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작전 전투기념일 43주년 추도사
3.27전우회 회원 및 가족여러분 ! 날씨도 쌀쌀한데 최전방 이곳 대성산 까지 찾아와 뜻깊은 행사를 함께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주말인데도 이렇게 자리를 함께해 주신 김경중 15사단장님과 장병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벌써 4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3.27작전이 있고나서 10년 주기로 행사를 해왔고 40주년행사를 계획 했습니다만 코로나 때문에 일정이 순연되어 오랜만에 여러분을 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용맹스러웠던 우리 전우들이 이제 백발이 되어 할아버지가 되어 손자 손녀들 손을 잡고 이렇게 행사를 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날의 작전에서 전사한 고 김윤길 하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날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처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고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저희 전우회에서도 이 자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자리에 함께하신 가족분 들께도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잠시 그날의 상황을 회상해보겠습니다. 1980년 3월 27일 당시 사단장은 이기백 장군님이시고 GOP근무는 연대가 돌아가면서 1개 대대가 맡고 있었는데 당시 GOP철책임무를 맡고 있던 부대는 50연대 1대대로서 대대장은 박기준 장군님 이시고 3월 27일 자정을 기해 임무를 인수할 부대는 39연대 1대대였습니다. 39연대장은 임인조 장군 이시고 39연대 1대대장은 정화언 장군이신데 GOP경계근무인수를 위한 선발대장으로 저를 보냈던 것입니다. 승리OP에서 상황실 업무에 관한 업무인수를 하고 있는데 39연대장의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내용인즉 수색소대 정찰로 인수인계하는데 책임질 수 있는 간부가 동반해서 확실히 인수 받으라는 사단장님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중대장들은 중대별로 업무인수에 바쁘고 누가 동반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정보장교인 제가 동반하기로 하고 수색정찰로 인수인계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보니 50연대 1대대 수색소대장 박호민 소위 외 4명, 39연대 수색소대 이종석 소위 외 4명 총 10명이 GOP출입을 위해 2통문인 영산포 통문 앞에서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래 대기시키고 급히 합류해서 합동으로 수색정찰을 하는데 442고지 하단 계곡에 이르자 50연대 1대대 수색소대장이 여기가 정찰로 끝이라는 겁니다. 저는 임관해서 그때까지 특전사에서만 근무했던 경험으로 수색정찰을 위해서는 442고지까지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 확인해보니 과거에 고지가지 다녔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 겁도 없이 첨병을 앞세우고 약50여m 통로를 개척하면서 442고지로 올라가는데 긴장한 탓인지 첨병이 지쳐 쓰러지는 겁니다. 그래 소대장 이소위를 앞세우고 고 김윤길 상병 그리고 나 이렇게 3명이 앞서고 있었는데 다른 대원들은 뒤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고지가 눈앞에 보이니 발걸음이 조금 빨랐던 것 같습니다. 순간 탕탕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고 이소위는 우측으로 나뒹굴고, 윤길이는 내 앞에서 쓰러지는데 순간 오른손으로 밭이면서 보니까 불과 7~8m 전방에서 은거하고 있던 적이 사격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작전 후에 판단해보니 우리가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은거 중이던 3명이서 선두3명을 얼굴부분을 조준 사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 이소위는 철모에 맞았고 윤길이는 얼굴에 총격을 당했고 나는 운 좋게 좌우로 빗나간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특전사에 연마한 즉각 조치 사격으로 제압하고 보니 내 앞에는 아무도 없고 다른 대원들은 뒤에 멀리 떨어져있고 저 혼자 노출된 상태였습니다. 