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현실 기획
박인환의 도시시와 1950년대 모더니즘
박몽구(시인)
1. 문제의 제기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부친 박광선과 모친 함숙형 사이에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부친 박광선(朴光善)은 중등교육을 마친 사람으로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는데, 토지도 어느 정도 소유하여 시골 살림으로는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여, 부친은 아들 교육을 위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서울로 생활 터전을 옮기며 산판업을 시작한다. 가족들이 인제에서 서울 종로구 원서동으로 이사를 하고, 그는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한 박인환은 3년제 관립학교인 평양의전에 진학하지만, 해방이 되자마자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내려온다. 해방 후 서울 종로에서 ‘마리서사(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알게 되어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박인환은 《국제신보》 주간으로 재직 중이던 송지영의 천거로 문화면에 「거미」라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어서 1947년 시 「남풍」, 산문 「아메리카 시론(試論)」을 《신천지》에 발표. 1948년 「마리서사」 경영을 그만 둠. 4월에 동인지 「신시론」창간에 김경린 등과 함께 참여. 진명 출신의 이정숙(李丁淑)과 덕수궁 앞뜰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뿌렸다. 1950년 1월에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김규동, 조향 등과 ‘후반기’ 동인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56년 돌연한 심장마비로 작고 후 시집 「목마와 숙녀」와 「박인환 전집」이 간행되었다. 이것이 그의 짧은 삶의 이력이다.
박인환의 주로 활동했던 1950년대는 한국전쟁이라는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상처를 안고 출발한 시대였다. 또한 미국을 통로로 한 새로운 문물이 수입되면서 한국 사회의 지적 맥락이 새롭게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적 영향은 한국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타의에 의하여 국토가 분단되면서 백석, 이용악, 정지용, 김기림 등이 이념의 그림자로 사라지면서 한국 시단은 그야말로 절름발이가 되고 말았다. 이념 기피증이 깊숙이 뿌리내리면서 우리 시단은 청록파의 몇몇 시인들과 인생파의 서정주를 비롯한 이른바 전통 서정파 시인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거기에 문인 협회를 중심으로 권력의 비호까지 주어지면서 전후 우리 시단은 지극히 편협하고 황폐한 형국이 되었다.
이 같은 1950년대의 척박한 풍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온 그룹이 박인환, 김경린, 김차영, 김규동, 조향 등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후반기’ 동인들이었다. 이들은 전통서정파의 반대편에 서서 모더니즘을 주창하였다. ‘후반기’ 동인은 당대 우리 시단의 중심을 형성한 문협 정통파로 지칭되는 유치환, 서정주 등의 인생파와 박목월 등의 청록파들이 내세우는 순수시 개념을 비판함으로써 입지를 삼으려 했다. 반전통성, 도시성, 그리고 서구 모더니즘 기법의 수용을 기치로 삼았다. 이들 후반기 동인의 중심에 시인 박인환이 존재한다. 그는 ‘말리서사’라는 서점을 운영하여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자임하기도 하였지만, 1949년에 결성된 후반기 동인들의 전신 ‘신시론’에서 펴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서부터 일관되게 참여하였다는 데서, 50년대 모더니즘 운동의 중심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박인환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 하나는 ‘후반기’ 동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195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의 시를 다룬 경우이다. 이 경우 대부분 ‘후반기’ 동인의 모더니즘 운동의 한계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거나, 본격적인 모더니즘이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박인환 시에 대하여 약간의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현대시사상 제2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보는 견해들이 있어 왔다. 후반기 동인 자신들을 비롯, 이승훈 등이 이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1950년대 전후 현실이 박인환의 시세계에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박인환 시의 주제적 측면에 관심을 두고 1950년대 현실의 시적 수용과 문명 비판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그를 리얼리스트라고 파악한다. 특히 김영철의 경우 박인환희 시세계를 해방정신과 6․25 체험을 형상화한 리얼리즘 계열의 시오 도시 문명을 소재로 한 모더니즘 계열의 시로 양분하여 보고 있기도 하다. 맹문재는 박인환을 가리켜 1950년대의 시인들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아픔을, 그 폐허의 시대를 가장 열성적으로 품은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공광규는 전장의 생체험을 통해 전쟁에 희생되는 인간과 파괴되는 문명을 보면서 인간의 실존적 삶을 자각하거나 무의미한 전쟁을 부각시키고 전쟁의 무용성과 불안, 그리고 절망의 주제화를 통해 전쟁을 한 차원 고양시킨 사실주의 시인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의 평가이다.
