이후 데이토나 해변(미국 플로리다에 위치)에서 개최되는 이 경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야 모터사이클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다소 규제적인 법령이나 다양한 기능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침체상태에 빠짐으로서 미국 모터사이클은 유렵식 디자인과 동떨어지기 시작했다. |
모터 스쿠터 인기절정
![]() 미국 무대의 또다른 사건이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났었는데 종종 사람들은 그것을 잊어 버린다. 바로 모터스쿠터이며 이 바이크는 전쟁기간중 급부상했다. 아메리칸 오토패트라는 이름의 스쿠터는 유명한 영국 의원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1919년초 데일리뉴스 신문에 기사화되면서 영국 매니아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이 신문사로 쏟아진 팬레터는 말 그대로 푸대자루 가득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오토패드를 가지고 있는 상가앞에 사람들 행렬이 넘쳐서 옥스퍼드 거리를 가득 메웠다고 할 정도니...뿐만 아니라 편집자들은 오토패드에 별 관심없었지만 모터사이클 잡지에 기사는 넘쳐났다. 매주 새로운 디자인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대부분 조야(組野)하고 비실용적인 것들이었다. 많은 소자본가들이 스쿠터를 제작했지만 생산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때를 전후로 매니아들의 흥분도 가라않기 시작했다. ABC 스쿠터모터, 케닐월쓰, 오토글리더 같은 종류가 겨우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니 30년후에 이탈리아나 독일의 스쿠터가 나타났을 때 영국 제조업자들이 주저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독일에서 스쿠터 열풍은 영국의 그것처럼 높지는 않았지만 좀더 꾸준히 진행되었다. DKW(댐프 크래프트 웨건)가 만든 스쿠터는 적어도 손해보지 않을 정도로 판매되었으니까. 덴마크에서 독일로 망명한 엔지니어 J .S .라스뮤젠은 켐니츠 근방의 쵸판에 광산에서 사용하는 증기차(광차)를 제작하기 위해 댐프 크래프트 웨건(DKW)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그러나 1919년 헤르만 웨버가 디자인한 간단한 2스트로크 엔진으로 작동되는 자전거, 스쿠터 그리고 초경량 모터사이클용 보조엔진을 제작하는 걸로 사업을 변경했다. 이 엔진은 독일에서 다른시장으로 광범위하게 팔렸다. 이회사는 1923년 악몽같은 인플레이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휴고루페가 디자인한 엔진과 특허를 받은 라데펌프 즉 크랭크케이스 아래 장착한 변속 피스톤을 가지고 175cc급(나중에 250cc급으로 바뀜)경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 엔진에 우리한 냉각방식은 수냉공법이 요구되었다. 그들은 로드레이싱과 언덕을 오르는 장거리경주에서 성공했고 독일에서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랜드프릭스 경기에서 영국의 4스트로크나 스플릿 싱글 2스트로크, 펌프 변속의 오스트리아 푸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1930년과 31년 경기에서 DKW는 푸치에 의해 패배했다. 그래서 DKW에서는 스플릿트 싱글 레이싱 엔진을 설계했던 아놀드 졸러를 기용했었는데 이 엔진은 점차적으로 발전해나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2스트로크 엔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DKW는 1934년, 35년, 그리고 38년에 250cc 유러피언 챔피언쉽을 손에 쥐게 된다. 또한 1939년에는 250cc와 350cc 두분야에서 우승을 하게 된다. 아마도 그들의 최상의 성과는 1938년 에발드 클러지가 경량급TT경기에서 80마력으로 우승을 한 것일 것이다. 물론 많은 의구심을 자아냈지만... |
이시대 가장 화려한 BMW
![]() 전쟁기간중 독일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1923년 프랑스 파리의 전시관에 첫선을 보인 BMW의 탄생이다. 원래 전쟁기간중 비행기 엔진제작회사였던 BMW는 플랫트윈 모터사이클 엔진을 만들기 전에 다양한 사업을 시도했었다. DKW처럼 BMW도 초기에 경주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압력을 높인 흡입공기를 내보내는 즉 슈퍼챠져를 채택했다. BMW의 언스트 헤른은 1930년대 가장 빠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38년 유러피언 챔피언쉽에서 BMW는 500cc우승을 했다. 그리고 39년에 열린 시니어 TT경주에서 조지 메이어와 조크 웨스트가 1, 2등을 차지했다. 