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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운 金剛山
고 광 창
<금강산 찾아가자 일 만 이 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 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우리가 어렸을 적 많이 불러 본 노래다. 노랫말이 금강산을 가보고 싶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민족의 靈山 금강산을 가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은 금강산이 북쪽에 있어서 가볼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금강산에 꼭 가보고 싶은 이유는 북한에 있어서가 아니라 금강산이기 때문이다.’고 그만큼 아름답다는 이야기다.
‘一 萬 二千峰’ 이란 봉우리가 많아 ‘산 너머 산, 그 너머 또 산’이 계속 이어져 봉우리를 헤아릴 수가 없고 옛부터 ‘萬’이라는 글자는 10,000이라는 숫자이기 전에 ‘많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萬보다 더 많다는 의미로 뒤에 二千을 붙였다는 이야기에 나는 공감이 갔다.
금강산은 하늘에서 선인들이 아름다움을 구경하러 왔다는 전설이 많은 산으로 유명하다.
옛날부터 시인, 묵객들이 금강산을 많이 찾아 그림도 그리고 시도 많이 지었다고 한다. 시인들이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에 유혹되어 붓을 들었지만 잘 못 표현할까 두려워 붓을 내려놓은 시인들이 많다고 하며 특히 방랑시인 김삿갓 마저도 금강산에 대한 시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 잘 못 표현하는 게 두려워--- 그 만큼 금강산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유명한 시인들도 잘못 표현할까 두려워 시를 짓지 않았다는데 내가 어떻게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말과 글로 표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만 금강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전하려고 이 글을 쓸 뿐이다.
1999년 8월이라고 기억된다. 나에게 갑자기 금강산 관광을 가는 기회가 생겼다. 작년 (1998년) 9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나도 언젠가는 금강산에 갈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그 기회가 생각보다는 빨리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별도로 외국어를 익힐 필요도 없기 때문에 아무 부담 없이 홀가분하게 가게 된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자랐던 우리 집 벽에는 가족 앨범 사진 액자가 걸려있었는데 그 액자 속에서 우리 선친께서 가장 소중히 하는 사진이 금강산 관광사진이다. 언젠가 벽에 걸린 사진틀을 내려 청소하실 때 금강산 관광사진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내가 금강산 갔을 때 찍은 사진인데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삼삼하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어떤 폭포 아래에서 30여 명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인데 빛은 바랬지만 선친의 얼굴 모습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이것이 내가 어렸을 적 본 금강산의 전부였다.
<출경 수속>
출발 당일 오후 1시에 출발한 버스는 5시경 부산 다대포 항구 앞에서 멈췄다. 항구 앞에 설치된 출국장(금강산 관광을 위한 임시 설치된 출국장인 것 같았다) 에서 비행기로 출국할 때 와 똑 같은 절차를 밟았다. 出境(우리는 出國이라 하지만 중국에서는 경계선을 넘는다 해서 출경이라 하는데 북한에서도 출경이라 하는 가 보다) 신청서, 세관 신고서 작성, 방역 주사 맞기 등등--, 신청을 마치니 승선증을 준다. 내 사진과 이름 그리고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다. 여행 기간 내내 목에 걸고 다녀야 한다고 한다. 일종의 개 목걸이 같은 것이다. 외국 가는 것도 아닌데 절차가 왜 이렇게 복잡하나? 또 바다 건너 외국도 아닌데 왜 배로 가야하나?(그때 까지는 육로 통행이 안 되고 있었다)
<크루즈 선 탑승>
부두에 가보니 7층 규모의 커다란 여객선이 대기하고 있다. 아파트 한 채가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크루즈(Cruise)선에 오르니 유럽풍의 용모를 지닌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맞이한다.(이 미녀들이 러시아産 이란 걸 다음에야 알았다.) 나는 그동안 크루즈여행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크루즈선을 타 볼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처음 타보니 듣던 대로 호화유람선이다. 호실로 들어가니 호화스러움이 더 물씬 풍겼다. 짐을 풀기가 바쁘게 저녁 식사하러 식당으로 내려오라는 방송 맨트가 나왔다. 식당은 300여 명을 수용할 정도로 컸고 식사는 뷔페식인데 시내에서 먹는 것과 비슷하지만 육고기가 종류도 다양하고 양도 푸짐했다.
저녁 식사 후 대강당으로 모이라는 방송 맨트가 나왔다. 대강당에 가보니 금강산 가기 전 사전교육인 것 같았다.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안기부(?)에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강사가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이야기 해 주었는데 요점은 ‘~하지 말 것’이었다.
집단에서 이탈하지 말 것, 북한 정권이나 지도자를 비방하지 말 것, 북한 사람들과 이야기 하지 말 것,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 것, 북한 물건을 함부로 사지 말 것 등등
대강당에서 나올 때 위 사항을 잘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했다.
