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고난
정성구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 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장 6절-14절)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오늘 여러분과 함께 본문 가운데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라는 사도 바울의 교사로서의 자기고백에 대한 말씀을 중점적으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말씀을 보면 "이 복음을 위하여"라고 했는데 이 복음을 위하여서는 어떻게하는 것입니까? 이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말로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야 된다는 자각입니다. 그러니까 복사지 선교사는 교사든지 혹은 사도가 되든지 간에 그 복음을 증거한다는 입장에서는 같습니다. 물론 직임은 각각 다르지만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은 항상 고난과 헌신이 뒤따른다는 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지식이 있거나 사전에 공과 공부를 해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복음에는 고난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수적으로 따른다는 얘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내가 교사가 된 것은 바로 복음 때문에 교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생각이 좀 다르죠. 당회장이 임명해서 교사가 되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신 분은 이 시간 여러분들의 시각을 고쳐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이 바뀔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회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목사님이 임명해서 교사가 되었다.”
“친구가 나를 추천해서 교사가 되었다.”
“뭔가 보람있는 생활을 하려면 주일학교 교사를 하는 것이 좋아서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먼저 그런 시각부터 고쳐야 합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내가 복음 때문에 교사가 되었다”고 한 고백의 내용과 같은 자각과 확신이 여러분들에게 있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자기의 아들처럼 귀히 여기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옥중에서 쓴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가 너무 젊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하는데 실수하지 않을까? 또는 복음을 증거하는데 시련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여러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옥중에 갇혀 있지만 부모의 심정으로 이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디모데는 아직도 경험이 부족하고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이런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편지를 써 보내면서 먼저 몇 가지 칭찬을 합니다. 그 칭찬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디모데는 참 좋은 신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조상적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신앙을 갖게 된 것을 잘 살려서 주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일해야 될 것을 깨우쳐 줍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부모의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사장해두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마치 타는 장작에다 기름을 붓는 것처럼 그것을 활활 태워야 된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하므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라"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장년처럼 되었다. 그것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내 신앙은 그저 이정도면 된다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뜨겁게 태울 수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태우지 않으면 빛을 낼 수도 없고 힘이 없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걱정하는 것은 디모데가 조상적부터 할머니와 어머니의 신앙에 그치지 말고 그것을 뜨겁게 활활 불태워서 타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었던 그 신앙을 잘 살려서 신앙의 정통성을 바로 지키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받은 은사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을 사랑해 두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에 나의 삶 전체를 뽑아 바치고 헌신해야 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냥 고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더불어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복음과 고난 사이에는 특수한 관계가 있습니다. 복음 운동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고난이 따르고 이 고난은 그저 보통 고난이 아니라 반드시 복음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고난인 것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의 흐름을 잘보면 10절까지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서 권고하는 말이지만 11절에 와서는 갑자기 문장이 바뀝니다.
곧 3절에서부터 10절까지는 “너”라는 2인칭 단수(You)를 쓰다가 갑자기 11절부터는 "나"라는 1인칭 단수(I)로 바뀌어 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죽 권고를 하다가 자기의 간증이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나는 적어도 복음에 대한 이러한 뜨거운 확신이 있었으며, 나는 이렇게 소명을 받았으며, 나는 이렇게 일한다."는 체험적인 가르침을 디모데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본문 가운데 몇가지 진리를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는 자각을 하면서 자기는 복음 때문에 교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로만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사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복음을 가르치는 자의 책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면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말씀에 언더라인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교사가 되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복음을 위하여 교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어린이를 위해서”
이런 말이 좋은 말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말은 아닙니다. 내가 교사가 된 것은 어린이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어린이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일학교 교사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복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좀 풀어서 설명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진리 때문에 내가 교사가 되었다.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복음은 약해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 두나미스입니다. 하나님의 폭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은 폭탄을 쥐고 다니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질그릇 같고 별 모양도 없는 빈껍데기입니다. 주를 위해 산다고 하지만 넘어지고 또 자빠지는 형편없는 사람들이지만 우리 속에 이 복음의 능력이 있는 줄 믿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아주 귀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로마로 갔을 때 로마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참 우습게 봤습니다. 