본고에서는 이 같은 기왕의 견해들에 주목하면서, 박인환의 시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가를 면밀히 검토하고자 한다. 박인환은 31세라는 짧은 생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시사상 보기 드물게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시인이다. 대중적 관심과는 달리 아직 본격적인 연구는 드문 편이다. 또한 위에 든 기왕의 연구 성과에서 보듯이 낭만주의 시인, 리얼리즘 시인, 모더니즘 시인 등으로 박인환의 모습이 분산되어 왔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일관되게 박인환의 전 시세계의 바탕이 되고 있는 도시적인 정서를 중심으로, 박인환 시세계의 일단을 새롭게 해명하고자 한다. 연구자가 파악하기에는 박인환의 시들은 데뷔 이래 줄곧 도시적 취향을 보여 왔고, 양분법으로 나누기 어려운 공통성을 지녀왔다고 파악한다. 전통시에 반하는 도시적 소재에 천착해 왔으며, 또한 해방 공간에서 전후에 걸친 모색기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대응 의식을 담지해 온 점이 그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박인환 시에 공통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도시적 소재를 중심으로, 그의 시세계가 1950년대 모더니즘 전개에 어떤 위상을 갖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2. 모더니즘의 특성과 박인환의 시세계
2.1 모더니즘과 혼란기의 감수성
모더니즘은 현대주의 또는 근대주의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기성의 도덕과 권위를 부정하고 기계 문명과 도회적 감각,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고 추구하는 사조이다. 프레데릭 제임슨에 따르면 20세기 들어 새롭게 등장한 모더니즘의 주요한 특색으로는 비재현주의, 미적 자의식, 자율성 등이 우선 들어지는데, 이것은 문화적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바탕에 깔고 있다. 문화적 현대성이란 예술의 경우 낭만주의적 속성을 극복하면서 나타나는 반낭만주의적 특성을 일컫는다. 문화적 현대성이란 예술의 경우 미적 현대성이라는 개념과 동일시되며, 이것은 객관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현대성으로부터 소외되는 현대성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시적 기법에 있어서는 자율성과 초월적 기법을 도입하면서도, 시대의 어둠을 묵시하는 주제를 담아내는 김수영의 시들은 모더니즘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스피어즈(Monroe K. Spears)가 말한 바 디오니소스적 이미저리(도취, 황홀), 즉 과거적인 일체(반아폴로, 반이성)의 전통을 거부, 절연한다는 의미에서의 모더니즘이라고 한다면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는 노력을 보인 것하며, 직설을 회피하고 우회적인 언어를 택했다는 데서 미적 모더니즘의 정서 구현에 부심해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1950년대의 모더니즘 시는 청록파·생명파에 반대하여 도시적 감수성·현대 의식·문명 비판·전위적 기법의 추구 등의 다양한 노력을 통해 50년대의 혼란스러운 사회적 상황을 노래하면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탐색하였다. 「목마와 숙녀」를 1950년대 모더니즘 시의 한 점으로 볼 때 1930년대 김기림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에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30년대 모더니즘 시에 비해 50년대 모더니즘 시는 일반적으로 뚜렷한 이념적 중심이나 이론 체계가 없어 30년대 모더니즘의 발전적 계승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5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청록파적 경향에 반발하여 새로운 모색을 꾀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박인환은 1930년대 김기림과 이상의 모더니즘을 존경하지만 “단지 그 ‘신기(神奇)’와 ‘곡예(曲藝)’에 무한한 애착을 느껴왔고, 그 ‘신기(神奇)’에는 행동과 정신이 동반되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즉 새로운 기법에 추구에만 골몰하지 않고, 시를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표정을 읽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는 전기철의 지적처럼 “김기림의 기법에다가 현실의 불안을 담아 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박인환의 시들은 낭만주의 면에서는 당대의 청록파들이나 서정주 들의 시에 비해서 결코 수월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들과 대별되는 점이 있다면 자연이나 회고 지향의 소재를 지양하고 도시적인 정서를 물씬 풍기는 소재를 선택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세월이 가면」 부분
「목마와 숙녀」와 함께 박인환의 대표적 작품으로, 샹송 스타일의 곡을 붙여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시는 낭만적 시의 정수라 할 만하다.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박인환이 불안한 시대 의식과 위기감, 허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한 잔의 술과 이 같은 낭만적 시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3년간이나 계속된 전쟁 속에서 도시는 온통 폐허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은 삶의 가치를 상실하고 철저하게 상호 무관심한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러한 황폐한 분위기에서 시인은 따스한 인간애에 목말라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 이 시는 지극히 낭만적인 정서에 바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50년대의 서정시인들과는 달리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저 유리창 밖 가로등/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라는 구절에서 보듯 날로 황폐해져 가는 전후(戰後)의 도시적 분위기 가운데서 적응하지 못하는 한 지식인의 고뇌와 갈망이 표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都市) 그 암흑 속으로…/ 명상과 또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 …아 최후로 이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贖罪)의 회화(繪畵)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亡靈)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詩人)/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屍體)일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부분
제목 아래 T. S. 엘리어트의 「4중주(四重奏)」의 첫 구를 차용한 이 시는 전후(戰後)의 황폐한 현실로부터 느끼는 허무 의식과 불안의 시간을 극복, 초월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긴장감 있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낭만적인 정서는 배제되고 전후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도드라져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자신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허상이라고 인식한다.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는 구절에서 엿보이듯 시적 화자는 전후 현실과의 불화 관계를 밝힌다. 나아가 '살아 있는' '나와 우리들은' 모두 '시체'라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시적 화자는 자신이 몸담은 현실이 더 이상 삶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는 극단적적 인식으로까지 다다른다. 그와 같은 극도의 절망감과 허무 의식은 시대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발전됨으로써 자신을 '철없는 시인'으로 비하(卑下)시키고 마침내 죽음에 대한 강한 충동을 '나의 눈 감지 못한 /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라는 마지막 시행으로 표출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전쟁의 잔인성을 고발한다거나 전후의 비극적 분위기를 제시하는 데서 벗어나 모순된 현실을 묵시하는 방법을 통해 그것을 이겨내려는 치열한 시 정신의 반영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렇듯 박인환은 전후의 비극적 현실을 비교적 냉소적으로, 낭만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 배경은 철저하게 도시적인 것들을 택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도시적 정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의 목가적 정서를 불식한 가운데 새로운 문물들을 시의 중심 소재로 삼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이것은 곧 전통시가 딛고 있던 디오니소스적 황홀과 페이소스에서 벗어나 단단하고 명확한 이미저리로 정신의 추를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박인환이 다루고 있는 도시는 안식과 평화의 보금자리가 아닌, 오염된 자본과 체제로 인하여 불화와 갈등을 유발하는 진원지이다. 이 같은 정서는 도시와 문명에 휘말려 들지 않는 가운데, 물상을 개성적인 눈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미적 자의식과 연결된다. 이것이 박인환의 도시시가 담지하고 있는 모더니즘 정서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훈은 후반기 동인들의 시자업을 가리켜 피상적 모더니즘이라고 보는 일부 견해들에 반대하면서, 6․25를 계기로 폐허가 된 도시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노래했다는 점, 그리고 이 도시는 흘러가는 삶, 즉 현대인의 불안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시사에서 단연 새로운 국면을 부각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견해에 공감하면서 특히 박인환은 부박(浮薄)한 삶을 관찰하기보다, 도시의 내면에 도사린 비인간성을 시적 감수성으로 줄곧 비판하고 있는 데 그 특색이 있다고 본다.
