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장 2차 예루살렘 성전 파괴
2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내가 세상가운데 와서 육신으로 그 들에게 보였으나 그들은 모두 취해 있었고 아무도 목마른 자가 없더라. 나의 영혼이 인류의 자녀들을 위해 아파하는 것은 그들이 마음의 눈이 멀어 있어 보지 못함이라. 그 들은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하느니라.
하지만 당분간 그들은 취해 있을 것이다. 포도주를 떨쳐 버릴 때 그들은 그들의 길을 바꿀 것이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시위에 대한 진압은 정부의 엄격한 억압 정책과 시민들의 창의적인 저항 방식 사이의 긴장 관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침공이 시작된 이래, 러시아 내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여러 형태의 시위가 발생했으나, 정부는 이러한 반전 목소리를 강력하게 진압해왔습니다.
억압의 수단과 방식
체포와 벌금: 반전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이 대규모로 체포되었으며, 많은 경우 벌금형이 부과되었습니다. 시위 참가자들은 종종 평화적인 시위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환경에서 법적인 제재를 받았습니다.
형법 개정: 러시아 정부는 형법을 개정하여 러시아군에 대한 허위 정보를 유포할 경우 최대 1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법적 조치는 반전 목소리를 내는 개인과 단체에 대한 경고로 작용했습니다.
감시와 신고: 국가는 시민들 사이에서 서로를 감시하고 반전 활동을 신고하도록 장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는 공공의 장소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크게 제한했습니다.
이에 러시아 시민들은 창의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시민들이 정부의 엄격한 억압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드미트리 레즈니코프는 모스크바 시내에서 별표 8개(********)를 적은 종이를 들고 서 있었는데, 이 별표들이 러시아어로 '전쟁 반대(нет войне)'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5만 루블(약 74만원)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또한,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들고 있는 콘스탄틴 골드만이 시위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습니다. 골드만은 우크라이나 수도를 의미하는 장소 옆에서 이 책을 들고 사진을 찍다가 체포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푸쉬킨스카야 광장에서는 한 남성이 '미라토르그(Miratorg)'라는 상표가 적힌 햄 봉지를 들고 서 있었는데, 상표의 뒷부분을 검은 펜으로 지워 '미르(Mir)' 즉, '평화'라는 단어만 남겼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는 러시아 결제시스템 '미르(Mir)'에서 발급한 카드를 들고 있는 남성에게 경찰이 다가가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이 남성은 일단 연행된 후 훈방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와 니즈니노브고르드 등지에서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빈 종이를 들고 서 있는 1인 시위자들이 연행되는 사례도 보도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러시아 정부가 반전 목소리에 대해 어떠한 형태의 표현도 엄격하게 억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 내가 세상 가운데 와서 육신으로 그 들에게 보였으나 그들은 모두 취해 있었고 아무도 목마른 자가 없더라.
이 28장을 해석하면서 많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과연 이 구절이 영적인 내면의 변화에만 포커스를 맞춘 말씀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 의문에 휩싸였습니다. 저는 도마복음서가 이야기하는 시대의 관점에서 기록자의 마음을 알아보려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약사화는 이미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왔습니다.하지만 구약성경의 말라기와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사이에는 400년의 기간이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다시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남 유다 왕국의 멸망 후 바빌론의 지배에서,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알렉산드로스로,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나자 안티오쿠스4세의 성전 모독으로 이어지는 유대인들의 수난사는 하나님의 큰 시험이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의 헬라화 정책에 반대한 유대인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강탈하고 성전안에 들어가 율법서를 불지르고 많은 백성을 학살했습니다. 안식일을 금지하고 어린아이들의 할례를 막았습니다. 박해는 BC 167년 10월에 절정에 달합니다.예루살렘 성전안에 제우스신의 제단을 세워놓고 돼지를 희생제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시딤(종교적으로 경건한자들)들은 율령을 거부하고 그들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누카’ 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누카 혁명, 또는 마카비 혁명은 기원전 2세기에 발생한 유대인의 반란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한 유대인의 성공적인 반란을 말합니다. 이 혁명은 하누카 축제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으며, 종교적 자유와 유대인 정체성의 수호를 위한 투쟁을 상징합니다.
