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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8권
9. 수다라품(修多羅品)[1], 보시ㆍ지계ㆍ수행
이미 정(定)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니,
[수다라]
지금부터 수다라(修多羅)1)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일체지(一切智)께서 설한 바인
수다라의 묘한 뜻을
내 이제 그 일부를 설명하리니
수행자는 잘 들어라.
일체를 아는 까닭에 ‘일체지2)’라고 말한다. 일체란 십이입(十二入)3)으로, 그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있어서 일체를 안다는 것이다.4)
‘설한 바’란 일체지를 지닌 사람이 몸소 설한 것을 말한다.
‘묘한 뜻’이란 그 내용이 깊디 깊은 특성을 지니고 미묘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미묘한 뜻이 수다라에서 설해지는 까닭에 ‘수다라의 묘한 뜻[修多羅妙義]’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제’란 이 논(論)을 [말하는 시점]을 말한 것이고,
‘일부[少]’란 모니께서 말씀하신 바가 무량무변한 까닭에 ‘일부를 설명하리라’고 말한 것이다.
‘수다라(修多羅)’란 일반적으로 다섯 종류의 뜻이 있다.
첫째는 출생(出生)의 뜻이니, 즉 모든 의미가 이 수다라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둘째는 용천[泉涌]의 뜻이니, 즉 그 의미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현시(顯示)의 뜻이니, 즉 모든 의미를 뚜렷하게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승묵(繩墨)의 뜻이니, 즉 모든 잘못된 것과 바른 것을 가려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결만(結鬘)의 뜻이니, 즉 제법을 꿰뚫어 통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뜻이 곧 수다라의 뜻이다.
비록 의미는 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말로 인해서 의미가 뚜렷이 나타나는 까닭에 ‘의미를 말한다’라고 한 것이다. 즉 설법으로 인하여 이름이 일어나고 이름으로 인하여 뜻이 밝혀지는 것이다.
‘잘 들어라’라고 한 것은 모름지기 그 마음을 한 곳에 모아 결정코 잘 들으라는 뜻이다.
[보시ㆍ지계ㆍ수행의 종류]
【문】세존께서는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수행을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하나에 몇 종류가 있는가?
【답】
은혜 베풀고[惠施] 청정 계율을 지킴에는
각기 네 종류가 있고
선을 닦음에는 둘이니
이것을 공덕이라 부른다.
세 종류의 두려움을 두려워하여 방편으로 세 가지 두려움을 건너게 하고자 하는 까닭에 세존께서는 간략하게 이 세 종류의 공덕을 말씀하신 것이다.
빈궁(貧窮)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방편으로 제도하려는 까닭에 보시를 설하셨다.
악도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방편으로 제도하려는 까닭에 지계를 설하셨다.
생사(生死)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방편으로 제도하려는 까닭에 수행을 설하신 것이다.
[보시의 자성]
【문】어떤 것이 보시의 자성(自性)인가?
【답】
무탐(無貪)과 상응하는 사(思)와
그와 함께 일어나는 동일과(同一果)와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에 태어나는 것
이것이 보시의 자성이다.
무탐(無貪)의 선근과 상응하는 사(思)와 중생들에게 물건을 베푸는 곳[施物處]에서 태어나는 바와 따라 일어나는 신업(身業)ㆍ구업(口業), 이러한 5음(陰)5)이 보시의 자성(自性)이다. 그것은 색과 향기와 맛 등의 구족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원(思願) 등은 보시가 아니지 않는가 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물건에 대해 보시라는 명칭을 말하는 것은 세존께서 시주의 마음을 개발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생각하고 원하는 마음을 견고히 하고자 하는 까닭에 물건에 대해 보시라는 명칭을 말하는 것이니, 곧 이 마음은 물건을 보시하는 곳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네 종류의 보시]
【문】앞에서 네 종류의 보시를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보시의 종류에 해당되는가?
【답】
이른바 스스로를 거두어들이거나
또한 남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며
혹은 둘을 함께 거두어들이거나
혹은 둘을 모두 거두어들이지 않는 일이다.
어떤 이는 자신을 거두어들이는 까닭에 베풀고,
어떤 이는 남을 거두어들이는 까닭에 베푼다.
또 어떤 이는 자타를 모두 거두어들이는 까닭에 베풀고,
어떤 이는 자타를 거두어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해 베푼다.
[곧, 아라한이 부처님께 공양드림은 은혜를 갚기 위한 까닭이지 자신과 남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자신을 거두어들이는 것이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한 자는
지제(支提)에 공양 드리고
범부의 욕망을 벗어나니
이것을 자안시(自安施)라 부른다.