2.2 아방가르드와 불화의 사상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시문학에서 새롭게 대두된 모더니즘은 단순히 문명에 대한 감각과 도시적 서정의 세계만을 추구하지 않고, 실존적이며 내면화된 부정적 사유를 통해 전후 사회의 인간 조건을 탐구하고 현대적인 서정성을 회복하려는 이념을 추구하였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도 한국전쟁 직후의 허무주의, 실존주의적 고뇌, 도시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감상적, 허무적, 체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시어의 선택에서도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 생애', '목마', '별', '소녀', '늙은 여류작가', '등대', '페시미즘', '술병' 등을 동원하여 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특히, 주요 제재인 '목마'가 표상하는 바는 버지니아 울프의 비극적 생애와 불안과 절망의 시대적 슬픔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절망감이나 도시적 감상성은 퇴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미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이것은 박인환의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수성에서 연유한다. 이 시는 청록파로 대표되는 전통적 세계를 부정하고 도시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문명비판과 전위적 기법을 시도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시시는 장르 개념으로 딱히 분류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지배적이고 문제적인 공간이 되고 있는 도시를 제재로 삼고 있는 시적 경향을 가리킨다. 즉 도시적 삶고 감수성을 반영하고 있는 시라고 볼 수 있다. 도시는 문명의 대표적 표상이며, 시에서 문제 삼는 정서는 도시가 갖고 있는 요소가 인간의 삶에 끼치고 있는 영향을 감수성의 온상으로 하고 있다. 도시가 새로운 만큼 도시적 감수성에 기반한 시는 전통시에 비하여 새롭다는 면에서 모더니즘의 한 모태가 되고 있다.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陰影)같이 따른다,
-「거리」 부분
위스키 한 병 담배 열 갑/ 아니 내 정신이 소모되어 간다. 시간은/ 15알간을 태평양에서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고립과 콤플렉스의 향기는/ 내 얼굴과 금간 육체에 젖어 버렸다.
-「15일간」 부분
데뷔작인 「거리」와 박인환이 10여 년 가까이 상거한 1955년 미국 여행을 하고 돌아와 쓴 시편을 대비해 보았다. 초기작에 약간의 낭만적 객기가 보이고, 말기의 시편에서는 단단한 언어를 통한 현실 인식이 배어 있다. 하지만 그가 언어의 선택과 발상법에 있는 모더니즘적 성향을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초기 시에서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라는 대목은 마치 초현실주의자 달리의 그림을 대하는 듯하다. 풀잎의 흔들림을 젊음의 탄력으로 파악하는 것은 언술을 넘어선 이미저리 기법으로 시인의 내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더니즘 시인들의 전형적인 조사법(措辭法)이다. 그가 현대 물질문명의 본산이라고 볼 수 있는 미국에서 만난 현실을 ‘위스키 한 병 담배 열 갑/ 아니 내 정신이 소모되어 간다’고 인식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현대 문명 시적 화자에게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기보다 절망을 안겨 주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같은 절망적 인식을 감정 언어가 아닌 사물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데서, 이미지즘 시인들의 시적 방법론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고립과 콤플렉스의 향기는/ 내 얼굴과 금 간 육체에 젖어 버렸다’는 대목에서는 시적 화자의 데카당스한 태도와 함께, 오명 된 문명과 한 몸이 될 수 없는 비극적 인식을 담지하고 있다. 이처럼 박인환의 시세계 저변에는 시적 방밥론에 대한 모더니즘적 추구와 함께, 온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인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의 불화 의식이 일간되게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더니즘은 일단 언어의 자율적 사용, 미적 자의식 등의 외면적 특성과 함께 산업화, 도시화로 일별 되는 현대 문명의 비인간적인 면에 대한 비판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더니즘은 새로운 양식이자 세계 자본주의 혹은 산업화 사회가 불러온 속물주의와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에 대한 내면적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김용직은 1930년대 우리 시에 나타난 모더니즘을 크게 온건형 모더니즘과 과격형 모더니즘으로 나눈다. 온건형 모더니즘은 영미 모더니즘으로 T. E. 흄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이미지즘에서 발단하고, 과격형 모더니즘은 대륙 쪽에서 형성된 표현파, 미래파, 다다, 초현실주의 등을 일컫는다. 과격형 모더니즘은 아방가르드의 미학을 지니면서 때로 데카당스한 면을 띠게 된다. 따라서 나타나는 데카당스한 측면을 보이면서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띠는 박인환의 시들은 과격한 모더니즘으로서의 아방가르드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2.3 오염된 도시의 전신적 재건축
박인환의 시들이 여타 후반기 동인들의 시와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일관되게 도시를 배경으로 창작되고 있다는 점과 함께, 그 내면적 재건축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눈부신 도시 문물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불화 의식을 드러내는 한편, 그 안에서 새롭게 세우고자 하는 내면적 소망을 줄기차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창밖/ 암담한 상가/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윈도우/ 그 곁에는/ 절망과 기아의 행렬이 밤을 새우고/ 내일이 온다면/ 이 정막(靜寞)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
-「세 사람의 가족」 부분
나는 눈을 감는다/ 평화로운 나의 서재에 군림했던/ 서적의 이름을 외운다/ 한 권 한 권이/ 인간처럼 개성이 있었고/ 죽어간 병사차럼 나에게 눈물과/ 불명의 정신을 알려 준 무수한 서적의 이름을…/ 이들은 모이면 인간이 살던/ 원야(原野)와 산과 바다와 구름과 같은/ 인상의 풍경을 내 마음에 투영해 주는 것이다.