배경
기원전 2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유대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인에게 그리스 문화와 종교를 강요했으며, 유대교의 관행을 금지하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다른 신들에게 바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강제적인 헬레니즘화 정책은 유대인 사이에 큰 불만을 일으켰고,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혁명의 시작
반란은 기원전 167년경, 마카비 가문의 유다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이 안티오쿠스 4세의 군대에 대항하여 봉기한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유다 마카비는 "마카비"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마카바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망치"를 뜻합니다. 이는 그의 전투 스타일과 반란을 이끄는 데 있어 그의 결단력을 상징합니다.
주요 사건들
예루살렘 성전의 재정화: 유다 마카비와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재탈환하고 성전을 다시 정화했습니다. 이 사건은 하누카 축제의 중심 사건으로, 기적적으로 1일 분량의 등유가 8일 동안 타오른 것으로 전해집니다.
독립과 자치: 반란군은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한 여러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유대인의 독립과 종교적 자유를 얻어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유대인은 자신들의 법에 따라 자치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성
하누카 혁명은 유대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신앙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하누카 축제는 이 혁명을 기념하며, 빛, 기적, 그리고 자유의 축제로 매년 기념됩니다. 하누카는 유대인 공동체에게 중요한 축제 중 하나로, 혁명의 정신을 기리며 그 의미를 세대에서 세대로 전합니다.
하지만 마카비 왕조는 알렉산드라 여왕 때 분열을 맞이하게 됩니다. 알렉산드라 여왕(기원전 76년부터 기원전 67년까지 재위)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여왕으로, 유대의 마지막 여왕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유대 왕 알렉산더 야나이의 부인이자 마카비 가문의 후손으로, 남편의 사후에 왕위를 이어받아 통치했습니다. 알렉산드라 여왕의 두 아들,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으로 유명합니다. 이 두 형제의 경쟁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내부 분열을 심화 시키고, 결국 왕조의 약화 및 종말을 가속화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형제 간의 권력 다툼
히르카누스 2세: 그는 알렉산드라 여왕의 큰아들로, 어머니가 사망한 후 초기에는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대적으로 약한 지도자였으며,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의 권력 다툼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였습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 알렉산드라 여왕의 둘째 아들이자, 더욱 야심 찬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형 히르카누스 2세를 축출하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내전을 시작했습니다.
내전과 로마의 개입
이 형제 간의 권력 다툼은 유대에서 내전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이 분쟁에 로마가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처음에는 중재자로 나서려 했으나, 결국 유대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게 됩니다.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내전에 개입하여 히르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의 지위에 복원시키되, 실제 권력은 로마의 통제 아래에 두었습니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포로로 잡혀 로마로 끌려갔습니다.
결과와 영향
이 권력 다툼과 로마의 개입은 하스모니안 왕조의 약화를 가속화했습니다. 로마는 점차 유대 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갔고, 이는 최종적으로 헤롯 대왕의 등장과 하스모니안 왕조의 종말로 이어졌습니다.
히르카누스 2세는 왕위를 잃고 대제사장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으며,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가문은 로마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며, 외부 세력의 개입이 내부 분열을 어떻게 악화시키고 결국 왕조의 몰락을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유대 지역의 정치적 구조와 권력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로마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유대인의 독립과 자치에 대한 투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사이의 권력 다툼은 단순한 형제 간의 경쟁을 넘어서, 유대 사회 내부의 균열과 분열을 대변합니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외부 세력, 특히 로마와 같은 강대국이 개입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용이한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로마의 개입은 단기적으로는 유대 내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대의 정치적 독립을 약화시키고 로마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헤롯 대왕의 등장은 이러한 변화의 정점을 나타냅니다. 그는 로마의 지원을 받아 유대 왕국의 왕위에 오르며, 하스모니안 왕조의 직접적인 후계자가 아닌 외부인으로서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헤롯의 통치는 유대 지역의 안정성을 일정 부분 회복시켰지만, 그 과정에서 유대인 사회의 깊은 분열과 로마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알렉산드라 여왕의 두 아들 사이의 권력 다툼은 유대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 중 하나로, 내부 분열이 어떻게 외부 세력의 개입을 초래하고, 이것이 다시 국가의 독립성과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건들은 오늘날에도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분열과 외부 개입의 역동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왕국은 마카비 왕조에서 혜롯왕조로 넘어가게 됩니다.
