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14강
말씀/ 마가복음 9:2-29
요절/ 마가복음 9:7
그의 말을 들으라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지난 한 주 자매들의 아침 깨우기 투쟁이 있었습니다. ‘일용할 양식 먹고 기도하며 하루를 출발하자!’, ‘갓생’의 방향을 받아들이고 순종한 점이 놀랍습니다. ‘갓생’이란 신을 의미하는 갓(god)과 ‘생(生)을 조합한 신조어로서, 하루를 낭비하지 않고 부지런하고 보람있게 사는 인생을 일컫는 말합니다. 세상에서의 갓생은 운동, 공부, 독서가 우선순위인데, 우리 자매들은 양식과 기도를 우선순위에 두었으니, ’진짜 갓생-하나님 생명‘입니다. 유럽수양회까지 연결되어 비전과 영광을 보고 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엿새 후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말씀하신 지 엿새 후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가 썰렁했을 것입니다. 특히 '사탄'이라는 책망을 들은 베드로가 심각했습니다. ‘갓생기도모임’에 나와야 하는데, “사탄이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어”, 데모하며 분위기를 다운시켰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특단의 방법을 간구하십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들 앞에서 변형되었습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당시 흰 옷은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 퍼펙트하게 화이트할수록 높은 지위, 고결한 존재를 상징했습니다.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은 전용 세탁업자를 고용하여 하얗게 표백했습니다. 없는 사람일수록 땀과 오물로 변색된 옷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옷을 입고 다녔을까요! 폭염을 뚫고 전도하고 병자들을 고치느라, 한 벌 옷으로 다니느라 땀과 이런저런 얼룩으로 누랬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2절 말씀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모습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높은 산에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으로까지 변형되었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입에서 ‘와!’라는 탄성이 나올 정도입니까! 만약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영광의 주님을 알려주고자 변형하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변형되실까요! 슈퍼맨, 어벤저스처럼 차원이 다른 모습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계산을 초월하는 세계로부터 오신 분, 이 땅과 다른 차원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4절을 보면 엘리야와 모세까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 모세는 율법,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물들입니다. 이미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던 그분들이 다시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다? 제자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궁금했던 질문들이 샘솟듯이 흘러나올 수도 있습니다. “모세님,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 때의 심정이 어떠했나요? 엘리야님!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도 왜 죽여달라고 간청했나요!’ 그런 환호와 놀라움은 어느 순간부터 예수님으로 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이렇게 변형되고 모세와 엘리야를 호출할 수 있는 것일까!”
변형이나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닫혀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귀를 막고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고난 받고 버림 바 되고 죽임당하는데 다시 살아나? 죽으면 패배이고 끝이지! 무슨 승리야! 예수님을 그만 따를지 심각하게 고민이 돼!” 고상한 의미나 가치만으로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믿어야 예수님을 따를 수 있고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도 그러합니다. 죽도록 수고하고 죽도록 고난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영광중에 나타난 것은 고난의 끝이 영광임을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고백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18,25) 최근 들어 살기 어렵다는 소리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경제는 어렵고 경쟁은 치열하고 전쟁과 기후변화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어느 때보다 열심히 노력해야겠지만, 어느 때보다 부활과 영광에 대한 소망을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따라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용기있게 걸어가길 기도합니다.
물론 베드로의 마음은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갑자기 베드로는 초막 타운 건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말만 놓고 보면 하나님의 종들을 존경하고 속세를 떠난 욕심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본심은 산 아래로 내려가서 고난 받으며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은 막연하고, 이 땅의 고난은 무서웠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지도 않았고 고난 많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초막에 있어봤자 별 볼일 없는데도 여기가 좋사오니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마구 말을 쏟아내는데, 자기 말을 자신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자 성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제자들을 압도해 버리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우리도 “제발 말 좀 들어라” 말할 때가 있지요? 정말 꼭 들어야 하는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인데도 귀를 막고 있을 때입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키울 때,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현재 제자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만 봐도 그렇습니다.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나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미치도록 피곤하고 힘들었던 그 밤,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주여,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순종했습니다. 고기를 잡은 후에도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랬던 베드로와 지금의 베드로는 너무도 다릅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고 버림 바 되고 죽임당하는 십자가의 도를 말씀하신 다음부터였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귀를 닫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말씀이 있은 다음부터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빛나는 모습으로 변형되고 모세와 엘리야를 동원하여 본래 영광을 보여주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어려워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이 분명하여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이 분명해지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유익과 계산으로 복잡해진 마음이 말씀 듣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되고 더더욱 문제속으로 끌려들어갑니다. 그렇게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불안과 염려로 인해 믿음이 사라지고 원망과 불신이 마음 중심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사람의 일에 매이게 됩니다. 우리는 피곤하고 어려운 현실문제를 만날수록 더욱 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사람의 일에 매여 마음이 복잡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자책과 분노와 불안과 무기력이 휘말려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를 실감했습니다. 때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제가 먼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스텝목자의 직분이 나의 영혼을 죽지 않고 살게 하는 통로가 됨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말씀을 들을 때, 어둠에서 일어나 목자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현실은 지금을 실패라고 말하는데, 주님은 선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현실은 이제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처럼 말하는데, 주님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나서 기도하고 다시 일어나서 목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했습니다. 말씀은 부담이요 도전이면서 아울러 나를 살게 하는 은혜의 통로이며 성령의 도우심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말씀이 부담과 도전이 됩니까! 