밤 9시부터 자유시간이다. 주점, 게임, 영화 감상, 노래 방 등등. 나는 노래방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2~3류 가수들이 출연하고 러시아 미녀들이 우리나라 유행가를 불렀다. 노래방이 끝나고 선실로 들어온 후 배가 출항했는데 배 엔진의 진동을 통해서 내가 배를 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금강산 사전 공부>
갑자기 금강산 관광을 가게 되었는데 금강산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으니 모처럼 가는 금강산인지라 많이 보고픈 마음이 앞선다. 그래서 시내 관광여행사에 가서 금강산 홍보자료를 얻어 가지고 왔다. 금강산 노랫말에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이라 했는데 금강산은 4계절 이름이 바뀐단다. 봄철은 꽃이 만발하고 산수가 아름다워서 마치 빛나는 다이아몬드(금강석) 같다 해서 金剛산, 여름철은 골짜기 마다 녹음이 우거져 神仙이 사는 곳 닮았다 해서 蓬萊산, 가을철은 산이 불타듯 단풍이 아름다워 風樂산, 겨울철은 수목은 없어지고 기암괴석만 뼈처럼 남아있어 皆骨산 ---, 지금은 한 여름이니까 우리는 금강산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골짜기 마다 녹음이 우거진 蓬萊산을 보러 가는 셈이다.
금강산은 크게 해금강, 외금강, 내금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해금강은 이름 그대로 바닷가 금강이고, 외금강은 해금강 바로 안쪽이고, 내금강은 외금강 안쪽이란다. 금강산 관광여행은 정주영 회장이 직접 북측과 협의해서 유치했다고 하니 참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북사업 실무는 자기의 다섯째 아들이고 추진력이 강한 정몽헌 회장에게 맡겼다. 고
한다.
<정주영 회장 이야기>
여기서 잠깐 현대 정주영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정주영 회장은 지금은 북쪽 지역인 강원도 통천군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출하여 쌀가게 점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대 그룹인 현대그룹 회장이 되고, 우리나라 산업화의 상징이 되신 立志傳적인 인물, 한 세기에 한 명 날까 말까한 不世出의 인물이다. 정 회장은 그동안 자기가 살아온 삶을 후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이 땅에 태어나서’라는 책을 펴냈다.
또 정 회장은 다음과 같은 어록을 남겼다. ‘나에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해 낼 수 있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머리로 생각만 해서는 기업이 클 수 없다. 기업이란 현실이요. 행동함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이봐 해봤어, 해 봤냐고?’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 나가야 한다.’ ‘나는 자신을 자본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다.’ 등등
정 회장의 아이디어와 뚝심, 추진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하나는 바다를 막아 옥토를 만드는 서산 간척지 공사를 할 때의 이야기다. 마지막 물막이 공사를 하려는데 조류가 세어서 더 이상 진척시킬 수 없다고 하자 정 회장이 ‘그러면 헌 선박을 사다가 물막이를 해라’고 해서 회장의 지시대로 헌 선박을 사다가 물막이 공사를 무난히 마쳤다는 사례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어느 해 10월 경 정 회장에게 내년 2월에 국제적인 행사를 하려는데 장소가 마땅치 않으니 체육관하나 지어 주면 좋겠다는 주문을 했다고 한다. 이때 현대건설 직원들이 겨울 공사를 할 수 없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알아보고 특히 러시아에 물어도 겨울 공사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하니 정 회장 왈 ‘시멘트, 자갈, 모래가 있는데 왜 공사를 못해? 그럼 우리가 지어야 할 건물보다 더 높고 큰 천막을 만들고 그 천막 속에서 공사를 하면 돼 쟎아!‘했다고 한다. 결국 정 회장의 아이디어와 뚝심으로 밀어부쳐 겨울철에 그 체육관 공사를 마무리해서 북측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정 회장에게 불가능은 없는 것 같다.
정 회장은 가끔 ‘나에게는 여자가 많다.’고 했다는데 정 회장이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여자가 세 명 있었다. 첫째는 당연히 부인 변중석 여사다. 변 여사는 날마다 공사 현장에 나가서 직원들 밥을 직접 해주는 것이 일과다. 또 정 회장에게는 배다른 자식이 몇 명 있는데 어느 날 정 회장이 ‘핏덩어리’를 데리고 와서 ‘잘 키우라’고 놓아두고 가면 아무 불평 없이 자기 배가 아파 낳은 자식들처럼 잘 키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정 회장에게는 아들 7명에 딸 하나가 있다. 이걸 옆에서 지켜본 현대직원들이 변 여사를 ‘살아있는 천사’라고 불렀다 한다.