혁신적이고 우수한 성능의 대형 바이크인 BMW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바이크답게 가격도 매우 비쌌다. BMW는 200cc와 400cc사이의 다소 저렴한 소형 싱글 실린더 모델(여전히 샤프트 드라이브를 사용)을 만들기도 했지만 BMW의 전형적인 배타적인 성격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독일이 전쟁기간중 영국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바쁜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많은 회사들이 엔진이나 기어박스 그리고 기타 부품에서 영국제를 선호했다. 이는 넓게 보자면 영국산업의 능률에 대한 찬사를 보내는 것이지만 또한 영국 모터사이클 산업이 계속되는 것에 대한 존중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JAP, 블랙번 스터메이 아처, 그리고 피쏜엔진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브래드쇼유 유냉식 엔진과 우수한자르와 스트라우드 슬리브 밸브처럼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수입부품에 의존하던 산업을 중단시키면서 영국은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됐다. 또한 독일 사업체들도 당황하면서 뒤처지게 됐다. |
100cc Velomoteure
![]() 독일이 모터사이클 사업으로 이윤을 얻자 프랑스는 1차세계대전 후 곧바로 환상적이고 진보적인 디자인을 출하했다. 항공기 메이커인 블레리어트와 엔진제조업자인 로네는 침체된 산업을 일으켜 세우는데 모터사이클의 대량샌산이 해결책이 되리라 생각했다. 블레리어트는 흥미있는 수직으로 놓는 엔진을 선보였고 로네는 자격증을 가지고 영국 ABC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열기는 내부 산업이 최신의 기술을 개발하면서 뒤따라가려 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매년 파리 전시회를 개최하는 걸로 위신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들이 판매했던 것은 세금이 없고 정식 라이센스(면허)가 없더라도 탈수 있는 100cc 벨로모춰였다. 프랑스에서는 스포츠 모터사이클 또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해서 독일처럼 모터사이클 산업이 유지되지 않았다. 프랑스 그랑프리도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뿐더러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거대한 경주장이 파리에서 20마일 떨어진 몬틀어리에 지어졌고 이곳에 기록을 갱신하기에 유리한 1.7마일의 뱅크각이 있었음에도 빚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아르파존에서 '스피드주간'에 4마일의 굽이치는 좁은 가로수 길에서 개최되는 경기는 유럽전역의 라이더들로부터 관심을 모았다. 반면에 1924년 파리근처 세인트 저메인의 숲에 자리한 공공서킷에서 열렸던 24시간 라이더를 교체하지 않고 달리는 Bol d' Or은 15년간 지속되었다. 이곳 첫 번째 승리자는 OHV썬빔의 500cc가 차지했다. |
뒤늦게 입성한 이탈리아
![]() 이탈리아는 모터사이클 업계에 좀 늦게 참여했다. 하지만 20녀대 그것을 만회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쏟았다. 베넬리와 비안치가 했던 것처럼 가렐리와 모토구찌가 합병을 해서 경기용 메이커로서 질레라 & 프레라로 바뀌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OHV, OHC엔진에 열정적으로 몰입하면서 가벼운 합금부품을 애용했다. 그러면서 곧 그들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자리잡아 갔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장거리 오픈 경기가 이탈리아의 명물이 되었다. 수퍼차져 로딘(이후 질레라)를가지고 이탈리아는 4실린더 레이싱머신으로 추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1939년 500cc 질레라의 도리노 세라피니의 유럽타이틀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시범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모토구찌는 1926년 처음으로 TT경주에 참여했고 스텐리 우드가 경량급과 시니어 레이스에서 우승하던 때인 35년 상을 받았다. 그리고 37년 모토구찌 오모보노 테니스가 라이트급 TT경기이래 최초로 외국인 라이더로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모터사이클이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유럽지역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들이 경주나 국제6일간의 트라이얼에서 쌓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왜 수출이 순조롭지 않았을까. 그이유는 아마도 이탈리아의 뛰어난 제품들의 다수가 250cc나 그이하 제품인데 독일의 경우 소형엔진에 대한 세금이 높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혁명보다 전진하는 것이 좋다.