헤롯 대왕의 아버지인 안티파테르와 그의 아들들, 특히 헤롯 대왕의 유명한 아들들인 아르켈라오스, 헤롯 안티파스, 그리고 필리포스의 행적은 유대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각각의 인물은 유대 지역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안티파테르 (Antipater)
안티파테르는 이두매아 출신으로, 유대의 로마 지배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율리우스 시저의 지지를 받아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으며, 로마와 유대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했습니다. 안티파테르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권력을 분산시켜, 헤롯을 갈릴리의 총독으로, 그의 다른 아들 페이살을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안티파테르의 정치적 노력은 헤롯 가문의 부상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으며, 결국 헤롯 대왕의 통치로 이어졌습니다.
헤롯 대왕 (Herod the Great)
헤롯 대왕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4년까지 유대를 통치한 유명한 왕입니다. 그는 로마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며,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유대를 대대적으로 변모 시켰습니다. 대표적인 건축 작업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폭력적이고 의심 많은 성격 때문에 많은 갈등과 암살 시도를 포함한 가족 내부의 비극으로 얼룩졌습니다.
헤롯의 아들들
아르켈라오스 (Archelaus): 헤롯의 아들 중 한 명으로, 헤롯의 사후 유대와 사마리아의 에트나르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비효율적이고 잔인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결국 로마에 의해 축출되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 (Herod Antipas): 갈릴리와 페레아의 테트라르크로,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처형하고 예수의 심문에 관여했으며, 나중에는 로마 황제 칼리굴라에 의해 축출되었습니다.
필리포스 (Philip): 동부 갈릴리와 이투레아의 테트라르크로, 비교적 평화로운 통치를 했으며, 그의 지역에서 여러 도시를 건설하고 개발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헤롯 가문의 이 이야기는 권력, 배신, 그리고 로마의 영향력 하에서의 복잡한 정치적 교섭을 포함하는 유대 역사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헤롯 가문의 멤버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유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로마 제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헤롯 가문의 영향력
헤롯 가문은 유대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헤롯 대왕의 건축 프로젝트는 유대 땅의 풍경을 변화시켰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그의 유산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은 유대교 신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강화했고, 다른 여러 건축물들은 헤롯이 유대 지역의 행정적 및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줍니다.
헤롯 가문의 정치적 행보는 로마 제국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헤롯 대왕은 로마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통치는 로마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도 유대인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시도와 긴장감이 깔려 있었습니다.
가문의 내부 갈등
헤롯 가문 내부의 갈등과 권력 투쟁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났습니다. 헤롯 대왕 자신도 여러 차례 가족 구성원을 죽였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경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가문의 안정성을 해치고, 유대 지역의 정치적 안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후대에 대한 영향
헤롯 가문의 역사는 후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그들의 통치는 유대 지역에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로마 제국과의 관계, 유대인의 정체성, 그리고 권력과 가족 간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합니다. 헤롯 가문의 멤버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대의 역사와 문화에 기여했으며, 그들의 행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학문적 연구와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신구약중간사’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약성경 전체와 사복음서 도마복음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들은 그 당시의 복잡한 역사적 배경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요약하면 그리스인들과 유대인의 갈등, 그리고 로마군의 중재에 불만을 품은 열심당원들, 그리고 사두가이와 바리새인의 갈등이 혼재한 상황의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결국 로마 속주로 만들어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진 로마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당시의 지식인들은 이미 로마군의 참략과 예루살렘의 성전 파괴를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성전을 3일 만에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겠다는 구절은 요한복음 2장 19-2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그러자 유대인들이 말했다. '이 성전 건축에 사십 육 년이 걸렸는데, 당신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성전'은 그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뒤에 제자들은 그분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해 내고 성경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게 되었다."
2차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로마 전쟁(66-73년)의 결정적인 순간 중 하나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완전한 파괴로 이어졌으며, 유대인 사회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배경
유대인의 반란: 유대-로마 전쟁의 배경에는 로마의 과도한 세금 부과, 종교적 갈등, 정치적 억압 등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에 점점 더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불만은 결국 66년에 발발한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로마의 반응: 반란이 시작되자, 로마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초기에는 소규모의 충돌이었지만, 로마의 군사적 대응은 점점 더 강경해졌고,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 전역으로 전쟁이 확대되었습니다.
성전의 포위와 파괴: 70년,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몇 달 동안의 공성전 끝에 성벽을 돌파했습니다. 로마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대규모 학살을 저지른 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성전의 파괴는 유대교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 사건은 탈무드에 "티샤 베아브"로 기록되어 매년 애도의 날로 기념됩니다.
