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山에 뜨는 달은 雲門의 떡이요 東天에 흐르는 물은 趙州의 茶로다 山山水水頭頭 어느것이 참 三昧고 구월 국화는 구월에 핀다.
배고프면 떡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신다. 要用便用이라 보게되면 보고 듣게되면 들어라. 이것이 곧 平常心이다.
不受人惑 사람들이여 속지 말지어다. 운문의 떡도 다만 떡일 뿐, 배고프면 찾게되는 다만 떡일 뿐, 조주의 차도 목구멍을 적시는 물에 불과하다.
물은 차갑고, 불은 뜨거우며 구월의 국화는 구월에 핀다. 이것이 곧 法性이다.
欠少什麽?(흠소심마?) 무엇이 부족하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한가? 지금 내가 서있는 법당 앞이 곧 진리의 자리이다.
풍경은 울지않고 겨울빛은 의외로 따스합니다 언어가 끊긴 처마밑. 마음이 부처를 찾지못해 두리번거립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종교는 설익은 밥알처럼 겉돌기만하고 법당 안 부처님은 얻어입은 옷처럼 몸에 맞지 않습니다.
부처를 찾아가는 길은 구도의 길이 아니라 나를 다독이는 길입니다.
스스로를 위무하고 보듬는 길입니다. 보듬다 보듬다 그 일조차 싱거워지면 남이라도 보듬을 날이 올것입니다. 그러기에 즐겁습니다. 힘이 납니다.
겨울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눈은 길을 만들지 못하고 응달녁으로 밀려나 버렸습니다.
그래도 그늘진 길은 여전히 살얼음이라 조심 조심 걸어 오릅니다. 지난 일년 산을 너무 무리하게 탄 탓인지 양 무릎이 성하질못합니다. 의사로서 매일 환자를 질책하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고보면 그러지도 못하는 법입니다. 주차장에서 한 20여분 걸어가자 아직 풋기를 벗지못한 작은 절집 하나가 나옵니다. 오덕 선원입니다.
五觀偈
계공다소양피래처 ( 計功多少量彼來處 )
촌기덕행전결응공 ( 忖己德行全缺應供 )
방심이과탐등위종 ( 防心離過貪等爲宗 )
정사양약위료형고 ( 正思良藥爲療形枯 )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불교에도 식사전 기도가 있다는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욕심과 도업 사이에 오래된 양심이 바둑돌처럼 끼여 혀끝이 까슬거립니다.
그동안 정말 허기로 먹고 욕심으로 배를 채워왔습니다 생각해보면 비단 먹는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심결에 반복한 수많은 일들이 다 의미를 모른 채 반복되어 졌을것입니다. 그렇다고 오관게를 작은 종이에 적어 지갑에 넣어두고 식사할 때마다 꺼내 읽는것도 어색할것 같습니다. 내 나쁜 기억력에 필경 이 기도문을 외우지도 못할터이니 앞으로는 오관게 석자만이라도 떠올린 후 수저를 드는정도야 할 수 있겠지요. 나이가 들어 종교를 가진다는거 정말 쉽지 않습니다.
찬은 입에 잘 맞았습니다 정갈하고 담백한 식사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마애불을 구경갔습니다.
삼십여분 오르막을 지속적으로 오르자 몸에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옷을 하나 하나 벗고 모자도 바꾸어 써봅니다. 뒤를 돌아보니 오랜 만에 산길을 오르는 아내도 오르막이 힘에 부치나 봅니다. 시나브로 여린 햇살을 벗삼아 산을 오릅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입니다. 단석산에 오르려던 계획은 취소되고 신선사까지만 오르기로했습니다.
신선사에 오르자 멀리 오봉산이 조망되고..