![]() 분명한 것은 전쟁기간중 유럽 모터사이클을 지배한 것은 영국이었다. 그것은 영국의 해외시장(특히 오스트레일리아)으로 수출해 재미를 크게 보았기 때문이다. 다양한 기술과 영국중부지방에서의 경험, 모터사이클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장비 제조업자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 그리고 압력을 가하는 것도 책임감있게 전문적으로 행해졌다. 이렇듯 각 분야가 맞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해냈기 때문에 영국 모터사이클 산업이 유럽을 지배할 수 있었으리라. 영국 디자인은 다소 보수적이기는 했지만 획기적인 혁명보다는 조금씩 진전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디자이너들은 전후 ABC의 실패담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이 경이로운 모터사이클 ABC에 대해 설명하자면 400cc OHV플랫트윈엔진이 프레임을 가로질러 놓여있고 헨들 레버에 의해 변속되는 단일 카(car)타입 기어박스, 앞뒤 셀프 덤핑겹판 스프링의 서스펜션, 내부확장 브레이크, 독창적인 프레임 디자인 발전기로 작동되는 라이트,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등 모든 라이더들의 구매욕구를 자극했던 것으로 한마디로 시대를 앞서간 물건이다. 그랜드빌 브래드쇼우가 디자인한 ABC는 1919년 첫작품이 선보였다. 항공기 엔진회사인 솝위드가 만든 ABC는 처음에는 매년10,000대를 타겟으로 삼았다. 그러나 재기 넘치는 총체적인 컷셉과 솝위드의 자산에도 불구하고 ABC는 실패하고 만다. 이제품이 생산되기까지 15달이 걸린 것이다. 솝위드는 2,500대까지 생산하고 포기하고 만다. 실망한 영국사람들은 그다음으로 좋은 제품으로 발길을 돌린다. 비록 ABC만큼 시대를 앞서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회사의 요구와 명성을 유지시키는 바이크였으니까. 썬빔, 노턴, AJS, Scott, BSA 그리고 트라이엄프 같은 후속모델들은 광범위하게 팔렸다. 영국 바이크는 매년 TT경주에서 우승을 했고 유럽 그랜드 프릭스 경주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바이크의 시장 지배는 계속 확장되어 급기야 스포츠를 넘어 다른 분야로까지 넘어갔다. 270cc 빌리어스 2 스트로크 엔진이나 JAP, 블랙번이 만든 소형 사이드 밸브 엔진을 이용하는 회사들이 부지기수였다. 독일의 경우 직접제품을 만든 회사는 거의 없다. 대부분 부품을 수입해 조립하는 형태였다. 이 방법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 특히 소규모업체의 경우 제품을 저가에 판매할 수 없었다. 대다수 소규모 회사나 몇몇 대기업이 자금난에 빠져 있었고 1930년 공황에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은 오히려 꽃을 피웠다. 예를 들어 뉴 임페리얼은 20년대 중반에 직접 엔진을 만들었고 30년대에는 단일엔진과 기어박스를 조합시켰고 캔털리버 스프링 프레임을 직접 만들어 선보였다. 빈센트 HDR은 그전에 엑셀지어가 유명한 맨엑스맨 OHC 엔진을 가지고 그랬던 것처럼 엔진 메이커가 되었다. 이때는 블랙번이 모터사이클 엔진제작을 중단하던 때이다. |
모터사이클의 롤스로이스화?