지금도 화공작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때 당시에는 화공작전을 해서 풀 한포기 없어 엄폐물은 물로 은폐하기도 힘든 상황인데 적이 방망이 수류탄을 내게 던졌고 3~4m앞에 떨어져 굴러 내려오는데 달려가 주어서 던질까 엎드릴까하는 찰라 억새풀포기에 걸리면서 터졌는데 다행히 피해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당할 수 만 없다는 생각에 적이 은거하고 있는 진지를 향해 사격하면서 진지와 연결된 교통호로 뛰어 들었고 적과 나는 불과 5m도 안 되는 거리인데 나는 지향사격을 했고 적은 사격과 함께 수류탄을 나를 향해 던졌는데 나는 미쳐 그걸 알지 못했고 낮은 포복자세로 있는 내발 밑에 떨어져 나는 파편 11발을 맡고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수류탄 화염에 순간 실명되어 눈을 떠보니 온통 노랗고 귀는 폭음에 청력을 상실해 들리지도 않고 그러나 상황은 인식이 되어 조심스럽게 움직여보니 오른쪽 발가락이 잘려나갔을 뿐 죽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 시력은 회복되었고 다시 사격을 하려고 보니 아뿔사 실탄이 다 떨어졌던 것입니다. 급하게 수색정찰에 합류하다보니 15발들이 탄창 하나밖에 챙겨오지 못한 불찰이지요. 그래 어찌 합니까 다시 교통호 밖으로 튀어나와 최초 엎드려 있던 자리로 나오니 박호민 소위가 거기까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탄창을 두 개 받고 적들과 계속 교전중인데 적1명이 사격을 가하면서 우리 쪽으로 튀어 나오다 통신병이 우리 쪽을 향하고 무전교신중인데 그 앞에 나타났고 통신병이 사살을 한 것입니다. 적의 그와 같은 행동은 교통호에 나와 교전 중에 1명이 부상을 당했고 다른 한명이 부상자를 부측해서 적 방향으로 퇴각해서 큰 바위 뒤에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상황보고 되어 사단장이 직접 OP에 나와서 포사격까지 검토했으나 확전을 우려해서 종결했던 것입니다. 이작전이 주는 교훈은 당시에 GP에 57mm 무반동총이나 M79 또는 LMG같은 공용화기가 있었더라면 바위틈에 은거한 적을 완전소탕해서 완전작전으로 종결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고 수색견을 동반했더라면 희생자는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 그리고 수색정찰로 관리에 대한 지휘관심 등 많은 과제를 지적해주는 작전이었다고 생각되고 그 작전이후에 GP에 공용화기 배치와 GP와 GP를 잊는 통로를 개척하여 차단선을 완성하여 GOP 주도권을 장악하고 DMZ내 매복도 간부들이 동반하는 등 많은 작전의 변화를 가져온 매우 뜻깊은 작전 성과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작전은 당시국내 안보상황을 생각해볼 때 대단히 큰 의미가 있는 작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 3월 27일 전후해서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1979년 10.26 12.12사태 등으로 국내정세가 대단히 혼란스러웠고 이를 호기로 생각했던 북한 입장에서는 많은 간첩을 남파했었다는 사실입니다. 3월 25일 서부지역 임월교사건, 3월 26일 포항앞바다 간첩선 격침사건 그리고 3월 27일 동부전선의 442고지 침투사건 1980년 5.18광주 민주화항쟁까지 당시에 우리가 침투를 노리는 적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국내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43년의 세월 거의 반세기가 지났지만 우리의 안보상황은 뭐가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지금도 전선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북한의 위협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상황 속에서 국민은 불안해합니다. 국방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장병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당부 드립니다. 끝으로 사단장님께 건의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전공비를 이곳에 건립 하게 된 배경은 이 옆에 있는 공병중대 자리가 당시에는 사단 휴양소 이었습니다. 중대별로 휴양 와서 쉬면서 전공비를 보고 나도 간첩잡어 헬기타고 고향에 가야겠다. 라고 전의를 불태우는 게기가 되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곳에 건립해서 교훈을 주자고 했는데, 지금은 많은 변화가 생겼고 이곳은 관리도 제대로 잘 안되고 있는 상황이니 전방 승리 OP쪽으로 전공비를 옮기는 것도 고려해 주시기를 요청 드립니다.
오늘행사를 지원해주신 사단장님과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오늘 행사가 끝날 때까지 통제에 잘 따라서 무탈하게 뜻깊은 행사가 마무리되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3.27 전우회장 정 선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