둘째는 단골 요정 집 마담인데 공사하다가 자금이 떨어질 때면 언제나 자금을 융통해 주었는데 어느 날 거금을 보내 준 다음 그 마담은 자살했다고 한다. 정 회장이 당장 그 돈을 갚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마담이 모든 부채를 자신이 안고 자살한 것이다. 정 회장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셋째는 강원도 고향 통천 이장 집 딸이다.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 되는 소설 이광수 작 ‘흙’
을 읽기 위해서 매일 아침 20리 길을 걸어 이장 집까지 갔는데 그 때마다 정 회장에게 신문을 내어 준 사람이 그 집 딸이다. 어쩌면 신문보다는 이장 집 딸을 짝사랑하고 그 얼굴을 보고 싶어 갔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정 회장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부탁해서 통천 이장 집 딸을 만났는데 이미 결혼을 해서 애를 2명이나 낳은 여자였다. 정 회장이 이장 집 딸에게 내가 서울에 둘이 같이 살 집을 마련해 놓았으니 서울 가서 같이 살자고 했으나 여자가 듣지 않았다고 하고 그 몇 년 뒤 정 회장이 평양에 가서 다시 수소문해본 결과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알았다면 내가 아산병원에서 치료해 줄 수도 있었는데---’ 하며 매우 아쉬워했다. 고 한다.
북쪽 통천이 고향인 정 회장은 고향 사랑이 남달라서 1998년 소떼 500마리를 직접 몰고 판문점을 거쳐 북쪽에 전달한 사실이 있고 평양에 류경 돔 체육관을 지어 기증한 사실이 있으며 금강산관광개발 사업을 위해 북측 김정일 위원장과 여러 차례 만났다고 전해진다.
정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나라 경제 개발 사업에 적극 참여 하여 많은 사업을 했다. 특히 1973년 소양강 댐 건설 입찰할 때 정부 예상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낙찰을 받았는데 이때 일본 업체에서 ‘어떻게 그 작은 돈으로 공사를 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하며 이때 정 회장 말이 ‘이 댐을 국민 세금으로 건설하는데 한 푼이라도 적게 들여 공사를 하겠다.’고 말하고 그 공사를 성공리에 마쳤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자기 이익보다는 국민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이러던 정 회장이 박대통령 사 후 신군부에서 정치자금을 강요하는 바람에 많이 시달린 끝에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때 ‘통일 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했다. 이때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나라 경제는 일류인데 정치는 삼류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 정치도 일류를 만들겠다.’ 하면서 ‘반값 아파트’를 구호로 내 걸었다. 하지만 이때는 김영삼과 김대중 이라는 두 거물 정치인들이 양팔을 걷어 부치고 한 판 승부를 벼르고 있는 판이라 정 회장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장전항>
배가 출항한지 4~5시간 후 선실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말라는 방송 맨트가 나온다. 짐작컨대 그 시각에 배가 북측 경계선 가까이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듣는 바에 의하면 우리 선박이 휴전선을 바로 넘어 갈 수가 없고 남쪽에서 공해 수역으로 일단 빠져 나가 북상한 후 공해지역에서 다시 북측 지역으로 들어간다는데 그 시각을 쌍방간에 캄캄한 밤으로 정한 것 같다.
얼마 후 배 엔진 시동이 멈췄다. 장전항에 입항한 모양이다. 선실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방송이 나왔다. 창밖을 보니 깜깜하다. 한참 있다가 또 방송이 나왔다. 7시부터 선내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8시까지 부두로 나오라는 것과 오늘은 금강산을 구경하고 다시 이곳에 와서 배에서 잠을 잘 예정이니 필수품만 휴대하고 나머지는 배에 놓고 가라는 것이다.(이곳에 적당한 숙소가 없기 때문에 숙소 겸 여객선으로 사용하려고 호화 유람선을 빌려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현대 아산 버스>
배에서 내리니 ‘현대아산’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중형버스가 20여대 줄지어 서 있다. 버스가 중형이라 그런지 아주 예쁘게 생겼다.(다음에 알고 보니 금강산 오르막길에 커브길이 많아 버스의 길이를 짧게 해서 28인 승으로 특별히 제작했다고 한다.) 버스마다 현대아산 로고가 새겨진 휘장을 두른 안내원과 북측 여자 한 분이 함께 탔다.(다음에 알고 보니 이 여자가 북측 공원관리요원(감시자)이었다)
버스에 오르자 기사님이 ‘안녕하세요. 어서오십시오.’하고 우리말로 인사 한다. 알고 보니 이 기사들은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 동포들이란다. 차내에서 현대아산 안내원이 어제 밤에 대강당에서 들었던 이야기 ‘~하지 말 것’ 등등 외에도 여기에서는 카메라로 북측 사람이나 건물 그리고 차창 밖 풍경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덧붙인다. (다음에 알고 보니 여기가 북한 해군기지가 있는 장전항 이라 군사보호 시설을 못 찍도록 한 조치였다)
몇 분 후 입국 사무소 앞에서 차가 멈춰 섰다. 제복을 입은 북측 담당자가 입국허가서를 하나하나 첵크한다. 입국 절차를 마치고 차가 다시 출발했는데 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밖 북한 들녘을 보니 산은 거의 벌거벗었고, 논밭에는 잡초가 많이 나 있고 그나마 있는 곡식은 영양실조에 걸린 것 같이 메말라 보인다. 이곳에서는 국가에서 共同 生産, 共同 分配를 하고 개인 재산을 인정해 주지 않으니 누가 땀 흘려 일하려고 하겠는가? 그것이 共産主義 盲點인 것이다.
