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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명산트레킹후기 스크랩 2014년4월25일~27일(금~일 2박3일,26일)미야지마 - 04
정상고집(배연희) 추천 0 조회 50 14.04.30 14: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4년4월25일 ~ 27일(금~일 2박3일)

날씨 : 맑음(마지막날 대구도착 비님이 반겨주었다)

여행지 : 키타규수인근지역

항공 : 부산 김해공항 출발 / 도착 ( 스타플레이어 )

4월25일 : 10:50 김해공항 출발

              11:40 키타큐슈공항 도착

              큐슈와 혼슈를 잇는 칸몬대교

              야마구치 루리코지 탐방

              이와쿠니 일본3대명교 중하나인 킨타이교 * 일본3대명교

              ( 도쿄 궁성 니쥬바시교 / 나가사키 메가네바시 / 이와쿠니 킨타이교 )

             이와쿠이 카메노이 호켈 휴식

 

4월26일 : 히로시마 이동 ( 1시간30분 ) 히로시마 원폭돔 / 평화공원 등 탐방

               미야지마 이동 ( 30분 ) 후 훼리 10분

               * 일본 3대 절경 중 하나인 미야지마

               세계문화유산 이츠쿠시마 신사 탐방 ( 바다위에 지어진 신사 ) 회랑 / 대원사 등

               고쿠라 이동 ( 3시간 ) / 온천욕 (코로나월드 ) / 고쿠라 카메노이 호텔 휴식

 

4월27일 : 시노모세키 이동 ( 약1시간 )

              * 복어의 고장  / 재일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곳

              안토쿠왕을 모시고 있는 아카마신궁 탐방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 탐방

              큐슈와 혼슈를 잇는 해저터널 횡단

              모지 레트로 지구 탐방

키타규슈공항 출발 / 김해공항 도착

 

 

 

일본 후쿠오카 현 기타큐슈 시

 

히로시마 시(일본어: ?島市 (ひろしまし), 광도시)는 히로시마 현현청 소재지이다. 일본 전국에서 11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1974년에는 인구가 80만 명을 넘어 정령지정도시 지정을 요구해 온 결과 1980년 4월 1일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되었다. 히로시마 현 서부에 위치하며 주고쿠?시코쿠 지방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1945년 8월 6일에 미국의 원폭 투하로 파괴된 첫 번째 도시가 되었다. 이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1949년에 "히로시마 평화기념도시 건설법"이 시행되었으며, 폭심지 가까이에 있어서 큰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 현 산업 장려관"의 건물을 원폭 돔으로서 보존하고, 또 그 주변을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으로서 정비했다.

지리적으로는 산요 지방의 거의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히로시마 도시권의 중심이 되고 있다. 게이한신과 후쿠오카 도시권의 거의 중간정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주고쿠 지방시코쿠 지방을 총괄하는 정부 기관이나 전국 규모 기업의 지방 거점도 많이 놓여 있다. 또 서일본 유수의 공업 도시이기도 해 연안부는 공업지대를 이룬다. 근래에는 인구의 교외로의 유출도 계속해서 볼 수 있는 반면에 나카 구의 인구밀도가 높아지는 등 도심 회귀의 경향도 볼 수 있다.

 

 

히로시마는 1589년모리 데루모토에 의해 세토 내해의 해안 삼각주에 세워졌다. 히로시마 성은 빠르게 건설되었고 데루모토는 1593년에 예전의 근거지였던 고리야마 성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왔다. 데루모토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였다.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로시마를 포함한 데루모토의 영지의 대부분을 몰수해 자신을 지지했던 다이묘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주었다. 히로시마 성은 1619년아사노 나가아키라에게 넘어갔고 나가아키라는 이 지역의 다이묘로 임명되었다. 아사노 씨의 지배하에 도시는 별다른 군사적 충돌이나 소동없이 번영, 발전하였으며 확장되었다. 아사노 씨는 19세기의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이곳을 지배하였다.

히로시마는 에도 시대히로시마 번의 수도 역할을 했고 1871년폐번치현 이후에 도시는 히로시마 현의 현청소재지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도시화에 따라 히로시마는 일본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1870년대에 정부의 후원을 받는 7개의 영어 학교 중 하나가 히로시마에 세워졌고 1880년대에 히로시마 현령이었던 센다 사다아키의 노력으로 우지나 항이 건설되었고 히로시마는 중요한 항구 도시가 되었다. 1894년산요 철도가 히로시마까지 연장되었고 청일 전쟁 때 군사 수송을 위해 항구에 철도역이 건설되었다. 전쟁 기간에 일본 정부는 일시적으로 히로시마로 옮겨왔고 천황은 1894년 9월 15일부터 1895년 4월 27일까지 히로시마 성을 본부로 삼았다. 히로시마의 중요성은 청일 전쟁이 끝난 후 1895년 2월 1일부터 1895년 2월 4일까지 양국 대표간의 첫 번째 회담이 열렸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방적 공장을 포함한 새로운 공장들이 히로시마에 세워졌다. 히로시마의 산업화를 더욱 자극한 것은 1904년러일 전쟁으로, 군사 보급품의 개발과 생산을 요하게 되었다. 1915년에 히로시마 물산진열관이 건설되어 신제품의 교역과 전시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 1921년에 히로시마 현 상품진열소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1933년에 히로시마 현 상업장려관으로 바뀌었다.