베스파시안과 티투스: 당시 로마군을 이끈 사람은 베스파시안 황제와 그의 아들 티투스였습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공성전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으며, 그의 지휘 아래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영향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가속화: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인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유대인이 로마 제국 내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분산)의 가속화로 이어졌습니다.
유대교의 변화: 제2성전의 파괴는 유대교의 실천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성전 중심의 종교적 실천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면서, 유대교는 랍비와 학문, 기도, 율법 연구 등에 더 큰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말씀이 나온 당시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루살렘 성전파괴의 날을 인식하지 못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2. 제사위주의 종교생활을 주장하는 사두가이파들
3. 경전위주의 학습을 주장하는 바리새인파들
4. 무장투쟁으로 로마군을 축출하고 다시한번 성전정화가 필요하다고 믿는 열심당원들
‘내가 세상가운데 와서 육신으로 그 들에게 보였으나 그들은 모두 취해 있었고 아무도 목마른 자가 없더라.’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현실에 대한 자각없이 끝도 없이 내분만을 겪고 있었습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열심당과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보호하실 것이다.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하고 제사를 드려야 한다라는 사두개파와 제사에만 치우칠 것이 아니라 경전 중심의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바리새파로 나뉘어 혼란스러웠습니다.이것은 마치 구한말에 일본의 침략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조선과 닮아 있습니다.
고종은 동학농민운동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외세인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였고 동학군이 진압됩니다. 그러나, 조선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벌여 청나라는 패하고 조선에서 축출됩니다. 고종은 일본을 몰아내고자 러시아를 불러들였으나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맙니다.마지막으로 미국에 기대려 했으나,일본의 외교공작에 매수된 미국은 외면합니다.마지막으로 ‘만국평화회의’ 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만행과 독립을 호소하게 됩니다.
헤이그 밀사(1907년)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강압적인 외교 정책에 맞서 국제사회에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시도한 외교적 노력입니다. 이 사건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명으로 이뤄졌으며, 고종 황제가 밀지(密旨, 비밀 지시)를 통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명의 대표를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1907년)에 파견한 것입니다.
이들의 임무는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일본의 불법적인 간섭 및 을사늑약(1905년)의 무효를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강제로 넘기게 만든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강력한 반대와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밀사들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일본은 이 사건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 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즉위 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대한제국의 국제적 고립과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가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국 근대사에서 대한제국이 마지막으로 보인 독립과 자주권 수호를 위한 노력으로 평가되며, 이후 한국의 독립 운동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내가 세상가운데 와서 육신으로 그들에게 보였으나’
구약의 하나님은 오로지 경전 공부와 실천만이 신약의 예수님은 오지 사랑과 지혜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에는 경전 공부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지키라는 여러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라는 독려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1장 8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키라. 그리하면 네 길이 형통하고 네가 슬기롭게 행할 것이니라."
시편 1편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후서 1장 19-21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너희가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옳으니 라. 먼저 예언의 말씀이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라. 예언은 결코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사람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께 로부터 말한 것임이라."
이 구절들은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성경 공부는 믿음을 성장시키고, 올바른 길을 인도하며,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을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전혀 새로운 계약이 선포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구체적인 문구는 신약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통한 구원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특히 십자가에서의 희생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궁극적인 표현으로, 이 사랑이 인류의 구원과 영생을 가능하게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에 관한 신약성경의 중심적인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15장 13절: "사람이 그의 친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는지라."
에베소서 2장 4-5절: "그러나 하나님은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죄들로 말미암아 죽었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으로(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지라) 우리를 구원하셨 도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구원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비록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정확한 문구는 없지만,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사랑이 구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특히 예수님을 통해 보인 사랑이 인류의 구원의 핵심임을 신약은 명확히 합니다.
그들은 모두 취해 있었고 아무도 목마른 자가 없더라.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 열심당의 ‘무장투쟁’과 사두개파의 오로지 성전에서 올리는 제사, 바리새인의 경전공부와 토론만이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예루살렘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은 술 취한 자들과 같았습니다.
나의 영혼이 인류의 자녀들을 위해 아파하는 것은 그들이 마음의 눈이 멀어 있어 보지 못함이라.
‘인류’라는 단어는 이미 유대인만을 국한한 가르침에 매달려 있는 ‘바리새이’ 파와는 그 맥락을 달리합니다.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다양한 민족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셨고, 그의 가르침과 행적은 인종, 국적, 사회적 지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포괄적인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는 여러 구절에서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모두 없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가 다 하나이니라."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요한복음 12장 32절: "나를 땅에서 들어 올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 이끌겠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메시지가 단순히 유대인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모든 민족과 인류에게 해당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긍휼의 메시지를 통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하셨으며, 이는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는 혁신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은 유대인, 로마인, 그리스인, 팔레스타인 사람 등 당시 알려진 모든 민족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며, 기독교의 중심적인 가르침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의 눈이 멀어 있어 보지 못함이라.