<온정리 휴게소>
장전항에서 출발한 버스가 10여 ㎞를 달려 온정리에 도착했다. 여기가 금강산 관광의 시작점이라고 한다. ‘金剛山’이라는 이름은 화강암이 오랜 세월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겉흙은 없어지고 빼어난 절경만 남아 마치 다이어몬드 (금강석 金剛石)처럼 강하고 예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데 강원도 화양군, 고성군, 통천군, 인제군에 걸쳐있고 높이 1,638m(비로봉)에 넓이 530㎢ 라고 한다. 최고봉인 비로봉을 경계로 동쪽은 외금강, 서쪽은 내금강인데 우리는 오늘 외금강을 보러 간다고 한다.
<外金剛>
외금강은 ‘九龍폭포’와 ‘萬物相’이라는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암반, 절벽, 폭포 등이 웅장하고 거기에 아름다운 潭沼와 우거진 숲 등이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이 금강산을 대표할 만한 곳으로 ‘금강산 중 금강산’이라 부르는 곳이라 한다.
<구룡폭포지역>
오늘은 구룡폭포지역을 관광한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내려 걸어서 산을 올라갔다. 목란관 앞 다리를 지나갔다.
‘木蘭館’은 남북회담 시 ‘숙소는 백화원’, ‘만찬은 목란관’이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라고 한다. 우리는 보통 국제적인 회담은 큰 도시 호텔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교통이 불편한 이곳 산골짜기에서 남북회담을 하다니?
그 다음 한 참 걸어서 간 곳이 ‘金剛門’이다. 큼지막한 바위들이 길을 가로 막고 있는데 ‘ㄱ’자 모양으로 난 틈이 있어 그 곳으로 통과했다. 금강산에 이런 문이 몇 개 있다는데 그 중에서도 이 문이 가장 기묘하게 생겨 유명하단다.
‘玉流洞’ 금강문을 통과하면 바로 만나게 되는 것이 옥류동 계곡이다.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구슬같이 맑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골짜기에 폭포, 빼어 난 담소 들이 많고 골짜기 주변에 숲이 우거져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우거진 숲을 보니 금강산을 여름철에 왜 蓬萊산이라 하는지 알만했다. 나는 지금껏 관광명소하면 빼어난 산봉우리, 깎아지른 암벽, 커다란 폭포수, 유명한 사찰만을 생각했지 골짜기가 이렇게 유명한 관광 명소인지는 몰랐었다.
옥류동에는 옥류담, 연주담, 비봉폭포 등 유명한 명소가 많이 있었다.
‘玉流潭’ 금강산 沼 가운데 가장 크고 물이 맑은 곳이다.
‘連珠潭’ 옛날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가 실수로 두 알의 구슬을 흘리고 갔다는 전설이 있는 곳, 潭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파란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한 모양이다.