멀리 부산성을 이고 있는 오봉산이 보입니다. 신선사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건천 방향의 풍경은 마치 부석사에서 소백산을 바라보는듯 풍경이 경건합니다. 절집은 산야를 어늑하게 조복하고 차지도 넘치지도 않은 산들의 물결이 가슴께에서 일렁거립니다 걸망처럼 어깨에 맨 가방을 내려놓고 늘 하는 버릇처럼 그윽히 산야를 바라봅니다. 풍경이 나도 모르는사이에 크다란 위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불국에 들어선듯한 설레임이라 할까요. 향이 깊은 차를 마신 그런 마음이 듭니다
완만하기 그지없는 육산인 단석산 산중에는 뜻밖으로 역사를 간직한 바위들이 많다. 단석산은 김유신이라는 실명의 전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서 깊은 산이다. 하지만 유적이라는것이 그렇다. 아무리 유서깊고 의미가 큰 보물이라 할지라도 소경 앞에 아름다운 색채의 그림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듯이 그 가치가 자신에게 와 닿지 않으면 그냥 바위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신선사 미륵전에 들어가면 바위 속 부처를 만나게 될까, 아니면 부처를 싸고있는 바위의 보자기를 만나게 될까.
.
신선사 미륵전은 ㄷ자 모양으로 솟아오른 돌기둥을 석실로 조성해 만든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이다. 이곳을 시원으로 군위와 토함산의 석굴사원이 만들어졌다. 신선사 마애불상이 귀중한 것은 남쪽바위에 남아있는 명문과 조각상에서 볼 수있는 당대의 복식 때문일 것이다. 역사를 위한 스케치! 이 위대한 유산들이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고리인 셈이다.
공양상
참 소박한 모습의 도들새김이다. 너무 소박하여 귀여운 아이들을 보듬어 안듯 돌에 뺨이라도 부비어 보고 싶다.
이 새김에 더 정이 가는것은 그들도 나와 함께 중생으로 분류되는 동지들이기 때문일것이다. 버선 모양의 모자를 쓰고, 허리가 강조된 풍성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발 한발 부처님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라니!
이 풍성함이 오늘날 앙드레김의 복식으로 전해진것일까 마치 그가 디자인한 예복을 입고있는 느낌이 들만큼 친근감이 간다. 차를 공양(차의 유래는 828년 신라 사신 대겸이 중국으로부터 종자를 얻어와 재배한 이후 지리산 주위 사찰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는데 이 마애불이 조성된시기에도 차를 공양하는 풍습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모습이 차를 공양하는 상이라면 아무턴 차가 재배되기 훨씬 이전 부터 이런 풍습이 있었다는것을 알 수 있다)하는 이의 신발 코가 살아있는듯 날엽하다.
하지만 차를 공양하는 모습이라는 단석사 지킴이의 설명과는 달리 나는 어쩐지 향로를 받치는 상일것이라는 느낌이 더 든다.
좌로부터 여래, 보관이 생략된보살,여래,미륵반가사유상
불화라기보다는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운 조각이다. 주제에 맞는 구체적인 설정이라기보다는 어딘지 갖다 모은듯한 느낌. 여래와 보살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는듯한 자유분방한 스케치다. 그래서 대단히 익살스럽다. 여기 어디에도 종교적 근엄함을 찾아 볼 수 없다. 부처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더 부각된 까닭일까, 절대자를 향한 구도자의 고뇌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살아난다. 생동감이란 바로 이런것이다.
모두 왼손을 들어 본존불로 인도하는 양상이다.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의 모습같다. 주불에 비해 너무도 작게 양각된 여래,보살상등이 너무도 소박하다. 그래서 귀족 중심의 기도처라기보다는 일반 민초들의 기도도량이었을거라 더 짐작하게된다.
본존 미륵불
둥글고 원만한 얼굴의 장육존상이다, 장육은 부처님의 키가 일장 육척 즉 4.8m에 이르렀다는데서 따온것이다. 머리 위로 솟은 볼록한 덩어리는 2단의 육계인지, 머리를 묶은 상투인지는 불분명하나 상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상투와 더 비슷해 보인다. 통견의 법의는 u자형으로 자연스럽고 안으로 내액의가 보이며 수인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여원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다.