-「서적과 풍경」 부분
두 편의 시들은 각기 상반된 인식을 담고 있다. 앞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해방 공간의 서울 풍경을 ‘고통과 구토가 동결된 밤의 쇼윈도우’라고 묘사하고 있다. 쇼윈도우에 붐비는 쇼핑 인파가 아닌 취객과 부랑인들이 기대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도시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정막(靜寞)의 거리에 폭풍이 분다’라고 표현함으로써 건물이나 상가 등 도시의 외장이 도시민들과 어울리지 못한 채 분리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시적 화자가 보기에는 도시는 비인간화의 길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뒤에 든 「서적과 풍경」이라는 시에서는 그런 도시의 재건설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도시의 재건설은 낡은 건물을 헐어내고 새로이 높은 빌딩을 세우고 사통팔달하도록 길을 닦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평화로운 나의 서재에 군림했던/ 서적의 이름을 외운다’라고 말함으로써 인간다운 도시의 건설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의 충복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서적’은 지식의 보고의 의미를 넘어, 그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인간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대동사상 내지는 정신적 충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박인환의 시 가운데서 도시적 정서와 모더니스트로서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시가 「最後의 會話]이다. 도시적 감수성을 잘 보여줄뿐더러, 그가 직면하고 있는 정신적 상황을 비교적 진솔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데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작품의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무 잡음도 없이 멸망하는/ 도시의 그림자/ 무수한 印象과/ 轉換하는 年代의 그늘에서/ 아 영원히 흘러가는 것/ 신문지의 傾斜에 얽혀진/ 그러한 불안의 격투.// 함부로 개최되는 酒場의 謝肉祭/ 흑인의 트럼펫/ 구라파 新婦의 悲鳴/ 정신의 황제!/ 내 비밀을 누가 압니까?/ 체험만이 늘고/ 실내는 잔잔한 이러한/ 幻影의 침대에서.// 회상의 起源/ 오욕의 도시/ 황혼의 망명객/ 검은 외투에 목을 굽히면/ 들려오는 것/ 아 영원히 듣기 싫은 것/ 쉬어빠진 진혼가/ 오늘의 폐허에서/ 우리는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一九五○年의 사절단.// 병든 배경의 바다에/ 국화가 피었다/ 폐쇄된 대학의 정원은/ 지금은 묘지/ 繪畵와 理性의 뒤에 오는 것/ 술 취한 水夫의 팔목에 끼어/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한 최후의 會話.
-「最後의 會話」 전문
이 작품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신문지’, ‘酒場의 트럼펫’, ‘폐쇄된 대학’이라는 시어들에 보이듯 도시 생활에서 배태되는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50년대의 전통파 서정시인들이 누이, 강물, 별 등 정화된 소재를 채택하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소재를 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선 시대적으로 모더니티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칼리니스쿠는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로 ‘모더니티, 아방가르드, 데카당스, 키치, 포스트모더니즘’을 들고 있다. 그 가운데 모더니티는 시대적으로 현대적인 소재를 채택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에 따르면 과학과 기술의 진보, 산업혁명, 그리고 자본주의에 의해 야기된 광범위한 사회 경제적 변화로서의 모더니티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의 산물인 미적 모더니티를 구별하고 있다. 칼리니스쿠에 의하면 인간성을 파괴하는 문명에 대한 역반응으로서의 미적 모더니티에 더 비중이 두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박인환이 발견한 도시는 문명의 진보와 사람살이를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공간만이 아닌, 인간을 왜소화하고 소외시키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와 같은 인식의 일단은 이 시의 제2연에 묘사된 ‘함부로 개최되는 酒場의 謝肉祭/ 흑인의 트럼펫/ 구라파 新婦의 悲鳴/ 정신의 황제!/ 내 비밀을 누가 압니까?/ 체험만이 늘고/ 실내는 잔잔한 이러한/ 幻影의 침대에서.’라는 대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酒場의 謝肉祭’, ‘트럼펫’, ‘구라파 新婦’ 등은 전후의 현실에 침윤된 서구 문명 내지는 도시의 상징이다. 그런데 시 속의 화자는 이것을 환대하고 만끽하기보다 그 같은 것들이 모두 ‘幻影’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일단이다. 박인환의 경우 어느 시편에서도 1950년대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거론․비판하는 대목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상상력의 미학과 상징에 의해 표상되고 있는바, 이는 모더니즘의 주요한 특질 가운데 하나이다. “보들레르 이래로 모더니즘의 미학은 일관되게 어떤 종류의 리얼리즘과도 대립되는 상상력의 미학”으로 뒷받침되어 왔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은 3연에서 ‘오늘의 폐허에서/ 우리는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외래 사조의 유입으로 건설된 문명을 폐허와 다름 아닌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단순히 파괴를 의미할 뿐 아니라 산책자의 눈에 비친 비인간화의 표상이다. 그런 폐허 속의 인간 간은 단자화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一九五○年의 사절단.’이라는 다소 당혹스런 표현은 외세의 개입으로 치러진 한국전쟁의 상처를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연을 통해서 시인은 오염된 자본과 결코 화목하며 살아가갈 수 없는 운명에 대해서 천명한다. ‘병든 배경의 바다에/ 국화가 피었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도시 문명의 표정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이런 공간적 배경을 전제한 위에 시인은 ‘폐쇄된 대학의 정원은/ 지금은 묘지’라고 표현함으로써 병든 바다에서 방향타를 놓친 것과 마찬가지인 지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는 ‘理性’은 허상일 뿐이며, 시인은 결구에서 ‘술 취한 水夫의 팔목에 끼어/ 파도처럼 밀려드는/ 불안한 최후의 會話.라고 표현함으로써 출구가 지극히 좁아져 있는 1950년대의 현실을 암유하고 있다. 아울러 외양이 화려한 문명과 인간 사이에 단절된 대화에 대하여 간곡한 경구를 발하고 있다 하겠다.
이렇듯 박인환의 시 속에 재현된 도시는 화자와 잘 어울리기보다 불화의 공간으로 인식함으로써 미적 모더니티를 발산한다. 그런 점에서 발터 벤야민이 발견하였던 도시의 산책자 개념을 연상시킨다. 발터 벤야민이 19세기의 파리 시민 보들레르의 시를 논하면서, 그를 ‘도시의 산책자’로 묘사하는 대목은 참으로 인상 깊다. 보들레르를 상징 시인으로만 평가하던 시대에, 시인의 고뇌를 도시와 어울리지도 못하면서 또한 떠날 수도 없는 운명하에서 고뇌하는 인간형으로 부각시키는 대목은 상쾌한 느낌마저 준다.