작은 키에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이 로마로 들어왔을 때 로마제국은 사도 바울을 환영하는 사람도 없었고, 우습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우습게 여겨졌던 사도 바울이 지닌 복음이 로마를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어린 생명들에 이 복음 운동을 전하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운동입니다. 그저 어린이 운동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니까 어린이를 잘 키워서 좋은 세상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사람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교육의 대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교육은 선택과목이 아닙니다. 주일학교 운동은 선택과목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에 속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사가 된 것은 복음이 나로 하여금 교사가 되게 해야 그 교사가 참된 교사인 줄 믿습니다. 복음이 내 어리를 벌어서, 복음이 나로 하여금 이것을 안하면 못배길 정도로 뜨거운 가슴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복음에 빚진자라고 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없는 자나 내가 빚진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복음운동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은 우리가 이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학교를 성장 시킬려면 주일학교 교육부터 철저히 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은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는 언제든지 진리 중심의 이야기를 해야지 편의 중심으로 하면 안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없는 자나 내가 빚진 자라. 복음에 빚진 자라. 그 복음에 빚을졌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여 주신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고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서 부족하지만 어린 생명을 위해 주님을 위해 몸바쳐 일해야 하겠다는 그런 각오와 결심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교회 성장에는 주일학교 교육만이 능사가 아니예요. 너무 편리주의로 하니까 복음운동이 아니라 어떤 이상한 운동이 되어 버립니다. 요즘 교회교육이 너무 지나치게 별스러운 것이 개발이 되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킵니다. 집회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연예인들을 초청하는 그런 식으로 합니다. 이런 것이 모두 세속화의 과정입니다. 몸이 병들면 진통제를 자꾸 줍니다. 처음에는 효과적이지만 나중에는 회복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나의 생명을 다하여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에 나는 부족하지만 일생동안 진실하게 헌신하겠다는 각오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성경을 잘 보면 교사로서 대가(代價)가 있습니다. 교사로서 무슨 대가가 있느냐? 있다면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대가가 무엇이냐? 그 대가는 씁쓸한 것입니다. 고난이 기다릴 뿐입니다. 복음과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있을 뿐이요. 복음과 함께 고난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참된 의미의 교사입니다.
목사님의 칭찬을 기대하십니까?
당회원들의 칭찬을 기대하십니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세상의 교사는 학부형들이 찾아와서 수고한다 격려도 합니다만, 주일학교 교육은 10년, 20년 해도 누가 따뜻하게 와서 손 한번 잡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복음운동은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괴로움도 당합니다. 복음운동을 하면서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세속주의입니다. 복음운동을 하면서 사람이 영광을 받는 운동을 자꾸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복음운동을 하면서 사람이 영광을 받는 것은 복음운동이 아닙니다. 복음운동은 고생하는 일이요, 손해보는 일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운동은 손해보기 운동입니다. 참된 진리를 위해서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물질의 손해도 봅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도 받습니다. 복음운동이 너무나 크고 좋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른 모든 것을 분토처럼 다 버렸다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좋은 보화를 가지게 되니까 지금까지 아끼던 그 모든 것을 다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되는 이유를 디모데에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믿고 의지하는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내가 알고 그 분이 나를 알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현재의 고난, 시린, 아픔 등과 같은 것을 무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낙심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 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님이 한번 알아주시는 것으로 만족할 때에 거기서부터 신앙의 재미를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재미입니다.
아무도 몰라줘도 내가 하는 이 일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분명한 자각 곧 복음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는 그런 자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떠한 처지에서라도 굳하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교사가 된 것은 복음 때문에 되었다는 이런 확신이 있어야 일을 할 수가 있지 복음 때문에 일한다는 확신도 없어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그냥 뭐 잘 모르면서도 그냥 공과책 한두 번 읽고 그냥 자기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런 뜨거운 확신이 있을 때 교사로써의 사명을 능히 감당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다음에 사도 바울이 간증하는 내용 가운데 "또한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야! 참 대단합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고하니 지금 일이 잘 안되도 궁극적으로 우리 주님이 계시므로 결국은 마지막 날에는 저가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 내용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낙심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야! 이것 봐라 우리가 도대체 이런 방법으로 해가지고 되겠느냐? 암만해도 부흥이 되지는 않고 도대체 어떻게 되는건가? 낙심합니다. 또 일년내내 일하지만 열매가 없는거예요.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뭐 당장 효과가 번쩍번쩍 나타나야 되는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요. 우리는 일을 할 때 계획을 먼저 세워놓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만들어 놓은 스케줄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기를 지금 기다리고 있는데 이때 우리는 늘 낙심하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우리들의 방법이 그렇죠. 우리가 만든 그런 스케줄 속에 주님이 늘 일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고백한 내용은 뭡니까? 우리가 주님의 계획에 따르겠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요.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저가 그날까지 지키실줄을 확신함이라. 우리가 보기에는 잘 안되는것 같아도 결국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가 뿌린 그 복음의 씨앗이 싹이 나고 잎이 달리고 열매가 맺게 될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1년, 2년 후에 열매를 따려고 그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나무는 말이죠. 어떤 식물은요 몇 달만에 꽃이 피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10년만에 꽃피고 열매 맺는 것도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수 있는 우리들 되야 할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저가 마지막 날에 반드시 이루어 주실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