성인으로서 아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자6)와 범부로서 욕망을 벗어난 자가 지제(支提)[복을 청하는 곳을 지제(支提)라고 한다]에 공양드림은 곧 스스로를 거두는 보시이다. 보시로써 욕계의 보를 받게 되기 까닭이다. 즉 아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자7)가 욕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범부라면 욕망을 여의고 색ㆍ무색계에 태어난다고 해도 욕계의 후보(後報) 및 부정보(不定報)를 받게 된다.
이것을 ‘스스로를 거둔다’고 하며 ‘남을 거둔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 하면, 지제는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욕망을 벗어난 범부 아닌 자가
그가 현재 받고 있는 과보 제외하고
여러 중생들에게 베푸는 일
이것을 이름하여 남을 거두는 일이라고 한다.
현법(現法)의 과를 일으키는 경우를 제외하고 아라한(阿羅漢)이건 아나함(阿那含)이건 만약 남은 것을 중생들에게 베풀 경우 이것을 ‘다른 사람을 거두는 것’이라고 표현하니, 자기를 거두는 일이 아니다.
아라한의 생(生)은 자분(自分)이 아닌 까닭이다.
아나함은 비록 다시 생명을 부여받게 되지만 그가 태어날 곳은 색계와 무색계이며 또한 과보를 받지도 않는다. 이것은 인과가 끊어진 까닭에 따로 경계를 건립한 것이다.
아직 욕계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성인과
이미 욕망을 벗어난 범부가
여러 중생들에게 베풀 경우
이것은 둘을 함께 거두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성인으로서 아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자와 욕망을 벗어난 범부가 중생들에게 베푸는 것은 둘을 함께 거두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욕망에서 벗어난 범부 아닌 사람이
그 현법(現法)의 과를 제외하고
지제(支提)에 공양드린다면
이는 둘 모두에 속하지 않는다.
현법(現法)의 과보로 보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아라한이건 아나함이건 지제에 공양 드리는 것은 스스로를 거두는 일도 아니고 남을 거두는 일도 아니다. 아라한은 무생이기 때문이다.
아나함의 경우는 비록 생이 남아 있기는 해도 욕계는 자기영역이 아닌 까닭에 스스로를 거두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지제는 중생이 아닌 까닭에 남을 거두는 일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본래의 은혜를 기억하고 생각하여 은혜를 갚고자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비록 열반하셨다 하더라도 아직 지제에 공양 드리는 것이다.
혹은 다른 사람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부처님의 탑에 공양 드리는 것이 있나니
무량한 중생들이 보고 듣고
모두 따라 기뻐하는 마음 일으킨다.
혹은 지제에 공양하더라도 역시 다른 사람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깃발을 세우고 꽃 덮개로 탑을 씌우고 향을 사르고 꽃을 흩뿌리며 탑에 공양드린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 중 이 광경을 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 기뻐하게 하여 생천해탈의 인이 되게 한다.
그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수다라(修多羅)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찍이 세우지 아니하였던 곳에 지제를 세우면 범천의 복을 받는다”고 하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거두어들이게 되는 까닭에 ‘범천의 복[梵福]’이라 표현하신 것이다.
【문】어떤 것을 규정하여 ‘범천의 복’이라 말하는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의 경지에 근접하는 보살을 제외한 모든 나머지 중생이 능히 큰 부자가 되고 큰 힘이 생길 수 있는 증상과(增上果)를 낳는 업, 이것이 곧 범복(梵福)의 양(量)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계가 이루어질 때 모든 중생과 기세계(器世界)가 생겨난다. 이것은 능히 기세계를 일으키는 업이니, 이것을 범복의 양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 보시는 [다음과 같이 설해진다.]
이른바 그 희망 등의
일곱 가지 보시는 높은 것이 아니다.
여덟 번째의 마음을 장엄하는 것
이것을 가장 뛰어난 보시라 부른다.
[여덟 종류의 보시]
세존께서는 여덟 종류의 보시를 말씀하셨다.
즉, 희망시(希望施)ㆍ포외시(怖畏施)ㆍ반보시(反報施)ㆍ기보시(期報施)ㆍ가법시(家法施)ㆍ생천시(生天施)ㆍ구명시(求名施) 및 마음을 장엄하거나 마음을 조복(調伏)하기 위해, 수행에 순응하기 위해, 혹은 최상의 뜻을 얻기 위해 보시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희망시(希望施)8)란 복전(福田)을 선택해 많은 과보를 구하고자 찾아오는 자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찾아와서 구하는 자에게 베푸는 보시를 아비달마에서는 희망시라고 말한다.
포외시(怖畏施)란 실로 망실에 대한 우려 때문에 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음을 보고는 오히려 베풀어서 잃어버리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9)
다음 반보시(反報施)10)란 ‘일찍이 상대방 때문에 이익을 얻었는데 어떻게 그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해서 보시하는 것이다.