당시 로마인들은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려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로마에 대적하는 국가들은 예수님 당시, 즉 1세기 초 로마 제국은 지중해 전역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을 지배하는 대제국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에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이 있었으며, 그 중 일부는 로마의 지배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저항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로마에 대항하여 명확하게 독립된 국가 형태로 대적했다고 할 수 있는 국가들은 제한적입니다. 대부분의 지역은 로마의 직접적인 지배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유대 지역: 유대 지역에서는 로마에 대한 여러 저항 운동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1차 유대-로마 전쟁(66-73년)은 이후에 발생하지만, 예수님의 생애 기간 동안에도 로마에 대한 불만과 소규모 저항은 존재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로마의 세금 징수와 지배 방식에 대한 불만이 있었으며, 이는 종교적 지도자들과 일반 인구 사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르티아 제국: 로마 제국의 동쪽 경계에서는 파르티아 제국이 로마와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파르티아는 현재의 이란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제국으로, 로마와 여러 차례 충돌하며 대립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파르티아는 로마에 대한 주요 대항 세력 중 하나였습니다.
게르마니아와 다시아: 로마 제국의 북쪽 경계에서는 게르마니아 부족들과 다시아(현재의 루마니아 지역)가 로마의 확장을 저항하며 때때로 충돌했습니다. 이 지역의 부족들은 로마에 정기적으로 도전했으며, 로마는 이들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외에도 로마 제국과 대립하거나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다양한 소규모 부족과 집단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광범위한 군사력과 정치적 전략을 통해 대부분의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광대한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에 대항하는 국가들은 로마의 방대한 영향력 아래 있는 다양한 저항 운동과 세력들의 모습을 띠고 있었습니다.
강한 제국들은 약한 도시국가들을 자신들의 먹잇감으로 삼았으며, 약한 도시국가들은 두려움과 극단적인 폭테러리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위하였고 자신들의 탐욕과 두려움 분노에 예수님의 말씀에도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영혼이 인류의 자녀들을 위해 아파하는 것은 그들이 마음의 눈이 멀어 있어 보지 못함이라.
예수님은 이미 열심당의 집권과 반대파들의 무자비한 숙청과 그들의 시체가 성벽에 걸리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것은 영적 예언이며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그들은 자신들의 독선과 고집으로 순례객들을 인질로 잡고 로마군에 대적하기 시작합니다.
그 들은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하느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지혜를 믿지 않았습니다. 열심당원들은 무장투쟁으로 로마에 대적했지만 패하고 맙니다.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유대-로마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며, 몇몇 유대 반란군이 요새화된 곳에서 로마에 저항했습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마사다 요새의 저항과 그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성전 파괴(70년) 후에 일어난 주요 요새의 패전과 마사다 요새의 자결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 요새의 패전
유대-로마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유대 반란군은 여러 요새에서 로마 군대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요새는 다음과 같습니다:
헤로디움 요새: 헤로데 대왕에 의해 지어진 이 요새는 전쟁 초기에 로마에 점령되었습니다.
마헤로트 요새: 갈릴리 지역에 위치한 이 요새도 로마 군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야드보르 요새: 여러 요새 중 하나로, 로마 군에 의해 패배했습니다.
2. 마사다 요새의 자결
마사다 요새: 마사다는 유대-로마 전쟁에서 유대 반란군의 마지막 저항지였습니다. 이 요새는 사해 근처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헤로데 대왕에 의해 강화된 요새였습니다. 73년, 로마 군대는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의 지휘 하에 마사다를 포위했습니다.
로마의 포위: 로마 군은 공성탑, 램프, 공성벽 등을 사용하여 마사다 요새를 공략했습니다. 몇 달간의 포위 끝에, 로마 군은 요새에 진입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자결: 마사다 요새의 유대 반란군과 그 가족들은 로마 군에 포로로 잡히거나 노예가 되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집단 자결을 선택했습니다. 엘레아자르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의 지휘 하에 약 960명의 남녀노소가 자결했으며, 로마 군이 요새에 진입했을 때 그들을 발견했습니다.