![]() 조립공의 왕은 조지 브라우였는데 그 분야에서 어느 누구 못지 않았다. 그는 노팅검에 위치한 작은 공장에서 근무했는데 그의 브라우 슈페리어를 모터사이클의 롤스 로이스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브라우는 항상 최고를 지향했으며 그가 직접 테스트하고 트라이얼이나 스피드 경주에 참가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
새로움을 찾아 발전해간 바이크산업 |
오랜 기간 동안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휠씬 더 많은 노력들을 쏟아부어진 것이다. 오토바이 산업역사에서도 이 법칙은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오토바이 산업이 발전해오기까지 수많은 개인들의 업적이 그 밑에 깔려 있다. 몇몇이야 그 이름이 기억되고 있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전설적인 신화를 남긴 이들은 얼마되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시대 어느 나라에 살았던지 간에 급변하는 주위환경의 변화에 부딪히며 남 모르게 싸워가야만 했다. 기술의 진보 원자재의 질적 향상 새로운 발명 이모든 것들은 국경을 넘나들었다. 각국 시장의 흥망성쇄 역시 한나라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 파급효과는 전세계에 미쳤다. 원자재(가솔린을 포함하여)가격변동은 특히 중요사항이었다. 수출수입관세는 신문지상의 단 몇 글자로 인해 바뀌기도 했다. 산업쟁의와 파업 역시 바이크 산업역사에 중요부분을 차지했다. 이러한 것들과 모터사이클 관련한 공장이 90여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천여개에 달했다는 것은 바이크 산업부분에 많은 변동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기대를 넘는 바이크의 발전
![]() 초창기에 모터사이클에서개선된 것들은 스프레이 캬뷰레이터와 고압의 마그네토점화인데 이두가지 모두 사람들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스로틀과 점화조절장치는 연료탱크 윗부분에서 핸들바 쪽으로 옮겨갔고, 보우덴 케이블이 사용되었다. 자동 인넷밸브는 기계적인 작동으로 바뀌어졌다. 1907년까지해서 스프링 프론트 포크가 일반화되어갔다. 엔진은 거의 사이드밸브를 사용한 500cc였고 사이드카를 장착한 바이크는 1000cc의 대형 V형 2기통 엔진이 애용되었다. 아주 초창기에 보여진 것은 1904년 P&M 社의 리차드 모레가 디자인한 2단 변속기였다. 그 다음에 나온 엔진은 상당히 유연했고 V벨트의 1단으로고정되었는데 이는 꽤 오랜기간 지속되었다 밸브는 가볍고 가격도 저렴했을 뿐만 아니라 값비싼 쑉 업소버 없이도 아주 부드러웠다. 비오는 날 주행에도 벨트는 쉽게 젖지 않았고 길에서 튀긴 진흙이나 모래가 잘 묻어나지도 않았다. 초기부터 특허품인 다양한 프리엔진 클러치와 여러 가지 비율의 풀리가 선보였다. 즉 독창적인 제니쓰 그라두어와 러지 멀티 시스템의 수없이 다양한 드라이브가 1차세계대전 전후의 벨트 드라이브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이다. 브레이크의 경우는 초기엔 좀 조잡했던 것이 사실이다. 우선 표면적인 것으로 브레이크가 단순한 원형태의 등자로 되어있었는데 아무도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오토바이 프론트휠에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뒷바퀴는 벨트 드라이브 림에 슈를 박아놓았다. |
화난 영국인들, TT레이스
탄생 앞서 얘기한 것들이 1907년영국이나 유럽지역의 전반적인 오토바이 상황이다. 그 당시 영국은 1914년 부르크랜드에서 2.3/4마일 뱅크트랙을 개최했다. 이때까지 영국의 바이크 산업은 유럽지역에서 선두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후로도 이 뱅크트랙은 1939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 문을 닫기 전까지 30년간 긴요한 역할을 했다. 더욱 이슈가 되었던 것은 만섬에서 열린 투어리스트 트로피 경주였다. 유럽에서의 경주는 1903년 파리-마드리드 경주이후 묶여있었던 로드경기가 오픈되기는 했으나 제길을 찾지 못했다. 유럽인들의 주요경기인 국제 컵은 제대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겨우 각국에서 3명의 선수만 출전한 제대로 풀리지 못한 연극같았다. 국제컵(CUP)의 규정은 실제적인 모터사이클 발전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이유는 엔진 크기를 제한하지 않음으로 연료의 제한이 없었고 동시에 전체중량은 110파운드아래로 되어야만 했다. 