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
서로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에베소서 6:5-9
우리는 지난 주일 아침에 부모들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자녀를 육적으로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양육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자녀 양육은 부모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정의 질서를 세워주실 때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통치를 받아서 장성해 가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자식은 혼인(婚姻)하여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서 부모에게서 독립할 때까지 부모의 다스림을 잘 받아서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재정적으로 장성해 가야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具現)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영적, 인격적, 정서적, 육체적으로 장성해 가려고 하면, 부모를 존경해야 하고 부모의 다스림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격적으로 대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도리에 대해서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는 에베소서 5:21과 관련하여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도 바울이 살았던 당시처럼 주인과 종이라는 사회적 신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의 주인과 종의 관계를 오늘날에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종의 의무
주인에 대한 종의 의무에 관해서는 오늘 본문 5-8절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종은 고대 사회에 있었던 노예를 말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인권이 신장(伸張)된 시대에는 노예 제도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1세기 로마에서는 노예 제도가 합법화된 사회였습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6천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단히 많은 노예가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노예가 없다면 로마 제국이 존립할 수 없었고 문화를 창달할 수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종, 즉 노예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인격체이지만 신분상 인격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로마 시대의 노예들은 주인의 소유이고 동산(動産)이었으며 집안의 가구나 농기구와 같이 취급되는 존재여서 사고팔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로마 시대에는 의사나 교사나 관리와 같은 교육을 받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명과 삶이 주인에게 속한 자로서 노예는 자기의 의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노예는 주인의 자산(資産)이므로 물려 줄 수도 있었고, 자산으로 사들일 수도 있었고, 채무를 갚는데 양도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이 노예 주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인들은 노예들을 혹사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기도 하였고, 무섭고 극단적인 야만성을 가지고 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대 사회는 노예들의 노동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 제도는 사회의 여러 제도 가운데 하나였고, 당시 사회에서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예 제도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는 올바른 제도가 아니었지만,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인간의 마음이 죄로 어두워진 세상에서는 엄연히 존재하는 제도였고, 당시 사회를 유지하는 긴요한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노예 제도가 급격하게 혹은 한순간에 무너진다면 당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교회 역시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도 노예 제도는 있었고,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노예 제도는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예 제도가 잘못인 것을 아셨지만 노예 해방에 대해서 말씀하시거나 해방 운동을 주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노예 제도의 잘못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노예 해방에 대해서 말하거나 해방 운동을 주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마음,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제도이고, 그 당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또 바치고 있는 제도였고, 국가가 유지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제도하나 고친다고 인간 사회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노예 해방 운동을 주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이 들어가서 타락한 인간의 근본 마음을 변혁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하므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은 분명히 인간 위에 인간이 없고, 인격이 인격을 지배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은 서로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신이므로 분명히 노예 제도를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급격한 사회적 변혁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무너지고, 국가 역시 혼란에 빠지고 무너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서서히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어서 모든 사람이 자유를 얻고 평등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노예 제도는 분명히 타락한 인간의 부패한 마음에서 나온 제도로서 하나님 나라의 정신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시의 사회 질서가 유지되도록 그 악을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가 더 성숙하고 국가 구성원들의 인격이 더 성숙한 시대가 되었을 때 노예 제도가 철폐되게 하셨습니다. 그것 역시 타락한 인간의 마음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복음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져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배워서 비인간적인 노예 제도가 철폐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동안 사회악을 허용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노예 제도 폐지 운동은 18세기 후반에 영국의 기독교 단체에서 일어났습니다. 대부분 부유한 복음주의자(감리교)로서 익명으로 재산을 바쳐가며 사회변혁을 이끌었던 ‘클래펌 공동체’(Clapham Sect) 출신이며, 스물하나(1780)에 영국 하원의원에 당선된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윌버포스는 노예 해방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노예매매를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노예매매 반대 운동은 노예 해방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노예무역은 막대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으로서 영국의 유력한 인물들이 노예무역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윌버포스는 처음부터 상당한 반대에 봉착했습니다. 윌버포스는 노예매매 폐지안을 열한 차례나 의회에 제출했지만 번번이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윌버포스가 노예무역 폐지를 주장한 지 약 18년이 지난 1807년 2월 23일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이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이었으며, 미국보다 더 앞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1862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 해방 예비 선언”을 발표하였고, 1863년 1월 1일부터 남부 연합 반란 주(州)의 노예들이 모두 자유라고 선언함으로 노예들이 해방되었습니다.