8.2m의 바위면에 장식미가 없는 소박한 돋을 양식의 구조로 질박하지만 상투적이지는 않고 부처이면서도 인간적이며 인간적이면서도 근엄한 佛卽人의 면모가 느껴진다.
수직 혹은 직립
두가지 스타일의 인생이있다.
두가지 형태의 선택이 있다. 수직과 수평 삶은 양자의 선택을 강요한다.
두발로 서느냐 아니면 땅바닥에 가로 눕느냐.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나는 단지 비탈에 서 있는 나무일 뿐이다. 수직도 수평도 아닌 세계, 비탈.
청춘이 그랬고 청춘이 식어버린 현실의 밥그릇이 또 그랬고 수평과 수직의 글라디올러스가 그랬다
8m에 달하는 수직의 미륵불을 바라보며 1500년이 지나도록 도래하지 않는 쓸쓸한 기다림의 시간을 생각해본다. 그는 서 있고 나는 이렇게 앉아있다. 내가 서게될 미래는 언제인가?
먼 내세인가 아니면 기다림의 내일인가?
생멸의 상을 끊고 나면 바로 코앞이 내세라는데
망상과 망념 사이에 몰록 떠오르는 이 기분 좋은 각성의 순간이 바로 조금전 그렇게도 기다렸던 나의 내세가 아닐까.
西方을 지키는 지장 보살
마모가 심하다. 지장보살 하시는 일만큼 존상이 측은하다. 오른 손에 든것이 꽃인지 석장인지는 확실치 않다. 복장은 단순하고 장식은 없다. 아니 확인할 수 없다. 민초의 보살들은 늘 이렇게 소박하다.
관세음 보살
관세음 보살로 추정되는 6m의 보살상이다 상반신에는 법의를 걸친 흔적은 없으며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 손으로 뭔가를 받치고 있는듯한 인상을 주는데 주로 보병을 받치고 있는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영락 없이 아기를 안고있는 어머니 상이다. 물론 당연히 이런 모자상을 불화로 새긴 전례는 없다. 적어도 佛界에서 만큼은 여성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쨌던 모성이 느껴지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상인것은 사실이다.
신바람이 나서 단석산 마애불을 설명하시는 단석산 지킴이.
도대체 유리 온실같은 지붕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다. 철 구조물에서 녹물이 떨어져 바위를 오염시키는것도 문제가 된다.
마애불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처리제를 사용하여 바위 표면을 회반죽처럼 만든것도 불만이었다.
불만이 브라브라 쏟아졌지만 불만의 한편으로 문화재에대한 극진한 사랑도 느껴졌다.
털끝 하나 걸리지 않을것같은 적멸한 공간 속에 문득 느린 그림자 하나가 운다.
세상은 法을 봉하여 열리지 않았고 미명의 어둠 속에 如來는 오지 않았다.
나는 막 잠에서 깨어난지라 동서남북이 여전히 昏昏하고 이유없는 근심이 마음을 흐린다.
운문의 호떡과 조주의 차
하나의 마애불을 두고 수많은 육도 중생이 끊임없이 발심을 일으키니 운문의 호떡이나 조주의 차처럼 삼켰다 토하고 마셨다 토하기가 끝이 없다.
먹고 마시되 진실로 취한줄 알면 공양을 마친것이요, 불심을 발하되 마침내 머무름이 없으면 깨닫은 것이다.
神仙寺作
석굴사원 남쪽벽에는 400여자의 명문이 새겨져있다. 이 명문을 통해 이 곳이 신선사 절터임을 알게되었다.
청석 위의 공양상
차를 공양하는 상에 비해 신은 신발은 다소 투박해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란분절에 피는 부처꽃일까? 알알이 알곡이 꽉 여문 벼 이삭일까?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흔들릴것 같다. 화학처리를 마친 청석의 석질이 마치 시멘트처럼 느껴져 비록 질박해 보이기는 하지만 박수근의 그림에서 보는 화강석과 같은 뽀얗고 따사로운 느낌은 없다.