보들레르는 현대 문명으로 가득 찬 도시와 어울리지 못한 채 소외되는 ‘군중 속의 인간’을 ‘거리 산책자’로 묘사하고 있다. 현대 문명과 쉽게 교감하지 못하는 그에게서는 침착한 태도 대신에 조율병적인 태도가 나타난다. 대도시의 군중은 그 모습을 목격하는 자들로 하여금 불안, 역겨움, 전율 반응을 나타나게 한다. 또 군중 속의 행인이 겪는 충격의 체험은 기계 앞에서 노동자가 겪는 체험과 상응한다는 것이 벤야민의 진단이다. 나아가 산책자는 근대적인 도시 공간 및 장소의 스펙터클에 대한 비밀스런 탐색자이다. 그는 근대의 복잡한 기표들이 넘치는 도시의 구석구석을 단순하게 돌아다니거나 또 때에 따라서는 그것을 스스로 해석하기도 하는 그런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산책자는 단순한 구경꾼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근대 세계 및 자본주의 도시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단행하는 탐색자인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일련의 존재성은 산책의 논의에서 시각적인 것의 의미를 한층 복잡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산책자의 시선에 도시는 초현실주의의 환상과 꿈, 그리고 소외와 물신숭배의 ‘두 얼굴’을 드러내고야 만다. “산책자는 여전히 문턱 위에, 대도시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의 문턱 위에 서 있다. 아직 어느 쪽도 완전히 그를 수중에 넣지는 못하고 있다. 그는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못한다. 그는 군중 속에서 피신처를 찾는다.…군중이란 베일로서, 그것을 통해 보면 산책자에게 익숙한 도시는 환(등)상으로 비쳐진다. 군중 속에서 도시는 때로는 풍경이, 때로는 거실이 된다. 곧 이 두 가지는 백화점의 요소가 되며, 백화점은 정처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조차 상품 판매에 이용한다. 백화점은 산책자가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곳이다.” 벤야민은 물신이 짓누르고 있는 현대의 풍경에서 벗어나 정신이 마음 놓고 활보할 수 있는 산책로를 갈망하다 갔다.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박인환의 갈망 역시 벤야민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박인환의 낭만은 퇴폐가 아닌, 오염된 자본으로 폐허화되어 가는 1950년대의 한국 풍경을 인간다움으로 채우고자 하는 갈망의 소산이었다.
현대의 도시는 오염된 자본이 몰려 있는 진원지이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이를 한없이 소외시키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산책자는 자본주의의 일그러진 얼굴을 누구보다도 잘 감지해 낼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인환의 시들은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의 사생아인 도시의 일그러진 얼굴을 잘 감지해 내는 촉수라 할 것이다. 「最後의 會話」의 1연은 도시의 산책자로서의 박인환의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시인은 ‘아무 잡음도 없이 멸망하는/ 도시의 그림자’라는 구절을 통해서 도시에 대한 미적 감수성의 일단을 드러낸다. 도시를 멸망한다고 말하는 것은 도시가 지닌 팽창성과는 반대되는 인식으로, 물질적 번창과는 반대되는 인간다움의 상실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무수한 印象과/ 轉換하는 年代의 그늘’이라는 대목에서는 마음의 대화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삭막한 도시의 풍정을 표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박인환의 도시에 대한 인식은 ‘영원히 흘러가’면서도 ‘불안한 격투’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즉 도시 팽창의 역사는 지속될 것이지만 진정한 인간다움은 꽃피울 틈이 없이 인간들은 끝없이 소외되어 갈 것이라는 시적 인식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이승훈은 “박인환의 경우 강조되는 것은 도시가 아니라 도시의 그림자이다. 그는 도시를 보는 게 아니라 도시의 그림자를 본다. 그것은 ‘무수한 인상’과 ‘전환하는 현대의 그늘에서/ 아 영원히 흘러가는 것이’이며 ‘신문지의 경사에 얽힌/ 그러한 불안의 격투이다.’ 이런 삶은 불안한 삶을 표상한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역시 문명과 인간의 불화로 보는 데서는 마찬가지의 지평에 놓인 인식이라고 하겠다.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인간이 언어를 통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의식은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여기서 무의식은 ‘욕망’이라는 말로 대체될 수 있는데, 이 시의 경우 화자와 화려한 문명으로 위장한 오염된 자본과의 갈등을 하나의 은유로 제시할 수 없어, 유사하거나 인접한 사물을 끊임없이 탐색해 가는 환유로 확산시켜 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즉 현대 문명을 표상하고 있는 사물들을 잇달아 제시하면서 화해를 모색하지만 끝내 정착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대의 오염된 자본과의 전면적인 불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박인환은 그의 시 속에 등장한 무수한 “도시적 소재와 문명어를 통해 현대 삶의 허무 의식”은 이 같은 인식에 다름 아니다. 나아가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감수성을 바탕으로 서구적 물신주의의 허상임을 인식시키면서, 라캉의 어머니의 가슴처럼 따스하고 평화로운 도시를 심정적으로 재건축하고자 끊임없는 모색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키치와 살아 있는 시정신
3.1 키치에 몸을 기대다
박인환의 시에 구축된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키치(kitsch)이다. 그는 오염된 문명을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데카당스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한편으로 키치적인 것들에 몸을 맡긴다. 키치(kitsch)란 원래 속악한 것, 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이비 등을 뜻하는 미술 용어이다. 키치는 에펠탑 모양을 한 램프, 벨벳 천 위에 그려진 엘비스 프레슬리의 초상화, 로맨스 소설의 표지에 나오는 자극적인 일러스트레이션 등을 포함한다. 이 용어는 원래 ‘verkitschen(싸게 만들다)’이라는 독일어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키치는 산업시대가 낳은 엄청난 대량생산 능력과 여유 있는 소득의 부산물이다. 용어가 처음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 독일 남부에서였는데, 당시에는 예술가들 사이에서 ‘물건을 속여 팔거나 강매한다’는 뜻으로 쓰이다가 갈수록 의미가 확대되면서 저속한 미술품, 일상적인 예술, 대중 패션 등을 의미하는 폭넓은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유럽 전역이 이미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파급 속도도 빨라 중산층도 그림과 같은 예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에 따라 미술품이나 그림을 사들이려는 욕구가 강해졌다. 키치는 바로 이러한 중산층의 문화욕구를 만족시키는 그럴듯한 그림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던 개념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면서 고급문화나 고급예술과는 별개로 대중 속에 뿌리박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까지 개념이 확대되어 현대 대중문화·소비문화 시대의 흐름을 형성하는 척도를 제공하기도 한다. 1970년대 한국에서 유행한 촌티패션을 비롯해 1990년대의 뚫린 청바지, 배꼽티, 패션의 복고 열풍 등도 하나의 키치 문화로 보는 경우가 많다. 키치 현상을 보편적인 사회현상, 인간과 사물 사이를 연결하는 하나의 유형,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기능적이며 편안한 것을 추구하는 사회적 경향 등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서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화제를 불러 모은 한국 영화 「선데이 서울」이나 미국 영화 「오리지날 신」에 도입된 다양한 키치적 소품과 장치는 관객들을 크게 사로잡기도 했다.