1세기에 활동하였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노예 제도를 철폐함으로써 사회 구조가 급격히 변화되어 사회와 국가가 혼란이 빠지고 무너지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노예 제도가 존재하는 악한 사회 구조와 노예라는 신분 제도는 그대로 두고, 이 문제를 복음(福音) 안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서 5:21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고 하는 말씀의 빛 아래에서 주인과 종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에베소서를 살펴본 바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가정의 질서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가정의 질서에 대해서 말하고 이어서 주인과 종의 관계라는 질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노예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노예들이 있었고, 주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노예들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하나인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신실한 성도인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빌레몬은 자기 집을 교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줄 정도로 신실한 신자였습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이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서 달아나 큰 손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오네시모는 사도 바울을 만났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어서 사도 바울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에게 이제부터는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내용이 바로 빌레몬서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결정은 빌레몬이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 당시에는 노예의 주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노예만 믿는 일이 있었고, 노예의 주인과 노예가 함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있었습니다. 집에서는 종과 주인이지만, 교회로 모였을 때는 종도 주인과 한자리에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성찬에 참여하고, 성도로서 대등하게 서로 교제하였습니다.
여러분, 주인과 종이 교회로 모여서 한자리에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성찬에 참여하고, 함께 성도의 교제를 나누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주종의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때 종들이 주인과 함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주인에게 잘 순종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주인을 가볍게 여기고 주인의 명령대로 일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5절에서 믿는 그리스도인들 노예들에게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1-2에서도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노예 제도는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난 제도이므로 노예 제도를 폐지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지향하는 세계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성도가 새로운 질서에 의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있는 높고 낮음이라는 신분상 계급과 같은 것들과 피로 맺은 부모 자녀와 형제자매 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가 없어지고, 새로운 거대한 우주적 통일된 질서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 지향하는 세계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의 생활이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아버지 슬하에서 한 가족을 이루는 거대한 우주적 통일된 질서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녀를 출산하여 이루어지는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노예 제도는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나 에이브러햄 링컨에 의해 철폐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악함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엄연히 존재하는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종들은 비록 노예 제도가 비성경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런 사회악을 철폐하여 주시지 않은 이상 그 질서에 순응하여 주인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마치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발 앞에 모든 만물이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해야 하듯이 종들은 육체의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은 주인을 두려워하고 떨면서 섬겨야 합니다. 즉 종들은 겸손해야 하며 주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애정을 가지고 주인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자기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듯이 종들도 자기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노예들은 겸손해야 하고 주인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순종한다는 것은 자기 위에 감히 범할 수 없는 아주 높은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의 시선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입과 손을 향하여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입과 손으로 무슨 지시를 내리면 즉시 순종해야 하듯이, 종들의 눈은 항상 육체의 상전인 주인의 입과 손을 향해 있어야 하고, 주인이 입과 손으로 무슨 지시를 내리면 성실한 마음과 태도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종들은 자기 육체의 주인과 비교할 수 없이 높고 위대하신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성실하게 행하는 삶에 대해 배워야 하고 그 사실을 드러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육체의 주인이 명령하는 모든 일을 한다면,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신실하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으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대충 대충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과 힘과 뜻을 다하여야 행해야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종들이 육체의 주인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악한 제도라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였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歷史)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을 다 아시고 주관하신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할 때만 겸손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맡겨준 일을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겸손과 존경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상전인 주인의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1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직장에서 일할 때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6절과 7절에서 종들은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종들은 “눈가림만 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종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기에게 혜택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눈가림식으로 대충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종들은 육체의 상전이 볼 때만 일하는 척하고 육체의 상전이 보지 않는 데서는 대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종들은 육체의 상전의 일을 할 때 주님께 하는 것처럼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들은 육체의 상전에게 기쁜 마음으로 주님을 대하듯이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들은 주님께 하는 것처럼 육체의 상전을 속이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하시고 불꽃 같은 눈이 한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지켜보고 있듯이, 종들은 모든 일에 육체의 상전인 주인의 눈을 의식하고 주인이 원하는 일을 성실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주님의 일에 순종하듯이 육체의 상전을 대할 때도 그렇게 대하고 육체의 상전의 일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일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종들에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들이 상전의 일을 할 때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쁘게 한다는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직장에서 그렇게 생활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직업이라면 그 직업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아름답고 고귀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었든지 교수가 되었든지 공무원이 되었든지 건물의 계단을 청소하는 일이 되었든지 가게를 운영하는 일이 되었든지 모두 다 아름답고 고귀한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직업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을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분야에서 