도저히 있어야할 위치도 아닌 곳에 뜬금없이 보살상 하나가 양각되어있다.
분명히 이 석굴 속 조각 중에 이 보살상을 제일 마지막으로 조각하였을성 싶다. 마치 모든 작업들을 끝내고 수결을 하듯 인장 하나 찍어놓은듯한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보살상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상상이 멀리 날개짓하여 경주 하늘에 이른다. 이 불사를 위해 불려 온 석공은 경주나 혹은 이웃나라에서 모셔온 전문 석공은 아닐것같다. 어느 겨울날 일감이 없어 놀고있던 그냥 돌깍는 재주 하나가 밑천인 그런 범부였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가 남긴 최후의 보살상은 성불을 염원하는 기도의 마음이 아니라 결혼해 귀한 아들 하나 얻고 그저 처자식 잘되라는 작은 소망 하나 담은 그런 소박한 기원의 표현이었으리라.
보살상이라기보다는 아기를 안고있는 어머니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석굴이 조성되기 전 그 옛날에는 이 바위를 탱바위라 불렀는데 마을 총각이 이 곳에서 노인이 바둑을 두는것을 구경하다 집으로 돌아갔더니 50년의 세월이 지나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어있었다는 구태의연한 전설이 전해져 이 곳 절 이름이 신선사로 붙려지게되었다한다.
별 재미도 감흥도 없는 전설이지만 전설 이전의 바위의 존재, 미륵불 이전의 다만 바위였을 시절의 존재감이 탱바위란 이름에서 팽팽히 전해진다. 팽바위 이전의 마애불의 면모는 무엇일까? 다만 마음인가?
아내의 웃는 모습이 미륵부처님의 얼굴을 그대로 닮았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는 나아가야한답니다. 나는 당신의 자성에 이끌렸습니다
당신의 極에 내 고통의 극을 세워놓습니다 그 고통의 촛대에 이제 희망의 불을 밝힙니다.
내가 쇠퇴해가거나 혹은 잊혀져가는 일이 한 생의 패배가 아니라 지혜임을 일깨워주십시요.
시간이 나에게 희망을 빼앗아가는것이 아니라 삶의 여백을 더 꼼꼼히 채워가는 과정임을 일깨워 주십시요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나는 나아가야한답니다.
고요한 산길 말없이 나섰으니 겨울에 젖어드는 마음이 寥寥(요요)하다.
북풍한설에 경계가 있으랴 가없는 창공은 어디서 소리를 만들까
어름나무
나는 자유를 모르지만
단석산 정상의 단석
김유신이 난승에게 전해받은 보검으로 단칼에 잘라냈다는 단석. 단석산은 신라의 중악으로 본래 월생산 혹은 달래산으로 불리었으나 김유신의 전설이 전해지고부터 본격적으로 단석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천주암
칼로 잘라놓은것 같다고 하여 이곳을 단석이라고도함
단석산 송선리 마애불
선각으로 조성된 희미한 모습의 마애불이 포근한 폐사지 위에 고즈넉히 앉아있다.
부산성이 있는 오봉산은 경주의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수도 경주를 지키는 요충지였다.
이 산 아래 있는 옥문지에서 어느날 개구리가 사나흘을 극성스레 울어대므로 이를 이상히 여긴 백성들이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왕은 즉각 군사 2000을 보내어 여근곡에 매복해있던 백제병사 500을 죽였다.
뒷날 신하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어찌 여왕(선덕여왕)께서 이 사실을 아셨는지를 여쭈었더니 여왕께서 말씀하시길 "개구리가 성을 내어 울어대는 모습이 병사를 가리키며 옥문지의 옥문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것이다. 여성은 또한 음이요 음은 백색을 상징하니 백색은 곧 서쪽을 뜻한다. 그래서 서쪽에 있는 여근곡에 군사가 숨어있는 줄 알았으며 남성은 여성의 음문에 들어오면 필시 죽게되니 쉽게 잡을 수 있을것을 알 수 있었다."