「최후의 회화」에 동원된 ‘사육제’, ‘트럼펫’, ‘침대’, ‘병든 바다’, ‘패쇄된 대학’, ‘슬 취한 水夫’ 등 이질적인 물상들을 연거푸 나열함으로써 현대의 풍경을 리얼하게 표상하고 있다. 곰곰이 따져 보면 이 시에서 제시된 물상들은 하나하나가 중심 소재가 될 만한 비중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이렇듯 연거푸 나열하고 있는 것은 덧없는 욕망에 대한 환유의 의도와 함께, 현대 문명의 즉각성, 깊이가 배제된 일회성을 좀 더 실감 있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외양상으로는 나열된 시어들 시어에 연결고리가 끊어져 있으며 데카당스 하다거나 초현실적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같이 현대 문명이 앓고 있는 상처와 위기의식을 표상하는 물상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퇴폐적 정서와 방랑자적 기질로 드러난다.
주말여행/ 엽서… 낙엽/ 낡은 유행가의 설움에 맞추어/ 피폐한 소설을 읽던 소녀//
이태백의 달은/ 울고 떠나고/ 너는 벽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숙녀// 카프리 섬의 원정/ 파이프의 향기를 날려 보내라/ 이브는 내 마음에 살고/ 나는 그림자를 잡는다
-「센티멘탈 쟈니」 부분
폭풍이 머문 정거장 거기가 출발점/ 정욕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공규(空閨)한 운명처럼/ 열차는 떠난다/ 검은 기억은 전원에 흘러가고/ 속력은 서슴없이 죽음의 경사를 지난다
- 「열차」 부분
날개 없는 여신이 죽어 버린 아침/ 나는 폭풍에 싸여/ 주검의 일요일을 올라간다.// 파랑 의상을 감은 목사와/ 죽어가는 놈의/ 숨가쁜 울음을 따라/ 비탈에서 절름거리며 오는/ 나의 형제들.
-「영원한 일요일」 부분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중략)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의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목마와 숙녀」 부분
위에 든 어느 시편들이나 사물과 사람 등 시적 대상에 대한 정중한 접근보다 데카당스하고 상식을 넘어선 언술을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센티멘탈 자니」에서 ‘이태백의 달은/ 울고 떠나고/ 너는 벽화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숙녀’라는 대목은 도시 속에서 제 모습을 잃은 채 속악한 현실에 편승하여 살아가는 도시인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이태백’과 ‘담배 피우는 숙녀’를 대비시키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시 「열차」에서는 ‘정욕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라고 말함으로써 현대의 문명이 참신한 목표 아닌 방향을 잃은 채 무분별하게 치달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물질문명의 일그러진 얼굴을 ‘정욕’이라는 비속한 말로 상징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영원한 일요일」에서 시적 화자는 일요일은 ‘파랑 의상을 감은 목사와/ 죽어가는 놈의/ 숨가쁜 울음을 따라’ 온다고 말한다. 창조주와 종교에 대한 성스러운 인식과는 대칭점에 서 있는 언급이다. 「목마와 숙녀」에서 이 같은 키치적 인식의 극치를 만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시적 소재에 대한 정서적 소구와 함께, 현대 카페 문화와 사물에 대한 키치적 접근이 잘 어울려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고 말함으로써 성과 속을 교묘하게 오버랩시켜 놓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세계적인 작가를 목마를 탄 숙녀를 대비시킴으로써 인간다움과 권위가 통하지 않는 세계상을 암시한다. 나아가 현대의 인간의 자신의 의지에 바탕하여 살아갈 수 없다는 불구 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목마’는 이 같은 인식이 집약된 상징어이다. 여기에 ‘술병’과는 지극히 거리가 먼 ‘상심한 별’을 대비시킨 것은, 속악된 것들을 모아 시적 화자의 내면 의식을 드러내려는 키치적 수법의 일환이다. 이 같은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박인환은 자신이 몸담고 산 현대의 표정을 제대로 읽어내는 한편, 대량 생산과 물질적 풍요 속의 빈곤을 넘어 진정한 인간다운 세상을 염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것은 비관적이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적극성일 띠고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맹문재의 지적은 경철할 만하다. 술은 퇴폐를 넘어 지식인의 저항 수단이기 때문이다. 흔히 ‘버지니아 울프’라는 비극적인 작가의 죽음과 함께 센티멘털한 정서를 가진 것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곰곰이 행간을 주목해 보면 다르다. 즉 ‘등대’, ‘페시미즘’, ‘서러운 이야기’, ‘떠나든 죽든’ 등의 시어들을 모아 보면, 개인적 절망이라기보다 전후의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박인환의 시들에 등장하는 도시 문물은 인간과 친환하기보다 불화의 관계를 촉발시카는 것들이다. 물론 그것들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할 목적으로 탄생된 것들이지만, 몇몇 자본가들과 오염된 체제에 의하여 전횡될 때 오히려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소외시키는 존재로 변신하고 만다. 그 같은 정서는 위에 든 ‘정욕과 새로운 의욕 아래/ 열차는 움직인다/ 격동의 시간// 꽃의 질서를 버리고/ 공규(空閨)한 운명처럼/ 열차는 떠난다’는 대목에서도 충분히 감지된다. 여기서 열차는 속도가 빠른 현대 문명을 상징한다. 전에 없이 발달되고 빠른 교통수단이지만 거기에 편승할 수 없는 민중들에게는 신랑이 부재한 신방처럼 김빠진 장애물일 뿐이다. 아브라함 몰르는 일상생활에서 불가분 하게 접하는 많은 사물들이 곧 키치라고 말한다. 산업혁명에 따르는 대량 생산은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들을 양산하여 마구 들이댄다. 즉 현대인은 불가피하게 자신에게 유용한 것들보다 더욱 불필요한 사물들과 뒤엉켜서 살아가기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소외와 단절이 발생된다. 이 같은 키치적 상황과의 불화에 즈음하여 인간은 금욕주의적 유형, 쾌락주의적 유형, 공격적 유형, 소유욕의 유형, 초현실주의적 유형 등으로 반응하거나 아니면 이들이 혼합된 키치적 유형으로 반응한다. 이렇게 볼 때 키치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신, 나아가 그것이 배태한 문명과 문물에 대한 미적 자의식의 발로라는 면에서 모더니즘의 주요한 양태가 된다. 박인환의 시들에 등장하는 도시 문물은 키치의 이 같은 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브레디베리와 맥팔레인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모더니즘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정의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미적 자의식과 반재현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모더니즘이야말로 시대의 혼돈에 대한 미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를 참고로 한다면, ‘목마와 숙녀’, ‘술잔에 떨어지는 별’, '널개 없는 여신‘이 뒤엉킨 박인환의 시들은 키치적 양상과 함께 미적 자의식, 혼란한 시대에 대한 비정치적인 미적 반응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3.2 모더니티와 현실 비판의 결합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은 표면적으로는 갈등의 양상을 띠고 있다. 전자가 언어와 기법에 중심을 둔다면 후자는 주제 쪽에 더욱 무게를 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는 다 같이 비판 정신을 견지한다는 면에서는 일치되는 측면도 있다. 즉 모더니즘이 전시대의 매너리즘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데 비하여, 리얼리즘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강한 비판 정신을 생명으로 한다. 양자가 공존하던 1950년대의 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새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지니는 철학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바람직한 시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후반기’ 동인들의 시세계에서 보듯이,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인들의 시는 전후의 모순된 현실과 거기에 매몰된 인간들의 스노비즘에 대한 반발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즉 구세대의 역사에 대한 무감각과 무기력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해체적 인식은 박인환의 시를 이루는 큰 갈래의 하나이다. 전시(戰時) 피난열차에서 그가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검은 강」)고 썼을 때, 짤막한 미국 방문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마음만의 신사(紳士)’(「에베레트의 일요일」)였음을 깨달았을 때, 그의 시와 세계관은 새로운 지평을 겨냥하고 있었다.
