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 16코스의 땡볕 발걸음
2019년 6월 16일 (일) 날씨 : 쾌청 기온 : 섭씨 16~28도
거리 : 10.5km 소요시간 : 4시간 30분 동행 : 귀연산꾼 21명
<남대문 공원에서 단체 사진>
인류의 첫 시계는 기원전 4,000년경의 해시계, 물시계, 모래시계 등 자연을 이용한 시계였다.
그러다 13세기 말부터 해 뜨면 일어나서 일하고 해 저물면 자는 보통 사람과 달리 엄격한 규율을 따르는 수도원에서는 종루의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도원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미리 미사 시간과 기도 시간은 물론 그 종소리에 맞춰서 일상생활을 하게 되었다.
영어로 시계를 가리키는 클록(clock)은 ‘종’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클로카(clocca)가 어원이다.
유명한 밀레의 그림 ‘만종’에서도 농부와 그 아내가 일손을 멈추고 저 멀리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맞춰 경건하게 저녁 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후 하루를 24등분하는 정시법이 사용되었고 기계식 시계가 발명되어 14세기 말에는 유럽 각지의 교회나 성당에 종탑 대신 대형 시계를 걸어 놓는 시계탑이 생겼다.
시계를 오늘날의 시계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은 근대 천문학과 물리학의 아버지 갈릴레이다.
그는 추의 길이만 같으면 좌우로 한 번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일정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것이 오늘날 괘종시계의 기본 원리였던 거다.
15세기 말 대양을 누비며 영토를 넓히고 돈을 버는 대항해 시대에는 나침판과 더불어 정확한 경도를 알 수 있는 시계가 필수품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계 산업이 발달했다.
또한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노동 시간을 통제하기 위해 시계가 중요해졌고 특히 기차가 나타나면서 정확한 출발과 도착 시간을 알려 줄 시계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시계는 크고 무겁고 비쌌기 때문에 대형 건물에 붙여 놓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했는데 대표적인 시계가 영국의 빅 벤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시계는 점점 작아졌고 1900년경 드디어 손목시계가 탄생했으며 값싼 디지털시계의 출현으로 완전히 대중화되었다.
더불어 시계는 더욱 정확해지면서 최근엔 300년에 1초 내의 오차가 난다는 원자시계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좋은 생각 6월호 한비야의 ‘지금은 찔레꽃 시간’에서>
<남대문교>
<남대문리 입구>
시간의 흐름을 읽는 것은 젊음과 비례한다.
엊그제 한 해가 시작되고 시산제를 드린 것 같은데 2019년의 반이 흘렀다.
하얀 눈을 바라보며 걷던 대청호길은 새싹 돋는 봄을 보내고 진녹색의 여름으로 접어든다.
파란 하늘과 대청호반이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것을 인식할 무렵 세상은 뙤약볕 신작로를 걷는 시절을 거쳐 오지의 골짜기로 파묻혔다.
남대문공원에서 시작한 16구간은 최영 장군의 만지장과 호점산성 남문 밖에 있는 지형 때문에 생긴 남대문리 유래에서 호기심이 생긴다.
남대문리에는 거구리와 만마루 그리고 남대문이 있다.
거구리는 아홉 사람의 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산 중에 아홉 사람의 부자가 살았다니 대단한 마을이라고 생각된다.
마을엔 길가 호두나무와 밭에는 대추나무 그리고 가끔씩 사과나무들도 보인다.
6월의 남대문리에는 밤나무 꽃이 피어 특유의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다.
남대문리 1리를 지나는 동안 동네 사람들을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한가로움이 느껴진다.
<남대문리 방향에서 본 남대문교>
<마을 입구 호두나무>
<남대문리>
<남대문리 경로당>
남대문리 : 거구리와 만마루, 남대문이 있는데 만마루는 최영 장군이 만지장을 만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남대문은 호점산성 남문 밖에 있어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이괄 바위와 용굴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거구리 방향으로 좌회전>
염티고개 3km라는이정표 지점에서 죄측으로 돌아 거구리로 향한다.
한적한 신작로 언덕을 넘으면 거구리가 나오는데 길가 가로수에는 매실이 제법 컸는데 길바닥에 많이 떨어져 뒹군다.
너무 많이 재배하여 값이 저렴하다고 일행들이 알려 준다.
접시꽃이 핀 기와집을 지나 거구리로 접어들었다.
마을은 아직도 스레트 지붕들이 대부분이었고 대추나무 재배단지가 보이고 길가에 돼지감자가 수북히 자라 시선이 간다.