다음 기보시(期報施)란 가령 남에게 베풀고는 그 돌아오는 과보를 바라는 것이다.
다음 가법시(家法施)11)란 선인(先人)에게 배워 보시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생천시(生天施)란 하늘 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까닭에 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 구명시(求名施)란 칭찬과 명예 때문에 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일곱 종류의 보시는 지혜 있는 사람이면 천하게 여기는 보시이기 때문에 훌륭한 보시가 아니다.
생사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 보시라면 이것을 ‘마음을 장엄하는 보시[莊嚴心施]’라 부른다. 이것은 도방편(道方便)의 보시인 까닭에 재시(財施) 가운데 제일가는 보시이니, 이것을 상시(上施)라 부른다.
이미 보시에 대해 설명하였으니,
[보시의 과]
지금부터 보시의 과(果)에 대해 설명하겠다.
수명과 색과 힘과 안락함과
말재주 등 다섯 종류이니
보시의 과보로서 백천 가지를
베푸는 이가 얻는다.
보시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지만, 다섯 종류의 보시의 과보는 세존께서 보시의 다섯 공덕을 수다라 가운데서 설법하신 것과 같다.
음식을 먹고 나면 수명이 늘어나는데 먹지 않는다면 그렇지 않다. 그런 까닭에 수명을 베푸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말재주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다.
비슷한 원인이 비슷한 결과를 낳나니, 이른바 목숨을 보시한 사람은 장수의 보를 받고 내지 말을 보시한 사람은 변재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마치 외부에 씨앗을 뿌리면 그 종류를 따라 결실을 거두듯이 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수명이란 인간과 하늘 세계의 수명을 말하지 악취(惡趣)의 수명은 아니다. 이것은 유지하는 원인[持因]인 까닭에 시수(施壽)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살생을 벗어나는 일을 많이 닦고 익히면 오랜 수명을 누리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이는 생기의 인[招引因]이기 때문에 이처럼 말하는 것이니,
비유하면 두 종류의 어머니가 있는 것과 같다. 즉 자기를 낳아 주신 어머니와 길러 주신 어머니이니, 살생에서 벗어나는 일은 낳아 주신 어머니와 같고 음식을 베풀어 주는 사람은 길러 주신 어머니와 같다.
축생에게 베푼 다섯 종류의 보시는 그 과보로서 백배의 복을 얻게 하니12), 즉 그 모두가 합쳐진 복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자세히 설명되는 것이다.
그리고 도를 밝히는[見道] 가운데서는 비록 음식을 먹지 않더라도 보시를 받을 수 있다.
이것으로 보시 및 그 과보에 대한 설명을 마쳤으니,
[보시가 곧 과보임]
지금부터 보시가 곧 과보임을 설명하겠다.
[즉시 얻는 과보]
자(慈))와 무쟁(無諍)과 멸정(滅定),
견도(見道) 및 무학(無學)은
그 정수(正受)를 따라서 일어나니
베풀면 곧 과보를 얻는다.
자심과 무쟁삼매(無諍三昧)13)와 멸진삼매와 견도와 아라한과, 이로부터 일어난 뒤에 만약 보시하는 자가 있다면 즉시 과보를 얻는다. 왜냐 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에 대해서 안락하고 요익한 상(相)이 되니, 이 자비심은 자심으로써 몸을 훈습하는 까닭이다. 이로부터 일어난 뒤 베푸는 자는 곧 과보를 얻게 된다.
무쟁삼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에게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한다. 널리 거두어들인 공덕을 몸에 배게 하는 까닭이니, 이로부터 일어난 뒤에 베푸는 자는 곧 과보를 얻게 된다.
멸진삼매(滅盡三昧)는 넓은 공덕이 몸에 배게 됨으로써 또한 열반과 비슷한 경지인 까닭에 이로부터 일어난 뒤에 베푸는 자는 곧 과보를 얻게 된다.
도를 밝히는 단계에서 끊게 되는 번뇌가 영원히 다하게 된다면 성인의 도가 몸에 배게 되는 까닭에 이로부터 일어난 뒤에 베푸는 자는 곧 과보를 얻게 된다.
도를 닦는 단계에서 끊게 되는 번뇌가 영원히 다하게 되면 그 마음이 자재한 경지를 얻어 아라한과(阿羅漢果)에 머물게 되는데, 이로부터 일어난 뒤에 베푸는 자는 곧 과보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미 즉시 얻는 과보를 설명했으니,
[큰 과보]
이제 큰 과보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부모와 병든 사람 및
가르침을 설하는 스승과
부처에 가까이 간 보살들에게
보시하는 자는 큰 과보를 얻는다.
이 다섯 종류의 사람들에게 보시한다면 큰 과보를 얻게 된다.