신작로를 바람처럼 굴러간/ 기체(機體)의 중추는/ 어두운 외계(外界)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조종자의 얇은 작업복이/ 하늘의 구름처럼 남아 있었다.// 잃어버린 일월(日月)의 선명한 표정들/ 인간이 죽은 토지에서/ 타산치 말라/ 문명의 모습이 숨어버린 황량한 밤.
-「자본가에게」부분
착각이 만든 네온의 거리/ 원색과 혈관은 내 눈엔 보이지 않는다./ 거품에 넘치는 술을 마시고/ 정욕에 불타는 여자를 보아야 한다./ 그의 떨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무거운 침묵 속으로 나는/ 발버둥치며 달아나야 한다
-「충혈된 눈동자」 부분
럭키 스트라이크/ VANCE 호텔 BINGO 게임./ (중략) / 나는 옛날을 생각하면서/텔레비전의 LATE NIGHT NEWS를 본다./ 카나다 CBC 방송국의/ 광란한 음악/ 입맞추는 신사와 창부/ 조준은 젖가슴/ 아메리카 워싱톤 주(州)// 비에 젖은 소년과 담배/ 고절(孤絶)된 도서관/ 오늘 올드 미스는 월경(月經)이다.
-「투명한 버라이어티」 부분
언어의 자율성과 쉬르적 조사법에 바탕해 있으면서도 시적 화자의 현실 인식이 잘 엿보이는 시 몇 편을 들어 보았다. 맨 앞에 든 시에서 시적 화자는 ‘신작로를 바람처럼 굴러간/ 기체(機體)의 중추는/ 어두운 외계(外界)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기체에 닥친 사고의 풍경 묘사를 통하여 오염된 현대의 자본주의가 파행하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자본가’라는 제목과 ‘기체’, ‘외계’ 등의 시어는 동떨어져 있는 사물의 질서를 흐트러 놓는 해체 기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질서의 혼란을 넘어, 시적 화자가 몸담고 있는 세계 질서가 어긋나 있다는 인식의 일단을 드러낸 것으로 파악된다.
시 「충혈된 눈동자」에서는 ‘착각이 만든 네온의 거리/ 원색과 혈관은 내 눈엔 보이지 않는다’라는 언술을 통해, 문명의 건설은 번영이 아닌 도로에 불과하다는 인식의 일단을 드러낸다. 그 현란한 문명 속에서 인간이 벌이는 행태에 대해 ‘거품에 넘치는 술을 마시고/ 정욕에 불타는 여자를 보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현대인의 소외를 인상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다.
마지막에 든 시 「투명한 버라이어티」 제목부터가 아이러니에 기초해 있다. 시적 화자가 목격한 미국의 현대 문명은 백화점 식으로 거대하고 다양하지만, 겉으로의 투명을 가장한 불투명과 폐쇄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인식의 함축이다. 이 시는 ‘럭키 스트라이크’, ‘BINGO 게임’, ‘NIGHT NEWS' 등 키치적인 소재를 열거함으로써, 현대 문명의 풍경을 해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그것들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기보다 소외시키고 문명의 노예로 만들어 가는 사물들이다. 시적 화자는 ’입 맞추는 신사와 창부/ 조준은 젖가슴‘이라는 대비를 통해 오염된 문명이 은폐하고 있는 어두운 풍경을 드러내 보여 준다. 나아가 ’고절(孤絶)된 도서관‘이라는 시어를 통해 정신이 황폐화된 현대의 풍경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공광규는 “종군 작가로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온 박인환은 「고향에 가서」 등의 시를 통해 전쟁 후 물리적 심리적 상흔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결국 박인환의 전후 시들은 모리배들에 의해 편향화된 전후의 현실과 비인간화된 문명에 대한 시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서 드러나듯이 박인환의 시들은 도시적인 정서와 함께 그것이 비인간화로 치닫고 있는 50년대의 현실을 형상화하고 있다. 박인환이 한국전쟁을 전후한 현실을 소재로 삼은 일련의 시들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명시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그가 전후의 왜곡된 현실을 묵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문예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는 상징이 레토릭으로 떨어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상징(symbole)은 말(mot)로서가 아니가, 사실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징은 단순히 레토릭이 아니라 ‘상징체계’(symboliques)라 일컬어지는 현상을 고찰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상징에 의한 환기 작용(vocation)은 직접적인 의미 작용에 접목되는 것이며, 상징의 개념은 따로 떼어서 연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상징은 기호와 해석, 실용과 놀이, 전의(轉義)와 문채(文彩). 모방과 미, 예술과 신화, 압축(壓縮)과 전이(轉移) 등과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문장의 직접적 의미 차원과 담화의 간접적 의미 차원을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그 통일성을 근거로 문맥내적 상징 의미와 문맥외적 상징 의미, 그리고 그 요소들의 관련 양상을 언어학적 또는 구조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즉 문학 텍스트를 ‘상징적 의미 구조체’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토도로프는 모든 언술(言述)에는 직접적 의미와 간접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담화(談話)에 적합한 ‘의미’가 '직접적‘이라고 불러질 수 있게 되는 반면, 발화는 담화에서 이식된 간접적 추론적 의미를 가진다.(중략) 의미의 간접적 생산은 모든 담화에 존재하며, 중요한 담화를 포함한 어떤 종류의 담화에서는 아마도 가장 지배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즉 직접적인 언술보다 모든 언어는 그것이 환기하는 간접적 의미가 더 비중 있게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 토도로프의 견해이다. 환기는 단지 단어에 그치지 위에 든 제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에 넣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 같은 토도르프의 견해는 풍자시 등을 해석하는 데 있어 지극히 유용하다. 토도로프가 소개하는 프레그(Frege)의 삼분법에 따르면 “하나의 기호는 하나의 발화(reference), 하나의 의미(meaning), 그리고 그것에 연상되어진 하나의 이미지(Bedeutung, sinn, Vorstellung)를 갖는다는 것이다. 