이속에서 속임수도 자행됐다. 1906년 이러한 것들로 인해 화가난 영국라이더들은 영국 오토사이클 클럽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TT 레이스이다. 오토사이클 협회(Auto Cycle Union - 일명 ACU)는 매년 규정들을 만들어 갔다. 14마일이 좀 넘는 세인트 존 코승에서의 첫경기로 시작된 이 경주는 해가 갈수록 속도와 신뢰성을 제대로 테스트해 갔다. 우승자의 마력은 1907년 38마력에서 1910년에는 50마력으로 향상되었다. ACU는 37.1/2마일의 마운틴 서킷을 만들었고 1920년 이를 살짝 늘려 37.3/4마일로 변경을 했다.이서킷을 오늘날에도사용되고 있다 우럽지역 제조업체들은 초반부터 참여했고 TT의 명성이높아감에 따라 미국 Indian도 모든 경기에 참여해 시니어 경주에서 1-2-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는 영국의 자존심을건드렸지만 Indian의 여세는 그뒤로 24년간이나 계속되었다 |
조립 오토바이 산업의 성시
![]() 1914년에 발발한 전쟁은 독일에서 공급되던 것이 고갈됨에 따라 마그네토제작이 발전할 수밖에 없게된 점도 있었지만 모터사이클 산업이나 디자인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일차대전후 다소 급진적이고 현저히 다른 디자인인 수평대향적인 트윈 ABC가 많은 관심을 모았으나 너무 성급했던 디자인과 그의 스폰서인 솝위드(전쟁시 항공기 제작사)의 어리석음으로 ABC는 곧 없어지고 만다. Indian이 처음으로 사용했던 중간축 기어박스와 체인드라이브(Indian은 이를 장착한 바이크로 TT경기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1920년대 초에 주의를 끌기 시작했고 기어박스 제작자는 유명해지기도 했다. 특허를 받은 엔진은 제작자들이 서로 싸우면서 답보상태에 머물렀는데 이때 유냉방식의 브래드쑈와 독특한 슬리브 밸브를 사용한 베르와 스트라우드 등 몇몇의 업체와 함께 살아남은 JAP와 블랙번이 사라졌다. 그리고 조립 오토바이가 성시를 이루었는데 그들은 자체에서 제품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엔진, 프레임, 기어박스, 휠, 탱크, 새들 그리고 기타부품들을 잘나가는 회사에서 구입해서 조립을 했다. 웰버햄프톤의 빌리어즈는 전세계에 2스트로크 엔진 공급자가 되었다. 그는 부품을 영국제로 하정하지 않고 각국에서 수입했다. 독일의 경우는 1930년 영국산업으로부터 독립해서 엔진,기어박스, 그리고 다른 부품들을 구입했는데 나중에는 완제품으로 수출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양을 수입하는 꼴이 되었다. 이탈리아도 대표적인 조립국이었는데 이는 뒤늦게 오토바이 산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썬빔,노턴, AJS를 비롯한 영국의 여러 기업들은 이미 이탈리아에 부품을 판매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는데 한가지 더하자면 프랑스의 국내사업은 손쉬운 선택을 했다. 당시 자전거와 가격은 크게 다르지도 않고 도로세나 자격증 그리고 보험이 필요없는 100cc벨로모춰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
전시에도 식지 않는 열기 ![]() 전쟁이 진행중이던 때에도 세계에서는 많은바이크들이 제작되었다. 독일의 BMW와 DKW, 밸기에의FN, 그리고 스위스의Motosacoche, 아탈리아의 질레라와 모토구찌 등인데 이들 모두 우수한 제품들이었다.그러나 전시에 세계 오토바이를 이끌었던 것은 영국이었다. 미국의 경우 크고 무거운 대용량의 바이크에 중점을 두었는데 Indian과 하레이 데이비슨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에따라 미국시장의 오토바이는 점차 커지고 무거워졌으며 당연히 다른 시장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2차대전후 긴축정책과 가솔린의 배급으로 영국은 125cc 197cc 2스트로크를 구입했으나 내수 소비가 어려워 다시 수출을 해야만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영국산업은 스테그네이션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국이 잘나가던 때에는 심지어 보잘 것 없던 작은 2스트로크도 팔려 나갔었는데 이후 10여년간 대영제국의 시장을 비롯한 거대국가들의 시장대부분이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무역장벽의 뒤로 축소되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자국시장은 위축되어 국내 전반적인 산업을 지지할 기반이 될 수 없었고 중고차가 출퇴근용으로 더 애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니 바이크인 오스틴 모리스의 등장으로 일반 모터사이클이 별 빛을 보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해외시장으로 남아 있던 곳은 미국뿐이었다. 