오늘 참가자들은 21명인데 이젠 대청호길 골수들이 6월 뙤약 빛을 이기며 걷는다.
<문의와 남대문교를 잇는 지방도>
<거구리>
거구리 : 아홉사람의 부자가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
<거구리>
거구리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는 마을 중간에서 임도로 바뀐다.
인적이 뜸한 임도는 잡초와 구불거리는 비포장으로 걷기 불편했다.
임도를 따라 걸으며 대청호오백리길 이정표를 놓치고 390m 봉우리까지 오르고 말았다.
지름길을 놓치고 산정에 오르는 고생은 했지만 시원한 바람과 조망으로 기분은 좋았다.
멀리 청남대와 계족산이 길게 보이고 파란 대청호반이 아름답게 수를 놓아 근사했다.
오늘처럼 호수를 많이 벗어난 코스에서는 좀처럼 시원한 조망이 없는데 약간의 알바 덕분에 근사한 선물을 받았다.
능선을 타고 두 세 개의 봉우리를 넘으니 아까 놓친 대청호오백리길 이정표를 만났다.
<거구리 임도를 따라 오른 숲길>
<390봉에서 본 조망-길게 계족산이 보인다>
봉우리 사이에 부는 바람이 너무 시원해 모두들 이르게 점심상을 펼쳤다.
세 무더기의 상추를 가져온 로그인님과 두 병의 동동주를 짊어지고 온 정암님!
맛있는 반찬과 과일 그리고 성찬들이 행복한 점심시간으로 빛났다.
느긋한 점심으로 여유가 생긴 일행들은 몇 개의 봉우리를 사뿐히 넘은 후 하산 갈림길에서 대오를 정렬한 후 소금골로 내려섰다.
야생 수북이 청순한 모습으로 피어있는 지점을 지나니 넓은 밭이 반긴다.
대단한 인력을 들여 만든 밭은 인삼을 심으려는지 정성스럽게 고랑을 내고 물을 댈 관계시설도 갖추었다.
밭 가장자리에는 상추와 시금치, 완두콩, 아욱 그리고 씨로 변한 유채가 잘 관리된 모습으로 농부의 정성이 엿보이게 한다.
<능선에 설치된 이정표>
<야생 수국>
<어성리 지나 만나는 개간지>
<소전리 입구>
<소금골>
소금골 너머 산등성이 위로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여름의 한나절을 멋지게 채색했다.
이 골짜기에는 예전 금강에서 물이 닿아 선착장이 있는데 멀리 부강에서 소금을 실어 나르는 곳이라고 한다.
염티와 소금골은 그런 연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염티는 소금 장사들이 언덕을 넘을 때 소수의 인원이 여럿이 모여 넘던 고개에서 유래되었다.
부강~보은간 거리는 원채 멀어서 본 염티재에서 교대하기로 상호간 약속 장소로 이용되었고, 교대를 했다 해서 염티라 부른 듯하다.
웃 염티 마을은 1980년도 큰 장마에 부락이 쓸려 가운데 염티로 이주하고 지금은 3집만 거주 하고 있다.
염티리를 크게는 웃 염티, 가운데 염티, 아래 염티(점촌)를 합하여 염티리라 부르고 있다.
<인동초>
<선인장 꽃>
<벌랏-좌측으로 가면 선착장>
벌랏(버전) : 소전의 맨 끝 부락. 주위가 모두 밭이고 논은 거의 없는 부락.
임진왜란 때 피난와서 정착 해 화전하며 생계을 영위한 곳이다.
닥나무로 한지를 생산하였으며, 과일이 풍성하고 1987년부터 92년까지는 잠업이 번창하여 수입을 올렸었다.
<오미자 터널>
벌랏마을로 향하는 곳에 아치형 터널에 오미자를 심어 멋을 냈다.
인동초와 선인장이 꽃을 피워 화려함을 뽐내고 한적한 마을 입구에 만들어진 터널은 시간이 흐르면 대단한 모습으로 사람을 맞을 것 같다.
벌랏 선착장은 자그마한 배가 다닐 정도인데 신작로가 열려 크게 쓸모는 없는지 잡초만 무성하다.
<벌랏 선착장>
<벌랏마을 소전리>
벌랏마을 입구에는 낯선 장승 두 분이 서 있다.
특이한 얼굴과 형상으로 시선이 가지만 어딘가 어색함이 묻어난다.