‘飛鳳폭포’는 옥류동 계곡에 있는 높이 50m의 폭포로 폭포수가 바람에 의해 뽀얀 물안개로 변하면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봉황이 흰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양을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우리가 갔을 때는 뽀얀 물안개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봉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회오리바람이 불어주어야 한다는데 --
<북한측 공원관리요원>
장전항에서 우리가 출발할 때부터 우리 일행 주위를 바짝 붙어 말없이 따라 다니는 한 여자가 있었다. 곱상인 얼굴에 옅은 미소까지 머금고 있다. 북한 측 공원관리요원이라고 한다. 금강산에 쓰레기 등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를 띄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도 부산에서 출발 전에 ‘~하지 말 것’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쓰레기는 버리지 않았지만 여름철인 관계로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을 보니 세수도 하고 싶고 손도 씻고 싶은데 관리 요원이 못하게 가로 막는다. 심지어는 손수건에 물을 적시려고 해도 못하게 한다. 맑고 깨끗한 물을 더럽히지 말라는 뜻인 것 같은데 먹는 물도 아니고 흘러가는 물인데 좀 더렵혀지면 뭐가 덧나냐? 금강산 환경보전도 좋지만 정말 너무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점심때 빵 우유 음료수 등을 나누어 준다. 식당까지 내려 갈 수 없으니 대용식으로 주는 것 같았다. 내 옆에 북한 측 관리요원이 있는데 나만 먹을 수 없어 빵 한 개를 주었으나 받지 않는다.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기념으로 하려고 하니 나하고 사진 한 번 찍자고 했더니 손을 내저으면서 싫다고 한다. 그럼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고 했더니 또 손을 내저으면서 ‘남조선에서 여기 오기 전에 북측 사람과 이야기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왔을 텐데 왜 그러십니까?’한다.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사진도 안 찍어주고 말도 못하게 해서야 되겠느냐? 남측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 보아라. 내가 대답해 줄 테니’ 했더니
한 참 뜸을 들이더니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단다. ’이곳 북측에서는 남측은 미국의 경제 식민지로 알고 있는데 남측에서 이곳으로 관광 온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카메라는 독일제나 일본제가 많아 그것이 좀 이상하다‘ 는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그것이 남측이 미국의 경제 식민지가 아니라는 증거다.‘ ’또 의문 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라.‘ 했더니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하는 도중에 가끔 주위를 살펴보곤 한다. 아마 자기를 감시하는 눈이 어디선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모양이다. 더구나 나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무슨 이야기를 하나 궁금한 우리 일행 일부가 내 주위에 모여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감시자를 감시하는 또 다른 눈이 있다는 생각만 해도 섬뜻했다. 우리 일행 일부를 주위에서 물리 친 후 내가 물었다. ’남측이 북측보다 더 잘 살고 있는지 아느냐?‘고 그랬더니 고개만 끄덕인다. 그래서 내친 김에 또 물었다. ’남측에 와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그랬더니 목소리를 높여 퉁명스럽게 ’가기 싫습니다. 남측은 거지도 많다는데 거기 가서 거지로 살란 말입니까? 여기는 수령님께서 골고루 배급을 주시니까 부자나 거지 구별 없이 고루 잘 살고 있어요.‘하고는 자리를 떠나 멀리 가버린다. 남측에 와서 살고 싶냐고 묻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무심코 해버린 것 같아 후회스럽다. 북측이 알면 나를 잡아갈 것인데 --
남북이 서로 갈라선지 5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즉 북한의 속살을 보고 싶었다. 우리만 그러겠는가? 북측도 남측 사정이 궁금하겠지
그러니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라도 해야 하는데 북측이 주민들에게 공산주의 세뇌 공사를 워낙 튼튼하게 해 놓아서 말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잠시 후 우리 집단의 관리요원은 남자 요원으로 바뀌었다. 피부색이 약간 검은데다가 얼굴마저 무표정이다. 아침 식사하면서 들으니 이른 새벽 해돋이 모습을 찍으려고 갑판위로 올라갔던 관광객이 캠코더(Cam corder)를 압수당했다고 하고 또 우리 팀에서도 차안에서 북측 출입국 사무소를 찍다가 카메라를 압수당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그 관리요원이 나를 신고하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빵을 먹으라고 권하기도 하고 남측이 미국의 경제 식민지가 아니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나를 밉게 보지는 안 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내 주위 환경이 순식간에 곱상 미소에서 밉상 무표정으로 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말을 잘 못했으니 어쩌랴!
우리는 금강산 관광객인데 북측 감시자들이 이곳저곳에서 감시자의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니 뭔가 잘못 된 것 같다. 아! 감시자의 눈! 눈! 머리가 흔들린다. 나는 이 순간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의 감시를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살아가는 자유 대한민국에 태어 난 것을---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九龍瀑布’는 옥녀봉이라는 아름다운 연봉을 배경으로 높이 74m, 폭 4m로 우리나라 3대 폭포에 들어가는 큰 폭포라고 하는데 폭포의 벽과 바닥이 하나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깎아지른 암벽에서 내리붓는 물줄기의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보면서 와!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말 압권이다. 이런 풍광을 보면 뭐라고 찬미의 표현이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니 마음이 답답하다. 와! 장관이다. 야! 아름답다는 말 밖에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선친께서 금강산 관광 사진이라고 보여 준 사진과 그 모습이 똑 같다. 단체 사진을 찍으면서 선친 생각이 났다. 선친께서 이 사진을 보시면 옛날 감흥을 느끼시고 뭐라고 한 말씀 하셨을 텐데 5~6년 전 作故 하셨으니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九龍淵’은 폭포수에 의해 땅이 파인 깊이 13m 연못인데 옛날 금강산을 지키는 아홉 마리의 龍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上八潭’은 구룡폭포 바로 위쪽에 있는 8개의 맑고 푸른 연못을 말한다. 골짜기 절벽사이로 골짜기 밑바닥에 새파란 물을 담고 있는 둥글고 오목한 크고 작은 沼들이 구슬을 꿰어 놓은 듯 층층이 연달아 있는데 그 중 큰 것 8개를 八潭 이라하고 폭포 바로 위에 있다하여 ‘上八潭’이라 한단다. 이곳이 옛날에 하늘에서 팔선녀(선녀와 나뭇꾼 관련)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설화가 있는 곳이다. 상팔담에 내려가자마자 선녀들 옷이 어디 있나하고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선녀가 나타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조용하고 신선한 곳이었다.