마사다의 자결은 유대인의 저항 정신과 비극적인 결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현재까지도 유대인 역사와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인의 독립 의지와 투쟁, 그리고 비극적인 역사적 순간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나의 영혼이 인류의 자녀들을 위해 아파하는 것은…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계셨습니다. 성전의 패배와 유대국가의 멸망,그리고 전세계로 떠도는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행까지….그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왕국을 보지 못하고 영혼이 가난한자가 되어 빈손으로 육은 흙으로 영은 그가 온곳으로 돌아가 혼이 소멸되고 맙니다.’혼’은 인간의 개성이며 인격입니다.유대인의 개성을 사라졌으며, 인격은 바닥을 치게 됩니다.마치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마라톤에서 승리하지만 그의 가슴에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새겨진 것과 같습니다.망국의 슬픔은 2차세계대전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당분간 그들은 취해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후 제사중심의 신앙생활을 주장하던 사두개파가 학살됩니다. 성전 중심의 종교 실천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면서, 유대교의 실천 방식과 학문적 전통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Rabbi Yohanan ben Zakkai)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유대교와 유대인의 정체성이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는지를 보여줍니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와 예루살렘 성전 파괴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는 1세기의 유명한 유대 학자이자, 바리사이적 전통의 리더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전, 그는 이미 성전 중심의 종교 실천 외에도 토라(Torah, 유대교 성경)의 학문적 연구와 구두 전승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예루살렘 포위 중의 대피
전설에 따르면, 예루살렘 성이 로마군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랍비 요하난은 예루살렘에서의 유대교의 미래가 막막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로마 장군 베스파시안과의 협상을 위해 성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 의해 관속에 숨겨져 성 밖으로 밀반출되었다고 합니다. 베스파시안과의 만남에서 그는 예언자처럼 베스파시안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자 베스파시안은 그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야브네 학당의 설립
랍비 요하난의 소원은 야브네(Yavneh)에 학당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유대교 학문과 법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베스파시안은 이 요청을 승낙했고, 이로써 랍비 요하난은 야브네에서 유대교 학문의 새로운 중심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학당은 유대교의 랍비 전통과 구두 법(Talmud)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와 ‘야브네’ 학당의 이야기는 성전 파괴라는 역사적 재난 속에서도 유대교가 어떻게 적응하고 변화하여 살아남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이는 유대교 실천의 중심이 성전 제사에서 랍비 중심의 학문과 기도로 옮겨가는 중대한 전환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갈라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야브네’ 학교를 통해 토라와 탈무드를 가르쳐 유대인들을 유대인으로서 살아가게 교육하고, 교사들을 전세계 ‘디아스포라’ 에 파견하여 유대교를 가르침으로써 민족성을 보전하게 됩니다.
포도주를 떨쳐 버릴 때 그들은 그들의 길을 바꿀 것이다.
무장투쟁과 제사 그리고 경전공부은 우리들이 마시는 포도주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경전공부와 토론을 통한 지혜와 무엇보다 중요한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부정하였고 지혜만을 강조했습니다.그것이 유대교가 아직도 비주류 종교인 까닭입니다.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국가였던 로마를 변화 시키고 온 유럽과 아시아까지 영적으로 변화 시키는 가르침으로 탈바꿈합니다.
이것은 비단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나라에 정체성을 주던 ‘조상제사’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70~80대의 나이 많은 여성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지금의 60대 이하의 여성들은 제사를 모시지 않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쉬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성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를 논하려는 게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져가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전 제사만을 고집하던 ‘사두개인’들의 고민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던 사람들은 성을 빠져나와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며 살아왔습니다.하지만 그 예수님의 말씀도 이미 2000년이 지났습니다.현재 한국의 교회는 나이 많은 기성세대의 전유물이며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바꿀 것이다.
그들은 인류입니다. 우리가 4차산업혁명을 맞아 더 나은 인간과 사회를 창조하지 못하면 우리는 공멸의 길로 갈 것입니다. 인류가 구약의 율법에서 벗어나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의 가르침을 선택하면서 인류는 폭력과 범죄의 죄책감과 상처를, 용서와 사랑으로 회복하였습니다.그것은 탐욕과 분노를 용서와 화해로 바꾼 것입니다.
포도주를 떨쳐 버릴 때
탐욕과 분노 이기심에 취해 있는 우리에게 보다 나은 인간과 사회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길은 ‘지혜’와 ‘사랑’의 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