음기가 너무 강한듯하여 더 이상 서쪽으로 가기 싫었다.
오봉산 여근곡이 빤이 보인다. 빤이 보이는 그곳을 매직아이를 들여다보듯 뚫어지게 바라보아야하는것은 무언가 모양이 이름값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 만법이 다 그렇듯 더 깊이 본다고하여 더 잘 보일리 없는 그냥 그만한 시골 둔덕.
발기도 따르지 않는 늙은 여인의 속곳을 한량없는 몰염치로 바라보는것은 대체 어느 나라의 道일까?
이 보다 더 확실한 안내가 있을까!
따뜻한 봄날 진달래 만개하는 날 아내 손잡고 섭렵의 기분으로 오르고 싶은 산
나의 산은 언제나 높다 길섶 무너진 무덤들도 내게는 다 넘야할 산이다.
오봉산 아래 봉긋 여실을 닮은 저 둔덕이나 단석산 중턱의 곰살맞은 마애불은 다 내게는 산이다.
그 산은 높은 산일까 ? 넘지 못할 산일까
돌아가는 길
씹어도 씹어도 질기기만한 섹스처럼 내 걸음은 늘 소화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습관 속에 홀연히 반짝이는 불빛과 같은걸까? 그것을 찾아갔던 길이라면 나의 걸음은 늘 이렇게 맹목적이다.
여근을 앞에두고
覺이란 이름으로 마감될 그 언제인가를 망연히 희구한다.
코 끝에 손이 간다.
- 후 기-
불을 아무리 말하여도 입을 태운적이 없듯 여근이 아무리 적나라한들 범부의 양물은 미동도 않는다. 미륵전 부처님도 불러내지 못한 불심을 뉘라서 탓할것인가. 믿음이란 실망할 수 없는것이 아니라 희망을 지키고 가꾸는것.
|
첫댓글 하이 이상훈 작가님 반갑습니다. 이상훈 거사님... 삼라만상이 부처 아님이 없다하며 나무 바위 폭포수 등등이 내려주는 법문을 무정설법이라...도심깊은 선승이 주장자를 후려치며 난해한 공안을 토해내듯 눈밝은 거사님은 자연속의 부처님 가르침을 폭포물쏟아지듯 거침없이 토해내어 단석산계곡이 야단입니다. 이렇게 불교의사회의 첫 야단법석은 의미심장하게 마무리 장엄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앞으로 미혹한 이 중생은 신나게 목탁이나 후려칠테니 계속 좋은 법문 부탁하오 ...평광합장
예쁜 사진과 좋은 글,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
잘 보고, 잘 새기고, 잘 듣고 갑니다.
여러 자료와 함께 사진 정리하여 올려줘 고맙습니다.
엊그제 불교의시회 법회에 참여한 덕으로 이상훈 선생의 좋은 글과 사진을 볼 수 있는 복덕을 누렸네요~~
실은 지난 연말 오덕선원 원행은 개인적으로 매우 바쁜 일이 있어 참여할 수 가 없어서 좀 아쉬웠는데,
이렇게 좋은 사진과 함께 이선생의 감회(?)까지 함께 하니, 마치 내가 직접 가서 본것보다 더 감동적이구려~~ ^^
올해는 이런 모임 가능한한 참석하도록 하겠읍니다.이 욕심을 끊지 못하는 것도 .애고.
작가님! 감사합니다.반쯤은 본 것으로
스스로 자위해 봅니다.
인봉회 홈피에서 이원장님의 글/사진을 봤는데 불교의사회에서 다시보게되어 더 좋습니다.
그날의 감회가 다시 새롭고 그날 야외에서 본 이상으로 더 좋은 여운이 남고 많이 배우는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불 하십시다 이기욱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