 
원자 폭탄 투하 후의 히로시마

제2차 세계 대전 때 히로시마는 일본제국 육군의 근거지가 되었고 우지나 항은 일본제국 해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도시에는 또한 커다란 병창이 있어 수송의 중심지였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은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리틀 보이를 히로시마 시의 중심부에 투하했다. 당시 히로시마 시의 인구는 약 34만 명이었으나 약 7~8만 명이 8월 6일 중에 사망했고 전쟁 이후 1945년 말까지 방사능 피해로 인해 시민 약 9~14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도시 건물의 약 69%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약 7%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1945년 9월 17일, 쇼와 시대의 가장 큰 태풍 중 하나였던 마쿠라자키 태풍이 히로시마를 덮쳐 히로시마 현 전체에서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도시 교각의 절반이 파괴되고 도로와 철도도 심각한 피해를 입어 히로시마는 더욱 황폐화되었다.

1949년에 일본 국회에서 히로시마 평화기념도시 건설법이 제정되면서 도시는 재건되기 시작하였으며 같은해 1949년에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설계안이 채택되었다. 또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일부로서 히로시마 현 상업 장려관이 파괴된 자리에 원폭 돔을 만들었다. 1955년에는 평화공원 내에 히로시마 평화기념 자료관이 개관하였다.

1949년에 히로시마는 일본 의회에 의해 국제평화문화도시를 선언하였다. 결과적으로 히로시마 시는 평화와 사회 문제에 대한 국제 회의를 개최할 수 있는 바람직한 위치에 서게 되어 더욱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히로시마 시장의 발안으로 창설된 평화 시장 회의에는 130개가 넘는 나라로부터 3000개 이상의 자치체가 가맹하고 있다.

전후에 중공업과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부흥해 공업도시가 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는 정령 지정 도시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일본에서 11번째의 인구를 가지고있다

 

 

 

 

 

 

 히로시마 기념자료관에서

 

이쓰쿠시마 섬 (일본어: ?島, いつくしま 이쓰쿠시마[*])은 세토 내해 히로시마 만 남서부에 위치한 섬이다. 통상적으로 미야지마 섬(宮島)이라고 불린다. 히로시마 현 하쓰카이치 시에 배속되어 있다. 일본 3대 절경중 하나이다. 섬에는 세계유산이쓰쿠시마 신사가 있다. 1952년 (쇼와 27년) 국가 특별사적 및 특별 명승지로 지정되었으며, 미센 산의 원시림은 천연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또, 1934년 (쇼와 9년) 이 주변 해역은 세토 내해 국립공원으로 편입되어 자연보호법에 따라 특별보호구역이다.

 

이쓰쿠시마 신사는 아스카 시대593년 이쓰쿠시마 섬의 호족 사에치 구라모토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모습을 띠게 된 건 다이라 가문이 권력을 잡은 헤이안 시대 말기이다.

센고쿠 시대 모리 모토나리스에 하루카타를 격파하고 주고쿠 지방의 패자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이쓰쿠시마 전투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후 모토나리는 신성한 섬을 전장으로 끌어들인 일을 수치로 생각해 이 섬의 자연을 보호했다고 한다.

 

이쓰쿠시마 섬은 신성한 섬으로 벌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자연 상태의 원시림을 가지고 있다. 식생은 적송이 대부분이며, 해발이 낮은 지역에서는 생육하기 힘든 전나무등도 볼 수 있다. 또,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을 구경할 수 있어 케이블 카가 설치된 표고 535m인 미센 산 정상부까지 오르며 단풍을 즐길 수 있다.

섬에는 다수의 사슴원숭이가 살고 있다. 원숭이에 관해서는 에도 시대 어디에도 기록이 없으며, 아마 근대에 들어서면서 쇼도 섬에서 건너갔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사슴에 관해서는 근대 이전부터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쓰쿠시마 신사에서는 신성한 동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후 미군이 이쓰쿠시마 섬에 와서 사슴 사냥을 했기 때문에 종적을 감춘적도 있었다. 현재 사슴은 나라 현에서 이송해온 것이다. 썰물때 모래사장에서는 많은 집게를 볼 수 있다.

근년에 들어 이쓰쿠시마 신사의 건물과 도리이 부근에서 해초인 파래가 무성해 경관을 해치고 있다. 또, 썩은 악취도 나기 때문에 미야지마 관광협회와 미야지마 정 사무소, 자치회가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매년 청소를 하고 있다. 왜 파래가 무성하게 자라는 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수질 악화와 수온 상승이라는 말이 있지만, 히로시마 만은 고도 성장기에 비교해서 오히려 대폭 개선되왔다. 오히려 너무 깨끗해서 양식등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쓰쿠시마 섬 이외의 지역에서는 파래의 개체수가 급증하는 예는 없었다. 오히려 감소하는 지역도 있다. 이 때문에 간척사업에 따른 해류의 변화가 영향을 끼쳤다는 의견도 있다.