어떤 분은 전도하라는 말씀이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를 드리고 헌금하라는 말씀이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이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실패의 아픔이나 상처를 생각하면 도전하기보다 물러서고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말씀이 듣고 싶지 않은 말씀으로 와닿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면, 그 말씀이 내게 정말 필요한 말씀일 수 있고 나를 지켜주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한 주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산에서 내려오실 때에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보다 신비주의 쪽으로 관심이 흘러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부활에 대해 서로 묻고 토의합니다. 고난에서 부활로 관심 이동이 있었습니다. 구원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11절에서 엘리야에 대해 물어보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불의 능력으로 대적하는 자들을 모두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말 자체는 맞습니다. 다만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12) 헤롯왕의 죄를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한 세례 요한입니다. 고난의 엘리야와 고난의 그리스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고난의 제자들, 한 세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누구든지 고난과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 그 과정을 지나간 후에 영광에 들어갑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산 아래 내려와보니 아홉명의 제자들과 서기관들이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변론의 원인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고했습니다. “선생님 말 못하게 하는 귀신들린 내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고 하였는데 그들이 능히 못하더군요. 그래서 이를 보던 서기관들과 당신 제자들 사이에 변론이 난 것입니다.”(17,18) 어떤 변론이 오갔을까요! ‘그동안 고쳤다는 소문은 다 거짓이었구먼, 능력이 없으면 우리처럼 전통이라도 잘 지키든지?’, ‘니들이 사납게 째려보고 있는데, 역사가 있을 리 없지’, 성령의 역사가 없기에 변론이 나는 것도 있지만, 변론이 있는 곳에 성령께서 함께 하지 않습니다. 일심으로 하나 되는 곳에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노하십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믿음이 없는 세대여’, 율법박사 서기관들에게도,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야 본래 믿음없는 자들이었으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제자들마저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탄식하게 만든 주범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얼마 전까지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믿음을 잃고 무능한 제자들이 되고 말았을까요! 숫자 아홉이 모였으니 당연히 쫓겨날 것이다, 타성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서기관들이나 산위의 세 제자에게 보여주려는 마음으로 했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전에는 ‘믿음충만’ 했던 제자라도 지금에는 ‘믿음방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현재형입니다. 지금 믿음을 준비하고 지키지 않으면, 불신 세상에 동화되어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믿음을 가졌을지라도 오늘은 믿음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 오늘은 오늘의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아이 고치는 미션이 결코 쉽지 많은 않았습니다. 아이를 데려오자, 마귀가 가만두지 않습니다. 심한 경련을 일으켜 땅에 엎드러져 거품을 흘리게 합니다.(20) 아이 부모에게 그리고 아이를 고치려는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불신을 심고자 한 것입니다. 아이의 증상은 어려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21) 귀신이 자주 불에도 던지고 물에도 던졌습니다.(22) 물도 가리지 못하고 불도 가리지 못하며 자주 넘어지는 위험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수 능력이 있다는 자들, 용하다는 의원들, 아무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기대를 크게 가지고 갔던 만큼 돌아오는 절망도 컸습니다. 그러므로 이리 말합니다. “주여,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보통의 아버지라면 "제발 고쳐주십시오. 반드시 고쳐주셔야 합니다" 간청했을 터인데, 그는 마치 제3자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처럼 간청합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수많은 실패의 경험에 짓눌려 버린 것입니다. “당신이 할 수 없을지라도 이해합니다, 할 수 있을 만큼만 해주세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를 책망하십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무슨 말이냐!’, 이는 불신을 끌어올 수 있는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을 자세히 보면 삶의 행적도 부정적이며 한계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힘든 상황에서도 긍정의 말,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치고 올라갑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언뜻 보면 나폴레옹 분위기입니다.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는 그의 사전은 불량사전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인간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영국과 러시아를 정복하지 못했고 죽음에 정복당했습니다. 불가능이 없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믿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제 믿다가도 오늘 믿음을 빼앗깁니다. 믿음으로 출발했다가 현실에 갇혀 믿음 없는 자처럼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변함없이 믿었습니다.(히12:1)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다 이루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가장 끔찍한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고 하나님의 능력은 항상 선하신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의 근원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와서 광풍을 잠잠하게 하고 거라사 광인을 고치고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믿는 자이었기에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고 믿는 자이기에 믿음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팔당상수원에 담겨있는 물이라면, 믿음은 수도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만날 때 조건 문제, 사람 문제에 제일 먼저 주목하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믿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에서 시작하고 믿음을 지키는 싸움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에 민감하지만, 주님은 믿음이 있느냐에 민감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연단하십니다. 그를 위해 복을 주시고 고난을 주시고 연단하십니다. 우리 각 사람이 믿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고백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믿는다는 고백입니까! 믿음 없다는 고백입니까! 그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고백했습니다. 아울러 아이의 상태에 따라 믿음 없는 세계로 추락하는 연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아버지의 고백은 믿음위에 굳게 서겠다는 결단의 기도이며 불신에서 벗어나 믿음의 세계로 가게 해달라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아이의 아버지의 간구를 받아주시고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이에 충격 받은 제자들이 묻습니다.(25-28)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앞에서는 믿음을 강조하셨는데, 여기에서는 기도를 강조하십니다. 믿음은 내면세계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기도를 통해 드러납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할 때에 믿음을 공급받습니다.
제자들이 왜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무릎을 꿇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약했던 것일까요? 한 시간조차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빴던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해야 한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전의 경험으로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맨쉽으로 할 수 있고 경쟁심으로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순전히 의지하는 사람이 위기를 만날수록 기도합니다. 영적 싸움임을 인식하고 믿음위에 굳게 서고자 기도합니다. 가끔씩 ‘기도가 정말 어렵다, 기도가 싫다’는 심정이 찾아올 때가 있는데, 돌이켜보면 ‘뭔가 영적으로 중요한 시기, 중요한 싸움이 다가올 때’입니다.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기도할 때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항상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통해 믿음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