왜냐 하면, 부모는 낳아 주고 길러 주는 은혜가 있는 까닭에 부모에게 베푸는 사람은 큰 과보를 얻는 것이다.
병든 사람은 의지할 곳 없어서 슬픈 마음을 더 하는 까닭에 이들에게 베푸는 사람은 큰 과보를 얻는 것이다.
설법자는 법신(法身)을 더욱 자라나게 하고 사람들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여 보여 주는 까닭에 이들에게 보시하는 사람은 큰 과보를 얻는 것이다.
부처의 경지에 가까이 간 보살들은 공덕을 쌓고 모아 널리 중생들을 거두어들이는 까닭에 이들에게 보시하는 사람은 큰 과보를 얻는 것이다.
[보시의 청정함]
【문】생각[思]과 원(願)이 뛰어나기 때문에 보시가 청정하게 되는가?
아니면 복전(福田)이 뛰어나기 때문인가?14)
만약에 생각과 원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은 왜 복전을 찬탄하셨으며,
또 만약 복전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왜 한 복전에 보시하는데도 과보가 같지 않은가?
【답】생각과 원(願)이 뛰어나기 때문에 보시가 청정한 것이다.
복전의 인력(因力)으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생각과 원 및 이에 수반하는 마음 등을 지칭하여 보시의 복[布施福]이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순박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몸과 재산과 구하는 욕구를 벗어나서 지혜행을 따르는 것으로, 이와 같이 베푸는 사람은 큰 과보를 얻는다.
만약 이와 다를 경우 그것은 명칭을 구하여 보시하는 사람으로 뛰어난 복전에 보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인(大人)의 보시가 아니다.
만약 터[田]의 힘으로 죄와 복이 생긴다면, 이루지 못한 터의 힘[田力]에 보시하면 마땅히 무간업(無間業)을 얻게 될 것이다.15)
그러나 그런 과보를 얻게 하지 않는 까닭에 생각과 원의 힘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공덕의 복전은 능히 뛰어난 생각과 원을 일으키게 하니,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복전을 찬탄하신 것이다.
[법시]
【문】이미 생신(生身)을 장양(長養)하는 보시는 알았다.
그렇다면 법신을 장양하게 하는 보시는 어떤 것인가?
【답】
모든 경법(經法)을 훌륭히 설하고
모든 전도(顚倒)을 멀리 벗어나
모니(牟尼)를 비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일컬어 법시(法施)라 한다.
수다라와 비니(毘尼)16)와 아비담에 대하여 진실하게 분별하고 명예와 이익에 집착하지 않으며 널리 중생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이것을 법시라 부른다.
그에게 비록 생각의 집착이 없더라도 전도된 채 설하거나 여래의 진실한 인연을 비방하면서 다른 생각을 한다면 이는 어지러운 마음의 인연이 됨을 알아야 한다.
또한 전도되지 않은 설법을 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번뇌에 물들고 집착한다면,
이는 마치 장사꾼과 같은 것이다.17)
그런 까닭에 게송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모니의 말씀을 모른다면
칼날과 불과 독약 같으니
여기서 훌륭히 분별하면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다.
또한 세 종류의 전도가 있으니, 법에 대한 전도와 사람에 대한 전도와 시절[時]에 대한 전도가 그것이다.
법에 대한 전도란, 마치 어떤 이가 “정상(淨想)을 수습해서 탐욕을 끊는다”고 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18)
사람에 대한 전도란 탐욕스런 자인데, 그를 위해 자(慈)를 설하는 것을 말한다.19)
시절에 대한 전도란 아직 사람의 근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았는데, 그에게 진제(眞諦)를 설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바유가 있으니, 이와 다르다면 전도되지 않은 설법이라 부른다.
이것으로 법시를 설명했으니,
[무외시(無畏施)]
이제 무외시(無畏施)20)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수계 등을 벗어나 설법하여21)
모든 두려움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것
이것을 무외시라 부르나니
능히 빈궁의 두려움을 허문다.
만약 어떤 중생이 계를 받는 일을 떠남으로써 금세나 후세 혹은 두 세에 걸쳐 두려워한다면,
그를 위해 자비한 마음으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곧
‘중생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곧 그대가 지은 로써 두려움 없는 마음을 얻게 하여 주겠다’라고 하니,
이것을 무외시라 부른다.
그의 공포는 마치 빈궁한 자와 같으니,
그에게 진실한 대치(對治)를 주는 것을 무외시라 한다.
이미 무외시를 설명했으니,
[대시(大施)]
이제 대시(大施)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두루 모든 생류(生類)에게
평등하게 계의 율의를 받게 하면
공덕의 흐름이 불어나고 넓어지니
이것이 곧 대시(大施)이다.