어떤 영역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를 따져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상전을 모시고 사는 종들도 육체의 주인이 기뻐하는 일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을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여러분, 주인이 시키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그 일을 하라는 것이고, 반면에 주인이 종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을 명령한다면 종은 때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직업을 가질 때도 매우 중요한 원리로써 작용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 일할 때 상사나 기업주가 죄를 짓는 일을 명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직업을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우리 직장에서 일할 때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고자 한다면 눈가림만으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일하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믿는 그리스도인의 사업장에서 일할 때 대충 대충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더 열심히 일해서 성도의 기업이 더 잘되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기업주인 성도가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풍성히 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같은 신앙인이니까 대충해도 이해해 주겠지’라고 하는 마음으로 일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눈가림만으로 일하지 않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정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8절에서 그 이유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은 줄을 앎이라” 종들이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고 주님께 하듯 주인을 섬기면 주님으로부터 상(賞)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종이 아니라 자유롭게 주님을 섬기는 자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과 자유인이 받는 상급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종이 되었든지 자유인이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종이나 자유자에게 동일한 상을 주신다는 것은 당시로는 매우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종은 상전에게 순종하되 주님을 대하듯이 두려움과 떨림과 성실한 마음과 선한 의지로 주인의 말에 순종하며 섬겨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에 합당한 보상을 자유인과 동일하게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직업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귀한 직업이 있고 천한 직업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모든 직업이 다 아름답고 고귀하여서 직업에는 귀천이 없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의 삶에는 종과 주인 사이에 엄격한 구분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있게 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런 구별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종에 대한 상전의 의무
사도 바울은 상전에 대한 종의 의무에 대해 말한 후에 이제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종에 대한 상전의 의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상전들에게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종이 상전에게 순종하되 주님을 대하듯이 두려움과 떨림과 성실한 마음과 선한 의지로 섬겨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듯이, 주인 역시 종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당시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말입니까? 이 당시로서는 천지가 개벽이 되어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황금율(黃金律)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9절과 같은 말씀이 골로새서 4:1에도 있습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격은 있으나 인격이 없는 종들은 주인의 동산(動産)과 혹은 부동산(不動産)과 같은 재산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상전이 종을 섬기고 의(義)와 공평으로 대한다는 것은 상전이 섬기는 종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상전이 종의 위치에까지 내려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전들도 종들에게 똑같이 행해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권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즉 1세기 당시의 종과 주인의 관계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주인인 네가 존경받기를 원한다면 종을 존경하라는 것이고, 주인인 네가 섬김을 받고자 한다면 종을 섬기라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높은 위치에 있으려면 종의 자라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인간관계입니다. 이것이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있게 될 새로운 사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일이지 실천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고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9절의 말씀처럼 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서 살아갈 때 있을 질서입니다.
그리고 상전들은 종들에게 “위협을 그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협”(ajpeilhv)의 또 다른 뜻은 ‘협박’입니다. 주인은 종들이 일을 잘못하였을 때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노예의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노예 시장에다가 내다 팔겠다고 협박하거나 여러 가지로 괴로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겠다고 협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에 대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힘을 남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믿는 주인은 자기 위에 더 높으시고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자기 밑에 있는 종들을 협박하거나 위협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상전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악용해서 종들을 협박하거나 위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사도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종들과 상전들의 진정한 상전이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진정한 상전으로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진정한 상전으로서 종과 상전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상전들은 자신 위에 진정한 상전이신 하나님께서 높으신 하늘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아랫사람인 종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고 오히려 섬김을 받고자 원한다면 섬기는 자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는 분이므로 행한 대로 갚으시기 때문에 주인은 종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을 고용하여 사업을 하는 사업주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고용주나 고용인이나 똑같은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고용주는 고용인을 공정하게 대하여야 하고 자기의 이익의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업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에베소서 4:28의 말씀, 즉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라고 하신 말씀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경제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지런히 일하여 돈을 버는 것은 자기만 잘 먹고 잘살려고 버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義)를 구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약속하셨습니까? “내가 이 모든 것, 즉 이방인들처럼 먹고 마시고 입고하는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마 6:31-33). 따라서 고용주는 고용인들과 부(富)를 나누되 공정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수고에 따라서 합당한 임금과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에 더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노사관계가 올바르게 설정될 수 있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계약으로 이루어진 부부관계와 피로 이루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 그리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루어진 계약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 3:26과 2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가 영원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새로운 사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새로운 가정과 사회가 영원히 펼쳐질 것입니다. 따라서 구속받은 우리는 모두 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영원한 천국을 이 땅에서 구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이 있습니다. 아멘.
(2022. 10. 9 주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