또, 사슴이 너무 번식해서 먹이 부족으로 관광객의 도시락과 식료품, 종이류 등을 먹어 골치를 앓고 있다. 현재 섬에 서식하고 있는 사슴에 수는 추정치로 약 600마리다. 관광협회에서 사슴의 뿔을 자르고 있지만, 뿔 달린 사슴을 만날 경우도 있기 때문에 다칠 우려도 있다. (너무 번식하면 섬 주변환경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매너를 지켜야한다.)

 

 

 

 

 

 

 

 

 

 

 

 

 

 

 

 

 

 

 

 

 

 

 

27일아침에 슈퍼가는길~~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반적으로 개화기 이전까지 조선일본 에도 막부에 파견한 대규모 사절단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일본인 입장에서 조선 통신사라고 명칭했을뿐 정확한 명칭은 통신사이다.

 

일본 열도에 파견된 사신에게 붙은 통신사라는 명칭은 고려 시대에도 존재한 것으로 보이나,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통신사라는 명칭만을 사용하지 않고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명나라라는 동일한 사대국을 가진 동등 외교 관계의 국가로서 파견하는 외교 사절로, 왜구의 단속 요청, 대장경의 증정 등을 주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사절들 중에도 일본 막부의 새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의 사절들이 있었다.

1510년 중종 5년 발생한 삼포왜란을 계기로 세종 이후 파견되던 일본과의 사절 왕래는 끊겼으나 선조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끈질긴 요청으로 다시 파견하게 된다.

1590년 일본의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다. 조선은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과 역시 동인이었던 허성을 서장관으로,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여 1590년 3월 6일 출발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대립하여 손발이 맞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591년 음력 1월 28일 일본 교토에서 귀환한 통신사 일행은 3월 조정에 상반된 보고를 내놓게 된다.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과 동인이었던 서장관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였고,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조정에서는 그의 의견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는 이미 명을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침략에 대한 암묵적인 대비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연도 정사 부사 종사관 제술관 인원 특징
1428년(세종 10년) 박서생 이예 김극유 - - -
1439년(세종 21년) 고득종 윤인보 - - - -
1443년(세종 24년) 변효문 윤인보 - - - -
1590년(선조 23년) 황윤길 김성일 허성 - - 1590년 3월 6일 출발
1596년(선조 29년) 황신 양방형 이종성 - - -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나, 도요토미를 대신하여 들어선 에도 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쓰시마 번을 통해서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 끌려간 포로들을 쇄환하기 위해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1607년(선조 40년)에 강화를 맺었다.

그에 따라 1607년부터 1624년까지 3회에 걸쳐 사명당 유정을 비롯한 사절을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의 주 임무는 일본과의 강화와 그 조건 이행의 확인, 일본의 내정 탐색, 조선인 포로 및 유민 송환 등이었다.

그 뒤 조·일 국교는 형식상 조선이 한 단계 높은 위치에서 진행되었다. 일본 사신의 서울 입경은 허락하지 않고 동래의 왜관에서 실무를 보고 돌아가게 하였다. 일본은 조선의 예조참판이나 참의에게 일본 국왕의 친서를 보내와 사신 파견을 요청해 오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60여 차에 걸쳐 차왜(差倭 : 일본에서 보내는 사신)를 보냈으나,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통신사의 정사(正使)는 보통 참의급에서 선발되었으나 일본에 가서는 재상 또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연도 및 날짜 정사 부사 종사관 제술관 인원 특징
1607년(선조 40년) 여우길 경섬 정호관 - 467 국교 회복
1617년(광해군 9년) 오윤겸 박재 이경직 - 428 오사카 전투 직후에 파견
1624년(인조 2년) 정립 강홍중 이계영 - 300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취임 축하
1636년(인조 14년) 임광 김세렴 황호 권칙 475 병자호란 중에 파견
1643년(인조 21년) 윤순지 조경 신유 박안기 462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탄생 축하
1655년(효종 6년) 4월 20일-
1656년(효종 7년) 2월 20일[1]
조형 유창 남용익 이명빈 488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취임 축하
1682년(숙종 8년)
5월 8일-11월 16일[2]
윤지완 이언강 박경후 성완 475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취임 축하
1711년(숙종 37년) 5월 15일-
1712년(숙종 38년) 3월 9일[3]
조태억 임수간 이방언 이현 500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취임 축하
1719년(숙종 45년) 4월 11일-
1720년(숙종 46년) 1월 24일[4]
홍치중 황선 이명언 신유한 479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취임 축하
1748년(영조 24년)
2월 12일-7월 13일[5]
홍계희 남태기 조명채 박경행 475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취임 축하
1763년(영조 39년) 8월 3일-
1764년(영조 40년) 7월 8일[6]
조엄 이인배 김상익 남옥 472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취임 축하[7]
1811년(순조 11년) 김이교 이면구 - 이현상 336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취임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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