‘九龍臺’는 상팔담 바로 위에 있는 전망대로 상팔담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이곳에서는 비로봉 능선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오늘 관광의 핵심은 웅장한 구룡폭포와 옛날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구룡연, 그리고 엣날 여덟 명의 선녀가 목욕했다는 상팔담이다. 따라서 오늘의 Key Word는 아홉 마리 용과 팔선녀에 얽힌 설화라 해야 할 것 같다.
구룡연 지구 관광을 마치고 산을 내려 와 현대 아산 차에 탑승했다.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다. 안내원이 말한다. ‘잠시 후 온정각 휴게소에 들렀다 가는데 내일 기념품 살 시간을 충분히 드릴테니 오늘은 눈 구경만 하라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 배에도 기념품 가게가 있으니까 저녁 식사 후 그곳 가게도 한 번 들려 보시고 가격도 비교해 보시면 내일 기념품 사는데 참고가 되실 겁니다‘ 한다.
온정각 휴게소에 들렸다. 건물은 현대에서 지었다는데 가게 점원은 북측 아가씨들이고 상품 또한 들쭉술, 송화가루, 금강산 사진첩 등 모두 북한산이다. 또 이곳에서는 달러만 사용할 수 있단다. 몇 사람이 담금 술을 몇 병 사가지고 왔다. 저녁 밥 먹을 때 반주로 한다고 ---
이렇게 해서 첫날 관광은 마치고 배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었는데 식사 후 배 밖으로 못 나오게 하고 오락실이나 영화관 노래방에 가도록 권한다. 이웃에 해군 기지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몸이 피곤하여 침실에 있으면서 오늘 관광했던 내용을 좀 정리하기로 했다.
<만물상 지역>
둘째날, 오늘은 萬物相지역 관광이다.
萬物相은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 하실 적에 시험 삼아 만든 만물상이라 다른 말로 萬物草라고도 한단다. 세상 만물의 모형을 모두 한 곳에 모아 놓은 형상이다. 이곳은 금강산 절경 가운데에서도 으뜸가는 곳으로 깎아지른 층암절벽과 온갖 형태의 물체를 닮은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져 있어 금강산에서 山岳美가 가장 돋보이는 곳이다. 만물상은 빼어난 풍광과 수려한 경관이 찬탄과 찬미의 대상이다. 만물상이 신기한 인상을 주는 것은 흰색의 화강암 節理 때문이라고 하는데 화강암에 발달하는 서로 교차하는 수직 및 수평 절리가 만물상 같은 기암괴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온정리에서 차를 타고 뱀 모양 구불구불한 온정령 고개를 한참 올라간다. 가는 도중 ‘찬 안개가 낀 골짜기’(하한계)를 지나서 미인송이 쭉 뻗어있는 수십 개의 고갯길을 이리저리 돌아 올라가니 망상정이 나온다. 여기가 주차장인데 여기서부터 만물상 도보 관광이 시작된다. 그런데 관광객이 한꺼번에 200~300명이 몰려드니 내 마음대로 천천히 갈 수가 없고 밀려서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天仙溪는 아래쪽 망상정 에서부터 천선대 까지 오르는 5㎞의 계곡을 말하는데 길옆에 녹음이 무성하고 멀리 가까이 기암괴석도 보여 경치가 아름다운데 구불구불 오르는 버스길이 무척 아름답다. 이곳도 유명 관광구역에 속한단다.
三仙岩은 만물상 입구에 있는데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다. 하늘에서 세 선인들이 내려와 만물상을 구경하다가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 포토 포인트에 사진 찍으려는 사람이 줄지어 서 있다. 단체 사진을 찍는데 ‘김치’하고 찍기를 2~3번 반복하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뒤에서 소리친다. ‘인물 사진 찍는기요? 여기는 주위환경이 아름다우니까 대충 찍어도 잘 나오니 마 대충대충 찍소 여기가 금강산 아닌교?’한다. 함께 웃었다. 여기서부터는 철 사다리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관광객이 밀리고 좀 위험하다.
鬼面岩은 둥그런 돌 하나를 머리 위에 이고 우뚝 서있는 바위의 모습이 귀신의 얼굴처럼 험상궂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고 신선들이 금강산에 구경 온 귀신들을 붙잡아 돌로 만들었단다.
切斧岩은 몰래 도망 간 선녀를 만나고 싶은 심정을 하소연 할 길 없는 나무꾼이 도끼로 바위를 내려찍었다는 전설이 있다. 중턱에 도끼에 찍힌 것처럼 움푹 패인 자리가 있어 절부암이라 한단다.