세존께서는 오계(五戒)를 대시라 말씀하셨다. 곧, 가없는 중생들을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며, 가없는 즐거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재물의 보시로 일체 중생들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으니, 오직 계(戒)를 받게 하는 일만이 이를 가능케 한다. 이미 오계를 받아 지녔다면 일체 중생이 형체와 수명이 다하도록 생각마다 그 가운데서 일찍이 얻지 못했던 열두 가지의 율의(律儀)를 얻게 된다.
[세 가지 선근의 하나하나가 몸과 입의 작(作)ㆍ무작(無作)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계는 흐르고 상속되어 끊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네 종류의 계]
【문】네 종류의 보시는 이미 알았는데 앞에서 말한 네 종류의 계란 어떤 것인가?
【답】
욕계와 선의 율의와
무루계(無漏戒)의 율의와
단율의(斷律儀)는 두 가지 일로부터 일어나니
이것을 율의의 종류라 한다.
네 종류의 율의가 있다. 즉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와 선율의(禪律儀)ㆍ무루율의(無漏律儀)와 단율의(斷律儀)의 네 가지가 그것이다.
별해탈율의라고 하는 것은 칠부대중(七衆:比丘ㆍ比丘尼ㆍ優婆塞ㆍ優婆夷ㆍ沙彌ㆍ沙彌尼ㆍ式叉摩那)이 받는 계율을 말한다.
선율의(禪律儀)라 하는 것은 유루이며 수생(隨生)인 계율을 말한다. 무루율의(無漏律儀)라 하는 것은 학(學)ㆍ무학(無學)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지키는 계율을 말한다.
단율의(斷律儀)라 하는 것은 욕계의 욕망에서 벗어나 구무애도(九無礙道)에 따라 생기는 계율을 말한다. 그리고 유루일 경우 선율의이고, 무루일 경우 무루계이다.
이 율의에 대해서는 업품(業品)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것으로 네 종류의 계율의 설명을 마치고,
[나머지 네 종류의 계율]
지금부터 나머지 네 종류의 계율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혹은 희망 때문에 계를 받고
혹은 공포 때문에 계율을 지키며
깨달음의 구성요소에 순응하기도 하고
또는 청정하기도 한 계가 있다.
또 네 종류의 계율이 있나니, 이른바 희망계(希望戒)와 공포계(恐怖戒)와 순각지계(順覺支戒)와 청정계의 네 가지가 그것이다.
희망계라고 하는 것은 하늘 세계나 다른 좋은 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까닭에 계율을 지키는 경우를 말한다. 공포계라 하는 것은 자책감을 두려워하거나 다른 사람의 책망과 벌을 두려워하거나 악한 길에 떨어지는 것이 두렵고 살지 못할까 두렵고 나쁜 명예가 두려워 그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사람을 말한다.
순각지계라 하는 것은 마음을 장엄하기 위하여 또는 방편으로 모든 것을 갖추기 위하여 가장 뛰어난 진리를 구하기 위하여, 그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사람을 말한다.
청정계라 하는 것은 무루계(無漏戒)를 말한 것이니, 때묻은 번뇌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청정계를 지니는 방법]
【문】어떻게 하면 청정계를 지니게 되는가?
【답】
근본 및 권속과의 청정과
감각 때문에 부서짐이 없는 것과
정념(正念)을 섭수하는 것과
반열반에 수순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인연이 있어야 지계(持戒)가 청정해진다.
이른바 근본이 청정해야 하고,
권속이 청정해야 하고,
감각 때문에 허물어지지 아니하여야 하고,
바른 생각을 거두어 받아들여야 하고,
바르게 해탈로 향해 가야 하는 다섯 가지 인연이 그것이다.
근본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근본 업도(業道)를 벗어나 뛰어넘는 것을 말한다.
권속이 청정하다는 것은 살생 등에서 떠나는 방편을 말한다.
감각에 허물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은 욕심과 노여움과 남을 해치려는 마음 등 세 가지 감각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괴롭게 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바른 생각을 거두어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과 법과 승단의 생각을 거두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 일 때문에 또한 모든 무기(無記)의 마음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바르게 해탈로 향해 간다고 하는 것은 해탈을 위한 지계를 말한 것으로 이 지계는 몸과 재산 기타 작용을 위한 지계가 아닌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편으로는 이것을 각지(覺支)에 따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다섯 가지 인연으로 지계가 청정해지는데 부처님께서 큰 과보를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마음을 어지럽히고 괴롭게 하는 일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문】이미 모든 바른 수행이 근거하는 계율은 천덕병(天德甁)과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가지 수행]
그런데 두 가지 수행이란 어떤 것인가?
【답】
선과 무색과 무량에
득수(得修)와 습수(習修)가 있다.
부정관(不淨觀)과 안반념(安般念)의
두 가지 수행도 역시 그렇다.