한편 미국인들 눈에는 영국산업이 자국의 시장을 제압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라로 보였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들여온 50cc모펫(모터 달린 자전거)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BSA는 교묘하게 일을 꾸미긴 했지만 흠을 남기고 말았다. DBS 데니의 75cc 베글과 50cc 아리엘픽시가 거의 생산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자국에서 보호를 받는 일본제품(특히 혼다)이 국내제조업자들이 좀처럼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수준까지 영국시장을 뚫을 수 있었다. |
세계시장 잠식하는 일본
![]() 혼다가 1969년 4실린더 750cc CB750을 미국에 내놓았을 때 이는 영국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높은 세율과 매우 좋지 않은 노사관계의 시대에 BSA회사는 350cc 퓨리와 트라이엄프 밴딧 트윈스를 가지고 심각한 실책을 범하고 만다. 1972년 시장을 완전히 잃어 버린 것이다. 일본이 바로 그 자리를 차고 들어왔다. 영국산업에 정통했던 故 에르윈 트라게취가 처음으로 이 터무늬없는 사건을 접했을 때 그는 "영국산업의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 이라고 했다. 그는 경영을 제대로 못한 회사를 탓했다. 또한 엉터리 정부도 비난했다. 사업에 대한 경험이 전혀없는 이들이 종종 간과했던 점이다. 영국 모터사이클이 건진 것은 하나도 없을까? 영국정부측에서는 지지하지 않은 보호무역정책을 제외하고 아마 국내시장이 위축된 점에서 바라봤을땐 건진 것이하나도 없다. 독일의 자만과확싲도 1950년대 후반에 가서는 무너졌다. 과도한 생산과 국내 경제의 풍요, 저렴한 차의 등장, 그리고 수출의 실패가 그 원인이다. 이탈리아 산업도 그와 같은 시기에 급격히 쇠약해졌다. 노사문제도 그랬고 비록 보호무역주의를 채택했음에도 1990년대 진입할 즈음 자국내 남은 것은 보잘 것 없었다. 25년간 스페인이 미국에 엄청난 양의 수출을 하는 등 산업이 번창했던 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졌다. 프랑코 정권하에서 계속적으로 자급자족을 밀고 나갔고 저임금의 노동력이 25년간 수출에 한 몫을 했지만 스페인이 유럽공산주의에 합류되면서 모터사이클 산업은 약화되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적으로 힘있고 효과적인 산업의 산물로 그리 많지 않은 모터사이클이 판매됨에 반해 일본의 경우 수요를 완전히 충족시켰다. 사실 일본산업은 너무 과도한 생산에 힘들어 했다. |
클래식 바이크 인기
![]() 영국과 기타 다른 나라에서 일종의 예약산업을 확립시키고자 하는 시도, 즉 소비자가 원하는 디자인의 값비싼 수공제품을 판매하고자 했던 것은 난관에 부딪힌다. 성공사례가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야심에 찬 모험을 했던 헤스케쓰도 실패했다. 로터리 엔진을 장착한 노턴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았고 시기상조였다. 그러나 이 회사는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왔다. 트라이엄프를 재연하기 위한 죤블러어의 시도는 용감했지만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직 이렇다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어쨌든 1990년대 영국에서 계속적인 입법은 모터사이클 산업을 더 힘들게 했다. 91년이 끝나 갈 즈음 가혹하리만큼 인상된 보험료는 모터사이클 산업을 더욱 하락시켰다. 이에 대한 놀랄 만한 대조는 고전적인 움직임에 대한 영국과 유럽의 관심이었다.이는 1970년대 후반에 클래식바이크라는 잡지의 발간으로 시작되어 계속된 것이다. 오토바이 산업의 역사를 쭈욱 살펴보면 이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꾸준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도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월 속에 오토바이의 역사가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어디서 새로운 것이 불쑥 튀어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
첫댓글 지금은 시간이 없고.. 시간날때 다 읽어봐야것다..
공부방으로 옮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