단선적인 의미의 파악에 그치지 않고, 확장 언어적 국면을 골고루 검토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의 측면에서 본다면 박인환의 시들은 여느 리얼리즘 시들보다 비판 의식이 돋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박인환은 전 시세계를 통하여 아방가르드 정신과 함께 풍부한 이미저리와 자율적인 언어를 무기로 한 모더니즘 기법을 일관되게 구사하고 있음이 관찰된다. 이것은 박인환의 시적 지향이 모더니즘에 있음에 귀의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같은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이제 박인환을 낭만주의자와 현실주의자, 리얼리스트와 모더니스트로 보는 이중적 인식을 거두고, 1950년대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시인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더니즘은 단순히 도시적 정서의 수영, 언어의 자율적 사용에서 벗어나 오염된 문명이 초래하는 비인간적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과 인간다운 삶에의 회복 의지를 바탕으로 한 사조이기 때문이다. 박인환의 시들은 그 같은 모더니즘의 사유를 잘 형상화낸 시편들이다.
4. 맺는 말
이제까지 50년대 모더니즘의 전개와 관련하여 박인환 시세계의 일단을 점검해 보았다. 박인환은 기존의 견해로는 낭만적 모더니스트라거나 페시미즘에 침윤된 요절 시인 등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본고를 통해서 고찰한바 분명한 시각 교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선 박인환의 시들은 대부분 도시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는 단순히 현대화된 공간으로서의 도시 선호를 넘어서 인간과의 갈등 양상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그 나름의 미적 모더니티를 획득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박인환의 모더니즘적 특징은 그 방법론 측면에서보다 언어 선택의 내용으로 확인되는 의식지향성에 있어 특히 두드러짐이 확인된다. 박인환의 시 세계는 한마디로 로맨티시즘에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면서도 감각은 극히 현대적이요 인생파적인 관념에 더 접근되어 있다. 그는 삶의 고뇌와 모순을 이미지로 제시하기보다는 감성과 암유를 통해 나타내는 경향이며 그러한 자세는 많은 경우에 웅변조라기보다는 비장한 노래의 형식으로 자리를 굳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액자 은유의 연장선상에서 잇달을 환유를 구사함으로써 오염된 자본과의 갈등 양상을 효과적으로 표상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와 함께 환유에 동원되는 매재들을 키치적 상상력을 유발하는 물상들로 채움으로써 자유분방한 데카당스의 미학과 함께 신선함을 보태고 있다 하겠다. 하지만 박인환은 현대적 문물에 현혹되거나 극단적으로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에 몰입되지 않는 가운데 화려한 외양으로 치장한 자본과의 경계를 유지하는 지성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박인환의 모더니즘이 과도한 서구적 영향에서 배양된 것이 아닌, 우리 현실에 뿌리박은 토착 모더니즘임을 말해 준다. 여기에 박인환의 시가 독자들에게 대중적으로 오래 기억되는 것 못지않게, 현대 시문학사상의 의의가 있다고 본다.
80년대 말 들어 황지우, 박남철 등 일군의 시인들에 의하여 구사된 기법이, 50년대에 벌서 매끄럽게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더구나 현실에 대한 파편적 인식에 머물지 않고 보기 드물게 50년대의 반신불수적인 현실에서 주소를 모른 채 난립한 서구화된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형상화하는 데 동원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 몰르는 “행복의 반예술이라는 이념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지지자들은 다름 아니라 평균적인 중산계급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물을 소유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행복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사물들을 즐거움과 기쁨을 위한 단순한 소유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 매우 유용한 도구로 이용한다.”는 게 그 요지이다. 즉 사물을 대상화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그 가운데 숨어 있는 인간적인 요소들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한발 더 나아가 상품문명의 요소들을 함께 즐기면서, 그것들에게 인간의 입김을 불어넣고자 하는 의식을 박인환은 선구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1950년대의 모더니스틀은 모더니즘 본래의 취지와는 얼마간 거리가 있는 시작 태도와 성과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본고를 통해 고찰한 바, 박인환의 경우에 보듯이 아방가르드와 인간화를 지향하는 시정신이 결합될 때 모더니즘의 정화가 발휘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1060년대의 ‘현대시’ 동인에 이르러, 비판 의식이 약화되고 기법의 첨예화로 치달은 것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일관되게 도시적인 정서에 바탕해 있으면서도, 언어의 자율적 사용 등 모더니즘 기법과 함께 비인간화된 현대 문명에 대해 꾸준하게 비판의 메스를 가한 박인환의 시들은 모더니즘의 정서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연 한 출구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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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몽구 1977년 월간 『대화』지로 등단. 『수종사 무료찻집』, 『칼국수 이어폰』, 『황학동 키드의 환생』 등 시집이 있다.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한국크리스찬문학상 대상 수상. 계간 《시와문화》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