이 모든 선정의 공덕이 마음에 배이게 되면,
마치 꽃 향기가 옷에 배어드는 것과도 같고 꽃 냄새가 삼밭에 배어드는 것과도 같으며, 금을 녹이는 것과도 같다.
그런 까닭에 선정을 닦는 것을 훈의수(熏衣修) 또는 훈마수(熏麻修) 또는 융금수(融金修) 같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현재의 세계에서 닦는 것이 습수(習修)며 미래의 세계에서 닦는 것이 득수(得修)이다. 현재의 세계란 작용하는 세계며 미래의 세계란 일어날 세계이기 때문에 현재에는 지어진 업을 짓고 미래의 세계에는 곧 짓게 될 것이다.
현재란 생겨난 세계며, 미래란 앞으로 얻게 될 세계인 까닭에 현재의 수행이란 눈앞에 나타난 몫이며 미래의 수행이란 앞으로 성취할 몫이다.
선정(禪定)ㆍ무색정(無色定)ㆍ무량심(無量心)은 「정품(正品)」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부정관]
‘부정관’이란 탐욕의 대치이기 때문에 탐욕을 없애는 자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네 가지 탐욕을 대치하는 까닭에 다시 네 종류의 관(觀)을 말하게 된다. 즉
위의(威儀), 몸가짐에 대한 탐욕을 끊기 위해서 죽은 시체를 비추어 보는 수행을 하게 되고,
또 색에 대한 탐욕을 끊기 위해서 청어(靑瘀) 즉 여자의 죽은 시체가 푸른 멍이 든 형태로 변하는 모습 등을 비추어 보는 수행을 하게 되고,
촉감에 대한 탐욕을 끊기 위해서 가죽과 살이 떨어져 나간 뼈만 이어진 모습 등을 비추어 보게 되고,
사는 곳에 대한 탐욕을 끊기 위해서 뼈마디가 따로따로 떨어져 나간 모습을 비추어 보는 수행을 하게 된다.
이 부정관에도 또한 네 종류의 구분이 있다. 즉
물러서는 몫[退分]과 머무는 몫[住分]과 뛰어난 몫[勝分]과 결정된 몫[決定分]의 네 가지가 그것이다.
물러서는 몫[退分]이란 어느 곳에 머물다가 물러서는 경우를 말하며,
머무는 몫[住分]이란 어느 곳에 머물면서 물러서지도 아니하고 나아가지도 아니하는 경우를 말한다.
승분(勝分이란 어느 곳에 머물면 반드시 윗자리로 올라가게 되는 경우를 말하며,
결정분(決定分)이란 그곳에 머물면서 성인의 도에 따르는 경우를 말한다.
이에 해당되는 계는 욕계와 색계이며 그 경지를 말한다면 열 가지 경지가 이에 해당된다.
즉 욕계와 중간선(中間禪)과 근본 4선(根本四禪) 및 이에 수반한 네 가지 경지가 그것이다.
그 의지하는 곳은 욕계의 과(果)이며 그 행을 말한다면 행이 아니다.
그 대상을 말한다면 욕계를 연하고 그 염처(念處)를 말한다면 신념처(身念處)에 해당한다.
그 지혜를 말한다면 등지(等智)에 해당하며, 생(生)을 받는 까닭에 삼매가 아니고 세 가지 근과 상응하며 삼세(三世)에 떨어진다.
과거는 과거를 연하고 현재는 현재를 연한다. 미래는 생멸하는 법일 경우 미래를 연하고 생멸하지 아니하는 법일 경우삼세를 연한다.
이것이 선이면 무기(無記)를 연하고,
학(學)도 아니고 무학(無學)도 아니면 학도 아니고 무학도 아닌 경지를 연하며,
이것이 수도(修道)에서 끊어지는 것이라면 수도로 끊는 일을 연한다.
마땅히 뜻을 연한다고 말해야 한다.
【문】그 경지는 방편으로 얻게 되는가? 아니면 욕망에서 벗어남으로써 얻게 되는가?
【답】방편으로 얻기도 하고 욕망에서 벗어남으로써 얻기도 한다.
만약 욕계의 욕망에서 벗어나면 초선의 경지를 얻게 되고 나아가 삼선(三禪)의 욕망을 여의면 제4선(禪)의 경지를 얻게 되며, 그 후에 방편으로써 눈앞에 나타난다.
[부정관의 방편]
【문】부정관(不淨觀)에는 어떤 방편이 있는가?
【답】부정관을 닦는 사람은 무덤 사이에 이르러 지극히 그 상(相)을 잘 취하고 나서는 다시 좌선하던 곳으로 돌아와 발을 씻고 편안히 앉아서 그 몸과 마음을 유연하게 한다. 그리고 지혜를 덮고 있는 모든 덮개를 벗어나 그 외부의 대상을 취해22) 자기 몸과 나란히 두고는 마음을 묶어 둔다.
