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호 1동에는 오래 전 부터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고,
용호 2,4동에는 이 주민 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다.
1970년대 末 부터 80년대에 이곳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초량동 수정동등
고지대 철거민들의 정책이 주로 인하여 옮겨온 사람들인데 주민의 80% 차지한다.
용호동의 연혁을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도 연혁
1740년 동래구 남촌면 분포리
1761년 용호동 구터자리에 사람들이 정착
1910년 동래군 용주면 용호리
1936년 부산부 부산진 출장소
1953년 부산시 부산출장소와 대연출장소로 분리
1972년 용호지구 구획정리 사업 발주
1973년 부산시 정책이주 사업실시및 새마을 시범지구로 선정됨,신흥주택지로 변모
1975년 부산직활시 남구 개설, 용호1동,2동으로 분동
1982년 용호 1동이 용호 1,3동으로 분동
1983년 용호 2동이 용호 2,4동으로 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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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용호동은 남구에서 교육과 문화면에서 비교적 발전이 늦은 지역이다.
교육 시설에는 용호초등학교,용산초등학고,백운초등학교,운산초등학교,LG메트로시티 내
분포초등학교,용문초등학교, 오륙도초등학교 등 7개교와 용호중학교,용문중학교, 분포중학교, 오륙도중학교 등 중학교 4개교,
고등학교는 예문여고, 분포고둥학교 가 있다.
용호동에는 빼놓을 없는 자랑거리로서 동민들 뿐만 아니라 부산시민의 사랑을 받으며
휴식처로 즐겨찾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있다.
기암 절벽으로 이루어 지고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이기대 자연공원
신선의 발짜국과 신선이 탄 백마의 발자취가 있었다는 신선대,백운포
항구도시 부산의 상징이자 관광명소로 알려진 오륙도가 있어서
용호동은 남구민들이 주말이면 동생 끝에서 ~ 큰고개(장자봉과 포 부대 사이)까지
바닷가 절벽따라(인공도로)을 따라 즐겨찾는 명소가 되었다.
용호동은 1960년대에만 하여도 민가는 몇 집만 있었으며 용호만 바닷물이 들어와서 늪지를 이루고 있어서 사람이 살아 갈수 있는 곳은 못 되었다.
용호동은 소금을 굽는 동(盆)이만 여기저기 널려있어 동이 있는 갯가라는 뜻에서 분개(盆 浦)라 불러졌던 것이다.
염전은 중앙에 찰흙으로 1평정도의 구덩이에 파 놓은 것이 있는데 이 구덩이를 서실이라고 하였다.
서실 속에서 깨끗하고 결이 고운 모래를 넣어두고 있는데 이를 파내어 염전에 엷게 써레질하여 놓은 다음 바닷물을 끌어들이면 햇볕에 물기는 증발을 하고 염분만 모래에 엉켜 보얗게 남는다.
이 보얗게 남은 모래를 다시 서실에 넣고 바닷물을 길어다 부으면 염도가 아주 짙은 소금물이 서실 밖으로 넘쳐나는데 이것을 작은 개울을 통하여 가마에 받아 끓인 것이 소금이다.
이 서실을 한자식으로 표기할 때 분(盆)이라 불렀다.
‘동래부지’(1740년)에는 분 포리(盆 浦 里)는 부의 관문에서 남으로 28 리 거리에 있다.
라고 적고 있으니 이곳이 바로 용호동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곳에 주민들이 이주한 것은 수정동등 고지대 판자촌들이 부산시의 도시개발 사업에 부응하여 현 용호2동부지에 2.4호 연립주택을 건립 하여 철거한 이주민들을 수용하였다.
1960년 후반부터 이주를 시작하여 1975년10월에는 부산시 조례에 의하여 용호동을 용호1 2동으로 분동하여 오다가 시내 변두리 철거민들이 줄을 있자 인구가 늘어나서 1982년9월에는 용호1 2동을 용호1 2 3동으로 또다시 분동을 하였으며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983년에 용호4동으로 분동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호동입구 옛 동국제강이 포항으로 이전을 하여가고 그 자리에 전국에서 단일 아파트 로는 제일 큰 LG 아파트단지, 오륙도에는 SK가 또다시 대단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단지 내에 초 중 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가장 큰 문제점은 엄청나게 늘어난 인구에 비해 도로망이 좁아서 용호동 교차로는 상시 교통체증 지역으로 남을수 있다.