그런데 좀 반반한 바위벽에는 이곳저곳 어김없이 낙서가 되어있다. 낙서 내용이 좀 다른데 ‘김일성 장군 만세!’가 대표적이다. 우리 대중가요 노랫말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다음에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곳 낙서도 연필로 썼으면 지우개로 지울 수 있을 텐데 크게 음각해 놓고 거기에 빨간색 페인트까지 칠해 놓았으니 지울 수도 없다. 우리 관광객들에게 자연을 훼손한다고 쓰레기도 못 버리게 한 사람들이 자기들은 돌 벽에 낙서를 해 자연을 파괴하고 있었다. 이 낙서가 아름다운 금수강산의 큰 오점임을 알아야 한다.
安心臺는 바위 봉우리 위에 널따란 바위가 있어 거기에 앉아 쉬면서 구경할 수 있는 곳 즉 천선대가 멀지 않았으니 안심하라는 휴식처란다. 위•아래를 보니 산세가 절경이고 기암괴석들이 만물상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여기서부터 철 사다리의 경사가 50~60도로 위험하다.
忘杖泉은 조그만 옹달샘인데 물 한 모금을 먹으면 힘이 솟아올라 가지고 왔던 지팡이를 놓고 간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나도 한 모금 마셔보았는데 난 지팡이를 안 가지고 갔으니 놓고 올 지팡이도 없다. ㅎㅎㅎ
‘하늘 문’은 하늘로 올라가는 문을 뜻하는데 겨우 한사람 통과할 정도로 좁은 자연석 문이다.
‘제일문’이라고도 하고 ‘금강 제일문’이라고도 한다. 반대쪽에는 내려가는 문 ‘땅문’이 있다.
天仙臺는 금강산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다. 만물상 경치가 좋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정상에 오르니 관광객이 만원이다. 상봉에 국가지정 천연기념물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내려다보니 구불구불한 천선계의 자동차 길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기암괴석을 파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계곡에 이런 길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望洋臺는 망망한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이라는 뜻인데 멀리 동해 푸른 바닷물이 보이고 해금강이 바로 아래에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만물상은 어떤 특정한 곳이 아니라 이 지역전체가 만물상이고 기암괴석마다 전설이 얽혀 있다. 따라서 만물상지역 관광의 키 워드는 당연히 기암괴석과 전설이다.
<온정각 휴게소>
이틀째 관광을 마치고 온정각으로 내려와 식당으로 들어갔다. 좀 늦은 점심이다. 몇 가지 메뉴를 제시하면서 그 중에서 하나 고르라고 하는데 더운 여름철이라 그런지 대부분 평양냉면을 주문한다. 면도 좋고 국물도 맛있었지만 시원한 김칫국물이 일품이었다.
식당에서 나오니 금강산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앗차! 저기가 금강산인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틀간이나 산속을 헤매고 다녔네. 금강산은 산속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고 밖으로 나와야 보이는 건데 그걸 깜빡 잊었네. 하마터면 금강산 보러 왔다가 금강산은 보지 못하고 갈 뻔 했네. 이곳저곳을 찍고 다른 분에게 부탁해서 금강산을 배경으로 내 모습도 두 컷 정도 담았다. 앞으로 2시간동안 자유시간이니 이곳 휴게소 지역 내에서 머물러 주라는 안내원 부탁이다. 모처럼 자유시간이다. 대부분 기념품 가게로 향했지만 나는 온천탕으로 갔다. 가게에 있는 물품 중 사가지고 갈 기념품도 적당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내가 여행가서 사온 기념품을 우리 집 사람은 마땅치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리 요원이 북측 사람인 걸 보니 온천탕은 북측에서 마련한 시설인 것 같았다. 탕속에 들어가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이번 여행은 1박 2일로 외금강만 보았는데 다음에는 3일이나 4일로 해서 해금강과 내금강까지도 관광했으면 좋겠고 이번에 호화유람선을 타 보는 기회를 갖기는 했으나 값비싼 유람선을 외국에서 빌려오는 바닷길 관광은 앞으로는 지양하고 대신에 고성에서 바로 금강산에 올 수 있도록 도로를 개설하고 이곳 온정리에 현대아산에서 호텔을 지어 놓으면 훨씬 저렴한 경비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현재 금강산 관광이 관광의 차원을 넘어 남북 화해와 협력의 장을 마련해 주고 있는데 이를 보다 더 발전시켜 남북통일과 평화의 단계까지 발전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보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해금강이나 내금강을 보러 오고 싶은데 그때는 감시 받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온전히 자유롭게 관광하는 관광객으로 오고 싶기 때문이다.