담장에 아름답게 핀 장미를 보며 도착한 버락 마을 담한정(澹韓亭)은 찬샘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등산화를 벗고 정자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피로를 날려 버린다.
샘봉산과 산자락에 푹 묻힌 버랏 마을은 소전 1리 경로당 앞 쉼터가 제격이다.
마을 주민이 이 더위에 웬 고생이냐며 우리들을 향해 혀를 끌끌 차며 아쉬워한다.
하긴 이런 자연마을을 찾아 땡볕에 길을 걷는 우리들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할 것 같다.
벌랏한지마을로 얼마 전까지 유명세를 탔던 마을은 요샌 행정당국의 무관심으로 찾는이가 없다고 한다.
<소전리 장승>
<소전리 찬샘>
<소전 1리 경로당>
* 벌랏 한지 마을 유래
임진왜란 때 피난 와 살게 된 약 5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마을이다.
오래전부터 한지를 생산하였고, 잡곡, 과실이 풍부하여 3,000냥의 부자마을로 널리 알려졌다.
‘벌랏’은 마을 전체가 골짜기로 되어 있어 밭이 많은 것에 놀랍다는 뜻이라고 한다.
자연환경보전지역 내에 있어 야생동물, 야생화, 산나물 등이 풍부해 자연과 마을 주민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청정장수마을로 알려져 있다.
농촌전통 테마 마을인 벌랏 한지마을은 전국 8대 오지마을로 고향의 품을 그리워하는 탐방객들에게 산골마을의 삶과 자연의 멋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안겨줄 수 있는 곳으로 제격이다.
참된 농촌 삶의 멋과 맛 그리고 진한 우리네 인정을 나누는 대청호오백리길 자연마을로 기억된다.
<담한정>
澹韓亭 : 찬샘에 세워진 정자
<벌랏한지마당>
한국전쟁이 발발한 줄도 몰랐다는 문의면 소전1리 벌랏한지마을.
면사무소에서 굽이굽이 외길을 따라 10㎞가량 고개를 몇 개나 넘어야 도착하는 외진 곳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곳 주민들은 한지를 만들어 대전과 청주에 내다 팔았다.
하지만 수요가 급감하면서 살길이 막막해지자 주민 가운데 절반가량이 외지로 떠났다.
남은 주민들은 보리농사와 산나물 채취로 삶을 꾸려갔다.
이렇게 한지 만들기 전통이 끊겼던 이 마을이 다시 한지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주민들이 한지를 다시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일부 주민이 “전통을 잇고 마을도 살리자”는 나섰다. 이듬해 농촌진흥청과 군청에서 지원 받은 1억3000여 만 원으로 폐기처분되기 직전이었던 종이공장 자리에 체험관을 지었다.
첫해인 2006년에는 방문객이 1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점차 입소문을 타고 늘기 시작했다.
천연 재료로 한지를 만들고 주민들이 직접 채취하고 만든 산나물, 꿀 등을 구입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벌랏한지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무대라고 해도 믿겠다”고 말할 정도다.
한지 만들기로 마을이 부활하면서 이 마을은 2010년 농촌진흥청이 주관한 ‘살고 싶고 가보고 싶은 농촌마을 100선’에 뽑혔다.
초등학교 졸업 후부터 한지를 만들었다는 이정용(72) 할아버지는 “체험관을 운영하기 전까지는 밭농사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는데 지금은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며 환하게 웃었다.
마을에는 22가구 38명의 주민이 산다. 체험관 운영 전 1000여 만 원이던 가구당 연소득은 요즘 배가량으로 늘었다.
지난해 마을을 찾은 방문객은 1만2000여 명. 마을 전체가 올린 지난해 소득은 1억7000여 만 원가량이었다.
1인당 5000~1만원의 체험비와 숙박비를 받고, 고사리·취나물, 꿀 등을 판매해 올린 소득이다. 올해는 1만5000여 명이 마을을 찾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체험관 운영과 이장을 맡고 있는 김준수(75) 할아버지는 “35년 전 마을을 떠났다 2년 전 돌아와 다시 이장 일을 보고 있다”며 “큰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먹고 사는 데는 부족하지 않다”고 말했다.
마을은 다음 달 7~8일 이틀간 처음으로 한지축제를 연다. 숙식은 마을회관과 민박(8가구)을 이용하면 된다.