곧, 발뼈ㆍ정강이뼈ㆍ허벅지뼈ㆍ넓적다리뼈ㆍ볼기뼈ㆍ허리뼈ㆍ등뼈ㆍ겨드랑이뼈ㆍ손뼈ㆍ팔뼈ㆍ어깨뼈ㆍ목뼈ㆍ턱뼈ㆍ어금니뼈ㆍ이뼈ㆍ해골뼈 등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혹은 마음을 미간에 두는데,
만약 간략하게 관찰하기를 원한다면 신념처를 따라서 건너고,
만약에 자세히 관찰하기를 원한다면 두 눈썹 사이로부터 해골 내지 다리뼈에 이르기까지를 관찰한다.
다시 이로부터 하나의 자리, 하나의 방, 하나의 승당(僧堂), 하나의 승가람(僧伽藍)23), 하나의 동네, 하나의 마을, 하나의 나라를 관찰한다.24)
만약 오직 상상으로만 이러한 관(觀)이 일어난다면 이는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변에 두루 한 대지(大地)의 안광(眼光)에 이른다면 능히 그곳에 백골이 가득히 메워져 있음을 비추어 볼 수 있게 된다.
또 만약 다시 간략히 관찰하기를 원한다면 차례로 돌아와 미간에 이르니, 이것을 표현하여 부정관의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부정관이 그 대상은 적으면서 자재로움은 적지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것은 4구(句)로 구분하여 설명하게 된다.
대상은 적으면서 자재로움이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 누누이 부정관에 드는 경우이다.
자재로움은 적으면서 대상은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사해 대지에 두루 채워서 부정을 일시에 관찰하면서 누누이 부정관에 들어갈 수 없는 경우이다.
대상도 적고 자재로움도 적은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일시에 스스로의 몸의 부정을 관찰하면서도 누누이 부정관에 들어갈 수 없는 경우이다.
상도 적지 않고 자재로움도 적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사해 대지에 부정을 두루 채우면서 또한 누누이 부정관에 들어갈 수 있는 경우이다.
다시 또한 부정관이 그 대상은 무량하면서도 자재로움은 무량하지 못한 경우가 있으니, 이에 관해서도 역시 네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해야 한다.
대상이 무량하면서 자래로움이 무량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사해 대지에 두루 채운 부정이 있고 게다가 누누이 부정관에 들 수 있는 경우이다.
자재로움은 무량하면서 대상이 무량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 누누이 부정관에 드는 경우이다.
대상이 무량하면서 자재로움이 무량한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사해 대지에 두루 충만한 부정이 있고 게다가 누누이 부정관에 들어갈 수 있는 경우이다.
대상도 무량한 것이 아니고 자재로움도 무량한 것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른바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 누누이 부정관에 들어갈 수도 없는 경우이다.
부정관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고,
[안반념(安般念)]
지금부터 안반념(安般念)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안나(安那)25)란 ‘지니고 온다(持來)’는 뜻이며,
반나(般那)26)란 ‘지니고 간다[持去]’라는 뜻이다.
또한 아습파사(阿濕波娑)27)ㆍ바습파사(婆濕波娑)28)라고도 한다.
염(念)이란 억념(憶念)을 말한다.
들숨과 날숨에 있어서 진리를 살피는 일에 염을 붙들어 두면 마음이 허망하지 않게 하니, 그 염을 닦는 까닭에 수(修)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안반념은 곧 지혜의 성품으로, 그 단계에서 염(念)이 불어나게 되는 까닭에 이를 안반념이라 말한다. 이는 마치 염처와도 같고 염숙명(念宿命)과도 같은 것이다.29)
숨의 최초의 일어남을 말하자면, 먼저 모태 속에서 배꼽 있는 곳에서 업생(業生)의 바람이 일어나니, 그 바람은 혹은 아래로 향하고 혹은 위로 향한다.
아래로 향한 바람은 아랫몸의 모공을 만들고 위로 향한 바람은 윗몸의 모공을 만든다.
모공이 만들어지고 난 뒤 내쉬는 숨이 최초의 숨이다.
나아가 죽을 때 내쉬는 숨이 최후의 숨이다.
정수(正受)에서도 역시 그렇다. 즉 내쉬는 첫숨에 정에 들고 들이쉬는 첫숨에 정에서 나온다.30)
여섯 가지 인연으로 여섯 종류의 안반념을 얻게 되나니,
이른바 수(數)ㆍ수(隨)ㆍ지(止)ㆍ관(觀)ㆍ환(還)ㆍ정(淨)이 그것이다.