또 금강산 관광을 위해 북측에서는 해군기지인 장전항 일부를 내어 놓고 금강산에 버스 노선을 개설할 수 있도록 배려 해주는 등의 양보를 해 주었고 현대아산에서는 이곳에 투자를 많이 했으니 이 관광이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국 조선족 버스 기사>
시간이 좀 남아 있지만 일찍 버스에 올랐다. 버스 기사가 또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물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고향은 중국 길림성 연변 부근 농촌이란다. 작년 9월에 이곳에 왔는데 계약 기간이 1년이라 곧 만기가 된단다. 다시 올 수 없느냐고 물으니 신청은 해 놓았는데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급료는 중국서 농사짓는 거 보다 훨씬 좋은데 또 관광객들이 가끔씩 수고한다고 격려금까지 주신다고--, 여기에서 숙소는 장전항 부근에 임시 숙소를 현대 아산측에서 마련해 주어서 거기서 기사들끼리 합숙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만약 병이 나면 현대 아산측에서 강릉 병원에 입원시켜 준다고---. 어려움은 남측 관광객들이 자기를 북측 사람으로 오인하고 자기와 말도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가족과 1년 정도 떨어져 있으니 가족을 보고 싶다고 ---
버스가 장전항을 향해 출발했다. 비가 좀 내린다. 잘 가라고 가랑비가 내리는 것 같다. 창밖을 보니 길거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초병(哨兵)이 비옷을 입고 부동자세로 서 있다. 전혀 움직임이 없어 사람인지 동상인지 알 수가 없다. 불쌍한 생각마저 들었다.
<출입국 관리소>
출입국 관리소에 들러 출(경)국 절차를 밟고 있는데 어디선가 ‘다시 만나요.’의 북한 가요가 들려와 내 눈물샘을 자극한다.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우리에게도 익숙한 노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 모두 떼창을 했다. 이산가족과 만난 후 헤어져야 하는 것처럼 금강산을 떠나는 아쉬운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이 노래가 억누르고 있던 아쉬운 감정을 그만 터뜨리고 말았다. 소리 내어 우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다시 크루즈선으로>
크루즈 선으로 돌아와 짐을 챙기고 있는데 저녁을 먹으라는 방송맨트가 나왔다. 이 배에서는 최후의 만찬인 셈이다. 잠시 후 이 배 승무원들이 보여주는 쇼를 보았다. 러시아 아가씨들이 그동안 우리 말 익히기를 열심히 했구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룻밤을 크루즈선에서 자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부산에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금강산 관광은 끝마쳤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외국 아닌 외국을 다녀 온 기분이다.
이번 관광의 기회를 마련해 주신 남북 양측 관계자들에게도 감사한 말씀을 드린다. 덕분에 금강산 관광 잘 했노라고 ---
<아! 다시 보고픈, 그리운 금강산!>
쉼 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가 압권인 구룡폭포, 금강산을 지키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구룡연,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고 갔다는 상팔담, 기암괴석이 만물의 형상을 닮았다는 만물상, 만물상을 보러 온 세 선인이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는 삼선암, 만물상을 보러 하늘에서 선인들이 내려 와 머물렀다는 천선대 등등 2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까지 금강산 관광 일지>
o 1998. 9. 바닷길 관광 시작
o 2001 정주영 회장 사망
o 2003 정몽헌 회장 사망
o 2003, 9. 육로 관광 시작(육로 관광은 정몽헌 회장이 생전에 다 이루어 놓았다고 함)
o 2004. 바닷길 관광 폐지
o 2008. 7. 북한 초병이 쏜 총에 관광객 1명 피살 ⇒ 금강산 관광 중단
o 2011. 12 북한 김정일 위원장 사망
<남북 해빙 무드에서 다시 결빙으로>
※ 북한 초병 말은 남측 관광객이 북측 군사지역까지 들어와 몇 차례 나와 줄 것을 요구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총을 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지만 亡人은 말이 없으니 알 수는 없고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북측 초병의 총 한 방이 10년 동안 구축해 놓은 남북 해빙과 평화무드의 공든 탑을 허물어 버렸다는 것과 이 사건이 발생했으므로 結者가 解之해야 되는데 남측 결자인 정주영 정몽헌 회장과 북측 결자인 김정일 위원장 마저 亡者가 되어있으니 해결할 길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금강산 관광 입장료가 북측의 군비 확장, 핵무기 개발 사업비로 쓰이고 있으니 금강산 관광을 즉시 중지해야 하다는 일부 국민 여론을 의식해서 인지 이번 일에 정부마저 뒷짐만 지고 있는 사이 남북 해빙 무드는 다시 꽁꽁 결빙 무드로 바뀌어 버렸다. 더구나 17년 동안 북한 실권자로서 금강산 개발, 개성공단 조성 등 남북 협력 사업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던 김 위원장 마저 사망하고 말았으니 남북 협력과 화해는 또 남북통일은 어디로? 아! 이를 어이할꼬?
2022년 추석을 며칠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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