<소전리 그늘 오솔길>
<자연마을 소전리 입구>
<소전리 벌랏한지마을>
소전리 : 소전리는 면의 남부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동은 회남면 거교리, 서는 거교리, 서는 후곡리, 남은 산수리, 북은 염티리와 접하고 있다.
마을 동쪽 샘봉산(461m) 서쪽 골짜기에 발달한 마을로 마을의 중앙에 산서리가 있고 마을 남쪽 숯고개를 넘어 금강변에는 소여골 마을이 있다.
산서 동쪽 횟골 고개를 넘어가면 버랏마을이 있다. 버랏에는 버랏 나루가 있었고 소여골에는 소여골 나루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수몰되었다.
1980년 대청댐의 준공으로 소여골 마을은 완전 수몰 이주하였다. 현재 60가구 정도 거주하고 있다.
버랏 처음 밀양박씨와 청송심씨가 들어와 살다 김해김씨와 아산이씨가 살고 있으나 현재는 김해김씨가 제일 많이 살고 있다.
또한 산서리는 처음 경주김씨가 살았으나 현재는 경주이씨와 수원백씨 등이 살고 있다.
<고갯마루>
서낭당을 지나 대청호를 바라볼 수 있는 조망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6월의 태양이 이렇게 따가울 줄은 미쳐 몰랐다.
하긴 그린랜드의 눈이 녹고 얼음이 풀린다는데 이런 정도를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하다.
불이 빠진 대청호의 모래톱이 보이고 호수의 파란 물빛이 초록 녹음과 잘 대비된다.
바로 코앞에 고리산과 주변 산들이 이어지고 멀리 식장산과 천태산이 보인다.
한송이 나리꽃을 근접 촬영하면서 예전 남덕유산에서 보았던 참나리의 만남도 떠 올려 본다.
근처에 염티가 있다는 것을 귀가하면서 확인한 것은 우리가 자연 오지에서 주변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음을 자인해 본다.
포도가 벌써 알알이 실하게 송이를 이루고 있다. 땡볕과 이글거리는 태양은 곡식과 과일을 달고 영글게 하는 보약이다.
<서낭당>
<꾸불길 고개에서본 대청호 조망>
<나리꽃>
<샘봉산 주변 산줄기>
<대청호 조망>
<조망터>
과수원 길을 따라 내려가면 소전리가 보인다.
소전리는 면의 남부에 위치한 산촌 마을이다.
동은 회남면 거교리, 서는 거교리, 서는 후곡리, 남은 산수리, 북은 염티리와 접하고 있다.
마을 동쪽 샘봉산(461m) 서쪽 골짜기에 발달한 마을로 마을의 중앙에 산서리가 있고 마을 남쪽 숯고개를 넘어 금강변에는 소여골 마을이 있다.
산서 동쪽 횟골 고개를 넘어가면 버랏마을이 있다. 버랏에는 버랏 나루가 있었고 소여골에는 소여골 나루터가 있었으나 지금은 수몰되었다.
1980년 대청댐의 준공으로 소여골 마을은 완전 수몰 이주하였다. 현재 60가구 정도 거주하고 있다.
버랏 처음 밀양박씨와 청송 심씨가 들어와 살다 김해 김씨와 아산 이씨가 살고 있으나 현재는 김해 김씨가 제일 많이 살고 있다.
또한 산서리는 처음 경주 김씨가 살았으나 현재는 경주 이씨와 수원 백씨 등이 살고 있다.
<포도 농원>
<소전리>
<소전리 마을회관>
노란 베이스 캠프에서 잘 익은 두 개의 수박을 먹으면서 16구간의 피로를 풀었다.
산 속과 숲을 헤치고 지난 16구간은 자연마을 오지의 폼을 경험했던 의미 있는 발걸음이었다.
섭씨 28도를 웃도는 땡볕을 이기고 걸었던 대청호반에서 땀과 대화 그리고 인정을 느꼈음은 또 하나의 보람이었다.
<소전보건진료소>
첫댓글 알바하면서 이번처럼 좋았던 적은 없었던거 같습니다 길도 적당히 우거지고 시원한 바람이 참 좋았습니다
대장님의 자세하게 쓰신 산행기를 보니
저는 길을 걷는거 밖에는 한일이 없네요
많이 공부하고 가요
보이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챙기니니
여행이 더 재미 있을 수 밖에요ㆍ
좋은 길도 잘 걸었고 맛 있는 수박도
잘먹고 떠 뒤늦게 문화기행 까지
알차고 즐거운 여행길이었습니다ㆍ
수고 많으셨습니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