먼저 수(數)란 수행자가 묘한 방편으로 생각을 한 곳에 모아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을 헤아리는 것인데, 한 번의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도 느끼고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만약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때로는 수가 줄거나 혹은 늘어나기도 하며, 혹은 헤아림이 어지럽게 되기도 한다. 수가 줄어드는 경우는 두 번 쉰 것을 한 번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불어나는 경우는 한 번 쉰 것을 두 번으로 헤아렸기 때문이다.
또한 헤아림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내쉰 숨을 들이쉰 숨으로 생각하고 들이쉰 숨을 내쉰 숨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을 등수(等數)라 부른다.
다섯 번 내쉬는 숨과 다섯 번 들이쉬는 숨, 이것을 십수(十數)라 부른다.
만약 수행자가 숨을 헤아릴 때 열을 헤아리는 도중에 마음이 어지러워진다면 다시 하나에서부터 헤아리기 시작한다.
만약 열 번이 채워지고 나면 마음이 어지럽든 어지럽지 않든 다시 하나에서부터 헤아리기 시작한다.
마음이 흐트러짐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열을 넘기지 않으며,
마음이 모여듦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열 아래로 줄이지 않는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일찍이 헤아리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수(隨)31)란 ‘내쉬고 들이쉰 숨은 사라져 행해지는 바가 없거늘 그것은 숨을 따라서 길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짧아지는 것인가?
그것은 두루 온몸에 퍼졌는가? 아니면 한 곳에 있는 것인가?
들이쉰 숨은 멀리까지 퍼지는가? 가까운 곳에서 멎는가?
어디를 경계로 하여 다시 돌아오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지(止)32)란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서 몸의 한 부분에 마음을 묶어 두어 머물게 하고는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즉
‘그 숨은 몸에 이로움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차갑게 되는가, 따뜻하게 되는가?’하는 것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관(觀)33)이란 수습하고 또한 극치까지 수습하면 마치 자기 이름을 기억하는 것처럼, 그가 바라는 바를 따라 그 대상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환(還)34)이란 만약 욕망의 생각[覺]에 의지하게 되면 수행이 적어지고 욕망을 여의는 생각에 의지하게 되면 부지런히 수행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정(淨)35)이란 마음의 여러 번뇌[蓋]를 맑히는 것을 말한다.
그 수행자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한 가지 생각을 하는데,
즉 몸을 마치 대나무통과 같다고 관찰하고,
숨을 마치 구슬을 꿰는 것과 같다고 본다.
그리하여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로 부동의 상태가 되면 몸에 있어서 신식(身識)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안반념의 성취’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또한 신식이 일어날 경우도 있으나 몸에 손상이 되는 작용은 아니다”라고 한다.
또한 수행자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에서 극미(極微)로써 [색을] 무너뜨리니, 이것을 신관(身觀)이라 이름한다.
그리고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을 느끼면 이를 수(受)라고 부르며, 곧 그 수를 관찰하면 이를 수관(受觀)이라고 이름한다.
내쉬고 들이쉬는 숨결을 인식하면 이를 식이라 부르며, 곧 그 인식을 관찰하면 이를 식관(識觀)이라 이름한다.
내쉬고 들이쉬는 숨결을 생각하면 이것을 상(想)이라 부르며, 곧 그 상을 관찰하면 이것을 상관(想觀)이라 이름한다.
[이른바 극미로써 색을 허물고 색이 다 소멸된 후에 희(喜)와 상(想)과 식(識)이 일어나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그때 곧 그 세 가지를 비추어 보니, 이로써 세 가지 염처[三念處]의 방편종자를 삼는다].
들이쉰 숨결이 소멸하지 아니하였는데 내쉬는 숨결이 생기는 일은 없으며,
내쉰 숨결이 소멸되지 아니하였는데 들이쉰 숨결이 생기는 일도 없다.
이것을 안반에 말미암은 무상행도(無常行度)라 부른다.
또한 들이쉰 숨결이 핍박하기 때문에 내쉬는 숨결이 단멸하는 것, 이것을 고행도(苦行度)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방편의 무원해탈문의 종자를 얻는 일이라고 부른다.
또 내쉬고 들이쉬는 숨결이 생기고 머물고 소멸함은 자재롭지 못하니, 이것을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에 인연한 무아행도관(無我行度觀)이라 부른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은 상(常) 등에서 벗어난 것이며 그 벗어난 세계에 인연하는 까닭에 공행도(空行度)가 되니, 이것을 방편의 공해탈문의 종자를 얻는 일이라 부른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에 있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 열반을 향하면 이것을 방편의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 종자를 얻는 일이라 부른다.
그 약한 삼삼매(三三昧)에 의거해 중간 근기가 되고, 중간 근기에 의거해 증가한 근기가 되니, 이와 같이 난법(煖法)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진지(盡智)와 무생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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